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연이어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첫째 사건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고, 둘째 사건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첫째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법을 위반하였고 둘째 사건은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위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안식일법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사람이 만든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의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토대로 메시야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밝히셨습니다. 저자 마태가 체험한 예수님의 모습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1-8)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그 때에”는 밀 이삭이 익은 것을 볼 때 4월의 유월절과 5~6월의 칠칠절 사이의 어느 한 안식일로 추측됩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후 50일 후이고 칠칠절은 7 X 7 = 49라는 데에서 나온 것이며 신약시대에는 10일 X 5라고 해서 ‘오순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칠칠절은 ‘초실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불렀는데 첫 밀 이삭을 드린 날입니다.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이삭을 잘라 먹을 때이므로 밀을 수확하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셨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를 안식일에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평일에는 남의 밭을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3:24-25을 보면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된다고 하였으나 그릇에 담지는 말라고 하였고,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율법에 허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은 엄격한 것이고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진지하고 자세하게 율법을 들여다 보면 율법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정신이 녹아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남의 밭을 지나갈 때 조금씩 열매나 곡식을 따먹는 것을 허용하도록 정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곡식을 추수할 때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남겨두도록 하셨습니다(레 23:22; 신 24:19-21). 제자들이 배가 고플 때 남의 밭에서 곡식을 잘라 먹을 수 있는 것은 이 율법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을 안식일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것이고 밀을 비비는 것은 탈곡하는 것이며 밀껍질이 날아가도록 훅 부는 행위는 키질하는 것을 여겼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율법 어디에도 안식일에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을 일로 규정해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좀 더 구체화시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세부 규정 39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씨뿌리기, 밭갈기, 추수하기(자르기), 거두기(묶기), 타작하기, 까부르기, 빻기, 체질하기 등은 농사와 관계된 금지사항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하기, 타작하기, 까부르기로 보는 것은 자의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긍휼과 사랑의 정신을 배우지 않고 율법을 이용하여 남을 정죄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금만 봐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따질 때 다윗의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적극 변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무엘상 21:1-6을 보면 다윗이 놉땅에 피신하면서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하였는데,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윗과 그의 무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히멜렉이나 다윗에게 율법을 범하였다고 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보고 사람이 필요에 따라 율법을 어겨도 용납이 되는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용납하신 것은 다윗이 구속역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그림자로서 예외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3개의 직분을 갖고 계십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그림자로 이 직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 왕국의 모형으로 다윗을 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백성들의 목자요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헤매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무리들을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히 택하심을 받은 자로 높이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제사법을 어기고 진설병을 먹은 것을 용납하셨듯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제자들을 용납하신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안식일법의 예외로 제사장의 예를 드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민28:9-10을 보면 안식일에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매일 드리는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때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쉬라는 법을 어기고 진설병을 새 것으로 바꾸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사장적 지위로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윗과 제사장에 견주시면서까지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들을 감싸주시고 변호하시고 감당해 주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키우실 때에도 그의 허물과 약점을 친히 감당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를 빼앗길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아브라함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곤경에 빠뜨리게 했던 바로에게 저주를 내리시고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셨습니다(창 12:10-20).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거했을 때 두려움 때문에 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나타나셔서 사라를 돌려보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라로서 그가 왕을 위해 기도하는 자로 높여 주셨습니다(창 20:1-7). 제정일치 사회에서 선지자나 제사장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허물 많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높이시고 그의 편이 되어 그를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님을 허락하시고(히 9:15)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히 7:25). 사도 바울은 유명한 사랑의 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차서 시를 읊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 편이라는 말입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롬 8:1).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8:34). 성령님 또한 우리의 변호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4:26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칭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the Advocate(NIV)로 ‘변호인, 대변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변호인이 되셔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를 중보하시고 세상에 대해 우리의 편이 되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의 짐을 덜고 감사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안식일과 관련하여 누구이신지를 선포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something greater, 즉 ‘더 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보다는 “성전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우월한 것”은 바로 메시야 예수님이 하실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제사장을 예를 들면서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을 지키고 성전에서 중보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번제를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를 드리느라 안식일법을 위반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고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안식일이라도 일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형의 성전을 허물고 십자가로 무형의 성전이 되셨습니다(요 2:29). 우리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성전에 나아갈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형의 성전보다 우월하신 무형의 성전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은 안식일법보다 우선합니다. 