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율법이 적힌 돌판을 받으러 간 사이 백성들은 지도자의 부재로 몹시 불안해졌습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40일을 비우고 있자 그들은 모세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에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부재로 잠시 지도자의 책임을 맡은 아론에게 찾아가서 불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어떤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그들은 십계명과 율법을 통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십계명의 제 1-2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알고 있었고 율법의 낭독을 통해 우상 숭배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성을 따라 아론의 묵인 아래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교도들이 하는 의식대로 그들이 만든 금 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였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진노하여 하나님이 주신 돌판을 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돌판이 깨진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깨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끌어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백성의 속죄를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그는 진 바깥에 회막을 짓고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언약을 회복하십니다. 백성의 죄를 위해 기도하는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중보자 모세를 통해 참 지도자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백성의 요구를 마지 못해 들어줌으로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한 아론은 무책임한 지도자의 모습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백성의 죄에 대해 엄격해야 하며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기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금 송아지를 만든 부패한 백성(32:1-6)
출애굽기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32-34장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 산기슭에서 벌여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금 송아지 숭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32장에서 시간 순서 배정 때문에 성막에 대한 설명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마무리한 후 이어지는 35장은 31장의 내용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이 새겨진 판을 받기 전에 우상 숭배로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언약을 파기한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실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인가, 그러다가 가나안 족속에 의해 멸망당할 것인가, 이런 결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언약을 회복하십니다. 그 과정은 길고 어려웠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만나주셨고 파기된 언약판을 다시 주심으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안심시키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보여줍니다(33:19).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에게 모였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기 전에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당부하였습니다(24:14). 그러나 그들은 불안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그들의 공동 지도자 아론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에 대해 반복된 경고를 들었고(20:4-5; 20:23; 23:32-33),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19:8; 24:3; 24:7).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와 그들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신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계약서에 잉크가 다 마르기 전에 계약을 파기하였습니다. 백성이 모여 아론에게 몰려간 것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가담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분노의 함성으로 아론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선 부재 중에 있는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의지하였습니다. 모세가 여러 날 동안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아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들은 가시적 신뢰 대상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하던 지도자 모세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가 산 위에서 무슨 사고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신을 만들어 달라고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 그들의 변명은 말도 안되는 변명입니다. 그들은 시내 산 위에 타는 불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표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그들 가운데 있었을 때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보이는 신을 섬기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시내 산 기슭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고 생각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속히 약속의 땅으로 가서 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불안했습니다. 그들의 미래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미래가 보장받기를 갈망합니다. 당장 힘든 현실이 오래 지속되면 불안해 하면서 기다리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의 본성을 대변합니다.
우상 숭배는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다가오기 때문에 강력한 유혹의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여깁니다. 군중 심리는 변덕스럽습니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들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맞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롬 12:2). 반면 믿음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이나 순응을 택함으로 화평과 조화를 추구했다고 변명합니다. 이스라엘 군중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에 그들의 지도자 아론도 가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신을 만들라는 요구는 십계명의 제 1-2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거짓 신을 숭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 2계명에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시각화하고 형상화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되고 완전한 성품은 어떤 피조물로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왜곡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들이 다른 신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들은 금 송아지를 만든 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금 송아지 형상으로 대체되는 것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소는 힘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가 상징하는 힘은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송아지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전지하심과 능력을 결코 나타낼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나 그림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요 4:24).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지만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2:2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아론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백성에게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금 귀고리를 빼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른 귀중품도 있었을 텐데 아론은 왜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금 귀고리를 빼어 가져오게 했을까요? 아마도 시간을 벌기 위한 계산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중한 귀걸이를 빼어 오는 것은 설득하는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론은 이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아끼는 금 귀고리를 쉽게 내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론은 이렇게라도 해서 그들의 요구를 잠재우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아론은 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한 금 귀고리를 모으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갈등하고 있는 동안 모세가 내려와서 이 문제를 수습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아론은 그들의 제안에 대해 반박하거나 그들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꾀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이끈 지도자로서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이처럼 우유부단하면 안됩니다. 지도자는 대중의 탐욕에 부응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단호한 경고의 말씀을 전해야 했으며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꾀를 내어 시간을 지연하고자 하였지만 사람들의 완강한 요구에 타협하고 굴복한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민주적인 방식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성난 군중의 요구에 타협한 빌라도의 비겁함을 연상하게 합니다.
출애굽기 32:3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내와 자녀들은 가장의 요구에 저항도 하지 않았고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광기를 가정에서 그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부재에 대한 불안에 휩싸였고 그 불안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불안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망각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형상을 만드는 일에 집착하여 아내와 자녀가 아끼는 금 귀고리를 빼앗았습니다. 게다가 어떤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녀가 자신의 금 귀고리를 바치는 데 더 열정적인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백성은 집단적 불안에 휩싸여 우상에게 쉽게 그들이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불안은 미신의 충동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물질에 대한 탐욕도 집어 삼켰습니다.
출애굽기 32:4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은 자신의 꾀에 자기가 넘어갔습니다. 아론은 그들이 그렇게 빨리 금 귀고리를 가져올 줄 몰랐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금 귀고리는 큰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만큼 많은 금을 갖고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금 송아지 형상에 금을 입한 것으로 말합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협박조의 간청에 못 이겨서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조각칼로 새기는 기술은 그들이 애굽에서 배운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이 송아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본 형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송아지(a golden calf)는 히브리어로 ‘녹인 소’(a molten calf; KJV)라는 뜻입니다. 애굽은 제1왕조 때부터 힘을 상징하는 황소와 송아지를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나일 삼각주 인근의 주요 도시 멤피스(Memphis)에서는 황소 신 아피스(Apis) 숭배가,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처음 살았던 고센 인근의 도시인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창 41:45)에서는 황소 신 므네비스(Mnevis) 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애굽에 거주하면서 송아지의 형상과 이 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잠재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호수아도 그의 고별 메시지에서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라고 한 것을 보아 이스라엘 자손의 삶에 우상 숭배가 보이지 않게 깊이 침투해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수 24:14). 에스겔 20:8을 보면 그들은 에스겔 시대까지도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00년 간의 애굽에 거주한 삶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고 영향력을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은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송아지 형상을 가리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만나고 계신데 아론과 백성은 송아지를 가리켜 그들의 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웠습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의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고도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적인 하나님,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습니다. 이는 그들 마음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기초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눈에 보이는 돈을 더 사랑하고 의지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에 보이는 안전 장치를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추구하지 못하고 세상 풍조를 따릅니다. 오늘날의 송아지 우상은 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하였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10; 골 3:5).
출애굽기 32:5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아론은 백성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백성이 송아지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는 송아지 형상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실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절차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사의 형식을 갖춘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우상숭배였습니다. 아론과 백성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을 명백히 무시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시 106:20).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 1:23). 아론은 이와 같은 예배가 정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은 백성과 타협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6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들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 위해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중한 금 귀고리를 바쳤고 잠도 부인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우상을 섬기기 위해 부산을 떨었습니다. 번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이므로 제물은 완전히 불태웠습니다. 화목제는 교제를 위한 제사로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제사드리는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 교제하는 일종의 잔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우상과 교제하였습니다(고전 10:20). 그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은 자들이었고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신 자들이었습니다(고전 10:19-21).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금 송아지 사건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고전 10:7). 그들은 우상 앞에서 즐거워하였지만 그 순간 하나님의 질투는 맹렬하게 불타올랐습니다.
“일어나서 뛰놀더라”는 구절은 그들이 이방 종교 축제의 모습을 본따서 그대로 행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방 종교 의식에서는 제사 의식을 거행한 후 이와 같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뛰노는 축제가 벌어졌는데 행음하면서 육체적 환락을 즐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행음하였을 것이라고 가능성은 적습니다. 17-18절에 의하면 그들의 축제의 소리에 대해 “요란한 소리”, “승전가”,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라는 언급하였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았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19). ‘그들이 행음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에 다른 장소에서 모압 여자와 음행을 했고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함으로 그들은 이방 신들에게 절하게 되었습니다(민 25:1-3). 사람이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협의 정도가 넓어지면서 나중에는 혼합 종교를 떠나 아예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일말의 타협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결심한 것처럼 단호한 결단과 순종이 아니고는 우상 숭배의 유혹을 물리치기 쉽지 않습니다(수 24:15). 우리는 보이는 우상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은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를 속이고 유혹합니다(고후 11:14).
모세의 중보 기도(32:7-14)
출애굽기 32:7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갑자기 산을 내려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산 아래에 무슨 큰 사건이 벌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계시하는 과정이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네가”, “네 백성”이라는 2인칭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 아닌 “네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패하였도다”는 말은 have corrupted themselves(KJV)으로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다’라는 뜻이지만, 히브리 원어로 보면 ‘자기 자신을 파멸하다, 파괴하다, 폐허가 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의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타락한 본성에 굴복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죄를 낳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자기 우상 숭배의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출애굽기에는 “내 백성”이라는 말이 19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네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 기도에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32:11).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애굽에 있는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내 백성”이라는 1인칭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 숭배로 부패했을 때 그들을 “네 백성”이라고 함으로 2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떠넘기면서 “네 백성”이라고 하심으로 모세가 중보자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진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세와 그의 백성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여 그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그가 진노하신 일을 깨닫게 하여 그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 역사를 중보자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범죄한 백성을 그의 가슴으로 떠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양들의 목자로서 책임감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무리가 몰려왔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이 오천 명의 무리를 책임질 목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막 6:37; 눅 9:10-17). 그런데 사실 제자들이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이 큰 무리를 먹일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를 친히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책임감을 갖도록 하시고 먹이신 것은 그가 친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함으로 그들을 위해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중보 역할을 통해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도 부패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보내어 유다를 멸망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고통을 안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들의 멸망을 깨닫지 못하는 부패한 유다 백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회복을 말씀하셨고 덧붙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땅의 황무함을 보고 간절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 부패한 백성을 위한 눈물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부패한 백성을 일깨우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지자적 사명과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그의 택하신 자를 구원시며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출애굽기 32:8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가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났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율법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잠시의 부재로 인한 불안과 불신 때문에 그들은 “속히”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것은 “속히” 무너졌습니다. “속히”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와 자녀의 금 귀고리를 바칠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속히”는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제 2계명을 어기고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를 위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제 1 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자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없이 자신들이 광야에 갇혀 몰살당할 것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해 뭔가 눈에 보이는 구심점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송아지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딤전 6:16).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한낱 송아지 형상으로 바꾸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으로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실 때 그들의 어리석음에 진노하시고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가를 알려주셨는데도 어린 황소에게 경배함으로 우상 숭배의 ‘열등한’ 방식으로 그 분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 연기, 불 기둥, 음성 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는 성막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전수하여 율법을 따라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어리석은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황소의 형상은 그들이 애굽에서 보았던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지만 사고방식은 애굽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몸은 자유인이었지만 생각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편히 보고 만질 수 있는 신을 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강요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자 하고 죄의 본성 대로 살고자 함을 나타내 줍니다.“부패하였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가 ‘자기 자신을 파멸하다’는 뜻을 나타내듯이 그들은 자기를 위한다고 했지만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안타까워 하셨고 이를 모세에게 알려줌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사랑을 저버리고 송아지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기 백성에 대한 질투의 불이 타오르셨던 것입니다. 질투하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그만큼 사랑하셨다는 반증입니다.
