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거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은 특히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도록 경고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3:7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말세의 예언을 떠올리며 메시아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라고 무서운 심판을 경고했습니다(말 3:2).
마태복음 3:7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많이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으므로 마지막 날이 임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두려움이 있어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으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 장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이방인 회심자에게 이런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은 특별한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은 이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책망은 말라기 3:2이 말한 불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위선과 교만과 독선은 뱀의 독과 같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은 “누가 너희에게 와서 세례만 받으면 진노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원했습니다. 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고 그들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 형식적인 기도와 금식, 생색내는 구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신약에 4번이나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두 번 사용했고(3:7; 마 3:7), 예수님도 두 번이나 “독사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마12:34).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번의 화를 선포하시면서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일컬으셨습니다(마 23:33).
독사는 사람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위장합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불을 피울 나무를 줍다가 뱀에 물렸듯이 겉으로는 구별을 잘 할 수 없습니다(행 28:3, 6). 이처럼 그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자기의 겉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마 23:27).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험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은 말라기의 예언 이후로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잔뜩 긴장했을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한 메시지는 주로 심판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사실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
요한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요한이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에서 “하더냐?”는 warn으로 ‘경고하더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그렇게 경고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말은 “다가올 진노를 피하는 방법을 너희에게 보여 준 사람이 누구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러면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은혜롭게 대하기 위해 애둘러 그들의 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인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지자답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심각한 질병에는 강력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직설적인 경고와 회개의 촉구는 그들을 살리는 처방입니다. 설교자는 회중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설교자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다가올 진노”가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한 영혼을 멸망으로 가도록 놔두는 무서운 죄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자 한다면 이 주제를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지옥의 끔찍함을 알아야 천국의 평안함을 갈망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마 4:17). 또한 설교자는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을 전하면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잘 풀어 설명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의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이 그게 아닌데 특정 단어만을 부각시켜 흐름과 관계 없이 부풀려서 말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위탁받은 복음을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전했습니다(살전 2:4).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좋게 하거나 그들에게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갈 1:10).
누가복음 3:8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험악한 말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요한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열매는 삶의 행위를 상징합니다. 회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삶이 증명합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의 세례”는 얄팍한 가짜였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느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들의 “회개의 세례”가 참됨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방향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참된 회개자는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고, 영적 변화를 드러내고,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메시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의 메시지에는 흐릿하거나 현학적이거나 모호하지 않았습니다. 가혹했고 강했습니다. 선과 악의 대조가 뚜렷했습니다.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마음의 변화가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해야 합니다. 교만과 외식의 옷을 벗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또한 죄 사함의 복음을 들을 때 가능한 한 빨리 응답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세례 행위가 죄의 용서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 가와 같이 굳어지고 딱딱한 마음, 돌 밭과 같이 흙이 얇게 덮여 있지만 그 밑은 바위로 가득한 마음, 가시 밭과 같이 온갖 염려와 정욕의 가시로 가득한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1. 좋은 마음 밭으로 가꾸어야
제거할 뿐 아니라 좋은 마음 밭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굳어진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제거하고 가시와 잡초를 제거하고 퇴비를 주어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작업을 가리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눅 8:15).
2. 말씀을 들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들은 것을 잊지 않도록 간직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초로 기도하고 기도 제목을 적고 신앙 일기를 쓰면서 간직해야 합니다.
3. 인내로 결실해야
더 나아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인내로 결실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조각가가 정으로 바위를 쪼아 형상을 만들듯이 조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인내함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삶에 적용함으로 결실해야 합니다.
4. 뿌리를 내려야
회개를 했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가르침 받은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골 2:6-7).
5.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감사함이 없는 삶은 열매가 없습니다. 감사함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성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감사함이 없다는 것은 구원의 감격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는 상태는 은혜 안에 거하지 않고 율법 아래 거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을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헛된 자부심에 대한 경계
우리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은 헛된 자부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자부심이 헛된 자부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부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교만과 헛된 자부심으로 굳어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경고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 없는 돌에서 아브라함을 위해 자녀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하신다면 무생물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구절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참자녀는 단순히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믿음을 따라가는 자입니다(롬 4:11-16; 롬 9:8; 갈 3:7).
육신의 혈통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이는 영적으로 치명적 오류입니다. 단순히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할례라는 종교 의식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조상의 의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히 성별된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삐뚤어진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이 천하 만민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귀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스라엘 밖의 이방 세계는 영원한 고뇌로 가득찼다고 생각했습니다. 헛된 자부심은 영적으로 꽉 막히게 합니다. 특권 의식을 가진 사람은 소통이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목적은 만민을 구원하는 일에 그들을 쓰시고자 하신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잊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입니다(갈 3:7).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갈 3:29).
특권의식을 버려야
크리스천도 믿지 않는 자에 대해 구원받은 자로서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기득권이 되었을 때 이런 현상은 두드러집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자는 선민이고 불신자는 이방인이라는 분리 의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의 경고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참감람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내시고서 본래 돌감람나무였던 우리를 접붙여 주셨고 우리는 참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롬 11:17-18).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 대해 특권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낮아져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Will you give me a drink?)”고 하신 것처럼 겸손히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롬 1:14).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사실입니다(요 1:13). 부모님이 믿음이 좋다고 그 자녀가 저절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믿겠다는 의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믿게 하겠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요 3:8). 즉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을 헛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고전 1:29-31).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