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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마태복음 14:1-36 )

14-16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후반부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14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1-12절은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회상, 13-21절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22-33절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신 사건입니다. 34-36절은 예수님이 제자양성에 집중하셨지만 무리 사역도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후반 사역의 결론은 16:16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사건입니다. 14장에서 오병이어 사건과 물 위를 걸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16:16의 고백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무리들을 떠나서 제자양성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과는 달라지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끌어올리시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1-12)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때에”는 글의 흐름상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받으실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지역에서 배척을 받고 있었지만 나사렛 외의 지역에서는 그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최고 권력자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폭넓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는 13장에서 언급된 천국 비유 중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바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를 말합니다. 헤롯대왕이 죽은 이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습니다. 헤롯 안타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렸고, 헤롯 빌립은 갈릴리 북동부를 다스렸으며, 알켈라오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나누어 다스리던 왕을 분봉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알켈라오는 잔인한 독재 정치를 하여 그 지역에 폭동을 많이 일어났고 그는 잔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알켈라오는 불신임을 받아 쫒겨났고 이 지역은 총독 코포니우스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총독 제도가 유지되면서 그의 후임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이어 받았고 사도 바울 때에는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이 차례로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헤롯 왕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한 것은 그가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자기에게 바른 소리를 한 의인을 죽였다는 죄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만 생기면 세례 요한과 관련을 지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 다시 환생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런 미신적인 영향을 받아 그의 죄책감과 결합되어 예수님을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착각하게 했습니다. 

3-12절은 헤롯이 왜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착각하고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렸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그의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사랑하여 동생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기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결혼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간음죄요 근친상간의 죄로 세례 요한은 헤롯을 찾아가 그의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4절에서 “말하되”는 had been saying(NIV, ESV) 또는 had repeatedly told(NET Bible)로 되어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책망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를 책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로디아가 구약의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과 같은 악녀였습니다. 그녀는 헤롯이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듣고도 유약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헤롯을 충동질하여 요한을 옥에 가둔 것 같습니다. 이는 그녀가 자기 딸에게 헤롯의 생일에 요염한 춤을 추게 해서 헤롯을 기쁘게 함으로 요한을 참수하도록 충동질한 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진작에 없애고 싶었지만 그의 유약한 성격과 무리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를 죽일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악녀였던 헤로디아는 이런 유약한 헤롯을 충동질하여 요한을 죽이고자 계략을 세웠습니다.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헤롯의 생일이 되자 헤로디아는 자기 딸 살로메에게 헤롯 앞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게 하였습니다. 살로메는 헤롯의 이복 동생인 빌립 1세 사이에서 난 딸로 10대 중반으로 추정합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에게 매력을 느낄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였습니다. 그는 살로메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나자 한낱 분봉 왕에 불과했지만 그는 마치 제국의 황제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맹세하면서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가복음 6:13을 보면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살로메가 십대에 불과하니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엊어 달라고 섬뜩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는 십대 소년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끔찍한 요구를 한 것은 어머니 헤로디아가 자기 딸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그녀의 요구를 듣고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인을 함부로 죽일 수 없어서 오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둔 상태로 내버려 두었는데 이제 와서 죽이려고 하니 두려워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맹세와 그와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 소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의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이는 마치 공포 영화의 가장 잔인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소름 끼치게 합니다. 유대 사회는 재판 없이 이런 형태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이 당했던 것처럼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비참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영웅적인 삶이었습니다. 정말 비참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악인들은 장차 더 비참한 죽음을 영원히 겪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투옥 기간 내내 그의 스승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갔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가족 대신 조촐한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가족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음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나이 늙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이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대로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최고 권력자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예수님의 사역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왕이지만 예수님과 헤롯의 모습이 완전히 대조됨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자기 지역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지만 그는 권력을 백성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왕은 목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왕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자기 백성을 먹이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의 관심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는 쾌락을 위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고 아내의 딸에게 정신을 빼앗겨 헛맹세로 인해 의인을 죽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없었고 자기 밖에 모르는 왕이었습니다. 에스겔 34:1-5에서는 이런 왕을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왕은 양 떼를 먹여야 하는데 자기만 먹고 보호해야 할 양을 잡아 먹습니다. 이런 왕의 다스림을 받는 양들은 목자가 없는 양처럼 흩어지면서 들짐승들의 밥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에게 때를 따라 꼴을 먹이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상한 자를 싸매 주시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시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섬기십니다. 이 목자 왕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요한이 헤롯에게 정치적인 적대자로 여겨진 것 같이 예수님도 후에 로마 총독과 관리들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게 됩니다. 요한이 악인들에게 죄 없이 죽음을 당했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악인들에게 버림 받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헤롯이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배척하였듯이 그를 이어 천국 복음을 전파하던 메시야를 배척하였습니다.