출애굽기 32:9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었습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고집이 세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다고 표현했습니다(호 4:16). 그들은 멍에를 거스르는 소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고삐를 잡아당기는 농부를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힘이 센 황소를 그들의 신으로 삼고자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멍에를 거부하는 고집 센 황소처럼 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특징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그들에 대한 희망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의 음성에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는 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그들이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그들이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것입니다(신 6:10-1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협박이나 강요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크고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만일 거역하고 듣지 듣지 않으면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는 그들의 목이 뻣뻣하고 그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이 뻣뻣하여 거역하는 것이 멋있게 보인다고 착각하고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멸망으로 가는 어리석음과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자는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 11:29-30). 그러므로 목을 뻣뻣하게 하고 그 멍에를 거부할수록 고통스럽고 짐이 됩니다. 그 멍에를 깨고 나가는 자는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렘 5:5-6).
출애굽기 32:10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을 구하는 표현 같이 보입니다. 이는 피상적으로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해 중보하지 말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반어법적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진멸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모세의 허락을 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에게 중보 기도의 문을 열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설득될 수 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백성을 향한 중보 기도의 헌신이 그의 진노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한 그의 진노의 불을 거두도록 기도하도록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8:19-20).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도 없이 이행하실 수 있었지만 이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누설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멸망의 성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정보를 듣고 그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 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조카의 가족을 불의 심판에서 구원하는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그의 진노의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일부 남은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민수기 14:12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 그들을 진멸하는 방식은 전염병이고 모세를 통해 이룰 큰 나라는 현재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제안은 모세에게 큰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사람인지라 이 제안은 그에게 매우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해 가끔씩 모순적인 명령이나 제안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2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순이 되는 점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22:14). 모세는 하나님의 모순적인 제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해 진노하신 이유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한낱 짐승의 형상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철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모세는 그들의 반복되는 죄로 하나님의 언약이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모세는 범죄한 백성을 버리고 자신을 높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통한 새 나라가 건국되는 영광보다는 아브라함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약속의 흐름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2:11-14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제 모세는 중보 기도에 돌입하였습니다. 그의 중보 기도는 거듭되었습니다(32:31-34; 33:12-13, 15-16; 34:8-9).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며 그들의 죄가 사해지기를 간구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지는 영광을 바라는 대신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자가 되기를 결단합니다. 여기서 “구하다”는 의미는 히브리 원어로 ‘구하다’는 뜻 외에 ‘약하다, 병들다, 슬퍼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차용하면 그의 간구는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약하게 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를 진정시키고 설득하여 은혜를 베풀도록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 반역을 한 백성이지만 그들이 말살되는 것을 보면서 자기 가문이 영광을 누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사나 죽으나 동족이었고 그 동족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운명론적으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항변하였습니다. 모세의 항변은 하나님의 진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에 미칠 재앙 때문에 이렇게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광야의 산에서 죽이고 진멸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고 조롱할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1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고 기도한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듣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창 18:25). 모세와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의 특징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기도하였고 모세는 어떤 가운데에서도 영광을 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무효화시켜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펼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애굽 사람들이 이를 보고 조롱하며 기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더 나아가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3).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그가 허락한 땅을 그들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2; 15:14-15; 26:3-4; 35:9-12).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결코 취소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인간은 신실하지 못해 실패하기를 반복하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심으로 그의 계획과 뜻을 반드시 실천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신 성품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고 마침내 세상의 구원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무턱대고 무엇을 해달라고 간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그의 뜻대로 간구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십니다(요일 5:14).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과 긍휼의 풍성하심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어릴 때에는 어린 아이가 떼를 쓰듯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억지스러운 간구도 들으실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의 뜻대로 간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그냥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을 스스로 멸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의 신실하심과 배치된다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그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성숙한 지도자요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중보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의 기도로 그 뜻을 돌이켰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이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을 때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욘 3:10). 히스기야 왕은 그가 병들자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사 38:5-6).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결코 바꾸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분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엡 1:4; 계 22:13).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십니다(삼상15:29).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법은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후회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않았다고 했을까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성품 중 신실하심과 불변하심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도 그의 계획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고자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에 의해 그의 맹렬한 불의 진노를 거두심으로 마음을 바꾸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결코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배역으로 그의 인류 구원의 계획을 취소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맹렬히 진노하신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진노의 성품을 알고 백성들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모세가 중보자로서 그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돌이키다(후회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나함’으로 ‘슬퍼하다’는 뜻과 ‘위안받다’라는 상반된 뜻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여기서 “한탄하다”가 바로 ‘나함’으로 ‘후회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는데 인간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은 마음에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 분이신데 후회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 한탄하셨지만 노아의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나함’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청소하시고 새로운 바탕 위에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부활로 인한 구원과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에 이스라엘의 배역은 결코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모세와 같은 중보자를 쓰시고 그와 만나시며 인간의 실패를 극복하시고 구원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후회는 악을 정화하는 것이고 다시 깨끗한 자리에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배반, 하나님의 진노, 돌이키시기를 구하는 중보자의 기도, 뜻을 돌이켜 구원하심이라는 순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백성을 중보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성품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보자 모세의 간구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구속 역사에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실 때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와 패역을 말해주심으로 중보 기도하실 것을 넌지시 비추십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기도 제목을 주십니다. 그 문제를 위해 중보 기도하도록 하심으로 그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십니다.
백성에게 진노한 모세(32:15-29)
출애굽기 32:15-16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모세는 그 동안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그의 영광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범죄한 백성들을 수습하러 가야 합니다. 아마 모세는 불평이 많고 변덕이 심하고 감정적인 백성들을 섬겨야 할 것을 생각하니 산을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과 영원히 영광의 산에 머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 산에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한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 밑으로 내려가면 문제 많은 무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생하고 싶지 않았고 십자가 없는 영광 가운데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손에 두 증거판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글자는 하나님이 직접 새겨 쓰신 것이었습니다. 보통 기록을 남길 때 파피루스나 가죽에 글을 쓰는데 이것은 돌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돌에 새겨 주신 것은 이 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계명으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이 두 돌판의 한 면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는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전체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양쪽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글자가 상당히 커서 다수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십계명은 수정되거나 추가될 수 없는 하나님의 헌법입니다. 다른 율법 조항은 헌법에 대한 설명적 법규로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적용되는 법이었습니다. 이 율법 조항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말하는 뜻과 정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율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었고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었습니다. 만일 십계명이 모세가 듣고 이를 전달하여 사람이 돌판을 만들고 이를 새겼다면 후대 사람들이 이것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돌판까지 준비하시고 손으로 그 판에 새겨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그의 백성에게 주실 때 조금이라도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셨습니다. 이로써 이 법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헌법이 되었습니다.
돌판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실 때 그의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고자 하셨습니다. 돌판은 시간이 지나면 닳아지고 없어집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로 이 언약이 파기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자 하시는 계획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다 알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렘 31:31-34). 돌판이 아닌 마음에 새겨진 언약은 성령의 임재로 가능해집니다.
출애굽기 32:17
17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산 정상과 산 기슭 사이 중간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면서 떠드는 소리를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습니다. 이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요란하고 격하게 흥분하여 우상을 숭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엄숙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이교도들의 광란의 의식을 그대로 본받아 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싸움에 능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를 전쟁하는 소리로 착각한 듯 합니다. 그는 자기가 나아가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8
18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여호수아의 보고를 들은 모세는 여호수아와 다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들리는 소리가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판단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특이합니다. 모세의 판단과 여호수아의 판단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의 우상 숭배의 방법이 얼마나 무절제하며 광적인 괴성을 질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거룩함이 묻어나는 찬양과 완전히 거리가 기괴한 발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19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진에 가까이 이르자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들이 춤 추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발광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모세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을 목격하자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두 돌판이 깨졌습니다. 그는 산을 내려와서 백성의 부패한 모습을 보니 하나님의 진노가 실감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진노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하나님이 친히 새겨주신 돌판을 던져 깨뜨릴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감정적인 분노일까요?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판을 던진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출24:3).
예수님께서는 부패한 성전을 보시고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막 11:15-19; 눅 19:45-48; 요 2:13-22). 우리는 이 예수님의 행동을 과격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 공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부패한 모습에 진노의 불을 쏟으시는 것은 당연한 행동입니다. 죄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한다면 이는 죄와 타협한 아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서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으로 바라보았고 아론은 백성의 인기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의 평가와 판단과 인기에 영합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갈 1:10). 그는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of God),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이라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불 같은 진노를 쏟아내었습니다. 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함으로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이라 해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돌판마저 신성한 물건이라고 해서 숭배의 대상이 될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마음 아파하고 속상해 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오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출애굽기 32:20
20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모세는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불살라 부수었다는 것을 보면 송아지 상은 불에 탈 수 있는 재료에 금을 입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큰 우상을 제작할 때 조각한 우상에 금이나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사 30:22; 40:19). 모세가 우상을 가루로 만든 것은 철저히 우상을 파괴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요시야 왕도 종교 개혁을 할 때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것들의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렸습니다(왕하 23:6; 대하 34:4,7). 모세가 송아지 우상을 파괴하고 가루로 만들었을 때 송아지 우상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상은 인간이 부어 만든 것이므로 그 신상을 인간이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상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습니다(사 44:17-19).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우상을 만들고 신성시하며 그것에게 기도하고 구원을 간구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우상을 가루로 만들어 우상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아무런 힘이 없음을 체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모세는 이어서 빻은 가루를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조치였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함으로 그들의 죄를 그들이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행동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법 제도가 발달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렇게 조치하지 않으면 그들은 죄가 죄인 줄 모르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들이 태운 재가 둥둥 떠 있는 물을 마시는 것은 역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배한 우상의 재를 마심으로 그들이 범한 죄를 삼켜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온 몸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1-25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모세는 백성에게 십계명의 돌판을 던져 깨뜨리며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송아지 형상을 불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그것을 물에 타서 그들로 마시게 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에게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형 아론을 책망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심각한 우상 숭배 사건을 방조한 책임이 아론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모세는 아론이 그의 형이라는 혈연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요 대리인으로서 아론을 책망했습니다. 모세는 아론이 어떻게 했기에 이 백성이 큰 죄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추궁했습니다. 지도자의 결정이 백성에게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일깨워주는 책망입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은 그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게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21, 30, 31).
이스라엘 왕국이 둘로 분열된 원인은 솔로몬의 우상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7:21).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죄는 어떤 의미에서 “큰 죄”입니다. 특히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큰 죄”를 범한 자입니다. 우리는 죄를 도덕적이고 법에 기초한 형사적인 죄만 죄로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심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는 선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적 판단 기준에 근거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근거한 죄입니다.
