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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 25:1-46)

25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자들이 깨어 있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님의 사명을 맡은 청지기로서 우리의 사명에 충성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재림 신앙으로 사는 신자들의 삶의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의 주로서 심판하실 예수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이분법을 사용하심으로 신자들이 마땅히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 경각심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독자의 경우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가까왔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세 비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깨어 있도록 하시고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고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1-4)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실 때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취지와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준비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24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삶을 사는 자들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줍니다. 즉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귀하게 여기고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감당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준비하는 삶’에 대해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십니다. 24장에서 준비하는 자는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말한 반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모든 사람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청지기는 소수의 사역자들에게 국한시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는 모든 신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종말의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의 천국의 모습을 열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셨습니다.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말하고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로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보통 예수님과 신자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는데(호 2:19; 계 19:7-8; 21:2), 여기서는 신랑과 신부의 들러리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회중을 나타낼 때 많이 쓰입니다. 10명은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모든 종교의식나 회의의 정족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열 처녀는 장차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십 계명, 열 재앙, 십일조의 열(10)과 같이 충분히 꽉 찬 상태를 상징합니다. 장차 우리 주님을 맞이할 그리스도인들은 구름 떼처럼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결혼 관습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결혼은 초저녁에 치러졌는데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신랑 집으로 데리고 가지 위해 신부 집에 옵니다. 이 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손에 등불을 들고 나가서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을 맞이하고 신랑을 신부에게로 인도합니다. 그 후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향했는데 이 때 신부의 들러리들이 앞서 가며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 때부터 성대한 결혼 잔치가 일주일 동안 열렸습니다. 이를 위해 신부의 들러리들이 꼭 갖추어야 할 것은 바로 등불이었습니다.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다섯 명씩 구분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섯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분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자와 땅에 쌓아 두는 자를 구분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를 구분하셨습니다. 또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를 구분하셨고, 집은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모래 위에 짓는 미련한 건축가를 구분하셨습니다(마 6-7장). 우리는 이런 구분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준비성’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교훈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준비하였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도 준비하였고 여분의 기름을 따로 준비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는 신랑이 늦게 올 경우를 대비하여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구분이 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담긴 기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나름대로 생각습니다. 등은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이라고 한다면 기름은 그 신앙을 유지하고 타오르게 하기 위한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공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키고 타오르게 하는 ‘기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의 신앙의 등불을 지속적으로 밝히고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는 것은 번거롭고 거추장스럽고 무거우며 게다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경제적 측면에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한된 기름만 등잔에 넣어 간편하게 등불을 밝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뒤처지지 않고 신앙에서도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간편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치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야 하고 그럴듯한 직업을 가져야 하며 그럴 듯한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그럴듯한 주택도 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은혜의 기름통을 준비하는 일이 거추장스럽고 무겁고 힘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겨울을 대비하지 않은 베짱이와 같은 생각입니다. 부지런한 개미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먹이를 모아 그들의 창고에 쌓아둡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미래를 대비하는 자입니다. 미련한 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노년은 준비하지만 죽음 이후 하늘 나라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그것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재림 신앙을 가지고 준비하는 자들은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밤중에 온 신랑(6-13)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신랑은 보통 초저녁에 신부 집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신랑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예상한 시각을 훨씬 지나 밤중이 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과 달리 예상보다 지체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라는 말씀에 기초해서 예수님이 곧 오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징조는 보였지만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지체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셔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나타나야만 합니다(롬 3:25). 게다가 하나님은 당신의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을 통해 정금과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나오도록 하십니다(욥 23:10). 그리스도의 지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지체되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적당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 

