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는 추상적이고 개념적 표현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려면 신학적인 사고를 요구합니다. 요한복음은 순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저자의 나름대로 구성하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세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귀납적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여러 가지 사건과 증언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관점이 같다’라는 의미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1장에서 먼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연역적 방법을 취했습니다.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예수님의 선구자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과 구분합니다. 사도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헬라의 이원론 사상이 유행이었습니다. 이원론은 인간 세계를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로 나누는데 물질은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고 영의 세계는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몸을 입고 오느냐?”고 하며 성육신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 개념을 끌어다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먼저 말하고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31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서술하였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구원을 얻는 것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1:1-2)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1의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시점을 말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창조이전의 어떤 때’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 전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 즉 영원 전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로 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헬라어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로고스는 ‘만물을 존재케 하는 이성적 원리’라고 하며 ‘ 제 1의 원리’라고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했고,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론을 주장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온 세계는 아주 작은, 무한히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물질인데, 그 물질은 어디에서 존재하게 되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이성적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로고스라고 칭했습니다. 로고스는 서구 철학의 대전제이자 가장 주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차용하여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영어로 the Word로 되어 있고, 2절에서 He라는 대명사를 씀으로 철학적 개념이 아닌 인격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을 에서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화의 세계가 지나고 철학의 시대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세상은 규칙적으로 운행되고 있고 그것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는데 그들이 말하는 원리는 추상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로고스가 ‘말씀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로고스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 나온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존재가 아닌 원래부터 계셨고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고 역사 속에서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역사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를 의인화시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방법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 속에 거하는 방식은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씀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말씀은 인격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말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1:14).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말씀은 서로 다른 인격적인 존재임을 말합니다. ‘함께’라는 말은 관계성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함께 계셨는데 이는 끊임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또한 ‘함께’는 toward의 의미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부 지향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예수님(3)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그’는 말씀, 성자 예수님을 말합니다.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중부정을 사용함으로 이 말씀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1:16). 만물과 예수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창세기 1:1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1:26을 보면 “우리가 …만들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창조사역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과의 뜻과 능력 속에서 나온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천지창조를 담당하셨던 창조주이십니다. 3절은 예수님과 만물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저작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인간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은 만물을 지을만큼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잘 아십니다. 창조주 예수님은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도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7개의 표적이 나옵니다. 2장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4장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5장에서 38병자를 고치시고 6장에서 물고기 두 마리아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시고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9장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주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뭐든지 하실 수 있고, 심지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시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주가 되셨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며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습니다(롬11:36).
예수님 안의 생명(4-5)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진화’의 법칙에 의해서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생명체가 생기고 그것이 진화하여 복잡한 메카니즘을 가진 다양한 생명체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진화에 의한 설명은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기원을 명확히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생겼다고만 합니다. 그것을 과학적 이론을 덧붙여 설명했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생명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22회 나오고, 영생이라는 단어가 21번이 나옵니다. 생명의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생명은 꽃병의 꽃과 같아서 언젠가는 시들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와 같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있으므로 한계적이고 시들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 옴을 느끼기 때문에 그 마음이 어둡습니다.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땀을 흘리며 일하지만 결국 죽을 때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에 인생은 허무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중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중한 것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사용해야 나의 인생은 의미가 있게 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내가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모든 것이 헛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생명은 예수님의 안의 생명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영생으로 연결됩니다.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입니다. 이 말은 영어의 joy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의 생명은 영생으로 기쁨을 주는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하고 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다고 하여 자살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갖는 이유는 그 내면에 기쁨을 주는 예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의 생명은 하나님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며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의 주 예수님을 통해 변화받은 사람들의 예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 됩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사는 이유는 생명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빛이 그 마음을 비추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몰아냅니다. 어떻게 보면 빛과 어둠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서로 세력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은 세상의 어둠을 이기는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23번 반복되고, 신약성경에는 73회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빛’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의 반대는 당연히 어둠입니다. ‘생명’과 ‘빛’은 진리, 용서, 용기와 연관되고, 어둠은 거짓, 정죄, 두려움과 연관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장 강력한 어둠의 세력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너무도 강하여 온 인류를 지배해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멸절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으면 영혼의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계시록 21:8은 둘째 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죽음으로 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끝난다면 현세의 삶이 고통인 사람에게는 죽음은 편안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있고 그것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그것은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죽음의 고통이 있는 것일까요? 