출애굽기 32:22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아론은 모세를 “내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은 ‘아도나이’로 하나님께 대해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하고 대신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모세를 ‘아도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비록 그의 동생이었지만 하나님을 대리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론은 “노하지 마소서”라고 말하며 모세를 진정시켰습니다. 이를 볼 때 모세가 크게 진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진노를 통해 아론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시고 그에게 신적 권위를 주시고 그를 통해 그의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책망에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서 아론은 이 사건의 근원적인 책임이 백성의 악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악함을 알았으면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엇습니다. 그는 모세의 대변자로서 얼마든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악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들에게 믿음을 심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기까지 잠잠히 기다리도록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이 두려워서 그들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그들의 죄를 책망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지도자로서의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명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모든 결정은 지도자의 승인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의 요구에 마지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무리에게 돌렸습니다(마 27:24). 이로 인해 그는 ‘비겁한 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을 본디오 빌라도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타협에 기초한 판결과 비겁한 책임 회피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23-24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론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기 입장에서 변명했습니다. 아론은 백성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금을 모았을 뿐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백성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였습니다. 아론은 모은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는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의 변명은 누가 들어도 과장된 거짓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변명을 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이처럼 자기 방어 본능이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추궁하셨을 때 아담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주었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라고 함으로 자기 아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책임을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함으로 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은 자기 잘못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못하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변명과 거짓말로 자기를 방어하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다윗도 간음 죄를 숨기고자 그의 남편이자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하였습니다.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는 그의 말은 그가 당황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25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방자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파라’로 ‘풀어주다, 떠나게 하다, 벌거벗다’라는 뜻이고 영어 번역은 out of control(통제가 안되는; NIV), broken loose(속박에서 벗어난; ESV, RSV), run wild(제 멋대로 행하다; NRSV, LEB), naked(벌거벗은; KJV)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제멋대로 날뛰는”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 종교의 제사의식에서 행한 것 같이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날뛰며 광란의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성적인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잠언 29:18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는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음으로 방자히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그들은 자유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죄의 노예가 되어 죄에게 구속받고 얽매이는 삶을 살아갑니다(요 8:34). 현대적인 용어로 죄의 종노릇하는 삶은 죄에 중독된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때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요 8:31-32). 하나님의 율법은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삶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방 신을 따라 가는 이스라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 2:20). 이스라엘은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멍에라고 생각하고 그 멍에를 꺽고 결박을 끊으며 “나는 순종하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들은 산당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영적인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우상의 노예가 되고 죄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기는 커녕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들의 종으로 사는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아론은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원수는 애굽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했습니다(5:1; 7:16; 8:1; 8:20; 9:1; 9:13; 10:3). 이 메시지는 시내 산에서 그들이 율법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결국 자기들이 섬기는 송아지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이는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될 것을 생각할 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론의 죄는 그들이 방자하게 행하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자유라는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자유가 방자함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가치를 하나님의 법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 세대를 방자하게 행하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방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양들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 학교에서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자녀를 주시고 가정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7-9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지 예를 제시하였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아론은 백성이 방자히 행하였을 때 그들에게 십계명을 상기시키고 그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며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방자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방치의 죄를 지었습니다.
출애굽기 32:26-28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는 진 문에 섰습니다. ‘진 문’은 시내 산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백성들의 진영(19:1, 2) 입구를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라는 말은 ESV를 보면 “Who is on the LORD’s side? Come to me.”로 번역되어 있는데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편에 설 자가 누구냐? 그는 내게 나아오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여호수아의 고별 메시지에서도 발견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선지자 엘리야도 하나님과 바알 신 사이에 머뭇머뭇하는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균형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원주의 세상입니다.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통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우상 숭배와 미신적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점을 보거나 제사를 지내는 관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편 고대 사회의 우상 숭배 의식이 아니더라도 우상 숭배는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고(골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10). 예수님도 물질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재물은 mammon(맘몬; KJV)으로 오늘날을 지배하는 가장 큰 신입니다. 재물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삶의 수단입니다. 성경은 재물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잘 활용하여 그의 나라를 위해 잘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 재물을 신격화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물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될 때 우리는 재물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로 재물을 올바른 일에 잘 사용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재물을 우선시할 때 우상 숭배가 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라고 결단을 촉구하듯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 돌아보고 하나님의 편에 서 있도록 촉구하십니다.
출애굽기 32:27-29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27-28절은 우상 숭배를 한 백성들 중 일부를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에 선 레위 사람들에게 허리에 칼을 차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영의 문에서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일은 모세의 지시로 이루어졌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자 그 날에 백성 중 3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살육을 명령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지시를 따른 모세는 잔인한 살육을 지휘한 자가 된 셈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29-3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한 일을 가리켜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라고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행한 살육이 하나님께 헌신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금만 잘못해도 벌을 주시는 살벌한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품이 넓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의 가정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모세가 금송아지 앞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백성을 용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방자한 백성들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무관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타락으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이들의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출22:20). 오늘날 국가의 법에서도 반역법은 엄하게 처벌합니다. 하물며 고대 국가에서 반역하는 죄는 얼마나 엄하게 다루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정국가에서 우상 숭배를 용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모세가 그들의 행동에 눈 감고 지나쳤더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 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 지파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는 메시아의 탄생의 희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리한 한 국가의 통치자입니다. 모세가 레위인을 통해 가담자들을 죽이도록 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법을 세우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고대 시대의 우상 숭배는 끔찍하고 잔인한 관행과 쾌락적이고 음란한 관행이 많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 국가에서 이런 것들이 용납된다면 어린 아이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행음하듯 신들을 섬기는 타락한 문화가 이스라엘을 지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자에게 칼을 주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워 백성에게 선을 베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백성이 악을 행하면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칼을 가지고 보응하는 역할을 합니다(롬 13:4). 모세와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자가 되어 백성이 망가지는 것을 바로 잡는 공적인 사법 집행을 한 것입니다. 약 200만 명의 백성 중 3천 명이 처형된 것은 법에 의한 것보다 가벼운 처벌에 그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우리 시대의 국가는 신정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 국가의 통치자가 아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이 행하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의 신정 국가의 개념은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의 죄를 다루기 위한 치리의 개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상을 전파하고 성도를 죄에 빠지게 하며 타락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회개하도록 돕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출교 조치를 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18:15-17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할 때 가서 개인적인 권고를 합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세워 확증하게 한 후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는 출교 조치를 합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에 권징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권징을 하였을 때 이를 법정까지 끌고 가는 일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와 레위가 행한 사형 집행은 하나님이 부여한 권한이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신정 국가에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세우기 위한 조치였음을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도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겸손하게 권고를 해야 합니다. 그 범죄의 정도가 심각하다면 교회 차원에서 징계를 행해야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바로 서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절차가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특히 타협하기 쉬운 부분이 우상 숭배와 간음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다른 신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행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간음 죄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는 죄이고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진노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신경에 나와 있듯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기본 교리를 지켜야 합니다.
본문은 죄의 심각성을 말해줍니다. 3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우상을 만들기 위해 금 귀고리를 갖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자면 우상 숭배를 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합니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자면 모두 심판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 범죄하였지만 그들을 다 죽이지 않으시고 오직 3천 명만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멸망당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임하도록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죄에 대해 적절한 징벌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징벌을 행했던 레위인들에게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치명적인 죄를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와 친구와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순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이를 헌신으로 여겼습니다. 레위인은 3천 명을 희생시킴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전염병처럼 퍼진 우상 숭배를 차단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차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정에 매이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고 하나님은 이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을 회복하였고 그들은 여호와를 참되고 유일한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간 모세(32:30-35)
출애굽기 32:30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는 백성에게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은 3천 명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서 죄의 누룩을 제거하고 이제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러 하나님께로 올라가고자 하였습니다.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라는 구절은 모세가 기도한다고 죄 사함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들의 속죄를 위한 중보 기도에 매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보고 그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큰 죄”라는 말은 세 번 반복됩니다(32:21, 30, 31). 창세기에서는 “큰 죄”를 성적인 타락과 간음 죄를 가리킵니다(창 13:13; 20:9). 성경에서는 우상 숭배를 영적인 간음으로 여깁니다. 그들의 죄는 기아나 전염병을 유발할 정도로 심각한 “큰 죄”입니다. 모세와 레위 자손의 죄에 대한 조치가 없었다면 온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3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올라갈 때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내 산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속죄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고 매달리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속죄할 수 없습니다. 속죄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취하여 제물을 바친 사람을 위해 속죄할 때 제물을 드린 사람이 속죄함을 받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속죄한 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레 4:20,26,31; 5:16,18).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신 희생 동물의 피만이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7).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속죄받지 못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유사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중보자이시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대속 제물이 되신다는 것입니다(요 1:2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절망에 빠질까 두려워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범한 죄는 “큰 죄”라고 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극악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는 “큰 죄”를 저지른 죄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죄를 모호하게 하여 자기 체면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자기의 죄를 희석시키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핑계함으로 조금이나마 죄 의식을 덜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이고 “큰 죄”로 인해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자임을 고백하고 그의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죄 사함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본 자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기고자 하는 것을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3:8).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의 관계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22에서 사도 베드로는 마술하는 사람 시몬을 책망하면서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행 8:22). 베드로는 “혹 … 사하여 주시리라”라는 불분명한 말을 썼습니다. 이는 죄 사함의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고 그 분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해 준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언약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찍혀 버림받을 돌감람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로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롬 11:17).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죄인의 자세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출애굽기 32:31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슬픔의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였을 때 그는 히브리인임을 자각하고 큰 결단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섰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하루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같은 동족끼리 화평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을 폭로했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세는 백성들의 온갖 불평을 들어야 했고 심지어 모세를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이고 노예 근성에 찌들어 있었으며 시민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았고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지만 이를 잊고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런 백성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이런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직접 미치기 전 법 집행을 함으로 희생자 숫자를 최소화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슬프도소이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끌어 안고 그들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30절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를 범함으로 모두 다 멸망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자면 그들은 모두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들의 속죄를 위해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32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백성의 영적 생명을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는 백성의 생명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의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실제로 그의 영적 생명을 포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의 특별한 열심을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바로 그 생각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씌워질 치욕과 모독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비통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제물로 그를 받으시고 그 자신의 완전한 멸망을 대가로 큰 재앙을 막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런 언급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로서 말하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신다면 용서받은 자들은 주님의 값없는 은혜와 자비에 감동을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해 주의 영광과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이유를 갖게 될 것이며 주님을 두려워하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큰 의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빚진 자의 심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롬 1:14). 빚을 진 자는 그 빚을 갚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고자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마 18:24). 이는 한 사람이 만 년을 일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자는 이런 엄청난 빚을 진 심정으로 겸손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빌 2:17). 민수기 11:15에서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감당하다 지쳐서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는 표현은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비통함의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록하신 책”은 산 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책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은유적 표현으로 백성의 이름을 보관하는 정부의 책을 비유한 것입니다(겔 13:9). 여기서 “책”은 신약에서 말하는 “생명책”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계 3:5; 13:8; 20:15; 21:27). 신약의 생명책은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명부입니다. 즉 영생을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책은 영생의 책으로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계 13:8). 이 책은 하나님의 예정,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선택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였습니다(롬 9:3). 이는 하나님의 생명책이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말함으로 동족을 향한 그의 상한 목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생명책은 기록된 그 어떤 이름도 지워질 수 없다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과 안전에 대한 중요한 교리를 말해줍니다.
