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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누가복음 16:19-31)

이 비유는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16:13-15)과 바리새인들의 비웃음(16:14)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6:13)는 선언에 이어 지상에서의 삶의 결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삶의 역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죽어 음부의 고통에 처하였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 보여주면서 돈과 쾌락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 지옥의 고통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 그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아브라함은 기록된 말씀으로도 충분한 경고가 된다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순종이 우리의 영원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승에서의 삶의 대조

누가복음 16: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누가는 19-31절을 비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른 비유처럼 비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한 부자가 있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다른 비유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의 이름 나사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인간의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것을 묘사한 유일한 비유입니다. 대부분의 비유는 새, 씨앗, 밭, 진주, 밀, 곳간, 누룩, 물고기 등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누구도 개인적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영역입니다. 다른 비유들은 지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비유는 지상 영역을 초월합니다. 또한 이 비유는 역사적 인물인 아브라함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아브라함은 부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죽은 자가 가는 곳, 곧 “음부(하데스)”와 아브라함의 품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의 장소를 묘사한 유일한 비유이면서, 천사를 언급한 유일한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가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을 보면 듣는 바리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충격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런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7:21,23). 반면 나사로는 사람에게 가장 천하게 여김을 받는 거지였지만 그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천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그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반면 부자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땅에서 썩어 치욕으로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14절의 바리새인들의 비웃음에 대한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이를 듣고 비웃었습니다(14). 그들은 직접적으로 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과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쌓은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부를 행복의 가장 높은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이 율법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혼하는 것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이 가르치는 이혼에 대해 엄격하게 말씀하시자 마음이 불쾌했습니다. 그들의 외식과 세속적인 삶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향락과 쾌락의 삶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거지 나사로가 안겼던 아브라함의 품을 예약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로 상징되는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는 존경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가증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14).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라 자랑했고,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책을 소유함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람이라고 하고 이방인들을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목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을 탐하고, 시장에서 인사와 문안받기를 좋아하였으며, 랍비요 선생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많았고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와 섬김에서 특별히 구별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지식과 의로움으로 하자면 그들은 부자이고 완전하다고 생각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천국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복한 삶에 걸림이 되는 말씀만 한다고 불쾌하게 생각습니다.

그들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나 장군들이나 귀족들이 입었던 옷으로 매우 비쌌습니다. 고운 베옷은 애굽의 나일 강둑에서 자란 아마포에서 생산되었습니다(잠 7:16; 겔 27:7). 그것은 특별히 부드럽고 희었으며, 따라서 사치품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고, 너무 비쌌기 때문에 왕자들이나 제사장들이나, 혹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창 41:42; 대상 15:27; 출 28:5).

“호화롭게 즐겼다”는 말은 “화려하게 잔치하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산해진미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최고급 포도주가 빠질 수 없습니다. 부자는 가끔 호화롭게 즐긴 것이 아니라 “날마다” 즐겼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부자인지를 말해줍니다. 이 구절은 헤롯의 잔치의 장엄한 화려함을 생각하게 합니다(마 14:6; 막 6:14; 막 6:21).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과 같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공모하였습니다(마 22:15-17). 그들은 헤롯을 비난하면서도 헤롯의 호화롭게 즐기는 삶을 본받았습니다. 

호화롭게 날마다 잔치를 하는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행복한 모습이고,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가 부정직하게 이 재산을 얻었다거나, 혹은 불친절하거나 자비롭지 못했다는 말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가 “부자였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참한 고통에 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그의 부가 그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적 축복들에 둘러싸인 사람이 착각하고 사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율법도 잘 지키고,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불꽃 가운데 타는 불못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이 비유의 청중인 바리새인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6장에서 돈 사랑의 위험(1-2), 재물의 기만적이고 배반적인 본성(9-11), 스스로 옳다 하면서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과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15),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에 충성하지 못하는 고 돈을 사랑하는 것(11-12), 구약 성경이 말하는 바를 잘 들어야 한다는 것(16-17), 결혼이라는 언약 관계를 잘 지켜야 하는 것(18)에 비추어 이런 흐름 속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살 때 그들의 결국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의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그 부자에게 어떤 큰 잘못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외적으로 악행을 행한 것이나 율법의 명백한 위반도 없었습니다. 그냥 많을 부를 소유한 부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0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거지의 이름을 언급하십니다. 대부분 부자에게 이 거지는 이름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거지는 지상에서 이름 없는 존재로 살았지만 천국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유명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오르내렸지만 죽은 후 그가 간 지옥에서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거지는 원어로 ‘프토코스’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구약의 ‘엘르아살’의 헬라어 형태의 이름으로 그 뜻은 ‘하나님은 돕는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그 이름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어 하나님을 의지했고, 가난의 고통 중에서도 인내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사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인내심을 간직한 우직한 믿음을 시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곤경에 대해 불평하지도, 부자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한 것은 가난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누워 있었습니다. 대문은 부자의 집의 현관을 의미합니다. “버려진 채”라는 말은 KJV에 보면 was laid at his gate로 ‘현관 앞에 누워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원어에서는 ‘발로’로 ‘내던져지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과거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그가 그곳에 내던져졌고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거칠게 내버려지며 경멸을 당했습니다. 

