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pring

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13:10-17)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날이 있는데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점을 따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자기 가축들을 풀어 이끌고 물을 먹이지 않느냐 하시면서 여인의 병을 고친 것을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

누가복음 13:10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신 데에는 종교 지도자들의 심각한 영적 무지와 위선을 드러내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신 또 다른 목적은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가 선포하신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은 이 병든 여자를 고치심으로 사탄에게 매인 인생을 풀어주시고 해방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을 통해 그의 사역의 중심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을 거듭 강조했습니다(4:16-21, 31-32, 43; 5:17; 6:6, 17-49; 8:1; 9:11).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늘 그랬듯이 그의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 불만은 품을 자들이 항상 등장합니다. 여기서 불만자는 회당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관심하거나 거부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능력과 기적으로 역사합니다. 1-9절은 심판의 비유를 다루고 있지만, 10-13절은 자비와 은혜의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을 통해 그의 사역의 중심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을 거듭 강조했습니다(4:16-21, 31-32, 43; 5:17; 6:6, 17-49; 8:1; 9:11).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늘 그랬듯이 그의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 불만은 품을 자들이 항상 등장합니다. 여기서 불만자는 회당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관심하거나 거부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능력과 기적으로 역사합니다. 1-9절은 심판의 비유를 다루고 있지만, 10-13절은 자비와 은혜의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1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 이야기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어를 보면 “보라”(이두)라는 말이 있어 저자 누가가 이 이야기를 매우 귀중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아마도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가 선포하신 내용(4:18-19)을 이루고 계심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이사야 61:1-2과 58:6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전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이루고자 하셨고 저자 누가는 약속의 성취의 관점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는 그녀가 앓고 있는 질병 때문에 안식일에도 안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지키고자 회당에 갔지만 굽어진 허리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여자의 병을 “귀신 들려 앓으며”라고 표현했습니다. KJV을 보면 a spirit of infirmity로 ‘질병의 영’, ‘연약함의 영’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저자는 이 여자의 신체적 질병을 영적 상태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독특한 것은 예수님이 그녀의 질병을 고쳐 주실 때 귀신이 쫓겨 나갔다는 진술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질병과 사탄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가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하셨고 사탄의 매임에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16). 

 예수님은 그녀의 질병이 사탄과 관련되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관련되어 있을까요?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그녀를 구부정하게 만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 사탄이 욥의 질병과 고통에 밀접하게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 2:7). 유대인들도 질병이나 사고가 사람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13:1-5). 이런 점에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사탄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자가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질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주 회당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분명 하나님께 질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구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낙심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신할 만도 한데 이 여자는 비통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회당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회당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회당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진 여자는 허리를 펴지 못함으로 억지로 외적인 겸손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녀는 하늘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오로지 땅만을 바라보고 걸었습니다. 그녀는 걸을 때 어색한 동물의 걸음을 걸었을 것입니다. 세월의 무게가 그녀를 누르자 그녀는 점점 더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몸도 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영적인 지향점은 하늘이었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회당에 나아와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약함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집에 있는 것이 편했지만 그녀는 예배와 말씀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 