신약의 “생명책”과 달리 우리는 모세가 말한 책의 구약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국가나 도시에서는 백성에 대한 기록을 보관했습니다. 이는 과세, 병역 의무, 재산 소유권 설정 등의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인구 규모가 커지면 정확한 목록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책으로 기록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 책은 인구의 증가와 유입에 따라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 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래서 책에 보관된 사람의 이름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목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생명책’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무엘상 25:29을 보면 “생명 싸개”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생명을 “생명 싸개” 속에 싸서 지키실 것과 다윗의 원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생명 싸개”에서 꺼내어 물매로 던지듯 던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대 사회는 씨족 사회로 구성되었는데 자갈을 이용하여 주민의 수를 파악했습니다. 목자가 양의 나타내는 작은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였고 새끼 양이 탄생하거나 새로운 양을 구입하였을 때 그 주머니에 자갈을 추가했습니다. 만일 양이 죽거나 도살될 경우 조약돌을 꺼내어 버렸습니다. 조약돌은 살아있는 사람의 명부를 의미했기 때문에 “생명을 …던지시리이다”라는 의미는 그들의 생명을 빼앗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이 발전하여 책이 되었고 그것이 “생명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기의 영적 생명을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이 백성에 대한 그의 큰 애정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의 큰 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기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32:33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의 속죄를 위해 기도하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거래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범죄하면 그가 행한 일로 그 죄의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에스겔 18:1-32에서 33절이 말하는 원칙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 것이고 공의를 행하면 그 행한 공의로 살 것이라는 원칙을 선언합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죄가 3-4대까지 이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의 죄가 그 후손에게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출 20:5; 34:7; 신 5:9). 그러나 에스겔은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않고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천명했습니다. 의인의 공의는 자기에게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 만일 악인이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말씀을 지키고 정의와 공도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범죄한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반면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면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을 것이 원칙입니다. 아무리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그들이 행한 악으로 인해 그들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반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에서 구원에 관한 조건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주심으로 속죄를 이루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선물을 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 값 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의 언약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32:34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하나님은 중보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계획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보내어 앞서 가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의도에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자 이스라엘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보응할 때가 이르면 그들의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보응은 35절의 전염병을 내리신 것을 가리킵니다. “보응하다”는 말은 visit(KJV; ESV)로 ‘방문하다’는 뜻이 있고 punish(NIV, NASB, NRSV)로 ‘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에 “보응하다”는 ‘계산하다, 세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장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그들의 죄가 쌓이고 어느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는 현재의 죄까지 계산해서 그들을 징벌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범죄함으로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민 14:29-33). 그의 후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반복해서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음으로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 70년간 포로로 잡혀가 죄의 보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지만 그들의 죄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세시고 있다가 그 죄가 차면 벌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죄의 결과는 우리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사적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이로 인해 감옥에 가기도 하고 벌금형에 처하기도 합니다. 간음 죄를 지으면 이로 인해 이혼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자녀 문제로 평생 괴롭힘을 받습니다. 감정적 분노의 죄를 지으면 이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관계성 파괴로 인한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다윗이 그의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 죄를 짓고 나서 회개했을 때 죄 용서함을 받았으나 그 열매는 자기가 따먹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을 잃어야 했고 그의 첫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에서 쫓겨나 도망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교만하여 인구조사를 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많은 백성을 잃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세어 놓고 계셨다가 때가 되면 그 죄를 보응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런 공의의 원칙이 없다면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짓고 용서를 받고 또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일을 반복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징계를 당할 때 이로 인해 교훈을 얻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출애굽기 32:35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과 죄의 보응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반드시 보응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의 양면적 측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 그의 약속을 지키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셔서 모세가 기도한 대로 백성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으로 죄에 대해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만일 죄에 대한 보응이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죄를 짓게 됩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악인들에 의해 해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보응하시고 반드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행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죄를 보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를 만든 죄로 이스라엘 백성을 치셨습니다. 여기서 “치시니”는 ESV, RSV, NRSV에서는 sent a plague, ‘전염병을 보내다’로 번역하였고, NIV에서는 struck … with a plague, ‘전염병으로 치셨다’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사형 집행과 별도로 전염병으로 백성을 치셨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죄를 보응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의 규모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송아지를 만드는 일에 아론이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고 “아론이 만든 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NIV에서는 because of what they did with the calf Aaron had made로 ‘아론이 만든 송아지를 두고 그들이 행한 일 때문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아론은 금 귀고리를 거두었고 송아지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실 백성의 죄도 무겁지만 아론의 죄는 그가 지도자이기 때문에 더 무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이 무사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9:20을 보면 그를 살려두신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의 공의대로 아론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멸망당하지 않은 것은 모세의 중보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레위 자손이 “누가 주의 편에 서겠느냐?”라고 모세가 결단을 촉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을 고려하셨을 것입니다(26).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두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그를 살려두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출 33:19).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롬 9:22-23). 하나님은 아론을 그의 주권으로 선택하셔서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그를 세우시고 중보와 대속의 원리를 백성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베푼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론도 또한 그가 한 일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회개한 이스라엘(33:1-6)
출애굽기 33: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모세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하셨다고 일관되게 말씀하셨습니다(12:51; 13:3,9,14,16; 16:32; 18:1; 20:2; 29:46).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후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32:7에서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이스라엘의 범죄가 하나님을 매우 실망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성은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닌 그의 사자를 보내어 앞서 가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열등한 의미에서 천사의 단순한 안내와 도움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천사의 단순한 안내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모세는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하나님의 실제의 임재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염병의 징계를 받고 나서 회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이스라엘의 금 송아지 우상 숭배의 죄를 용서하기를 꺼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시내 산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떠나 올라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결별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그 관계가 손상되었지만 모세의 기도대로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 가더라도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가더라도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특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16).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전에 하셨던 것처럼 그가 친히 인도하시고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는 은혜롭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는 하신 이유는 그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 그들이 또 범죄하면 가는 길에 그들을 진멸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영광과 은혜와 축복이지만 범죄한 백성들에게는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안전을 걱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그들을 진멸함으로 생길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그들이 멸망받을까 염려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인 은혜롭고 자비로운 성품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3:4-6
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준엄한 말씀”은 KJV에서는 ‘안 좋은 소식’(evil tidings)으로, NIV에서는 ‘고통스러운 말씀’(distressing word)으로, ESV에서는 ‘파멸을 초래하는 말씀’(disastrous word)으로, NRSV에서는 ‘가혹한 말씀’(harsh words)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는 ‘결별 선언’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무사히 시내 산까지 왔습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든 과정이 기적이었습니다. 광야는 강한 민족도 거주할 수 없는 메마르고 거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에는 불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셨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셨습니다. 원수들이 그들을 치려 할 때 그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접촉을 부담스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불안하자 눈에 보이는 신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이방인이 신들을 섬기듯 그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그들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겨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으나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던 하나님께서 같이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주셔서 인도하시겠다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같이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하니 그들은 약속의 땅에 가서 어떻게 그들이 생존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결별 선언으로 충격을 받고 통곡하고 슬퍼하며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가 없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의 인도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은 받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들의 자세를 고쳐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출애굽기 33:5-6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들이 목이 곧은 백성임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그들 가운데 이르면 그들을 진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잠깐 동안이라도”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죄를 발견하고 그들을 진멸할 것 같다는 염려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고 죄 가운데 자라며(시 51:5),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 6:5).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오히려 하나님께서 같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 멸망을 피하게 하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모세를 통해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는 그들이 애굽을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이 준 것입니다. 그들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기 위해 금 귀고리를 헌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장신구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장신구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장신구에는 신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되돌아갔을 때 가족에게 있던 신상과 귀고리를 땅에 묻었습니다(창 35:4). 이를 볼 때 장신구는 우상의 형상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장신구는 애굽 사람들이 준 것으로 우상이 새겨진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많이 돌아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고서는 장신구를 떼어 내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지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결별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기 위한 충격 요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의 마음과 순종의 여부를 보고 결정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부모가 자녀들을 몹시 심하게 야단치고 나서 자녀를 돌이키게 한 후 회복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그의 백성을 돌이키십니다.
회막에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심(33:7-11)
출애굽기 33:7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은 장신구를 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상이 새겨진 애굽 사람들의 장신구를 떼어낸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순종의 표시였습니다. 이에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쳤는데 그 장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장막의 이름을 ‘회막’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만남의 천막(the tent of meeting)’이라는 뜻입니다. KJV에서는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으로 ‘회중의 장소’, ‘집회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만남의 장소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을 위한 장소였습니다. “앙모하다”는 말은 inquire(묻다; NIV), sought(구하다; RSV; NRSV; ESV; NASB95)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그에게 묻고자 하는 자입니다. 진 밖의 회막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께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막은 ‘만남의 장소’로 성막을 짓기 전 임시로 지은 하나님의 거처로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성막이 지어진 후 ‘회막’이라는 명칭은 성막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35:21; 38:8, 30; 39:32, 40; 40:2,6 등).
