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좁고 길이 협착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길이 넓고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입니다. 여기서 주는 메시지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권하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대다수가 가는 쉽고 편한 길을 가지 말고 소수가 가지만 험하고 힘든 길을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넓은 문은 멸망의 길이고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을 구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자는 생명이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는 자는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좁은 문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지만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냐, 대다수가 가는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삼가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의 행실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이 되는 말씀으로 지혜로운 건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집을 말씀의 반석 위에 짓도록 말씀하심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는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에서 행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셨습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옥같은 산상수훈 말씀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수준이 너무 높아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부담스러워 합니다. 한편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돋보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더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르고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삶에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좁은 문이라 부르신 것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불편하고 힘든 길입니다. 길이 좁고 험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보편적인 길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넓고 평탄하고 안전하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길게 보지 않고 당장의 급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으로 봅니다. 그들은 인생의 결국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기를 금기시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를 말할 경우 종교와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과 선택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영생의 문제를 담론으로 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의 결국을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결국을 생각하고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는 우리 인생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들이 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핏 보면 좁은 문과 넓은 문을 구분하는 기준이 “좁고 힘든 길이냐, 넓고 편안한 길이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좁고 힘든 길이라고 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좁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갔습니다. 철저하게 금욕하는 삶을 살았고 인생의 낙을 부인하며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중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영생의 길을 가고자 험하고 좁은 길을 갑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길 자체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좁은 문과 넓은 문을 구분하는 기준은 얼마나 힘든 길이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넓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생길이 있는 것 같지만 크게 나눠보면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로 나누게 됩니다. 험하고 힘든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평탄하고 넓고 편안한 길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든 길이냐, 편안한 길이냐로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이냐, 멸망의 길이냐로 구분하셨습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 상대적으로 힘들어 보일 뿐입니다. 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세상사람과 다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넓은 길을 가는 자들은 좁은 길을 가는 우리를 향하여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자기들 편에 서지 않는다고 박해를 합니다. 또한 좁은 길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거슬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라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데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이런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하여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는 느즈막한 나이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 그 곳은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그 약속은 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여 회의와 낙심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는 땅을 선택할 때 살기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쉽고 화려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악의 도시 소돔 성에 살면서 그들의 죄악된 영향을 받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멸망한 소돔성에서 이끌어 내었지만 그는 딸들과 근친상간을 하여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삶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여 안심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천성으로 가는 순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좁은 길을 가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실생활 가운데 적용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산상수훈 말씀처럼 제자의 탁월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해야 하며 세상의 죄악과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높은 도덕 수준을 추구하며 자기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내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자도의 대가”의 첫 번째 글인 <귀중한 은혜>에서 “값싼 은혜”를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공짜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얻은 은혜라고 해서 그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킨 대가로 주신 은혜입니다. 그것이 너무 비싸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값싼 은혜로 여기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대로 넓은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라(15-16)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갑자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들을 언급하신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가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대언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을 다르게 가르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도록 안내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깊게 살펴서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삼가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리더이기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은 자들은 회의와 의심에 빠집니다. 그들은 균형 있는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힘들면 적당히 하도록 말합니다. 분명하게 회개하고 자기 부인을 해야 할 때 다른 사람도 다 그렇다고 하면서 위안을 줍니다. 특히 죄악된 세상적 영향력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불신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영광을 취하며 자기 이익에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구약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선지자를 통해 회개와 재앙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들의 메시지가 부담스러워 그들을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돈을 위하여 예언하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미 3:11).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귀에 듣기 좋게 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과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렸고 공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패하고 썩은 무덤과 같은 자들이었지만 이를 은폐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율법의 지식을 독점하며 그들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의 문을 차단시켜 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눅 11:37-54). 거짓 선지자는 우리가 말하는 이단이나 무신론자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들일 수도 있고 경건하게 보이는 크리스천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신자라고 칭찬과 인정을 받지만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위로와 희망과 용서와 평안과 번영과 축복의 메시지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책망, 자기 부인과 십자가, 제자도와 전도에 관한 말씀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산상수훈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우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제자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도달하지 못할 너무 수준 높은 말씀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춰버립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지 못하고 왜곡하고 변형하여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축복과 번영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축복과 번영을 주시되 십자가와 고난과 함께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9-30).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버리라”고 하셨고 축복과 번영을 말하지만 “박해”를 겸하여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변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우리는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이는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열매는 사람의 행실을 말하는 것으로 꾸밀 수 없고 열매는 거짓말하지도 않습니다.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력을 포함합니다. 겸손과 순종, 헌신과 사랑은 생명의 열매이지만, 거짓과 교만, 불순종과 허영과 탐욕은 죄악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땅에서 나는 것을 말합니다(창 3:18). 이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다른 유익한 작물들을 해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작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거해야 합니다. 