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pring

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눈을 들어 밭을 보라(요한복음 4:31-54)

6강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변화로 사마리아 지역이 복음화되는 이야기와 말씀의 능력을 믿고 체험한 왕의 신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의 두 이야기의 공통적인 특징은 두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와 예수님과 이틀을 유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중병에 걸린 아들의 아버지인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찾아와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동행하지 않으시고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왕의 신하는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던 중 아들이 회복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 중에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입니다.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숨을 불어 넣어 주신 것으로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으며 누구든지 쉽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일한 교회의 권위이며 성경에 기초한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6강을 통해 우리가 표적신앙이 아닌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소유하며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양식(31-34)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 사이에’는 사마리아 여자가 마을에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할 때를 말합니다. 또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가(8) 돌아온 때를 말합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27). 여자는 그때 갑자기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로 가버렸습니다. 모든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던 제자들은 사가지고 온 음식을 내밀면서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말하며 음식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는 것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시느라 그녀로부터 물도 얻어 드시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 지치고 피곤해야 할텐데 예수님은 전혀 힘든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변화된 사마리아 여자를 인하여 기쁨과 힘이 넘치셨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그만큼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양식은 힘과 기쁨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사람에게 먹는 기쁨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먹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입니다. 사람들은 값이 싸고도 맛있는 맛집을 찾아 다닙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식사하시면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을 정도였습니다(막2:1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힘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꼭 먹을 것이 아닌 다른 취미생활이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하면 쉼을 얻고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SNS를 하면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글을 올리면서 삶의 활력을 얻습니다. 또한 축구나 자전거, 등산이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를 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먹고 살아갑니다.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 기여하면 사람들이 “수고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라고 말해주면 힘이 납니다. 새로운 신제품을 기다리다가 먼저 사고 쓰던 것은 중고시장에 파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이런 육신의 즐거움도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틈만 나면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양식 뿐만 아니라 영의 영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바로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구원을 얻고 변화되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방황하던 한 영혼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만큼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가운데, 나의 동료 가운데, 나의 주변 사람 가운데 변하여 새사람이 된 이야기를 들으면 기쁨과 감동이 됩니다. 내가 오래 동안 기도하던 부모님이나 친척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 다니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고 성장하고 잘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나의 양식이 됩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보다 큽니다. 이는 마치 여자가 해산의 고통 후에 아기를 낳았을 때 태어난 새 생명으로 인하여 그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요16:21). 스바냐 3:17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 기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딤전2:4).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는 잃어버린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이 세상 즐거움을 찾아 세상으로 나갔다가 진탕 고생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돼지 냄새가 나는 그를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눅15:22-24). 이처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집니다(눅15:6). 잃어버린 한 영혼을 돌이키고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할 것을 염두해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녀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대화의 과정에서 여자의 반응이 점점 변화되더니 결국 자기 속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배에 대한 영혼의 갈증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녀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참 예배자였습니다. 그녀는 참된 예배의 대상이시며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를 만난 기쁨에 동네로 달려가 메시아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바뀐 여인의 모습을 볼 때 마음에 흡족해 하시고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기도할 제목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만 받고 나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것은 나를 통해 그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의 행복에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좋은 것을 늘 공급하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 살 때 존재의미가 있고 우리는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각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사명은 각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사명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사도행전 1: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하던 거라사의 한 청년을 고치시면서 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막5:19).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천국행 티켓만 따놓고 있는 신자는 아닌가? 나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가? 그 사명은 나에게 기쁨과 힘을 주고 있는가? 나는 그 사명을 억지로 하고 있는가, 자랑스러워 하는가? 나는 그 사명을 나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35)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고 말을 합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것은 추수를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로 사람들이 말한 것 같습니다. 또한 넉 달을 기다라면 추수를 할 수 있으므로 씨 뿌리는 자에게 열심히 씨를 뿌리라는 격려의 속담이라고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속담이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은 12월과 4월에 밀 수확을 했다고 하고 3월에는 보리수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확이 4월이 남았다고 하면 예수님의 때는 현재 11월에서 12월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파종과 추수 사이 4달의 시간이 필요하며 때가 되어야 추수하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보라” 하셨듯 고개를 들어 영적 수확을 하게 된 밭을 보라는 뜻입니다. NIV에서는 Open your eyes로 ‘눈을 뜨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영적인 눈을 떠서 영적인 눈으로 사마리아를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리킨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은 이제 막 복음이 들어간 사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증언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복음의 황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도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혼합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정통 신앙이 아닌 사이비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라고 말씀하심으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고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러 사마리아로 오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도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보십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아직 추수할 때가 될려면 넉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추수의 측면에서 볼 때도 사마리아인은 그들의 눈에 참 예배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실 때 그들은 참 예배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마음 밭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길가 밭’도 아니고 ‘돌 밭’도 아니고 ‘가시 밭’도 아니라 ‘좋은 밭’이었습니다(눅8:8). 그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었습니다(눅8:15). 우리는 예수님의 희망의 눈,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으로 여겨야 합니다. 