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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의 분리(누가복음 17:34-37)

예수님은 인자의 날에 같은 공간과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결정적인 분리가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한 침상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같은 맷돌을 가는 두 여자 중에서도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이는 종말의 분리가 외적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각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 곧 영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짐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영적 죽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한다는 것과 인자의 날의 심판은 은밀하거나 우연적이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데려감, 버려둠

누가복음 17:34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4-35절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분리 현상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날에 일어날 분리의 장면을 말씀해 주심으로 그 분리가 개인적이며 즉각적임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 밤에”라는 표현은 노아의 날과 롯의 날과 연결되는 심판의 날, 곧 인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 날은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과정이 아니라, 결정이 단번에 내려지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을 설명하면서 징후 목록이나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고, 결과가 발생하는 순간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는 장면은 친밀함과 일상성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침상은 휴식의 자리이며, 하루의 일을 마치고 가장 방심하는 공간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말하자면 교육, 정보, 경험 면에서 거의 동일한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극명하게 갈려 분리되는 순간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분리가 수동적 분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둘 다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도망치지도, 선택 버튼을 누르지도 않습니다. 분리는 외부에서 일어납니다. 이는 앞서 33절에서 강조된 원리, 즉 생명은 스스로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 분리는 도덕적 비교나 사회적 평가의 결과가 아닙니다. 같은 침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 사람이 특별히 더 경건해 보였거나 종교적으로 우월해 보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방향성, 곧 앞절에서 반복해서 강조된 것, 즉 붙들고 있느냐, 내려놓았느냐의 문제입니다.  

“데려감을 당한다”는 표현은 구원에 대한 앞의 구절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노아와 롯의 이야기에서 ‘구원은 ‘밖으로 옮겨짐’의 형태로 나타났고, 멸망은 남겨짐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구원의 영역으로 옮겨짐을 말하고,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심판의 영역에 남겨짐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이어 나오는 35절에도 반복됩니다. 종말의 날에는 가장 가까이 있던 두 사람조차 영원한 운명에서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통해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누가복음 17:35-36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17:36 (없음)

35절은 앞선 34절의 장면을 일상의 또 다른 공간으로 옮겨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말에 일어날 분리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진리를 다른 생활 장면으로 제시하시며, 분리의 원인이 환경이나 역할의 차이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는 상황에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맷돌을 가는 일은 고대 가정에서 가장 평범하고 반복적인 노동이었습니다. 맷돌을 가는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상 노동의 한복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분리가 예배당이나 특별한 영적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이 진행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두 여자가 함께”라는 표현은 34절의 “두 사람이 한 침상에”와 마찬가지로 상황의 동일성을 말해 줍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외적으로 구분할 만한 차이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관계적 친밀성도 전제합니다. 함께 맷돌을 간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같이 일하는 사이이며 삶의 리듬을 공유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극명하게 갈릴 것입니다.

여기서도 34절과 같이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종말의 때에 일어날 분리가 인간의 선택이나 준비 동작의 결과가 아님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분리는 외부에서, 단번에, 주권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침상(34절)과 맷돌(35절)은 밤과 낮, 휴식과 노동을 아우르며,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루의 전 시간대와 모든 삶의 영역이 종말의 분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십니다. 종말은 특정 계층이나 특정 순간만을 겨냥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상의 가장 평범한 순간에 임합니다. 종말의 날에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이야말로, 영원의 갈림길이 될 수 있습니다.

일부 해석가들(세대주의)은 34-35절을 휴거(rapture)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과 연결시켜 재림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서로 다른 경륜 속에서 다루신다고 봅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먼저 교회를 위한 은밀한 강림, 곧 휴거로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 휴거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7년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가장 분명히 설명하는 본문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4:17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강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와 죽은 성도가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17:34-35절의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말씀을 휴거의 실제 장면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같은 침상, 같은 맷돌이라는 표현은 휴거가 일상의 한복판에서, 예고 없이, 개인 단위로 일어날 것을 강조합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휴거로 들려 올라가는 성도이며, “버려둠을 당하는 자”는 세상에 남겨져 이후 환난과 심판을 맞게 될 불신자 또는 회심하지 않은 자로 해석됩니다. 그들은 노아와 롯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심판은 그들이 제거된 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시합니다. 이는 교회가 환난 이전에 휴거되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입니다. “데려감”은 심판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한 구출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휴거 후에 7년 환난이 진행되고, 그 환난의 끝에서 예수님은 권능과 영광으로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생각합니다(마 24장). 이 재림은 천년왕국의 시작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은 휴거를 가리키고, 마태복음 24-25장의 재림 묘사는 환난 후의 공개적 재림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반면 개혁주의 입장에서 누가복음 34-35절을 휴거의 방식이나 시점을 설명하는 말씀이라기보다,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분리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즉 관심의 중심은 “누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가”가 아니라, 인자의 날에 누가 구원에 속하고 누가 심판에 속하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날과 롯의 날을 예로 들며, 심판이 일상의 한복판에서 갑작스럽게 임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눅 17:26–30).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죄악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뒤로 돌아가지 말라”(31절),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32절), 그리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절)라는 일반적 원리를 제시해 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분리는 인간의 선택이나 행동의 결과라기보다, 인자의 날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분별의 결과입니다.

개혁주의 해석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이 본문을 휴거 사건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문맥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요점에 집중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34-35절을 휴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본문이 아니라, 재림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나는 단일한 종말 사건 안에서 이루어질 분리를 묘사한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굳이 시간을 분리하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종말론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날에 어떤 방식으로 데려가질 것인가”에 관한 것 대신 “지금 너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너희의 생명은 누구의 손에 맡겨져 있는가”를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침상에 있고, 같은 맷돌을 갈고 있어도, 생명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영원에서 갈라진다는 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주검과 독수리

누가복음 17:37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함께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대체로 집단적, 공간적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홍수는 특정 지역을 덮었고, 소돔의 멸망도 특정 성읍에 임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현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데려감을 얻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질문에는 예수님이 이전에 하신 다른 종말 가르침의 영향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 인자의 날, 환난의 징조 등을 말씀하시면서 장소와 사건이 연결된 예언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맥락 속에서 같이 있던 사람이 서로 분리되는 일 역시 특정한 지점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 공간적 질서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를 묻는 데 익숙했습니다(17:20).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대답은 그 질문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장소를 가리키지 않으시고,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는 비유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고 있는 방식이 종말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일어날 분리를 영적 상태의 문제로 재정의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심판의 필연성과 영적 분별의 중요성을 비유를 통해 강조하십니다. 

독수리는 멀리서도 죽은 짐승의 냄새를 감지해 모여드는 존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광야나 전쟁터에서 시체가 남아 있으면, 곧바로 하늘에 독수리들이 맴돌았습니다. “주검이 있으면 독수리가 모인다”는 말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독수리나 시체를 먹는 새들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8:26을 보면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고 욥 39:30을 보면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에스겔 39:17에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 인자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라고 함으로 새들이 시체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는 말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격언입니다. 성경에서 ‘주검’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을 넘어,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상실된 상태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앞선 비유에서 사람들이 일상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강조하셨는데, 바로 그 정상성 속에 영적 무감각과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주검’은 회개 없이 죄 가운데 머무는 상태, 하나님을 배제한 채 삶을 보존하려는 태도,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생명이 떠난 존재 상태를 포괄합니다.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는 자명한 자연의 질서를 통해, 영적 죽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영적 상태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은밀하지 않고, 감추어질 수 없으며, 영적으로 죽은 곳에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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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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