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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와 정결(누가복음 37-41)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점심 식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정결예식에 익숙한 바리새인은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읽으시고 지나친 정결예식에 집착하는 그의 잘못된 신앙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것에 신경쓰기 보다 그의 내면의 탐욕과 악독을 회개함으로 안을 깨끗이 하는 것에 신경을 쓰도록 권면하셨습니다. 그들은 탐욕과 악독 대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를 함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1:3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는 33-36에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한 세대의 문제는 빛의 문제가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는 영적인 눈의 문제임을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임하셨지만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좀더 논쟁을 이어가고자 예수님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가셔서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리새인 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그를 고소할 꼬뚜리를 잡고자 했다는 숨은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엄청난 무리가 따르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그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6절에서 등불의 빛이 비출 때에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온전히 밝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열어두셨습니다.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식사 교제를 즐기셨습니다. 이는 식사 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14:1-24 ; 마 15:1-20; 막 7:1-23). 우리는 바리새인의 식사 초청에 응하신 예수님을 통해 신자가 불경건한 자들과 이 세상의 자녀들과 섞여 교제를 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과 동기는 예수님처럼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차별하지 않고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식탁에 앉아 교제하는 것도 신자의 사회적 의무입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죄나 경박한 오락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불신자들의 사회에서 물러나서 은둔자나 금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선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할 때 한 가지 지켜야 할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것과 같은 정신으로 불신자들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담대함과 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과 관련하여 행동하셨습니다. 불신자들이나 대적자들의 틈에 끼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중요한 사명입니다. 

누가복음 11:38

예수님은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의례로 여겼던 바리새인은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기초해서 식사 전 정결예식을 시행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외적인 더러움만 다루고 마음의 내적인 부정함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결예식을 거치면 그의 내면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도 야고보가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약 4:8). 

미쉬나는 손을 씻는 규례에 대해 자세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했거나 율법에 부정한 것을 만지면 손을 씻었습니다. 이런 정결의식은 그들의 거룩함과 세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해지려는 열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씻을 때 손을 씻기 위한 물은 구멍이 뚫리거나 금가지 않은 온전한 그릇에 담아 손에 부어져야 했습니다. 손 씻기를 위한 물의 양은 충분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른손을 먼저 씻고 나서 왼손을 씻었습니다. 물은 손목까지 닿아야 했고 물로 씻기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이 손가락들의 구석구석 흘러갈 수 있도록 손가락들을 살짝 벌려야 하고, 약간 위쪽으로 쳐들어야 했습니다. 또 물이 손톱들과 모든 손가락의 둘레까지 적시게 부어야 했습니다. 충분한 양의 물로 손을 적시기 위해 그들은 각각의 손에 물을 두 번 부었습니다. 그들은 양손을 씻은 후에 양손을 비볐습니다. 그후 시편 134:2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라는 말씀처럼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들은 손에서 물기가 마르기 전 다음과 같은 축복기도문을 낭송하였습니다. “복 받으시옵소서. 오 주님, 우리의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손 씻는 것에 대해서 저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각각의 손에 두 번 물을 부을 경우 각각의 손에 한 번씩 먼저 물을 붓고, 손을 비비고, 축복기도문을 낭송하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물을 부었습니다. 그후 그들은 양손을 철저하게 말리는 것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입고 있는 옷에 손을 말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정한 구속력 있는 규칙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반대하신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아니라, 랍비들이 반드시 장로들의 유전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39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겉모양을 중요시 여기는 그 사람의 실존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통을 지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를 이상히 여겼고 그 마음은 정죄하는 마음으로 부글거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정죄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내면의 상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은 음료를 담는 그릇이고 대접은 음식을 담는 음식을 담는 크고 평평한 접시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규례는 속죄제를 드릴 때(레 6:27-28)와 유출병 있는 자가 그릇을 만진 경우(레 15:12), 부정한 짐승의 주검이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의 그릇인 경우였습니다(레 11:32-33; 민 19:14-17). 

일상 생활에서 그릇을 깨끗이 하는 세부적인 규례는 장로들이 만든 유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그릇의 안팎을 철저하게 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과 대접의 겉”과 “너희 속”을 비교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에는 크게 열심을 쏟았으나 마음과 영혼의 내적 순결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손을 씻는 방법을 연구해 하나의 의식으로 만드는 데 세심했지만 그들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이 만든 정결의식에 지나치게 얽매인 모습을 볼 때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만드시고 영혼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겉 사람의 깨끗함을 원하실 뿐만 아니라 속 사람의 깨끗함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업적과 경력과 체면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내면을 지키고 가꾸는 데에는 소홀합니다. 그들은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잠언 4:23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는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우리의 가치도 포함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거짓되므로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만의 마음을 갖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렘 17:9-10).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보다 사람 앞에서 살기 쉽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을 지키기 위해 기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갈1:10).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그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셨습니다(요 5:30).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요 5:41).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채워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습니다.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harpage)로 ‘강탈, 노략, 탈취’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기득권이고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약자들의 소유를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소유물 뿐만 아니라 영혼을 도적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15에서 그들의 영혼의 도적질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악독”은 헬라어로 ‘포네리아(poneria)로 ‘악한 성향’, ‘악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악한 것으로 의도적으로 행한 악의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 또는 사회적 가치가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저속함, 죄성, 악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적극적인 악의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청중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아들을 세워 복 주시려고 먼저 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행 3:26). 바울은 우리의 마귀 원수를 “악의 영들”이라고 했을 때 “악”이 바로 ‘포네리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종교적으로 보이기 위해 열심히 손을 씻고 잔과 그릇을 닦았지만 속으로는 죄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고 자기 행위를 철저하게 숨겼습니다(요 3:19). 그들의 영혼은 교만과 정욕과 속임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종교로 자기 죄를 은폐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은 화려했지만 그 속은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회칠한 무덤처럼 심하게 부패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자들의 죄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죄를 깨닫게 하고자 의도적으로 도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대담한 언어를 사용하여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지만(요 5:22, 27), 그 권세를 당장 사용하지 않으시고 어둠과 사망의 나라에 사는 자들을 건져내사 생명의 나라로 옮기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요 5:24-25). 