모세는 문제의 해결의 초점을 ‘하나님을 앙모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진 밖에 회막을 짓고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적인 소원을 유도했습니다. 회막에는 증거궤나 다른 신성한 기구들이 없었고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한 장소도 없었었습니다. 그가 회막을 지은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통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 회막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궁리했습니다. 모세는 먼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장막을 만들어 회막이라 부르고 하나님을 앙모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도 하나님을 앙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수많은 문제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문제를 수습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터지면 여기를 막고, 저기서 문제가 터지면 저기를 막는 방식으로 문제를 쫓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 해결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앙모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문제의 짐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세상의 불뱀이 나를 물려고 돌아다닐 때 불뱀을 피하느라 땅을 바라보지 않고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민 21:9). 예수님은 장대에 높이 달리신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 3:15).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제안했습니다(히 12:2). 예수님은 믿음의 주관자요 완성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킬 때 문제에 휩쓸리지 않게 되고 문제가 우리 삶과 생각을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앙모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회막에 나아와 회막에 임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때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박탈당한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를 앙모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섰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11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장면을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각 자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였습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각기 장막 문”은 NIV와 NRSV에서는 at the entrance of their tent라고 함으로 그들이 사는 장막의 문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모세가 만든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집 멀리서 구름 기둥이 회막에 내린 것을 보고 예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예배하다”는 것은 NRSV에서는 rise and bow down으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일어서고 절했다’는 뜻입니다. 8절에서 모세가 회막에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모세에 대한 존경심의 의미보다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에서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고 엎드려 절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회막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진 바깥 먼 곳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는 이 일정을 습관화했습니다. 그는 텐트를 친 것은 하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막이 완성되기까지 매일 하나님과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성막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진영 밖에 지은 회막은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앙모하던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일정 시간을 비워두고 일상 생활과 떨어져 방해를 받지 않는 일정한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QT(Quiet Time)와 같은 경건의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 제목을 노트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고요한 만남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힘을 줍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며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우선 순위에 두면 다른 부수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리더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실천했을 때 백성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였습니다. 영적인 리더의 자격은 발로 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11). “대면하다”는 말은 face to face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상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십니다(딤전 6:16).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환상이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고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모세의 교제는 친밀한 교제임을 말해줍니다.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친구처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친구에게 어려운 일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기도의 친밀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그와 제자의 관계를 재정립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죄의 장벽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회막에서 진으로 돌아올 때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고 회막을 지켰습니다.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을 지키지 않고 여호수아가 지킨 이유는 이 회막이 성막이 완성되기 전까지 임시 성소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리더로서 우상 숭배를 방조한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 일에서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11절은 여호수아를 가리켜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라고 칭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나이가 40세였으므로 현재 그의 나이는 39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수 14:7).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비교할 때 한 세대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할 다음 세대의 리더였습니다.
“수종자”라는 말은 ‘섬기는 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모세의 수종자로 보이지 않게 뒤에서 모든 궂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병원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인턴과 레지던트의 수련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들은 병원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감당함으로 전문의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처럼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종자”로서의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낮은 곳에 처하면서 백성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요구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다니며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수종자로 바울로부터 배웠습니다. 예수님께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한 백부장의 믿음은 그가 하급 장교로 있었을 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눅 7:7-8). 우리는 여호수아에게서 ‘섬기는 리더십’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섬김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본 마음 자세입니다.
주의 영광을 구한 모세(33:12-23)
출애굽기 33:12-13
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3절에서 중단되었던 모세의 중보 기도의 내용이 12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보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함께 보낼 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함께 보낼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실 자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1). 하나님은 천사를 먼저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분명하지 않아 확신이 서지 않았음을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해오셨던 것처럼 구름 기둥으로 주의 백성을 인도해 주실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을 안내하고 지시하고, 그를 돕고 지원하는 천사나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5절에서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장신구를 떼어 내고 회개한 이후 이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모세가 “함께 보낼 자”를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나머지 여정에 하나님이 친히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름으로도 그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인격적으로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상당한 정도의 친밀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름 하나로 모세의 전인격을 알고 계십니다. “이름으로 알고 있다”는 구절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요 10:14-15).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나의 허물과 약점을 아시고 나를 도우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그의 생명책에 기록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름으로 아신다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가 나를 위한 길을 다 예비해 놓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과정에서 동행하시고 그가 정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의 삶의 최종 종착지를 예비해 놓으시고 그 곳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며 누리게 하실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혼란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철학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깨우쳐 주시고 나의 실존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내가 나를 잘 알려면 내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와 같이 그와 친밀한 대화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나는 그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내가 그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는 말은 you have also found favor in my sight(NIV; ESV; RSV; NRSV; NASB95)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창 6:8). 노아는 세상 사람이 다 육신이 되어 부패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하나님의 눈에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의 삶을 기뻐하시고 그를 홍수 심판 가운데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지자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이름을 위해 출애굽의 지도자로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섬기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신본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은총을 입히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은총을 구합니다. 그것은 주의 길을 그에게 보이시고 그에게 주를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지 않은 것(5절)에 대해 주의 길을 보이시고 주의 계획을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입히셨듯이 주의 백성에게도 은총을 입혀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하나님이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3:14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은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가리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는 히브리 원어로 ‘파네’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 My presence will[shall] go with you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나의 임재(임재의 천사)가 너와 함께 가리라’라는 뜻입니다. 이는 민수기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의 “얼굴”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영원히 멀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모세의 중보의 덕분에 그 거리는 점점 좁혀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에 조금씩 그 뜻을 돌이키시더니 그의 사자를 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할 때 그들을 진멸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3).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 모세는 회막을 짓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백성들도 여호와를 앙모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7). 나머지 백성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서 구름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경외심 가운데 일어섰고 그에 대한 순종의 표시로 엎드려 절했습니다(10).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로 인해 확고하던 마음을 푸시고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중보하는 모세에 대해 은총을 입히셨습니다. 모세가 주의 백성에 대한 은총을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내가 친히 가리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는 My Presence(NIV)로 ‘나의 임재(의 사자)’가 간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자”라고 했다가(2), 그 “사자”가 ‘그의 임재’, 즉 하나님 자신이 되셨습니다(14). 여기서 ‘그의 임재’는 주의 사자로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63:9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출애굽의 구원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여기서 “자기 앞의 사자”는 the angel of his presence로 ‘그의 임재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그의 임재의 천사’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친히 출애굽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3:2).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이신 사자(the angel that is Yahweh)’, 또는 ‘여호와 천사(the Angel Yahweh)’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피조물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에도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20).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한 “사자”는 KJV을 보면 an Angel로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제 2위 하나님으로 구약 시대에 사역하신 그리스도임을 말해줍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역사를 실행하신 분은 하나님의 사자, 즉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셔서 이 큰 일을 이루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임재의 사자가 친히 갈 것이라고 하신 후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바로와 10라운드의 혈전을 치렀고 20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그가 인도한 백성은 노예 백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금광석과 같은 거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이 험하면 힘들다고 불평했고 물이 없어 불평하고 배가 고파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으로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교도들처럼 날뛰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함을 받았지만 그들의 내면과 인격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진멸의 위기에 있는 그들을 위해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대가로 그들을 속죄해 줄 것을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서서히 그의 얼굴을 돌리시며 그의 백성을 향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큰 백성을 감당하느라 지친 모세에게 안식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사자가 친히 가심으로(14절) 이제 모세는 큰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3:15-16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아뢰었습니다(15). “주께서”라는 말은 your presence로, 이 구절은 ’당신의 임재가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가 친히 가지 않으시면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의 말은 대담한 기도입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임재가 함께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백성과 함께 친히 가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면서 모세에 대한 언급은 하셨지만 그의 백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 불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담대하게도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의 요구는 무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형성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기도하는 호소의 언어였습니다.
모세는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16). 모세는 여기서 “나와 주의 백성”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모세는 혼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어서 수사적 표현으로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이 구절에서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백성”이라고 언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동안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천하 만민 중에서 구별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내 백성”은 18번이나 언급되어 나옵니다(3:7,10; 5:1; 6:7; 7:4,16; 8:1,8,20,21,22,23; 9:1,13,17; 10:3,4; 22:25).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목적도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7:16; 8:1,20; 9:1,13; 10:3). 모세는 주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행하심이 그들을 천하 만민 중에서 구별하시는 증거가 됨을 거듭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선택된 백성과 우상을 섬기는 나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15절에서 “우리”로 시작했지만 16절에서는 “나와 주의 백성”이라고 함으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이라고 호소합니다. 그는 자신과 죄와 허물 투성이인 이스라엘 백성을 동일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목적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6). 이 약속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고자 하신 계획으로 발전합니다(사 42:6).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메시야를 보내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출애굽기 33:17-18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질문에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모세의 간청을 다 받아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께서 이름으로도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2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름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렇다고 대답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답해 주시니 모세는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기뻐하셨기에 그의 간구도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은총을 입은 모세는 이에 기초하여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간청하였습니다. 13절에서 모세는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간청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주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 자체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또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그의 찬란한 빛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구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와 긍휼이었습니다(19). 그가 영광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관련된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구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의 동행이었습니다. 모세가 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주로 그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행위였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존재의 본질을 보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문장의 형태는 히브리어에서 명령형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명령형으로 말할 만큼 담대한 간구를 하였습니다. 이는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감히 요구한 것을 상기시킵니다(요 14:8).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섭리, 그의 법, 그의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 영광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하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 “그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7:5,17; 14:4,18; 16:12).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확인과 친밀한 관계의 확인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더 많은 것을 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갈망을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커집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열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전체 기도 제목과 개인적인 축복을 구하지만,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세의 열망을 갖고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기도는 “나를 주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데려다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옛적에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통해 그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아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만유의 상속자요, 창조주시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요,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히 1:2-3). 오늘날 우리에게 ‘주의 영광’은 그의 나타나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입니다(요일 3:2).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은 장차 예수님과 재림과 함께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광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9-23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 모든 선한 것”을 보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그의 선하심과 연관시키셨습니다. “선”은 하나님의 많은 속성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선함은 하나님의 본성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호세아 8:3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이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뜻으로 “선”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말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하나님의 공의, 능력, 죄에 대한 진노 등 여러 가지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의 한 측면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공의와 권능과 진노까지도 그분의 선하심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구직).
하나님은 그의 모든 선한 것을 그의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가게 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지나가게 하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본성, 성품, 인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에는 불변성, 영원성과 같은 특별한 특성을 반영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백성에게 계시된 그의 신성한 속성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속성은 한마디로 그의 선하심(goodness)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선하심은 궁극적으로 은혜와 긍휼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됩니다.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에서 “은혜”는 히브리 원어로 ‘하난’인데, 이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받을 자격도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단어는 받는 사람보다는 베푸는 측을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단어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행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죄 사함과 구원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또한 원수나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진멸해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셔서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17). 그들은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입니다.
이것과 평행을 이루는 단어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히브리 원어로 ‘라함’인데, 이는 ‘자비를 베풀라’,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젖먹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 이사야 49:15은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긍휼히 여기다”가 바로 ‘라함’입니다. 또한 “자비”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시편 103:13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여기서 “긍휼”이라는 단어도 ‘라함’입니다. ‘라함’은 이처럼 자녀와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강한 결속의 개념에 무조건적 사랑의 개념을 포함한 것입니다.
19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방법과 뜻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 자”와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긍휼의 대상이 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격은 단 1%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노아가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구원과 희망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을 받은 그들이 이 언약을 파기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진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 이에 모세는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13). 하나님은 이에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17). “이 일도 내가 하리니”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총을 입히셨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총을 입히시겠다는 응답입니다(17). 이에 대한 확신을 구하자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이 지나가게 하겠다고 하셨고 여호와의 이름을 그의 앞에 선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19).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내용은 바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롬 9:15). 바울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이 있다고 고백했는데 그것은 그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의 배역 때문이었습니다(롬 9:16).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이루어지는 구원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의 풍성한 구원 역사가 있음을 깨달았고 이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그들도 또한 충만한 구원 역사가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롬 11:11-12). 바울은 또한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함으로 이스라엘이 받은 긍휼이 이방인에게도 미쳤음을 강조하였습니다(롬 11:31).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이며 그의 주권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3:20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허락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그의 영광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자욱한 연기와 지진과 불과 그의 음성으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출 19:16-19). 애굽에서는 열 가지 재앙으로,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을 내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가시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완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빌립은 대담하게도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심으로 그의 영적인 무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요 14:8-9).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시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정의했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우리는 육체의 장막에 거하고 있습니다(고후 5:1).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을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의 발 아래의 청옥을 편 듯한 모습이었습니다(출 24:10). 이사야도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것은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과 그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모시고 섰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사 6:1-2).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광채를 볼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속성, 즉 선하심, 불변성, 영원성의 충만함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경을 통해 영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요 3:13).
