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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출애굽기 3:1-4:31)

모세의 부르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이 광야에서 끝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의 화려한 옛 영광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갈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억압받고 학대받는 이스라엘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이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을 이루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치셔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모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그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삼으셨습니다. 40년 간 광야 생활만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받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의 무능력을 내세워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는 인간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가 깨어지고 낮아진 자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애굽의 왕자로서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완전히 자기를 비우실 때까지 광야 훈련을 시키셨고 그가 무능력을 주장할 때 그를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철저히 낮아질 때 그때부터 일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3:1-10)

출애굽기 3:1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쳤습니다. 2:18에서는 그의 아내의 아버지가 르우엘로 나와 있는데 이는 르우엘이 부족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실은 그의 아내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거주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족장인 르우엘이 죽고 그의 아들 이드로가 미디안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양 떼를 친 것이 아니라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모세는 상당한 재력을 얻지 못하고 처가 집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이런 모습은 왕자 시절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그는 양 똥이나 만지고 양과 벗하면서 살아갔고 자기 분깃을 갖지 못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 떼들에게 신선한 목초를 먹이기 위해 미디안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 서쪽으로 양들을 인도하여 갔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곳에서 장인의 양을 침으로 자기 백성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애굽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 가는 것이 됩니다. 호렙은 시내산이 있는 곳이며 미디안 서쪽의 광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렙의 위치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가 빈약한 관계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증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에 도달할 때까지 석 달이 걸렸다고 말합니다(출 19:1-2). 이는 시내 산이 있는 호렙이 애굽에서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내 산이 시나이 반도 남쪽 끝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수르 광야 북동쪽과 가데스 바네아 부근이라고 하고 최근에는 고고학적 증거를 주장하며 아카바 만 반대편의 미디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9:1-2에 의하면 이 곳은 “시내 광야에”, “산 앞에”라고 나와 있어 시내 산이 산맥의 바깥 쪽의 평지가 있고 뒤로는 산이 있는 곳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호렙은 전체 산줄기의 이름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의미하고 시내 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 곳까지 이동한 목적은 양들에게 줄 풀을 찾기 위함입니다. 유목민들은 신선한 풀을 얻기 위해 천막에 살며 먼 곳까지 이동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디안 땅에서 나와서 시나이 반도의 호렙 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절에서 호렙은 “하나님의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불린 것은 이 곳이 하나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신 곳(행 7:30)이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곳이었기 때문입니다(18:5; 19:3). 모세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 곳이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땅이 실패의 땅이요 절망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3:2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이신 사자(the angel that is Yahweh)’, 또는 ‘여호와 천사(the Angel Yahweh)’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피조물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 나타나시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니라’라고 하시 않고 ‘나타나시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사자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말씀이 … 있었느니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사자는 자신을 1인칭으로 말하고 있으며 6절에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하셨고, 14절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으므로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모세에게 나타난 사자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 구약 시대에 사역하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친히 사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자”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냅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고 그는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로 아들을 죽이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 … 불러 이르시되”라고 하였고(창 22:11), 그 사자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밝히셨습니다(창 22:12). 사사기 6:11-14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라고 한 뒤에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사자는 여호와로 이 둘은 동격입니다.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1). 그리고 바울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15). 그러므로 2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그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모세가 들은 말씀은 아들의 인격으로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었습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자라는 키작은 관목을 의미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불꽃이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엄과 순결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 불꽃은 원수들에게는 공포와 멸망을 의미하지만 그의 백성에게는 빛과 희망과 위로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막의 관목은 메말라 있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계속해서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계셨고 고통 중에 있는 그의 백성 가운데 계셨으며 그의 능력이 불이 꺼지지 않고 애굽을 심판하시고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그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성막 가운데 거하시며 친히 성육신하셔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성령으로 믿는 자의 마음에 내주하시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출애굽기 3:3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모세의 80 평생 이런 신기한 광경을 경험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광야의 떨기나무는 작은 불씨에도 쉽게 타서 없어지는데 시간이 가도 떨기나무의 형태가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호기심으로 접근했지만 그 호기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그에게 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임재하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영적 지식의 간절함과 소원이 있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제자들이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그들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요 15:16). 

모세는 그의 40년간의 애굽의 왕자의 시절과 40년간의 미디안 광야 시절은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 남자 아기로 태어나 강에 던져져 죽을 운명으로 태어나 가까스로 바로의 공주의 눈에 띄어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고뇌와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동족들을 볼 때면 궁궐의 침대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하나님의 백성에 서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감독관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들에게 배척당함으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낯선 미디안 땅에서 한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을 치며 그야말로 푹 썩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 잘하던 그는 말이 어눌해지고 열정적이었던 자가 무기력해졌으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체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언젠가 애굽 땅으로 돌아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젊은 날의 패기는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달았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절망한 마음에 불꽃으로 임함으로 희망의 불꽃을 지피셨습니다. 

출애굽기 3:4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으로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라고 하심으로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것은 애정을 가득 담아 부르신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그 누군가 있다는 것은 모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네가 필요하단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이 일을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키우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한 시도 멈추지 않고 그의 구속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때가 되자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그의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이루려는 소망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는 양 치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조용한 광야에 적응했으며 그냥 이대로가 좋았습니다. 반면 이런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다급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하자 다급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창 22:11). 하나님은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았던 사사 시대에 다윗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간절히 부르셨습니다(삼상 3:10).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을 애정 어린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습니다(행 9:4).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사람을 부르셔서 그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5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모세에게 그의 거룩함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아주 초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호기심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외심과 겸손으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성소를 맨발로 밟는 것은 경외와 굴복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부르실 때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5:15). 동양에서는 실내에 들어갈 때 신을 벗고 서양에서는 모자를 벗습니다. 만일 한국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오면 이는 그 집을 짓밟는 것과 같은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강도나 불량배들은 신발을 신고 들어와 물건을 빼앗고 집안을 더럽힙니다. 바로 모세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으로 모세는 그의 집에 들어갈 때 신을 벗어야 합니다. 

