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11장에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에 대해서 열거하고 12장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인내의 경주를 하도록 권면. 히브리서 13장은 여러 가지 실제적인 교훈들을 다루고 있다. 교훈의 내용을 열거하면 형제 사랑(1), 손님 대접(2), 고난당한 형제에 대한 자세(3), 결혼 윤리(4), 돈에 대한 자세(5-6), 지도자들에 대한 자세(7, 17), 고난에 대한 자세(9-12), 찬송과 선행의 제사(15-16), 기도부탁과 문안 인사(18-25)이다. 13강 본문에서는 교회 지도자를 본받으라 하면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언급하고, 제단에서 나온 희생제물을 영문 밖에 불사른다는 구약적 배경을 말하다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언급하며 기도를 부탁하다가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평강의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본문을 통해 실제 삶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자의 자세가 무엇이 있는지, 그 가운데서 언급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제적인 교훈들(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저자는 1-3절에서 이기적인 세상에서 힘써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기적인 세상에서 형제를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막 12:18-31). 형제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3:1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요일3:18). 우리는 각박한 세상에서 형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쁜 시대에 서로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려면 마음을 쓰고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절대적으로 지키라고 형제 사랑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생활 습관상 잘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합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자꾸 미운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다양성을 생각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듯이 형제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를 거역하는 자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은 십자가로부터 나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붙들 때 의인된 심령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영접하고 용서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가정을 개방하여 손님을 초대하는 미덕을 가져야 합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아파트와 같이 격리된 공간에서 살다보면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생기고 아파트 공간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기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집 현관 문을 열어 초대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음식을 해서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고 교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내에 인적 네트워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손님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손님 대접에 전형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손님을 대접했는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대접한 그 손님들은 서육신하신 하나님과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42).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접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로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손님 대접은 마음의 문제이지 물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잠언 11:24,25절은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를 힘쓰면 하나님이 풍족하게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윤택하여집니다. 부자라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는 반면 가난하여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있습니다.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여기서 옥에 갇힌 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갇힌 자들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그들은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신자는 복음 역사를 위해 수고하다가 이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내 몸을 돌보듯 돌봐주어야 합니다. ‘학대 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변에 고난을 당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연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생각하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몸의 일부가 아프면 전체가 아프듯 공동체 내 누구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아픔을 나누고 돌보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신자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음행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것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 생활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결혼의 신성함이 무시될 때 가정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사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날은 결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해도 쉽게 이혼하고 결혼은 족쇄라고 하면서 싱글 라이프를 즐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현대인들은 결혼을 할 때 겪는 책임 때문에 결혼하기를 꺼려합니다. 양육비 부담 때문에 아이 낳기를 꺼려합니다. 아예 싱글 라이프(single life)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유롭게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면서 음행을 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성적으로 문란하여 이로 인해 길거리에 버려진 영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가 멸망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성적 타락으로 인한 것이 가장 큽니다. 결혼은 의무만 생각하기 쉬운데 결혼은 의무가 아니라 행복입니다. 결혼을 통해 주어지는 행복은 의무의 짐을 넘어서기에 충분합니다.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5-6절은 돈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저축하고 적절한 곳에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부를 축적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물질의 청지기임을 말해 줍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따라 주시는 것으로 잘 관리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섬기며 선을 행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 자체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돈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돈이 가장 큰 권력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돈은 ‘자본주의’, ‘경제’, ‘금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돈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디모데전서 6:9,10절은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은 사람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어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절에서 ‘재물’은 영어로 대문자를 써서 Money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등한 격으로 올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풍족해지면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 결국 돈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고 죄에 빠지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며 형제 간, 친구 간의 관계도 깨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딤전6:10).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부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도록 권면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다스리는 청지기가 되려면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6-8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잠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새들을 먹이시고 들풀과 같은 하찮은 꽃도 화려하게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6:33). 우리는 궁핍에 처해 있든지 풍부에 처해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우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빌 4:11-13).
