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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누가복음 11:33-36)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하였지만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의 등불인 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가져야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온 몸이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의 빛으로 가득차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의 완고함과 죄를 회개함으로 어두운 데가 없어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33

33-36절은 앞의 구절들과 연관 짓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속담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진리의 빛이 숨겨져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속담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화려한 표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한다면 영적 시력이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속담은 마태복음 5:15의 등불을 두는 장소의 비유와 마태복음 6:22-23의 눈의 비유와 비교할 때 표현과 순서가 비슷하지만 36절의 표현은 누가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등불은 예수님의 사역의 빛을 말하는데, 이 빛은 숨겨져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합니다(사 48:6).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비추는 예수님 자신의 빛은 온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다른 빛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강합니다. 

두 번째 속담인 ‘눈의 비유’는 빛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33절은 등불이 사람들을 비추는 예수님에 대한 비유였다면, 36절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궁극적인 영적 상태가 결정됩니다. 11:15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 번째 속담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자신의 이해와 삶 전체가 밝아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움”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어 비바람이나 추위를 막아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넣어 두는 곳’입니다. NIV에서는 a place where it will be hidden로 ‘감추어진 곳’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말”은 ‘곡식, 액체, 가루 따위의 분량을 되는 데 쓰는 그릇’을 말합니다. 사람은 등불을 물건을 감추는 곳에 두거나 말 속에 넣어 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등불은 등경, 즉 등잔대에 두어 빛이 비추도록 합니다.

등불은 실외에서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마 25:1-12), 주로 실내 조명을 제공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들고 다니거나 등잔대 위나 벽의 틈새에 두었습니다. 등불은 일반적으로 올리브 오일에 담근 아마섬유 재질의 심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부 등불에는 여러 개의 심지(2-7개)가 포함되어 있어 더 많은 조명을 제공했습니다. 

등불은 요리용 불을 지피기 위한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등불의 연료량을 측정하여 밤새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성소에 램프를 계속 켜 두었습니다(출 27:20; 레 24:2). 신약 시대에 등불은 장례식과 기념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기름이 없는 등불은 탈 수 없습니다. 등불 안의 기름은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합니다(고전 3:16).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등불에 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상징하기 위해 등불을 사용하셨습니다.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등불은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이 등불을 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이 있는 곳으로 가서 등불을 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등불도 불을 붙이려면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습니다(딛 3:5).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어두운 데서 부름을 받고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벧전 2:9). 우리는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되었으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엡 5:8). 우리는 어둠 속에 감추어지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빛을 반사해서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가 빛을 발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기 때문입니다(고후 4:6). 그리스도를 위해 밝게 불타오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빛은 어둠을 비추기 때문에 어둠은 결코 빛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요 3:19-20). 이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의 속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에 있는 자는 스스로 빛 가운데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빛의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빛을 알려면 빛의 자녀들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마 5:16).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는 말은 눈이 빛을 우리 몸에 받아들이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은 우리 몸에 빛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므로 눈이 맑아지고 빛이 들어올 수 있으면 몸 전체에 빛이 들어오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시력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우리 영혼의 눈이 성령님에 의해 열리고 복음의 진리 안으로 밝혀질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길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면 영혼 전체가 빛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몸의 눈은 사람의 마음과 같습니다. 눈이 흐릿해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으면 몸 전체의 활동이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이 두 마음을 품고 타협하면 그 사람의 성품 전체가 그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의 행로는 흔들리고 불안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향성을 잃고 비틀거리며 일관성이 없을 것입니다.

눈이 건강하고 빛을 많이 받으면 몸 전체에 유익이 됩니다. 눈이 좋으면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백내장이나 황반 변성 또는 망막 박리가 있어 눈에 충분한 빛이 들어오지 않거나 선명하지 않으면 평생 불편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미 주어진 빛은 충분히 밝습니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빛이 아니라 더 나은 시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육신의 눈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노환이 오고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이고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은 우리의 눈이 무엇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미 빛은 충분히 우리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적인 눈이 가려지거나 기능을 상실하면 빛을 볼 수 없거나 일그러진 형상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가려진 눈은 믿지 아니함으로 사탄에 의해 혼미해진 마음이며 사탄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고후 4:4). 

