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죄의 심각성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심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자주 발생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지을 경우 연자맷돌을 목에 매여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용서하되, 반복된다 해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심으로 용서가 공동체 치유의 최고의 덕목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한 엄중한 경고
누가복음 17:1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10절은 앞부분의 내용과 상관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예수님의 네 가지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제자도라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다른 신자들을 실족하게 하거나 죄에 빠지게 만드는 일을 피해야 할 필요성에 관한 것입니다(눅 17:1–3a). 사람이 하나님의 ‘작은 자들’, 즉 믿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은 맷돌을 목에 매고 빠져 죽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회개하는 신자를 지속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필요성에 관한 것입니다(3b–4).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죄를 범했을 때, 그 사람은 가서 죄를 지은 자를 꾸짖어야 합니다. 그 꾸짖음의 목적은 회개를 이끌기 위한 것이므로, 정죄하거나 비난하기보다 사랑과 관심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 번째 말씀은 제자들이 믿음을 구하는 요청을 다루고 있습니다(5-6).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 같아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양(quantity)’이 아니라 ‘질(quality)’임을 지적하십니다. 즉,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참된 믿음이라도, 그것은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말씀(눅 17:7–10)은 누가만 기록한 비유로서,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맡은 모든 일을 다 행했더라도 “나는 무가치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원래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18:9–14)에게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5에서는 그들은 사도들(apostles)로 불립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 이후 복음 선포를 이어갈 내부 핵심 그룹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 다루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의 삶 속에서 실족의 일들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세상, 육신, 그리고 마귀라는 세 가지 강력한 적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화로다”라는 표현은 다른 신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엄숙한 경고를 나타냅니다. 이 “화”는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구절,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오히려 그 화를 피하는 길로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그 화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으시지만, 연자맷돌에 매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신 것을 고려하면, 그 화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으로 ‘걸림돌’,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scandal(추문, 스캔들)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이 단어입니다. 영어 번역으로는 stumbling blocks(걸리는 돌; NASB95, NASB2020, NET), temptation to sin(죄를 짓게 하는 유혹; ESV, NLT, RSV), offenses(위반, 죄의 원인; KJV)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짐승을 잡는 덫을 열어 둔 나무 막대기, 즉 ‘미끼 막대기’를 가리켰습니다. 짐승이 그 막대를 건드리면 덫이 작동하여 포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영적으로 사용되어, 죄로 유혹하는 어떤 것, 특히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예를 들어, 약한 형제를 죄에 빠지게 만드는 행동이나(롬 14:13), 교묘하게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거짓 교훈을 가리킵니다(롬 16:17). 누군가의 앞길에 ‘걸림돌을 놓는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미끄러지거나 벗어나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책망하듯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심으로 그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심으로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을 할 때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6:22-23).
그러나 모든 ‘스칸달론’이 죄악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림돌’(offense)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습니다(벧전 2:8).
“화”는 헬라어로 ‘우아이’라는 의성어로
비탄과 공포, 깊은 불만, 혹은 재앙의 경고를 표현하는 감탄사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소리가 마치 독수리의 울음소리와 같은 음산한 소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슬프다!’, ‘화 있을진저!’, ‘얼마나 두려운가!’라는 뜻으로, 다가올 재앙이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화 있을진저(woe)”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종말론적 맥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마 24:19; 막 13:17 등). 누가복음 6:24–26에서는 세 가지 “화 있을진저”가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우아이’는 대부분 불가피하고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때로는 그 심판을 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함께 섞여 사용됩니다(마 11:21–22; 눅 22:22).