예수님이 오시기로 한 그 때가 자꾸 지체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에 오시지 않으므로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깨어 있지 못하게 되거나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 종말 신앙에 매몰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어느 시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거짓 메시아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이 세대에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안 오시니까 예수님은 ‘나의 세대’에 오시지 않는구나 하고 긴장을 늦추고 준비하지 않고 현실에 얽매여 살거나 방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미혹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기에 생각보다 지체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긴장을 늦추거나 영적인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다 졸며 잘새”라는 말에서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일지라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졸거나 잘 수 밖에 없습니다. 재림 신앙 가운데 사는 신자는 일상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고 자기 가족을 돌보기에 힘쓰며 그 다음 날 일하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힘써 일합니다. 교회에서 맡은 바 직분을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감당하며 분수에 넘치지 않게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고 동역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실하게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때로는 영적 침체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여러 환난을 당하거나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마음이 무겁고 걱정에 휩싸이거나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 등불을 유지하기 위기 위한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매일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영적 침체기에도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를 기다리며 기도로 주님의 긍휼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죄악되고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졸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등불을 유지하기 위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열 처녀들이 자고 있는 사이 밤중에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오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들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라고 외쳤습니다. 기나 긴 기다림의 지루함과 고요함이 지나고 이제 신랑이 오고 있다는 다급함과 갑작스러움과 긴장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처녀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등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영어로 trimmed their lamps(NIV)로 ‘등을 손질하다’는 뜻입니다. 즉 잠을 자는 동안 심지가 탔을 것이고 그래서 심지를 빼내어 밝히 비추도록 정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바람을 가리고 빛을 통과시켜 주는 가림막의 그으름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의 불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이 다 떨어져 간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보충할 기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랑은 오고 있고 기름은 떨어져 가니 마음이 급해서 옆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름을 나눠주면 둘 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갈 때까지 기름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대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슬기 있는 처녀들은 이기적이고 얄미운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도덕적인 잣대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은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구원 문제만큼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만 성립합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의 뜻이나 연줄이나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거래와 흥정의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어 있습니다(고후 5:10). 그러므로 자기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을 의존하거나 그 때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구원의 기회를 다음을 미루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당면한 문제 해결에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을 때 그 때 믿음을 갖겠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인생의 낙이 없을 때 그 때 믿으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인생의 낙을 누리고 죽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감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착각한 것은 인생의 종말이 언제 갑자기 닥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실 때 낭패를 보게 됩니다(눅 12:20). 

슬기 있는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차라리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가서 쓸 것을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온 순간에는 때늦은 해결책이었습니다. 신랑이 오면 이미 기름을 파는 곳은 문을 닫고 천국의 문마저 닫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옵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 당장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현실의 유익과 편리함만을 추구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지만 외형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그들의 신앙 생활의 목적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며 친목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어지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로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직업에는 충실하지만 교회에서 직분과 사명을 맡아 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예민합니다. 이런 그들은 자고 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꺼져가는 등불을 허둥지둥대며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때늦은 후회일 뿐 그 어떤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예수님은 슬기 있는 처녀들을 “준비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나의 구원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 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러나 천국 잔치의 문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고 닫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천국에 들어오도록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초청하셨습니다. 암탉이 새끼를 모음 같이 자기 백성을 모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선지자를 수없이 보내어 정중하고도 겸손하게 천국 잔치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두들겨 팼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우리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복음의 일꾼들을 통해 천국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이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맞이하며 준비하는 자는 천국 잔치에 들어가는 복을 누리고 듣고도 무시하거나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그 문은 굳게 닫힐 것입니다.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고 오니 이미 천국의 문은 굳게 닫히고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면서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치며 애걸복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차갑고 냉정하고 무시무시한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 문 입구에서 구원을 갈망하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평소 어떤 자세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봇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거나 보험에 가입하듯이 우리는 천국을 위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기름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이 기름이 계속 공급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에 헌신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주님이 주신 사명에 헌신해야 합니다.

