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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마태복음 27:1-66)

하나님게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유혹자 뱀을 저주하시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원시 복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인데,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창 3:15).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때가 되어 그 아들을 여자에게 나게 하셨습니다(갈 4:4). 십자가는 언뜻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마태는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다루면서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음을 드러내었습니다. 마태는 또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새벽에 불법 재판을 열어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음을 기술하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강조하였습니다. 빌라도 또한 예수님의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넘겨진 것으로 알고 석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과 무리들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예수님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셨지만 억울하게 심문당하시고 채찍질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하셨을 때에 사람들로부터 “너 자신을 구원하라”라는 조롱을 들으셨습니다. 마태는 아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에수님께서 못 박히시자 어둠이 임하였고 운명하시자 지진이 일어났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특히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친히 성전이 되셔서 죄악 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히 10:20). 백부장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에서 이방인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가 되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유다의 죽음(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27:1-2은 대제사장의 집의 뜰에서 재판받으신 장면에서 산헤드린 법정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은 해가 뜨기 전 새벽에 대제사장의 집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셨는데 이는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정식 재판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열리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누가복음 22:66-71에서 나온 것과 달리 공회 앞에 재판받으시는 장면에 대해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의한 내용만 언급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산헤드린에서 정식 재판을 열어 그들이 미리 결의한 사형을 선고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미쉬나의 기준에 의하면 중요한 재판은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23명의 공회원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m. Sanh. 1.1). 그러나 마태는 이 재판의 불법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전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이루어진 심문을 언급하고 이 과정은 짧게 언급함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기 위한 요식 행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형 판결을 내려도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당국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을 결박하여 사형 판결의 권한을 갖고 있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집권 시긴에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그가 집권했을 때 그는 로마 제국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 곳곳에 로마 황제의 형상을 세웠고 로마의 종교적 상징을 동전에 새겨 넣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빌라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칠게 항의했고 이런 소요 사태는 빌라도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빌라도는 소요사태를 막고 무리들의 요구대로 예수님께 달갑지 않은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만이 유다의 후회와 그의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는 가룟 유가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사도행전 1:18에서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올 정도로 시체가 훼손되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의 차이는 관찰자의 주관적 서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목매어 자살한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누가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를 강조한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종합해 볼 때 유다는 경사가 가파른 계곡의 나무가지에 목을 매어 죽었고 나무가지가 부러지거나 줄이 끊어져 그의 시체가 절벽으로 추락하여 시체가 크게 훼손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의 정죄됨을 보았다”는 것은 Judas saw that Jesus was condemned(NIV)로 ‘예수님께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는 인간의 양심상 하지 말아야 행동을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에 홀려 그런 끔찍한 행동을 했음을 알고 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가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이런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고통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롬 2:9).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불못의 고통을 주시지만 살아 있을 동안에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통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 없어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창 4:13). 유다의 말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도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를 자기들이 받고 싶지 않아 “네가 당하라”라고 말하고 은 삼십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여기서 성소는 성전의 어디를 가리키는지 불확실합니다. 그는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에 자기 임의로 들어가서 배반의 대가로 얻은 돈을 던져 넣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더욱더 그를 옥죄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물린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엎지러진 물로 도로 주워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뉘우쳤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것과 다른ㅂ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켰다는 말이지만 후회는 고통스러움을 느끼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물론 회개한 사람은 후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한 사람이 모두 회개한 사람은 아닙니다. 애굽 왕 바로도 열 가지 재앙을 받았을 때 모세와 아론에게 자기의 죄를 용서하고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자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습니다(출 10:16-20). 바로가 “내가 … 죄를 지었으니”라고 말한 것은 회개가 아닌 후회였습니다. 후회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유다가 뉘우쳤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마음이 고통스러워 그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후회나 회개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 줌으로 그의 죄책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절로 그는 성전에 가서 그가 받은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죄책감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습니다. 자살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는 십계명의 제 6계명인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죽인 살인 죄에 해당합니다.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대제사장들은 그가 던진 은을 거두며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리는데 공범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규례에 얽매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모순되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피값으로 얻은 돈을 성전에 두지 않음으로 깨끗한 척 했으나 그 핏값을 지불한 장본인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의논한 후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성전고는 백성들이 드린 헌물을 보관하는 장소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이 은 삼십을 돌려받지 않자 이 곳에 둔 것을 보면 이 곳에서 핏값이 지출되지 않았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돈이 불의한 돈이라 성전을 위해 사용되면 성전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여 나그네를 위한 자선 사업에 대신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돈으로 밭을 사서 나그네을 위한 묘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은 삼십에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을 보면 토기장이가 더 이상 좋은 흙을 얻을 수 없는 불모지가 되어 아주 싼 값에 내놓은 땅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그네의 묘지”는 그 당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었던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위한 묘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 삼십에 팔리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핏값은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핏값이 더러운 돈이라고 생각해서 성전고에 둘 수 없어서 이방인을 위한 묘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더럽고 하찮게 취급했기 때문에 이 핏값이 쓰여질 수 있는 곳은 이방인들을 위한 묘지 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중죄인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치욕을 받으시고 저주받은 자가 되어 영문 밖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 13:12). 