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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마태복음 8:18-34)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고되고 힘들지만 가치와 영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삶의 가치와 영광을 모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합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어둠을 사랑하여 빛 가운데에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가치를 알고 따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과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중에 제자로 따르겠다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둘은 제자의 삶의 화려한 면만 보고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생활에 따르는 어려움을 가르치시며 각오와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최우선의 순위를 둘 만큼 가치가 있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는 자연세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되시고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삶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그가 자연세계와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가난을 각오해야 하는 제자생활(18-20)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16절에서는 말씀은 그에게 온 모든 사람을 고쳐 주셨지만, 이번에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습니다. 무리가 에워쌌다는 것은 무리가 지난 번보다 더 많아졌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에워쌌으므로 운신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시고 치유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양성에 힘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전파와 치유와 제자양성의 사역의 균형을 중요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른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불량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잇습니다. 그들은 좀 안다고 해서 예수님께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서기관은 다른 서기관과 달리 예수님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알고자 할 뿐 아니라 따르고자 하였스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 포함된다면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들로 구성된 예수님의 제자의 수준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이 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인기를 보고 사람들의 화려한 조명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 다녔고 그의 말씀은 항상 새로웠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특히 독창적이고 심도가 있는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시적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오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온 자기 자신도 은혜가 될 정도였습니다. 종교인이 그는 이런 예수님의 밑에서 배우면 예수님처럼 사람을 감동시키고 많은 무리들의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유명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건조하고 틀에 박히고 갑갑한 서기관 생활에 싫증을 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서기관으로서 사회적 명성은 가지고 있어서 근근이 버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의 환상을 깨뜨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즐겨 사용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총 31번이 사용되었습니다. 인자는 성육신하신 메시아로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실 때 사람들은 인자라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내리실 때 ‘인자’를 표현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메시아 사역과 관계되는 말씀을 하실 때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표현은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다니시느라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삶을 살려면 가난함을 각오해야 하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서기관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허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이 따르고 환호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시고 배척받으시고 버림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제자로서의 따르는 대가를 생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중간에 포기하게 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자로서 환상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의 본질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리는 인기와 명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아 완성과 자기 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학문적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도 제자로서 산다면 고난받고 외면받는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에서 환영해주고 조금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교회 내에서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고 인정해주는 맛에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맛이 사라지고 모든 일에 식상해져 신앙생활에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나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가고 내가 봉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신앙생활의 동력이 떨어지면서 처음 가졌던 환상이 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이 영육간에 방전이 되면서 조금씩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제자생활은 가난과 고난을 각오해야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한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집을 판 것도 아니고 직장을 그만 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 조금 희생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조금 희생한 것조차 버겁고 힘들어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런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넘어서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제자생활한다면 그에게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의 목표와 계획과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로부터 나온 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동기를 살피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가난을 각오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꼭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데 동반되는 희생의 가치를 귀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그 곳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습니다. 만일 이 서기관이 가다라 지방까지 동행했더라면 과연 그는 예수님이 당하신 배척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대가와 희생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기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자가 진짜 제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우선권을 두는 제자(21-22)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는 아니고 외곽 그룹의 이미 제자가 된 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서기관이 “선생님이여”라는 호칭 대신에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제자생활을 해왔는데 먼저 가서 자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의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셔서 급히 집에가서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르반을 이용하여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셨습니다(눅 7:11).