이들에게서 포도와 무화과를 기대했다가는 농사를 망치고 맙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이런 선한 것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세상의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교회로 갖고 들어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감춥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 의로운 척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딤후 3:5). 우리가 기독교 기본교리가 약하면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잘못된 신앙, 치우친 신앙을 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이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은혜와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의미와 대속, 부활과 영생에 대한 분명하고 건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의 삶을 부담스러워하고 그냥 신자에 머물고 적당히 예배만 드리는 삶에 만족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절실한 문제는 금식기도를 해서라도 간절히 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과 말씀 순종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기 쉽습니다. 세상과 짝하여 허영과 돈을 자랑하고 사람의 박수를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에게 유익되는 것만을 찾고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킬 것을 찾기 쉽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내 속에 있는 가시와 엉겅퀴를 솎아내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되어 그 안에서 자라며 좋은 열매를 맺기에 힘써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17-19)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에 따라 결정됩니다. 열매는 한 사람의 행실을 가리키며 나무는 그 사람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과정이 좋아야 결과도 좋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과정이 허술하거나 편법으로 되어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편법으로 만든 결과는 위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래는 좋은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돌감람나무로 돌감람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참감람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무 자체가 바뀐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진액을 빨아들여 극상품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주인은 줄기로부터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도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결산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맺은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을 경우 그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가지임을 기억하고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5:7).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게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흐름에 기초한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는 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백성은 천국의 백성답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지만 그가 정작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뜻을 거슬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합니다. 이들은 15절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외치면서 간절히 매달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복음의 핵심에 관심이 없고 세상적 축복을 바라는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순종을 동반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구하기보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심지어 능력을 행하며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구약에 애굽의 마술사들도 기적을 행하였고 이방인 발람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서 사도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언의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나는 너를 하리라
“그날”(22)과 “그때”(23)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예외 없이 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십니다(25:19). 그날에는 모든 마음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또한 숨겨진 위선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적 연기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것을 자랑합니다. 이방인 주술사 발람도 예언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한 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만족과 기쁨과 이익을 위해 주의 이름을 잠시 사용했을 뿐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신적 능력을 가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악인을 통해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귀의 힘을 빌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신 13:1-2). 예수님도 말세의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24). 크리스천 중에는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나를 모르신다고 한다면 이것처럼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밝히 말하되”는 plainly(NIV)로 ‘분명하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큰 일을 행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뜻인 은혜와 믿음의 진리를 붙들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일을 행하지만 은혜와 믿음의 진리를 버리고 자기 의와 행위를 자랑한다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에 나타난 천국복음을 우리 삶에 실천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합당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일지라도 우리의 의와 업적이 앞설 때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역이 자기 영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의 일을 하지만 도덕성이 따라가지 못하는 신자가 많습니다. 신자의 윤리 수준이 불신자보다 더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가 권력 다툼이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사회적 악영향을 끼칩니다. 굵직한 부정부패나 스캔들로 인해 구속이 되는 사람들 중에 교회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에서 많은 헌금을 하고 사역의 큰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때 심판대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등 은사가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윤리의식이 희박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적 타락과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였고 서로 당을 지어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15장에서 그들이 받은 복음을 상기시킴으로 순수한 복음 진리로 돌아가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큰 기여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주님이 인정하시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셈이 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의 비유(24-29)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리시면서 말씀에 대한 자세를 가르치셨습니다. 24-27절에서 비유가 가리키는 것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석”은 “나의 이 말”이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집”은 ‘인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5-7장에 걸쳐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건축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두 종류의 건축자가 나옵니다. 하나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건축자이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와디라는 강이 있습니다. 그 곳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가 확실히 구분됩니다. 우기가 되면 강에 물이 생기고 건기에는 강에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기에 강가에 집을 짓는다면 우기에 비가 쏟아지고 강물이 흘러 넘치면 강가에 지은 집은 떠내려 갑니다. 강가의 모래에 집을 짓는 것은 쉽습니다. 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러나 반석에 지은 집들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강물이 덮칠 염려가 없습니다.
반석 위에 집은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건축자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듣고 행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듣고 행하는 삶은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생활입니다. 세상의 영향력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가까이 가는 생활입니다. 이는 세상을 등지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 들어가서 적극 선을 행하고 천국 백성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삶입니다. 주의 말씀의 빛을 비추이고 소금과 같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삶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로 살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의 삶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계십니다.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고 그들의 말은 그리스도를 주어가 되어있고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멀리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모여서 같이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매일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주와 보석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만 이를 행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은 건축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설교 시간에 집중하지 않으며 졸음을 참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잠들지 않고 주일날 몽롱한 상태로 예배에 임합니다. 주일날 교회 예배를 드리지만 성도의 교제를 빼먹고 급하게 자기 볼 일을 위해 교회 문을 나섭니다. 연휴가 있으면 예배를 생략하고 나들이를 다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냥 그 수준에 머물러 있고 더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만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어서 새가 와서 그 씨를 먹어 버립니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거나 마음이 분주하여 귀 기울여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일에 바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일에는 게으릅니다. 어떤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어 말씀을 기쁨으로 잘 받습니다. 그들은 아멘하고 주의 말씀에 화답을 잘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힘든 일이 있거나 박해를 받거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 할 때 인내하지 못하고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리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것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고자 하지만 주님께 염려와 짐을 맡기지 못합니다. 그들은 말씀도 사랑하지만 세상의 유혹과 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자꾸 넘어집니다(막 4:1-20).