그러나 예수님의 핏값으로 인해 온 세상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핏값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안타깝게 죽은 나그네들의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구입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피 흘리셨을 뿐만 아니라 이 핏값은 나그네들의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밭을 일컬어 “피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밭을 보면서 유다가 은 삼십에 그의 스승을 배반하고 판 값으로 구입된 땅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로써 유다는 영원히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히며, 이 묘지는 그의 배반의 상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배반의 빌미를 제공한 자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의 무고한 희생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는 기념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유다의 비참한 최후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거래에 대해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마태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레미야 19:1-13과 32:6-9에서 “토기장이”와 “밭을 사라”는 용어를 인용한 것으로 본문의 흐름에 기초한 인용은 아닙니다. 마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 스가랴 11:11-13과 유사합니다. 마태는 예레미야서의 “토기장이”와 “내 밭을 사라”는 구절과 스가랴서의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라는 구절을 적절히 혼합하여 이 상황에 적용하였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혼합 인용의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는 길이 우연히 일어난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표면적으로는 유다의 비극적인 배반과 그의 죽음,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과 그들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에 예언된 사실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는 이런 인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거절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마치 선지자들을 거절하고 박해하던 이스라엘의 백성의 모습과 연결시키면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11-2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이제 다시 장면이 바뀌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으로 넘어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라는 구절은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의 권한이 없었으므로 그 권한을 갖고 있는 총독에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넘길 경우 사형판결을 얻어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목을 바꾸어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로마로부터 유대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란이고 로마 당국에서 예민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로마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란자로 취급하여 잔인하게 억압하고 아주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서슴 없이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대답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의 대답의 진정성을 묻기 위해 추가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그들의 증언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기가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눅 23:2). 그들은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여 반역을 일으키는 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눅 23:14; 요 19:12). 예수님은 빌라도의 추가적인 질문에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추가적인 질문에 대답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엮어낸 죄목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 침묵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소가 조작된 것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들의 고소에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 53:7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변명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소에 조금의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에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위엄을 느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고소를 당하고 있는 것임을 한 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가이사를 거역하는 정치적인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무리들과 정치적인 거래를 시도하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총독은 이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마태는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라고 하였고 누가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눅 23:19). 마가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하였고(막 15:7) 요한은 단순히 “강도”라고만 하였습니다(요 18:40). 빌라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무리의 반응을 보고 판결을 하고자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진 초미의 관심사는 민란이었습니다. 만일 잘못된 판결로 민란이 일어난다면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무리들은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요구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환호하는 소리로 온 성이 소동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21:9-11).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이 악의와 시기로 인해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것을 알았고 일반 백성들은 반대로 예수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는 무리들이 바라바와 예수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할지 질문을 던져 놓고 재판석으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아 무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녀가 꾼 꿈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예수님을 “옳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빌라도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 속에서 예수님 때문에 애를 많이 태웠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꿈 때문에 더욱 갈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양심도 아내의 꿈 이야기도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는 덜컥 무리들의 반응을 떠본다고 질문을 던져 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마태는 빌라도의 아내의 꿈을 언급함으로 예수님의 무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리들의 반응을 긴장하며 기다렸습니다.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그런데 무리들은 빌라도의 예상과 달리 빌라도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민란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사람들을 죽인 악명 높은 바라바라는 강도를 놓아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참으로 변덕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던 자들이었습니다(마 21:8-9). 그런데 일주일도 안되어서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바라바로소이다”라고 외침으로 그들의 입장이 돌변하였습니다. 어떻게 선하신 예수님을 두고 흉악한 강도의 석방을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충동질에 쉽게 넘어간 줏대 없고 변덕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짓하고 사람을 죽인 살인마 바라바를 단지 반로마 전선에 뛰어들어 민란을 일으킨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 세우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서 뭔가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신성모독을 한 가증스러운 죄인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의 외침을 들어보면 바라바는 구국의 영웅이요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백성들은 정확한 진실에 근거하여 판단하지 않고 군중심리에 휘말려 남들이 그렇게 외치니까 자신들도 따라하는 감정적이고 우매한 자들이었습니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무리들의 반응을 듣고 당혹스러워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으로 수치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아가 중죄인 취급을 받을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12). 무리들이 이렇게 외치게 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꼬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호한 것을 보고 매우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정 조직망을 가동하여 이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무리의 선동자들을 사람들이 많은 곳곳에 박아 놓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으로 신성모독을 한 가증스러운 죄를 범함으로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눅 23:2) 로마를 대적하여 소요사태를 일으켜 가이사를 반역하는 주동자임을 선동했습니다(눅 23:14; 요 19:12). 이 소문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매우 불안한 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로마 군대의 군사적 진압이 있을 것이고 이 와중에 피해를 보는 쪽은 예루살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런 꼬드김에 예수님을 환호하던 마음이 바뀌어 예수님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끄나풀들은 예수님은 저주와 수치의 형벌인 십자가 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부추겼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무리들이 서슴지 않고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바라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물밑 작업이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무리들의 성난 외침은 공의와 진리가 서야 할 법정을 소란과 선동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법정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선동 정치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외치기만 하면 진리를 거짓으로 바꿀 수 있고 선을 악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재판장인 빌라도가 바라바냐, 예수님이냐 하고 선택의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재판관으로서의 권위를 포기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약점을 잡힌 셈입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 질문은 어떤 사람을 재판할 때 묻는 일상적인 질문입니다. 