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거듭해서 자기를 만진 사람을 찾자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이유와 나은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인생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구원과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8:47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믿음의 고백을 하도록 도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시자 여자는 더이상 숨길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5:32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여자는 더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대중에게 알리기를 고집하셨고, 그렇게 하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로부터 공식적인 고백을 듣고 그녀가 영과 육으로 모두 치유되었음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왜 병 고침을 받았는지, 그것이 그녀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 미신적인 손길 자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예수님에게서 축복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축복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누구에게도 주신 적이 없는 영예로운 칭호인 딸이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에 혈루증에서 나음 받은 여인은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여자는 이 장에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세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귀신들린 자(8:28)였고, 둘째는 야이로(눅 8:41)였고, 세 번째가 이 이름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엎드린 것은 그녀가 잘못해서 살려달라고 빈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분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그 분께 예배하고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녀의 삶의 주인이심을 알게 되었으며, 그에게서 창조주의 권세를 느꼈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이는 군중이 모두 지켜보는가운데서 하는 고백입니다. 그녀는 모든 백성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했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로서 자기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였습니다(시 107:2).
누가복음 8:48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아름다우신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참된 구원에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이 나은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참된 지식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 여인의 마음의 믿음은 정말 탁월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의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입술의 고백으로 이끄셨습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간 이루어진 일을 이야기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셨습니다. 그는 그녀가 12년 동안 짊어졌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짐, 그녀가 겪었던 멸시, 그녀가 견뎌온 외로움, 그녀가 느꼈던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군중 앞에 섰는데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 순간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본문에는 그녀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음의 문턱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재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에 대해 덜 관심을 두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의 손에는 삶과 죽음이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
혈루증 여인은 믿음이 있었지만 미신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녀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생각한 것은 사람의 힘이 옷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미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옷 가에 손을 대면 낫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미신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자 부르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예수님의 부름에 반응이 없자 재차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불완전한 믿음조차도 그분을 감동시키십니다.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심과 동시에 그녀의 믿음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천국의 축복을 받기 위해 믿음이 완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자기 신앙을 고백함으로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의 육체적 치유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발견된 정체성이 결합되어 이제 그녀는 사회적 교류를 재개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심지어 자녀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하고 불완전한 믿음을 영접하시고, 그 기초 위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거기서부터 그것을 발전시키고 강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에 기초한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고백이 없으면 우리가 믿은 것은 헛된 것이 됩니다. 고백이 없다면 기초가 없는 집과 같고 뿌리 내리지 못한 식물과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구원은 ‘큰 믿음’이 아닌 ‘작은 믿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눅 17:6). 이 말은 믿음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행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네 믿음”은 여인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 옷 가에 손을 대는 그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여인이 자기를 숨겼고 몰래 와서 예수님의 능력을 훔쳤으며 능력자의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것이라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면서 그녀의 믿음을 폄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녀의 믿음의 행동을 높이 사셨고 크게 인정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가는 길을 멈춰 세우시면서 그녀를 찾으셨고 그녀가 자기의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자기의 사생활이 드러나는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주권적인 강권으로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의 중요성
완전한 구원은 고백이 따를 때 이루어집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입술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많은 신자들이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공표하지 않으려 합니다. 군중 속에 숨어 있으려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면 돌아올 불이익과 은근한 박해와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은 믿음이 연약하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지 않으려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이 그리스도께 얽매여 사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위로는 받고 싶고 죽어서 천국 가고 싶은 소원은 있습니다.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잘 이루어져서 복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생각하는 복은 참된 복이 아닙니다. 참된 복은 내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그와 더불어 교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참된 복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고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 숨어 살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나의 신앙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에 더하여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래야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믿음이 불확실하고 흔들리며 모호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입술로 고백할 때 우리 주님은 그 고백에 기초해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빌 1:6).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평안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
여자의 고백에 따른 예수님의 선물은 “평안”이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선물은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는 죄 의식에 매여 살아갔습니다. 그녀는 외출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을 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사람이 그리웠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사람들과 접촉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을 멸시와 천대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난치병 대한 유대인의 생각은 그것은 심각한 죄를 지어 하나님이 저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육신의 질병에서 놓임받을 뿐 아니라 모든 정죄의식에서 해방되어 참 평안을 누리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 평안은 외적 조건에 따라 잃기도 합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누리는 평안은 거짓 평안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모든 죄에서 벗어나 누리는 참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은 값진 평안입니다. 죽음과 심판을 이기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다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보혜사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을 누립니다. 이 평안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며 이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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