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은 요셉의 가정을 축복하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음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그를 배척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키우고 그가 만민을 위해 죽으시는 것을 보게 됨으로 칼이 그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은 요셉의 가정을 축복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을 했습니다. 요셉이 빠진 이유는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십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전에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보면서 예언을 하였을 때 “보라”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이는 “이 아이를 주목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이 아이는 단순한 아기처럼 보이지만 그는 영생과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패하거나 흥하게 하다
“패하다”라는 말은 ‘넘어지다(fall)’라는 뜻이고 “흥하다”는 말은 rising again으로 ‘다시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아기를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배척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사의 분수령이요 역사를 나누는 능선입니다. 파멸과 축복의 갈림길이요 그를 통해 양극화가 일어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걸림돌과 넘어지는 반석”으로 묘사했습니다(사 8:1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라고 하면서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말했습니다(롬 9:33). 사도 베드로는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벧전 2:6).
예수님이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듯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역시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복음을 영접한 자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2:15-16).
“패하거나 흥하다”는 말은 KJV을 보면 the fall and rising again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의로우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3:14-15; 2:36).
“패하거나 흥하다”는 말은 허물과 죄로 죽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엡 2:1-5). 바울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딤전 1:13). 그는 넘어진 자였으나 예수님의 은혜로 살리심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를 거부하고 미워하고 배척하여 넘어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을 겪고 죄로 고통하면서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게 됨으로 죄와 슬픔에서 “일어나고” 마침내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고 예언합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은 a sign that will be spoken against(NIV)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11; 눅 13:34; 19:47). 이방인들은 그가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여 영적 무지로 그를 박해하고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요 1:10).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못 박은 예수는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구원의 표적
십자가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었지만 이를 믿고 영접한 자에게 구원의 표적이 됩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배척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고 영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로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은 이가 적다고 하였습니다(마 7:13-14).
십자가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 되지만 겸손히 영접하는 자는 구원의 능력이 됨으로 자랑거리가 됩니다. 이 현상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복음이 학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복음은 거짓입니다.
누가복음 2:35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시므온은 마리아에 대해 마음 아픈 예언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모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축복에는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메시아를 잉태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을 키우는 수고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자 예수님은 집을 나가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고 계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외면하시고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아들에 대한 왜곡된 소문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이중적인 특수 관계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구주이시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복잡한 관계로 인해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의 절정은 십자가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셨고 참혹하게 군병들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의 하인에게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하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 군병들에게 잔인하게 끌려 가셨으며 굵은 못으로 십자가에 처절하게 못 박혀 매달리셨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을 때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고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요 19:26).
그리스도인의 고난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큰 특권이 있는 동시에 칼이 마음을 찌르는 아픔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경건하게 사는 것으로 인해 핍박을 받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믿음을 처음 갖게 되었을 때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부모님과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아픔은 칼로 마음을 찌르는 아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아픔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벧전 4:1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딤후3:12).
시므온이 마리아가 당할 고난을 언급한 것은 2차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가 본 아기가 자라서 장차 다윗과 같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마리아가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으로 묘사함으로 그의 구원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암시하였습니다.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 사람들의 깊은 마음의 생각을 드러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은 헬라어 원어로 ‘논쟁, 논의, 언쟁’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는 주로 ‘악한 생각’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총 14회 사용되었음).
복음은 사람들의 깊은 마음의 생각이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 적대감을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함으로 그를 영접하게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을 찌르고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선과 악에 대해 갈등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구원을 호소하게 합니다.
복음을 듣기 전에는 죄를 즐기는 삶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데 복음을 듣고 죄 의식을 갖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심코 행했던 행동과 말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지에 관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숨어버립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사람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금석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입을 통해 드러냅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미움나 혐오나 무관심이 화산처럼 분출할 것입니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요 3:21).
십자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 동안 자신이 의인인 줄 알았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게 되면 내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던 성난 군중들, 십자가 밑에서 제비를 뽑는 로마 군인들,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조롱하던 무리들을 보면서 이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까워질 때 그들의 생각을 숨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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