제자들 역시 성전보다 우월하신 메시야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 안식일법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법과 안식일법을 비교하면서 성전법이 우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의 임무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례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왜나햐면 제사장의 임무는 죄 사함을 위한 중보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7절에서 제사와 자비를 대조하시며 자비가 제사보다 우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은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제사’와 ‘인애’, ‘번제’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조시켰습니다. ‘제사’와 ‘번제’는 행위를 말하고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적인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하나님은 실천해야 할 율법의 규례와 의식보다는 율법의 정신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추수할 때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남겨두도록 하신 것은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는 것을 볼 때 곡식을 다 베지 말고 이삭을 줍지 말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나아갈 길을 열어놓으신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규례 자체에 얽매여 규례를 잘 지키는냐 못하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들은 더 비싼 제물로 더 거창하게 제사를 드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는 마음을 내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기도하였고 헌금을 많이 내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동전으로 헌금함에 떨어뜨려 소리가 나도록 해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무시와 비난과 정죄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 체면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봐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세부 규칙 적용에 대해 자기들끼리도 이러쿵 저러쿵 논란을 벌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지고 39개의 규정을 만들어 지키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에 문제를 삼은 것은 39개의 규정 중 추수, 타작, 까부르기였습니다. 곡식을 잘라 비벼먹는 것을 추수, 타작, 까부르기를 위반한 것이라고 법 적용을 한 것조차도 웃기는 일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에서 멀어지자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판단력이 마비되어 무죄한 자를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순수하게 구약의 율법으로 하자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배가 고픈 사람들이라 사람들의 긍휼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선교적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선교적 자세와 대조되는 것이 교리적 자세입니다. 교회에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확고한 교리가 확립될 때 세상의 여러 거짓 사상과 인본주의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믿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의 주인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중심의 신앙은 곧 무당신앙이요 이교적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신앙이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특별히 교리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한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적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강요한다면 바리새인처럼 딱딱하고 융통성 없고 우스꽝스런 말씀 적용 신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선교적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믿음이 어린 사람이나 불신자들에 대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접근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선교는 강요가 아닌 섬김과 본을 보이는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선교는 권력이나 돈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긍휼과 섬김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회적 약자, 영혼에 상처를 입은 자, 죄로 인해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으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행복을 누리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말씀 사역과 치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치유라 함은 영육간의 포괄적인 회복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실제문제를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도그마에 빠져 선교적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두 기둥이 있다면 확고한 교리와 선교적 자세인데 이 둘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자신이 누구이신지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사람들로부터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신 근본 목적은 육체적인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 안에서 영혼의 쉼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도록 일만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심으로 강제로라도 쉬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욕심이 생기면 안식일에도 일을 해서 빨리 돈을 벌고 싶어합니다. 안식일에 장사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어옵니다. 안식일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입시 경쟁에서 밀려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욕심을 내어 쉬지 않고 일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영향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통해서 억지로라도 쉬도록 함으로 우리에게 휴식과 건강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함으로 영혼의 만족을 통한 쉼을 얻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가장 바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다음날 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1:28-30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 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상황에서 쉬지 못하고 가장 바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감시하느라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누려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지를 감시하느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정작 그들은 안식일에 쉼을 얻지 못함으로 안식일법을 어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안식일의 수많은 세부 규칙을 만들어 율법의 짐을 지워 쉬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만드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심으로 안식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안식일의 본래의 의도를 분명히 하시고 안식일을 완성시키러 오셨습니다(5:17).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듯이 안식일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키시고 완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으로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쉽고 가벼운 그의 멍에를 짐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11:29-30). 즉 제자도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왜곡시키는 자들에 대한 도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희생제사 제도를 두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안식일을 만들어 지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토요일 대신에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초대 유대 크리스천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일요일에 모였습니다. ‘주일’이라는 것은 ‘주의 날(The Lord’s Day)’로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이방 크리스천들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당연히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이었는데 그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었는데 이것이 교회의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의 개념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기 신앙의 선배들은 주일성수라고 해서 주일을 절대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말한대로 월요일에 시험이 있더라도 주일에 공부를 하지 않았고 주일에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았으며 주일에 물건을 사고 팔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엄격한 주일성수는 매우 훌륭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으나 초신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일년 365일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와 같은 주일성수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겨 주일성수의 개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여행을 가고 운동을 하며 자기 여가시간을 즐겨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여행을 가서 그 곳 근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생각으로 인해 안식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드리라는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어느 선까지는 주일성수이고 아니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십계명의 안식일의 계명의 정신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안식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영적인 교제가 있으면 수평적으로 성도 간의 교제도 있어야 균형 잡힌 신앙이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성도 간의 교제를 등한 시 한다면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9-13)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9-13절은 또 다시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심을 말해줍니다. 회당에는 한 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오른손이 말라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오른손은 왼손과 비교하여 가늘고 힘이 없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 두 손으로 정교한 일을 하는데 그는 한 손으로 일을 하다보니 일의 속도가 느렸습니다. 