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며 창조주이심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심을 선언합니다. 저자 요한은 1:19부터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하나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19-28절은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은 누구인지 추궁하는 과정에서 세례 요한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합니다. 29-34절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 문제를 해결하실 대속의 주가 되심을 증언합니다. 35-51절은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안드레와 빌립의 증언으로 베드로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2강의 주제는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증언’의 역사입니다. 2강을 통하여 ‘증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19-24)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대표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한창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말라기 선지자(주전 444-430년 활동)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이 긴 공백기는 영적인 암흑의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였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예수님에 앞서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면 부담스러워 피하거나 박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그들은 그에게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나아온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마3:5-6).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착각하였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혹시 그런 것은 아닌가 하여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고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요한은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저함 없이 선언하였고 명확하고도 단호하게 공언하였습니다. ‘숨기지 아니하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그의 고백을 축소시키거나 조금의 의심이나 모호성을 남기지 않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분명하게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말했습니다. 그는 두루뭉술 얼버무리지 않았고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여러 해석이 가능한 말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에 요한은 “나는 아니라”하면서 간결하고도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 이에 요한은 “아니라”하면서 선지자임에도 선지자임을 부인했습니다. 조사단이 ‘엘리야’임을 물은 근거는 당시 세례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며, 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헤롯의 죄를 책망하는 그의 삶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말라기 4:5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한 그 엘리야임을 인정하셨습니다(마17:12). 또한 조사단이 세례 요한이 선지자라고 물은 이유는 세례 요한이 혹시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신18:15). 세례요한은 메시아인지, 엘리야인지,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인지 묻는 말에 각각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 하면서 점점 짧게 대답하면서 단호함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자신의 인기가 올라갈 때 그 인기를 부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명예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강렬한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이런 명예욕에 대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천사가 와서 받들어 예수님을 영웅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귀는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줄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마귀의 유혹의 핵심을 꿰뚫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담긴 마귀의 유혹을 간파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을 파견한 지도부에 보고할 수 있도록 세례 요한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지 캐물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시험 받으셨을 때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그들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이 구절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소리’로 소개했습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메시아를 증언하고 자기는 소리처럼 사라질 존재임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입니다. 즉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울퉁불퉁하고 거칠면 평탄하게 하며 깊이 패였으면 메꾸고 돋아졌으면 낮추어 메시아가 그들의 마음의 길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도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낮은 마음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고 친절을 베풀며 구원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메시아의 선구자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세례 요한처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나는 말씀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함을 깨닫고 자기를 낮추며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들어오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34)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튿날은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즉시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40일 동안 시험을 받고 돌아오신 후를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보라”라는 감탄사를 씀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예수님께 집중시켰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세례 요한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메시아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이었습니다.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예수님께 쏠려야 할 관심이 세례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사이 바리새인들이 보낸 조사단이 와서 세례 요한이 과연 메시아인지 물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자 세례요한은 감격하여 “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한 마디 외침에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 후 세례 요한이 외친 감격의 메시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였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하실 일이 핵심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질 속죄사역을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십자가의 그림자가 예수님 등 뒤에 드리워져 있음을 생생히 보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구약을 배경으로 한 말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소개할 때도 구약성경 이사야서 40:3 말씀을 인용하였고, 예수님을 소개할 때도 구약성경 출애굽기 12장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학대했던 애굽을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중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자 하셨는데 그들로 하여금 양이나 염소를 죽여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표적이 되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볼 때에 그들을 넘어감으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출12:3).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대속하신 것이었습니다(출13:15). 이사야 53:6-7은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즉 속죄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임을 당하신 대속의 주가 되십니다.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영어로 take away로 ‘우리 죄를 지시고 멀리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사셀 염소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 레위기 16:10을 보면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었습니다. ‘아사셀’은 두 단어의 합성어로 ‘염소’와 ‘가버리다, 사라지다’라는 뜻이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즉 아사셀은 ‘속죄의 염소’ 또는 ‘내보냄을 받은 염소’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사셀 염소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멀리 내보내어졌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요한은 세상 죄라고 함으로 세상의 근본문제가 죄 문제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 문제, 경제 문제, 인간관계 문제, 사회 갈등 문제, 빈부 격차 문제, 교육 문제, 환경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결국 이기심과 탐욕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온갖 죄에 대해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뿌리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죄 문제는 뿌리가 워낙 깊어 아무리 나무를 잘라내어도 다시 또 자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 하고자 산 속에서 도를 닦고 참선을 하고 자기를 학대하며 수련을 쌓기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죄 문제는 인간의 행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깊은 죄의 간극을 연결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4:16). 우리가 죄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1:18-19).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렘31:34).
