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면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의 삶은 화려하거나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57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세 제자 지망생
57-62절에는 “따르라”는 동사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57, 59, 61). 마태복음 8:19-22절에서는 처음 두 내용만 나오고 마지막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는 사람의 부탁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누가만이 세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말씀들을 “길 가실 때에”(57)라는 말로 시작하고, 마태는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마 8:18). 마태는 “서기관”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라고 함으로 특정 청중을 지칭했지만, 누가는 “어떤 사람(a certain man)”(57), “또 다른 사람(another)”(59,61)이라고 함으로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따르는 이가 누군지 특정하지 않음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세 가지 말씀을 통해 제자도의 엄격한 본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에게 랍비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더 조건 없는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예수님이 자신을 따를 때 생각 없는 결정을 하기 쉽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11:13). 제자가 되겠다고 사람은 먼저 그 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두 경우는 예수님을 따를 때 가족 관계에 얽매이기 쉬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싶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혹할 만큼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되고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도는 편안함과 안정감, 가족 유대, 가족 사랑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58, 60, 62).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9:23-26의 후속 세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목숨을 잃어야 구원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가르치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진리의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엄격한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결심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의 결심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결심이고 조건부적인 헌신으로 예수님의 결심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삶의 화려한 측면만 보거나 조건을 내건 결단의 허구를 통렬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제자 지망생의 결단
“길 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 십자가로 향하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따르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절대적인 가치와 목적을 두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순교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것은 반드시 순교를 의미하지 않지만 순교에 걸맞는 헌신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그 길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헌신적인 제자가 갑자기 등장하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그의 말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고 온전한 헌신의 말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서기관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마 8:19).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목격했고 사람들이 그에게 몰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인기에 반한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하시는 말씀은 그 동안 들었던 그 어떤 율법 해설보다 명쾌하고 감동적이며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습니ㄷ. 그는 서기관의 명성보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의 명성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선생님이여”이라고 부르며 나사렛에서 온 기적을 행하는 이의 기꺼이 제자로 자신을 바치고자 하였습니다(마 8:19).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간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바치리라는 결단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설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만난 랍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랍비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개종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학자의 인생을 포기하고 자기 인생을 예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받아들인다면 아마 제 2, 3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할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날개를 단 듯 온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퍼지게 될 것이며 기독교 선교는 훨씬 더 수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할 때 종종 이런 이상적인 생각을 꿈꿉니다. 학교나 병원을 설립하고 정치계와 재계, 지식인 계층처럼 상위 계층을 복음으로 공략하면 위로부터의 선교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빨리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을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그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사 55:8-9).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시고 그의 주권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열정의 이면을 보셨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끼칠 악영향을 보셨고 그가 따르고자 하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9:58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일정한 거처가 없으신 예수님
예수님은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다짐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우를 예로 드신 것은 팔레스타인 땅에는 여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삿 15:4; 느 4:3; 시 63:10; 아 2:15; 애 5:18; 겔 13:4). 그들의 은신처는 땅속의 굴이었습니다. 여우는 밤마다 개구리, 토끼, 생쥐, 가금류, 새를 사냥할 뿐만 아니라 계란, 과일 등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들판, 과수원, 포도원을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점은 이 동물들에게는 정해진 거처가 있고, 그들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확실한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높은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관에는 묵을 곳이 없어 노숙을 하실 때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심으로 바깥에서 밤을 지샐 때도 있었습니다(6:12). 누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호화로운 객실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지켜온 종교적 전통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가 지켜온 전통적 가치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보수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매우 진보적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람의 영혼의 약점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직시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와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명성과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과 인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에게 전부 내드린다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야생동물들은 자기 집이 있어 평안히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정한 거처 없이 사셨습니다. 어찌보면 창조주께서는 그가 창조한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궁핍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안락함과 평안함을 포기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부하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제자 지망생의 착각
서기관은 수많은 군중과 그들 앞에 행해지는 기적과 그에 대한 열광적 반응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기 절정 중에 있는 예수님을 그의 스승으로 모신다면 그를 따르는 자신도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서기관은 기적을 행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가르침을 듣고 몰려든 군중들 한 가운데 서신 예수님만을 주목하였습니다. 예수님 옆 가까이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둘러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관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죽으러 가시는 길을 걷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죄 용서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과 심령이 가난하고 자기 죄에 대해 우는 자, 그리스도와 함께 박해를 누리는 자가 복이 있다는 산상설교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조건도 걸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그의 말에는 표면적으로 아무 조건이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세상의 명성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인기를 얻고 사람들이 몰려든 것만 보았지, 그가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앞 구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셨습니다(9:51-53).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지만 그 지역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셨습니다(8:37). 그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4:29).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정착하신 마을인 가버나움에서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배척한 가버나움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10:15).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두 제자를 보내셨을 때 그들이 직면하게 될 적개심과 반대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마 10:16-22).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 전체가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23:21).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성난 군중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사람의 피 흘리는 것을 그들이 당하라고 하자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나운 사냥개가 되었습니다(마 27:25). 서기관은 과연 예수님처럼 배척받고 버림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다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8:13). 결국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자입니다(9:23).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유익을 원했지만 희생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서기관과 비교해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는 달랐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며(마 19:27 ), 기꺼이 체포되고 위협을 받고 살해당할 수 있는 상황에도 기꺼이 들어갔습니다(행 4:1-3; 5:40; 7:54-60; 21:13).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채찍질 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행 21:13).
그들의 삶은 안정적인 삶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원하는 방식으로 필요하다면 세상적 안락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 전부가 불편하고 힘든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때로는 고난과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축소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누리는 안전지대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진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든, 단순히 용기를 내어 직장 동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새롭고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고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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