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 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달리기를 할 때 그만 두고 싶은 고비가 여러 번 찾아 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면 완주자에게 주어지는 상이 없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경쟁해서 일등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페이스를 잘 조절해서 끝까지 완주하는 경기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우리 각자는 혼자서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닙니다. 같이 달리는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구름 같은 관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신앙의 경주를 마친 믿음의 조상들과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달려가야 할 길을 다 표시해 놓으셨습니다. 본문은 신앙의 경주, 하나님의 훈련의 의미와 목적,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권면들, 시온 산과 하나님의 도성의 차이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을 통해 인내로서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완수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다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의 경주(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러므로’는 11:39-40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성취될 약속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가졌던 구약 시대의 사람들보다 이미 성취된 약속 가운데 그리스도를 소유한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므로’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야 할 것임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증인들’은 경기장의 관중을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경기를 보러온 관중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믿음의 조상들, 신앙의 선배들을 말합니다. 좀 더 좁혀 말하자면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구약 시대를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우리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달려라’고 하면서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내 앞에 앞서 가신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관중이 없는 경기를 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무관중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얼마나 쉽게 지칠까요? 그런데 우리의 경주에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관중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함성 소리를 듣고 힘이 난나서 경주를 달릴 수 있습니다. 홈 앤 어웨이 경기 방식이라면 홈경기에서 승률이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홈 관중들의 응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거운 것’은 경주를 할 때 방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할 때 배낭을 메고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뛰지 않습니다. 최대한 옷을 가볍게 입고 뛰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면 쉽게 지쳐 버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무거운 것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달릴 때 무거운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것은 살면서 겪는 인생의 고민과 염려들일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에 얽매여 있을 때 염려의 무거운 짐들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은 염려의 백해무익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그리고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하겠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염려로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염려 대신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또한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얽매이게 하다는 것은 영어로 entangle로 ‘얽히게 하다, 말려들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성질은 우리를 얽히게 하고 말려들게 해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세상 쾌락과 물질은 우리의 죄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이것이 습관화되면 중독됩니다. 중독이 되면 우리는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끊으려고 하면 금단 증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얽혀 있는 죄를 끊어 버릴 수 있는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 때의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1-14)
저자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고 함으로 우리 신앙 생활을 경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는 NIV에서는 the race marked out for us로 ‘우리 앞에 표시되어 있는 경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마라톤은 달려야 할 길이 멀어서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경주는 하나님께서 그 길이가 얼마나 길고 얼마나 걸리는지 다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지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다 표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상은 일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주를 완주한 자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관중석에는 신아의 선배들이 내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도록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이 친절하게 우리가 잘 달릴 수 있도록 표시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표시해 놓은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말합니다. 경기장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경주를 하지만 오직 끝까지 완주하는 자만이 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인내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능동적인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다가는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인내는 준비된 마음으로, 기쁨으로, 의욕을 가지고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박해를 받거나 욕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마5:11-12). 하늘의 상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NIV에서는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로 ‘믿음의 주관자요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사람의 의지와 관계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믿고자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관자 예수님이 내 속에 믿음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내가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완ㅇ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믿음의 종결자(finisher)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있어서 본을 보이셨고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는 분이시고 믿음을 시작하셨기 때문이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도 그리스도시요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은 NIV에서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로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눈을 고정시키는 것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눈,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시고 영생의 수여자이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바라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고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십니다. 이 믿음은 처음에는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빛이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킬 때 점점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우리 눈은 자꾸 옆이나 뒤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달리다가 옆길로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옆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앞을 바라보지 않으면 직선으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게 됩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좌표를 찍고 그것을 향해 가야 합니다. 벌이 집으로 날아가듯 예수님을 향해 직선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은 ‘…대신에’라는 뜻과 ‘…을 위하여’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대신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은 성육신 하기 전의 누리셨던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영광을 대신에 죄인들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백성이 누리게 될 영광과 자신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영광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조소했다, 깔보았다, 무시했다’는 뜻으로 그것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사람들의 멸시, 조롱, 저주, 억울함, 배반, 버림받음, 부끄러움을 다 포함하는데 예수님은 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는 그 앞에 놓인 즐거움, 즉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9-11).