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린 성물’이라는 뜻으로 자기 재산을 “고르반 되었다”라고 하면 부모님을 섬기는 일에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고 하나님께 다 드리지 않고 일부만 드리고 일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깨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 제 5계명을 범한 죄가 됩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자기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연로하신 아버지를 돌보고 부양하기 위해 잠시 제자생활을 접고 그 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앞부분의 “죽은 자”는 영적인 가치를 모르고 세상 일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제자의 삶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승의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 인간관계를 앞세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제자의 삶은 무가치한 삶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인간의 도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우선시하는 자들입니다.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마땅한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보다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부모님이라면 자녀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갖지 않은 부모님이라면 자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서운해 할 것입니다. 좀 더 강경한 부모님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도록 박해를 가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종교가 다른 부모님이 싫어할까봐 두려워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믿고자 하지만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본문의 제자와 같이 부모님을 먼저 섬기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후 믿고자 하면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어버립니다. 이미 자신도 나이가 들어 노년을 맞이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미루고 미루다가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모님의 장사를 치르고 나면 이미 본인도 한창 노년의 나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월이 지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음과 생각이 굳어져 버려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전 12:1). 예수님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9: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결정은 신중하게 결단은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가치를 안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뒷수습을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갈 때 믿지 않는 부모님으로 인해 갈등을 겪을 수는 있지만 자식이 신앙의 단호함을 보인다면 이로 인해 부모님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되고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는 박해를 통해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을 때 복음이 들불처럼 전 세계로 번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적들이 어느 한 곳에 불을 끄려고 하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서 더 번졌습니다.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하시고 정금과 같은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며 이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제자의 삶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우선시될 수 없습니다. 국가에 전쟁이 있을 때 청년들은 징집을 당합니다. 군인으로 징집된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처자식이 있다고 군대를 안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도 이러하건대 예수님의 부르심은 국가의 부르심보다 더 상위에 있는 부르심입니다. 본문의 제자는 과연 그가 약속대로 나중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 다음은 어머님, 그 다음은 자기 아내(혹은 남편)의 장례 치르고 난후에는 나 자신도 나이 들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거나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더욱 더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특별히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사명인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야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부모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방해가 되었다면 요즈음은 자식이 부모의 믿음의 길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을 했고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식만큼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만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되어 가난과 고생의 삶에서 탈피하여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제자의 길을 가르치지 못하고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가 제자의 삶을 살면서 영적 가치관을 잃어버리거나 느슨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이삭은 그의 아들 야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히 11:9).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대로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그들은 부요했지만 이 땅을 영원한 거처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습니다(히 11:10). 

자연세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열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배도 버리고 아버지도 버리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서기관과 제자 중 한 사람은 자신 것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며 예수님과 한 배를 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그 호수는 바다처럼 넓었음을 말해줍니다. 보통 호수는 잔잔하지만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큰 파도가 칠 때가 있었습니다.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는 그들의 안방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서의 잔뼈가 굵은 사람들로 웬만한 폭풍에는 끄떡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선 “큰 놀”이었습니다. “놀”은 ‘너울’의 준말로 크고 사나운 풍랑을 말합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지진’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그들이 탄 배가 지진이 일어난 후 덮치는 쓰나미와 같은 큰 놀에 몹시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부 출신인 제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하였고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이 25절에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정말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37을 보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물을 아무리 퍼내어도 배에 물이 가득하여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께서 아무리 피곤하셔도 이 상황에도 주무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아기를 재울 때 안아서 흔들어 줍니다. 아기는 흔들거리는 상황에서도 부모님의 품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며 잠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마치 부모님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흔들거리는 상황에서도 잘 주무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항해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길에는 항상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에는 예기하지 못한 폭풍이 몰아닥치기도 합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풍랑이 몰아 닥칠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풍랑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히 예수님이 나와 함께 같은 배에 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개의치 않고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시련 속에서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날 도와주지 않으시는가? 왜 풍랑을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원망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죽을 상황이 되었음을 느끼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풍랑을 허락하시는 것은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기도하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인생의 풍랑이 몰아닥칠 때입니다. 