병의 속박을 풀어주신 예수님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예수님은 항상 청중과 공감하는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여자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안식일이었지만 안식일을 기회로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가르치시고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는 눈이 매우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보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우리도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여인과 같이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심지어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육적인 장애를 갖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여인의 질병과 연약함의 원인은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그 여인을 자기 자신과 땅에 묶었습니다. 사탄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았을 때 잔인하게 묶어 꼼짝 못하게 하듯 그녀를 묶었습니다. 사탄은 그녀의 허리를 굽게 함으로 땅만 보고 다니도록 묶어 두었습니다. 사탄에게 묶인 인생들은 허리가 굽은 이 여인처럼 생각이 모두 자기 자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작은 세상의 것만 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허약함을 절망하고, 항상 자신의 감정 상태만을 살핍니다. 그들의 생각의 유일한 주제는 자신의 상태입니다. 또한 그가 볼 수 있는 곳은 땅으로 슬픔, 비참함, 죄, 실망으로 가득 찬 것만 바라봅니다. 그들은 자신과 땅에 묶여 있고, 그리스도를 올려다볼 수 없으며, 그의 사랑의 햇살이 그들에게 온전히 비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밝은 하늘과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땅의 걱정과 짐에 짓눌려 있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영혼의 갈망을 제지당했습니다. 그녀는 마치 물을 마시러 물통에 갈 수 없는 나귀나 소와 같았습니다(15). 그녀는 구원의 약속을 알고 있었고, 안식일마다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특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4:18-19). 이런 여인의 모습은 죄에서 놓여 참 자유를 갈망하는 절규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이 그림은 이 땅만 보면 구원자를 볼 수 없는 모습을 절망스런 현실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에 묶여 있던 여인을 놓이게 하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놓였다”는 말은 죄수를 석방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허리가 굽게 된 것이 사탄에게 묶여 있다고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놓였다”는 말씀으로 그녀를 사탄의 결박에서 풀어주신 것입니다. “병”은 ‘연약함’(infirmity)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사탄에게 매인 바 되어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탄에게 매인 바되어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19). 그는 선을 행하고자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다시 한번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롬 7:25). 그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자유를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롬 8:1-2).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시고 그녀를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 여자는 아마도 회당 뒤쪽, 여자들이 앉았던 쪽에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앞으로 불러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병이 나음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제는 완료 시제로 그녀가 병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자유의 선포는 어둠의 권세에 대한 그의 강력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엄숙한 선포와 함께 그 순간에 해방되었고 그녀의 자유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인 자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영혼의 안식을 위해 그분께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영구적인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고쳐달라고 해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권을 가지시고 보시고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글에는 여인이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그분께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얼굴을 땅에 대고 구부정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필요를 알아차리시고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처럼 그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합니다. 예수님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자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단은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구부정한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의 치유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구부정하여 위를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갖고 보시고 고쳐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필요를 무시했거나 알아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의 영적인 필요를 보시고 계시며 주권적으로 부르시며 치유와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그의 말씀의 권능으로 우리 영혼을 만지시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시간을 집중하셨지만, 그는 항상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주님의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할 시간을 내신 것에 당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샘을 갈망하는 여인의 필요를 보시고 그녀와 장시간 대화하시고 그녀의 궁극적인 필요인 참 예배의 대상을 만나게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인간의 한계나 다른 해야 할 일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요구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지만, 따스한 주님의 시선을 받은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결코 냉정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비로운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의 자비심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3:13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님은 여인을 치료하실 때 손을 얹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안수하신 장면은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처음부터 허리가 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허리가 굽은 것은 18년 정도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수하시자 그녀는 곧 펴게 되었고 그것에 놀라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펴다’라는 동사는 과거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똑바로 허리를 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NASB95는 she was made erect again으로 ‘다시 똑바로 서게 되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서서히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안수하심과 동시에 “곧”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굽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죄와 슬픔과 고통으로 허리를 굽히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포로가 된 우리 인생들을 풀어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와 그의 자비의 안수로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본문에는 그녀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예수께서 그녀를 고칠 수 있다고 믿고 그분을 찾았는지, 아니면 그녀가 예수님이 오신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때 나아온 사람이 간절한 소원과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7:50; 8:48; 17:19; 18:42).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언급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완전히 주권적이고 일방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저자 누가는 때로는 주님의 주권적 선택과 부르심과 구원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라고 일방적으로 부르셨고(5:27),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을 때 그를 불러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네 손을 내밀라”라고 하심으로 그의 손을 회복시키셨습니다(6:6-11).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이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때 귀신을 쫓아내어 정신을 온전하게 하셨고(8:26-39),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수종병 든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14:1-6). 이 네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먼저 소원을 갖고 나아왔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펴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아노르쏘우’로 건물을 세우거나 폐허를 복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15:16을 보면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일으키리니”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폐허를 복구하는 것처럼 이 여자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세우고 회복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로 인한 상처, 고통, 낙담,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선순위를 두고 일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필요를 종교적 인간이 만든 전통의 필요보다 우선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허리가 굽은 여인의 필요를 다른 어느 것보다 우선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관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면 이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그 여인을 고치시기 전 먼저 불러 이르셨습니다. NIV를 보면 he called her forward로 ‘자기 앞으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녀가 허리가 굽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예수님의 치료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굴욕적이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실 때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6:10).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 주고자 하실 때 우리의 병든 부분을 내놓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 우리의 병든 부분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치료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병든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면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5:31-32). 스스로 의인인 척하고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치유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12)베드로는 그가 영적으로 어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으려고 하자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더러운 발을 내밀어야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허리가 굽은 여인도 “앞으로 나아오라”라고 하셨을 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녀의 허리를 곧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늘날 모든 죄인들이 그분께 와서 죄를 깨끗이 씻고 용서받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회복되라고 같은 부르심을 계속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기 전에 우리를 낮추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기본 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것은 존귀로 가는 지름길입니다(잠15:33). 겸손은 우리 자신을 해치지 않지만 교만은 우리를 해칠 것입니다. 겸손은 당신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지만, 교만은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 갑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인이 예배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 있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예배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녀가 귀신에게 놓임을 받은 축복을 받은 것은 절망 중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녀의 삶에 나타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의 치료를 받은 것은 어쩌다 한번 예배에 나왔더니 주님의 만지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신실한 예배의 결과로 주님의 만지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축복의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그 곳은 바로 주님을 예배하는 장소이어야 합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 자기 몸을 보이며 예배하는 삶은 주님을 만나고 그의 만지심을 받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리스도의 치유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완료 시제로 그녀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여인의 감사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평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몸에 배여 있었기에 이런 반응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녀는 단지 “할렐루야”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난 그녀의 표정, 감사로 가득 찬 눈물,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은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곧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굽었던 여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짓밟히고 무력한 죄 많은 죄인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곧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손이 그녀에게 얹혔을 때였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배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만지심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회당장의 비난