더욱이 재판장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데 아무런 죄목 없이 판결을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거스려 자기를 아들이라고 주장한 신성 모독죄로 내부적으로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이고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이사를 대적하여 무리들을 선동했다는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비난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해당할 만한 추가적인 죄목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로부터 그 어떤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대신 성난 목소리로 외쳐댈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분노와 감정에 지배당하였습니다. 군중 심리에 휩쓸려 감정적으로 외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증거보다 군중의 큰 목소리가 더 힘이 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으니 소리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리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 감정과 기분에 따라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왕임을 믿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력하게 체포되시자 그들의 꿈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체포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로마에 대항한 선동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체포되신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전혀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희망을 저버린 배신자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자기 감정과 자기 이익을 앞세워 예수님을 저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과 같은 자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니까 같이 비난의 대열에 끼였던 자가 아닌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이런 무리들에게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신랄하게 그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행 3:14-15).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이런 무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했고 자기 감정과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맞고 편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나를 거스리고 불편하게 하면 그것이 악이라고 여겼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합리화하던 자들이었습니다(롬 1:32). 많은 사람들이 하면 그것이 악한 일이라도 괜찮고 소수의 사람이 하면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악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나의 이익 때문에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요(11:7),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시 1:4). 우리는 무리들과 같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참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쓸 데가 없듯이 나는 의인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구주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9:12; .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자기 의를 주장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 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더러운 죄를 내밀지 않으면 예수님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요 13:8). 오순절 강림 사건 때 베드로는 이들 무리들의 죄악을 다음과 같이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 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자 그들은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며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그들은 자기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2:36-40).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친 무리들과 같이 진리가 없고 자기의 악한 욕심과 감정대로 행했던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영접할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에 이를 것입니다(행 3:19).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성난 무리들의 반응에 당혹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진리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판결을 내리면서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는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진리대로 판결하지 않고 정치적인 판결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판결해 놓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음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당국은 민란의 책임을 물어 빌라도를 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양심을 거스르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무죄하다고 무리 앞에서 손을 씻는 쇼를 보였습니다. 그는 그가 다스리는 지역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으나 자기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기를 싫어했고 자기 아내로부터 꿈 이야기를 듣고 더 큰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무리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양심에 거리끼는 판결을 함으로 영원히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비겁한 판단으로 인해 성도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그의 이름이 거론됨으로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무리 앞에서 손을 씻어도 그의 양심의 고소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일에 무죄하다고 선포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범죄한 자로 여기십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책임자의 위치에서 사형 판결을 해놓고 그 책임을 군중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당하라”고 말함으로 그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이 말을 넙죽 받아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무리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감당하지 못할 맹세를 함으로 빌라도의 사형 판결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무리들은 마치 보증을 서주는 사람처럼 “일이 잘 안되면 우리가 책임을 질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채무자가 파산이 되면 그 책임은 보증을 서주는 사람에게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태는 25절에서 “백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여 15절과 20절과 24절의 “무리”와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무리”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일반적인 무리를 가리키는 반면, 25절의 “백성”은 마태가 이스라엘을 하나의 나라로 언급할 때 쓰는 단어로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돌변한 무리들의 책임을 넘어 메시아를 저버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킴으로 그들에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곧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황폐화되고 대량 학살을 당한 사건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는 말이 그대로 실현된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까지 들먹이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그들의 책임이 있음을 공표하였고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억울한 자의 피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습니다. 마태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동족이 당한 재난을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태복음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마음 아픈 구절입니다.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채찍질하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 로마의 채찍질은 끔찍한 고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채찍을 때릴 때 40대 이하로 제한했습니다(신 25:3).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채찍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채찍에는 채찍 끝에 뼈나 금속 조각이 달려 있어 한대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뼈가 드러나고 장기가 드러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채찍을 맞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십자가 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강도나 반란 죄를 지은 중죄인들이었습니다. 일단 십자가 형을 언도받으면 그는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형도 끔찍스럽고 잔인한 형벌인데 채찍을 맞는 것 또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형벌이라고 합니다. 채찍질은 하도 끔찍스러운 것이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었고 대신 몽둥이로 태형을 가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이런 끔찍한 채찍을 맞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채찍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데 이 상처는 세월이 가도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무관심과 거친 말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에 의해 상처를 받습니다. 직장에서는 상관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더 나아가서는 모순된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예민해서 작은 충격에 쉽게 깨지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할퀴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관계 속에서도 오는 것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근본적으로 죄와 허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상처받고 만신창이가 된 것은 나의 죄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통해 참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사랑 대신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른 남편을 통해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남편으로부터도 또 다른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섯 번째 남편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영혼의 갈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그녀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리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렇게 하신 목적은 그녀가 그렇게 상처 입은 원인이 남편 문제, 곧 죄 문제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사생활이라고 해서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방황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와 허물로 인해 우리가 상처를 받고 이로 인해 병들었다는 자아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식에 머물면 안되고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상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내 대신 채찍을 맞으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상처가 나음을 받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심을 선포하시면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5,51).