시련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은 우리가 연약한 자임을 인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의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나의 연약함과 무력과 죄악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고 마땅히 그렇게 구해야 합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이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의 크기를 깨닫게 해주고 더 큰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풍랑이 없을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기 쉽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면 믿음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나의 믿음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달아야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풍랑은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는 인도자가 됩니다. 어린 나무가 자라 큰 나무가 되려면 온실 속에 있으면 안됩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 뿌리를 깊이 내려야 튼튼한 거목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런 인생을 풍랑을 많이 겪으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경험이 쌓여 사도행전의 큰 일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책망하시면서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꾸짖는 것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동사이지 사물에게 해당되는 동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으로 자연세계를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치료의 능력 뿐만 아니라 자연을 꾸짖으시는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 분이 이 땅에 오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는 일은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계기가 인생의 풍파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려움은 결코 해가 되지 않고 유익입니다. 인생의 풍파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을 배울 수 기회요 축복입니다. 짧은 풍랑의 시간은 우리가 기도하고, 자기를 발견하며 예수님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의 그래프를 그리면 풍랑이 있을 때 믿음의 그래프 곡선이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은 믿음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랑은 믿음이 점프할 수 있는 디딤발입니다. 우리 인생의 항로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배의 선장이 되셔서 안내자가 되십니다. 모든 인생의 역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경의 때에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풍랑 가운데 믿음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라 광풍을 만났습니다. 이는 선장이 항해의 경험이 많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고 큰 풍랑이 계속 되었으며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습니다. 바울은 절망과 위기의 때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그의 믿음은  돋보였습니다. 그는 광풍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증언하여 절망에 빠진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폭풍우가 언제 불지 어디로 불지 아무도 모릅니다. 갈릴리 바다에 광풍도 그러했고 유라굴라 광풍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바람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 속에 우리 주님이 같이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풍랑의 의미는 풍랑이 일 때는 잘 모르지만 지나가고 나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수인 바울을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선장을 비롯하여 선원들에게 증명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파선한 배는 멜리데 섬에 이르렀는데 바울은 그 곳에서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사에게 물려도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 곳의 병든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하였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막 16:18). 이처럼 풍랑은 복음 전파라는 주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며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성장하게 되는 역할을 합니다. 풍랑의 예기치 못하는 특징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지 막상 풍랑을 겪을 때 기도하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무사히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 지역 중 하나입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28-34절은 마가복음 5:1-20과 누가복음 8:26-39의 내용과 흡사하지만 지명과 사람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장소가 가다라이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거라사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로 갈릴리 바다 남쪽 끝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의 장소를 ‘가다라’라고 하였고, 마가와 누가는 ‘거라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 곳 지명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기 때문에 혼선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 인근 도시이고 ‘거라사’는 더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마태는 장소르 좁혀 특별한 지역을 언급한 것이고 마가와 누가는 더 넓은 지역 개념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돼지가 갈릴리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갈릴리 바다 오늘날의 케르사(Kersa)인 ‘게르게사(Gergesa)’의 절벽이 있는 해안가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Zondervan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마태는 귀신 들린 자가 둘을 언급했고, 마가와 누가는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저자의 기억의 혼선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 기사를 비교적 간략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한 반면, 마가와 누가는 이 이야기를 길고도 극적으로 묘사하였고, 여러 귀신들린 자 중에서 유난히 심하게 귀신 들린 한 청년에게 집중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다라를 포함한 데가볼리 지역에는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군사도시로서 특유의 군인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유대지역과 달리 타락하고 음란한 곳이었고 그만큼 귀신의 세력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귀신 들린 자 둘은 무덤 사이에 거하였습니다. 유대지역을 비롯한 인근지역들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여러 개의 방을 만든 것으로 방 안에 시체를 안치하였습니다. 이 곳은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곳이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입니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통제하는 세력은 귀신들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에 들렸다”는 말은 ‘귀신의 지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사탄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연인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통치를 받아 사탄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은 어둠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요 1:5).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는데, 그 마귀는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엡 2:2). 우리가 믿지 않았을 때에는 세상의 영을 받아 살았습니다(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엡 6:12).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를 범한 죄의 종이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종입니다(요일 3:8). 