누가복음 13:14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고침을 받고 허리를 폈을 때 사람들은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오히려 화를 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그 동안에 와서 고치면 될 것을 꼭 안식일에 그 일을 해야 했냐고 따진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듯 예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가장 ‘종교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인 한 여자를 해방시키셨지만, 회당장은 안식일에 대한 규정으로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을 율법조항에 매이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까지 매이게 하려고 했고, 그들 자신도 거짓 경건과 위선에 묶여 있었습니다. 

회당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묶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저주를 받은 자로 취급했습니다(요 7:49). 그들은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마 23:4).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례들은 안식일을 안식의 날에서 일주일 중 가장 힘들고 괴로운 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는 ‘죽은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죽은 종교인인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라고 하시며 그들을 ‘죽은 자’로 취급하셨습니다(막 12:27).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고 의지하는 자들은 위조의 달인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마음을 변화되는 체험하지 못합니다. 

본문의 회당장은 회당장 야이로와 완전히 딴판입니다. 야이로는 죽어가는 12살짜리 외동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으로 오시기를 간청하였던 겸손한 자였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과 두려움에 얼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8:50). 회당장 야이로는 죽은 딸을 위해 울며 통곡할 때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8:52). 그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살리신 부활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8:54). 회당장이라고 다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이로와 같이 겸손하고 믿음이 있고 예수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놓은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본문의 회당장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불쌍히 보는 연민의 눈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연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의 구원을 기뻐할 영혼도 없었고, 그녀의 찬양의 음악을 들을 귀도 없었습니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세부규칙을 39가지로 정하여 세세하게 지켰습니다. 그는 율법의 세부조항을 어길까 늘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겁이 많은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을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비판함으로 그의 야비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애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의 문제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얼음과 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진 회당장은 예수님으로부터 얼음과 같은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에 대해 분 내었습니다.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가 있고 감정적 분노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로운 분노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하거나 잘못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의 절대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분노하는 자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의로운 분노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 분노하는 것이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이 병들고 허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례에 얽매여 영혼이 굽어 펴지 못하고 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병들고 허약한 자였습니다. 