출애굽기 33:21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계신 곳 곁에 한 장소인 반석 위에 서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곁에 한 장소”는 하나님이 계시던 시내 산 정상을 가리킵니다. 시내 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 곳에 서게 하심으로 그 곳에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고전 10:4). 우리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요 1:18).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반석 틈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 하나님은 모세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의 손으로 그를 덮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손으로 덮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이는 모세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반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의해 소멸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반석의 틈으로 들어오는 광채 또한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 앞에 머물지 못하고 모세를 지나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잠깐 스쳤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손과 반석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그의 영광은 강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보호되고 그분이 제공하는 도피의 반석에 숨겨질 것입니다. “반석 틈”은 모세를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입니다. 파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반석 틈”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 참 능력의 주시로다 /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 내 영혼을 숨기시네 /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 나 피곤치 아니하며 /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 큰 바위에 숨기시고 / 주 손으로 덮으시네”(찬송가 391장)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모세는 그의 앞서 지나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옷자락의 영광을 살짝 보았고, 감동을 받아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애통했습니다(사 6:5). 요한은 환상 중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죽은 사람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계 1:1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는데 극히 작은 빛이었는데 그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행 9:3,8).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볼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21-23절의 표현은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이런 의인화된 표현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의 섬세한 돌보심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그의 등을 볼 것이지만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가 하나님의 어렴풋한 임재를 보는 것이지만 정확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위 틈에 있다는 것은 바위에 가려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해 제한되고 숨겨집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제한하셨는데 이는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는 진노의 불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반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의해 소멸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반석의 틈으로 들어오는 광채 또한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십니다. 그 사이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십니다. 그 후 손을 거두었는데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등은 영광의 빛이 지나가고 난 후의 흔적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은 형상에 기초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의인화된 표현을 통해 전달됩니다. 바위 틈은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과 싸움으로 탈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가라고 지시하신 곳이었습니다(왕상 19:9). 하나님은 거기서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고 엘리야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등을 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각 사람에게 맞게 그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손을 떼시면 하나님의 영광의 “잔광”을 볼 것입니다. “잔광”으로 보여진 하나님의 등은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마저 강력하여 모세의 얼굴에서 빛을 내게 하였고 그 광채가 너무 눈이 부셔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습니다(34:35). 모세가 본 잔광은 그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이고 모호한 윤곽이었습니다. 모세가 경험한 영광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장막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광을 보는 데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예수님의 영광의 재림으로 인해 나타날 영광 가운데에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볼 것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후 3:18).
두 번째 돌판(34:1-9)
출애굽기 34: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하나님께서는 33장에서 모세의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이스라엘과 화해를 암시하셨습니다. 34장에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들과 언약을 다시 맺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복의 암시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돌판 위에 처음 판에 새겼던 말을 그대로 그 판에 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돌판을 깨뜨린 것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범죄를 상기시킨 것입니다. 언약의 갱신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전에 하나님이 첫 언약을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친히 돌판을 만드시고 그 위에 그의 말씀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가 그 돌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를 암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의 판에 새롭게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돌판을 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이지만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이 언약을 버리고 범죄하면 돌판이 깨지는 것과 같이 언약이 파기된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를 힘입어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그들을 성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과의 성약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축복이 다시 한 번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들과의 언약의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로운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2-3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쓸 돌판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아침까지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돌판을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급하게 서두드도록 하셨습니다. 2절에는 “아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고대 시대에는 모든 일을 해가 뜨기 전부터 준비하여 해가 뜬 후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지방은 낮에는 뜨거워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선한 기운이 있는 아침에 출발해야 산 정상에 정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히브리 원어로 ‘자리를 정하다, 세우다, 삼다’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정하여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에 십계명을 주실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에서 임하셨던 것처럼 임하실 것입니다.
아침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일상을 시작하면 수많은 해야 할 일과 염려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됩니다. 낮에는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아침에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 하였습니다(시 5:3). 그는 아침에 하는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시 88:13). 그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느꼈고 그의 영혼이 만족하였으며 아침 시간의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살아갔습니다(시 90: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피의 언약을 세울 때 아론과 그의 두 아들과 이스라엘 장로 70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였습니다(24:2).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그의 발 아래에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였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모세와 거의 정상까지 동행했으며(24:13), 모세가 머무는 동안 내내 산의 일부에 머물렀습니다(32:17).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양과 소도 시내 산 앞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 정상에서 율법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산 기슭에 서 있었습니다(19:17; 24:4).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 후 언약을 갱신할 때 하나님은 더 엄격하게 백성을 경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이 그 어떤 것으로도 위협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백성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생각하셨습니다. 특별히 양과 소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방목지를 따라 방황할 가능성이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모든 호기심을 억제하고 백성의 마음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4:4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모세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간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창22:3). 모세가 두 돌판을 만드는 데 시간이 촉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백성 중 숙련된 석공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돌판은 증거궤 안에 들어갈 정도로 크기 않고 무겁지 않았을 것입니다(신 10:1).
출애굽기 34:5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하나님은 모세의 이전 두 가지 간청에 은혜롭게 응답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열망하였습니다(33:18). 이에 하나님은 33:19에서 약속하신 대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6절) 응답하셨습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입게 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에서 강림하셔서 그와 함께 거기 서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실 때처럼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을 때와 같았습니다(19:6, 16). 모세가 장소를 회막에서 시내 산으로 옮겼을 때 구름도 시내 산으로 옮겨갔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에 항상 따랐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가시적인 현현이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고 개인적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표준 방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인격적 존재가 그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구름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인 반면 하나님의 모습을 가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현현의 도구를 구름으로 택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경외심 없는 호기심과 오만을 경계하셔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고 모세와 함께 서실 때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는 것으로 6-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 즉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외적 열매에 따라 신앙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믿는 자의 삶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삶입니다(시 105:1).
가인의 후손들이 번성하자 인간의 죄도 번성하였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세속 도시를 건설하고 목축업, 음악 및 예술, 청동기 및 철기 문명 등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26). 이것은 사람들이 모여 공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죄가 번성한 사회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공개적으로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았습니다(창 12:28; 13:4; 21:33). 이삭도 브엘세바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26:25).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감사와 예배와 간구로 그분께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대상 16:8; 시 105:1).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자신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구원의 기본 전제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행 2:21).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친숙함의 표시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배의 한 형태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그 분을 의존하고 기댄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그의 이름에만 죄 용서와 구원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역으로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건지시고 보호하십니다(사 45:4; 시 91:14 ).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먼저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6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모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선포하셨습니다. 6-7절은 여호와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33:19). 하나님께서는 먼저 강렬한 영광을 보여주고자 하셨지만 그 영광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틈 사이에 숨기셨습니다. 바위가 그의 강렬한 영광을 가리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지나갈 때 여호와의 손이 그를 덮었습니다(33:22). 모세는 바위 틈에서 살짝 비친 하나님의 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등은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등은 영광의 빛이 지나가고 난 후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잔광조차도 너무 강렬하여 그 빛이 모세의 얼굴에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강렬한 빛을 보자 그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34:29-35).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은 그 후에 선포된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은 가시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나타내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도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모세가 섰던 그 산인 호렙 산에 서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차례로 지나갔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가운데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왕상 19:11-12). 엘리야가 찾던 영광은 하나님의 강렬한 영광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이 담고 있는 다섯 가지 속성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여호와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이름의 의미를 확실히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그의 이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존재하게 한 원인자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창조된 것의 창조자이고 세상을 유지하시는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고 역사 가운데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자”는 위대한 자존자로 그의 권능과 완전성과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이름이 그가 선택한 백성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백성이 필요 없다면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다섯 가지 속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면 그 분께 대한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며 변덕스럽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시고 우리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속성과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속성은 결코 부조화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인자와 진실의 성품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성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의 조화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자비”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비는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내적 연민입니다. 자비는 자녀의 연약함과 필요를 이해하고 자녀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 없이 돌보며 키우시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성품입니다. 자비는 인간의 선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아닙니다. 인간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동정심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은혜롭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와 선한 행위와 무관한 그의 호의와 축복을 말합니다. 은혜는 그가 창조하신 사람과 만물에게 베푸시는 과분하게 친절한 행동입니다. 은혜롭다는 것은 친절한 것, 애정을 나타내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은혜롭다”라는 표현이 13번이 나오는데 그 중 12번은 하나님께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움은 인간을 향한 그의 성품으로 과분한 호의와 친절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빚을 졌기 때문에 빚은 갚은 의미의 호의가 아닌, 빚은 갚을 일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그의 분노를 자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그를 거역할 때 그에 대한 심판을 즉시 이행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잊어버리거나 묻어두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한 분노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은 완고하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오래 참으신다”는 것은 KJV를 보면 longsuffering으로 ‘오래 동안 고통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느라 고통하십니다. 이는 말썽 피우는 자녀를 둔 부모가 마음 아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정의의 집행을 미루시고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죄인이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납하신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노를 도발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림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힘들어도 투덜거리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 섞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거역하고 그의 노를 도발하는 말을 내뱉고 함부로 행동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누르시고 우리에게 용서의 기회를 제안하시는 은총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인자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인자는 히브리 원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45번이 나옵니다. 자비가 13번, 은혜롭다가 13번, “노하기를 더디하시다”가 15번, “진실”이 127번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자(헤세드)’는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 단어이고 그를 가장 특징지우는 단어입니다. ‘헤세드’는 언약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으로 우리가 신뢰하고 충성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리 변덕스럽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으시며 그가 하신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 항상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약속에 완전히 충실하십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진실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진실은 truth(진리)와 faithfulness(신실함)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생사 문제 또는 영생 문제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4:7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무한하신 하나님만이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고 무한하고 풍성한 인자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비의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해서 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건 단지 하나의 실수야”, “사람이 연약해서 그럴수도 있지.”라고 가볍게 넘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범위가 무한하기 때문에 은혜 속에 익숙한 우리는 죄의 결과가 그렇게 큰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he does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NIV)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 벌하지 않은 상태로 놔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도록 하십니다.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말씀은 후손들이 그들 자신이 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보응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가 세대를 거쳐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후손들이 지은 그들의 죄에 대해 마땅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인자는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에게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여 풍성하게 임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6). 하나님은 우리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희생시켜 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셨습니다.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한 성품은 새 언약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법을 사람의 마음에 두실 것과 이를 영접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받는 축복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음으로 그의 인자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렘 31:33-34).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행을 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지만 죄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죄의 상처로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독생자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사 53:5). 예수님께서 대신 찔리시고 상하심으로 우리의 치료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치료하는 광선으로 그 빛을 받은 자들은 죄의 상처를 치료함받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며 기뻐합니다(말 4:2). 하나님의 인자가 천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그의 인자는 변함이 없고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즉 헤세드는 하나님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위와 상황에 따라 그의 약속의 성취의 크기와 분량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비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출애굽기 34:8-9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에 나타난 속성을 통해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찼으나 그의 이름에 나타난 영광을 보자 경외심과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겸손한 경외심으로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본래의 속성을 발견하고 발견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이 선언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거룩한 복종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초로 담대히 하나님께 세 가지 요구를 합니다(9). 그가 이렇게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주께 은혜를 입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33:12-13). 우리도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히 4:16). 모세의 중보 기도는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32:11-13; 32:31-32; 33:12-13). 그의 기도 제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는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추상적이고 번드르한 기도보다는 그의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아주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는 “아도나이”로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에 초점을 맞춘 호칭입니다. “아도나이”는 출애굽기에서 7번 사용되었습니다(4:10; 4:13; 5:22; 15:17; 23:17; 34:23). 그는 하나님을 “주”라고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유권과 절대적인 다스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약속에 기초한 기도였습니다. 그 약속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는 것입니다(33:14). 33:14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라고 했을 뿐 “나의 백성과 친히 가리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것도 그의 짐을 덜어 주겠다는 것인데 모세에게 그것은 불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고 구체적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의 약속에 기초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기초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의 확신을 줍니다.