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사람들이 나를 거역하면 마음이 피곤하여 낙심하게 됩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히브리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저자는 이런 그들을 위해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2절에서는 ‘바라보자(fix our eyes)’라고 하다가 3절에서는 ‘생각하라(consider)’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의 참을 수 없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면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리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습니다(막15:16-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막15:29) 우리가 죄인들의 거역하신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분의 고난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에 나를 향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날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나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4-8)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 성도들이 받는 죄의 유혹은 유대교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죄의 세력과 싸울 때 적당히 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죄는 바로처럼 끈질기고 지독합니다. 죄의 유혹은 매우 강하여 적당히 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피흘리기까지 투쟁이 필요합니다. 죄와의 싸움은 격투기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죄는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지만 유별난 신앙 생활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느새 금새 지쳐버리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들어옵니다. 사명을 감당하되 이 정도까지 고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고생하지만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이유로 고생시키고 싶지 않는 마음도 듭니다. 특히 오늘날은 눈에 보이는 박해의 고난은 없습니다. 다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의 신념과 신앙을 존중해 줍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긴장을 늦추다가 내부의 적, 즉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유별난 신앙 생활보다는 ‘중용’과 ‘균형’을 강조하는 ‘회색 지대’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치고 경계선을 왔다갔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 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한 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 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찬송가 311장)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사탄은 애굽의 바로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놓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맹렬하게 싸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하늘의 상급,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로 생각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자 힘든 생각을 하면서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며 슬픈 생각을 했습니다. 저자는 부모가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들에게 권면하셨는데 그들이 이를 잊고 살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잠언3:11,12 말씀을 인용하여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고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에 자식을 징계합니다. 징계가 없다면 그는 자식이 아닙니다. 여기서 징계는 영어로 discipline으로 훈련을 말합니다. 5-11절까지 ‘징계’라는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6절에는 ‘채찍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교육적 목적으로 채찍질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시대에 채찍질을 한다면 당장 아동 학대 죄로 고소당할 것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체벌이 사라지면서 훈련이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거부감을 갖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장 말씀에서 ‘징계’ 또는 ‘훈련’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체벌과 채찍질이 용납되었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오늘날 시대에는 이 개념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징계’나 ‘훈련’은 오늘날 용어로 ‘교육’이라는 용어가 적절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은 결코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부모의 교육을 받고 간섭을 받습니다. 만일 부모의 교육이 없다면 그 자녀는 사생자요, 친 자식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도덕과 죄에 대한 개념이 생기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릇 없는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만일 사람에게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다면 그는 한없이 교만해질 것입니다. 그는 실패한 사람의 아픔과 고난을 당한 자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마음이 낮아지고 공감 능력이 생기며 내면이 성숙해지게 됩니다. 약자의 편에 설 줄 알게 되고 환난당한 자들의 억울함을 들을 줄 알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고난은 영적으로 매우 유익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2-1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한다고 슬퍼하지 말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훈련하시는 목적(9-13)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육신의 아버지도 사랑하는 자녀를 훈련하십니다. 자녀는 가르침 받을 때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 부모를 공경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자식은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는 허물과 실수가 많습니다. 자녀를 가르칠 때에 감정과 분노로 대하여 자녀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반발하고 어긋나가게 됩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러셨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늘 나와 함께 하실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써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뜻 가운데에서 우리를 교육하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특별히 계획하신 것으로 나에게 가장 잘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는 내가 당하는 고난을 이렇게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훈련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10:13).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안성맞춤으로 주신 고난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시고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엡4:13).
무릇 하나님의 훈련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열매 맺는 삶은 돈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잘 보고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잡아 넉넉한 삶,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열매 맺는 삶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삶은 영적으로 성장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 열매, 즉 성령의 열매는 시련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죄와 끊임 없이 싸우는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에서 벼가 익고 과일이 달아지듯이 나에게 닥친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맞춤형 인생 프로그램으로 내 인생에 열매를 맺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절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일으켜 세우고’는 ‘강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 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우리가 알게 모르게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되고 회의가 들 때 과연 그런 마음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낙심, 절망, 두려움, 회의와 같은 부정적 요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기에 자녀로서 훈련하고자 하시는 점이 있다는 점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잠언 4:26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나의 발이 의와 진리의 길을 곧장 갈 수 있도록 길을 평평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은 길(level paths)’의 반대되는 개념은 ‘굽은 길’이나 ‘울퉁불퉁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굽은 길’이나 ‘울퉁불퉁한 길’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피곤하게 합니다. 의와 진리의 길은 ‘곧은 길’이지만, 불신과 회의와 절망의 길은 ‘굽은 길’, ‘울퉁불퉁한 길’입니다. 고난 받는 성도들은 주의 말씀이 나의 발을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발’은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발이 범죄에 빠른 발(롬3:15), 교만한 발(시36:11), 넘어지는 발(116:8)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의 발을 주의 반석 위에 두어 걸음을 견고하게 하고(시40:2)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자의 발(사52:7)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저는 자’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는 ‘저는 자’와 같이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는 귀한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그들 가운데 회복의 역사가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고난으로 인해 절망과 회의에 빠진 자들이 수렁에서 나와 그들의 발로 굳게 서도록 도우십니다(시40:2).