그의 몸은 “헌데 투성이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헌데”는 궤양을 말하는 것으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분비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그의 비참한 상태를 의학적 관점에서 서술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나병 환자의 흉측한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그가 헌데 투성이었다는 것은 그가 거의 벌거벗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상처는 싸매거나 덮여있지 않고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습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하루 필요한 양에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겨우 연명하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부유층은 식탁에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뒤 손을 닦을 때, 값싼 빵 조각을 사용하여 기름과 찌꺼기를 닦고 그것을 바닥에 버렸습니다. 또한 식탁에서 흘러내린 부스러기, 먹고 남은 음식 조각들이 개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마 15:27).  

가난해서 먹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는 궤양을 앓고 있었습니다. 궤양에서 분비물이 계속 흐르고 이 모습은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불쾌하고 혐오스러웠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몸을 덮었지만 나사로는 궤양이 온 몸을 덮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지만 나사로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처지를 알아 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나마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아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집 주변에 떠돌이 개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나사로가 부자의 집 문 앞에 버려져 있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개들이 와서 그의 몸에 난 헌데를 핥았습니다.이는 그의 극심한 비참함과 방치된 상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지만 나사로는 음식 부스러기조차 얻지 못하고, 개들이 상처를 핥는 신세였습니다. 이 극명한 대조로 나사로의 비참함을 두드러지게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나사로를 외면했지만, 부정한 동물로 이방인을 비하할 때 부르던 개들조차 그의 상처를 핥아 줌으로 최소한의 동정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나사로가 죽어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제 곧 지금의 고난이 영광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반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고 부자의 자선이 없으면 그들은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부자들에게 그 의무를 다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율법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대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부자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분명히 그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고 거지는 부자에게 먹을 것을 구걸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지가 술꾼이고 인생을 낭비하여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갖는 폄훼성 발언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는 것과 부자는 지옥의 불꽃에서 고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가 악행을 했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가 불쌍한 나사로를 대문에서 쫓아내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그는 도덕적으로 흠결 잡히지 않고자 그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도 받고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그의 대문 앞에 있는 병든 나사로를 외면한 것입니다. 부자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고 돌보지 않았습니다. 

거지는 자선의 대상자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거지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이며,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부자는 평소에 하나님께 나아가 “주여! 주여!”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고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행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마 7:21-23). 하나님의 뜻은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돌보고 옥에 갇힌 사람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36-40). 그 작은 친절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입니다(마 10:42). 

죽음 이후의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대조

누가복음 16:20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내세관을 반영합니다. 유대인들이 미래의 축복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용어가 있었는데 첫째는, ‘에덴 동산’ 또는 ‘낙원’이고, 둘째는, 영광의 보좌이며, 셋째는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아브라함이 주인인 큰 잔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유월절 전날 마지막 만찬 때 예수의 품에 안긴 것처럼(요 13:23 ),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것은 가장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거지에게 할당된 자리였습니다. 이런 영광은 그가 지상에서 견뎌낸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그것들을 견뎌낸 믿음과 인내의 면류관으로서 주어진 영광이었습니다. 

22절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이 유일하게 사용된 절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역사상 가장 고귀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 민족 전체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자들의 조상입니다(히 7:4; 롬 4:11). 그는 유대교의 가장 위대한 영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친구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는 표현은 최고의 영예를 나타내고 최고의 행복은 그 곁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연회를 벌일 때 가장 중요한 손님은 주인 옆에 앉혔습니다. 그때 손님은 머리가 주인 가슴에 가까이 오도록 기대어 앉았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명예와 친밀함의 생생한 표현입니다. 나사로는 시궁창에서 하늘의 상석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묘사가 놀랍지만, 신약이 말하는 믿는 자가 받을 영광은 이보다 더 놀랍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의로운 성도들과 함께 있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1:23; 요 14:2; 고후 5:8). “아브라함의 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고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눅 23:43; 고후 12:4; 계 2:7), 천국, 하나님의 보좌와 동의어입니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는 구절은 거지의 장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과 대비되므로, 부자가 장사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장례가 특별하게 장엄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음을 암시합니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을 것이며, 슬픔을 한층 더 돋우기 위해 애곡하는 자들까지 고용되었을 것입니다.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선한 사람들의 영혼이 죽음에서 부활까지 머무르는 장소 또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과 다른 믿음의 조상들이 호화로운 만찬을 함께 나누면서 천국의 행복을 나타내는 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마 8:11; 눅 22:30). 부자의 문 앞에서 비참한 상태로 누워 있던 나사로에게 그에게 주어진 영광과 행복을 표현하는 방법 중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마 3:9).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자의 대명사인 나사로는 최고의 행복으로 올라갔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던 부자는 버려지고 영원히 잃어버려진 극적인 역전이 얼어났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해집니다. 죽음으로 인해 영원한 반전이 생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그가 묻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힌놈 계곡에 던져졌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처형된 범죄자,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던져 불에 태우는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고통은 영원히 끝났지만, 부자가 죽었을 때 그의 고통은 막 시작되었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머리가 다른 사람의 품에 닿게 되는데 이는 친밀함과 우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유대인과 로마 시대 잔치에서는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했습니다. 왼팔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방식이었고, 따라서 옆 사람의 가슴이나 품 가까이에 머리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곁에 앉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곁에서 품에 기대는 모습이 연출되는데, 이는 특별한 친밀감과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품”은 친밀함, 하나 됨, 깊은 사랑을 의미하는데, 아브라함의 품은 위로와 안전, 구원의 안식을 상징합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지냈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죽음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은 절제하지 못하게 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질병이 생깁니다. 그는 산해진미를 무분별하게 먹음으로 각종 성인병에 걸렸을 것이고 수많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화려한 장례식은 무의미합니다. 육신을 떠나는 순간 슬픔의 무대로 들어가는 영혼에게 이 모든 화려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도, 자신이 처한 상태와 다가오는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반면 이 땅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질병을 겪었던 나사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만이 불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서 그 나라로 들어가 안식하며 영원한 축복과 평안을 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극한 고통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얼른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고통과 슬픔, 눈물과 탄식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일 것입니다. 부자에게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매우 두려웠지만, 나사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후 부자와 나사로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들의 모든 상황은 완전히 정반대로 뒤바뀌었습니다. 경건한 거지는 수호천사들의 도움으로 미지의 세계로 떠밀려 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반면, 부유한 삶을 살던 그는 죽음이 가까워 오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이제 그가 지옥의 고통에 휩싸인 자신을 발견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이 휩싸였을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라는 표현에서 유대인들은 의로운 자들의 영이 죽을 때 천사들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견해에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히 1:14) . 