히브리서 저자는 5b절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약속입니다(수1:5, 신31:6).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의 손에 놔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으시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하나님은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타락에 빠지게 하거나 자기 힘이나 지혜를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고 엇나가지 않게 하시고 그의 얼굴을 비추사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얼굴을 감추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을 멈추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를 버리거나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지키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6절은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은혜의 보좌를 세우시고 우리가 나아가 도움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지와 같은 존재로 우리 혼자 힘으로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시103:14).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죄의 늪에 빠진 우리를 건지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우리를 사탄의 덫에서 건지시고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도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그의 은혜의 품 안에 두시고 보호하십니다. 인생이라는 싸움 가운데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힘 있게 하시며, 광야 같은 현실에서도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필요한 은혜를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풍성한 은혜를 생각하면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근거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과 은혜와 선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7-8)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은 영어로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으로 동사가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히브리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믿음의 선배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교회 지도자들의 행실의 결말, 즉 삶의 열매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많은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분들을 절대시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저자는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유심히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 선배들의 삶, 즉 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역사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선배들의 믿음을 잘 이어 받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잘 물려받아 이를 야곱에게 잘 계승했고 야곱은 열두 아들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세계 교회사와 한국 교회사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믿음의 선배들을 배우고 역사의 흐름을 알아 현대 사회에 맞게 잘 계승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듣지 못했던 낯선 이방 땅에 순교의 각오로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살아 있는 신앙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신실성을 언급합니다. 저자는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해놓고 나서 성도들이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본 받기를 힘써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을 본받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고전11:1). 이 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만왕의 왕으로서 영원토록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빌2:10-11).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많고 인격이 훌륭해도 세월이 지나면 늙고 약해지고 힘을 쓰지 못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생각과 감정이 쉽게 변합니다. 결혼 서약을 할 때 신랑과 신부는 검은 머리가 팥 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다고 맹세 하지만 녹록치 않은 삶의 세파를 겪다 보면 어느새 사랑이 식고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됩니다. 인간은 약속한 것을 밥 먹듯이 잊거나 깨뜨립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 변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지만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이나 능력이나 사역이나 그 어떤 면에서도 변하지 않으시고 동일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 제자들이 낙향하여 물고기를 낚고 있었지만 3년 전과 같이 빈 그물만 들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이 물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잡은 생선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셔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이나 부활하셔서 영광 받으신 후나 제자들을 대하는 사랑에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에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그리고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이나 부활하신 후나 승천하신 후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히7:25). 이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영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9-12)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9절 뒷부분에 음식에 관한 규례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음식에 관한 여러 규례가 나옵니다.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어 먹어도 되는 것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체에 관한 예법에 불과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어 개혁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맡겨 둔 것에 불과합니다(9:10). 이런 예법들은 오직 외적인 것만을 정결하게 할 뿐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없으니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9:13,14). 그러므로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습니다. 이 구절은 영어로 It is good for our hearts to be strengthened by grace(NIV)로 ‘우리 마음을 은혜로 강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음식이 아닌 은혜의 복음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기초해서 우리의 믿음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제는 율법에 의해 정결하게 하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오직 마음으로 예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 사함과 영생의 복을 누리면 됩니다.
10절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는 말은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화목제로 드린 것 중에서 일부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레 7:15-18). 그러나 속죄일에 드리는 희생제물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사람들은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영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율법을 고수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새 언약의 사람들은 더 이상 성전이나 제단이나 희생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1절은 10절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는 말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설명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숫송아지와 염소를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감으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속죄하였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영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레16:27).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성문 밖은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11절의 영문 밖과 연관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바깥은 나병 환자가 살거나 죄인들을 처형하는 분리와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영문 밖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능욕과 수치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영문 밖으로 나가 고난을 당하시고 저주와 수치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온전한 속죄를 이루시고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13절에서 저자는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능욕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주와 분리의 장소인 영문 밖에서 능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3).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신21:22-23, 갈3:13). 또한 이방인들에게는 십자가 형벌이 흉악한 중죄인이 달리는 형벌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자를 믿으니 미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유대교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옛 언약의 사람에서 새 언약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문 밖으로 나가 치욕을 받는 삶입니다.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저주와 분리의 장소인 영문 밖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미움을 받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영육 간에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하리라고 기대하면 오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와 권세를 누리는 기득권 편에 서면 안됩니다. 설령 기득권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장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 자체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영문 밖이라고 하는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합니다.
