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갈릴리 온 마을을 다니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도록 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선교 보고회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일을 치른 제자들과 함께 따로 한적한 곳인 벳새다로 물러가셔서 휴식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을 보고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부담스러운 무리를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셨습니다.
누가복음 9:10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보고한 제자들
누가는 이제 9:1-6의 중단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9:7-9에서 분봉 왕 헤롯이 제자들이 이룬 놀라운 기적을 통해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는 망령에 사로잡힌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는 이 부분에서 제자들이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전파가 그 사회에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흐름은 누가복음 9:20 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도들이 돌아와그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여쭈다’는 말은 ‘묻다’라는 뜻 외에 윗 사람에게 ‘보고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을 보고하도록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주의 깊게 들으시고 그들을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영적으로 해석하도록 하심으로 세상을 영적으로 바라보도록 그들의 영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도와주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흐름 속에 제자들이 그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역사를 다루는 구속 역사가 있습니다. 일반 역사는 바다의 풍랑에 비유되고 구속 역사는 보이지 않는 바다 밑에 흐르는 해류에 비유됩니다. 세상 역사는 바람과 폭풍으로 인해 요동하지만 바다 밑의 해류와 같은 구속 역사는 변하지 않고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어떻게 이루어오셨는지를 다룬 역사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아 사역을 섬기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것을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하신 단순한 창시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예언하신 대로 구속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베푸심으로 그가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계승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키우시기 위해 훈련과 실습의 의미로 그들에게 권능과 권위를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도록 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돌아왔을 때 선교 보고를 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한 일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에 기초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게 되고 예수님은 이에 기초해서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9:20; 마 16:18).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벳세다 고을로 물러가신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6:31은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떠나가셨다”는 말은 withdrew apart(ESV)로 ‘따로 물러가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일으킨 놀라운 이적을 통해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고자 따라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전파와 치유의 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무명의 촌사람들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갈릴리 전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 소문은 갈릴리를 벗어나 이방 지역과 유대 지역에게도 퍼졌을 것입니다.
마가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이 인기에 취해 영적으로 눈 먼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휴식과 더불어 제자들과의 비밀의 시간을 갖고자 벳세다의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큰 행사를 치르고 나서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원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쉬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 초능력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벳세다라는 마을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14:13에서는 “빈 들”이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6:31은 “한적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벳새다는 ‘낚시의 집’이라는 뜻으로 요단강 동쪽의 갈릴리 바다 바로 북쪽에 있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바로 북쪽, 요단강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빌립의 영지인 골라니티스(Gaulanitis)의 일부였지만 일반적으로 갈릴리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서들은 벳새다 마을의 이름을 일곱 번 언급하였습니다(마 11:21; 막 6:45; 8:22; 눅 9:10; 10:13; 요 1:44; 12:21). 이곳은 제자들인 빌립, 안드레, 베드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요 1:44). 하지만 마태복음 8:5, 14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어느 시점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했음을 보여줍니다. 벳세다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장소이고(눅 9:10-17), 눈 먼자를 치유한 곳이며(막 8:22-26),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은 곳입니다(막 6:45-51).
마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벳새다로 보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6:45). 또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기 전 예수님께서 맹인 한 사람을 고쳐주신 곳으로 언급하고 있는 반면(막 8:22-23), 누가복음에서도 이 기록 뒤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눅 9:18-21). 누가는 이 장소를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장소로 언급하였습니다(눅 9:10-17).
누가복음 9:11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예수님 일행을 따라온 무리들
예수님과 제자들은 따로 한적한 곳인 벳새다 마을로 가서 휴식과 제자 교육을 위해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이를 알고 따라왔습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들이 계신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거기에 도착했다고 하였습니다(막 6:33). 요한은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랐다고 하였습니다(요 6:2).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 때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따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한 기적의 역사를 보고 따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호기심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교회로 오는 동기는 다양합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교회에서 먹을 것을 주니까 친구 따라 교회에 많이 왔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치유의 역사를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냉대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따뜻한 환영 때문에 오기도 하였습니다. 남녀를 엄격하게 분리했던 유교적인 전통이 있었을 때에는 남녀의 만남의 장소로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동기로 교회를 왔든 그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무리들이 어떤 동기로 왔건 그들을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동기를 분별하여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차별 없이 다 영접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시는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초신자는 분별력이 없고 각기 자기 나름의 동기가 있어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청하는 사람의 강권이 작용했든, 초청하는 사람의 체면을 봐주어 한 번만 와주는 것이든, 교회에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든, 그 동기가 무엇이든 예수님이 무리를 영접하신 것 같이 우리도 나아온 무리들을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예수님
이렇게 영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병 고칠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초신자들이 듣기 쉽게 그들에게 맞춤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요리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성도의 영적 수준은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히 초신자를 위한 말씀 공부 프로그램을 항상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이 일은 꼭 목회자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잘 훈련된 교회의 평신도 리더들이 초신자를 위한 말씀 공부를 섬기는 일을 하면 초신자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 잘 스며들 수 있습니다. 구역 예배 때 그룹 성경공부를 하면서 초신자를 영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에게 말씀 뿐만 아니라 병 고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질병이 있습니다. 질병의 문제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실제 문제입니다. 질병의 문제는 물질 문제와 더불어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실제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문제를 도와주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배고픈 그들의 형편을 아시고 음식으로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먹는 문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먹는 문제가 영적이지 않고 물질적인 차원이라고 이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은 영과 육의 차원을 아울렀습니다.