유대교의 법은 안식일에 실제로 생명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완벽하게 합법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여인의 치유를 내일로 미루셨다면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고통을 내일까지 지속시키게 할 수 없을 만큼 그 여인의 고통을 깊이 동정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오늘 할 수 있는 도움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로 미루게 되면 그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우선순위를 따질 때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고통을 알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구원하는 일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15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외식하는 자들”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복수를 쓴 이유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노한 회당장 뿐만 아니라 그에게 동조한 율법주의자들로 가득차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회당장과 같이 무정하고 악한 말을 머리 속에서 되뇌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과 목적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들의 잘못된 의도를 보시고 “외식”한다고 반어적 질문 형식으로 질책하셨습니다. 

회당장은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라고 말함으로 병든 자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율법의 세부조항을 어겼는지 주시하고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주관심사였습니다. 회당장은 지나치게 외적 청결에 집착해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당장의 본래의 사명을 잊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도와주는 일과 그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일곱 날 중 하루를 따로 내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일상적인 일에서 쉬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에 대한 복잡한 규칙을 만들어내고 사람을 감시하는 피곤한 일을 하는 것은 위선으로 이어집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세부규칙을 지키는 것에 속박당한 사람으로 여자가 몸의 속박을 받은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지만 율법에 대한 집착과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 의는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감시와 속박의 날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고된 노동으로부터 안식과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데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아보아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오히려 안식일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불쌍하고 무거운 짐을 진 여자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하심으로 안식을 주셨고 그 날을 그녀의 몸과 영혼에 안식일로 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라고 반어법적 질문을 하십니다.  이에 대한 명백한 답은 “예”입니다. 이 질문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집착한 사람일지라도 안식일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짐승에게 물을 먹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쉬나의 엄격한 법규조차도 동물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허용했지습니다. 인간은 이런 동물보다 귀한 존재인데 슬프게도 인간은 이런 유사한 대우를 받는 것이 제한되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짐승을 풀어 물을 먹이는 것은 괜찮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병에 놓임을 받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니 그들의 이런 주장은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예수님이 예를 든 비유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가축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율법에 얽매여 있는 유대인에게도 아주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물건을 운반하지 않는 한, 동물을 줄을 매어 끌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미쉬나 샤바트 5:1). 또한 동물을 위해 물을 떠서 물통에 부어 동물에게 물을 줄 수 있었지만, 사람이 동물이 마실 물통을 잡아서는 안 되었습니다(미쉬나 에루빈 20b, 21a).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관행으로 예수님께로부터 외식하는 자로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물에게는 연민을 보이지만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기하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창조의 질서와 불일치하며 우선권의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물이 성스러운 날에 사람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한 태도는 창조 질서의 역전입니다. 

예수님이 이 구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심으로 비슷한 논조로 종교 지도자들의 거친 항의에 논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4:5절에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실 때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항의를 받자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가축이 우물에 빠졌을 때 끌어내어 구하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2:11에서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하심으로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를 드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관계 보다 규칙을 더 중시했고, 예수님이 제시한 예에서 보듯이 사람보다 동물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일 수 있는 자유를 느꼈지만, 수년 동안 사탄에게 묶였던 여자를 풀어줌으로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가 정한 규칙에 얽매이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할 때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우선순위를 망각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인수를 자랑하면 노골적인 죄가 있어도 눈을 감고 덮어버립니다. 교회 외적 성장을 위해서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십자가와 회개, 자기 부인과 희생의 메시지를 회피합니다.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주제가 복음의 핵심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핵심에서 빗나가는 죽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 사람을 사탄의 매임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키우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합당하다