한 때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복음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정기를 거쳐 지금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부요해지고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눈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와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탓하거나 살마들의 조건이나 외모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분석적이고 통계적인 사고로 복음역사를 바라볼 때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원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복음이 없어 방황하고 영적 기갈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그들 영혼의 필요를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멋있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기아 상태에 있으며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언제나, 어디나 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 영혼을 섬겼듯이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으시고 ‘작은 자’를 섬김으로 그들의 변화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키듯 우리는 희어져 추수하게된 밭의 알곡을 거두어 들이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말은 더 넓고 크게 보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세계선교 지상명령을 떠올립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세계선교 명령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셨던 유언적 명령으로 유언은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떠받들어 행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는 세계선교 명령을 그의 생애에 이루고자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죄수의 몸으로라도 가고자 하였고, 로마를 거쳐 당시 땅끝이라고 하는 서바나(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고자 계획했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것은 복음의 일꾼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고자 하는 자들은 많은데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어 그들은 여전히 고통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이에 우리는 이사야 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셨습니다(마9:39). 세상은 넓고 거두어야 할 곡식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습니다. 세계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추수할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눈을 들어 밭을 보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 곳곳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되어 있듯이 세계선교 기도제목을 놓치지 않고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에 힘쓰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특히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과 중국, 그리고 회교권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목회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신도가 세상으로 침투하기 딱 좋은 직분입니다. 요즈음은 세계화시대가 되어 해외에서 일하는 기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일하면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즈음과 같이 복잡하고 전문화된 시대에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복음의 일꾼을 양성하는 지혜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36-38)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라는 말은  당시에는 추수할 일꾼이 적어서 선불제로 했다고 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복음 역사에서 추수할 일꾼은 이미 영생을 선물을 받았고 거기에 더불어 영생의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기쁨을 누리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특징은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추수하면서 거두어 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기까지 4개월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처럼 생명의 열매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 각 사람에게 정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농부들은 곡식을 키울 때 매우 수고스럽지만 추수하는 즐거움은 그 동안의 수고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 또한 수고스럽지만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제자로 자라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한 영혼을 위한 노력과 수고가 크면 클수록 그 삯인 기쁨은 배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수고를 감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딤후4:8).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12:3). 한 영혼을 구원하는 수고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씨를 뿌리고 가꾸고 알곡이 맺히면 그것을 수확하는 수고만 할 뿐, 곡식을 키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전도하고 내가 제자로 키웠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남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를 구분해 놓으셨습니다(37). “한 사람이 심었다”에서 ‘한 사람’은 뿌리는 자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에서 ‘다른 사람’은 거두는 자를 말합니다. 뿌리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들은 대부분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박해하였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간곡한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를 전했지만 백성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죄를 지적하는 그들을 죽이기도 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씨를 뿌린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에 도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예비하였습니다. 거두는 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성육신하셔서 선지자들이 뿌린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마리아 여자와 그녀가 증언하여 몰려온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완성하신 구원역사의 열매를 거두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를 구분하셨지만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하셨고(36), 거두는 자는 뿌린 자의 노력의 결실에 참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즉 뿌린 자들은 노력하였다고 하였고 ‘너희는’, 즉 제자들은 뿌린 자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뿌리는 자는 고생만 하고 거두는 자는 노력하지 않고 열매만 거두는 영광만 누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영어로 보면 ‘노력하였다’는 것은 NIV에서 have done the hard work라고 해서 엄청난 수고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NIV에서 reaped the benefits of their labor라고 해서 그들의 노동의 열매를 거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그 누구도 뿌리려 하지 않고 거두려 들 것입니다. 뿌리는 사람은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 같고 거두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류는 열매를 거두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뿌리는 자가 없다면 거두는 자가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뿌리는 자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어느 한 부류의 일이 아니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거두는 자는 전임자의 수고를 거두는 것이고 그 거두는 사람은 또한 뿌리는 자가 되어 그 다음 세대가 그의 수고를 거두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뿌리고 거두는 일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뿌린 열매를 거두기도 하셨지만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씨를 뿌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고치는 일로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씨를 열심히 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드리셔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제자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자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 오천 명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회개하는 폭발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졌고 그들이 사는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로마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는 생명의 대수확을 의미합니다. 그 후 성경책이 만들어지고 복음은 문서의 형태로 더 넓게 멀리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계획이 급속도로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있는 믿음의 조상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가 수확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백성들의 마음을 예비하고 열심히 씨를 뿌리다가 헤롯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늘에서 수많은 영생의 열매를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겹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리셨지만 생명의 열매를 거두시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많은 열매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들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노력과 헌신의 합작품입니다. 우리는 뿌리는 자보다는 거두는 자가 되어 자기의 수고의 열매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있습니다. 뿌리는 자만 되어서 자기가 직접 거두지 못할 때 손해 보는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은근히 자기 역할에 불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뿌리는 자가 되면 거두는 자가 되고 거두는 자도 뿌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아예 속 편하게 뿌리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낫습니다. 뿌리는 일을 하다가 보면 저절로 거두는 일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역사가 흥해야 하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높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신랑을 신부에게 인도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기쁨을 자랑했습니다(요3:29-30).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역사이고(마13:3)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둡게 됩니다(시126:5). 

