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찬양시는 ‘마그니피캇’이라고 하여 6세기부터 서방 교회의 저녁기도의 찬미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사벳의 영적 조언과 격려를 듣고 힘이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녀는 갈릴리 나사렛 시골에서 비천한 처녀로 살다가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을 자신의 인생을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신 은혜에 감격하여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46-47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6-56절은 마리아의 찬가로 ‘마그니피캇(Magnificat)’이라고 하여 공적 예배에서 저녁 기도 때에 노래하였습니다. 46절에서 “찬양하며”는 영어로 magnify로 ‘확대하다, 크게 하다, 찬양하다’는 뜻이고, 여기에서 Magnificat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전반부는 성모 마리아의 개인적인 찬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한나의 노래와 유사점이 많습니다(삼상 2:1-10). 이를 볼 때 마리아는 구약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영혼(soul)과 마음(spirit)이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전 존재는 태중에 계신 예수님의 임재로 인해 찬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영(soul)”과 “마음(spirit)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시적 평행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히브리 시의 주요 특징인 시적 대구법의 좋은 예입니다. 혼과 영의 결합은 마리아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녀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마음을 다해 온 영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찬양과 기쁨
누가는 성탄 이야기에서 찬양과 기쁨을 중요시합니다. 그는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의 축복을 한 것에서 출발하여(42-45), 마리아의 찬송시(46-55), 사가랴의 찬송시, 목자에게 성탄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천사들이 부른 찬송(2:14), 시므온의 찬송(2:29-35)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누가는 ‘기뻐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14[2], 44, 47, 58, 2:10; 2:14). 그는 성령의 충만과 함께 찬송과 기쁨의 주제를 강조해서 다루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성령이 충만하고 찬송과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신앙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과연 성령이 충만한가, 신앙 생활이 기쁘고 즐거운가, 내 영혼과 마음이 늘 주님을 찬양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복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시 73:28).
주님께 가까이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도 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어 매달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의외로 가까이 계십니다.
시편 119:130은 이에 대한 간단하지만 가장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손안에 있는 성경책에 있습니다. 성경을 열어 공부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나의 우둔한 마음을 깨닫게 되고 빛이 비추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하게 되고 찬송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내 구주
마리아는 하나님을 “내 구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영접했으며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는 구약의 신자였습니다. 신약의 신자는 그분의 초림을 돌아보며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고대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필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내 구주”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는 죄의 삯인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구주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롬 6:23).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어머니, 즉 성모라고 해서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주”의 의미는 “회개함과 죄 사함”과 관련이 있습니다(행 5:31). 그녀의 눈은 여전히 죄와 사망에서 그녀를 건지실 구주가 되실 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48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마리아는 자신을 “그의 여종”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므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 6:19-20).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비천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성모로 쓰임받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구절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의 시골 처녀인 비천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각 사람의 인생에 혁명적인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기 전 우상숭배자였고 딸 자식 하나 없이 외로이 늙어가던 노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택하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천한만민이 복을 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수많은 자손을 허락하여 주셨고 그의 자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막내 아들을 다윗을 비천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이 은혜에 감격하여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고백했습니다(대상 17:16).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갈릴리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육받지 못했고 결점이 많았으며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심으로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삼상 16:7; 롬 2:11). 하나님의 호의는 부나 명예 또는 직책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롬 10:12).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셔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시며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십니다(사57:15).
다윗의 자손 요셉은 몰락한지 오래된 다윗의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목수 생활을 했고 마리아는 가난한 목수인 요셉과 정혼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갈릴리 나사렛의 조그만 시골 동네의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7-29). 마리아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역사 원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천한 자를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복 있는 사람
마리아는 이제부터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그녀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성모로서 유명해질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들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나의 자랑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축복은 행복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행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지만 일어나는 일에 따라 변화가 심합니다. 반면에 축복은 객관적이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인정과 보상’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누가 큰가, 누가 더 많은 인정과 보상을 얻는가, 누가 세상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는가에 따른 성공의 기준을 하나님의 복을 가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과분하고 넘치는 은혜입니다. 게다가 그의 구원역사에 쓰임받는 은혜는 그것이 크기와 열매에 상관없이 가장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의 개념을 바로 알 때 복받은 자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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