성경에는 천사들이 우리 몸을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신자들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그들의 몸은 땅이나 화장터로 갑니다. 우리는 몸, 혼, 영을 모두 온전히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해 이끌려 아브라함의 곁으로 천국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개념이 전달된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가리켜 예수님 안에 잠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18,20). 또한 바울은 죽음을 육신에서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고후5:8). 천사가 신자들을 천국으로 데려간다고 기술한 다른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천사가 사람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읽고 필요할 때 도움을 주러 내려옵니다(마 18:10). 천사는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습니다(히 1:14). 

누가복음 16:23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데스’가 아닌 ‘하데스(hades)’입니다. ‘게한나’(Gehenna)는 히브리어 ‘게힌놈’인데, 이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고 구약에서는 몰렉에게 자녀를 불로 바치는 우상숭배가 행해졌던 장소였습니다(렘 7:31; 19:2-6).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주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곳은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마 5:22, 29-30; 막 9:43). 게한나는 불타는 쓰레기 소각장 이미지와 연결되고,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게한나는 최종 심판 후 불신자들이 가는 영원한 지옥을 뜻합니다.

하데스(Hades)는 ‘보이지 않는 곳’ 구약의 스올(Sheol) 개념과 비슷합니다. 신약에서 하데스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이 가는 곳, 곧 “음부”로 번역됩니다(눅 16:23, 계 20:13).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모두 가는 중간 상태의 영역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가 고통당한 곳이 바로 하데스입니다. 하데스는 최종 심판 전, 죽은 자들의 임시 거처를 뜻합니다. 의인에게는 위로의 장소(아브라함의 품), 악인에게는 고통의 장소로 구분됩니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인데, 잃어버린 영혼들의 최후의 감옥이 아닙니다(마 5:22). 이 비유에서 심판자의 강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죽음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모든 영혼에게 영원으로 가는 문입니다. 하데스는 불신자들이 대백보좌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과 같습니다. 이제 그곳은 불못에 던져질 것인데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계 20:14). 

“고통중에”라는 말은 ‘바사노스’로 원래 금속의 시험이나 시금석에 적용되었으며, 그 후 증인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고통은 일반적 고통에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주는 불꽃은 상징적 연관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지옥 을 꺼지지 않는 불로 묘사했습니다(막 9:43-49). 반면 불은 “소멸하는 불”이라고도 하는 이는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묘사합니다(히 12:29).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라는 말은 being in torments(KJV)으로 ‘고통 중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being은 헬라어로 ‘휘파르코’로 ‘실재하다,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그는 고통 속에 시작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알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지옥에 간 사람들 대부분이 가고 나서야 후회하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너무 늦었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약 2:10). 예수님은 이런 착각을 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착각하는 자들은 그들이 주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죽습니다(요 8:24).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요 14:6)

