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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잃은 과부를 위로하신 예수님(누가복음 7:11-13)

예수님이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한 장례행렬을 만나셨습니다. 죽은 자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독자를 잃은 과부를 위로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7:11

오직 누가만이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나인이라는 도시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인까지 남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를 여행하셨습니다. 이곳은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 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나인은 이스르엘 계곡의 동쪽 끝에 있는 모레 언덕의 북쪽 경사면에 있었습니다. 모레 언덕 남쪽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키운 수넴 성읍이 있었습니다(왕하 4:18-37). 

나인이라는 성읍은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인으로 들어가는 성읍 입구는 한 곳뿐이었습니다. 평원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의 거친 언덕이 입구 뒤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인은 ‘아름답다’는 뜻인데 그날 나인에는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나인이라는 작은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 작은 마을에서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새 제자와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 성으로 가셨습니다. “새 제자”는 새롭게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치신 사건의 영향으로 많은 새로운 제자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했고 장례 행렬에도 사람들이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생명의 행렬이었고 죽은 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의 행렬과 죽은 자를 따르는 죽음의 행렬이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에 따른 필연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행렬이 마주쳤을 때 죽음이 생명을 삼킨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을 삼켰습니다. 장례식의 당사자는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가 과부라는 사실은 당시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과부는 고대 세계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과부는 밭에서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 없었습니다. 룻기를 보면 일찌감치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을 하여 겨우 입에 풀칠해 먹고 살았습니다.

과부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약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무시하였습니다. 과부는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가장 쉽게 유린당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과부는 무력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력한 과부를 상대로 사기를 침으로 과부의 돈을 삼킴으로 과부는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과부의 자녀들이 장성하였다면 자녀의 부양을 받았지만, 자녀가 어린 경우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에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사회적 약자로 분류하여 특별히 그들을 돕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2:21-22; 신 10:18-19; 14:29; 24:17-22; 26:12-13; 27:19).

이런 힘없는 과부에게 아들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자녀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녀가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을 여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과부로 사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온갖 수난과 모욕을 견디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장성하여 어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들의 부양을 받으며 아들을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이었습니다. 과부로 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외아들마저 잃다니 이는 그 여인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들 하나를 삶의 희망으로 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마저 잃을 때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망과 깊은 슬픔에 빠져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더운 날씨로 시체가 쉽게 부패했기 때문에 장례식은 보통 죽은 날에 거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례식 전에 시체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또한 장례식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애곡하는 자가 고용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러 온 것을 보면 그들도 과부의 처지가 너무 딱하여 같이 슬퍼해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장례 행렬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청년을 살리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좋은 기회임을 말해줍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어 매장 준비가 완료되면 고인의 시신은 일반적으로 관에 넣어져 친척, 친구 및 하인의 행렬을 통해 매장지로 운반됩니다. 사람들은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티끌을 쓰고 수염을 깎고 머리털을 베는 애도 의식을 행하였습니다(삼하 1:11-12; 13:31; 14:2 , 사 3:24; 22:12; 렘 7:29; 겔 7:18; 요엘 1:8). 

유대인들의 매장은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을 만들어 그 안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가족묘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안치한 후 구르는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동굴을 사서 가족묘로 사용했는데 이는 천연 동굴이었습니다(창23:9). 그 곳에는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레아, 야곱이 묻혔습니다. 이렇게 장례식이 끝나면 슬픔에 잠긴 유족은 쉬브아(Shib’a)라고 하는 7일간의 애도기간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7:13

예수님께서는 독자를 잃고 슬피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영어로는 compassion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라틴어 라틴어로 콤파시오(compassio)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라는 뜻과 ‘고통’이라는 뜻의 합성어로 ‘함께 고통을 느끼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심파티아(sympatheia)이인데 영어로는 sympathy로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다”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매’(splanchnizomai )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자’, ‘내부 기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사람 내부의 깊은 감정을 말합니다. 즉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충동을 말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것을 덜어주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 우는 과부를 보셨을 때 깊은  연민을 깊이 느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는 있지만 동정심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타락한 육체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장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람의 형편에 처해 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 마굿간으로 밀려나셨고 비위생적인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하셨고 그가 공생애를 섬길 때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사회에서 소외받고 냉대받으며 멸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이는 십자가에 죽으심이었습니다(빌 2:8).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그 몸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죄의 짐을 다 지셨고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갈 3:13; 벧전 2:24).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받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마 27:46; 막 15:34).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창자’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동정심을 느끼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상처받고 슬픈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하였습니다(히 4:15). 

누가는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과부를 먼저 “보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단어에는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거나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참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보셨다”는 말은 보고, 어떤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그저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볼 뿐만 아니라 깊이 참여하시고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 오르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죽음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녀가 무덤에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은 그녀를 생명으로 더 가까이 이끄십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동이 트기 전 시간입니다. 하룻밤의 슬픔은 돋는 해가 되시는 예수님이 오시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죽은 청년의 관을 따르는 죽음의 행렬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행렬이 맞닿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라는 승리의 외침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 생명이 죽음에 의해 삼켜지겠지만 예수님이 계시면 죽음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게 됩니다. 장례의 행렬은 예수님의 행렬에 의해 정지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평지 설교에서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울 때가 있고 울지 말 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울 때는 자기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할 때입니다. 자기 죄를 애통해 하면서 우는 자는 우리 주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울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연민과 슬픔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이 주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승리의 찬가를 부를 때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망은 인간에게 죽음의 독화살을 쏘아 고통을 주고 결국 죽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깊은 상실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 상실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입니다. 상실의 슬픔은 죽음이 우리의 심장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화살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은 것보다 더 큰 아픔을 주는 죽음의 화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감히 “울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감하고 자신 있게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고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사 53:3-4).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만이 “울지 말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처럼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겪은 두 자매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집안의 기둥이 나사로를 병으로 여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매들의 상실에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의 친구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함께 우셨습니다( 요 11:33-35 ).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죽은 나사로가 불쌍해서 우신 것이 아니라 사망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 11:25-26). 예수님이 죽어 무덤에 누워있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시자 죽은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요 11:44).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실 부활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가장 근본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와 연합한 자가 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그와 연합한 우리도 그와 함께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요 5:24). 그를 믿는 우리는 사망의 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라고 하심으로 그녀를 생명의 세계, 부활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에게 다시 오셔서 그들이 더 이상 울지 않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계 7:17;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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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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