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들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올 때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워했습니다.
누가복음 9:42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마가복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가 좀더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누가와 마태는 주로 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귀신의 최후의 발악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오려고 하자 귀신은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이 실패한 일을 예수님께서 과연 하실 수 있는지 의문이 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불신의 말을 차단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은 오늘날의 의사처럼 사건의 역사를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9:21 ). 아버지는 그것을 알려주고 불과 물에 대해 더 심각한 세부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적 형태로 말함으로 예수님이 과연 그 소년을 치료할 수 있는지 의심을 내비쳤습니다. 믿음은 어떤 가정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어떤 조건도 붙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접근하려면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말씀과 더불어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마 9:22; 15:28; 막 5:34; 10:52; 눅 7:50; 8:48; 17:19; 18:42).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의 의심을 강한 책망으로 물리치시고 불완전한 그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책망은 아이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리와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는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마 7:7-8 ; 21:22 ; 눅 11:9-10 ; 요 14:13-14) ; 15:7 ; 16:24 ; 요일 3:22 ; 5:14-15 ). 믿음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마 7:7-8).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 21:22).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은 구하는 그것을 행하실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요 14:13-14).
아이의 반응은 오늘날 간질의 증상과 유사합니다. 마태복음 17:15에서는 아버지가 이 아이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였다고 예수님께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질”은 헬라어로 ‘셀리니아조메(selēniazomai)’로 ‘미치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간질이 달이 커짐에 따라 증상이 더 심해지는 질병으로 믿었습니다. 마태는 아버지가 간질로 여기는 질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간질이 아니라 귀신을 꾸짖어 고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마 17:18). 아버지는 간질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귀신이 한 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마태는 마태복음 4:24에서 “간질”을 질병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간질과 귀신 들린 것과는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발작은 귀신의 파괴적인 반응입니다. 귀신이 평소 이 아이를 이와 같이 죽이려고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며 심지어 불과 물에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자 귀신은 잠잠해졌고 아이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낫게 하시고 그 아이를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시고 그 청년을 홀어머니에게 도로 주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7:15). 이처럼 예수님은 병든 자를 낫게 하시며, 파괴된 것을 회복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주의 은혜의 해”, 즉 영적인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4:18). 예수님은 우리의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맡기고 믿을 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더러운 일을 하는 더러운 귀신
누가는 이 귀신을 “더러운 귀신”이라로 하였습니다. 귀신은 더러운 일을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우리를 자신의 세력 안에 가두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었을 때 더러운 귀신이 세력을 잡은 사람으로 하여금 소리를 지르게 하였습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크게 분내어 사람을 강력하게 붙잡아 괴롭히고 죽이려고 합니다(계12:12). 마귀는 자신의 시간이 짧고 교회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발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면 귀신은 이처럼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마귀는 마치 애굽의 바로와 같이 결코 내어 주지 않으려 합니다. 마귀는 구원의 문턱에 있는 죄인을 붙잡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더 강한 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그를 굴복시킬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눅 11:21-22). 애굽의 바로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는 장자 재앙으로 치명타를 입고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꾸짖으시고”, “낫게 하사”, “도로 주시니”라는 세 동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가 명령하면 더러운 영이 나가고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누가복음 9:43a
43a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하나님의 위엄에 놀란 사람들
누가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예수께서 제시하신 이유를 생략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의 무능의 이유를 믿음의 적음으로, 마가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제자들은 자신을 살피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허물과 실수를 가리려고 합니다. 자기의 좋은 모습만 부각시키고 자신의 약점을 감춤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믿음의 작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능력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9-20). 산은 장벽과 장애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막고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습니다. 귀신들이 아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사탄은 구원 역사를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우리는 이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장애를 만날 때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사 49:11). 하나님은 모든 산을 길을 삼고 그의 큰 길을 친히 돋우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을 옮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장애물을 치우시고 그 가운데 길을 내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작은 믿음은 무시하기 쉬운데 믿음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가능성을 믿고 도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내십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자 하실 때 제자들의 오병이어를 받으셨습니다. 안드레는 아이가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리면서도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하며 겸연쩍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했다는 것은 give thanks to God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 작은 행동은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그것이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도 그 믿음은 산을 옮기는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마가도 마태와 같이 제자들의 질문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마태와 달리 제자들의 무능의 원인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이 기도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막 9:29).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분은 하늘의 모든 자원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러한 자원을 우리 상황에 투입하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 열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그 뜻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마귀는 인간의 어떤 능력보다 더 강력하고 악의적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능력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두려워하고 조급져서 믿음이 시들게 되고 자만해서 긴장을 늦추어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깨어 기도하고 끈질기고 간절하며 꾸준한 기도에 힘쓰기를 원하십니다(마 7:7; 눅 18:1-8; 21:36). 또한 기도할 때에 염려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빌 4:6). 이때 우리는 그가 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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