죽음 이후 악인의 영혼은 우리 몸의 신경이 불에 데이는 것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부자의 고통은 생전에 사후의 세계를 멸시했던 사람들, 이기적인 방종에 빠진 영혼들이 겪게 될 고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맞추셨습니다. 랍비들은 고통의 장소와 낙원이 서로 다른 위치에 있어서 한쪽에서 행해지는 일을 다른 쪽에서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축복받은 자들의 거처와 저주받은 자들의 영역과 인접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그곳이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으로만 분리되어 있고 죽은 영혼들이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육을 입고 있는 영혼은 사후 세계에서도 마치 육체가 있는 것처럼 서로를 알고 서로 대화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지상 세계의 몸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악인의 영혼은 불길 속에서 고통하고 그들이 불의 강에 누워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불에 데인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한다고 여겼습니다. 신자들의 영혼은 육신의 짐에서 해방된 직후 기쁨과 행복 속에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거룩하지 못한 영혼들은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살며, 그 고통은 끊이지 않고, 치유되지 않는 끝없는 고통에 처한다고 믿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라는 표현에서 부자와 나사로는 다른 영역에서 살면서도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자가 불꽃 가운데에서 고통하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모습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자주 벌거벗고 굶주리고 종기로 뒤덮여 그의 대문 앞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부러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부자가 있는 지옥의 구덩이에서는 의로운 자의 거쳐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와 하늘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서로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지옥은 천국에서 멀리 떨어진 어둡고, 흐릿하고, 비참한 장소를 말하며 악한 자들이 영원히 벌을 받는 곳입니다. 그 고통은 이 세상의 고문대, 채찍질, 화형과 같이 그들이 가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것 그 이상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곳의 고통이 인간의 고통 중 가장 극심한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부자의 비참함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지옥에서 가장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지상에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은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극한 대조에서 더욱 가중하게 합니다. 얼마 전까지 살아있을 때 그는 부유하게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고 있었고, 가난한 나사로는 그의 문 앞에 누워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고통들이 그에게 닥쳤고, 나사로는 행복하며 하나님의 낙원에 영원히 안착했습니다. 나사로와 부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영역에 있지만 부자는 천국의 행복한 영혼들을 볼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은 행복해 하는 천국의 영혼을 보면서 시기심과 부러움의 고통에 절규할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맹인의 인도자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에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거기서 메시아에 대한 배척과 실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끔찍한 괴로움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무서운 감각을 갖게 되고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막 9:48). 그곳에서는 할례의 언약도 아무 소용이 없고, 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던 아브라함의 후손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오신 메시아는 하늘로 가셨는데,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의로운 자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고통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낙원의 문은 지옥의 문과 맞닿아 있어서, 의로운 자들이 안식에 들지만 자신들은 괴로움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누구도 사랑하거나 돌보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들은 불꽃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혀가 타오르는 듯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눈을 들어 멀리 … 보고”라는 표현은 부자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데스가 땅의 심장부에 있고 아브라함의 품이 구름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부자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이제 진실을 보고 자신이 하데스에서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의식이 있었고, 자기 자신을 의식했으며, 보고, 느끼고, 말하고, 기억할 수 있었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 무의식 상태라는 개념이라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영혼의 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표현할 뿐입니다. 지옥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즉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의식하고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가는 곳, 곧 하데스는 두 영역으로 나란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어 영혼이 천국에 간다면 나사로처럼 하데스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하데스는 현재 단 하나의 영역만 있으며, 그곳이 바로 불신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곳은 죽은 영혼들의 거처,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가 다시 오실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임시 중간 상태입니다. 

죽음은 영이 육신을 떠날 때 발생합니다(약 2:26).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고후 5:1-8; 빌 1:21 ). 믿지 않는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이 받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는 ‘지옥’, 곧 불못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때 육신을 내어주고, 하데스는 영혼을 내어줄 것이며, 잃어버린 자들은 심판대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것입니다(계 20:10-15 ). 

낙원은 하늘에 있으며 그곳은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통치하시는 곳입니다(눅 23:43; 고후 12:1-4). 성경에는 하늘의 있는 영혼들은 하데스에 있는 사람들이나 땅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의 경험은 지옥에 국한됩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의 경험은 모두 천국에 국한됩니다.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천국에 가는 우리의 입장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히 지불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대한 공포가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장소입니다. 악인은 이곳에서 이생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지옥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지옥은 회피하고 싶은 심각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지옥의 실존을 깨달을 때 은혜의 복음의 풍성함이 다가옵니다. 또한 이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이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로 채우게 합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열정적이고 끈기 있게 선포하도록 우리 마음을 불태웁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고 이 복음 진리를 말하라고 하십니다(행 4:31; 행 5:20).

지옥은 불쾌한 주제로 불신자들은 지옥을 믿지 않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무시합니다. 지옥은 성경의 어떤 교리보다도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은 불타고 있습니다. 지옥은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주제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부에 있는 부자가 이제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가장 불타오르는 때가 꺼지지 않는 지옥불의 공포를 온전히 진정으로 깨달을 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를 위시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1741년)을 통해 성령님께서는 미국에 제 1차 대각성으로 알려진 부흥의 불길을 지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옥에 대한 교리를  어떤 식으로든 약화시킨다면 , 그것은 당신의 열정을 약화시킬 것입니다(RA 토레이). 