이는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죄 아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죄와 죽음의 세력에 시달리는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한 아기의 몸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러 성육신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몸을 대속제물로 드려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의 삯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의 빛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심판이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다스리거나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생명의 빛이 되셔서 죽을 우리 인생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빛은 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힘, 권세가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아예 우리를 어둠의 나라에서 옮겨 생명과 빛의 나라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의 왕은 당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추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비추다’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비춘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비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둠’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로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영적 무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 무지와 교만 속에 있는 사람들은 빛이 와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고 우리 죄를 십자가에 지셨다는 복음을 들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믿지 못하겠다.”, “나는 종교에 관심이 없다.”, “나는 나를 믿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니고데모는 영생의 고민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엉뚱한 말만 늘어놓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변화에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기지 못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뜻으로 해석하면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밤이 길고 어둡다 하더라도 아침 태양이 솟아나면 어둠은 어느새 물러가고 없습니다. 영어로 보아도 두 가지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NIV, NASB, KJV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다’로 되어 있고 ESV, NET Bible, NLT에서는 ‘이기지 못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빛의 증언자 세례 요한(6-9)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증거자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증언자로 보내셨습니다. ‘증언하다’는 말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해 증언자의 ‘증언’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둠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둠에 있는 자에게 빛을 향해 나가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빛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자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영적으로 갈급했던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 빛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했을까요? 참 빛이 되려면 각 사람에게 비추어야 합니다. ‘참 빛’의 대조되는 개념은 ‘거짓 빛’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거짓된 희망에 목숨을 겁니다. 한 때 이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함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념을 버리고 그들 나라에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자본주의 이념은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습니다. 가진 자의 탐욕이 사회적 약자를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보완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념은 정치제도의 한 형태이지 사람에게 참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빛을 찾습니다. 인터넷에는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강연들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수많은 상품들이 있습니다. 좋은 학교를 가서 더 좋은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좋은 집을 사서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꿈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의 빛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며, 한계적이며,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성취 가능성이나 기회가 적습니다. ‘참 빛’이 되려면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어야 합니다. ‘참 빛’이 되려면 인간의 죄와 죽음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참 빛’이 되려면 영원한 것이어야 하고, 사람의 마음 깊이 와 닿아야 하며, 어떤 인생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빛’은 진리의 계시자요 생명의 수여자이어야 합니다. 참 빛은 각 사람을 비춘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격적인 ‘비춤’을 말합니다. 즉 각 사람의 인생문제, 죄문제, 어둠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문제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참 빛’은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와 맞춤형으로 도와 주며 각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어 살립니다. 이 빛은 원형적인 빛이요 본질적인 빛입니다. 흉내내는 빛이 아니며 반사된 빛도 아닙니다. 우리가 증언자의 증언을 믿고 영접하면 참 빛 예수님은 나의 인생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내 인생의 빛의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10-13)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참 빛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11절과 대조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세계를 말합니다. 참 빛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은 선민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자요 구약성경을 통하여 메시아에 대한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와서 참 빛에 대해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줄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교만과 욕심 때문에 고의로 참 빛을 배척했습니다. 오늘날 참 빛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3:19). 그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 잡혀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변화된 새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봐, 자기가 쌓아 놓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놓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셨습니다. 어둠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으로 자녀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 국가에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혈통을 통해 계승되는 것이 아닌 각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육정’은 human decision으로 사람의 계획과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내가 믿어야겠다’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계획과 의지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은 a husband’s will로 남편이 아내를 믿게 하겠다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아내가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사람의 설득이나 강요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인간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특권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2:3-5).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의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8:15).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롬8:16-17).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시편 73:28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9:12를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실 때 백성 주위에 경계를 정하라고 하셨고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허무시고 그의 긍휼하심을 받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4:16).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예배의 특권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참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때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토록 방황했던 것도 참 예배의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요4:20-26). 사가랴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했습니다(눅1:75). 하나님의 자녀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나 제사장 처럼 특정 부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섬겼으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생명의 말씀을 증언하며 수많은 영혼을 파멸에서 건지는 고귀한 사명의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명의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은혜의 직분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벧전2:9). 하나님의 자녀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소망 가운데 사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세상의 거짓된 소망과 달리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한 산 소망(living hope)입니다(벧1:3). 하나님은 이 특권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값 없이 공짜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그것든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친히 직접 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거했다는 것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 중에 행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레26:12).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더 가까이 지내시 위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독생자를 한 아기의 모습으로 보내시며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형상으로 오신 것이요,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 제한적인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역사 바깥에 계신 분이 역사 속으로 오신 것이요, 초자연적인 분이 자연적으로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막10:45).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이지만 창조된 존재는 아닙니다. 독생자는 영어로 the One and Only Son 또는 the only begotten Son으로 이 단어는 오직 예수님께만 쓰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유일하게 나신 하나님의 아들(the only begotten Son)’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예수님은 사람의 몸에서 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들이십니다(사9:6).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롬1:4).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3:17;갈3:26)이시며,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14:9).