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이 무슨 이적을 행하나 보려고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헤롯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눅 23:8-12).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관할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3-16)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시고 헤롯에게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소한 세례 요한의 죽음이 의로운 죽음이었다는 것을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어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 요한의 죽음의 억울함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정치적 행동을 취하는 순간 정치 지도자들과 갈등에 휘말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는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동에 대해 매우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키셨습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가 계획하신 제자 양성의 프로그램을 속히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빈 들에 가셨습니다. 이 곳은 도시와 달리 정치 지도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하셨지만 무리들은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이 이동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해안가를 따라 걸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비록 군중들이 변덕스러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냄새를 맡습니다. 무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삯군 목자의 악취가 났지만 예수님에게서는 목자의 향기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참 목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겪는 고토에 동참하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시고 열심히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점심도 굶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그들을 돌려보낼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적절한 때에 합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마치 비서가 왕의 일정을 챙기듯 공손하게 제안했습니다. 제자들은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원어로 보면 주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와 있습니다. 또한 의미의 흐름상 주어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너희”라는 말을 써서 강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 주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관찰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 사역의 대전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 사역에서 제자 양성으로 그의 사역을 전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2단계 프로젝트는 제자들의 ‘참여’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이제는 제자들이 참여하게 하십니다. 후에 전개될 폭풍우 사건 때에도 예수님이 물 위를 걷게 하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도 걷게 하십니다. 참여를 해야 경험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참여해야 목자의 심정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관찰자로 남아 있지 않고 참여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교사의 교수법 중에서 강의식 수업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수업이라고 합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학생들이 참여하게 하여 직접 경험해보도록 하는 것이 미래 사회 교육의 흐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의 하신 일에 참여하여 그들의 믿음을 키우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성장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을 계승해야 합니다. 벌써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내다보시고 그 이후 천국복음 역사를 생각하시고 제자들을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생각한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도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사역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자들이 움직여야 교회가 운영되고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현실적인 생각이요 물질주의적 사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갖기를 원셨습니다. 예수님과 무리들은 외딴 지역이 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현실적으로 어떤 먹을 것을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한다면 집으로 돌아가거나 마을로 들어가서 사먹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심으로 현실을 외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예수님은 무리들을 지금 당장 돌려보낼 생각이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질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15:32).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시고 돌려 보내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제자들이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지침도 내리지 않으면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하니 제자들은 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계획을 갖고 먹이고자 계획하셨기 때문입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고 무엇인가 작은 것을 드려 참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에 자기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병이어 밖에 없는데 그것이라도 예수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17-21)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이 오병이어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반응하였습니다. 이 반응을 부정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고 긍정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신 말씀에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병이어 뿐인데 자기들은 무리들을 먹일 처지가 아니라는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제자들은 먹일 수 없다는 응답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은 “가진 것이 오병이어 밖에 없지만 이것이라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그들의 반응이 부정적인 반응이건 긍정적인 반응이건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리를 먹일만한 충분한 양식으로 만들 것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과 참여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인한 참 자유를 선물로 주는 구원역사에 쓰임 받게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그리스도의 손에 올려 놓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올려놓는 것은 쉽게 말하며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주님께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내가 내려 놓은 것을 사용하셔서 기적을 창조해 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 구원역사를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라는 작은 것을 드리고 그의 일에 참여할 때 주님은 그것을 축사, 즉 감사기도하시고 그것을 부풀려 큰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축복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나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신이 이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라 나의 영역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해내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느라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오병이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도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병이어를 내 손에서 그리스도의 손에 올려 놓는 ‘전가의 과정’입니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잔디에 앉도록 명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39과 요한복음 6:10에서는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잔디에 앉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직접 무리에게 명하였다기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포함하면 만 명이 넘는 인원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셔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했다는 것은 NIV에서는 gave thank로 ‘감사를 드렸다’는 뜻이고 ESV에서는 said a blessing이고, KJV에서는 blessed로 ‘축복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들이 드린 오병이어는 축복의 씨가 되어 온 무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일에 참여시켰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무리들은 떡 먹던 다음 날에 예수님을 찾아와 또 떡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을 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떡 먹는 것에만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과 무리들의 평행선을 달리는 긴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무리들은 자기들에게 현실적 유익이 주어지지 않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떡을 나눠주면서 무리를 먹인 일에 참여한 제자들에게 이 기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기점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무리들은 떡 주기를 거절한 예수님의 반응에 