무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뒤쫓아 먼저 와서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따뜻하게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눅 18:17; 마 18:3; 막 10:14).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8:24-25). 이 말씀은 사람이 마음이 부요해서 세상의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부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마 5:3).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아야 한다고 하심으로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주권적 사랑과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요 3:5).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죄의 대한 인식과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막 1:1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실존을 ‘잃어버린 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하신 이유에 대해 마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왜 불쌍합니까? 양은 목자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양은 눈이 어둡고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먹어야 할 풀과 독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목자가 양들이 먹을 만한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먹이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갑니다. 그들에게 목자가 없다면 그들은 땅에 난 독초를 먹고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을 경우 그 뿔이 가시덤불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야생에 사는 포식자들에 대한 방어기제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한없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기생충이 많은 더러운 물을 함부로 먹기 때문에 목자가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야 합니다(시 23:2). 양은 시력이 약하지만 청력이 발달하여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목자를 따릅니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합니다(요 10:5). 이처럼 목자와 양은 생명이 결탁된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무리를 볼 때 이처럼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영접한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리를 영접하신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볼 때에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영접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볼 때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문제를 부의 불평등 문제로 봅니다. 어떤 사람은 교육의 문제로 보고 100년 앞을 내다보는 교육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 구조의 문제로 보고 정치와 사회 시스템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세상의 문제를 ‘목자 없는(shepherdless)’ 문제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뒤이어서 양들을 돌볼 목자를 키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도자 상을 ‘목자’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위를 이어 오신 왕이십니다(눅 1:32). 다윗은 목자와 같이 그의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셔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군대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목자와 같이 다스리십니다(마 2:6).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 때문입니다(요 10:11). 예수님은 양을 잘 아십니다. 이는 성부께서 성자를 아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과 같습니다(요 10:14-15). 예수님은 양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고 그의 필요를 따라 도와주시는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때를 따라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고 성령의 강물을 마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원수인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자의 다스림을 받는 우리는 일생 동안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느끼며 그의 집에서 그와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시 23:1-6).
양을 치는 목자로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십니다. 목자는 목회를 하는 목회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의 제자의 직분이고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위탁하신 양들을 섬길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시고 그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신 후,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요 21:15-17). 예수님은 열두 사도에게 능력과 권위를 부어 주셔서 전도 여행을 보내시며 그들이 양들의 목자가 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천 명의 양들이 몰려온 상황에서 그들을 어떻게 먹여야 할지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르시는 양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이 이중 직분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부탁하신 양들을 먹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근본 문제를 ‘목자 없는’ 문제로 보고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목자는 ‘추수할 일꾼’(마 9:38; 눅 10:2), ‘빛과 소금’(마 5:13-14),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 ‘양식을 나누어 줄 자’(눅 12:42)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벧전 5:2).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우리의 양무리로 바라보는 영적인 시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시각을 가질 때 문제 많은 사람들을 영접할 이유를 갖게 되며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신 능력과 권위를 덧입을 때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들을 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양들은 인격적인 도움을 원합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일일이’ 손을 얹어 고치신 것과 그들을 ‘일일이’ 도와야 합니다(눅 4:40). 손을 얹는 것은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와 양의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끈으로 하나씩 하나씩 연결되어 갈 때 교회는 사랑의 네트워크가 됩니다. 교회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사랑의 열기를 발산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 불꽃의 열기로 몰려들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근본 문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줄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목자가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으로 세상 가운데에서도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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