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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17-48)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달리 힘이 있고 권위가 있었으며 구약의 율법과는 달리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구약의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것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뛰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 중 여섯 가지를 들어서 그것을 어떻게 완성시키시는지 반제(antithesis) 형식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행위의 살인을 뛰어 넘어서 마음의 살인인 미움과 분노의 문제를 다루셨고, 행위의 간음이 아닌 마음의 음욕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의 문제를 다루시면서도 음행한 연고 없이는 이혼하면 안된다고 못박으셨으며 도무지 맹세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결코 폭력을 쓰지 말고 무한히 참을 것을 말씀하시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완성시킨 여섯 가지 새로운 율법은 새롭고 감동적이지만 신자들이 실천하기에 불가능한 것 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너무 탁월하고 수준이 높아서 단순히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도록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아버지를 닮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선지자는 시가와 선지서를 가리킵니다. 폐하러 왔다는 말은 효력을 제거하다, 무효화시키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여겼습니다(7:29). 율법에 가장 큰 열성을 보인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나의 규례로 가르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 일하지 않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휴식의 대상은 종과 나그네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이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어서 세부규칙을 만들어 구체화시켰습니다. 그래서 39가지의 규례를 만들고 각 규례에 6개씩의 해석을 붙여 234개 조항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들의 병을 고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12:13). 제자들은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12:1).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어긴다고 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완전히 율법을 무시하고 구약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성전 제사를 완전히 폐기하는 말씀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이단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미완성된 것을 완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의 부족한 부분을 완성함으로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점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일까요? 율법이 제정된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직후였습니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우상숭배 문화에서 율법이 없이 살아왔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많은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들의 수준을 생각해서 높은 수준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제시한 것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랍비들은 구약의 율법을 하나의 성문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미쉬나’입니다. 그런데 미쉬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서 일상생활에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미쉬나에 기초해서 그 해석작업을 했는데 이것이 ‘게마라’입니다. 그리고 게마라와 미쉬나를 하나로 모은 것이 바로 탈무드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은 모든 사람이 다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로마 권력에 빌붙어서 현실적인 유익을 취했던 자들로 구약성경 중 모세오경만 믿었고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행 23:8). 반면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일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하며 당시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전승을 포함하여 율법의 모든 사항을 낱낱이 지켰습니다. 안식일 법을 만들어 일하지 않기 위해 일정 거리 이상을 걷지 않았고 일정 무게 이상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의 금식과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조항에만 집착하였을 뿐 율법의 근본 정신인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렸습니다(23:23).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무시하고 비난하였습니다(눅 18:11-12). 엣세나파는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파와 같았지만, 현실 도피적이며 은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따로 모여 자기들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끈끈하게 뭉쳐 살았지만 외부 사람에게 대해서는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외부 사람에 대한 백척은 율법의 근본 정신 중 하나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을 지켰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율법을 만드신 율법의 창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만드신 분으로 이제 율법을 완성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 역사를 완성하시고 율법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율법의 조항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내면적인 의미를 제시함으로 더 강력하고 완전한 율법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나라를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로 확대하였습니다. 율법도 유대 사회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 넘어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도록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하게 하신 율법은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색채로 탈바꿈한 온전한 율법입니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이 일점 일획이라도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문자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을 나열하여 썼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세시대에는 히브리어를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히브리 학자들이 점과 획으로 된 모음 체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자음 밑에 붙여 놓아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점과 획은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점과 획이 아닌 글자의 세세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사실 히브리어는 알파벳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 꼼꼼히 봐야 한다고 합니다. 즉 율법의 가장 작고 세밀한 것까지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부분까지 참되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작은 계명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크고 무거운 계명은 중요하고 작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게 되면 큰 것과 작은 것을 사람이 판단하게 됩니다. 자기 기호와 평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취사선택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읽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신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오늘날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않더라도 성경 전체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발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설교의 주제가 십자가와 회개와 심판에 관한 것이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어느 부분이라도 소홀하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작은 자는 ‘작은 것을 버리고 (취사선택해서)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고 천국에서 큰 자는 ‘작은 것을 행하며 (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자’로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먼저 행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버리지 않고 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영적 소원을 갖고 알고자 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으로 돌리지 말고 누구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나름대로 해석하지 말고 문맥 속에서 흐름을 따라 이해하고자 해야 합니다. 자기에 맞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전체를 이해하는 것도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행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대단히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암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였으며 십일조를 비롯하여 하나님께 헌신적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였습니다. 그들은 38년 동안 병자로 누워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은 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자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하며 나무랐습니다(요 5:8). 그들은 안식일에 무거운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이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드로 생각하고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과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율법의 항목을 지켜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들이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면 제자들은 사흘을 금식해야 할까요?