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자기 몸을 찢기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내면의 상처가 나음 받고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희롱당하신 예수님(27-31)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빌라도 총독이 사형판결을 내리자 총독들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관정”은 영어로 the governor’s headquarters (ESV)로 본래 로마 장군의 병영 본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총독의 관저(the Praetorium; NIV)를 의미합니다. 총독의 관저는 평상시에는 가이사랴에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의 명절에 폭력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하여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총독은 그 곳에 일정 기간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곳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머물렀는데 온 군대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온 군대가 예수님을 에워싼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원어로 ‘스페이라’인데, 로마 군대 300-600명 규모의 보병대를 말합니다. 이는 군단을 뜻하는 ‘레기온(legion)’의 10분의 1정도 규모입니다. 이들은 총독의 지휘를 받는 군대로 총독의 수비대 역할을 했습니다. 특별히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서는 역할을 했습니다. 군대가 관정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홍포”는 군인들이 입던 붉은 망토인데, 마가복음에서는 “자색 옷”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던 옷인데 아마도 군인들이 왕의 옷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입던 진홍색의 망토를 가리키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마가가 “자색 옷”이라고 기록한 것은 군인들이 예수님께 왕의 옷을 입혀 조롱하였다는 것을 단순하게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들은 가시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손에 들게 하였습니다. 가시관은 왕관을 말하고 갈대는 왕이 갖고 있는 지팡이인 홀을 말합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서는 가시에 찔려 피가 흘러나와 얼굴을 뒤덮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더기가 된 홍포를 입으시고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시고 임금의 홀 대신 갈대를 들고 계셨습니다. 군인들은 이 예수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연기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렇게 한껏 조롱하거나서는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습니다. 침을 뱉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또 얼굴을 치는 행위도 뺨을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모욕을 주는 학대였습니다.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시늉을 하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침을 뱉고 머리를 치는 행위를 함으로 희롱의 정도를 한층 고조시켰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피조물에게 이렇게 조롱을 당하시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희롱을 당할 때 그 수치심으로 인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지만 실제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노예도 이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 낮추심에는 채찍을 맞으시고 조롱과 침뱉음의 수모를 당하심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한껏 희롱하고 모욕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사 53:7).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제단으로 끌려가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고 만물의 찌끼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곳은 성문 밖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농부들이 그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의 예언처럼 거룩한 성 밖으로 내치심을 당하셨습니다(마 21:39).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히 13:12-1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32-44)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형을 집행하기 위해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갈 때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장을 짊어지고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형장에서 사형수가 짊어지고 온 가로장은 긴 기둥에 연결되고 사형수는 양 손목과 발목에 못이 박혀 높이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가로장의 무게는 30-40 킬로그램 정도 되었고 전체 십자가의 무게는 약 130 킬로그램 정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심문 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채찍을 맞다가 죽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해지신 상황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30-40 킬로그램이나 되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육신이 연약해진 예수님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로마 군인은 빨리 형을 집행하고 쉬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또 다시 채찍질로 재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채찍을 때리면 때릴수록 지체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일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지나가던 사람 하나를 붙들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으로 지나가다가 억울하게도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도시로 알렉산드리아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순례자였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처럼 시몬은 아마도 오순절까지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건을 통해 감동을 받았고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회심했다고 합니다(행 2:41; 4:4).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시몬에게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그 당시에는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모습에서 이 분이 구약 성경에 예언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눅 23:34). 시몬은 당장은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는 수치를 당하였지만 그가 진 십자가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음을 십자가 현장에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의 아내와 아들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 가족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막 15:21).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문안 인사에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루포의 아버지 시몬으로 인해 그 가정에 복음이 들어갔고 그의 아내는 로마 교회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롬 6:13). 

이처럼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당장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기다리면 거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사랑받는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살아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부인으로부터 성폭행범으로 누명을 쓰고 노예에서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성실하게 감옥생활을 하여 감옥의 사무일을 맡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7년간의 대흉년을 대비하게 하셔서 세상 사람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야곱의 자손들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고자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이끄셨고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을 애굽에 정착하도록 하셨습니다. 요셉은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받았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억울하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과 시몬을 호위하던 군인들은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의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마태는 “해골의 곳”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이름이 생기게 된 이유는 그 곳 지형이 해골처럼 생겨서 생긴 지명이라고 하기도 하며 많은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많은 시체가 버려져서 해골이 많기 때문에 “해골의 곳”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골고다를 ‘갈보리’라고도 하는데 ‘갈보리’라는 지명은 해골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칼바리아(calvaria)’로 이것이 갈보리(Calvary)가 된 것입니다. 이 곳은 역사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곳은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장소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이었으며 그 지역의 모양이 ‘해골’을 닮았습니다. 이 곳은 예루살렘 밖에 있었으며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은 사람은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도록 했습니다(레 24:14). 이 곳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으며 예루살렘 성문과 큰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한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 동산이 딸린 무덤이 있었는데 그 곳은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로 요셉은 빌라도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그 곳에 장사지냈습니다(27:57-61; 요 19:41-42).