누가복음 16:24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는 불꽃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너의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어디 있느냐? 너의 향품들과, 잔치들과, 춤들은 어디 있느냐? 이제는 너의 혀를 식히기 위해 간절히 구하는 물 한 방울 앞에서, 너의 맛좋은 포도주들은 어디 있느냐? 너의 장엄한 궁전 대신에, 너는 지옥에 갇혀 있고, 즐거움 대신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음악과 기쁨 대신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고 특별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마 3:9). 부자는 음부의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상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떠난 영혼들이 서로 알고 대화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인의 세계관을 차용하여 이야기하시는 것은 하늘의 일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언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되며, 단지 그것이 지옥에 있는 부자의 고통을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지만그들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조상들의 믿음대로 살지 않는 유대인들은 밖에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13:28). 유대인이면 자동적으로 조상들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도 고통 중에 있지만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지상의 삶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롬 2:29),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갈 3:7).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부자가 불꽃 가운데 고통하면서도 과거의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무정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사로를 이리저리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음부에서도 나사로를 자기 심부름을 하며 자기의 안락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자기 눈 아래 있다고 업신여겼던 나사로를 이제는 도움과 동정과 갈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자비한 부자가 이제 평생 무시했던 사람에게 자비를 구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날은 그 사람의 삶이 끝나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입니다(12:20, 39-40). 지옥의 고통 속에서 영혼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아마 이 부자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한 것은 그가 지옥의 고통을 맞보고 나서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고 의로운 생활을 함으로 의로운 자라는 지위를 얻는 데 합당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한 자이기 때문에 더이상 영적인 의사가 필요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마 9:12-13; 막 2:17, 눅 5:31-32). 이렇게 메시아를 믿지 않음으로 그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때 영원히 충격 상태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죽음 이후 사람의 운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극적입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나사로는 그의 대문 앞에 온몸에 종기투성이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부자는 그에게서 아무 유익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늘에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부자는 그 나사로가 와서 자신에게 물 한 방울의 위안을 주기를 간구하며 은혜로 구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라고 간구합니다. 부자의 외침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비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그에게 맹세하신 맹세, 그리고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눅 1:70)을 의지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메시아를 보내셨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를 배척하여 긍휼을 얻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불꽃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이 혀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혀는 그가 살아 있을 때 호화롭게 즐기면 잔치했을 때 가장 호사를 누렸던 감각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꽃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감각기관이 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방종했던 그 혀를 보응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자는 불꽃의 뜨거움 속에서 간절히 긍휼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에 떨어진 영혼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끝난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풀려나기를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은 자기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것이 헛됨을 압니다. 그는 또한 나사로가 있는 곳, 곧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기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을 원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한 번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는 회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 지옥에 떨어진 자에게는 회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의 외침은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가 됩니다. 은혜의 날은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지금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을 넘어가면 더 이상 자비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이 은혜 받을 날이요,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혈통도, 재산도, 지식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 믿음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우리를 영원한 위로로 인도합니다.

부자는 불꽃 속에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 요청은 아주 작은 은혜의 간청이었습니다. 물 한 방울조차 큰 위안이 될 만큼 그의 고통은 심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잠시의 안도감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희망은 개선의 가능성이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자에게는 이미 때가 늦었고,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물 한 방울로 혀끝을 식히는 작은 위로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라는 표현은 단순히 갈증 해소를 넘어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 의식, 대제사장이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던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로 인한 정결과 용서, 위로와 새로움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 은혜를 거부한 채 살았고, 이제는 그 은혜의 표징조차 누릴 수 없는 상태에 처했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부자가 가장 고통받는 부위가 혀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혀는 살아 있을 때 호화로운 연회와 쾌락을 가장 크게 누린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혀가 불꽃 가운데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방종하고 죄악을 행했던 바로 그 혀를 보응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뜨거운 불꽃으로 인해 부자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일으켰습니다.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자들은 물을 고갈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28). 이 이야기에서 부자의 고통은 타는 듯한 갈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 한 방울이라도 그의 혀를 시원케 해 줄 수 있을 만큼 심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과 비참함은 이 상태가 하루하루 계속되면서도 위안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부자가 살았을 때 그의 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수많은 저속하고 모독적인 말들을 하였습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죄인, 탐식가, 술꾼,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자라 하였고, 또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였으며, 그가 선동가이며 신성모독에 유죄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줄 물 한 방울조차 얻지 못합니다. 가장 작은 위로나 양심의 고통을 덜어 줄 완화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혀의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가 말한 것처럼, 지옥은 결코 치료의 장소가 아닙니다. 지옥은 영혼을 고치거나 정화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지옥에는 치료 기능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순수한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부자는 지옥에서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가 뼈저리게 뉘우치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하나님을 섬기겠다” 고백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옥은 회개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부자가 구한 것은 단 하나,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였습니다. 그는 나사로에게 빵 부스러기 하나 주지는 않았지만, 나사로가 자신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주기를 원했습니다.

부자의 삶은 죽음을 경계로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그는 물 한 방울만으로도 만족하겠다고 외칩니다. 죽음은 우리의 관점을 현세에서 영원으로 바꾸어 놓습니다.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성경은 연옥이라는 중간 지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천국 아니면 지옥뿐입니다.