재능대로 달란트를 준 주인(14-18)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에 이어서 달란트 비유를 들어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어떤 자세로 준비해야 하는지를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등을 밝히는 기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신앙 생활의 내적인 마음의 준비를 강조하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하는지를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의 준비도 중요하지만 실제 삶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암시합니다. 주인이 돌아와 결산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승천부터 재림 전까지 기간 동안 신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기간은 각 개인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살아 있는 기간을 말합니다.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인데 1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6,000데나리온은 20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거액으로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충분한 밑천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함께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기도 하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그에 맡는 직분과 역할과 은사를 주십니다. 이를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에 따라 금액을 달리 주신 것은 공평한 일입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에게 한 달란트를 준다면 이는 그 재능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반면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준다면 그는 그 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재능과 성격과 능력에 따라 적절한 직분과 역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재능대로 달란트를 준 것은 합리적이고 공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누구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자기는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다고 불평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는 자로 남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창 1:31). 우리는 나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순간 불행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나지 않아서 자기 인생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벌 집 아들은 나름대로 자기만이 갖고 있는 인생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메마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는 존재라는 절대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손목 시계는 주인의 손목에 채워져 있어 주인에게 시각을 알려줄 때 손목 시계로서의 가치와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손목 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귀한 존재입니다(창 1:26). 그런데 하나님을 배제한 채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그 인생은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힘들 때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 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명을 복으로 주셨습니다(창 1:28). 인간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큰 복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그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분부하신 것을 떠올립니다(28:19-20). 

누가복음 19:13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떠났을 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유익을 남겨드리는 것은 우리의 책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재능을 주시면서 이를 낭비하지 말고 이익을 남기도록 하십니다. 장사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거기에 돈을 투자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는 우리를 품꾼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인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 비유하셨습니다. 품꾼은 일정한 금액을 받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청지기는 주인이 맡기고 떠났으므로 자기가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경영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주인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주었습니다.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고 치밀한 계획과 시장 조사를 거친 후 주도 면밀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사업을 벌여야 합니다. 또한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제품을 판매해야 합니다. 또한 부지런해야 하고 과감한 결단력과 시장 상황 반응에 재빠르게 반응하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자한 것을 날리고 파산하게 됩니다. 

이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두 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16절에서 “바로 가서”라는 말에서 그들은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큰 돈이 생겼다고 해서 그 돈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수중에 큰 돈이 있으면 좋은 집과 고급 승용차를 사고 좋은 옷을 사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자 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맡긴 돈을 자기 돈으로 착각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그들에게 충분히 장사할 수 있는 기간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을 의식하지 않고 사업 자금을 물 쓰듯이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돈이 주인이 준 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주인의 뜻을 따라 열심히 장사하여 이익을 남김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능력과 건강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가진 자본을 두 배로 불렸습니다. 한편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장사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장사를 하면 주인이 준 자본금을 다 날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금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럴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는 장사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아까운 돈을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칭찬을 받은 종(19-23)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하였습니다. “오랜 후에”라는 말은 열 처녀의 비유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예상보다 지체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인은 종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결산”하였습니다. “결산”은 다른 말로 ‘평가’를 말합니다. 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생을 마감한 후 우리 주님으로부터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산”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결산을 할 때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거나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유익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대가 되고 설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해서 좋은 결과를 낸 사람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거나 장학금을 받으면 집으로 당장 달려가 부모님께 자랑합니다. 회사에서 우수 사원 표창을 받고 격려금을 받은 사람은 기분이 좋아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 턱’을 냅니다. 이처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가 번 다섯 달란트를 주인에게 내놓으며 자랑하듯이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에 주인은 기분이 좋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보란 듯이 자기가 번 돈을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에게 많은 이익을 남긴 두 종은 공통적으로 “주인이여 내게 다섯[두] 달란트를 주셨는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주인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준 달란트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금이 없어 고생하는데 그들은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밑천을 주인으로부터 두둑히 받았던 은혜를 먼저 언급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내가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음 보통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인생을 즐기고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가 준 모든 재산을 몽땅 다 탕진한 탕자처럼 빈털털이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 때 파산하여 돼지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보면 낭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데 왜 남에게 주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를 위해 사용한 자도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결산을 받을 날이 옵니다. 