그들도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 때문에 예수님을 좇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영생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여를 통해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그들에게 그의 양무리들을 맡길 준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참여를 통해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우리를 예수님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맡기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육적인 먹을 것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은 그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오병이어와 같이 작은 것이지만 주님은 이를 축복하시고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역량이 바닥이 나면 우리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또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말씀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무리들은 예수님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무리들이 마음껏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그 남은 조각을 다 모으니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남은 것을 간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친히 사람들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우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는 그냥 오천 명이라고 하지 않고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당시 숫자를 세는 관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부터 오래 동안 내려온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일할 수 있는 남자를 중심으로 분량을 정했고 가정 단위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가정은 모든 단위의 기초였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22-27)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들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재촉하여 무리를 보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을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의 시도했습니다(요 6:15).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그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으면 무리들과 같이 있으면 유혹을 받을 것이 염려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 곧 예수님이 왕이 되고 자기들은 장관이 될 헛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리들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재촉하셨습니다.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신 또 다른 이유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해산시킨 후 기도하기 위해 산중턱을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 해안선을 끼고 있는 이 지방에는 높은 산은 없지만 호수로부터 경사지는 언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곳에서 제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그 곳에 더 오래 머무르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16:16). 예수님은 산에 올라간 때는 날이 저물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밤 사경에 제자들과 합류했으니 밤 늦게까지 기도에 매달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폭풍우를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스르는 바람과 싸우기 위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밤 사경, 즉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였습니다. 유대의 하루 개념은 우리와는 달리 오후 6시부터 시작됩니다. 하루를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8, 13, 19, 23, 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 6시를 하루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낮은 오전 6시에서 오후 6시이고 밤은 오후 6시에서 오전 6시입니다. 낮 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6시가 유대시간으로는 12시가 됩니다. 그래서 유대의 낮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계산할 때 6을 더하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 시각이 제 6시이므로 낮 12시가 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이 제 3시이므로 오전 9시이며(막 15:15). 운명하신 시각이 제 9시이므로 오후 3시가 됩니다(막 15:25). 유대인들은 밤은 ‘시’가 아닌 ‘경’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하룻밤을 3경으로 나누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를 1경,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를 이경, 새벽 2시부터 새벽 6시까지를 삼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로마시대의 식민시대에 와서는 4경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4경이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가 됩니다. 제자들이 저녁 먹고 9시에 출발했다고 한다면 6시간 이상을 바다에 있었고 오랜 시간 바람과 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투를 벌이는 것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에 육지로 돌아서 오시지 않고 직접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러서 바다를 육지 같이 걸어오셨습니다. 8:23-27에서 제자들이 폭풍우를 만났을 때는 예수님이 배 뒷 편에서 주무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여기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폭풍우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와 달리 안 계셨기 때문에 그 두려움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큰 믿음을 심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들은 바람과 사투를 벌이느라 완전히 지쳐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반갑게 영접해야 하는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니까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도 날이 어둡고 비나 안개가 있어 예수님의 모습을 잘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고 공포 영화에 나오는 분위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령 같은 존재가 물 위를 자연스럽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니”라는 말은 불에 타고 있는 가시덤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음성이었습니다(출 3:14).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가리켜 “I am …”이라고 자신을 많이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48,51),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평소에 듣던 음성과 달리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 음성은 스스로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이요, 어떤 위협 가운데에서도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의 주의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음성을 듣고 나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심이 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불안하거나 염려에 빠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잘 터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은 성경입니다. 그 은혜의 방편은 마치 의사소통을 위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의 귀를 열어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귀가 있다고 하나님의 음성이 다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과 자기 생각과 분주한 마음과 죄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두려움과 불안, 염려와 우울함등이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전함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제자들(28-36)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하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고 난 후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두려움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믿음이 생겨 무엇이든지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부탁함으로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괜히 자기 과시를 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이라면 물 위를 걷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번 폭풍우 사건을 통해서는 “나니 두려워말라”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만물을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주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앞으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는 성급하지만 주님을 사랑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다른 제자들 가운데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그 누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상상했겠습니까? 