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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누가복음 6:22-23)

예수님은 4복 중 마지막 복으로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므로 기뻐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22-23

네번 째 복은 누가복음의 4복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제자들을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그들의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때에는 그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는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받는 박해를 의미합니다.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리다”는 말은 좀 생소한 표현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의 이름은 당시 ‘그리스도인’(행 11:26; 26:28; 벧전 4:16) 또는 ‘나사렛 이단’(행 24:5)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방인들에 의해 불렸고, ‘나사렛 이단’은 유대인들에 의해 불렸습니다. 그들은 이 이름을 경멸적이고 혐오적인 의미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식별 표시나 표찰 그 이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으로 지정된 사람의 고유한 특성을 의미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대에 이름은 사람의 전체 성격, 즉 그 사람의 직위와 명성, 인격과 특성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면서도 거룩한 이름으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반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름을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믿는 자에 눈으로 보면 세상은 악하고 제자들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인데 사람들은 제자들의 이름을 악하다고 여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을 악하다고 하는 것에서 그 기원이 있습니다. 

쉐모네 에스레라고 불리는 유대인 기도문의 열두 번째 축도를 보면 “나사렛 이단들(그리스도인)을 즉시 생명책에서 도말하게 하시고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교만한 자를 겸비하게 하시는 주님, 찬양 받으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단자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그들을 박해하고 배척했습니다. “버리다”는 말은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들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율법을 훼손하는 자로서 마땅히 죽여야 할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후 그는 동족들로부터 같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박해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미움, 배척, 모욕, 경멸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복입니다.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욕 먹고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림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배척합니다. 그들은 신자의 존재가 자기들의 죄를 드러낸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이 드러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요 3:19-21).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늘에서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고 뛰놀아야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 슬프고 서럽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뛰놀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이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입니다. (요 15:18-27). 그러므로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고 뛰놀아야 합니다. 우리는 박해의 영광과 의미를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불 시험을 당할 때에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그들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벧전 4:12-14).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는 것은 감사하고 찬송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죄와 악행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이는 심각하게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와 무책임,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입니다(벧전 4:15).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고난받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했던 말 중의 첫 마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였습니다. 그는 박해받는 성도들이 찬송해야 할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신 것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벧전 1:3-4).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행 5:41).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빌 1:29). 

그런데 우리는 막상 현실에서 박해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좋은 말을 듣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에 비유하십니다(23, 26). 참 선지자는 자기 진리를 말함으로 자기 백성으로부터 배척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면 그를 따를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유익을 제공하면 그들은 와서 아첨할 것입니다. 적절한 물질적 보상과 유익을 제공하면 그는 곧 지상에서 유명해지고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하늘에서 거절당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가 박해를 받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두더지처럼 숨어 살거나 카멜레온처럼 세상에 맞게 자기를 변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살던 시대의 백성들은 아합과 이세벨의 종교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렬한 바알숭배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회색지대에 머물러 모호한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하는데 미지근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광신도라고 생각하고 적절한 선만 지키고자 합니다. 신자는 신자인데 자기소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날씨가 좋으면 주일예배보다 여행을 우선시합니다.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면서 주일이면 주 앞에 나가 자기 몸을 보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온라인 예배도 예배라고 생각하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에 대해 출석 도장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런 그들의 미지근함은 오히려 역겨운 냄새를 자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입에서 토하여 버리신다고 경고하십니다(계 3:16).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우리가 속히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생과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그분의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제자들이 받을 박해에 대해 수없이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을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자기로 말미암아 그들이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재판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막 13:9-13).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편에서 서서 박해를 받고 예수님을 인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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