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청년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에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행렬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살리시고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14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율법이 힘을 잃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율법에 부정한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거나 무덤을 만지는 자는 부정하다고 했습니다(민 19:11, 16). 이는 관을 만지는 것도 포함합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관에 다가가 “일어나라”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자에게 명령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이시기 때문에 과감하게 다가가셔 관에 손을 대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죽은 청년을 일으켜 살리실 수 있고 그가 살아나면 부정하다고 하는 모든 율법이 힘을 잃게 됩니다.
관에 손을 대신 것의 의미
유대인들의 장례식에서 관은 열려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하시자 그 청년이 바로 일어나 앉았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관이 무덤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으로 향해 가는 관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을 살리심으로 방향을 수정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과감하고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행동에 관을 멘 자들이 놀라서 멈췄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채운 것이 그의 입에서 나왔고 그의 행동을 동기부여했습니다(13). 연민은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세 번 살리신 것 중 첫 번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눅 8:49-56),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 11:20-44).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실 때 죽은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말씀하여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말씀하시고 백부장의 종에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허공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광풍을 만났을 때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명령하셨습니다(8:24; 마 8:26; 막 4:39). 그러나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은 헛되이 그에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그의 기뻐하는 뜻을 이룹니다(사 55:11).
예수님은 몇 마디 말로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차가운 시체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즉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심장, 폐, 뇌, 감각이 다시 일을 재개하고 의무를 다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 그가 살아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청년은 즉시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죽은 한 사람을 살리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온 인류를 살리실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28-29). 나팔 소리가 나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면 모든 사람은 거절하거나 피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선을 행한 자는 그리스도와 영원한 영광 가운데 살게 될 것이고 그를 불신하고 대적한 자들은 영원한 불못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강력한 기적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지금 죄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영혼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부패하고 생명이 없어 보이는 마음에 일어나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영혼도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죄로 죽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하고 활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줄기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그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우리 주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실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7:15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죽은 자는 앉아 있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기 어머니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즉시 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신 것은 온 인류가 기다린 메시아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셔서 성난 파도를 잠재우시고 말씀으로 멀리 떨어진 백부장의 종의 병을 낫게 하십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죽은 몸을 살리심으로 죄로 죽은 영혼을 새 생명으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가 가운데에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사역을 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
오직 그리스도만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십니다(고전 15:20).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같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 15:42-44.
청년에게 주시는 메시지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시고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은 그 시대의 희망입니다. 청년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닙니다. 그는 관 속에 누워 있어서는 안되는 나이입니다. 그는 일어나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청년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청년은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열정이 있고 지치지 않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그들의 기상은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힘찹니다.
청년이 아닌 청년
그런데 여기 있는 청년은 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청년이지만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청년은 어머니를 슬프게 합니다. 죽은 청년은 장례 행렬에 모인 사람들을 슬프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육체는 청년이지만 마음은 늙은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 없는 좀비처럼 살아갑니다. 마약과 쾌락에 탐닉하여 폐인이 되어가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게임과 도박에 중독되어 청년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어두운 시대를 원망하고 불행한 가정을 탓하며 살아갑니다. 좋은 배경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걸어다니는 시체’와 같습니다.
청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
청년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예외 없이 모든 인류의 문제입니다. 청년도 이 문제 앞에서 속절 없이 무너졌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 청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람을 병들이는 죄
죄는 사람을 병들입니다. 죄는 청년을 나병 환자나 중풍병자와 같이 그 영혼이 병들어 눕게 합니다. 그들이 생명력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을 사로 잡고 무기력하게 하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죄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33).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립니다. 죽음이 주는 무기력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죽음이 주는 허무와 무의미로 인해 살아갈 의욕을 상실합니다. 열심히 하면 뭐 하나, 죽으면 다 끝인데 하는 생각으로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삶이 어짜피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마음껏 마시고 즐기자고 말하며 쾌락주의자가 됩니다. 이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청년들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의 청년들이 주의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역사 창조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젊은이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환상을 보고 사도들과 같이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죽은 아들을 돌려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살리셔서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상실의 고통 가운데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쏘는 독화살에 쓰러진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독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는 과부에게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연민으로 공감하셨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도로 찾아주시는 예수님
누가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하에 슬피 울고 있는 인생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십니다(요 11:35). 예수님은 죽음이 인간에게서 행복을 앗아간다는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이 죽음은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인 죄 문제로 온 것입니다. 육체적인 죽음 뿐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해 인간은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이 죽음 권세를 쥐고 있는 사탄의 머리를 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도로 찾아 주십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잃어버린 자아, 잃어버린 삶, 잃어버린 창조의 질서,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되찾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시고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 사건을 통해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자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덤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16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일으켜 살리시자 이를 보고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ESV(RSV; NRSV)에서는 Fear seized them all로 번역하여 ‘두려움이 그들 모두를 사로잡았다’는 뜻이고, NASB95에서는 Fear gripped them all로 번역하여 ‘두려움이 그들 모두를 움켜쥐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으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보았을 때 이런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부정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외심입니다.
이 두려움은 지식의 근본입니다(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9:10).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김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이 말을 볼 때 그들은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가까이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1-24)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왕하 4:32) 와 같은 큰 선지자로만 생각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깊은 사고가 없다면, 메시아를 주시겠다는 구약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예수님을 인격적 관계성이 없으면 그가 누구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신비로움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이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로움 그 자체에 머문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돌보셨다는 것은 has visited로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프게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방문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나님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지만(요 1:14),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적인 부활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시자 그분에 관한 이 소문은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사건은 병 고치는 기적보다 더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도 놀라운 일을 소문을 내며 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침묵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생각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무의미와 허무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은 청년을 살리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안다면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죽음이 끝이 아니구나, 죽음 이후 영생의 세계가 있구나 하고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소심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임을 깨닫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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