신발을 벗는 것은 죄 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죄 있는 상태로 만날 수 없습니다. 죄 씻음을 받아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 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대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5-7).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쓰임받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5:8). 이는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쓰임받기 위해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전에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죄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심으로 그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하고 신을 벗고 그에 대한 경외와 순종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그가 있는 곳이 저주받은 땅이고, 좌절과 실패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유목민 미디안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슬프고 한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특권을 버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 뭔가 큰 일을 하고자 했지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고난을 받고자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의 백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지만 지금은 처가살이하면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자기의 집을 갖지 못하고 종살이하는 것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지금은 의미 없이 양이나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족들 외에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 하루 종일 적막한 광야에서 외톨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선 곳이 인생의 뒤안길로 가는 마지막 정착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조상의 하나님은 이제 그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다고 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통해 그의 백성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선 곳은 역사적인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땅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40년간 머물렀던 미디안 광야는 그를 훈련시켰던 훈련장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철저하게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감당해야 할 백성들이 얼마나 불평이 많고 감정적이고 섬기기 까다로운 노예 근성에 찌든 자들인가 알고 계셨기에 이들을 감당하할 지도자가 되려면 철저하게 훈련된 지도자이어야 함을 잘 알고 그를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길이 거칠다고 불평하였고, 목이 마르면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없다고, 고기가 없으면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더 편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출 16:3; 민 20:3-5; 민 21:5).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대들었습니다(출 8:26; 민 14:10). 모세가 이들을 섬기고 무사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려면 이들을 감당할 넓고 겸손한 내면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간의 훈련을 통해 겸손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2:3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모세는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실패하였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전무후무한 세계적인 지도자로 키우신 영적 학교로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자기와 자기 민족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그와 그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고 한 사람을 키우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6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거룩함을 가르치시고 그의 발에서 신을 벗게 하심으로 경외심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모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발에서 신을 벗음으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신지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함께 고난을 받기로 결단하였던 백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배신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확인받았습니다. 이 백성은 겉보기와 다르게 하나님의 언약을 간직한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 후손을 통해 이어 내려왔습니다. 모세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늘 마음에 간직하시고 그의 때에 이를 실현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각 개인의 하나님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이제 ‘모세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세계가 움직이고 자연 세계를 유지하는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만드셨지만 때로 그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기적이라는 형태로 이를 거스려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으로 역사적 사건이 그 분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시고 야곱의 가족들을 이주시키셔서 그 곳에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대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 가운데 살아계시고 각 사람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도 그의 구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위대한 구속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가 됩니다. 모세의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모세에게는 실패처럼 느껴졌지만 하나님께는 그를 지도자로 준비시키기 위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당한 것도 그가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끌며 당한 수많은 배척의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함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지 그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됨으로 하나님은 그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나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를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닫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나와 함께 거하시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구원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기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말로만 듣던 조상의 하나님께서 지금 그가 있는 곳에 계셨으며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만나자 경외심에 휩싸여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한 바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불어 씨름하였을 때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습니다. 그는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그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고백의 의미였습니다(창 32:30). 

아무도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습니다(요 1:8; 6:46; 요일 4:12). 이는 그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6:16).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것이 아니라 불꽃 가운데 임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었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들 수 없었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그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고백했습니다(요 1:14).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시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요 14-9-10). 사도 요한은 오감을 통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의 귀로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라고 말했습니다(요일 1:1-2).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을 통해 전해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의 내면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7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7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2:23-25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2:23-25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이 “들으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3:7에서는 “보았다”, “들었다”, “알았다”라는 세 동사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2:23-25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반면, 3:7-10에서는 “내려가다”, “건져내다”, “인도하다”, “데려가다”라는 동사가 단계적 과정의 그림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즉 3:7-10은 2:23-25에 이어진 동작의 표현이고 구체성이 두드러져 표현되었습니다. 

3:7-10은 창세기 15:13-16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구체적인 계획을 430년 후에 이루고자 일을 시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이 안고 있는 고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고통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든 일에 형통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일이 더 꼬이고 믿지 않는 자보다 궁핍하게 살 수 있고 삶의 결말이 인간적으로 볼 때 비극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렸던 아벨은 그의 형 가인에게 살해를 당했고 욥은 의롭게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 가족과 재산을 잃고 몸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히 11:36-38). 

믿음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깊이 동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하시기 위해 친히 ‘내려’ 오셨습니다. 내려오신 것은 그의 성육신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고 있는 고통에 관심을 갖고 계셨고 이는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 동안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생각하였고 언약을 잊으셨다는 생각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으로부터 받는 육체적인 고통도 심했지만 이런 신앙적인 회의가 그들을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갖고 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왜 가혹한 고통을 주시는가?”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우리는 또한 모세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과거 “나는 나의 동포를 도우려고 했을 뿐인데 왜 그들은 날 버렸는가?”라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이제 와서 민족의 구원자로 부르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고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세 개의 동사 “보았다”, “들었다”, “알았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보았다”는 것은 ‘주의 깊게 관찰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입니다.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 속에 부르짖음과 탄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알았다”는 것은 ‘인식하다(aware, NASB95)’, ‘염려한다(concerned, NIV)’는 뜻입니다. 이 동사 이외에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내 백성”이란 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를 배척했던 노예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니 놀라운 말입니다. 감정적이고 불평이 많고 종잡을 수 없고 변덕이 심한 이 백성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니 이해 불가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 생각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렸는데, 그 결과는 배척당했고 도망자의 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을 더 이상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혈통으로는 그의 백성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창 18:19). 하나님은 이 언약대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땅을 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19:6).

출애굽기 3:8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7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통을 “보셨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 고통을 “아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내려가서” 놀라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내려간다”는 말은 우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에 그의 놀라운 일을 행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늘 뿐만 아니라 땅에도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 여인이었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수 2:11).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지만 땅에서도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자연법칙이나 원리에 의해 통치하지 않으시고 친히 세상의 모든 역사를 일일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가 잠시 이 땅에 내려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땅에 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려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베풀고 자신의 은총을 나타내시고자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쓰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으로 엄밀히 말해 이곳저곳을 옮겨다닌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절망의 땅, 실패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 계셨고 그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깨닫게 하고자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임하셔서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나타내셔서 놀라운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는 애굽을 열 재앙으로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애굽의 고센에 비하면 좋은 땅이고 넓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신 8:7-10을 보면 그 땅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이 많이 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옥토라고 표현했습니다. 민수기 13:23-24을 보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그 땅에 보냈는데 두 사람이 막대기에 포도송이 꿰어 메고 다닐 정도로 열매가 크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그 곳이 왜 그렇게 메마른 땅이 되었는지 의문을 갖기 쉽습니다. 시편 107:34을 보면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죄로 인해 가꾸어야 할 땅이 폐허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와 오늘날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좁은 고센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곳은 강력한 제국이 자리잡을 수 있는 매우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그리스 시인의 표현으로 가축과 열매와 곡식의 풍부함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은 땅입니다. 이른 비는 10월경에 내리는 첫 비를 말하고 그 이후 우기가 시작되면 건기 동안 메마르고 굳은 땅을 무르게 해주어 경작과 파종을 하기에 좋게 해줍니다. 늦은 비는 4월경에 내리는 비로 곡식이 탐스럽게 결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의 적절하고도 풍족한 은혜와 선하심을 상징합니다(신 11:14; 시 84:6; 렘 5:24; 욜 2:23). 이처럼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비를 내려 주심으로 애굽처럼 수로를 만들고 물을 댈 필요가 없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젖(우유)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필수 음식으로 많은 가축을 키우기에 좋은 땅임을 말해줍니다. 꿀은 달고 맛있는 과일이 풍부함을 말해줍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포도 열매가 자라기에 참 좋은 기후이고 사람들은 포도주와 포도로 만든 시럽을 이용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할 땅의 경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땅은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이를 보면 구체적으로 그들이 얻을 땅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19-21은 열 족속을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여섯 족속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아브라함 때와 출애굽 때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가나안 족속”(the Canaanites)은 팔레스타인 지역 살고 있는 모든 인종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안과 요단 계곡의 주민들을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함의 자손인 가나안의 후손을 말합니다. 