제롬에 의하면 그는 미장이였다고 하는데 그가 일하다가 다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손으로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살 길이 막막하여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걸을 수가 있으니 회당에 나아가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10절 원문 첫 머리에는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치료하심을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치시기를 기다렸다고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셨으니 “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고 잔뜩 신경을 곤두 세우고 숨죽이고 예수님과 손 마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 같은 자를 보면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연약한 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 날이 안식일임을 상기시키면서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을 일부러 예수님이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도록 부추겼습니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예수님도 질문 형식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도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어 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양을 잡아먹는 짐승들을 포획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서 위장을 하여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식자가 아닌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더 엄격했던 에세나파 사람들과 다르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밧줄을 이용하여 양을 구덩이에서 건져냈다고 합니다(NIV Cultural Backgrounds Study Bible). 예수님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에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를 구한다는 그들의 일상을 예를 들어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지나치지 않고 그 양을 건져내는데, 양보다 더 귀한 한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일은 더욱 더 율법에 합당한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심으로 인간의 고귀함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을 응급환자를 구하고 고치는 것과 같이 가장 우선권을 두고 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한쪽 손 마른 자가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이 아니니 내일 고쳐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예수님이 이 사람을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은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실 일이 많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내일 고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쪽 손 마른 사람의 경우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칠 기회가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되고 고귀한 일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간을 살리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사명을 주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창 1:28).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에서 사람을 부르시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이키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사람 낚는 어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9).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천국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10:7).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마 28:19).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롬 1:16).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라고 하였고(롬 15:16), 사도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9).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귀한 생명을 구원하도록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라고 하시며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할 자를 지금도 모집하고 계십니다(9:37). 세상은 불신자들이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로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불신적이고 적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교회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적인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불신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구원해야 할 영혼이 많다는 것입니다. 불신 세상에서도 복음을 듣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이 본문의 한쪽 손 마른 사람처럼 구원의 복음을 듣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이 안식일이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기다리는 불신자들을 볼 때 본문에 나와 있는 한쪽 손 마른 자처럼 불쌍히 여기고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라고 하며 미루지 말고 그에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구원의 긴박성을 갖고 죄로 병든 영혼을 복음으로 구원하고 치유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시급함을 깨닫게 하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존재하는 이유는 영혼의 쉼을 주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한쪽 손 마른 사람과 같이 구원과 치유의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배는 믿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목자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그들이 예배 가운데에서 선포되어지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도록 돕기 위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위한 날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시급성을 깨닫고 불신자를 초청하는 선교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 영혼 구원의 일을 말합니다.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의 소중함과 그들을 구원하는 선을 행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한쪽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가 손을 내밀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였습니다. 한쪽 손 마른 자에게 마른 손은 그가 드러내기 싫은 그 사람의 치부입니다. 그가 치유를 받고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병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이기 싫은 치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꽁꽁 숨기면서 살아갑니다. 병든 부분을 감추며 멀쩡한 사람인 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치부로 인해 아파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며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나의 병든 곳을 내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든 곳을 보고 결코 나무라거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의 치부를 치료해주시고 온전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한쪽 손 마른 자의 손은 죄로 인해 병든 우리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한 상처로부터 나음을 받으려면 나의 병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자는 다섯 번의 이혼 경력과 현재 다른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감추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도덕한 삶은 그녀를 불행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인의 과거를 알고는 그녀를 멀리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안 그런 척 하면서 살려고 하였지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녀와 오래 동안 대화를 하시고 그녀의 치부를 고의로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죄로 인한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그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치부를 주님께 내놓는 것은 ‘죄의 고백’을 말합니다. 내가 우리 주님 앞에서 나의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나의 죄를 사하시며 나를 모든 불의 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바로 죄 사함으로 이루어지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는 예수님(14-21)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례를 무시하고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시자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하였습니다. 유대교에는 유대 사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있었는데 그것은 할례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한쪽 기둥을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안식일을 무너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고 안식을 누려야 하는데 오히려 감시하느라 안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을 상실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였고 자기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살인 의도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긍휼을 베푸시는 목자 예수님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로 인한 부정적 반응으로 예수님의 남은 사역에 방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 소문을 내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태복음의 특징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을 많이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이루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17-21절은 이사야 42:1-4를 인용한 것으로 마태가 인용한 것 중에서 가장 긴 인용구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는 예수님을 인자, 다윗의 자손,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지만 여기서는 고난받는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십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실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로 인치실 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립니다(마 3:17).