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군병들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시더니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사형수가 처형당하기 전 몰약 성분이 담긴 포도주 한 잔를 주어 마시게 해서 마취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잠 31:6). 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사형수에게 베푼 자비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이를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막 15:23). “쓸개”는 간 아래쪽에 붙어 있는 장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쓰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쓸개를 탄 포도주는 ‘쓴 맛을 가진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록된 “몰약” 또한 쓴 맛을 가지고 있어 마가의 “몰약을 탄 포도주”가 더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는 마취제에 의존하여 고통을 덜고자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느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예언을 성취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지만 그 후 한 사람이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했을 때 그 신 포도주는 받으셨습니다(27:48; 요 19:30).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에 극형 가운데 하나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처형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인 강도와 같이 중죄인들에게 내려진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은 수 일 동안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도록 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극한 고통에 맛보게 한 후 죽도록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공개적으로 실시하였고 죄패를 달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십자가 형이 언도되면 죄수는 먼저 채찍을 맞고 사형장까지 형틀을 메고 가야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십자가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4-15) 물 같이 쏟아졌다는 것은 자신의 몸무게를 못 박힌 채 지탱해야 하는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뼈가 어그러졌다는 것은 십자가의 못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관통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뼈에 무거운 몸을 지탱해야 하니 지속적으로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또한 손목과 발목은 신경이 몰려있는 곳이라 관통한 못이 신경을 건드려 죽는 그 순간까지 극도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마음이 뜨거운 불에 밀랍이 녹는 것과 같이 녹아내렸습니다. 그의 몸의 피는 서서히 빠져 나가 질그릇 조각 같이 말라 생명의 진액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목이 마른지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진토 속에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죽음이 주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고통을 지속시키기 위한 형벌로 가장 비인간적인 처형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을 받은 죄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비는 무릎 뼈를 망치로 부러뜨려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참혹하고 수치스럽고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떨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종교적 낭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그만큼 처절하고 공포스러운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을 개인의 사생활이라고 여기고 즐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사는 대가로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십자가 형벌과 같은 무서운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옷을 놓고 누가 가질 것인지 내기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극도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거리며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습니다. 군병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적 무지로 인해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고 양심마저 무뎌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장면은 시편 22:18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장면 하나하나는 놀랍게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옆에 앉아 지켰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십자가 근처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구출할까봐 이를 경계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그 곳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지진이 일어나 온 땅이 흔들리는 초자연적인 광경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백부장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하였다는 소문은 이들에 의해 반박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죄패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다른 복음서에서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공통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좀더 이 죄패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쓸 것을 주장했으나 빌라도는 이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이 패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요 19:19-20). 이는 이방인 권력자를 통해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요 왕이 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는 죄패로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나신 만민의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마태가 처음부터 주장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쓸 때 처음부터 이방인 동방박사를 등장시킴으로 그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2:2). 이제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방인들을 통해 “유대인의 왕 예수”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유대인으로 나신 왕”으로 만민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받고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의 죽음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배척한 유대인들과 영적 무지로 흑암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속으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제는 우리의 삶과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왕과 달리 목자가 양을 돌봄과 같이 돌보심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험과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울타리를 쳐주심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왕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마음의 평화와 안정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명을 드려 예배하고 섬길만한 영원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결코 실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으로 만족함으로 부족함이 없고 그의 영예로운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 두 강도와 함께 못 박히셨음을 부각시켰습니다. 두 강도는 각각 예수님의 좌우편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 사이에 가운데 계심으로 행악자 중에 으뜸으로 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위해 강도와 같이 취급을 받으셨음을 전하고자 이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는 이 장면이 이사야 53:12,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라는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죄인들과 구별되신 분이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흉악한 강도와 같이 취급을 받다니, 이는 놀라운 은혜요 감동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 흉악한 중죄인 취급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범죄자 취급받는 데에 내어 주시고 대신 아들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6-7,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거나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 옆으로 골고다 언덕이 보였기 때문에 그 날 누가 처형되었는지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람들이 이 처형 장면을 일부러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로 생각했기에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들은 소문에 기초해서 비난하였습니다. 아무리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해도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짓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전을 짓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렸는데 그것도 지금도 짓고 있는데 어떻게 사흘만에 짓겠다고 허풍을 떨 수 있는가 하며 그들은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 2:2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드려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성전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흘만에”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메시아의 호칭으로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을 존재하게 한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실 수 있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 없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을 구하였습니다(12:38; 16:1) 그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12:39; 16:3).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하시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서 내려오라”라고 조롱조로 말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며 거들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습니다. 