반면에 청지기 사상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욥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갖고 있는 생명은 기본이고 생각할 수 있는 지성,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절제할 수 있는 이성, 어려움을 참고 극복하고 계획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의지력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이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를 잘 활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없는 은사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하니 실패할 염려가 없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실패를 겪기도 하고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지기도 하고 죄로 인해 실수하여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게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주님을 힘 입어 다시 일어나 도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패와 좌절은 오히려 주 안에서 승리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여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 자를 축복하셔서 그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고 똑같은 칭찬을 하셨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은 누가 많이 남겼느냐 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준 칭찬도 같았고 그들에게 준 보상도 같았습니다. “착하다”라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에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인간 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이익이나 비즈니스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만일 이 두 사람들이 주인과의 관계에서 비즈니스 관계에 기초했다면 주인의 뜻을 헤아려 순수한 마음으로 사업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주인의 뜻을 따랐고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겸손의 마음을 유지하였습니다. “충성되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변함 없이 성실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충성되지 않다는 것은 게으르거나 자기가 내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할 수 없는 여건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맡은 일이 성사되도록 합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그들의 재능이나 인기, 그들이 이룩한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착함과 충성스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개인의 능력과 재능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 그것이 내적 동기가 되어 이루어집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는 대목입니다. “적은 것”은 영어로 a few things(NIV; KJV; NASB), a little(ESV)로 ‘몇 가지 일’ 또는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숫적으로 많은 일을 하기보다 몇 가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말하고 양적으로는 대규모 사업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큰 일’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님의 종들이나 성도들이 교회에서 ‘큰 일’에 집착하는 것은 그 일을 이룸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작은 영역에서 충성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즐거워하고 이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6:3,6).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충성하는 자가 큰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경홀히 여기고 무시하는 자가 큰 일을 할 경우 그 큰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작은 것이지만 가능한 예술적으로 디자인을 한다거나 사용자의 편의성 측면에서 고려한 기능을 넣은 제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또한 소비자의 만족을 꼼꼼하게 챙기며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때 그것이 모여 큰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일, 그렇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전도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일,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일, 성도의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한 일 등 해야 할 수많은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꼭 무대에 서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일만이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적은 일”을 귀하게 여기고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않고 하늘의 상을 바랍니다. 

책망을 받은 종(24-27)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예수님은 이제 부정적인 사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해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뜻은 무정하고 포악하고 거칠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9:21에서는 “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보다 더 강경한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는 주인이 너무 계산적이라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해를 봤다가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종들을 착취하는 자로 묘사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것은 harvest where you have not sown(NIV)로 ‘씨앗을 뿌리지 않는 데에서 수확을 거두다’는 말입니다.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은 gathering where you have not scattered seed(NIV)로 ‘씨앗을 뿌리지 않는 데에서 거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같은 뜻을 두 번 반복하는 말이 됩니다. 헬라어 원어에서는 “헤치다”는 단어가 ‘씨앗을 흩뿌리다’는 뜻 외에 ‘까부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바람을 불어 까부르면서 곡식을 모으는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은 까부르는 과정도 없이 곡식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 폭군과 같은 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벽돌에 쓸 짚도 주지 않고 할당된 벽돌을 만들어내라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출 5:7). 

그는 또한 주인을 두려워하여 주인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과의 관계성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왜 주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에게 한 달란트만 주신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달란트를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비교의식과 원망하는 마음은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기 형편과 상황만을 생각하고 이에 기초해서 주인도 혼내기만 하고 자기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인간은 이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고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이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영접할 때 죄 의식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한 달란트 받았다고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현실에 자족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풍부에 처하거나 빈곤에 처하거나 자족하는 것을 배웁니다(빌 4:11). 그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는 많은 일을 하기보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감사함으로 감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며 비교 의식에 시달리면서 뼈를 깍는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또한 한 달란트 가진 자의 문제는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잘못 투자했다가 손해가 나면 주인이 자기를 혼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일은 결코 손해날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사업과 달라 실패할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역사로 하나님을 우리를 쓰셔서 친히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손해를 보느니 차라리 땅에 묻어 두자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재능과 생명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묻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자기 만족과 쾌락과 이기심을 위해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하여 하나님이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체험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도전하고 시도하여 주님께 유익을 드리는 자입니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심히 분노하셨습니다. 그 누가 나에 대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자”라고 한다면 매우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악하고 게으른 것을 책망했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그가 주인에 대해 삐딱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주인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상황과 현실을 탓하며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악한 종’이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게으른 점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할지 모릅니다. 자기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민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혼인 잔치에 초대를 한 임금의 초청을 무시하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하러 간 사람들과 같았을 것입니다(22:5). 그는 노아 시대의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24:38).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귀찮아 하고 무가치하고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육적인 게으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게으름이 있습니다. 육적인 게으름이든, 영적인 게으름이든 하나님은 게으름을 피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잠언에는 게으름에 관한 말씀이 20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게으른 자는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합니다(딤전 5:13). 게으른 자는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핑계가 많습니다(딛 1:12). 믿음과 오래 참음의 반대말은 게으름입니다(히 6:12). 게으른 사람은 결코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벧후 1:8).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게으른 자를 책망하십니다. 