친히 듣고 믿은 사마리아 사람들(39-42)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여자의 증언으로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testimony)이었습니다. 저자는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의 증언이 어떤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언은 자기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증언은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고 일어났던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동감 있어 사람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증언이 있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습니다. 증언이 공감까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기뻐하지? 저 사람은 무엇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는 거지? 저 사람은 과거 저러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증언은 이처럼 예수님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 호기심과 관심을 갖도록 하게 합니다. 이것이 증언의 힘입니다. 증언은 거짓이나 과정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진실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드러낼 때 한 사람의 인생사(life history) 가운데 함께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그대로 말하라고 하십니다(눅8:39, 행5:20, 행1:8).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39). ‘내가 행한 것’은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라워 자신의 과거까지도 드러내며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드러내었습니다. 증언은 자기 자랑이 아닌 예수님 자랑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갈6:14).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하고 그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만을 드러내었습니다(딤전1:13-14). 여자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임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멸시 받는 사람들로 마음이 가난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겸손하여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 사함이 필요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요 참 예배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첫 번 제자들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인격을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소원을 매우 기뻐하시고 이틀 간 그들과 함께 유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드러내셨습니다.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천하고 냄새나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유대인이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틀을 유하신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뉴스거리입니다. 하물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황태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멸시받는 그들과 함께 유하심을 알았을 때 그들은 넘치는 은혜에 더욱  감격하고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39절의 “여자의 말이 … 증언하므로” (because of the woman’s testimony)와 41절의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because of his words)가 대조가 됩니다. 증언이 예수님께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반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증언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인도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마음을 예비시켜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증언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중매장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견고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는 모임으로 적극 안내함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고한 믿음은 성경공부를 통해 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자를 만나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여자의 증언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NIV를 보면 We no longer believe just because of what you said로 “더 이상 네가 말한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증언을 통해 믿게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no longer)’ 그녀의 말을 통해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친히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통해 볼 때 ‘친히 듣는’ 것이 우리의 견고한 믿음에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됩니다. 이 구절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호소합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16:13-17).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은’ 제자들은 ‘구원자 예수님’으로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정확히 알고 믿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면 빛이 보입니다(시119:130). 주께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로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어 그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엡 1:17~18, 3:18~19, 고후 3:14~16, 4:6). 