그는 독특한 믿음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것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또한 전도여행이나 오병이어 사건에서 순종하고 참여하면서 믿음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시켜서 된 일이 아니라 믿음이 생김으로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걷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교만하고 나서기 좋아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걷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도전하고 참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오라”하심으로 그가 물 위를 걷도록 도우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려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할 때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오라”라는 허락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창조주의 뜻을 거스려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물 위를 걷는 것은 교만이요 자기 과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과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음을 배우고자 할 때 그 허락이 주어집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 때는 온 신경을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바다를 육지 같이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곧 베드로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람을 보았다는 것은 바람에 의해서 물결이 높게 일고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움을 느꼈고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에서 엄청난 믿음의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물 위에서는 예수님께 갈 용기를 잃고 맙니다. 그가 바람을 보는 순간 그는 예수님을 놓치고 그의 믿음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을 본다는 말은 현실의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삽니다.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고 빠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켜야 하는데 옆을 보거나 밑을 보면 두려움이 확 몰려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반면 불신은 앞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옆이나 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딪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현실의 바람이 나를 흔들 때 시선이 흐트러져서 현실의 바다에 빠져버립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먼저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바람을 의식하고 불신의 바다에 빠지지만 구원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께 나의 형편을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알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붙잡지 않으면 적대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불신과 두려움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며 가라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붙잡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유지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작은 믿음’의 반대말은 ‘큰 믿음’입니다. 큰 믿음은 처음 가졌던 믿음이 지속적으로 오래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믿음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작다고 하신 것을 보고 베드로의 믿음을 별 것 아니라고 깍아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물 위로 걷게 해달라고 도전한 베드로의 믿음은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도전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싶으셨습니다. 주님은 책망이라는 방법으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처음 가졌던 믿음이 잘 작동되지 않을 때를 많이 겪습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붙드시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붙드심이 아니면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그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처음 가졌던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연약한 점을 인정하고 예수님 바라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을 보면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믿음의 주관자요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우리의 의지에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주가 예수님이시고 그 믿음은 은혜로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시면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잘 작동되지 않을 때 그 믿음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작은 믿음’의 반대인 ‘큰 믿음’을 감정적인 에너지가 폭발하여 자기를 불살라 큰 일을 할 것 떠벌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의 믿음은 믿음의 동기를 부여하는데는 효과적이지만 믿음을 지탱하게 할 만큼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지와 공로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현실이라는 바람이 자꾸 우리 시선을 흐트러지게 하는데 그 때마다 시선의 방향을 예수님께 수정해야 합니다.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상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우고 알면서 그의 음성을 듣고자 하고 그를 한결같이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은 명사가 동사라고 합니다. 명사는 소유할 수 있지만 동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명사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동사처럼 계속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이 배에 계신데도 풍랑과 폭풍이 몰아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배에 계시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폭풍은 불 수도 있고 잦아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배에 계시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항해에 선장으로 모신 자입니다. 예수님이 선장이시면 안심입니다. 문제가 우리를 위협하고 덮치지만 이내 곧 잦아듭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의 싸이클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원망과 절망을 극복하고 감사하며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사건을 목격하고 나서 예수님께 절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절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이 절한 것은 영어로 worship으로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본 데에서 영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시고 폭풍우 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배에 오르시자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연 세계를 지배하시는 창조주로 영접하면서 한 단계 믿음이 더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경배는 왕이나 권력자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압도되어 나온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이해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된 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받은 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경배하면서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급격하게 커졌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그만 경배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발전합니다(16:16). 이제 제자들은 제 2단계 학습목표를 성취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16:16에서 나타납니다. 

게네사렛 땅에서의 사역(34-36)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 일행은 바다 건너 편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 해안을 따라 약 5.6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는 평야입니다. 이 평야는 갈릴리 바다에 접해 있는 유일한 경작 가능한 땅이며, 호두, 야자수, 무화과, 올리브 등을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곳으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헤롯 안티파스가 건설한 정교하고 번화한 도시인 디베랴와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의 고향인 막달라(Magdala)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줄 알고 근방의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든 병든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옴으로 그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혈루증 앓던 여인이 뒤로 몰래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그렇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러나셔서 2단계 사역인 제자 양성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궁핍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사역에 집중하셨지만 군중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양성을 하면서도 대중사역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어떻게 무리들을 영접해야 할지, 어떻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는지, 이를 위해 그들이 갖추어야 할 인격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15:1-20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나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나 밖에서 들어올 때마다 종교적 의식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것을 만지는 것을 극도로 주의하였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무리들이 자기에게 접근해서 만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이 나은 자 중에서 율법상 부정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예수님의 깨끗함이 그들에게 미치게 되어 그들이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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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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