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 설교의 4가지 복 중 둘째와 셋째 복은 주리고 우는 자가 갖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린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주림이고 우는 것은 자기 죄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복은 이렇게 역설적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복음 6:21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을 축복은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무엇에 대해 주려 있는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언급했습니다(마 5:6). 그들의 굶주림은 음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이라고 함으로 현재의 영적 상태를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영적 소원이 많고 헌신적이었다고 해도 현재 그렇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늘 현재이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적 굶주림은 더 심하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장할수록 우리는 주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를 갈망하고 그를 우리 마음에 채워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무한하신 분으로 우리가 평생 찾고 알고자 해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의의 말씀으로 아무리 채워도 우리는 부담이 없습니다. 주님의 의의 말씀은 아무리 먹어도 체하지 않고 지겹지 않고 다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분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필요를 진정으로 만족시켜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사람들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받으면 존재 의미를 느끼고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SNS에 자기와 관련한 사진이나 글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인간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줄까요?사람들은 끊임없이 관심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지치고 피곤한 마음이 듭니다. 웬만한 인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에 비례해서 피곤도는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한복음 4:1-30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 실망하고 다른 남자를 찾아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았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인은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되었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죄 많은 여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음으로 늘 정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관계성도 잘 맺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햇빛이 강렬한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문제가 세상에서 마시며 다시 목마르게 하는 ‘야곱의 우물물’을 찾고 있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녀의 죄 문제인 남편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경배하고 섬길 대상은 오직 한 분,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다시 목마르게 하는 ‘야곱의 우물물’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우물물’을 추구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하나님께서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만족줄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과 칭찬을 구할 때 진정으로 채워지고 만족합니다.
육체적으로 배고픈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종 슬프고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 나와 있는대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제 배고픔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풍성히 공급하시는 그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인 굶주림은 의를 사모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린 자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와 다릅니다. 인간의 의는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과는 별도로 한 의를 주셨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가리킵니다(롬 3:21-24).
하나님은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고 값 없이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굶주려 있다는 것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4:7).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는 말은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심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만족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채울 수 있는 내면의 영혼 만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배고픔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지금” 우는 자
예수님은 세 번째 복으로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번 째 복에서도 “지금”을 언급하심으로 계속해서 우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자들”이 받을 복은 ‘웃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웁니까? 사람들이 우는 경우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입니다. 또는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자기 처지가 한심스러울 때 웁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서 드라마를 보고도 눈물을 훔칩니다. 연기자들이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할 때 인생에서 가장 아픈 순간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가짜 눈물로 동정심과 연민을 유도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악어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때 슬퍼합니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을 잃었을 때 웁니다. 또한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소식에 눈물을 흘립니다.
우는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울음의 감정이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슬픈 일을 겪어도 울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마저 메말라 인간이지만 로봇과 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불쌍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은 죄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고 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와 같이 자기의 영혼이 썩어 문들어져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계처럼 일하며 학교와 직장과 사회에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받을 때 감성이 살아납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슬프고 힘든 일을 만날 때 슬퍼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특히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서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죄가 죄인줄 알게 되는 것은 곧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이 아픈데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픈 것을 느끼는 사람은 의사에게 나아가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5:32).
우는 자가 얻는 위로
예수님은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복이 있습니다. 위로는 메시아의 주요 역할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고통이 항상 악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그는 십자가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으심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웃음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십니다(사 53:3).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죄로 인해 우셨습니다(13:34). 예수님은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들 때문에 우셨습니다(요 11:35).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슬픔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슬픔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은 때로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3-4). 장례식은 슬픔의 장소이지만 우리는 장례식을 통해 우리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애써 회피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영생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선포되어지는 집례자의 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자기의 슬픔을 위로해 줄 이를 찾게 됩니다. 그들은 장례식에서 우리는 죄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계기는 슬픔 앞에서입니다. 그래서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 슬픔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축복과 평화를 누립니다. 그의 백성이 겪는 슬픔과 역경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가지 복의 세 번째 축복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자기 죄로 인해 울어야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죄로 인하여 울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없이 근심하는 세상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없이 혼자서 근심하는 것은 세상 근심입니다. 이 근심은 사람을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 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를 낳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낳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이고 심한 죄의식을 가졌지만 그것이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근심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움과 분노와 살인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의 행동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죄의 결과인 두려움과 죄의식에 대해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좋은 예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죄악에 대해 너무나 슬퍼서 괴로워 울부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그의 슬픔과 탄식은 곧 찬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를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폭로합니다. 그것은 밝은 빛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우리 자신이 나병환자와 같이 죄로 인해 흉측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내 하나님 안에서 근심하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찬송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진리를 깨닫고 기뻐 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 이 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위로가 됩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의 모든 죄를 완전히 지불하셨음을 아는 데서 오는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지불하셨다는 것과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 눈물 골짜기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예수님께 찬양드리고 이 위로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목자의 눈물
둘째로, 방황하는 양들을 향한 목자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픔은 다른 사람의 절박한 곤경과 끔찍한 고통을 진정으로 느끼고 동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주님께 들어 나아가 그 문제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중보 기도하는 눈물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그는 조국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들이 살 길을 가르쳤지만 그들이 듣지 않음을 인해 마음이 상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며 조롱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물을 양식으로 삼으며 주야로 기도하였습니다(시 42:3).
바울은 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서 3년 동안 목회할 때에도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섬겼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그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부패한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면서 마음의 큰 짐을 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그는 빌립보 교회 내의 손할례당과 같은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십자가의 사랑을 잊고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 때문에 마음이 앞아 수많은 기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도 울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예수님도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히 5:7).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22:44).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땀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물은 하나님의 의와 교회를 위한 기도의 눈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자기 연민의 값싼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라린 마음을 품고 죄로 인해 고통하는 양들을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눈물을 흘린 자는 복이 있는 자로 그들은 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후에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나이 늙도록 딸 자식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많았지만 외롭고 슬펐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은 더디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집의 충성스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창 15:2). 사라도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종 하갈을 아브라함에 주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몸에서 날 자를 상속자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가 되던 때에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하셔서 사라를 웃게 하셨습니다. 창 18:10에 나타난 사라의 웃음은 과연 가능할까 하는 냉소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심으로 감격의 웃음을 짓게 하셨습니다. 사라는 이삭을 얻은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아브라함과 사라는 신앙 출발한지 25년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체험함으로 최후에 웃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흉년을 당하여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오직 이방 여인 룻만이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함으로 그녀의 고통을 표현했습니다(룻 1:13).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성읍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룻 1:20-21).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따라온 이방 여인 룻을 통해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를 허락하시고 룻에게서 상속자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룻 4:15). 남편을 잃고 살 길이 막막했던 나오미와 이방 여인 룻은 구속자(Redeemer)인 보아스로 말미암아 다윗의 계보를 잇고 그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들의 슬픈 인생이 바뀌어 최후에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왕 여호야김 집권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완전히 뒤집고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바벨론의 침략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알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그의 나라의 원수인 바벨론을 심판하실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이에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는 당장의 현실이 절망적이라서 슬퍼하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예수님의 비밀을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 소망의 계시를 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사도 요한도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임하게 될 위로를 노래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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