요한계시록 8:13에는 “화”가 세 번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실 심판의 극도의 강조이며, 이사야 6장에서 “거룩하다(holy)”가 세 번 반복된 것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이 완전한 심판을 요구한다는 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의 불가피성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게 만들어진 존재라서, 선한 사람들조차 언제나 같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악한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 앞에 걸림돌을 던집니다. 타락 이후 우리는 본성상 다툼과 논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은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은 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일으키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도 말고, ‘그 일로 상처받는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불쾌하게 해도 실족은 불가피한 것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여겨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친 말, 생각 없이 한 행동, 경솔한 농담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서로 상처 줍니다. 상처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실족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의 심각성과 책임의 무거움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흐름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또 그들을 죄로 이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범했을 때 쉽게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나쁜 본이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와와 아담가 뱀의 유혹의 넘어가게 된 사건이 인류 최초의 실족 사건입니다(창 3:1–6). 하와는 뱀의 교만과 허영을 부추기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와 부담감을 갖게 되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를 볼 때 거짓말, 의심, 왜곡된 말은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대표적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은 선지자였습니다(민 31:16). 그는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습니다(계 2:14).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민 25:9). 아간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실족시킨 탐욕적인 사람이었습니다(수 7장). 그는 여리고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였습니다(수 7:11). 이는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를 넘어지게 한 실족의 형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은 백성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고 위선적 신앙으로 천국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마 23:13; 눅 11:46). 제자들 또한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에 휩싸였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8:1-10). 고린도 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알고도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면서 음식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8:1-13).
“실족”은 단순한 불쾌가 아니라 타인을 죄로 이끌거나 믿음에서 이탈시키는 영적 장애물을 뜻합니다. 이런 실족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하지만, 그것의 통로가 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삼가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넘어짐이 생기면 회개하고 사랑의 권면과 반복적 용서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누가복음 17:2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2절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끔찍하고 두려운 정죄가 따른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영적으로 넘어지게 만드는 자에게는 큰 슬픔과 재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그의 등에 과녁이 붙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면,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 반드시 나를 공격하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작은 자”는 새 신자들이나 연약한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죄에 빠뜨리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자들은 심각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라는 표현은 작은 자 하나를 실족시키기 전에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연자맷돌”은 헬라어로 ‘리소스’로 ‘돌’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8:6과 마가복음 9:42에서는 ‘밀로스 오니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나귀의 힘으로 돌리는 맷돌’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데 주로 나귀를 이용하였습니다. 이 맷돌의 지름은 120–150cm 정도 되었고, 아래 받치고 있는 돌의 무게가 1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위쪽에 바퀴처럼 생긴 맷돌이 짐승에게 연결되어 아래쪽의 무거운 맷돌 위를 빙빙 도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나 사회를 혼란케 한 중죄인에게 이런 형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 맷돌을 목에 메고 물에 던져진 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물속 깊이 가라앉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표현은 그가 마치 잔혹한 고문자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으로 작은 자 하나를 넘어뜨리는 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작은 자 하나를 실족시키느니 차라리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끔찍한 죽음의 이미지로 실족의 심각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두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경고였습니다.
“나으리라”라는 말은 ‘뤼시텔레오’로 ‘이익이 되다’, ‘유익하다’, ‘누군가에게 더 낫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이익’이라는 것이 무거운 돌에 목이 묶여 빠져 죽는 끔찍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하기 때문이라는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백성 중 가장 작은 자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입히는 것은 가장 크고 파멸적인 죄입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심지어 무심코라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해가 될 일을 삼가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괜찮을 수 있어도, 약한 형제에게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하나님의 자녀라도 고의로 근심하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목에 무거운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낫다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그런 방식의 죽음이 실제 형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실 형벌이 그보다 훨씬 더 무섭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를 실족시킨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이 조롱하게 만들었습니다(삼하 12:14).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워 위선을 행하여 다른 유대인 신자들과 바나바까지 실족시켰습니다(갈 2:12–13).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회개했고,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참된 신자는 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끌었다면, 그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넘어진 형제나 자매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극적인 묘사는 인간관계에서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을 매우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반복되는 회개에도 용서해야 할 제자의 책임
누가복음 17:3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2절은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이고, 3-4절은 실족당한 자에게 주어진 지침입니다. 3절은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할 때 취해야 할 패턴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므로, 제자는 늘 깨어 주의하고, 세심히 살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현재 명령형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항상 계속해서 주의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그를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뜻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실제로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를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풍성히 거해야 한다(엡 5:18; 골 3:16). 그렇지 않으면, 이 명령들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거울로 비추어 죄의 흔적이 없는지 살피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다루는 일에 성급히 나서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를 조심하라”라는 말의 위치가 앞의 1-2절에 대한 것인지, 그 뒤의 3-4절에 대한 것인지 모호합니다. 헬라어 본문은 “조심하라”는 완전한 명령문으로 끝나고,
그 뒤에 조건절 “범하거든”이라는 조건절이 이어집니다. 즉 “조심하라”는 명령이 다음의 상황, 즉 형제가 죄를 지을 때에 대한 태도 지침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이런 구조는 헬라 문체에서 흔히 ‘전환과 적용’의 역할을 합니다.