온통 사방에서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는 소리로 가득찼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마귀의 조롱하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에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4),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3:6)라고 했던 방식의 유혹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라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느냐?”라고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네가 남을 구원할 수 있으면 자신도 구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메시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요구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모욕하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헛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를 위해 죽으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고 구원 역사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십자가 형벌의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비꼬아 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한 말은 순전히 속이는 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이라는 가장 큰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입막음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라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28:13). 이를 볼 때 그들은 처음부터 믿으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우리가 믿겠노라”는 말은 허언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기적의 역사 (45-66)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은 오전 9시입니다(막 15:25). 그 후 제 육시, 즉 정오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 즉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낮 12시인데 어둠이 임하였다는 것은 언뜻 개기일식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못 박히신 날은 유월절로 보름이라 이는 개기일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고통과 함께 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고통할 때 하나님께서도 고통하셨습니다. 이는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땅도 메시아의 죽음에 같이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사적인 대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으로 악이 선을 이기고 온 땅은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실패처럼 보였고 이제 세상은 끝났것 같았습니다. 또한 이 어둠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장자 재앙을 내리시기 전 3일 동안 애굽 온 전역에 어둠을 내리신 사건을 상기시킵니다(출 10:22). 하나님께서는 어둠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에 바르게 하셔서 장자 재앙을 피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사신 백성이 되었고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새 날이 밝아 오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하듯 구원의 새 날이 오기 직전의 어둠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에게 가해진 고통과 모욕과 박해는 하늘을 놀라게 하였고 세상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이 임하였을 때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어둠과 싸우고 계셨습니다. 이 어둠은 예수님의 영혼이 극도로 고통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계속되었을 때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고통을 감내하고 계셨습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께서 혼자서 우리 죄를 위해 온전히 그 고통을 다 견디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낮에 벌어진 어둠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직감했습니다. 이 시간은 인류의 대속이 이루어지기 위한 절정의 시간이었습니다.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 구시, 즉 오후 세시가 되어가자 예수님의 생명이 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 그의 마지막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마지막에 그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마가복음 15:34에서는 아람어 ‘엘로이’로 기록했습니다(우리말 성경에는 히브리어 ‘엘리’로 기록했습니다). “라마”는 ‘어찌하여, 왜’라는 뜻이며, “사박다니”는 아람어로 2인칭 남성 완료형으로 ‘(당신께서) 저 버렸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혼합하여 기록했고 마가는 아람어로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둘의 의미를 번역해 놓았는데 그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시편 22:1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이 말씀은 불평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지금도 그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시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겪는 육체적인 고통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너무 컸기에 이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해 지옥에서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그 한 몸으로 온통 다 뒤집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류의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잠시나마 버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잠시나마 원수의 손에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이 때 하나님은 음성으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하셨고(요 12:28),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더했습니다(눅 22:43).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혼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구속 역사의 완성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잠시 동안 하나님과의 분리를 겪으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홀로 겪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진노의 쓴 잔이 온통 그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은 다음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을 죄가 되게 하셨고 그 대신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이로 인해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치열하게 고뇌하셨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셨으며 철저하게 버림받으셨고 끔찍한 지옥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지옥이 갈보리 언덕에 임하였고 우리 구주께서는 그 밑으로 내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끔찍한 공포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즐길만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 짓는 것을 사생활이라고 여기고 보호받아야 할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므로 이 본성을 억제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만 죄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말합니다(롬 1:32). 반면 도덕적으로 비교적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공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욕심을 제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들은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자랑하며 역사는 이런 인간의 이성과 선한 의지로 진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롬 3:10).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또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다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롬 1:2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우상숭배자가 되고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심지어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동성애를 즐깁니다.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온갖 죄악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죄는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메마르게 하고 고뇌하게 합니다. 죄는 독약이 발라져 있는 사탕과 같아서 즐길 때에는 달콤하지만 죄의 독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합니다. 죄는 나병과 같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그 내면을 흉측하게 만듭니다. 죄는 암과 같아서 정상적인 세포 조직을 파괴하고 결국 죽게 만들듯이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파괴하여 죽게 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간혹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호위호식하고 살 수 있게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롬 2:9). 죄는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요한계시록 21:8은 죄의 삯이 사망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 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고통하는 것이 “죄의 삯”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이런 끔찍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통해 나를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구원을 가볍게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십자가에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구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 동안 죄가 쏘는 고통으로부터도 구원해 주십니다. 죄로 인한 상처와 아픔으로부터도 구원하여 주셔서 온전한 치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나음을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죄책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 죄책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나의 죄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지고 예수님과 살아나심과 같이 새 생명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은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엘리”라는 말이 ‘엘리야’라는 이름처럼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구경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처절한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듣고는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를 적시아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마시게 한 것 같습니다(요 19:28). 