여기서 죄는 복수인 sins라고 하지 않고 단수인 si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죄를 하나로 다 모아서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온통 다 뒤집어 씌운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세상 죄’라고 하면서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희생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의 죄도 결코 가볍지 않은데 어떻게 이 세상의 무거운 죄를 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구약의 짐승의 희생제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구약의 짐승의 희생의 피는 매우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또 다시 짐승의 피를 흘려 또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속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드려 속죄하심으로 다시는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히10:18).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30-34)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은 전에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그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내 뒤에 오시는데 그가 나보다 앞섰고 나보다 먼저 계셨다. 그 때 내가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분이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가장 영광스러운 선지자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지만, 요한은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를 눈 앞에서 보고 소개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늦게 태어났고 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되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와 예수님 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서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요한은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가리키면서 증언하는 영광을 갖게 되어 감격과 두려움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31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친분관계가 없음을 말합니다. 사실 엘리사벳과 동정녀 마리아는 사촌 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개인적으로 친분과 교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삶의 양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한 광야에서 지냈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가족들과 지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친분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편파성을 갖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메시지를 그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은 완악한 백성들의 마음에 도전하여 그들의 마음을 낮추었고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 준비를 하도록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은 자신이 준 물 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비교해 가면서 증언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통해 메시아에 대해 들었는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내려 머무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이 주는 물 세례는 마음을 준비시키는 의식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되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성령 세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근본적 변화의 원천입니다. 과거에는 짐승의 피를 뿌려 죄사함을 받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역사로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죄 문제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 내면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사55:1, 58:11). 예수님은 약속대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믿는 자의 니면에 계셔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고 감격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과거의 그림자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빛의 새로운 시대가 임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의 시대였지만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그 그림자를 보고도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보고 느끼고 깨달은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자입니까!
두 제자를 초청하신 예수님(35-39)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또 이튿날’은 요한이 세 번째 예수님을 본 사건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사건을 말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광야 시험을 받고 돌아오신 후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 때를 말합니다. 요한은 세 번째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때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1:40). 그러나 다른 한 제자는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19-34절의 생생한 묘사를 보면 저자 요한으로 추측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를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13:23,20:2,21:7,21;20)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계속 반복됩니다. 두 제자는 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들은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두 제자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그들을 예수님께 보내고자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택했을 때 자신을 위하여 제자를 택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택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님은 두 제자가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시는 목적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한지를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고 체험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스승이 소개한 대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같이 거하면서 예수님을 알고 따르고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들에게 여러 번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메시지에 이끌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두 제자가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두 제자를 보고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리스도와 그들의 만남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주목하셨고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이끄심이 그들을 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는 선생이나 박사들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와 성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를 부담스러워 하고 성도로 남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자와 성도는 같은 말입니다. 제자이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인 성도이고, 성도라면 곧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랍비로서 생각하고 가르침을 받고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멈추지 말고 예수님의 닮고 예수님 처럼 되고자 가르침 받고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라는 과정입니다. 성화를 게을리할 때 우리는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욕을 먹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더 친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요 방향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했습니다(빌3:10-11). 찬송가 338장의 가사는 우리에게 감명을 줍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시73:28).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은 어디 계신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와보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 처소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 각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은 제자들을 초대하실 때 약속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와보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자기 처소의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임을 기억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고후 6:2).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초청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가장 중요하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즉시 수락했습니다. 이 때가 제 10시경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은 6시간을 더하면 우리의 시간으로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6시로 오후 4시입니다.
시몬을 초대한 안드레(40-42)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0절은 두 제자 중 하나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임명할 때에는 기름을 부어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은 자’라는 말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구원자 메시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가 됩니다. 안드레는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형제인 시몬에게 찾아가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쁨에 벅차 자연스럽게 거침 없이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이 외쳤습니다. 안드레는 단순하고 쉽게 말했습니다. 그는 복잡한 교리를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정보를 주입시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가 체험하고 느낀 예수님을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차이일 뿐 같은 의미입니다. 메시아가 하실 일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세상 죄를 지시고 가시는 일입니다.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다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다 알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이 자기와 같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더니 그의 이름을 아시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예수님은 어떻게 묻지도 않고 시몬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모든 사람을 잘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자기 양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요10:14-15).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를 그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습니다(사49:15-16). 다른 사람은 내 이름을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나의 이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키우시고 인도하시고 나에게 소망을 두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게바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게바는 아람어이고 헬라식 표현은 베드로입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희망을 두시고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경우가 종종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하셨고, 사래는 사라로 하셨으며,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약에서는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 부른 것은 이미지의 변화와 더불어 그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소망을 나타내고자 할 때 그렇게 씁니다. 아브람은 ‘한 가정의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은 ‘여러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의 여러 나라를 품고 섬기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사래는 ‘여주인, 나의 공주’라는 뜻인데, 사라는 ‘여러 나라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여러 나라를 섬기는 어머니가 되라는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 빼앗는 자’라는 뜻인데 하나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과 경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 씨름을 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라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사울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사울’은 ‘바울’의 유대적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로마 이름으로 두 가지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과 이스라엘의 경우도 혼용해서 많이 사용하였고 시몬과 베드로(게바)도 혼용해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빌립을 부르신 예수님(43-45)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3-45절은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이튿날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안드레나 요한이나 베드로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신 부르심의 특징은 예수님이 일방적인 주권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다른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잘 알려져 있을 것을 전제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벳세다는 갈릴리 호수 의 한 지명으로 가버나움 근처로 추정합니다. 저자 요한이 이 지명을 언급한 것은 자신이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같은 고향임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고(마 14:13-21;눅 9:10-17), 사천 명을 먹이셨으며(막 8:1-9), 또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막 8:22-26).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립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쉽게 이해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통해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레미야 29:23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리라”는 말씀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간절한 소망대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말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상황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명령으로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만삭된 아내를 이끌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산통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아기를 낳은 장소를 구하지 못해 베들레헴 짐승들이 머무는 축사에서 아기를 낳아 아기를 구유에 누였습니다. 이것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미5:2). 그 후 예수님은 고향 땅 나사렛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그 곳에서 보내셨습니다. 빌립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사9:1).