즉 앞 단락의 실족에 대한 경고를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주제인 책망과 용서로 이어지는 연결구문입니다. “너희 스스로를 조심하라”는 명령은 “서로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1–2절과 긴밀하게 이어지지만, 이어지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구절로 넘어가며 실천적 지침(3-4절) 으로 확장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라는 구절의 두 동사 모두 부정과거 명령형(aorist imperative) 으로 되어 있어, “지체하지 말고 즉시 행하라”는 뜻이 강합니다. 즉, “죄를 덮어두거나, 용서를 미루지 말고 즉시 행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앞의 1–2절에서 예수님은 “남을 실족시키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3–4절에서는 반대로, 남이 우리를 실족시켰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죄’만큼이나 용서하지 않는 죄도 위험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를 조심하라” 이후, 이 두 가지 명령, 즉 “죄를 보면 사랑 안에서 책망하라.”, “죄인이 회개하면 즉시 용서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경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티마오’로 ‘꾸짖다’, ‘책망하다’, ‘충고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히 “화를 내며 비난하다”가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여 회복시키기 위한 사랑의 책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을 때(눅 4:35)와 제자들을 교훈하실 때(눅 9:42)에 사용된 것과 같이 강한 단호함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그 어조가 ‘단호하되, 사랑으로 하는 경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정죄(judge)’가 아니라 ‘회복(rebuke for restoration)’이 목적입니다.
성경적으로 ‘경고’ 또는 ‘책망’은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죄의 행위를 명확히 밝히는 것입니다. 죄가 죄인 것을 알면서도 눈 감아준다면 이는 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라아 여인이 영생수를 구하였을 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면서 그녀의 죄의 사실을 제시하셨습니다(요 4:16). 죄를 지적하는 것은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관계성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의 관계성에 기초한 죄의 지적은 수술과 같이 칼을 대는 것이라 아프지만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둘째는 죄의 지적이 양심의 자극이 되도록 죄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책망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에 기초해서 한다면 오히려 책망은 상처로 남게 되거나 실족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양심을 깨우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인식을 하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셋째로 회복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다섯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지만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함으로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를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진실을 인정한 그 한마디를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즉, 회개의 출발점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의 메시지가 충분히 제시된 상황에서 경고를 통해 양심이 자극되고 예수님의 풍성한 용서의 사랑으로 나아오도록 도와야 합니다.