본문에 나타난 귀신들려 사나워진 두 사람은 그 정도가 심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자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수없이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세계의 죄악된 문화에 쉽게 녹아들어 죄에 자신들을 맡기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네 감정에 충실하라”는 세상 풍조를 좇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짜릿한 죄의 자극과 감정의 지시를 따라 아무렇게나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내면에 역사하는 죄의 세력과 죄악된 세상에 대한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마귀의 대리자들인 수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을 멸망의 길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사나워지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고자 했지만 그들은 사회의 통제를 벗어나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음침한 무덤에 거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법이나 사람들의 관습이나 통제도 그들의 삶을 얽어매는 쇠사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서 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지나갔으나 그들은 공격적으로 변해 사람들을 해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접근하고 하면 그들은 자기 방어적이 되었고 사나워져서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인간은 무한대한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감명적으로 와닿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이나 가정의 억압적 환경, 제도권의 온갖 법적 규제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자기 감정을 따릅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그것이 선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은 악이 됩니다. 이런 왜곡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갈등을 일으키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정도가 심해지면 귀신의 세력이 그를 통제하고 자신은 빠져나오고 싶지만 이미 귀신에게 모든 전권을 내준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사나워지게 됩니다.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영적 세계의 지배자로서 귀신을 굴복시키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귀신은 때가 이르면 멸망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최후 심판의 때에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 2:10). 귀신들은 그때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벌써부터 멸하려고 한다고 따지듯 묻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릅니다. 그런데 귀신도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지만, 그들은 멸망하기로 예비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의 지배자요 권세이신 예수님을 이길 수 없고 멸망에 처해 있으므로 최후의 발악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발악하지만 예수님의 영적 권세 앞에 꼼짝 못합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마귀가 그를 꽉 붙잡고 있어 마음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감으로 구원을 받아 자유로운 소원과 나보다 힘이 센 마귀가 나를 지배함으로 인해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세력의 충돌로 그 당사자는 여기 나오는 귀신들린 자와 같이 괴로워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자아인 하나님의 형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종이 되어 마귀의 지배를 받아 어둠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갈등을 합니다. 불신자가 처음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거룩한 분위기와 은혜로운 말씀에 감동을 받지만 주님께 나아가 영접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마귀는 그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에게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님을 두려워하게 하거나 사회적 핍박을 떠올리게 해서 믿음을 갖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쪽은 항상 사람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더 큰 힘으로 제압하고 자기의 수하에 있게 합니다. 마귀는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께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유혹하고 빼앗아 자기와 같이 멸망하려 하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마귀보다 더 힘이 센 그리스도의 권능이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의 권세자로서 강한 마귀의 세력을 결박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12:29).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그가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기 위함입니다(히2:14).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엡 2:1-5).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들은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쫓아 내시려면 돼지에게도 들어가게 허락해달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간구한 것을 볼 때 귀신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영의 세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권세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시자 두 사람에게 들어가 있던 귀신들이 우르르 나와서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 귀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많은 돼지떼에게로 다 들어갔습니다. 마가복음 5:13에서는 그 수가 2천 마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그 두 사람에게서 2천 마리 이상의 떼귀신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 온 떼가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였습니다. 마귀는 파괴적입니다. 마귀는 결코 이익을 주지 않고 손해를 끼칩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파괴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은 파괴자로서의 마귀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에게서 마귀가 나가자 그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들로 변화되어 있었고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스스로 파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사람을 분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쓸모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마귀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가르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희생당한 돼지만 해도 2천 마리로 지금 시가로 하면 약 6억 정도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들 때문에 6억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시내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돼지가 떼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다 예수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좀 더 계셨다가는 얼마나 더 피해를 볼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지역에 귀신들린 자들이 많은데 그들을 다 고쳤다가는 그 지방에 돼지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들이 정신이 온전해진 것을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이 온전해진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귀신들린 상태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를 안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만일 자기의 자녀들이 귀신들려 고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고 상대방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공감을 해야 했습니다. 남의 불행이라고 함부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귀신들렸던 두 사람의 불행이 자기나 자기들의 자식의 불행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두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한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길을 갈 때 귀신들린 사람들에 의해 놀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들은 사납게 그들을 위협하여 그 동안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거하는 무덤을 지날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그 귀신들린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골치거리를 해결해 주셨으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의 자기들의 유익만을 생각했습니다. 이는 가다라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물질적이고 자기 중심적인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방지역과도 같은 이 지역에도 복된 소식을 전하고자 했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하늘의 복을 거절한 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한 것입니다. 다만 귀신들려 고생했던 두 사람에게는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돼지 2천마리의 희생으로 인해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고 생명을 얻는 것은 값진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를 마귀의 세력에서 놓이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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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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