왕의 신하의 간구(43-48)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께서 수가에 이틀을 머무신 후 그곳을 떠나셔서 원래 가고자 하시던 목적지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정을 보면 매우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관심이 있지 지나가는 곳은 무시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나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심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메시아 사역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이 사역지였습니다. 우리의 사명의 땅도 내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전도의 대상도 내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이를 가리켜 관계 전도라고 합니다. 나와 관계성 있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전혀 모르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전도하셨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간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모든 것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보내신 섭리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면서 친히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44). 마태복음 13:54-56에 의하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 기적을 행하셨던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으로 보아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과 친분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1).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과의 친분관계 때문에 그것이 편견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을 보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달리 서술한 이유는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인간적인 편견에 가리워져 예수님을 영적으로 바라 보지 못함을 강조한 것인 반면, 요한복음은 흐름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마리아와 비교하여 기적을 보고 믿은 갈릴리 인들의 믿음의 초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후 소개될 왕의 신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믿는 믿음보다 말씀을 믿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표적과 기사에 집중하는 아주 초보적인 믿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 그리고 왕의 신하의 믿음을 갈릴리 사람의 믿음과 비교하심으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지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이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을 베푸신 후 두 번째 방문입니다. 그때 가버나움으로부터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와서 병든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이렇게 먼 곳에서 달려와 간구하는 것을 볼 때 그의 간구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의 신하로 추정됩니다. 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을 볼 때 그는 유대인으로 추측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는 당시의 말에 기초해 볼 때 유대인들이 표적 신앙을 추구했던 것을 보아 그가 유대인일 가능성이 큽니다(고전1:22). 그가 예수님께 오게 된 동기는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자기 아들을 능히 고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표적을 따라다니는 일반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도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표적과 기사를 따르는 무리 중 하나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는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이신 줄 모르고 표적과 기사만 따르는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표적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3:2). 니고데모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적 같은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적만 바라고 예수님이 누군지에 관심이 없는 신앙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표적신앙’이라고 합니다.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 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보다 표적에 관심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는 선물만 바라고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에 대해 무관심한 아이와 같은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적신앙과 유사한 성격의 신앙은 ‘구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함으로 자기가 구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다고 간증합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성공과 축복과 번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배우고 제자다운 인격을 갖추는 것에는 관심이 적습니다. 영성은 추구하지만 영성에 걸맞는 도덕성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의 양상도 많이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인에게서 “저런 모습은 크리스천의 모습은 아닌데” 하는 것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닮고자 하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축복과 특권에만 관심이 있는 경우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는 ‘표적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은 왕의 신하(49-54)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회의적인 반응에 섭섭해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며 재차 간청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치료자가 되심을 믿었지만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치료자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그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책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를 올바른 믿음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의도를 갖고 계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책망의 말씀을 들었을 때 포기하고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간구하면서 빨리 오셔서 아들을 낫게 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간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간구한 대로 동행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그가 나았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은 아무 방법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동행하지 않으시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는 말씀은 아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지, 병이 저절로 나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먼 곳에서 고치셨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동행해 주실 것을 막무가내로 간청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그는 그의 종을 만났는데 종들은 아이가 살아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왕의 신하의 반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나음 받았다는 것 자체가 기뻐서 발걸음을 재촉했을 터인데 그는 종에게 열기가 떨어진 시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종은 어제 일곱 시, 즉 오전 1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한 바로 그 시각이었음을 알고 놀라워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표적은 단순한 기적과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담긴 기적입니다. 두 번째 표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믿는 신앙은 가장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은 기초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기적신앙도 신앙 출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적신앙의 약점은 기적 자체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병고침을 받는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 눈 앞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고도 말씀 자체를 믿는 신앙의 단계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두 번째 표적은 바로 말씀 신앙을 가르치기 위한 메시지가 담긴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요구한 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는 왕의 신하에게 더 좋은 믿음을 선물로 주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께서 그와 동행하지 않고는 절대로 갈 수 없다고 하며 재차 간구했더라면 이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불신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왕의 신하는 눈에 보이는 증거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구하지 않고 말씀을 믿고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종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수님이 나았다고 말씀하신 시각과 아들의 열이 떨어진 그 시각이 일치하는가?’ 였습니다. 그는 그 시각을 비교해 보니 정확히 딱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지 치료자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표적 신앙에서 말씀 신앙으로 더 깊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리를 초월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성장 단계를 보면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 매달려 간구하는 ‘간구 신앙’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붙들고 집으로 향해 가는 ‘말씀 신앙’, 아들이 나음 받았을 때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시각이 일치했을 때 체험했던 ‘확신하는 신앙’, 이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을 온 집안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증인 신앙’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

About Me

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테고리

Bible spring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