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해 안식일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를 더 짧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온전하게 구현해 내는 것을 의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7-48절에서 613가지 계명중에서 여섯 가지 예를 들어 제자들이 어떻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야 할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살인에 대한 계명(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48절에서는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라(You have hear that … But I tell you …)”라는 대칭 구절이 6회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제시하고 그것과 비교하시면서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요 율법의 완성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은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고 완성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을 통해 그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제는 만민의 구주 예수님의 오심으로 계명의 범위가 넓어짐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천국 백성으로서 완성된 계명에 기초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들에 의해 그것을 해석하고 지키기 위해 수많은 해석과 시행규칙들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는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율법이 제한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의 해석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그 범위가 전 세계의 구원받은 천국 백성에게 확대된 만큼 본질적 차원으로 되돌아가서 보편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에서 제 6계명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살인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파괴하는 극악한 범죄입니다. 이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형사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의 행위 뿐만 아니라 살인의 동기까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분노와 욕과 경멸을 살인 죄로 규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의 시작이 분노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가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로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이 하나님께 반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4:5). 그의 분노는 동생에 대한 시기심으로 바뀌었고 결국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창 4:8). 그는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았고 이에 죄가 문에 엎드렸다가 그를 덮쳤습니다. 그는 마음의 분노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끔찍한 살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노의 감정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욕하는 것과 경멸하는 것까지 살인 죄라고 보셨습니다. “라가”라는 뜻은 “텅 비었다”는 의미로 우리말에 ‘골빈 놈’이라는 뜻입니다. 욕설은 듣는 자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는 독화살과 같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욕설은 친근감의 표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욕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무계획적이고 충동성이 높다고 합니다. 또한 어휘력이 낮아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뇌 속에 프루닝(pruning)이라는 ‘가지치기’ 작업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기에 욕을 많이 사용하면 뇌에서 좋은 가지가 오히려 잘려지고 안 좋은 가지들이 더 늘어나게 됨으로 어휘력이 낮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정, 행동, 동기부여, 기억, 후각 등을 관장하는 변연계에 이상을 일으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심해지면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EBS 다큐프라임). 이는 욕과 살인 충동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무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은 조롱과 경멸을 받을 때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습니다. 그들은 미움과 복수의 감정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살충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욕설과 경멸을 살인 죄로 규정하고 마음의 동기와 충동의 근원적인 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관찰해보면 점층법을 써서 살인의 동기에 관련해서 분노 → 욕설 → 경멸의 순서로 점점 강도가 증가하고 이에 대한 심판도 심판 → 공회 → 지옥 불의 순서로 강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마음의 죄를 다루지 않고 오직 드러나 행동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법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동만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백성의 법은 마음의 법을 규제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갈등으로 인해 서로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마음에 분노와 원망과 미움이 쌓이고 관계된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괴로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기도하면 마음이 걸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예배에 기쁨이 없습니다. 자꾸 갈등한 사람이 생각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상처를 받았을 경우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자신이 상처를 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상처 받은 것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복수의 마음을 갖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루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가해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면 다 된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실 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처 받은 사람의 입장에 서십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하지도 않고 자신은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 해결되었다고 하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유리 그릇과 같아서 이것이 깨지게 되면 다시 복원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은 피해자의 마음이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상처받은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화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를 방치하게 되면 형제의 마음에 분을 일으켜 살인의 원인이 되는 복수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죄를 다시 짓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간에 자신의 안에 분노와 미움과 혐오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했던 죄를 사과하고 화해하고 관계성을 회복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제 6 계명인 살인의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우리의 내면의 투쟁입니다. 우리는 사람 사는 곳이면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묻어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예수님은 이런 마음의 분노와 미움과 혐오의 감정을 살인 죄에 해당할 만큼 아주 심각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이 유리 그릇과 같아서 깨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데 온전히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이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사 53:3). 우리는 인간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 죄로 인한 아픔이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 그 몸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죄로 인해 받은 상처를 낫게 하고자 채찍을 맞으시고 그 몸을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못박은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죄 사함과 회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평안을 누리고 모든 상처로부터 회복하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을 때 응어리졌던 모든 마음이 녹아 없어지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한편 다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예민한 마음을 주셔서 나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에 대해서 진심의 사과를 하고 관계의 회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당장에 관계가 회복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의 긍휼을 구하는 가운데 모든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음을 믿고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엡 2:14-16).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5-26절은 개인 간의 사소한 다툼이 법정 다툼으로 갈 경우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개인 간의 다툼의 문제를 법정으로 가기 전에 속히 당사자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는 법정으로 가는 길이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에 불신과 반목과 미움만 키웁니다. 잠시 자존심을 죽이고 사과하여 해결할 문제를 자존심 때문에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자존심 때문에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법정 다툼으로 가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원수가 됩니다. 미움에 기초한 감정적 분노가 얼마나 문제를 키우는 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하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속히 화해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피해를 입힌 자가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아 재판에 넘겨지면 재판관은 “옥리(officer)”, 즉 교도관이 그를 옥에 가두게 됩니다. 가해자는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엡 4:26-27). 