모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그의 백성의 악과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라는 구절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행 7:51).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멍에를 매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는 소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호세아 4:16에서는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 5:5에서는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모세오경에서 6번이 나옵니다(32:9; 33:3,5; 신9:6,13). 이스라엘은 끌어당겨도 이에 응하지 않은 소나 말처럼 완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을 뻣뻣한 소를 숭배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완고한 백성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스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이 없어 불평했고(15:23-25), 먹을 것에 대해 불평했습니다(16:2-3). 그들은 광야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었는데 이는 여호와를 시험하는 행동이었습니다(17:2).
이어서 모세는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기꺼이 자신을 반역하는 사람들과 동일시하였습니다. 모세는 32:32에서도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라고 죄 사함을 간구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하다는 것은 히브리 원어로 ‘나사’이고 영어로는 forgive로 사람 사이에 서로 사과하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히브리어로 ‘살라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로는 pardon인데 이는 ‘해방시키다, 풀어주다, 사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큰 죄에 대한 형벌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살라크’는 사람이 서로를 용서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주기도문에도 나와 있듯 우리가 늘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죄인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병자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오신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까? 그는 죄인인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모세도 “우리의 악과 죄”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의 은혜와 더불어 죄책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모세의 기도 제목은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업”은 inheritance로 ‘상속하다, 소유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업은 상속된다는 의미에서 영구적인 소유를 말합니다. 기업은 양도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소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셨습다(32:13).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듯이 이스라엘을 영원한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기업으로 삼아달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고자 하실 때 그들을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9:5). 여기서 “내 소유”라는 것은 “기업”이라는 말과 혼용해서 사용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소유” 또는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시 28:9; 33:12; 94:14; 135:4; 렘 10:16; 20:26; 벧전 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소유로 삼으신 목적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뻣뻣한 백성으로 이런 은혜를 감당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담대하게 이스라엘을 주의 영원한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기도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9-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로운 기업으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복음의 말씀을 전파함으로 뭇 백성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요 그가 아끼시는 자녀들입니다(말 3:17).
다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34:10-28)
출애굽기 34:10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는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 언약은 19:4-6의 언약을 갱신한 언약입니다. 24:8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피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금 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언약이 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네 차례에 걸친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시내 산 언약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이 언약은 새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갱신입니다. 왜냐하면 첫 판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새기기 때문입니다(34:1). 이 언약은 그들의 우상 숭배로 일시적인 무효 상태로 있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언약이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회복을 위해 자비를 베푸시고 오래 참으셨고 하나님은 언약 회복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셨습니다(NAC).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는 현재시제로 시내 산 첫 번 언약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고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당사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여호와”로 선포하셨습니다(6).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기업”이 된 특별한 백성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9). 하나님은 이에 그들에게 행하실 놀라운 일을 약속하심으로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아주셨습니다(10).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은 두려운 것이 될 것입니다(10).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실 것입니다(11). 이렇게 함으로 그들의 지경을 넓힐 것이며 아무도 그들이 차지한 땅을 탐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심으로 언약 백성을 향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간 생활할 것입니다. 그 사이 하나님은 처음과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신 8:4).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요단 강물을 말리실 것이고(수 3:16-17),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릴 것입니다(수 6:20). 하나님은 우박으로 아모리 족속의 다섯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태양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수 10:11-12). 이런 기적은 그 어느 땅에서도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우상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의 기업으로 삼으시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사 42:6).
출애굽기 34:11-12
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가나안 여섯 족속들을 쫓아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예언이었습니다(창 15:18-21). 뿐만 아니라 모세를 부르실 때 그에게 보여주신 계획었고(3:8, 17), 시내 산에서 언약식을 세우기 전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23:2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실 때 그들을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가득찰 때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약속의 성취이지만 가나안 족속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그들의 죄로 깨진 언약 관계를 갱신하시고 나서 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11-17절에 걸쳐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과 언약을 세우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경고는 출애굽기 23:32-33에 나온 내용을 반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23:32에서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과 언약하는 것은 곧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과의 언약은 우상 숭배로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외에 어떤 종류의 언약도 맺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축복과 번영을 위해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언약을 맺지 않는 것은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섞히고 얽히면 오염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반복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땅으로 다른 민족이 살 수 없는 배타적인 곳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세계의 질서를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만일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올무”라는 용어를 사용하셔서 우상 숭배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음과 일단 올무에 걸리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take care로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집중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올무에 걸려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협정, 우상 숭배 의식에 단순한 참여, 혼인 관계 등 이 모든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의 자유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를 어기고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그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또 다시 노예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그들을 위해 공물을 바쳐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약탈을 당하고 좋은 땅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권리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벗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세상과 벗하는 것이 당장 유익을 줄 것 같지만 파멸과 재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세상과 벗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고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며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과 같습니다(신 32:32-33). 그것들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와 같습니다(벧전2:8).
우리는 세속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은 그들과의 적대적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악한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롬 12:12). 세상의 악한 풍조 중 대표적인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입니다. 물질주의는 돈과 관계된 것이고 쾌락주의는 주로 성적 타락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질의 청지기로 삼으셨는데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탐욕을 부립니다. 돈 때문에 살인을 하기도 하고 불법적 거래를 하기도 합니다. 물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골 3:5). 성적 타락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족이라는 제도를 무력화시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회적 문제와 개인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출애굽기 34:13-14
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꼬투리가 되는 어떤 형태의 상이나 장신구를 갖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상 숭배를 유인하는 것들은 “헐고”, “깨뜨리고”, “찍어야” 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제거를 말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백성이 그들의 신들을 섬겼을 때 사용했던 제단과 주상과 기둥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문화재 보호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교도들과의 평화를 이유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 없이 그들의 길을 따르기 쉽습니다. 그것은 문화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초대하니까 이스라엘은 예의상 응하는 형태로 우상 숭배가 시작됩니다(15). 이래서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초대할 때 처음엔 어색할지 몰라도 익숙해지다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언약으로 자신을 묶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 땅 가운데 평안히 거하려고 사회적, 정치적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굳이 날을 세우며 대립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사 시대, 요시야 시대, 에스겔 시대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된 상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매춘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충실을 묘사하는 은유적 방법입니다. 매춘부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여러 사람에게 자기의 몸을 파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에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교 숭배의 특징은 흥청거리며 열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면서 앉아서 먹고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32:6).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우상 숭배의 잔치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우상 숭배로 직결되었습니다(민 25:1-2). 그들의 파티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유혹의 꼬투리가 될만한 것들, 즉 그들의 제단과 주상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지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 근절에 사용된 세 가지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헐다”, “깨뜨리다”, “찍다”입니다. 이 동사들은 우상 숭배의 제단과 그 상들을 파괴하는 데 가장 자주 사용됩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오늘날 우상은 사상이나 이념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10:4). “견고한 진”은 stronghold로 ‘성채’를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배제한 모든 사상과 이념을 우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사상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반대하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를 “무너뜨린다”는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우상은 무너뜨리기 힘든 ‘성채’와 같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사상은 오늘날의 우상입니다. 우리는 인종과 국적, 성별과 나이, 신분과 출신, 외모와 성적 지향 등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이상주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 간 대화와 타협도 포함됩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길은 다양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혼합 사상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이 시대의 우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싸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경고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여호와는 질투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질투”라고 이름한 구절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강력하게 금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질투”라고 하셨습니다. 질투는 우리가 자주 언급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이 갖고 있는 유치한 감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투는 죄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그의 거룩한 성품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결혼 언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 숭배를 간음이라고 비유합니다. 배우자의 부정은 이로 인해 상처 입은 상대방의 질투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질투는 나의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갖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마땅한 것을 빼앗겼을 때 질투하십니다. 하나님께는 그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아무런 능력도 없고 가치도 없고 거짓된 것에 돌아갈 때 질투하십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의 남편와 시시덕거리면 남편이 질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남편만이 그의 아내와 시시덕거릴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투는 죄가 아니라 정당하고 적절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를 빼앗길 때 불처럼 질투하시는 것은 선하고 합당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34:16-17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의 초청으로 우상 숭배 의식에 참여하면 그 제물을 같이 먹게 될 것입니다. 제물을 나누는 것은 그들의 신을 섬기고 이교도와 벗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교도와의 혼인 관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로 막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혼인 관계가 그들을 얽어매는 “올무”가 되어 그들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12). 다른 민족과 섞여 같이 살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이 넘게 그들과 섞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우상 숭배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은 섞여 있는 상태에서 그의 구속 역사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열 재앙으로 애굽과 이스라엘 사람을 분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약 백성으로 삼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의미를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7:16; 8:1,20; 9:1,13; 10:3).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시키심으로 그들을 애굽 사람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시키셨으나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애굽의 우상 숭배의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그들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애굽에서 배웠던 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를 통해 어렵게 그들과 언약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백성과의 혼인 관계를 금하심으로 언약 관계를 무력화시키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고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젊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백성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렸던 솔로몬도 혼인 관계 때문에 이스라엘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고 그 분단의 비극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6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방인의 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아내가 될 경우 그 딸들이 우상을 가지고 들어와 남편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여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담이 하와의 유혹에 연약하여 같이 범죄하였듯이,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면서 그들의 유혹에 넘어졌듯이,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약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시킬 때 여호와 신앙을 가진 여자가 이교도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16절에서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다”는 말은 whore after their gods(ESV)로 ‘그들의 신과 매춘을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이유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되기 때문입니다(사 54:5, 62:5, 렘 2:2, 3:1, 14, 31:32, 겔 16:1-14, 23:5, 호 2:7, 19-20).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내인 이스라엘과 이미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혼인 관계를 저버린 영적인 간음입니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 또 다른 배경은 실제적으로 우상 숭배 의식 후에는 성적 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방 신들의 신전에는 여사제가 매춘부의 역할을 하여 종교 의식 후에 그들과 행음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음행을 다산을 위한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을 가리켜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17절은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라는 계명을 축약하여 반복한 것입니다.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라고 한 것은 그들이 금 송아지를 만든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32:4). 하나님은 그들에게 금 송아지 사건을 떠올리며 강조해서 경고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송아지를 섬긴 것을 모방하였고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이것을 모방해서 금 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어 대대로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왕상 18:28-29).