“헷 족속”(the Hittites)은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아들인 헷으로부터 형성된 민족으로 오랫동안 가나안에 거주하던 원주민이었습니다(창 10:15; 15:20). 역사적으로는 히타이트 인이라 불렸으며 한 때 광활한 지역에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들은 헤브론 지역과 가나안 중앙 산지에 거주하였으며 가나안 족속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수 1:4). 이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 진멸당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종으로 섬기다가 점차 이스라엘에 흡수되었습니다(대하 8:7-8). 다윗의 신하 중 아주 충성스런 우리아는 헷 족속이었으며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삼하 23:39). 

“아모리 족속”(the Amorites)은 BC 3세기 후반부터 2세기 중반까지 거대한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아모리 사람들은 주로 산지에 살았으며(신 1:7), 출애굽 당시 그들은 요단 강 동쪽에 거대한 왕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땅으로 통과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민 21:23). 게다가 그들은 군대를 모집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했으나 전멸당했습니다(민 21:21-30). 가나안 정착 후 아모리 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들의 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수 13:4, 8).

“브리스 족속”(the Perizzites)은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여 그들의 기원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다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원주민이었습니다(창 13:7; 15:20; 34:30). ‘브리스’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산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브리스 족속은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것처럼 ‘시골에 사는 자들’이라는 것과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후에도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스 9:1). 

“히위 족속”(the Hivites)은 함의 후손으로(창 10:17-20), 북방 레바논 산과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거주하였습니다(삿 3:3; 수 11:3). 그들은 시돈과 두로까지 거주하였고 일부는 세겜(창 34:2)과 기브온과 그 주변 성읍에도 살았습니다(수 9:3, 17). 그들은 기브온 족속과 더불어 여호수아를 속여 평화조약을 맺고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수 9:3, 7). 

“여부스 족속”(the Jebusites)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을 말하는데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입니다(대상 11:4). 여부스는 가나안의 셋째 아들로 다른 가나안 족속들과 같이 함의 자손이었습니다(창 10:15-20).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남쪽 비탈까지만 차지합니다(수 15:8). 후에 다윗이 이 여부스 족속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그 곳을 차지하여 그 곳이 다윗 성이 되었습니다(대상 11:1-5). 

출애굽기 3:9-10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셨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친히 내려가시겠다,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8절에서 “내가 내려가서 … 건져내고… 인도하여 … 데려가려 하노라”라고 하시면서 모세에게 “이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를 … 보내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보내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바로에게 도전하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40년 전 바로를 두려워하여 이 곳에 피해서 왔는데, 이제는 그 곳으로 가라니, 이는 다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들립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에는 긴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전쟁을 하기 전 긴장의 상황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쟁 출정 명령을 내리십니다. 모세는 하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하나님은 준비가 안 된 그를 부르실 만큼 긴박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손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달하고 애굽 사람들을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학대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결코 묵과할 수 없으셨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기 힘드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신 것은 그들이 애굽생활에 철저하게 절망하고 그들의 손에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갖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때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표시해 놓은 그 시간이 정확하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대하는 애굽의 죄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강포와 잔인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차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죄가 차면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죄를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애굽의 악함이 극에 달했고 이스라엘의 고통도 극에 달한 상황입니다. 그는 더 이상 구원을 미룰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에 달한 상황이 그가 일하실 수 잇는 최적기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때가 너무 늦었고 자기 형편도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습니. 그는 자기 몸과 정신과 영혼, 모두 다 녹이 슨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의 열정도 패기도 없었고 오히려 배척당한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게대가 자기를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두려움과 애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두려움과 상처의 땅인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다니,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 

하나님은 비천한 도구를 택하셔서 그의 구원역사에 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모세를 가리켜 전무후무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가장 비천한 시골의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도 나일 강에 던져져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를 전무후무한 애굽 대탈출 역사에 사용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자기 백성을 애굽에게 인도하는 일을 맡기십니다. 이는 작은 일개미가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나르는 일과 같이 모세에게는 들지도 못할 무게의 짐과 같은 무거운 일입니다. 출애굽은 모세의 능력과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모세를 바로에게로 보내십니다. 

여기서 바로는 투트모세 3세(BC 1479-1425) 또는 람세스 2세(BC1279-1213)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바로는 인류의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인 피라미드를 만들만큼 태양 신의 아들이라 불리워지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정면 도전하여 대탈출을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10절의 주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 보내어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대탈출의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역사를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아니고는 출애굽 과정의 한 단계도 이동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이 일을 자기가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는 그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공식적으로 부르셔서 출애굽의 대사명을 위임하십니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스스로 계신 자”(3:11-22)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이제 가라 …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의 명령을 듣고 자기와 바로를 비교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을 잘 알고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내 꼴 좀 보세요. 저는 애굽에서 도망친 도망자입니다. 게다가 이런 시골 구석에 처박혀 40년을 살아온 가난한 목자입니다. 이런 제가 거대 제국의 바로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사명은 크고, 그는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아 발견이 선행되어야 작고 연약한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모세는 사명의 무거움을 느끼며 자기가 이 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님을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할 때, 그는 하나님과 동역하면서 자기 생각과 의견을 말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하면서 안되는 점을 말할 것입니다. 마치 빌립이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자 의도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낸 것과 같습니다(요 6:7).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주님의 지시는 무모하고 부당하고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신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자아 발견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을 발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겸손이 지나칠 때 이는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본질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가치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 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눅 5:5). 베드로는 자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다시 그물을 내려 보았자 물고기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기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며 주의 말씀을 앞세워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의 공식은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의 말씀대로 가겠습니다.”라는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다 다릅니다. 우리는 모세의 반응에 대해 비난할 수 없습니다. 만일 모세처럼 40년 간 그 상태에 처했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2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철저하게 절망한 모세를 설득하는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불신의 마음에 확신을 심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완벽한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가장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라고 하심으로 확실한 약속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부르실 때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 1:9). 하나님께서 겁쟁이 기드온을 구원자로 부르실 때도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 6:16).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 대명령을 주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과 함께 하셔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그들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낸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백성들과 바로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보통 증거(sign), 즉 표징은 과거나 현재 일어난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는 확신이 부족한 자에게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 아하스에게 위기의 상황에서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징조는 한참 후에 일어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하나님이 주신 표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마치 현재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출애굽한 백성들이 모세가 서 있는 그 곳 그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약속이 증거가 됩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다신교의 나라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의 착취를 당할 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까지 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시간도 없었고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숨 죽이고 두더지와 같이 조상들의 신앙의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고자 계획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출애굽시키시고 광야로 인도하셔서 모세가 있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출 20장).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 그들에게 그들을 인도하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큰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 만민에게 복을 주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 혈통 가운데 만민의 구주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으며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가치 있는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몸은 자유이지만 마음과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가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진리를 주셨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참 자유의 가치를 누리게 하셨습니다(요 8:32). 