누가복음 13:16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방금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사람보다 소나 나귀에 우선권을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여자는 그들이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딸로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중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딸이 이 여인이  소나 나귀보다 덜 중요한가?”라고 받아치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사탄에게 매인 바 되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녀가 안식일에 회당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신실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즉,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을 열렬히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날 어쩌다가 회당에 온 어떤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예배에서 이 구부정한 여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삭개오가 주님을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삭개오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누구나 아는 죄인인 것을 알았지만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그를 영접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셨습니다(19:4). “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호칭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이 될 뿐 아니라 그가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조상이 됩니다(롬 4:12).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적인 후손이 아니라 그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해당하며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입니다(롬 4:16). 유대인들이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만, 그가 우리 주님을 배척하는 한 우리 주님이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고침 받은 여인은 사탄에게 매인 바 되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자가 어떻게 회당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질병의 원인이 인간의 원죄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사형선고는 질병이나 사고로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병들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분명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습니다. 본문의 여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것도 그녀가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면서 “매임에서 푸는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를 넘어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인 인생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구원의 능력자가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에서 그 여인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라고 묘사되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귀신 들려 앓으며”라고 되어 있지만 KJV는 “허약함의 영을 가진”(a spirit of infirmity)이라고 번역되었고, ESV는 “무능하게 하는 영”(a disabling spirit)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아스테니아’로 신약에서 24번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연약함’, ‘질병’, ‘고통’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11절과 16절은 그 여인의 질병이 악한 영이나 사탄과 관계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욥기에서 욥은 사탄으로 인해 종기를 앓았다고 말합니다(욥 2:7). 그러나 이는 모든 질병이나 질환이 특정한 악한 영에 의해 발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이 여인은 허리에 장애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그녀가 사탄에 의해 그녀의 영혼과 마음이 완전히 장악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은 그녀의 질병이 사탄으로 인한 것이라는 일반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질병은 사탄은 질병을 앓게 하는 원인자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병이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여자의 문제가 어떤 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죄로부터의 돌이키도록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가 회당에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장애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산 그녀의 믿음을 은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젊음의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굽은 등으로 인해 훼손되었으므로,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여인으로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어 끊임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굽은 등으로 회당까지 걸어가는 것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녀는 땅만 보고 걸었기 때문에 자기 앞에 상황을 쉽게 인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회당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탄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고통의 원인을 밝히시고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사탄에게 매인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녀가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묶였는지,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고통, 그녀가 치유를 위해 기도했던 일, 그리고 여전히 그녀에게 닥친 병약함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정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녀의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인 사슬을 풀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고통의 원인을 외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범죄로 인해 사탄에게 매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매인 것을 풀어 놓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탄은 “강한 자”가 되어 인간을 속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여 우리를 사탄의 결박에서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을 통해 고통의 원인인 죄를 없이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십니다.

누가복음 13:17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과 같이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사탄의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면이 있지만 그들이 회개할 만큼 죄책감을 느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은 예수님의 논리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설득력은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탁월한 논리에 당황하여 부끄러워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32:17-18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예수님의 말씀에 상반된 반응을 보인 자들은 무리였습니다.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무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함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억압과 죽은 신앙에 질식할 정도로 숨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강력한 펀치를 맞은 것에 기뻐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이 이를 인하여 믿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기뻐했지만 온 무리가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기적을 행하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놀랍게 여겼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인간적인 배경을 들먹이며 배척했습니다(4:22). 무리는 상황에 따라서 놀라거나 기뻐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군중 심리에 이끌려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는 메시아로 환영했지만, 며칠 후에 그분의 피를 구걸했던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구하였습니다(23:18,1,23).



댓글 남기기

About Me

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테고리

Bible spring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