빛이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들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빛을 볼 수 없다면, 그 잘못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잘못은 그들의 고집과 교만으로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은 율법주의으로 완고해진 마음, 위선과 독선, 자기 의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신념으로 여겼던 그들의 종교는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를 눈멀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속고 있으며 그들의 죄악된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은 빛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창으로 묘사됩니다. 창문이 깨끗하고 유리가 깨끗하면 들어오는 빛이 방의 모든 부분을 적절하게 비춥니다. 창문이 더럽거나 유리가 고르지 않거나 착색되거나 변색된 경우 빛이 방해되어 방이 빛의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합니다. 방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과 질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눈도 마찬가지로 눈의 상태에 따라 몸에 들어오는 빛의 질이 결정됩니다. 색맹이라면 크리스마스 장식의 빨간색과 녹색이 모두 사라집니다. 백내장이 있으면 누군가 옆에 앉아도 그림자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눈이 멀었다면 색깔도 없고, 형태도 없고, 움직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에 들어오는 빛은 빛이 통과해야 하는 눈의 영적인 상태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1:35

“그러므로”라는 말은 결론을 내리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33-34절에 기초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보는 눈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the light within you is not darkness(NIV)로 ‘네 안의 빛이 어둠이 아닌지’라는 뜻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통찰력이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영적 진리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했다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을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삼으셨습니다(사 42:6; 49:6).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고 자기 안에 빛이 있어 스스로 비출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독선은 매우 기만적이고 위험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세상을 비추는 영적인 빛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영적인 어둠이었습니다. 

이처럼 교만과 완고함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 13:13-14). 보지 못하는 눈은 이제 불신으로 인해 눈이 멀어 신성한 계시의 충만한 빛 가운데 서 있었음에도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향해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13:16).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잠시 동안 빛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들과 잠시 빛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계실 동안 빛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빛의 아들이 됩니다(요 12:35-36).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복음의 빛이 나의 마음과 삶에 임하여 참되고 깊은 내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성령의 열매가 그의 삶에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빛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어둠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가리워진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무지의 어둠과 완고한 불신의 어둠입니다. 무지의 어둠은 깨닫지 못해서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완고한 불신의 어둠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완고한 불신의 어둠입니다. 거짓 복음이나 왜곡된 복음에 선동되었을 때 이 어둠에 지배받게 됩니다. 모든 거짓 종교 , 모든 형태의 이단,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제도는 다른 형태의 어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사람들이 그것을 빛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빛의 천사로 가장한 세력에게 속아 어둠 가운데 있는데도 빛을 찾았다고 외칩니다. 완고한 마음에 지배를 받는 자들은 로마서 1:21-22에서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깁니다. 이것이 가장 깊은 어둠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 되었는데도 지혜 있다고 자부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죄인들은 예외 없이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36

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차 있고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이라는 조건문이 붙습니다. 이 말은 눈을 멀게 하는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6:18을 보면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구원하실 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예수님과 죄 사함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지난 날의 교만과 자기 의로 영적으로 눈 먼 자였는데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만의 자기 의의 죄에서 돌이켜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난하며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은혜롭게도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표적은 십자가 죄 사함을 말하며 이를 영접하는 자는 죄의 어둠이 이 사라지고 온전히 밝아지게 하는 표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공적으로 시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감시의 눈에 걸려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요 9:22; 12:42). 이는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2:43). 그들에게는 사람의 인정이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문제는 빛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죄가 영적인 눈을 가려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용서함을 간구함으로 우리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온전히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롬 10:9-10). 마음으로 믿지만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몰래 믿는 신앙은 빛이 있어 온 몸이 밝으나 어두운 데가 있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믿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공회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요 3:1,10).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없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가진 것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고 존경 받는 공회원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목격하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요 19: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그의 소유의 새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마 27:57-60; 막 15:43-46; 눅 21:51-53; 요 19:38). 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살았을 때는 그 마음에 어두운 데가 있어 빛이 비췄지만 온전히 밝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위해 대속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용기를 얻고 빛 가운데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44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8:38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눈 앞에 영광의 빛이 있었으나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인정은 그 사람이 살 동안만 지속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인정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를 자랑하며 복음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때 복음으로 우리 안에 빛나는 빛은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춰질 것입니다. 이 빛은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어둠이었으나 이제 주안에서 빛이 되었으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엡 5:8). 우리는 모두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살전 5:5).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6-7). 밤이 가까웠고 낮이 가까운 지금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롬 13:12).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신자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 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입니다(벧전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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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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