우리도 믿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고 살아가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로 악이 심판받았다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요 16:8-11).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방주를 예비하는 삶을 살므로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된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 대해 구원과 심판을 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히 11:7). 

누가복음 11:4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고 잔과 그릇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들에 대해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은 이해력이 부족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의 헬라어는 ‘아프론(aphron)’으로 올바른 판단력이 부족함을 의미하며 어리석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의 포로가 되어 길 잃은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의 패턴은 보면 그는 먼저 나쁜 소식(로마서 1-3장)을 강조한 다음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좋은 소식(로마서 3장)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미련한 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5:22). 

여기에 쓰인 단어는 ‘모로스(moros)’인데 이는 사람을 욕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말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표현이 아닙니다.여기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단어, ‘아프론’은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현명하지 못하거나 경솔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권면 하면서 ‘아프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엡 5:17). 확실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 바리새인의 착각은 그들이 외적인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자기 확신 때문에 경솔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결국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복음은 죄의 절망감과 동시에 구원의 희망을 줍니다. “어리석은 자여”라는 말은 우리의 죄에 대해 영적인 무지를 시인하고 죄를 깨닫고 구원의 희망이신 예수님께 돌이키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나에게 두신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여 영적인 무지 상태에 게속 두는 것이 아니라 그를 깨우치고 자기 실존을 깨닫게 하여 타락한 본성에 대해 절망하게 함으로 구원의 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심오한 복음의 깊이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당연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바리새인이라도 하나님께서 겉과 속을 만드셨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둘다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겉과 속 모두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의식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은 겉과 속을 모두 의미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외적인 것에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가로막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깊은 속”, 즉 그들의 영혼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종교의 외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구약의 반복되는 가르침을 무시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며 마음을 보시는 주님을 노래했습니다(시 51:16-17). 

누가복음 11:41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은 어렵습니다. 구제는 헬라어 원어로 ‘엘레모순네(eleēmosynē)’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돈이나 음식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구절은 ‘구제물품을 주라’는 말입니다. KJV으로는 But rather give alms of such things as ye have로 ‘네가 가진 것과 같은 그런 구제물품을 주라’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구제 행위를 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취득했지만 실제로는 탐욕 때문에 그들의 기득권을 활용하여 남의 것을 탈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자선을 베풀어서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탐욕으로 얻은 재산을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줌으로 정당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이는 이제 그들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얻은 것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눠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세리 삭개오가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19:8).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제를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구제를 함으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깨끗해진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진 것으로 구제함으로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탐욕과 악독”과 “구제”를 대조하심으로 그들이 정결 의식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들의 탐욕과 악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에 기초하여 구제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NIV에서는 But now as for what is inside you—be generous to the poor로 번역했는데, 뜻은 “네 안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너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안에 있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행위가 참된 자비의 행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제는 안에서, 즉 사랑하고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선물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2에도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비유적으로 자신의 자선 행위를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깨끗이 하는 일에 매이지 않더라도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해질 것라는 뜻입니다. 

구제는 종교적 의무에서 나오는 구제가 있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가득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제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구제는 개인의 삶에서 부당하게 이익을 구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부당하게 이익을 취했다면 이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이를 돌려주어야 하며, 회개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얻는 진실하고 정당한 자기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삶을 살 때 육체와 영혼이 모두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제를 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디도서 1:15을 보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회개에 대해 분명하게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제는 우리의 마음의 변화에 달려 있습니다. 그 내적인 변화는 반드시 구제와 같은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못할 경우 그에 합당한 사과와 배상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탐욕으로 과부의 집을 삼키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씻으며 깨끗하게 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해야 합니다(사 1:16-17).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정의와 자비의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자비의 행위를 하도록 함으로 모든 것이 그들에게 깨끗하게 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약 1:27).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지지 않고는 결코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의 영향력과 도움 없이는 어떤 영혼도 진실로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성결의 영으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는 구절은 원어로 보면 “보라”라는 말이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라”라고 하심으로 종교적 의식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를 통해 마음과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지식보다 율법이 말하는 사랑의 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와 같은 이야기로 종교 지도자들의 부족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음식과 음료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잔과 대접을 씻는 종교적 의식에 매이지 말고 다른 사람을 향한 순수한 선한 의지와 사랑과 같은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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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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