‘경고’는 용서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난이나 정죄로 끝날 것입니다. 비난과 정죄의 결말은 관계성 파괴와 갈등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하고 ‘경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절차는 아주 섬세한 절차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책망을 하기 전에 반감을 불러 일으키거나 상대방이 방어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그 마음을 붙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당사자에게 다가갈 때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너에 대해 염려가 된다’는 느낌으로 그가 마음을 열도록 섬세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의 잘못이 무고하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 말이 스스로 충분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화를 하되 성경적 접근을 통해 그 사람의 양심이 깨우침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대화를 마친 후에는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함으로 마무리합니다. 혹시 그 사람이 대화 후에 바로 삶을 바로잡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를 통해 그는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하던 일을 자제할지도 모릅니다. 한편 방어적으로 변해 당신에게 맞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그 다음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경고’의 목표는 상대방을 눌러버리는 서도, 한 방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상대방이 속내를 털어놓고 후련해지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고’의 목표는 상대방의 마음에 회개를 구하도록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지 경고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경고의 대화의 목표는 그 사람이 주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에서 올바른 태도를 제시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교만해지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해지기 쉽고 이로 인해 갈등을 유발하고 관계성이 깨지게 됩니다. 우리가 범죄한 형제나 자매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먼저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성품은 온유합니다. 우리도 온유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온유함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바로 잡다”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해 제 기능을 잘하게끔 알맞은 상태로 되돌린다는 근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과 같고 부러진 뼈를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할 때 특히 모욕을 인내하는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쓴 감정과 원망 없이 모욕과 경멸을 견디는 절제된 힘, 분노, 원망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부드러운 영향을 제공하는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바로잡다”는 단어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순종적 온유를 가리키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오래 참음이 부드러운 태도와 친절한 행위로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17:4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4절은 3절의 ‘용서 명령’을 구체화한 예시입니다. 3절은 ‘경고와 용서’를 통한 관계 회복의 원리를 제시하고, 4절은 그 원리가 반복적인 죄와 회개 속에서도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3절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원칙을 보여주고, 4절은 ‘얼마나 해야 하는가’라는 범위를 보여줍니다.
더 오래되고 신뢰할만한 사본에 의하면 “네게”(against you)라는 말이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게 죄를 짓고”는 “죄를 짓고”이고, “네게 돌아와”는 “돌아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게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라는 개인적 상황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공동체적 상황으로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용서의 원리가 개인적 모욕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성도의 관계 속의 죄와 회개에 적용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말하며, 이는 어느 특정 대상에게 저지른 죄도 포함됩니다.
“회개”는 성경적으로 세상이나 자기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돌아오다”라는 것은 죄로부터 떠나 다시 관계의 상태로 돌아오려는 의지적 행동을 말합니다. “하거든”은 조건문으로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상황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런 반복적인 죄와 회개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영어 번역은 if로 되어 있지만, NIV에서는 even if로 번역하여 ‘그렇다 하더라도’라는 뜻을 강조하여 번역했습니다. 이는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는 일은 흔하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다른 평행구절과 비교할 때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2에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11:25에서는 숫자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은 용서의 횟수를 특정하기보다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들은 “한 사람을 세 번 용서하면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적 기준을 두 배로 늘리고, 거기에 하나 더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숫자 계산이 아니라 본질적인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을 초월하여 용서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용서하라”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쉽게 용서가 안 되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적인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라 관계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존엄과 신뢰를 무너뜨린 사람에 대해 분노합니다.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했을 때,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토대”가 부서진 것이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순히 “이해해야지”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감정 조절이 아니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용서가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복수와 보복, 정당화와 자존심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육신의 생각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롬 8:7). 우리의 육적인 본성은 사적인 보복을 ‘정의 구현’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배치되는 것으로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값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세계를 깊이 체험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상처를 직면하지 않고 억누르거나 덮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쓴 뿌리’로 남습니다. 쓴 뿌리는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히 12:15). ‘쓴 뿌리’는 독이 있는 식물의 뿌리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분노, 원한, 상처, 미움을 가리킵니다. 쓴 뿌리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정의 독은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킵니다. 진짜 용서는 ‘감정 부정’이 아니라, 상처의 깊이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분께 맡기는 과정입니다. 잊어버리거나 묻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구할 때 용서의 힘을 주십니다.
용서가 쉽게 되지 않는 이유는 용서가 한 번의 결심으로 완전히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순종의 행위입니다. 처음에는 감정이 안 따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히 12:2).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6:14-15절에서 용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조건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용서의 통로’를 통해 흐른다는 뜻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닫히고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이 내 안에서 멈춥니다. 그 결과, 기도를 해도 답답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볼 때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동시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미워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과 어긋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움의 마음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가 통하지 않고, 마음이 막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주제라서 주기도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듯이,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닮아 가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닮기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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