여기서 해면은 바다 바위 빝에 서식하는 해양동물로 움직이 거의 없고 이것을 햇볕에 말리면 미세한 구멍들이 생겨나 물을 흠뻑 머금을 수 있는 스폰지 역할을 합니다. 신 포도주는 앞에서 언급한 진통제의 역할을 하는 “쓸개를 탄 포도주”와 달리 로마 군인들과 일반인들의 일상 음료로 빵과 함께 마셨습니다. 이것은 물보다 흡수력이 좋아 갈증을 더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일반 포도주보다 값이 싸서 일반 백성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신 포도주를 제공한 사람은 목말라 고통하는 예수님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고 아니면 사형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행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형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그를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호기심과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에수님을 놀림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그들의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영적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5:44).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은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세상은 사형 현장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원수 같이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습니다(찬송가 294). 하나님은 자기의 원수가 되시는 세상을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고 자기 아들을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롬 2:4; 3:25). 그리로 부지 중에 지은 죄, 영적 무지로 완악하게 대적한 죄, 하나님을 멀리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산 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이용한 죄 등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까지 십자가로 다 소멸하셨습니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이 온 줄 알고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단순히 “숨지시니라”라고 표현했고(막 15:37), 누가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서술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현하셨습니다(눅 23:46). 요한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기록함으로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 역사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강조하였습니다(요19:30). “영혼이 떠나시니라”는 표현은 he gave(yielded) up his spirit(NIV; ESV; NKJV)로 ‘영혼을 놓아주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로 희생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요 10:18). 아무도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요 1:4; 11:25). 겉으로는 제자들의 배신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죽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기적의 사건을 기술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더해 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성전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놓은 커튼을 말합니다(출 26:31-35; 27:21; 30:6; 대하 3:14).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을 짜서 만들었고 그 위에 그룹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고 지성소 안에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난 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 16장; 출 30:10; 히 9:7). 휘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커튼처럼 쉽게 찢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휘장은 네 가지 색깔의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든 것으로 꽤 두꺼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초자연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 짐승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율법이 정한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시간과 장소의 한계가 있었고 짐승의 피의 효력도 한계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히 10: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히 9:12).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주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로 휘장 가운데로 새로운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로서 예수님은 그 몸이 찢기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히 10:19-20). 이제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롬 8:15).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큰 사랑을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3-5).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습니다(엡 2:14-16). 우리는 그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이로 인해 우리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눅 1:75).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가장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며 그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힘이 되고 방향이 되며 세상 만민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은 가장 복되고 가치 있고 보람 잇는 일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벧전 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 일어난 두 번째 기적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마태만이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땅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고 지진으로 인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유대인의 무덤은 매장된 땅 속이 아니라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것으로 지진으로 인해 큰 바위로 막아놓은 무덤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원어를 보면 “무덤들이 열리며”와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사이에 접속사 and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난 후 사흘 후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성도들 중 어떤 사람들이 부활하여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 보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무덤 문이 열린 것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마자 지진과 함께 일어난 사건이고 성도들이 살리심을 얻어 사람들에게 보인 것은 예수님의 부활 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는 성도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구약의 역사적인 믿음의 위인들인지, 예수님을 가까이서 뵈었으나 예수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마태는 우리를 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우리가 납득하기 쉽게 자세히 묘사해 놓기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곧 일어나게 될 부활과 연결시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우리가 납득하도록 설명하기보다는 단순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의문에 일일이 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루시는 당연한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무덤 문이 열린 것은 사흘 후에 있을 그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사람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구원의 계획을 이룬 놀라운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바로 부활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은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선포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새 생명을 여는 시작입니다.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세 번째 기적은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에 심히 두려워하였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던 자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백부장은 사형의 집행을 지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지켜보던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사형수들의 사형을 집행해왔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는 처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하시는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에 그의 영적인 무지와 죄를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의 기록은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지 않고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과 증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우리가 때로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십자가는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고 영접합니다. 이 대속의 사랑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완악한 죄인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원자폭탄과 같아서 돌처럼 굳어진 사람의 마음을 깨고 그 사랑 앞에 굴복하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복잡한 철학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많은 학식과 인간적인 배경을 자랑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 2:2). 이는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과 이어질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원을 주는 복음의 핵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로마 백부장과 같이 복음을 모르고 영적 무지 가운데에서 죄가 죄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을 들려줄 때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남아 있던 여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도망간 열두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록 십자가 현장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드려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이 여제자 그룹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 역사에서 여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은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룹이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죽으시기까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예수님을 따랐던 충성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데 그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쪽 지역의 막달라 출신으로 과거 일곱 귀신들린 여자였으나 예수님께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눅 8:2). 