주인은 종이 최소한 원금을 은행에 넣었다가 이자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주인은 모든 사람이 원금의 두 배의 이익을 남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일을 하여 이익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정 안되면 이자를 많이 주는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라도 이익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은행에 돈을 넣는 것 조차 귀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주인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것은 주인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달란트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달란트를 갖기 싫다고 물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재능과 건강과 기질 등은 내가 갖기 싫다고 반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달란트들을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께 유익이 되도록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달란트를 죄를 짓거나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은 달란트를 땅에 묻고 썩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능도 많고 능력도 많은데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불만 때문에 무기력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던 달란트들이 힘을 발휘하여 완전히 바뀐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도 몰랐던 달란트를 발견하고 매우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숨겨진 재능을 열심히 발휘합니다. 달란트를 통해 이익을 남기려면 나 자신이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는 존재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이 생기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의해 한 달란트를 부여받았지만, 결산의 때에 그 달란트는 회수됩니다. 주인이 그에게서 달란트를 빼앗은 것은 그가 행한 죄에 대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재능과 시간과 재산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무가치한 것에 투자한 것으로 그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충성된 종들은 그가 받은 것에서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자기의 형편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선악 간에 그 행한대로 보응을 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각 사람의 영에 환난과 곤고가 끊이지 않지만,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풍성할 것입니다(롬 2:6-10). 예수님은 그가 다시 오실 날에 받을 상과 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대조시켜 설명하고 계십니다. 29절 말씀은 유대의 속담을 말하는 것으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상과 벌이 분명하다는 것을 대조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속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도 하며(막 4:25)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를 대조하시면서 말씀이기도 합니다(13:12). “있는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을 말하고, “없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을 말합니다(21,23,26). 예수님은 항상 비유에서 대조법을 사용하심으로 듣는 자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서 그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풍성한 상을 말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에게 형벌을 주심으로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일컬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초기 사역 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아 찍혀 불에 던져지는 나쁜 나무와 같은 자들이고(3:9),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는 쭉정이와 같은 자들입니다(3:12). 예수님은 이 때에도 대조법을 사용하여 무익한 삶을 살지 않고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고 쭉정이가 되지 않고 알곡과 같은 신자가 되도록 강조하셨습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 즉 “무익한 종”은 그들의 인생 목적이 세상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 다른 하나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 나머지 하나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익한 종은 자기를 위해서만 살았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농부되신 하나님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포도나무의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서 그로부터 말씀과 성령의 영양분을 공급받음으로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요 15:8). 무익한 종이 당할 종말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긴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와 축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이고,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고통의 극심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결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대비하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비유들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주고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양과 염소로 구분하시는 예수님(31-33)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님은 이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재림 신앙으로 사는 신자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인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며(요 3:13) 메시아의 별칭이며(단 7:13) 재림하실 심판주를 가리킵니다(25:31). 예수님은 초림하실 때 겸손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조용하게 오셨습니다. 초림의 목적은 구원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때에 초림과 다른 모습으로 임하십니다. 그는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 그는 왕이요 심판자로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십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벧후 3:10). 그가 보좌에 계실 때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고자 하지만 숨을 곳이 없습니다(계 20:11). “모든 민족”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합니다(살후 4:1). ‘죽은 자’는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성도들을 말합니다(살전 4:16; 고전 15:52). ‘산 자’는 재림의 때에 살아 남은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죽은 자’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고 주와 함께 항상 있게 됩니다(살전 4:17). 뿐만 아니라 악한 자도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게 됩니다(요 5:28-29; 계 20:13).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은 그 오른편에 두시고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는 것은 양과 염소가 처음에는 같이 목초지에 섞여 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키우는 가축은 양이었는데 목자는 그 사이 사이에 염소를 섞어서 키웠습니다. 양들은 한 곳으로 모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게 되어 다치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는 염소들을 그 사이에 두었는데 염소들은 모여 있는 양들을 헤쳐 놓았습니다. 목자가 먹이를 주면 양들은 한꺼번에 모여 경쟁하였는데 염소가 있으면 양들은 흩어집니다. 또한 염소를 키우는 목적은 맹수가 나타났을 때 양들은 겁이 많아 도망하기에 급급한데 염소들은 겁도 없이 맹수들에게 대들어서 양들은 그 사이에 도망가거나 목자가 나타나 이 일을 수습했습니다. 목자는 밤에 잘 때 양들과 염소들을 구분했는데 양들은 서늘한 곳을 좋아하여 밖에서 잠을 잤고 염소는 추위를 잘 타서 텐트 안으로 들여 재웠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은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주 익숙한 것으로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오른편에 둔다는 것은 오른쪽이라는 뜻도 있지만 ‘올바르고 정당하다, 의롭다’는 뜻을 상징하고 왼편은 ‘불의하다, 옳지 못하다, 악하다’는 뜻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양을 의인으로, 염소는 악인을 비유하셨습니다. 양은 온순하고 단순하며 목자의 인도를 잘 받는 가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를 말합니다. 반면 염소는 싸우기 좋아하고 공격적이며 도발적인 가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악인을 상징합니다(겔 34:17; 슥 10: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에 살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시는 이는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예수님만이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단하십니다. 이 판단은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을 가르는 순간입니다. 세상에서 재판을 하다보면 2심에서 1심과 다른 재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판관들은 법 해석에 있어서 자의적인 판단이 들어갑니다. 그들의 재판의 기준은 참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판단은 아주 정확하고 의롭습니다(딤후 4:8; 롬2:5). 