출애굽기 3:13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전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모세의 말은 조상의 하나님이 모세를 그들에게로 보내셨다 말하면 그들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애굽은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 국가로 신들마다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래 동안 이교 문화권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들어온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The God of your fathers)”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그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조상의 하나님”은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후 그가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 제사장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God Most High)”이라고 칭했고(창 14:18-22),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항변할 때 하나님을 “이삭이 경외하는 이”(the Fear of Isaac)라고 칭하였습니다(창 31:4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99세 때 나타나셨는데 이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God Almighty)”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1). 이삭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고(창 28:3), 하나님께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라고 소개하며 약속하셨습니다(창 35:11).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면서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창 48: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종 하갈이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갈은 그녀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a God of seeing)”이라고 칭하였고(창 14:13),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여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the God of Bethel)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31:13).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실제 고유 이름에 대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4:26). 여호와라는 이름은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라반에 의해서도 불웠습니다(창 9:26; 12:8; 26:25; 28:16; 30:27). 성경에 기록에 의하면 그 후에는 야곱의 자손 중에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부르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정착 이후 그 후의 세대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모세의 말에 잘 나와 있습니다(13). 

이스라엘은 애굽에 정착하면서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흐릿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예배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놀랍게도 그 책에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기간은 유다가 70년 간 바벨론 포로 생활 하던 기간이었고, 유다인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로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는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들이 대체로 이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시대의 이스라엘의 신앙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로 하나님은 그 이름의 뜻을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I am who I am으로 ‘나는 나이다’, 즉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I cause to be로 ‘나는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존재하게 한 원인자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창조된 것의 창조자이고 세상을 유지하시는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고 역사 가운데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모세를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하면 모세가 하는 말이 그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사용된 시제인데 미완료형으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늘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셨고 지금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조상들의 하나님”이 현재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이는 그가 약속을 이행하는 데 항상 신실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계시록 1:8은 이 하나님의 영원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그 분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 민족인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온 인류를 구원할 구원의 주 예수님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죄 사함과 구원의 복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불러야 할 이름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방 문화에 영향을 받아 여호와라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조상들의 하나님 정도로 생각했고, 그들의 민족의 하나님이 되셔야 할 그들의 신은 아무 힘과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그들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셨습니다. 이제는 여호와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듯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출애굽기에서 “나를(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6:7; 7:17; 8:22; 10:2; 14:4; 14:8). 하나님은 열 재앙과 홍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애굽의 신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3:15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닌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 보다 친숙하고 알기 쉬운 다른 이름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 이 이름은 조상들과 관계 없는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상들의 이름 뒤에 각각에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따로 붙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은 각각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개척자로서 신앙의 여정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영향력 아래 성장하여 무난한 인생을 보내어 특징이 없어 보였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산을 잘 계승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아가 강하여 하나님께서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오래 동안 인내하시고 감당해 주심으로 자기 중심적인 야곱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목자 같이 인도하시고 키우신 하나님을 간증하였습니다(창 48:15).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자 모세를 보내시고 그들을 애굽의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의 믿음을 그들 마음에 부활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의 신앙의 소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즉시 이행하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세심한 보살핌과 섬세한 인도하심과 약속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심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에 나타났다가 다른 시대에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돌봄에는 휴지 기간이 없습니다. 400년 후 여러 세대를 걸쳐 끊이지 않고 멈춤이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고 대대로 기억할 그의 칭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그 시대의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과거의 하나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의 하나님이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2:32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과거에 살던 인물이므로 “…의 하나님이었다(I was the God of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 하나님이다(I am the God of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묻히신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역사를 만들고 계십니다. 이 이름은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이고 대대로 기억해야 할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의 영원한 이름을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에 대한 소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6

16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대상인 장로들을 모으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달할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철저한 감시망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소수의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 조직을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는 민족이었으므로 살려면 자기들끼리 뭉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는 자기 형제들을 위로하고 서로 모여 그들의 애환을 달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우선 장로들에게 전할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우선 그들에게 그들에게 친숙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그들이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다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어떻게 학대를 받고 있는지 확실히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당하는 아픔을 같이 겪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의 고난을 같이 겪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바로 행동 개시를 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렸다가 이제는 때가 되어 행동에 옮기고자 하셨습니다. 모세가 할 일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한 학대를 외면하였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확실히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17

17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자 하십니다. 이제 그들이 모세의 메시지를 들을 때 고난의 끝이 다가왔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메시지를 들을 때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구원의 소식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땅의 이름을 열거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구체적인 땅의 이름을 들을 때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땅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이행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구체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희망을 갖게 해줄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가족들은 그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와서 정착하였고 그 사이 40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근이 있었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풍요로운 땅이지만 그 곳은 그들이 노예로 살고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괴롭게 하심으로 그 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흩으신 것입니다(신 32:11). 이는 그들이 바로의 노예로 살지 않고 자유인이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19:6).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섬길 때 그 땅 전체가 젖과 꿀의 강이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나온 본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8

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장로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배척의 아픔을 아시고 그가 구체적으로 할 말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지시하신 내용은 모세에게 매우 부담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장로들과 같이 애굽 왕을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내용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는데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이 말을 곧이 들을 리가 없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함으로 그들은 바로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은 물론 잡혀서 죽임을 당할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로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될 것입니다. 

모세와 장로들은 바로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모세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임하셨다”고 할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장로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대표이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들이 바로를 만날 때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다신교 국가에는 신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사람들이 믿는 신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바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와 장로들이 바로에게 그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 애굽에 알리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대로 장차 열 재앙을 통해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애굽인들이 “나를(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것입니다(6:7; 7:17; 8:22; 10:2; 14:4; 14:8).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시요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 역사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반면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요 지역의 신이나 어떤 영역을 주관하는 신으로 사람이 할당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수 없고 응답할 수 없으며 말하거나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이적을 행하심으로 그가 참 신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이 소문은 출애굽 후 가나안 지역까지 퍼져 그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그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수 2:10-11). 