공동체를 위한 권면들(14-17)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4-29절은 공동체에 관한 실천적 말씀입니다. 신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저자는 실제 삶에서 신자의 특징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화평입니다. 신자는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과 화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롬12:18).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습니다(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3:18). 화평하게 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재는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없이는’라는 말은 without holiness로 ‘거룩함이 없이는’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레11:45). 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출19:6, 벧전2:9).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주의하라’는 말은 KJV에서는 looking diligently로 ‘부지런히 살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거짓 교훈과 부도덕한 삶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교회는 이를 감독하여 불신과 죄에 빠지지 않도록 돕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견고해지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를 붙들도록 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함으로 마음이 힘들어져서 이 은혜를 저버리지 않도록 서로 사랑하고 영적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힘들어져 떠나가면 불신의 악영향이 독처럼 번지게 됩니다. ‘쓴 뿌리’는 신명기 29:18 말씀과 관계된 말씀으로 ‘독초와 쑥의 뿌리’라는 말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완악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누구 한 사람이 패역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믿음에서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공동체 내에 큰 독이 되어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특히 거짓 교사의 가르침이나 죄의 영향력은 쓴 뿌리처럼 퍼져 영적인 파괴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당시에는 유대 율법주의로 인한 교만과 헛된 자부심의 쓴 뿌리가 잠재되어 있다가 자라서 어느 한 순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쓴 뿌리’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절망과 미움이 싹트게 되어 어느 순간 독버섯처럼 번지게 되어 교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쓴 뿌리의 특징은 감추어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독성은 은근히 전체에 미쳐 교회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나 자신 속에 있는 ‘쓴 뿌리’가 있다면 이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의 형제∙자매 중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과 이해와 겸손과 진리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쓴 뿌리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치료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이 쓴 뿌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 상처가 있는 연약한 자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치료함을 받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교회 공동체는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음행의 문제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가정의 윤리를 지켜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적 윤리가 희미해져 가는 오늘날 시대는 더욱 더 그러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가정 사역’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가정을 ‘가정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가정은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입니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성적 부도덕입니다. 이는 누룩과 같아서 온 교회에 퍼져 영적인 힘을 잃게 하고 서로간의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교회는 또한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망령된 자’는 godless로 하나님 없이 사는 생활, 즉 ’불경건함’을 말합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에서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자였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는 당장의 배고픔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며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는 영적 가치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히브리 성도들 중 일부는 타협해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분을 팔아 버린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이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명분이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명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받는 상속자로서의 명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하고 편한 세상에서 이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 생각하고 아무렇게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가 에서와 같이 순간의 충동으로 이 귀한 명분을 팔아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장자의 명분을 아무렇지 않게 팔아 넘긴 에서는 나중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자 하지만 놓치고 맙니다. 물론 동생 야곱의 속임수가 있었지만 아버지 이삭은 동생 야곱이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평소 에서가 장자의 명분과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겼더라면 그가 불경건하게 생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가치관은 인본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냥이나 하고 들판을 쏘다니면서 들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위해 함부로 이방여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창26:35). 그는 자신의 결혼으로 인해 부모님이 근심이 되자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자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말하며 어린 아이가 떼를 쓰듯 소리내어 울었습니다(27:38).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에서에게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라고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에서의 예를 들면서 함부로 믿음을 버리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에서와 같이 신자의 명분을 함부로 여기고 세상 물결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때 회개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기 쉽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을 좇아 함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지키고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시온(18-24)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 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18-21절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시내산’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이와 대조되는 것은 ‘시온산’,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이는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18-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타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의 현상을 여섯 가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현상은 만질 수 있고 불이 붙은 산의 모습, 침침함,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입니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촉감, ‘불이 붙는’, ‘침침함’, ‘흑암’, ‘폭풍’은 시각,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는 청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고 들을 수 있는 것들로 외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백성들에게 두려움만을 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20절은 출애굽기 19:12-13을 축약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경계를 침범하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만일 침범할 경우 사람인 경우에는 돌로 쳐죽이고 짐승인 경우에는 화살로 쏘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가 ‘짐승이라도’라는 말로 축약되었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한다’는 말이 ‘돌로 쳐죽이라’는 말로 축약되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이 돌로 침을 당하리라’는 말이 된 것입니다. KJV에는 ‘돌로 치거나 화살로 쏘아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영어 성경은 ‘돌로 침을 당하리라’는 말만 있습니다. 여하튼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성경을 축약해서 인용해서 생긴 혼돈이라고 보면 됩니다. 21절에서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라는 말을 쉽게 풀이하면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새번역)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모세도 또한 백성들처럼 심히 두렵고 떨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9장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9:19을 보면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백성들을 보자 화가 나서 두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심히 분노하셔서 그들을 멸하려 하실 때에 두려워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7:32에서는 하나님이 시내 산 광야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실 때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옛 언약의 중보자 모세도 두려워 떨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과 예배자가 분리되어 있어 예배자가 감히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저자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시내 산’과 대조적으로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나열합니다. 