복을 받은 의인들(34-40)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 때에 임금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31절에서는 심판하시는 분을 ‘인자’로 표현했고 여기서는 ‘임금’으로 표현했습니다. 인자는 성육신 하셔서 오신 구원의 주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제는 심판의 주로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오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아버지께 복 받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에 서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구별된 특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것은 복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의 부름을 받을 때 이를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은 더욱 복되고 영광스럽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우주에 비해 먼지만한 나에게 주목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은혜를 받은 자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이고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 대한 복을 결코 거두어 가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부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나라를 창세로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구별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5).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습니다(롬8:17). 이는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갈 2:16). 믿는 자에게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 자녀의 기도를 다 들어주십니다(요 16:24; 요일 5:14; 벧전 3:12). 우리는 그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영화로운 직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복음의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그의 아름다운 일을 선포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롬 15:6; 벧전 2:9).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고 전파되어야 세상의 끝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24:14). 이는 세상의 역사가 복음을 중심으로 돌아감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맡은 자로서 세상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갑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13:11; 롬 8:14).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특권을 누리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베푸신 혼인 잔치에 참여하며(계 19:9),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입니다(계 20:6; 22:5).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의 우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복을 누리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36절에서 의로운 자들이 행한 의로운 행동을 여섯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우리말에는 없지만 원어에는 “나를”, “나에게”라는 말이 역시 여섯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NIV을 보면  ‘gave me something to eat’, ‘gave me something to drink’, ‘invited me in’, ‘clothed me’, ‘looked after me’, ‘came to visit me’로 동사가 여섯 개, 목적어 me가 여섯 번 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섬겼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고, 영접하였고, 옷을 입혔고, 돌보았고, 와서 보았습니다. 34절에서 그들이 임금의 오른편에 서게 된 것은 그들이 선행을 베풀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위로 이런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선행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실제 삶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들의 그들의 섬김은 보여주기 위한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아 발견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작은 자를 위해 베푼 섬김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은 자를 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동사는 한 마디로 ‘섬김’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섬김은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수동적으로 섬겨준 것이 아니라 방문하고 찾아가고 함께 한 적극적인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인 선대와 나눔과 베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은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을 그렇게 섬겼는지 의아해 했고 주님께 그런 적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9:37). 또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42). 예수님은 초대 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4). 예수님은 성도들을 박해받고 있는 것을 자신이 박해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8:12).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내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이기도 하고 제자들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의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은 작은 자들입니다. 또한 이웃 가운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거처가 없는 자들, 옥에 갇힌 자들도 작은 자들입니다.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오른편에 선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자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교회 공동체의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고 기도해주고 함께 해주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다 한 근원에서 났고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 2:11).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12:50). 우리는 교회 공동체 내의 작은 자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한 사람이라도 그 약한 양심이 상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자들은 형제 사랑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자는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의 삶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 전도자, 선교사, 사역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과 세상의 안정을 버리고 불가피하게 가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고난의 길에 들어서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역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작은 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미자립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런 작은 교회들은 헌금만으로는 목회자들의 자립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교회에서 미자립 교회를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일은 곧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20:28). 