모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바로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사흘김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가도록 허락하소서”라고 공손하게 말해야 합니다. ESV에서는 please let us go로 겸손한 요청이 두 곳이나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결코 부드러운 부탁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당당한 요구였습니다. 다만 그 당시의 관례대로 암시적이고 온화하고 억제되고 제한된 방식으로 요청했을 뿐입니다. 

사흘길 여행은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이주를 하겠다는 공식적인 독립선언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는 이집트를 떠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애굽에서 사흘길 떨어진 시내 산에서 그들이 율법을 받을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메시지는 모세가 앞으로 바로에게 끈질기게 요구할 메시지입니다(7:16; 8:1; 9:1, 9:13; 10:3). 바로는 나중에 그들의 끈질긴 요구에 멀리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도록 제의를 할 정도로 물러났습니다(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면서 사흘길 떨어진 광야에 가서 제사하겠다고 하면서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습니다(8:27). 이를 볼 때 모세와 장로의 제의는 아예 애굽을 떠나 이주하겠다는 완곡 표현입니다. 

바로는 그들을 억류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바로의 노예가 아니라 바로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는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눅 1:72).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을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진 폭군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다스림 아래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풍요로운 애굽에 살고 있었지만 바로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실 것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낮에는 뜨거운 곳이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로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몰아오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열을 막아주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거룩한 율법을 받고 율법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 노예 백성의 때를 벗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원수 사탄의 손에서 건지신 목적은 우리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눅 1:75). 사탄의 폭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출애굽기 3:19-20

19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억압한 애굽에게는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애굽 왕은 막대한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이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의 말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도 애굽 왕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손으로 애굽 왕과 애굽을 치실 것입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10번째 장자 재앙을 얻어 맞고 항복할 것입니다. 애굽 왕은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결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는 한 번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이로써 바로는 그의 완고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바로는 사탄의 끈질기 저항을 상징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놓아주지 않으려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집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와 같이 끈질기고 강한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한 번에 바로를 거꾸러뜨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열 번에 걸쳐 강한 손으로 바로를 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열 번에 걸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영광받고자 하십니다. 이를 듣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무시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나안 사람 기생 라합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영접했습니다(수 2:9-11). 그녀는 멸망할 민족에게 속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평판을 듣고 여호와를 그녀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바로는 “강한 자”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강하신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심으로 그는 굴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로 상징되는 사탄의 저항은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단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일타로 단번에 승리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이루었고 자신이 성실하게 노력하고 땀 흘렸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사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바로의 거절을 허용하십니다. 바로의 끈질긴 저항을 겪으면서 우리는 이를 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시시각각으로 체험하며 우리의 믿음은 내면화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 번에 애굽을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치심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이미 열 재앙을 내리고자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열 재앙은 각각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쉽게 꺽이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아무리 힘이 세고 끈질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바로의 싸움에서 승리는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 번에 애굽을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치심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이미 열 재앙을 내리고자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열 재앙은 각각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쉽게 꺽이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아무리 힘이 세고 끈질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바로의 싸움에서 승리는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3:21-22

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2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 것입니다. 은혜를 입히게 한다는 말은 좋은 것을 주어 호의를 베푼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간수의 은혜를 입었을 때 사용했던 표현입니다(창 39:21).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서 두 번 더 사용되었습니다(11:3; 12:36).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재앙을 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들에 대해 적대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그들의 귀중품과 의복과 물품을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싸워 약탈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입어 풍성하게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창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빈 손으로 광야로 가게 하셔서 그 곳에서 비참하게 살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몸만 빠져 나오도록 하지 않으시고 애굽 사람의 귀중한 것들을 갖고 나오도록 해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심지어 그들 자녀들을 꾸밀 정도의 물품을 얻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 도망자의 모습으로 누더기를 입고 무일푼으로 쫓겨나듯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애굽 사람들의 전적인 동의 하에 애굽을 나올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나라의 좋은 것을 입고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갈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수 세기 동안 압제와 학대를 받고 짓밟히면서 고된 노동을 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애굽은 여태까지 이스라엘의 노동력으로 부를 쌓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돌려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성함을 더하십니다. 애굽인들이 친절하고 관대해진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이리들이 어린 양처럼 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인간의 마음을 은밀한 영감에 의해 움직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 가지 표적을 보여주신 하나님(4:1-9)

출애굽기 4:1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지금까지 두 번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물음은 자신의 처지의 항변이었습니다(3:11). 그는 이미 40년 동안 도망자 신세로 광야의 외진 곳에서 비천한 목자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물음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볼 텐데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3:13). 즉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세 번째로 그의 걱정과 불안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모세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은 겸손의 반응이었지만 세 번째 반응은 그의 불안과 불신의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증거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하셨습니다(3:12).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하여 차지할 땅의 이름을 열거해 주셨습니다(3:17).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3:18).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불안을 씻어버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배척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마음의 상처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가만 놔둔다고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고 그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 상처는 다시 드러나게 되고 그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이 주신 확신과 격려의 말씀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는 40년간 광야에서의 은둔 생활로 인해 소심해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의 솔직한 심정을 말할 때 “보십시오(behold; KJV, ESV)”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말씀에도 “보세요”라고 말하며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좀 선을 넘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를 가혹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두려움과 불신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배척의 아픔과 불안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해하면서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물음표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의 응답에서 더욱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모세는 430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증거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야 믿고 따를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모세의 생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말의 권위를 뒷받침할 표징을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비범한 지도자로 세우신 것을 입증할만한 비범한 일을 요구할 것입니다. 모세는 비범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의 목격자이지만 장로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나타나신다는 물증을 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4:2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모세가 갖고 있는 물건은 끝이 굽은 지팡이였습니다. 보통 계급 사회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지휘봉의 역할을 하는 긴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이는 왕과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지휘봉이 아닌 양을 치기 위한 평범한 지팡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평범한 지팡이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쓰고자 하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나중에 “하나님의 지팡이”이가 됩니다(20). 이 지팡이는 기적을 성취하는 도구가 됩니다(7:11-12; 7:20; 8:17; 9:23; 10:13; 14:16). 그 지팡이는 애굽인들이 천하게 여겼던 직업인 목자의 지팡이였지만(창 46:34),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수천 개의 날카로운 칼보다 더 큰 공포를 불러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모세가 임의로 휘두를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만 작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칼처럼 기교를 이용하여 휘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지팡이는 대적에게는 해를 입히는 공격용 무기가 되고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도움과 보호의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이드로의 양을 치던 지팡이에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기 위한 목자의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채찍으로 이스라엘을 학대했지만 이제는 그 지팡이로 채찍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여호수아와 동행했던 제사장들은 “양각나팔(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trumpets of rams’ horns)”을 들고 있었고(수 6:8), 기드온의 용사들은 나팔과 항아리 속에 든 횃불을 갖고 있었습니다(삿 7:16). 삼손은 나귀의 턱뼈 를 갖고 있었고(삿 15:15), 다윗은 물매와 매끄러운 돌 다섯을 갖고 있었습니다(삼상 17:40).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고자 하실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셨습니다(마 14:17; 막 6:38; 눅 9:16; 요 6:9).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치고자 하실 때 진흙에 침을 뱉어 고치셨습니다(요 9:6). 이를 볼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창한 것을 준비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가 가진 것을 통해 일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진 것이 없어 그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바울이 갖고 있는 학식과 다니엘이 갖고 있었던 지혜와 여호수아가 갖고 있었던 용맹과 다윗이 갖고 있었던 싸움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나는 갖고 있는 것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내 주변에 있는 것,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것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의 사건을 잘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작은 재료로 오천 명을 먹이셨듯이 평범한 목자의 지팡이로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4:3-4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도록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해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자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겁에 질려 뱀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공포스러운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뱀은 목 부분을 잡아야 꼼짝 못합니다. 모세가 꼬리를 잡았다가 뱀에게 물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식을 뛰어넘어 모세가 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뱀의 꼬리를 잡자 그것이 지팡이로 변하였습니다. 모세는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순종을 배운 모세는 이제 앞으로 상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뱀은 바로의 왕관에 새겨져 있는 형상으로 애굽의 신성한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뱀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교활한 뱀의 유혹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직후 원시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와 원수 관계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실 것이지만 부활하셔서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죽음을 이기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가 순종해서 뱀의 꼬리를 잡자 지팡이가 된 것은 바로와 애굽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바로가 아무리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틀어 쥐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면 도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어떤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출애굽기 4:5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팡이의 기적은 모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백성들에게 모세를 부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서 나오는 불꽃 가운데 임하신 것만으로도 모세의 믿음을 확증하는데 충분했습니다. 