여기서 한 푼은 가장 작은 화폐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 화폐인 1렙돈으로 로마 돈 1/2고드란트를 말합니다. 이 말은 빚진 자는 한 푼도 남김 없이 가 갚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것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다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거기는 감옥인데 이는 영혼의 감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로 나아가야 하는데 형제에게 작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마음의 짐으로 남아서 참 평안과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감옥에 가둠으로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푼”과 같이 작고 사소한 죄까지도 회개하고 자신의 영혼을 감옥에 가두어 두지 않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작은 것 죄 하나라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제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하고 자기 죄에 대해서 엄격해야 합니다. 

간음에 대한 계명(27-32)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 죄는 십계명 중에서 제 7계명입니다. “간음”은 부부 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행해지는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말합니다. 간음은 혼인서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 공동체 파괴하는 큰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음욕까지도 간음이라고 합니다. 음욕을 품을 때 이성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며 성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부라는 테두리를 정해 놓으시고 성적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대상에 대해 음욕을 품을 때 자기 배우자에 대해서 사랑의 대상이 아닌 성적 도구로 취급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 속에 품고 있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됨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인사들이 성추문으로 인해 낙마하고 온갖 오욕을 뒤집어 쓰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도 마음의 음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마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자기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맹세와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음욕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전 성관계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청년의 때의 부도덕한 삶은 결혼 후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로 인해 가정을 얼마 가지 않아 파괴되고 이혼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집니다.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슬픔과 아픔을 갖고 살게 되며 바르게 성장해야 할 나이에 삐뚤어진 가치관이 형성되어 사회적 문제가 됩니다. 청년의 때에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자는 결혼 후에도 자기 배우자에게 충실하며 가정을 지킵니다. 안정된 가정 배경에서 인격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선한 영향력을 받아 건강한 가치관이 형성되고 긍정적인 자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이 결국 부도덕한 삶으로 이어지고 결혼 후에도 그 부도덕한 습관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불행을 낳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음욕을 말씀하시면서 어느 정도까지 죄와 싸워야  하는지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른 눈이 범죄하게 하면 그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일 오른손이 실족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의 지체 중 범죄의 도구로 눈과 손을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많은 죄를 짓습니다. 죄의 상상력이 눈을 통해 넘나 듭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보며 영적인 눈을 떠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보며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눈꺼풀도 주셨습니다. 눈꺼플은 눈을 보호하기 위함일 뿐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 대해 눈을 감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은 정교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지체입니다. 그런데 손으로 칼을 쥐고 강도짓을 하거나 손으로 다른 사람을 폭행하는 것과 같이 범죄에 쓰일 수 있습니다. 살인도 손으로 범죄하는 것으로 살인하다는 것을 손에 피를 묻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이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깨끗한 마음을 위해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막 7:3).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선고하면서 자신은 이 죄에 대해 무죄하다고 하여 손을 씻었습니다(마 27:2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시 24:3-4). 그런데 우리의 중요한 지체인 눈과 손이 범죄하면 빼어버리고 찍어 내버리라고 하심으로 잔인하고 과장된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1-32절은 이혼에 관한 계명입니다. 구약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 주도록 했습니다. 모세 당시 이혼증서를 허락한 이유는 이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여자들이 재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을 이용하여 남자들이 정당한 사유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가지 조건을 제외하고는 이혼을 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의 유일한 조건은 음행입니다. 음행은 결혼서약을 흔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혼 사유를 보면 사소한 문제 때문에, 감정적 충돌로 인하여, 성격 차이로 인해 충동적으로 이혼을 합니다. 사람들은 결혼도 쉽게 하고 이혼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이혼을 한 몸을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이혼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혼이 가져다 주는 수많은 아픔이 생기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혼이 보편화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엄청납니다. 한 사람의 음행은 이처럼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가정이 깨어지면 사회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천국 백성은 가정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가정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가정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가 있을 경우 예수님을 바라보고 서로 용서하며 용납하고 요구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영접함으로 인해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22-33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 지에 관하여 설명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여야 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습니다. 결혼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편들이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함으로 ‘사랑과 존경의 원리’를 말하였습니다. 남편은 기질상 존경받기를 원하고 아내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존경할 꼬투리가 없어도 남편이라는 것 자체로 존경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존경’의 원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원리와 같습니다. 