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17:5).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종이요 기뻐하시는 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역사가 이방까지 전파되어 온 세상이 구원을 받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전파된 복음으로 인해 이방은 심판을 알게 됩니다. 심판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구원을 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3:18을 보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도 우습게 압니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구원이요 밖에 있으면 심판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죄인줄 모르고 영적 무지 가운데 함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 2:3-5).
12:1-21을 보면 복음의 전파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두 번의 갈등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율법의 짐을 벗기시고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임을 보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다이즘에 굳어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병들고 약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13).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14). 마침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에게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2:36). 그리고 유대인들의 배척으로 말미암아 복음은 이방 세계로 넘어가게 됩니다(18). 심판을 알게 된 이방 세계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갈망하며 그의 이름을 바라게 됩니다(21).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9-20절은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16절의 말씀과 연관됩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믿는 무리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다투지 않고 조용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투지도 안고 들레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일을 할 때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 날 좀 보고 알아주세요” 하고 자기를 들레려고 합니다. 또 일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면서 밀어 부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독생자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방인인 동방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 외에 아무도 그의 탄생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차가운 냉대 속에서 여관에서 방 한 칸 얻지 못하고 짐승이 머무는 축사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세주의 화려한 강림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조그만 동네에서 30세까지 조용히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시면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을 피해 다른 동네에 가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부딪히기도 했으나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묵묵히 하나님이 맡기신 메시야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 백성의 허물 때문에 형벌을 받으셨습니다(사 53:7-8).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기독교 사역의 특징은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감정적으로 다퉈서도 안되고 복음을 전파한다고 야단스럽게 떠들어서도 안됩니다. 불신자들이 요란스러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본다면 비웃거나 적대적 감정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으라고 압박하거나 위협을 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오도록 겸손하게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마음을 두드리면서 마음의 문을 열기를 원하셨습니다(계 3:20). 우리의 선교는 과시적 선교나 요란한 집회보다는 일대일로 예수님처럼 한 사람 한 사람씩 겸손하게 다가가 초청하고 설득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마음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적대적 공격에 대해서도 다투지 않고 침묵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조용한 복음 전파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우선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
예수님의 사역의 또 다른 성격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입니다. 갈대는 약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갈대 중에 상한 갈대는 가장 연약한 자를 상징합니다. 상한 갈대는 소생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부러뜨려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a smoldering wick로 ‘그을음을 많이 내는 심지’를 말합니다. 이는 연료가 다하여 이제 곧 꺼지는 심지입니다. 사람들은 연기 냄새가 난다고 해서 뚜껑을 덮어 꺼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싸매어 붙이고 상처난 부위가 회복되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꺼져가는 심지에는 연료를 다시 공급하여 환한 불빛이 비추도록 하십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죄로 인해 상처난 영혼, 병든 영혼, 슬픈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서 살리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자 마태입니다. 그는 이기심으로 깊이 병든 자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억울함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소외로 인해 상처받고 외로움에 깊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또한 그가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죄 의식으로 악몽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가 회복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예수님은 그를 곁에 두시고 임마누엘하셔서 그의 병든 영혼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많이 입어 본래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였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지만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변화되어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사랑과 긍휼의 목자 예수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의 수준에 미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비난하고 소외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회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기들만 제외하고는 다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눈에 이방인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의 눈에 이방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이방인들이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심판을 알게 하셔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도록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가 다스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라는 말은 till he has brought justice through to victory (NIV)로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에 이를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전파하신 복음의 내용은 천국,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평하고 정의롭습니다. 그의 통치 하에서는 억울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도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평하고 민주화가 실현된 나라라 할지라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이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세상 나라의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죄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요 정의로운 왕으로 아무리 연약하고 병든 자라도 믿음으로 나아올 때 영접하시고 감싸주시고 변호해 주시고 실제 문제를 도와주시며 일어나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람을 병들게 하고 연약하게 하며 상처를 주는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죄의 결과인 사망의 세력을 파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몰라 어두움과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의 이름을 바라고 부르는 자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다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없는 세상은 냉혹하고 경쟁적이며 잔인하지만 예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긍휼히 여기며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직장에서는 사람을 능력으로 평가하여 연약한 사람은 냉혹하게 잘라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며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스타일로 교회 일을 섬기지 않고 예수님 스타일로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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