우리말 구조에서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영어에서는 you have come to …라는 말로 성도들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영어로 살펴보면 you have come to Mount Zion … (시온산에 이름), to thousands upon thousands of angels in joy assembly(즐거운 모임에 천만 천사들에게 이름), to the church of the firstborn … (장자들의 교회에 이름), to God, the judge of all men(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이름), to the spirits of righteous men made perfect(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게 이름), to Jesus 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 이름), to the sprinkled blood that speaks a better word than the blood of Abel(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에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 맞추어서 구속 받은 성도들이 시내산의 경계선에 이르지 못한 것과 달리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저자는 먼저 ‘시내 산’과 대조되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소개합니다. 이것들은 시내 산과 대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입니다. 시내산은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온 산’은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곳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시온 산’은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무형의 성전입니다. 이 곳은 시내 산처럼 경계선이 없습니다. 지옥의 불못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불꽃도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자아내는 침침함, 흑암, 폭풍도 없습니다. 듣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도 없습니다. 시온 산의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에게 더 이상 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기쁨과 즐거움과 찬송으로 이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온 산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2-3) 저자는 ‘이르렀다’는 말을 완료형으로 씀으로써 히브리 성도들이 이미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곳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이 계신 하늘 성소에 대한 은유로 그들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늘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에 이르렀습니다. 모임은 영어로 joyful assembly로 ‘즐거운 집회’라는 말입니다. 그 즐거운 모임에는 천만 천사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천만 천사와 함께 연합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앞에 나아가는 모습은 옛 언약 하에서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장자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어린 양의 피로 장자들을 대속하여 주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출13:15). 그래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받은 ‘장자’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라는 것은 하늘의 생명책에 구속 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계21:27). 개역개정에서는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를 따로 표현했지만, NIV에서는 joyful assembly(즐거운 집회)와 the church of the firstborn(장자들의 교회)로 따로 분리되어 ‘장자들의 모임(개역개정)’이 ‘장자들의 교회(NIV)’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구속 받은 성도들이 만민의 심판자 하나님께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심판자 하나님은 즐거운 모임과 장자들의 교회에서 구속 받은 성도들의 예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시지만 믿음을 버리고 간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심판자가 되십니다. 또한 구속 받은 성도들은 온전하게 된 영들에게 이르게 됩니다. 이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를 간직한 구약의 성도들과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를 간직하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모임 가운데 천만 천사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갑자기 아벨의 피를 언급했을까요? 저자는 그리스도의 피와 아벨의 피의 유사점과 대조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첫 희생제물로 드린 것같이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드려 희생하셨습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그 피가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죽었으나 그가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이 그의 형에 의해 죽임을 당했듯이 그리스도도 그의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아벨의 피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라고 함으로써 복수를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화평과 용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각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 양심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라고 설명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이어 받음(25-29)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말씀하신 이는 ‘땅에서 경고하신 이’와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로 나뉘어집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이’는 옛 언약을 가리키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는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옛 언약 하에 있었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거역하였습니다. 하물며 새 언약의 메시지를 고의적으로 거역한 자들은 더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6절의 ‘그 때’는 시내 산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18-21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땅이 진동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는 땅의 진동보다 더 큰 진동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학개서 2:6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내 산 사건은 땅만 진동하였으나 미래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27절의 ‘또 한 번’이라는 말은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이루어질 일들을 말합니다. 그 때에는 이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은 진동하는 것, 즉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옛 언약에 속한 것들도 포함됩니다. 옛 언약 하에서 섬겼던 모든 것들, 구약의 여러 제사들, 율법이 세운 제도들, 규례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다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지상 장막은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성소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합니다. 진동하지 않는 것, 즉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영원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말은 KJV에서는 have grace로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감사하자’로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생각하고 은혜를 붙들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붙드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행위’를 생각해 냅니다. 그래서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 인생 목적이요 복입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참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방황한 것도 예배의 대상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대화했던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메시야를 만난 기쁨이 충만하여 동네로 들어가 메시야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세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서 지상 장막이나 성전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요4:23). 즉 복음을 붙들고 복음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기쁘시게’라는 말은 영어로 acceptably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11:6). 둘째는 경건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경건함’은 죄인으로서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은혜를 기억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시내 산에서 백성들이 가졌던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됩니다.
29절에서 저자는 갑자기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8절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멸하는 불’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미 저자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백성들은 두려움 가운데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속 받은 성도들이 이른 곳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내 산’이 아닌 즐거운 모임의 장소인 ‘시온’으로 그 곳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십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불기둥처럼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비추이시고 따뜻하게 해주고 선하게 인도하시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는 결코 소멸하는 불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원수들에게 대해서는 크게 진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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