맹세에 대한 계명(33-37)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 23:16-22을 보면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맹세하는 방법에 대해 열거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이나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였고, 제단과 제단의 예물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또한 하늘과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두고 맹세하였든 그것은 하나님께 맹세한 것입니다. 율법은 맹세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신 23:21-23). 만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레19:12).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믿게 하기 위해 맹세를 합니다. 맹세를 할 때 자기보다 높은 대상이나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특히 상거래를 할 때 거짓 맹세를 하여 상대방을 속이고 망하게 하는 일을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늘로 맹세를 하였는데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으로 맹세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예루살렘으로 맹세를 했는데 이는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머리로 맹세하였는데 이것조차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머리털은 사람이 희고 검게 할 수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검은 것은 청년의 때를 말하고 희게 하는 것은 노년의 때를 말합니다. 즉 머리털이 색이 바뀌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이 머리털조차 하나님이 세신 바 되고 희고 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두고라도 맹세하지 말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맹세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단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지나는 것은 악이라 하셨습니다. 옳다, 아니라 하라고 하신 것은 애매모호한 답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을 하여 상황에 따라 빠져나갈 탈출구를 마련해 둡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정치적 수사를 사용하여 자기가 한 맹세로부터 빠져나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 때 그렇게 말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한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애매모호한 수사를 재해석해서 자기 책임을 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하고 정직한 자는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상대방이 믿게 하려고  맹세하는 표현을 알게 모르게 많이 씁니다. 영어에서는 I swear, I promise라는 말을 쓰는데 이말은 “맹세코”, “정말이야”라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져”, “내 성을 갈거야”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시작부터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믿게 하려고 하는 헛 맹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이 아닌 상대방을 믿게 하려고 과장된 말이나 속이는 말을 금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맹세한 것을 지키는 데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확신에 찬 맹세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켤로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습니다(26:33). 또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습니다(26:35). 그러나 그는 그의 맹세와 달리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26:69-75).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낙향하여 할 일이 없어 다시 어부의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심으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 베드로는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연약한 것을 잘 알고 자기의 사랑에 기초해서 대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에 기초해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에 기초한 맹세가 아니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결단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을 갖고 자기 말에 책임을 지키고 맹세한 것을 이루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음 받지 않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않아야 합니다. 또한 애매한 말로 불리한 상황에 대비하여 빠져나가려 하지 않고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여 정직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많이 맹세한 것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고자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니거나 작은 사실을 부풀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로 인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복에 대한 계명(38-4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38-42절은 보복에 관한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율법은 레위기 24:19-20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 상해를 받은 만큼 벌을 가하도록 하는 법률입니다. 이를 동해보복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감정에 치우쳐서 죄값 이상으로 보복하므로 인해 계속 반복될 보복의 악순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고 있고 동해보복법에 의해 공적인 재판을 통해 벌을 가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예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뺨을 치는 것은 엄청난 모욕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치려면 손등으로 때렸습니다.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더 모욕적이라고 합니다. 동해보복법에 의하면 재판을 걸어 상대방에게 동일하게 오른쪽 뺨을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왼편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또한 상대방이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합니다. 속옷이나 겉옷은 물질적으로 큰 돈이 되지 않습니다. 즉 사소한 것 때문에 법정에 가서 그 사람과 관계성이 깨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질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이익에 얽매여 포기하지 않고 얻으려다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함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얻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고전 9:19-22). 그는 복음을 위해 얼마든지 자기를 비우고 손해를 감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데 민간인을 징발할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병사가 민간인을 지목하여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하게 하면 그는 오 리, 즉 1.6 킬로미터 정도 옮기는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너무 힘들어 하시자 로마군병은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눅 23:26). 이런 상황에서 오 리를 동행하고자 하면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해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의 예, 즉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게 할 때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상대방은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깨다고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감동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악한 의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오히려 선을 행하는 쪽이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가해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 불의가 스스로 정죄받게 함으로 악인들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롬 12:20).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게 되면 분명히 뜨겁다고 반응할 것입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큰 영향력을 준다늘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동에 대해 감동을 받는 사람이라면 괜찮은데 우리의 선한 행동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구나 직장의 동료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는데 나중에는 그들이 나의 선한 의도를 이용하고 나의 도움을 당연한 듯이 여기데 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잘 도와주었는데 자꾸 요구하여 내 일 하기도 힘든 경우 과연 도와주어야 할까요?