이 비유에서 우리 인생의 과정에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가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때만 생각하지 않고 비와 창수와 바람의 때를 대비하여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비와 창수와 바람은 특정한 사람에게 닥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환난이 닥칠 때 “왜 나만?(Why me?)”라고 말하면서 억울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상황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역경을 기회로 활용합니다. 그들은 역경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그들에게 역경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하심을 체험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역경을 대비하기 위해 좋은 터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반석에 집을 짓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팔레스타인의 와디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평소에 물이 없어서 고운 모래와 같은 곳에 집을 짓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많은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깊게 파려고 노력하지 않았도 됩니다. 기둥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팔 때 아주 쉽게 파서 기둥을 세울 수 있습니다. 모래 위는 아름답고 화려한 집을 짓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공사기간도 단축되고 건축비도 절감하는 이득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그 집은 견디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자들은 역경의 때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과 함께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생의 집을 짓기 시작할 젊은 나이에 어떤 가치관을 갖고 인생의 집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자기 만족과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여 인생의 집은 지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로 느즈막한 나이에 후회와 허무에 시달리고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됩니다. 반면 반석되신 예수님의 터 위에 집을 지은 자는 인생의 비바람을 잘 견딜 뿐 아니라 심판에서 건지심을 받고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집을 짓는데 두 종류의 재료를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입니다. 장차 하나님은 불로 각 사람의 공적을 밝힐 것인데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집들은 타서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금과 은과 보석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건축자를 의미하고,나무와 풀과 짚은 주의 가르치심을 듣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어리석은 건축자를 의미합니다(고전 3:11-15). 많은 신자들은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즐기고 싶은 대로 마음껏 누리며 자기 만족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입니다. 본문에서는 물로 그 사람이 지은 인생의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불로 그 사람이 지은 인생의 집이 타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건축자는 비바람과 홍수와 마지막 날에 임할 불심판을 감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를 대비하지 않습니다. 구원만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상급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만 바라던 그들이 구원받는 은혜조차 잃어버린다면 그것처럼 낭패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끝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확신하고 주의 말씀의 터 위에 견고한 신앙의 집을 지어 장차 올 불심판을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고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하여 세상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늘에 지은 집은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였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 거하면서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장막은 임시로 지은 천막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고급 저택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늘의 성을 바랐습니다(히 11:9-10).
우리가 인생의 집을 지을 때 재료 또한 주의해서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재료로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또한 견고한 교리 위에 흔들리지 않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성경의 교리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빈약할 때 논쟁을 벌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재료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로 기둥을 세우고, 죄를 멀리하고 우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헌신의 벽을 쌓고, 성령의 내주하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의 지붕을 씌워야 합니다. 이 모든 재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접착제로 하나가 되어 견고하고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이 모든 것의 터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8-29절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무리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것으로 인해 놀랐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과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로 율법을 잘 분석하고 풀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만이 아는 용어로 분석하고 풀이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르칠 때에는 율법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였습니다. 율법은 그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고 싶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체감하는 율법은 “하지 말라”는 금지 규정 뿐이었습니다.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고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율법에서는 본래 율법에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는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짐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지만 자기들도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백성들에게 지웠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먼 자들로서 눈먼 자들을 이끄는 선생이었습니다(눅 6:39). 이들이 가르치는 율법은 딱딱하고 지루하고 짐스러웠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으로 인해 백성들은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다가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습니다(눅 11:52).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달리 무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잡한 학문적 접근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말씀의 원저자이십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구약에 나타난 613개의 율법조항을 명쾌하고도 쉽게 압축하고 요약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보완하여 완성한 천국 헌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시니 즉시 빛이 생기는 것과 같은 권위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영접한 자는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로 옮기게 됩니다. 그의 말씀은 세계 만민이 꼭 들어야 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분석하고 품평하는 자세로 듣기 쉽습니다. 사람은 한 번 듣고 또 들으면 싫증을 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듣고 새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하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지탱하기 위한 매일 필요한 양식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육의 양식을 매일 거두도록 하신 것 같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섭취하도록 하십니다. 지겹고 싫증난다고 멀리하면 금새 영혼이 굶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인간의 지식적 차원으로 이해하거나 학문적 재료로 이용하지 않고 권위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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