나다나엘을 초청한 빌립(46-51)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의 증언을 들은 나다나엘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박했습니다. 나사렛은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던 곳이었습니다(요 7:41, 52)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나다나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편견에 갇혀 구주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설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황하게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빌립의 편견을 깨기 위해 ‘초청’이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와서 보라” 빌립의 초청은 안타까운 간청이었습니다. 그가 꼭 만났으면 하는 그 메시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다니엘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진심의 눈빛으로 나다나엘을 바라보면서 그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기를 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또 친구의 간청에 자기 편견을 내려 놓을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각이 굳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의견도 청취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생각의 유연성이 있었으며 아직 찾지 못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에 진리를 향한 열정과 순수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다나엘을 따라 예수님께 온 것 자체가 믿음의 행동이었고 진리를 열망하는 진리의 사람임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가 올바르고 정직한 사람이며 빌립의 초청을 수락한 수용성이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리분별이 있고 예수님께 가기로 진리를 선택한 용기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롬2:28-29). 나다나엘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몰랐지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나시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빌립이 말한 증언을 곰곰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빌립에게 반박했지만, 자기가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빌립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을 볼 때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사함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악함과 이중적인 마음으로 자기의 속마음은 감추고 겉으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다나엘을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자신을 감출 줄 모르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정직하게 자신의 허물과 실수와 죄를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자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인간적인 약점이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그가 가진 장점과 가능성과 희망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관한 나다나엘의 반박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반박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에게서 가능성과 희망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 앞에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수없이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고 난 후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 놓였을 때, 또 광야에서 굶주렸을 때, 또 목말랐을 때, 그들은 수없이 불평함으로 노예근성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긍휼하심은 끝이 없고 한계가 없고 영원합니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오시는 것을 보시고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소개하기도 전에 자기를 아신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그의 속마음을 보시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빌립이 말한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잎은 매우 컸으므로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고 당시의 랍비들은 이곳에서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많이 이용하였습니다(미4:4).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신 것은 그가 무화가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참 이스라엘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신앙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아셨고’, 그리고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고자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제자가 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를 선택하신 것을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습니까”라고 반박하며 편견을 갖고 있었던 그의 약점은 예수님께서 그를 먼저 아셨고 보셨고 선택하신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우리의 모든 약점과 허물을 덮고 남을 만큼 풍성하고 충분합니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의 모든 편견이 예수님 앞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스승이나 선배나 친구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듣습니다. 또한 여러 책을 통해 예수님과 그의 사상에 대해서 배우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신학적 접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까지는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편견이 깨지고 예수님에 대해 열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실 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십니다(16:8). 이를 위해 우리는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도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사도 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 알게 하시기를 구했습니다(엡1:17-19). 우리는 이를 위해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때 그 동안 가졌던 나름대로 가졌던 자기 생각이 사라지고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며 삶의 과정을 통해 영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풍성해집니다. 나다나엘도 안드레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나다니엘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였을 뿐 아니라 ‘랍비’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생각하고 기대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28:12에서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과 유사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늘이 열리고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을 상징합니다.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배 피를 힘입어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10:19-20). 이로 인해 우리는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땅에 거하는 우리에게 하늘 문이 활짝 열림으로 인해 하늘의 축복이 우리에게 쏟아져 내림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 사역을 통해 하늘 길을 여신 것은 그의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보다 더 큰 일’이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 대속 사역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특하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공관 복음에는 주로 진실로(truly)가 한 번 사용된 형태로 나오지만(마 5:18, 26, 6:2), 요한복음에는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로’가 두 번 사용된 형태는 놀랍게도 오직 요한복음에만 26회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은 진리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과 맹세의 표현이요 자신의 말씀에 대한 권위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이 나올 때 예수님의 엄숙한 선언으로 우리는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그 뜻이 무엇인가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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