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나 자신 하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만일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오히려 나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 잡아 먹으려는 이리 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리 떼 가운데 순한 어린 양과 같이 위험하고 그들에게 뜯겨 먹히기 딱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6). 우리는 항상 마음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하고 이와 같이 난처한 상황에서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들에게 뜯어 먹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난처한 상황에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이리 떼 같은 세상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수처럼 연약한 신자들을 이용하고 이리처럼 물어 뜯고자 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경우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이 친히 갚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롬 12:17-21).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방이 악을 행한다고 나도 같이 악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세상 통치자를 세우시고 공적인 사법 체계와 징벌 규칙을 허락하셨습니다(롬 13:4). 

원수 사랑에 대한 계명(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47절은 원수에 대한 계명을 다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옛 계명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옛 계명은 특정한 구절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원수에 관한 언급은 레위기 19:18에 나와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구절은 원수를 갚지 말고 원망하지 말며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웃 사랑은 자기 동포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할례 없는 백성이라 하여 외인 취급을 하였고 그들을 원수처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방인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고 이웃 나라들의 침공을 많이 받은 것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천국백성은 이방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이런 유다이즘 때문에 매우 마음에 거북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 선교를 하는 것을 내심으로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 가운데 성령을 허락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이방 세계에 교회가 세워지자 그들은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영접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시기는 본격적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이 들어가기 전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동포들은 사랑하지만 이방인과 같은 원수는 사랑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관한 정의를 내리실 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29-37).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마음을 넓혀 그들이 생각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무지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을 미워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함으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이를 통해 그들 마음에 생명의 복음이 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 기도했습니다(행 7:59-60).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복음 전파가 주춤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순교의 피로 인해 복음의 불씨가 사방으로 흩어져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행 8:1). 스데반의 순교를 지켜보고 있던 사울도 그의 용서의 기도를 통해 회심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는 인간의 감정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에 부어 주시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동자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고 예수님처럼 용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원수가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5절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차별하지 않고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당장에 심판하시지 않고 그들이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영접하고 악인이나 선인이나 가리지 않고 다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악인은 자기에게 못되게 구는 자를 말하고 선인은 자기에게 잘 해주는 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세리들도 자기들끼리 사랑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러나 자기와 다르거나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믿는 사람끼리 뭉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편의를 봐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서로 챙겨주고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조롱하고 박해하는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적대시하기 쉽습니다. 심지어는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물들지 않기 위해 그들을 배척하고 소외시키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기득권이 되었을 경우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배척하고 혐오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 대해, 특히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벽을 쌓고 적대시한다면 그들도 신자들을 경계하고 미움을 갖게 하여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영접할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되지만 세상을 배척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거론하신 세리도 자기들끼리 사랑하는데 우리들끼리 똘똘 뭉쳐 자신들의 세계만을 구축한다면 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서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사람과 달리 비범성과 탁월함을 소유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돋보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47절에서 “형제”는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 있어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나에게 잘해주고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해주는 자에게 문안합니다.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고 잘되고 건강하기를 빕니다. 이렇게 공손하게 대하고 덕을 베푸는 일은 이방인, 즉 불신자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48절에서 높은 목표를 제시하셨습니다.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48절에서 그리스도인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도 온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흠이 없고 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외모에서나 기질적으로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입니다(벧후 1:4).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사랑의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목표가 없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뜻조차 갖지 못합니다.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목표가 있고 그로 인한 상이 따를 때 우리는 그것을 얻으려고 달려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합니다(벧전 1:16).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는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요일 3:23). 제자의 탁월함의 으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인생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 용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엡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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