누가복음 16:25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간청하는 모습이 마치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의 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이런 기도는 전혀 응답받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라는 구절에서 “얘”는 ‘아이’,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부자가 육신으로 있었을 때 그는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누렸고,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보다 자기의 명예와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뜻은 부담스럽고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장 완전하게 누렸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판결은 그가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실제 삶은 노골적으로 어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셨는데(신 6:5), 그는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영적이고 영원한 복들을 박탈당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은 그가 살아있을 동안 가치 없다고 멸시했던 것들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소원대로 그것을 주지 않은 것 뿐입니다. 재판관은 그에게 결코 가혹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소원대로 해준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라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와 반대로 그의 생애의 고난들을 인내로써 감내하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나은 상태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라는 구절은 그의 환난들은 모두 끝났고, 그는 결코 주림도, 추위도, 고통도 모르는 영원한 기쁨으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머리를 둘 집조차 없었던 그는 이제 하늘의 자유시민이자 복된 거주자가 되었습니다. 불멸의 기쁨과 영원한 사랑이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바랐던 그가 하늘의 잔치에서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고 있습니다. 영광이 그의 영원한 화려한 옷이 되었고, 질병과 슬픔만 있던 자가 늘 건강하고 기쁨이 충만하며, 땅에서는 헌데로 덮였던 피부가 이제는 영광스러운 의의 옷의 부드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달콤한 교제, 천사들과 모든 성도의 교제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부정의 짐승이었던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으며 동정심을 보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천사들의 섬김과 믿음의 조상들의 격려가 그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는 구절은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 대신, 불꽃의 옷을 입었고, 호화로운 음식 대신 쓰라린 눈물을 먹고 있으며, 단죄하는 양심에 의해 끊임없이 갉아먹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과거의 모든 우아함과 위안 대신, 이제는 고통과 괴로움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기억하라”라고 함으로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의 극적 반전을 상기킵니다. 사람의 미래 상태를 가르는 것은 단지 한쪽에서는 가난과 고난, 다른 쪽에서는 부와 풍족과 안일에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닙니다. 돈이나 재산, 풍족한 삶 그 자체가 영혼을 구원하거나 멸망시키는 기준은 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 상황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이생에서 누리는 좋은 것들을 자기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마음이 그것들에 사로잡혀 오직 얻고 유지하며 늘리고 누리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으로 삶을 드려야 할 본분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또한 재물을 교만과 사치, 무자비함의 도구로 삼아 하나님을 향해 불경건하게, 이웃을 향해 비인간적으로 행한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도 장차 영원한 좋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세상의 선으로 위안을 받는 데 만족한 결과, 그의 앞에는 영원한 악의 고통과 괴로움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특정한 한 가지 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마음,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한 것, 쾌락과 이익에 몰두하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의 뿌리이자 기초입니다. 이런 삶에 빠지면 사람은 미래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의 기만과 야심, 탐욕, 그리고 세상 일의 염려입니다. 그것들은 결국 신앙의 양심을 질식시키고, 말씀의 생명력을 차단하여,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부자의 요청과 아브라함의 거절

누가복음 16:26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뿐 아니라”는 부자의 요청이 거절된 것 뿐만 아니라 큰 구렁텅이 때문에 나사로가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그 혀를 서늘하게 하는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구렁텅이”는 ‘틈’, ‘깊이 벌어진 공간’을 뜻합니다. 두 높은 지점 사이에 놓인 깊은 간격을 가리킵니다. 이는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갈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장면은 마치 단테의 신곡 속에 나오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깎아지른 바위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한쪽에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다른 한쪽에는 낙원의 아름다운 동산과 왕의 궁전, 그리고 아브라함이 주재하는 잔치가 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삶의 행위에 따라 상을 누리거나 벌을 받으며, 서로를 향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대화와 논쟁을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묘사된 것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제 모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 마음과 양심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그림과 같은 표현을 하신 것이고 이런 방식은 우리가 가게 될 내세의 모습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놓여 있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스테리조’로 ‘고정되다’, ‘세우다’, ‘강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완료시제로 큰 구렁텅이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옥에는 탈출구도 없고, 두 번째 기회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거듭난 성도들과 영원히 분리하는 구렁텅이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절망은 지옥의 습기요, 기쁨은 천국의 평온함이다(존 블랜차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죽을 때 확정되며, 바뀔 가능성은 없습니다. 죽은 후 베드로와 흥정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구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불을 “영원한 불”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8:8; 마 25:41). 여기서 영원한은 헬라어 원어로 ‘아이오니오스’로 지옥의 불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죽음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는 인생들이 영원한 죽음에 처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심을 나타냅니다(벧후 3:9; 딤전 2:4). 천국이 영원한 것처럼 지옥도 영원합니다. 만일 지옥이 영원하지 않다면, 천국도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같은 ‘영원한(아이오니오스)’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천국도 영원하고, 지옥도 영원합니다. 