모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견고했겠지만 백성들의 반응에 대한 믿음은 불확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것과(3:12)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하여 차지할 땅의 이름을 말하면(3:17)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8).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긍정적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장로들이 초자연적인 이적 말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표적을 보고 믿기보다 그의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요 4:48; 20:29).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 14:10-11). 사도 요한은 일곱 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0:30-31).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의 말씀을 믿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필요한 기적으로 이루셔서 그의 나타나심을 확증하십니다. 

출애굽기 4:6-7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추가적으로 두 번째 표적을 보여주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하셔서 백성들이 믿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도로 지팡이가 되는 이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장로들이 조금이라도 미심쩍어하는 부분이 없도록 추가적인 표적을 보여주심으로 확실하게 해두고자 하셨습니다. 두 번째 표적은 손을 품에 넣으면 나병이 생겼다가 손을 다시 품에 넣으면 나병이 낫게 되는 표적이었습니. 

나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센병을 포함하여 모든 심각한 감염성 피부병을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감염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여 피부병이 번지는 것을 막게 하고자 철저한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했습니다(레 13-14장; 민 5:2-5).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에 나병이 낫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만이 나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병이 전염되어 눈처럼 희게 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것이 치료되어 낫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는 마치 나라가 하루에 생길 수 없으며 민족이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사 66:8). 나병이 순식간에 낫는 것은 순식간에 나병이 걸리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나병은 현대의 의술로도 이렇게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없습니다. 고대에 나병은 피부의 백혈병과도 같았습니다. 눈처럼 하얀 반점에 피부에 확대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의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시고 나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능히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세 또한 나병환자처럼 약한 자이지만 주님에 의해 소생되어 강해짐으로 능히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모세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부터 그에게 전가될 때 이루어집니다. 

나병의 즉각적인 발병과 치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그들이 이 추가적인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큰 재앙으로 그들을 멸하실 것이고, 믿으면 나병이 나음을 받는 것처럼 그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교만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 나병의 재앙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였다가  7일간 나병에 걸렸지만 모세의 기도로 나음을 받습니다(민 12:1-16). 유다 왕 웃시야는 대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였지만 그의 말년에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성전 분향을 왕이 직접 행하는 월권행위을 함으로 나병에 걸려 격리 조치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통치하였습니다(왕하 15:3-5; 대하 26:16-23). 

출애굽기 4:8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첫 번째 기적은 뱀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마술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은 애굽의 마술사들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잡하고 의심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많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하였습니다(요 20:25). 예수님은 의런 의심 많은 도마를 위해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하나님은 의심 많은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켜 주시고자 나병의 기적을 보여주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의심까지도 용납하시고 확실한 믿음을 갖기까지 인내하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9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준비하신 기적은 나일 강물을 피로 만드는 기적이었습니다. 이는 애굽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의 예표였습니다(7:14-24). 이는 모세와 장로들 뿐 아니라 애굽을 겨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은 평범한 도구가 징벌하고 멸망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긴 두 번째 기적은 모세의 연약한 손으로 애굽을 징벌하시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의 손이 즉각적으로 나음을 받은 것은 그의 손에 구원이 달려 있음을 말해 줍니다. 물이 피로 변하는 세 번째 기적은 애굽의 번영과 평화가 고통과 유혈로 변할 것을 암시합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풍부한 생명의 젖줄이 피로 변하여 비옥한 땅이 메마르고 황량한 곳으로 변하게 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 피로 변한 강물은 무고한 아기들의 피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의미합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나일 강의 신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연약함을 도우신 하나님(4:10-17)

출애굽기 4:10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첫 번째 대답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였습니다(3:11). 이는 의례적이고 예의 바른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3:13). 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대답은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 설 때 그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의 말이었습니다(4:1). 모세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증거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의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모세와 장로들이 확신하게 될 충분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를 바라보고 장로들에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자신의 무능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나친 겸손은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낼 뿐이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불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의 네 번째 대답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11, 14). 그는 말을 잘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그는 예전에 달변가였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고 말했습니다(행 7:22). 모세는 애굽의 왕자들이 받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동족의 편에 서고자 할 때 스스로 동족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은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간 광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는 대화할 사람이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하루종일 말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는 그의 모국어인 애굽 말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와서 모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불신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모세의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모세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적인 조건을 다 따지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조건을 다 갖추어도 뒤로 물러서고자 하면 수만 가지의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편을 이해하시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접하지 않고 물러서고자 하는 그의 자세를 문제 삼고 계신 것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을 보면 그가 언어적 결함이 있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신명기에서 백성들에게 한 방대한 분량의 연설을 보면 그가 달변가임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모세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의 공주를 통해 궁중에서 자라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를 구원 역사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 그를 나일 강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40년 간의 애굽의 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서 백성을 설득시킬 능력이 필요함을 아셨고 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모세오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해 그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40년 간의 광야생활로 그의 이런 능력이 감추어지고 녹슬어 있을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능력을 꺼내시고 녹슨 부분을 닦아 빛을 내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표현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slow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이는 말이 느리고 잘 나오지 안나온다는 뜻입니다. 설득력 있는 설교는 말을 유창하게 하고 빨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확신이 충만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과 감동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사 49:3-4). 