그녀는 자기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고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을 지켜 보았으며(요 19:25),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막 15:47). 그녀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가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막 16:9). 특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요 20:11-18). 마태는 십자가의 목격자로서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소개하였는데 이를 볼 때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를 말합니다. 야고보와 요셉은 예수님의 형제들로(마 13:55-56; 갈 1:19) 처음에는 예수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세상적인 야망이 있었습니다(요 7:3-4). 그러나 이들도 변화되었고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가 되었으며 야고보서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를 말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로 예수님께는 이모가 됩니다(요 19:25). 요한복음 19:25에서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추가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녀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십자가의 현장을 지켰던 여인들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눅 23:49). 열두 제자 중에서 십자가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모 마리아의 인생을 부탁받았습니다(요 19:27). 나머지 제자들은 다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26:56).  하나님은 이 여인들을 구원 역사의 핵심적인 사건인 십자가의 증인들로 쓰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증인으로도 쓰셨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의 확실한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용기와 충성스러움을 기뻐하셨습니다. 

묻히신 예수님(57-66)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날이 저물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재빨리 장사지낸 것은 날이 저물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월절 행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급하게 장사지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 의식에 따르면 유대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날 매장을 했습니다. 이는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이고 시체를 오래 놔두는 것은 땅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므로 빨리 매장하였습니다(신 21:22-23). 그 후 그들은 7일간 애도 기간을 갖고 문상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목적은 만인이 오래 동안 그 시체를 보고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 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놔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려면 로마 행정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일은 로마 당국과 친분이 있는 유력한 사람이어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부자였던 아리마대의 요셉이 나서서 빌라도에게 청하여 시체를 인수받아 유대인의 율법대로 그 날 장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처리할 때 향품을 발랐는데 이는 시체의 부패한 냄새를 제거해주고 시체가 빨리 썩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흙에서 났으므로 빨리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날이 저물면 안식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향품도 바르지 못하고 급히 깨끗한 세마포를 싸여 묻히셨습니다.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 현장까지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향품도 제대로 바르지 못한채 묻히신 것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제대로 예우해 드리지 못한 것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안식일이 끝나고 여인들이 향품을 발라드리고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의 사랑과 충성심 때문에 안식 후 첫 날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오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소유의 무덤에 장사하는 데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부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모범적인 평신도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나 학식, 젊음이나 건강, 우리가 가진 소유나 사회적 지위 등을 드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헌신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다양한 지체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드릴 때 오케스트라와 같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내며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곳이 됩니다. 이를 통해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 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 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4복음서에서 마태만이 “준비일”에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그들이 우려하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예수님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었고 유월절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 빌라도와 회동하였습니다. 그들이 정한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 그들이 정한 거리 이상을 걸어가서는 안되었고 이방인의 거주지인 총독의 관저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안식일법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규제해 놓고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판사들이 법대로 재판을 하지만 자기들은 지키지 않아도 그들을 재판할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들을 기소하고 재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옥죄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님을 죽임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위반해도 그들을 살인죄로 기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시간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4시간 토요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해서 36시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유대인의 날짜 계산에 의하면 죽으신 시각부터 따져서 사흘로 계산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에 대해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16:21; 17:9; 17:23; 20:19). 이 예고는 제자들에게 한 것인데 이 사실이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고를 네 번이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슬픔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민하게 이 사실을 기억해 내고 이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목격하였고 증언을 들었고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에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배후에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있다고 폄훼하였습니다(12:24).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던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지진이 발생하여 온 세상을 뒤흔든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만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질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빌라도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경비병들과 함께 무덤으로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를 설득할 때 에수님이 부활하게 되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빌라도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서 사람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 속임이 전보다 더 클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습니다. 빌라도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지만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여 군사들을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면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사기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도 사기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뉴스가 세상에 퍼질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기적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실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사기’라고 몰아부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의 공작을 길게 기술함으로써 그들이 진짜 ‘사기꾼’은 종교 지도자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나게 될 혼란이라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를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는 이런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이 사건에 국한하여 성전 경비대와 더불어 로마 군인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인봉하였다”는 것은 시체를 무덤에 안치하고 난 후 바위를 굴려 무덤 입구를 막고 진흙으로 그 틈새를 막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다 그 위에 빌라도의 인장이 찍힌 띠를 붙임으로 다른 사람들이 침입하였다는 흔적을 감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로마 경비병들은 로마 정부를 상징하는 빌라도의 군사였기 때문에 무덤을 봉한 최후의 인봉이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과 함께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또 다른 증거를 추가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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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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