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무저갱으로 들어갈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근처의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예수님을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영혼이 돼지 떼보다 귀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돼지 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8:31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무저갱
귀신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무저갱은 헬라어 ‘아뷔쏘스(abyssos)’로 되어 있는데 ‘아’는 ‘깊이’, ‘뷔쏘스’는 ‘구덩이’라는 뜻으로 끝이 없이 깊어 측정이 불가능한 구덩이를 말합니다(계 9:11). 영어의 ‘Abyss’는 여기서 차용되었습니다. 이는 태초의 창조되기 전의 땅의 상태인 원초의 ‘깊은 심연’(창 1:2)과 ‘땅 아래의 깊은 물’(시 33:7; 겔 26:19)을 뜻하는 히브리어 ‘테홈’해당합니다(출 20:4; 욥 38:16).
신약에서 ‘무저갱’은 죽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롬 10:7) 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음부’나‘지옥’이라고도 합니다(마 16:18; 계 1:18; 벧후 2:4). 무저갱은 불순종의 영들 곧 사탄과 그 졸개들(더러운 귀신들)이 들어가 영원히 벌받을 형벌의 장소입니다(마 25:41; 눅 8:31; 계 11:7; 17:8).
무저갱은 히브리어도 ‘아바돈’이라고 하는데 ‘파괴자’, ‘멸망자’란 뜻을 지녔습니다. 사도 요한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천사(무저갱에서 다스리는 사자) 곧 ‘사탄’을 가리켜 ‘아바돈’이라 했습니다(계 9:11). 요한은 이를 묘사하면서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계 9:11)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바돈’이라는 단어는 여섯 차례 등장합니다(욥 26:6; 28:22; 31:12; 시 88:11; 잠 15:11; 27:20). 그중에서 욥기 31:12절에서는 ‘멸망’(파괴)이란 뜻으로, 다른 세 곳(욥 26:6; 잠 15:11; 27:20)에서는 ‘죽음의 자리인 스올’ 혹은 ‘죽은 자들의 공동 거주지(음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욥기 28:22에서는 ‘사망’ 그리고 시편 88:11절에서는 ‘무덤’과 같은 의미로 소개되었습니다.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구절에서 “간구하다”는 말은 미완료시제로 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저갱으로 가라고 명령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분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실 수 있는 고통의 장소인 “무저갱” 의 존재를 믿고 있었습니다(마 8:29). 그 곳은 사탄이 천 년 동안 결박될 곳이고 그후 그들은 환난 기간 동안 잠시 풀려나지만(계 20:1-3) 그들의 최후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것으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입니다(계 20:10).
누가복음 8:32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 예수님
마침 그 산에서 많은 돼지 떼 가 산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30은 “마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5:11은 “막5: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13에서는 2000마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레 11:7-8), 돼지는 개와 함께 가증한 동물이었습니다(참조, 눅 8:32; 눅 15:15 ; 레 11:7-8; 신 14:8). 그러나 이방인이 거주하는 데가볼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돼지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는 것은 꽤 돈이 되는 사업이었습니다(막 5:14-17).
귀신들은 예수님께 2천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하여 짐승의 차원으로 전락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 2천 마리에게 들어가기를 허락하셨는데, 이는 허락해 주신 것이지 그들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악귀들이 돼지들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 이유는 기록에서 분명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더럽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인 돼지에게 끌렸을 것입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곳을 아늑한 집은 삼는 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더러우면 귀신이 살기에 적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이 악령들이 갇히는 곳인 무저갱에 갇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영혼의 원수의 세력이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으며 그분이 허락하시는 방식으로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8:33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돼지 떼를 희생시켜 한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돼지는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금지되었으며 부정합니다( 레 11:7 ; 신 14:8 ). 그러므로 돼지는 귀신들에게 매우 적합한 집일 것입니다. 마귀의 목적은 파멸입니다. 결국 마귀는 돼지떼에게 들어가 그들을 희생시켰습니다. 돼지들도 귀신들렸을 때 귀신 들린 사람의 특징이었던 것과 똑같은 광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광란을 반복했습니다.
마가복음 5:13에서는 그 돼지가 2천 마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속성인 엄청난 악의,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 대한 증오심이 이 사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탄은 도둑과 같이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돼지들의 죽음을 통해 이 마귀들의 순전한 파괴성을 물리적인 영역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이 마귀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0:10).
예수님이 무저갱에 던지지 말아 달라는 귀신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로 정하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신의 심판을 위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계 20:1-3; 마 8:29). 또한 만일 수천의 귀신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아마도 자신들이 머물 곳을 찾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벧전 5:8) 사람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예수님을 피해 달아나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더 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복음서 저자 중 누구도 돼지의 익사로 인해 주인이 겪었을 경제적 손실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문제의 해결이 재정적 손해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돼지를 몰살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사탄이 경제적 손실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사탄은 축복과 평안 대신 저주와 파괴를 불러옵니다. 이 구절은 2천 마리의 돼지떼의 손실보다 마귀의 속박에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귀신이 심판받은 것을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돼지 주인에게 불공평하다고 항의합니다. 돼지 주인은 재산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을 허락한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돼지떼 2천 마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생명은 천하보다 귀중합니다(마 16:26; 막 8:36; 눅 9:25).
돼지 2천 마리는 오늘날 시가로 8억원 정도 됩니다. 돼지를 소유하고 있던 주인의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돼지가 호수로 돌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돼지의 몰살 장면을 묵묵히 보고만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이 돼지 2천 마리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관된 행동 원칙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내면의 치유와 회복에 우선순위를 두고 행동하셨습니다.
정신질환 혹은 귀신 들린 사람의 대부분은 정서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방치되었거나, 학대를 받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 정서적 안정감이 없고,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 속에 버림받은 존재로 인식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으며, 하루하루 고문당하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헤엄을 치지 못한 사람이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을 때 느끼는 공허감과 공포심을 안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불안하며 작은 충격에도 쉽게 자아가 무너져 내리며, 그 결과 정신질환 혹은 귀신에 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 스스로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생각, 즉 ‘자아 존중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어보심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귀신을 내어쫓아 주심으로 그의 본래의 자아를 찾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이 청년이 귀신이 나가고 정신이 온전하게 된 것에 대해 축하해 주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산상의 손해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물질적인 세상에 대해 한 사람의 생명이 돼지 2천 마리의 생명보다 훨씬 더 귀중함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귀신 들린 청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세상의 그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2000마리의 돼지 생명도 소중합니다. 돼지를 잃은 주인의 마음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 허무함과 무의미 속에 인생을 의미 없게 살아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희생하고 건져야 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을 갖는 사는 사람이 또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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