이 이야기의 그림은 예수님의 새롭고 독특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 그림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랍비 요하난은 큰 구렁텅이가 ‘한 벽’이라고 하고 다른 랍비는 둘 다 평평하여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위대한 랍비들의 생각을 빌려온 것입니다. 랍비들은 하데스의 두 영역을 나누는 것이 “큰 구렁텅이”가 아니라 단지 벽으로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낙원과 게헨나 사이의 거리는 한 벽이라고도 하고 한 손바닥 넓이라고도 하며 혹은 단지 한 손가락 너비라고도 했습니다(코헬렛 미드라쉬). 그러나 “큰 구렁텅이”는 이런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의 작정입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정하사 저주받은 자와 복된 자의 상태를 불가역적으로 고정해 두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라는 구절을 보면 우리는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있는 복된 자들이 불못의 형벌을 받고 있는 자들을 측은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건너가고자 하지만 건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건너갈 수 없다는 사실은 로마 가톨릭의 연옥과 면죄부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들의 중보가 무덤 너머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도의 기도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곧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건너가고자 하되”라는 구절은 의인들이 지옥에 가고 싶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세계 사이에는 오고 갈 수 있는 통로가 없습니다. 의인들이 영광의 거처를 떠나 고통의 세계로 가려 할 리가 없습니다. 건너가고자 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꽃 가운데에서 고통하는 자에게 물 한 방울조차 주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그들 앞을 가르는 이 구렁텅이를 넘어 행복의 상태로 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헛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감이 불가능함을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많은 보편구원론자들은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하늘로 옮겨지게 되어 지옥은 조금씩 비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정되었다”고 하심으로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분명한 진리는 지옥에 들어간 자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가라앉은 자는 영원히 가라앉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이 불가역적인 작정에 의해, 성도들은 하늘에서 영원히 행복하고,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7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7절은 지옥의 불꽃 가운데 있는 부자가 드린 두 번째 기도입니다. “그러면”은 아브라함이 방금 전에, 아무도 건널 수 없는 큰 틈이 있다고 선언했을 때를 말합니다. 부자는 그 선언을 듣고는 두 번째 간구를 합니다. 그는 유대인 혈통을 내세우면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세 번이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16:24, 27, 30). 아버지는 헬라어로 ‘파테르’인데, 이는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를 넘어서, ‘생명의 근원’, ‘정체성의 뿌리’, ‘닮음(likeness)을 전수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단지 육체적 기원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살았고, 영원한 운명에 처해서도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은 결코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부자는 지상에 남아 있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그가 있는 곳에 오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뭐, 내가 지옥에 간다고 해도 괜찮아. 동무가 많을 테니까!”라고 말하며 지옥의 존재를 조롱합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우정도, “동무됨”도 없습니다. 지옥은 고통과 고독의 장소입니다. 지옥은 죄인들이 땅에서 하던 것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영원한 송년 파티가 아닙니다(위어스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지금 하데스에 있는 부자가 전도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그가 땅에 있을 동안 자기가 알아들을만큼 충분히 경고받지 않았고 전도받을 기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땅에 있을 때 땅의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늘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부자의 말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에 얽매여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세상 욕심에 매몰되어 그를 영접하지 않을 때 받을 영원한 대가와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신자들로서 정죄받은 자들의 영원한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본다면, 우리는 더 절박하게 전도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의 세계에는 더이상 전도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나의 생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면 다시 사올 수 없기 때문에, 값을 주고라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지혜로운 생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엡 5:15-18).세상의 가치 없는 정보의 홍수가 나의 삶의 동기가 되지 않게 해야 하며, 영적인 대화를 나눈 적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으로 이 부자는 사랑에 가까운 어떤 감정을 느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형제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에게 더 큰 고통만을 더해 줄 뿐입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의 고통은 그들이 산 자들에게 영원한 고통에 대해 경고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청소년들을 설득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고통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거듭남의 체험이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의 이런 고통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전도의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의 간구에 대해 꽤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가 하며 불만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들이 지옥에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왜 가능한 최대한의 경고를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브라함의 말의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자가 자기 요청을 거절당한 것은 하나님이 가능한 한 많은 기회를 주기를 원치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그의 부탁은 쓸모없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거절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적하듯이,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 할지라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 가족에게 보내 달라고 애원한 것에서 그는 교회의 사명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어떤 친구도 같이 있기를 원치 않았고, 특히 자기 형제들이 거기에 합류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지상 세계로 보내어 지옥의 무서움을 경고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그 경고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틀림없이 죽은 부자처럼 살지 않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람들은 그런 경고조차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가 돌아와서 사후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면 경고를 받고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그 어떤 기적도 쓸모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16:28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라는 구절에서 부자는 왜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으로 보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과 똑같이 살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이 세상 일들에 얽매여 자신들이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도 죽으면 음부에 보내질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라는 구절에서 ‘증언하다’는 말은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로 ‘증언하다’, ‘확증하다’, ‘엄하게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영어번역에서는 warn으로 ‘경고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경고의 목적은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나사로는 여전히 종이었습니다. 그는 운명이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가 살았을 때처럼 나사로를 명령하면 복종하는 종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의 부탁은 아이러니하게도 멸시받고 비천한 나사로가 부자의 형제들에게 선교 여행을 보내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나사로가 그의 부탁대로 다시 세상으로 간다면 그것은 그의 형제들에게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고의 내용에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내용은 없고 단지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는 내용만 있습니다. 그러나 경고로만으로는 부자의 다섯 형제들은 고통 받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자의 부탁을 보면 그가 일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다섯 형제를 위해서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것과 자기 가족만 챙기는 이기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다섯 형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온 사람인 나사로의 증언을 믿을 것이라는 망상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서 사후 세계의 고통이 있음을 경고하더라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무시하거나, 비웃거나, 그 메시지를 믿지 않는 것이 뻔합니다. 

