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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누가복음 5:29-32)

예수님의 부르심의 영광을 받은 세리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세리와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29

큰 잔치를 베푼 세리 레위

예수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그가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순수한 목적으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과거 그는 아마도 편의를 봐달라고 청탁을 넣거나 세리계에 끈을 대기 위해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푼 잔치는 그의 이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그가 받은 은혜를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U자형으로 배열된 낮은 식탁을 중앙에 배치하고 손님들은 머리를 식탁으로 향하고 발은 벽을 향하고 바닥에 기대어 몸을 기울인 채 식사하였습니다. U자 형태의 식탁 가운데의 비워진 공간에는 하인들이 들어가 음식 시중을 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식탁에서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식사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눅 7:38, 요 13:23).

레위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소유를 아까워하지 않고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소유함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적 기쁨이 가득 차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것을 착취하고 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았으나 이제는 오그라진 손을 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는 축복을 나누는 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했는데 아마 그의 집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잔치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가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베푸신 곳도 혼인 잔치집이었습니다(요 2:1-11). 예수님은 이 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을 베푸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기쁨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진정한 하늘의 기쁨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인간은 생명과 행복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면서 슬픔과 절망, 허무와 무의미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그저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기쁨이고 곧 고갈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 구원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았을 때에 베풀어지는 하늘 나라의 잔치를 빗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았을 때 잔치를 베풀만큼 기뻐하신 것과 같이 구원받은 영혼도 하늘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세리 레위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큰 잔치를 베푼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세리와 다른 사람을 초청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다른 사람을 “죄인들”이라고 언급했습니다(마 9:10-11; 막 2:15). 그들은 레위가 함께 일하고, 어울리고, 삶을 공유한 자들로 평판이 안 좋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회당 예배에서 배제된 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이었으며 돈의 노예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마 11:19; 눅 5:30; 7:34; 15:1).

예수님은 우리와 먹고 마시기 위해 우리를 그의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누가복음 5:30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레위의 잔치에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레위의 집은 개방되어 있어 아무나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세리를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였기 때문에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들의 그룹과 구별하였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 주위에 있어 그의 행동을 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과 같이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보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곧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비방하여 이르되”라는 말은 murmur(KJV)로 ‘속삭이면서 불평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비난은 나름대로 구약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이 말하는 대로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깨끗한 것을 분별하고자 했습니다(레 10:10). 그들은 율법도 지키지 않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깨끗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 구별 의식이 있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게 됩니다.

구별 의식과 선교적 관점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을 대할 때 구별 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길 잃은 양들이고 그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구별 의식을 갖고 멀리하기보다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선교적 관점에서 우리는 개방적인 마음으로 세상에 다가가야 합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을 열어 복음을 영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미리 분리의 장벽을 쌓아 그들이 복음으로 나아오는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분리 의식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하심을 본받아 가망성 없는 자라 할지라도 복음이 임하면 누구든 변화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희망을 갖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실 때 그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내보내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심으로 세상으로 가도록 선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다시 길 잃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면서 고치셨는데, 이는 율법적 판단에 의하면 접촉과 동시에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대어 그의 나병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부정한 것에 의해 부정하게 되지 않고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 관계는 교회 안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인간 관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 세상에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우리의 교제의 확장과 세상과의 구별의 관계에 대해 혼돈을 겪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된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배를 타고 물 속에 구조를 간절히 찾는 자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물이 배에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세상의 물에 가라앉아 같이 멸망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지만 세상으로 파견된 하나님의 대사로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구별 의식은 율법주의와 자기 의에서 왔지만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의를 내세우고 구별 의식을 갖는다면 자연스럽게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자기 의가 많은 사람들은 비판의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들은 감사 대신 불평의 습관을 갖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감사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삽니다(살전 5:16). 

누가복음 5:31-32

영적 의사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맞서 그가 영적 의사로 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에게만 필요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건강한 사람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옳고 의롭다는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인정하면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아픈 데가 없고 건강한데 왜 자꾸 고치려고 하느냐 하면서 반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같은 자들을 병든 자로 생각하고 자신은 깨끗하고 고귀하고 거룩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같은 부류를 ‘불가촉 천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죄로 인해 병든 자임을 자각하고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영적인 의사가 되셔서 그들을 고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이 낮은 자, 버림받은 자, 만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 2:12). 물론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끄십니다. 이 확신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힘든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자세는 항상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며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다른 사람에게 항상 겸손하고 개방적이고 정직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하실 때 의사의 눈으로 대하셨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사람을 치유하여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의사는 아픈 환자가 왔을 때 왜 이렇게 병들었냐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질병의 원인자와 환자를 구분하여 봅니다. 그는 질병의 원인자를 제거하면 환자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는 사람을 대할 때 검사의 눈으로 대하였습니다. 검사의 사명은 사람을 정죄하여 벌을 주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율법을 어기는지 감시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세리들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세리와 어울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들은 세리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의인의 착각, 죄인의 발견

그러나 그들 내면에 깊숙한 곳에서는 세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한 방식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시행 규칙을 만들어 지킴으로 자기들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그 테두리 안에 들지 않은 자들과 구별함으로 존재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는 구절을 첨가했습니다(마 9:13). 

예수님은 의사와 병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가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의인인 척 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의롭다고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영생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자 피나는 투쟁을 해도 하나님의 의에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개인적인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려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킨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19:10). 예수님은 자칭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한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정죄하고 따돌리고 피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지기를 꺼려하는 나병 환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5:13). 예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시고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요 5:1-9). 예수님은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들에게 조차도 멸시를 받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라고 그녀에게 말을 건네시고 참 영생수를 선물로 주고자 하셨습니다(요 4:1-26).

회개한다는 것은 세상과 자기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말은 죄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죄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회개가 없고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 없습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멸망하지 않습니다(요 3:16). “죄인을 불러 회개시킨다”는 것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온전히 회복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처음 선포하신 메시지입니다(마 4:17; 막 1:15). 회개는 저자 누가가 매우 반복해서 강조한 주제입니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 뿐만 아니라 마음과 태도, 관심과 방향, 의지와 행동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가 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들어나 정죄를 받을까봐 회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있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의 표현에만 강조점을 둠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가 주는 최고의 선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 사함의 축복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축복으로 가는 길입니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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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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