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고 죄인들을 품어 주셨으며 구원과 영생을 거저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마11:9;눅7:34). 예수님을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막2:17). 예수님은 죄인들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마12:20). 예수님은 은혜가 풍성하실 뿐만 아니라 진리도 풍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요14:6).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말하고 속이고 방황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자기의 종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시며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로서의 탁월한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과거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진리의 삶을 사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심으로 병든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긍휼이 풍성한 제자가 되도록 변화시키셨고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며 만족 줄 것을 찾아 방황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 경배의 대상이 되셔서 증언자로 살도록 하셨으며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심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속에 은혜와 진리가 조화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15-18)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토대로 예수님의 선재성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이 자기보다 앞선 분이시고 먼저 계신 분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나신 분이시고(눅1:36),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뒤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등장하심(막1:14-15)을 가리킵니다. ‘나보다 앞선 것’과 ‘나보다 먼저 계심’은 세례 요한은 인간에 지나지 않지만 예수님은 창조 전에 계셨고(1:1) 만물을 창조하셨으며(1:3)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빌2:6)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이나 능력이나 신분 면에서 세례 요한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에 대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 양’(1:29,36),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분’(막 1:7)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그 분을 주목하여 보도록 증언하였습니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는 세례 요한이 증언한 그 분의 충만하신 것에서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습니다(골2:9). 이는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족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은 그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골1:16). 그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엡3:8). 14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충만함을 가리키는 반면 16절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 속한 본래의 충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진 것이 아니라 본래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그의 풍성함이 넘쳐 우리에게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는 NIV에서는 one blessing after another로 은혜가 연속해서 주어짐으로 다함이 없다는 뜻이고, ESV에서는 grace upon grace로 은혜 위에 은혜가 연속적으로 겹침으로 끊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풍성하여 흘러 넘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이며, 새번역에서는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특징은 넘쳐 흐르는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다함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온 세상을 다 뒤덮고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의 풍성함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미칩니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7절에서는 은혜와 율법과 비교하여 나오는데, 율법과 대조하여 생각해 보면 은혜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완벽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사람에게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지키지 못했다는 정죄감을 줍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하인이 먼지가 가득한 방을 청소하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는데 물을 뿌리자 먼지가 가라 앉아서 마침내 방이 말끔히 청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은 먼지와 같아서 우리를 숨막히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3:20). 우리는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뿐이지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부담감과 정죄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정죄의 압박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내면을 채우고도 넘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율법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것에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떨쳐버리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늘 부족하였고 채워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서는 차고 넘쳐 율법을 행할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율법을 행할 능력을 줍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13:10)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차고 넘치는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그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차고 넘쳐 선을 행할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은혜와 진리는 조화시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면 진리가 서지 못하고, 그렇다고 진리를 강조하면 은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은혜와 진리를 완벽하게 조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라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자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우심으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의 속성을 만족시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대속제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더 이상의 정죄감과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고 진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조화시킨 하나님의 지혜요 기적의 방법입니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철저히 계획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밝히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도 하나님을 보여주시면 족하겠다고 하였습니다(요14:8).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종결자이시고 최종적인 말씀의 계시자이십니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십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예수님을 알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