출애굽기 4:11-12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모세는 자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 못하는 자”, “못 듣는 자”, “눈 밝은 자”, “맹인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 이런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불만 섞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불행의 근원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말하고 말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말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은 더 이상 모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권위로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가라”라고 무작정 명령만 하지 않으시고 그가 전하는 말의 권위를 부여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의 물 위를 걷고자 했을 때 그의 눈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불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그는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약점이든, 우리의 강점이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히 12:2).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도 쓰셔서 강하게 하시고 그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입술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이나 입술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로 쓰십니다. 다니엘은 그가 환상을 보았을 때 인자와 같은 이가 그의 입술을 만지므로 그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단 10:16).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습 3:9). 시편 기자는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였고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라고 그의 마음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시 51:15). 

입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은 신약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 집사는 입을 열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7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8:35).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구하기를 부탁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말씀을 주사 그의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엡 6:19). 하나님은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각 나라에서 온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각 나라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하게 하셨습니다(행 2장). 사도들이 그들 나라의 외국어를 알아서 그 나라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의 입을 주장하셔서 그들의 말로 복음을 전하는 기적을 베푼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 놀라 어리둥절하였고 이를 인간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행 2:13).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용기가 없어서입니다. 모세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왕에게 나서는 것이 몹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 때문에 발을 빼려는 그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더불어 강한 확신을 불어 넣으시며 약속하십니다.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애굽기 4:13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이제 가라” 하시는 주님의 엄중한 명령을 듣고도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명령을 회피하였습니다. 모세는 단호한 어조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NIV를 보면 “Pardon your servant, Lord. Please send someone else.”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주여, 종을 용서하옵소서. 부탁하옵나니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주 특이한 경우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이처럼 직접적으로 거부한 사례는 요나 외에는 없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하였습니다(욘 1:3). 요나는 이로 인해 풍랑을 만나 큰 물고기에게 먹히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하자 하나님은 이에 크게 진노하셨습니다(14). 

모세는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무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큰 일을 벌이고 싶지 않은 그의 속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냥 조용히 미디안 땅에서 그의 나머지 인생을 보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는 고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연약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크기와 중대성에 비하면 자기는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심으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고전 1:27-29). 

출애굽기 4:14-16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모세가 아무리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반응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그를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하셨다고 짧게 언급하고 더 이상의 결과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모세에게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여 형 아론에게 그 권한이 위임되거나 그에게 나병과 같은 질병이 생기게 하거나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죽거나 병들게 하는 진노의 결과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세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책망의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불신에 대해 책망하심으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엉뚱한 행동을 한다고 그들에게 벌을 주거나 그들을 내치거나 그의 역사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진노하셨지만 바로 형 아론을 붙여 주심으로 그의 연약함을 보완해 주셨습니다. 아론을 붙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에 기초한 책망의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그의 형 아론을 모세의 대변인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3년 먼저 태어났습니다(7:7). 본문에는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처럼 레위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 반면, 아론은 제사장의 우두머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이 모세를 기쁨으로 환영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산이 있는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도록 하셨습니다(4:27). 그들은 80년 간 이산 가족으로 살다가 처음으로 만남으로 기쁨과 감격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그 사이 메시지를 주고 받았겠지만 얼굴을 직접 보며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을 처음이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이 될 것입니다. 아론은 애굽 생활에 친숙했으므로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는 것은 아주 익숙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론이 이집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아론이 그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모세를 대신해 말할 대변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결정권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이 이를 종합하여 간결하고도 설득력 있게 공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의 입에서 나간 말에 권위를 줄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간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리자가 하는 말은 신적 권위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리자는 자기 말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는 자기 말에 신적 권위를 가졌다고 해서 마음이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여 자기의 영광을 취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즉시 신적 권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는 그의 설교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어떤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성경적 근거와 균형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17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지팡이는 필수적인 개인 물품이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였을 때 그는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다”고 말했습니다(창 32:10). 이를 볼 때 먼 여행을 할 때 지팡이는 필수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실 때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며 여행에 필요한 물품으로 지팡이와 배낭, 양식과 돈과 두 벌 옷을 언급하시며 이런 것도 가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눅 9:3). 

또한 지팡이는 개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자손을 잇기 위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이때 유다에게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품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요구하였습니다(창 38: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지휘관들에게도 그들의 이름을 지팡이에 새겨 하나씩 그들에게 주었습니다(민 17:2, 6). 이는 지휘관들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또한 지팡이는 들짐승들을 퇴치하는 무기나 가축을 통제하거나 물건을 조작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지팡이 끝으로 벌집의 꿀을 찍어 꿀을 맛보았습니다(삼상 14:27). 다윗도 골리앗과 싸우기 위한 도구로 물매돌을 시내에서 구할 때 막대기(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삼상 17:40). 

왕에게 지팡이는 통치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유다에게서 통치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을 것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대로 유다 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창 49:10). 

모세가 든 지팡이는 평범한 생활의 필수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 수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니 피가 되었고(7:17), 여러 가지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7:11-12; 7:20; 8:17; 9:23; 10:13). 모세는 홍해의 기적을 행할 때 이 지팡이를 사용했고(14:16), 반석에서 샘물을 내게 하는 기적을 행할 때도 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17:5-6). 지팡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셨고 그를 통해 구원과 심판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20). 

애굽으로 돌아간 모세(4:18-31)

출애굽기 4:18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모세는 시내 산이 있는 광야에서 미디안으로 돌아와서 장인 이드로에게 공식적으로 애굽으로 떠나겠다고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는 장인의 승인과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는 애굽에 가는 목적을 그의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난지 40년이 흘렀고 모세는 그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내 형제들”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는 그의 형 아론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는 주된 동기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장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말했을 경우, 장인의 만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과 이스라엘을 향하신 그의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비밀과 계획을 아무에게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막 8:30).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눅 8:56). 예수님은 두 맹인의 눈을 고쳐주시고는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마 9:30).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행로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불필요한 소문을 만들거나 그의 일을 일부러 세상에 알리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초막절 명절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라는 그의 형제의 말을 듣지 않고 조용히 명절 중간에 올라가셨습니다(요 7:4, 10). 