출애굽기 34: 18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무교절에 관한 명령은 12:14-20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무교절 전날은 첫째 달인 아빕월 14일이고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을 지켜야 합니다. 태양력으로는 3-4월로 유대에서는 보리 수확의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기간에 난 첫 열매를 여호와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번갈아 사용하였습니다(눅22:1). 무교절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날에는 죄의 상징인 모든 누룩을 제거하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무교절은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무교절에 관한 말씀을 통하여 내가 어떤 가운데에서 구원을 받았는가를 기억하고 기념해야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속량, 곧 죄 사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13-1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한 것은 우리가 흑암 권세 하에 있는 상태를 상징하며, 출애굽은 우리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긴 것을 상징합니다. 속량은 노예를 값을 주고 해방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을 희생의 피를 바름으로 장자 재앙을 면하였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요 1:29).
출애굽기 34:19-20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19-20절은 13: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를 다소 확장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동물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처음 난 수컷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합니다. 나귀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꼭 필요한 교통 수단이지만 부정한 짐승입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른 동물처럼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었고 그의 피는 거룩한 제단에 뿌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난 나귀 새끼는 목을 부러뜨려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나귀를 아낄 수 있었습니다.
이 대속의 원리가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이 죄로 인해 부정하게 되었고 죄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이 당할 운명은 목을 부러뜨려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인 나귀를 어린 양으로 대속한다는 것은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택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민 18:6).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273명이 더 많았으므로 속전으로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내게 하셨습니다(민 3:46-47).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장자의 대속과 빈 손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13:14-16에서는 모세가 처음 난 것에 대한 대속에 대한 의미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바로가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을 희생제물로 드려 이스라엘의 장자를 다 대속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그들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로 삼아야 합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장차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실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상기하기 위한 이런 상징적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은혜를 상기하기 위해 성만찬을 행합니다. 성만찬은 세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의식입니다. 성만찬은 상징이나 기념 그 이상이며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시각적으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우리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무언가를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성만찬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QT와 기도와 찬양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배와 헌신의 원칙입니다. 빈 손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헌신의 자세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단순히 예배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 드릴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선물과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 무언가를 드리거나 헌신하기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주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특별히 구속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그에게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명기 16:16-17에서는 세 번의 절기에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각자 받은 복을 따라 그 힘이 닿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각 절기에는 추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교절 3-4월로 보리를 수확하고, 칠칠절은 무교절 이후 50일이 되는 시기로 밀 수확을 합니다. 초막절은 9-10월로 올리브와 포도 등을 수확하여 추수 감사절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드리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은 것까지 얻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햇빛과 공기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바람과 적당한 온도를 주시고 땅을 비옥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만의 수고와 노력을 주장합니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것을 가져간다는 생각에 불만을 갖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의 몫까지 몽땅 차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알고 그 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34:23-24
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절기 때마다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합니다. “남자”라고 특정한 이유는 남자가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한 장소에서 모일 때 현실적으로 국가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축제를 벌이는 동안 주변 나라의 침략할 때 그들은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하나님 앞에 보이면 여자와 아이들만 남게 되는데 그들을 보호할 자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만 참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남자라고 하심으로 믿음으로 정해진 장소로 성회로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대로 이방 나라들을 쫒아내고 그들의 지경을 넓히실 것입니다. 그들이 매년 세 번씩 여호와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그 땅을 탐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그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풍성하게 축복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킬 때 하나님은 그들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 그들이 가는 곳, 그들이 만지는 곳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들의 가축들이 번성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때마다 비를 내리시고 농사가 잘 되게 하실 것이고 그들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신 28:1-13).
출애굽기 34:25
25 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유교병은 누룩을 넣어 부풀린 빵입니다. 누룩은 부패와 악의 상징입니다(마 16:6). 그러므로 하나님께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의 피를 드리는 것은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죄를 속할 능력이 있습니다(레 17:11). 그러나 이교도들은 피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피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해서 피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창 9:4). 그러나 유교병을 제물로 드리는 예외 규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화목 제물을 드릴 때입니다. 하나님은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예물로 드리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레 7:13).
출애굽기 34:26
26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에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처음 익은 것”은 처음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처음 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약1:17). 우리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때 다른 것에 먼저 지출되지 않도록 먼저 하나님의 것을 떼어 놓아야 합니다. 만일 급한 것을 먼저 지출하고 나중에 드리려고 할 때 아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득은 늘 빠듯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약해서 지출을 최대한 줄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빠듯한 수입에서 필요한 것을 지출하고 나중에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 소득의 십일조의 분량을 드리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런 아까운 생각이 들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것을 떼어 놓는 것이 현명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우리를 축복하시고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민 11:23).
하나님은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요리하지 말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신명기 14:21에도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축의 번식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하나의 미신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미의 젖이 새끼를 건강하게 자라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축이 잘 될 것이라는 이런 미신적인 습관에 강한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미신적인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이교적 요소를 배제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4:27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32장을 보면 모세가 산에서 40일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기록하신 두 돌판을 받아 갖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들이 금 송아지 앞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고 대노하여 언약이 새겨진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이는 언약의 파기를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언약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라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34:6-7).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기록하도록 하심으로 영구적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언약을 갱신하시고 회복하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 뿐만 아니라 언약의 모든 말씀을 기록해야 합니다. 이는 25-31장에서 하나님이 전하도록 하신 말씀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갱신된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구속력이 있고 엄숙하며 친밀한 계약이었습니다. “언약을 맺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cut a covenant(언약을 자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절단된 고기 조각 사이로 통과함으로 계약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만일 지키지 않으면 쪼갠 고기와 같이 될 것이다라는 맹세입니다. 고대인들은 계약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죽음으로의 행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언약을 맺으면 죽음으로 언약을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맹세의 표시를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맺은 언약도 피의 언약으로 엄숙하고 구속력이 있습니다. 피 흘림은 언약의 헌신의 강도와 엄숙함을 나타냅니다(레17:11).
출애굽기 34:28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여호와와 함께 40일 동안 시내 산에 머물면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였습니다. 모세는 첫 번째 돌판을 받을 때도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24:18). 신명기를 보면 모세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 기도를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신 9:18) 예수님도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이 물 없이는 40일을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백히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주어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소문자 he로 되어 있어 독자가 모세가 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증거판을 썼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손가락으로 기록했고(31:18), 이스라엘의 범죄 후 언약 관계를 회복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1). 개역개정 번역은 영어 번역의 불분명한 he를 “여호와께서는”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34:29-35)
출애굽기 34:29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40일의 금식 기도를 마치고 증거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를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중보자로서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재확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게 하심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재확인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얼굴 피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보다 더 큽니다. 그것은 독생자의 영광입니다(요 1:14). 독생자를 믿는 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광을 받았습니다(롬 8:9; 고후 3:17-18).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고 하심으로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선지자들보다 더 큰 영광을 보고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마 11:11). 그리스도를 아는 영광은 그 어떤 영광보다 큽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5-18).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함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나왔지만 모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빛나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육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심을 받는 삶은 자유롭고 내면에 그의 형상이 조각되어 변화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더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알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앞으로 지나시면서 자신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인자와 진실을 더욱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영광을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요 1:14). 그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이어 그가 보았고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요일 1:1-3). 독생자의 영광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에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믿는 자의 내면에 내주하시는 그의 영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롬 8:9; 요 14:16).
출애굽기 34:30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난 것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은 단순한 강렬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광채를 보고 눈이 멀었다거나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가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원문에는 “모세의 얼굴 피부” 앞에 “보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모세와 같은 빛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광채가 나다”라는 말은 원어를 보면 ‘’뿔이 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얼굴 모양의 흰 빛이라기보다는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다면 그들이 보았을 때 죽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통해 그에게서 반사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그들을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시내 산을 덮은 영광의 구름을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19:16; 24:16-17).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은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었습니다(14:25).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를 보았을 때 그들 내면의 죄에 대한 기억으로 감히 쳐다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모세에 대해 함부로 말했습니다(32:1).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무시한 모세의 권위를 세우시고 그를 두려워하도록 그의 얼굴에 광채를 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4:31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모세에게서 도망가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오고”는 히브리어로 ‘돌아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피해 도망가다가 모세가 부르자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광채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과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그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다가가실 것을 약속한 것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회복하셨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출애굽기 34:32-33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올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 즉 그들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신 말씀을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난 후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위협이 없었음에도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빛나는 광채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모세가 하는 말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을 보고 그가 선포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거나 얼굴을 숙인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고 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이는 강렬한 빛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약함을 배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일을 벗은 얼굴은 심리적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였고 불이 났으며 연기가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으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습니다(19:16-19).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가면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호기심 때문에 산에 오르려 한다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19:21).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20:19).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 두려움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강렬한 빛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도록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바울은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없어질 것”은 옛 언약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주셨음에도 옛 언약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을 가리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고후 3:14). 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 그 뜻이 아닌데 수건이 그 마음을 덮어 완고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돌이키면 그 수건은 벗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가려졌던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또한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후 3:14-18).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의 잔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영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않을 때 그 영광이 시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선포하는 모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일시적으로 광채가 나게 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직분은 매우 영광스럽지만 새 언약의 직분을 맡은 신자들은 더욱더 영광스럽습니다. 신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으로 변화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맡은 새 언약의 직분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직분으로 모세의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 직분입니다(고후 3:6).
출애굽기 34:34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그가 회막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3:7,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이라는 구절을 보면 그 얼굴의 영광이 시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있을 때 광채가 재충전되어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와의 만남은 친밀한 대면의 만남이었지만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은 거리를 둔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예배로 화답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중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필요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와 같이 특별한 사람만이 대면하여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가나 하나님과 친밀한 대면의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죄의 장벽이 없어짐으로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 어디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이제는 우리가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만남은 모세보다 더 친밀한 만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찬송가를 펴서 노래하면서 바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영광이 모세가 누렸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것입니다.
출애굽기 34:35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얼굴을 광채를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그가 선언한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광채는 메신저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할 때 수건을 벗었고, 마치고 난 후에 수건을 다시 썼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너희 빛을 비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빛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우리 삶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마 5:16). 바울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의 영혼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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