복음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증언에는 반드시 지옥의 형벌의 경고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할 때 그 기쁜 소식에는 암묵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지옥에 간다는 나쁜 소식을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절망할 때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증언하는 복음 속에 ‘나쁜 소식’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말씀의 충분성

누가복음 16:29-31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들을지니라”는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긴급성을 요구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분명히 들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주신 것은 그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하고, 충분하며, 능력이 있습니다. 부자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확증하거나 하나님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추가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이 아입니다. 그들은 단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다”라는 말은 ‘귀기울여 듣다’는 말로 “유념하다”라는 의미입니다(눅 8:8; 9:35; 10:16; 14:35; 16:31). “있으니”는 현재 시제로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부자의 형제들은 언제든지 지속적으로 구약 성경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롬 2:1). 부자의 다섯 형제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자들입니다(롬 2:4).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이미 경고했습니다. 다섯 형제들은 구약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진리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롬 2:5). 그들은 말씀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낮추어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는 권면을 거부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라는 표현은 구약의 39권, 곧 성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16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딤후 3:16). 

아브라함은 구약 성경의 메시지를 듣고 따르는 것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체험에서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뭇별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5-6).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갈 3:8). 이는 곧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곧 복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원시복음을 허락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면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이 뱀,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얼마든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에 반박했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온 음성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성경이 아니라 표적을 더 신뢰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사역을 하시면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명하여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셔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만에 죽음 권세를 깨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다수는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나(요 11:43-44), 사람들은 그의 부활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요 12:10).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에도, 그들은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훔쳐 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마 28:12–15).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았다는 구약의 말씀 때문이었고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그런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신은 고귀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여겼는데 그런 신이 인간이 되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세상적 관점에서 사람들은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답답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메시아를 알아 보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11:16).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을 보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 선지자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9).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합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가장 큰 표적이고 최후의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이 원했던 기적은 도덕적으로 눈먼 자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부자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을 충분히 분명히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자기가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말씀해 주시면, 기침이라도 해주시면, 불타는 가시떨기나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여주신다면 믿음을 가질 텐데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창조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책’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말씀(성경)으로도 계시하시지만, 동시에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창조된 세계는 직접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치 작품을 보면 작가를 알 수 있듯이, 세상을 보면 창조주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역사를 통해 어떻게 드러내셨는지를 말해주는 구속 역사 책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역사는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합니다. 또한 구약에 계시된 예언은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철학적 사변으로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예수님은 자체가 말씀(로고스)이시고(요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전하는 분’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행동, 인격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9).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이며,하나님은 아들의 인격, 말씀,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책임을 면하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31절은 헬라어로 ‘그러나’의 뜻을 가진 ‘데’로 시작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부정적 반응에 대해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 즉 구약성경을 살아 있는 음성처럼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히 4:12-13). 

“듣지 아니하면”에서 부정어 ‘우’는 절대적인 부정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스데반 설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떠올립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그들은 스데반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했을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치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행 7:57). 그들은 단지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에서 ‘권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소’는 ‘설득하다’, ‘확신시키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e persuaded(설득되다; KJV, NASB), be convinced(확신하다; ESV, NRSV, RSV, NIV)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동사가 헬라어의 부정사 ‘우데’와 결합하여 ‘결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증언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입니다. 성경으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기적으로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부자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요청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기적은 돌 같은 마음을 녹이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증명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그들은 기적적으로 구원받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불신앙을 지속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각 지파의 대표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며 믿지 못하는 백성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기적들을 행했지만, 북왕국은 여전히 반역을 지속하여 결국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상 18:16–46; 왕하 2:19–22).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 이방인들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0-24).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자 어떤 이들은 믿었지만(요 11:45),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앙과 적대감은 더욱 강해졌습니다(요 11:46-53; 12:10-11).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행한 큰 기적을 보고도 놀라 그 소문이 퍼지지 못하도록 협박하고 박해를 가했습니다(행 4:16-17).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의 증언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거짓 이야기를 꾸며내어 주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마 28:11-15).

말씀의 경고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옥을 경고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죄인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회개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주심으로 우리 인간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명확하고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주의 말씀의 진리를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것을 듣고 회개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운명 — 천국과 지옥 — 을 경고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영원한 운명을 가릅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권세자든 무력한 자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우리의 영원한 관계를 결정합니다.

이 비유는 또한 우리가 믿는 자라면 현재의 책임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을 알리고, 모두를 향해 듣고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영접하려면 어떤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복음의 수용성을 높여 줍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의 생명력이 있어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지고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뿌려진 말씀의 씨를 받아들일 마음의 밭의 상태가 말씀의 열매를 맺는 일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밭과 같은 마음의 예를 들어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13:1-9; 막 4:1-9; 눅 8:4-5). 

참된 능력 전도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딤후 3:15).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필요도 충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와 능력을 확신할 때, 부유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복음을,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영원히 살릴 진정한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우리 시대의 나사로들을 문 앞에서 굶주리고 무력한 채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절박한 현재의 필요를 돌보는 데만 마음을 쏟다가, 그들의 가장 깊은, 영원한 필요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기록된 말씀은 회개와 구언의 길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그들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은 말씀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구원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0:17). 불신앙은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완악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 3:19).

부자의 죄는 단순히 부유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지옥에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기도했으나 자기 위로와 가족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가난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부유함 때문에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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