14절에서 저자는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 그에게 나아가자고 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장차 올 도성을 찾는 자들이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일시적인 도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도성은 장차 올 도성으로 사라질 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하늘의 도성입니다(11:10,16). 우리는 천구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므로 이 땅에얽매여 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며 천국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찬송과 선행의 제사(15-16)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5-16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찬송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시고 저주와 수치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을 때 인간적인 마음이 들어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가 드릴 제사는 복잡한 예법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리신 어린 양 예수님을 찬송하는 것이 우리가 드릴 제사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슬프고 힘든 마음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찬송을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물밀듯 밀려오고 감격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찬송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주님은 크신 능력을 부어 주시고 하늘의 위로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셔서 강하게 하시고 은혜의 샘이 솟게 하십니다. 찬송은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마음 속으로만 간직한다면 이슬의 사라짐 같이 어느새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를 생각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않고 우리는 입술로 표현해야 합니다. 찬송은 바로 입술로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열매입니다. 찬송을 부르거나 찬송시를 쓰거나 찬송의 기도를 드릴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려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메아리처럼 울렸다가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이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적극 반응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입술로 드리는 찬송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는 삶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착한 일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는 선행과 그들을 향한 긍휼의 사랑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제사입니다.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자를 살피는 마음, 심지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선을 베푸는 마음, 특히 가난한 성도나 사역자들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는 ‘잊지 말라’ 함으로 우리가 이 일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하고 무시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바쁜 시대를 살면서 나와 내 가족만 간수해도 벅차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도와야 하는 것은 아는데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서 덜 중요한 문제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돕는 일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9:13은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또한 선을 행할 때 정의와 인자와 사랑과 겸손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선을 행할 때 자기 의가 아닌 믿음으로 행하고 자기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며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합니다.
인도자에 대한 자세(17)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7절에서 말하는 지도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도자들을 말하는 반면 17절에서 말하는 인도자는 현재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참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자기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전하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우리 영혼이 경성하도록, 즉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돕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화평과 생명과 구원의 길을 가르치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 인도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예수님을 본 받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도들을 인도하고 양육하며 조언해 주는 그들을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복종’은 현대 사회에 잘 어울리지 않은 단어라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세속화되면서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모습을 봅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학식이 있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서 목회자의 설교와 그들의 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면서 목회자들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에 거부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교회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질서를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그들의 허물을 감당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지도자들도 허물이 있고 실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예수님 처럼 완벽한 인격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 주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근심이나 부담이 아닌 즐거움을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역자들이 즐거움을 가지고 부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이는 서로에게 유익이 됩니다. 만일 성도가 교회 지도자들을 불신하고 거스르고 비판만 일 삼는다면 지도자들은 사역에 부담감을 갖고 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서로에게 영적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서로 갈등의 골이 깊어져 말씀을 잘 들리지 않고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각 지체들이 아프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도 아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영적인 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 각자도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후배들을 인도하고 봉사하며 섬깁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 인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는 각 사람을 인정하고 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를 따르고 배우는 것은 지도자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숭배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큰 죄입니다.
기도부탁(18-19)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저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제 자매들의 기도를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살고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 가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저자와 수신자가 서로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합니다. ‘선한 양심’은 예수님의 피에 의해 깨끗하게 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성화된 양심입니다. 저자가 사역을 할 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말하면서 겸손하게 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선한 청지기로서 모든 일에 신앙 양심대로 섬겨왔습니다. 저자가 왜 돌아가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방해세력으로 인해 히브리 성도들과 만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든지 아니면 박해로 인해 몸을 숨기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히브리 성도들을 직접 만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돕고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문안 인사(20-25)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0절부터는 이 서신의 결론 부분입니다.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부탁과 함께 기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그와 그의 사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평가을 누리를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박해와 고난이 있을지라도 원수들은 그들의 양심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이 주는 평화이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오히려 흘러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끼칩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셨고 부활의 주, 영광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자는 이 예수님을 양무리들의 ‘큰 목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목자’라는 표현이 서신 마지막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저자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4:14), ‘큰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한계가 많은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속죄를 드리신 완전한 대제사장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큰 목자’라는 것은 모세나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과 비교하여 그보다 훨씬 뛰어나신 완전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라고 할 만큼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이며 영원히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큰 목자 예수님은 양들의 완전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양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21절을 보면 큰 목자 예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자기 양들을 온전하게 하시며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큰 목자 예수님으로 인해 건강하게 양육되며 큰 목자 예수님을 닮은 ‘작은 목자’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목자로 세우시고 양무리들을 맡기심으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요21:15). 예수님의 뜻은 자기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하나되게 하시며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인도하여 그들도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는 것입니다(요10:16). 큰 목자 예수님은 우리 안에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하기를 기원합니다.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권면의 말은 ‘설교’로 그 동안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의 배교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권면’이라는 말을 씀으로 그 수위를 조금 낮추며 부드럽게 애정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용납하라’는 것은 권면의 말을 인내로 마음에 새겨 들으라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은 듣기에 부담이 되고 때로는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리에 기초한 권면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일깨우며 살립니다. 그러므로 인내를 가지고 권면의 말을 마음에 새겨 듣고 자기를 살펴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자는 ‘간단하게 너희에게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디모데가 놓인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어디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 잘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의 석방을 알려주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볼 것을 기대합니다. 저자는 그들을 인도하는 자들, 즉 교회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합니다. 또한 이달리야(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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