예수님은 짐승들이 거하는 축사의 구유에 누이셨고 일생 목수로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이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8:20).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섬기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오해하고 배척하고 냉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형벌이라고 하는 십자가 형을 받으시고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의 주, 생명의 주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나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편히 앉아 계실 수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늘 고난받는 자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그들과 동일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시는 그들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구속의 고난은 끝났지만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재림 때까지는 그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귀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다가 다 갚아 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자들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영생과 천국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복입니다. 

저주를 받은 악인들(41-46)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그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생명되신 예수님께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와서 다스리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육신의 죄악된 소욕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경건의 노력을 한다하더라도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어 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떠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분리되어 모든 것을 상실하고 박탈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릅니다(요 15:6).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생은 꽃병의 꽃과 같이 처음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지고 가장 추한 모습으로 말라 비틀어지게 됩니다. 임금의 왼편에 있는 자들의 운명은 결국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들은 분리의 장소에서 영원토록 끔찍스러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장소는 세상의 창조 이전에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을 위해 예비된 장소였습니다. 그 곳은 처음에는 인간의 영혼을 위해 만든 곳이 아니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하였기에 그들의 죄의 대가로 그 곳에 던져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은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수준의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방대한 양의 교리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는 것은 구원의 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을 받아들이기를 배척하였고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그로 말미암아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축복의 반대인 저주 가운데 그대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운명은 단 한 가지, 영원히 타는 불못에 참여하는 것 뿐입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저주를 받아 영원히 불못에서 고통할 자들의 평소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들은 임금의 오른편에 서 있는 의인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여섯 가지 일, 즉 먹을 것을 주고 마시게 하고 영접하고 옷 입히고 돌보아주고 가서 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42-43절에서는 “아니하였다”는 말이 5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시는 이유는 하지 말아야 할 악을 행한 것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하지 말아야 할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적극적인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죄도 있습니다. 세상의 법에서도 해야할 것을 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부작위범’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의사는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고 경찰관과 소방관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고 도와줄 의무가 있는데 이를 방관하고 지나치는 경우 형사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강도에게 습격을 당해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예를 들어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이웃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0:25-37).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6:19-31).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을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주신 생명과 재능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묻어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임금의 왼편의 앉은 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한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의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지극히 작은 자는 많은 참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찾아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임금의 왼편에 앉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주를 뵈었다면 주님을 돌보는 일을 했을 것이라는 변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고난받는 자와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들이 만일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삶에 실천했더라면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이었고 세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버린 세상의 흐름대로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24:12). 그들은 노아의 때의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매여 살았습니다(24:38). 그들은 미련한 처녀들과 같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25:1-13).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잊고 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25:18).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대해 무정하고 무관심함으로 주님의 뜻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표적을 보여준다고 해도 믿지 않을 자들입니다. 오히려 더 큰 표적을 요구할 자들입니다(12:38; 요 6:30). 이는 그들의 불신에 대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의 왼편에 있는 자들, 즉 자기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벌을 내리시고, 그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주는 삶을 산 의인들에게는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주셨습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비유의 핵심이 주님과의 관계성이 무엇으로 드러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셨듯이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 곧 주님과의 관계성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구원론의 관점에 바라보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로 장사하여 주님께 유익을 남겨 충성하는 것이 재림 신앙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이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은 자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로서 마땅히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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