이드로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출애굽의 사명을 다한 후에야 모세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18:1).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하면서 모세를 보내주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가족이 떠나는 것이 아까웠을 것입니다. 그의 딸과 손자들을 멀리 떠나 보내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그의 가족을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사히 애굽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원했습니다. 

출애굽기 4:19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거취문제를 이른 후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바로가 죽은 소식은 모세가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데 무거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한 소식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분노로 40년을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바로를 40년의 인생을 낭비하게 한 원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으므로 그의 목숨의 위험은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새로 바로가 된 왕은 모세의 귀환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 고대 세계에서도 새 정부가 구성되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중범죄인이 아니면 사면을 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새로 집권한 왕은 권력을 그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 집권한 바로가 모세와 바로를 만나준 것을 보면(5:1)  40년 전의 일은 기억에 없거나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몰래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4:20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가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간 것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잠시 동안만 행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자기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40년간 궁중에서 교육을 받고 곱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성하면서 히브리인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애굽의 왕자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인가 깊이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애굽의 감독관에서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정의감에 불타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을 것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젊은 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살인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이런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행하였다고 생각했고, 그는 스스로 히브리인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해서 다투고 있는 동족을 말리면서 가르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애굽에서 쫓겨나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훈련하셔서 그를 준비시키신 후 이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증거는 모세에 손에 쥔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서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지도자로 산다는 것은 숱한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백성들로부터 온갖 원망과 불평을 들어야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먹을 것과 물이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생존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세우심을 입어 출애굽의 지도자가 된 것은 영광의 직분인 동시에 고난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노예 근성에 찌든 백성들을 섬기느라 그의 인생을 다 바쳤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들어가는 이 순간부터 이제 고난과 영광의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4:21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할 것인데 그것은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는 기적(7:9)과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7:20-21)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인 건강한 손이 품에 들어갔다 내밀면 나병이 들고 다시 품에 넣었다 빼면 나병이 낫는 이적을 행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물론 모세는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하기 전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 앞에서 이 이적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4:31). 

하나님은 바로가 모세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그의 마음을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가 완악하게 굴어도 당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로의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동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져나감으로 경제적 붕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하층 계급 구조를 구성하고 있어 대부분의 대형 건축사업이나 농사일 등에 동원되어 거대한 애굽을 떠받치는 애굽 경제의 주축이었습니다. 바로에게 이런 경제적 이득은 하나님께서 열 재앙으로 내리심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의 다른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입니다. 성경은 경제적 측면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하며 주권적 측면에서 기록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10번이 나옵니다(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17, 21). 

우리는 “하나님께서 꼭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은 악한 마음을 변화시켜서 부드럽게 하시고 선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게 하시지 왜 악하게 하셨는가?”라고 하며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악하게 하시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의 창시자가 되시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주권자가 되어 하나님의 주권적 행하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될 경우 끊임 없는 의심과 불신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될 경우 모든 불합리와 모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세상 역사의 주권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셨고 왜 이런 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느냐 반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대하고 높은 구속의 경륜을 깊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기록된 말씀 외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 즉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비로운 하늘의 일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가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요 3:12). 

사도 바울은 이를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롬 9:19-24).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으로 하나는 아름답고 예술적인 도자기를 만들 수 있고 하나는 일상생활에 천하게 쓸 용도로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롬 9:20). 그것은 지으신 자에게 속한 주권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악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그의 악한 생각에 내어주셨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더 완악하게 하셔서 악을 사용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언약 백성에게는 구원이지만, 애굽에게는 심판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의 성취이지만, 가나안 백성에게는 계획되어 있었던 심판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대한 심판을 미루신 것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아 그들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시고 인내하신 것입니다(창 15:16). 

하나님께서 심판을 이행하실 때 그의 공의의 성품에 따라 이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애굽에 내릴 열 재앙은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더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대적자이고 악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더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악을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에 “더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더불어 반복되어 나오는 표현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라는 표현입니다(6:7; 7:5,17; 8:22; 10:2; 14:4,18; 31:13). 하나님은 바로의 악을 사용하셔서 그의 영광을 이스라엘과 애굽과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알리려 하셨습니다. “더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표현으로 우리는 모든 현상을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22-23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친밀하고 부드러운 보호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맏아들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십니다. 맏아들은 상속자로 이스라엘은 그들이 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소유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출 9:6). 

그러나 이스라엘은 현재 바로의 속박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바로가 놓아주어야 하는데 바로는 완악하여 끈질기게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 ‘더 강한 자’가 와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탄의 권세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강한 권세를 무너뜨릴 더 강한 권세가 필요합니다. 

구원은 강한 원수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원수는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맏아들로 삼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의 장자를 죽이고자 하십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장자를 죽이는 것은 원수에 대한 결정적인 한 방입니다. 하나님께서 열 재앙으로 애굽을 치실 때 앞의 아홉 재앙은 바로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권투의 잽과 같은 것입니다. 원수는 잽을 맞고 상당한 타격을 입은 후 장자 재앙으로 KO패를 당할 것입니다. 장자를 죽이지 않고는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줄 리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접한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믿음으로 자녀, 즉 상속자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값없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은 원수의 장자를 물리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종의 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마귀의 최종 권세인 죽음을 파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4:24-26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모세와 그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가는 도중 한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셔서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이를 보고 놀라서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이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 주셨습니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것입니다. 

4:24-26절의 해석은 성경의 난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전후관계를 살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의문을 해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마다 다 다릅니다. 여기서 아들은 첫째 아들 게르솜이 아닌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모세가 언제 할례를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미디안에 와서 할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로 이스라엘의 관습대로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면 할례의 고통으로 그 부모가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아기 모세를 숨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공주가 모세를 갈대 숲에서 발견했을 때 히브리 아이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아기 모세에게 할례의 표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견해 중에서 후자가 더 타당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지만 애굽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워 주셨으리고 믿습니다. 모세는 첫째 아들 게르솜이 태어났을 때 그가 받았던 것처럼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엘리에셀은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나서 얻은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바로 할례를 행해야 했으나 애굽으로 여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모세가 여행 중이라 할례를 미루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숙소에 머물면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십보라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로 할례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죽음에 처하게 된 위기상황에서 십보라가 급하게 할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할례를 행한 도구는 돌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시대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실 때 하나님이 지정하신 도구였습니다(수 5:2). 돌칼은 flint knife로 부싯돌로 만든 칼입니다. 이 돌은 쇠보다 더 예리하며 독성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십보라는 급하게 아들의 할례를 직접 행함으로 남편을 위기 가운데에서 구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포피를 모세의 발에 갖대 대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때문에 할례를 행하였다고 하여 남편을 “피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면서까지 할례를 중요시 여겼을까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 죽이려 하셨다는 것은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이는 3:8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 데려가려 하노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내려가다”, “건져내다”, “인도하다”, “데려가다”라는 표현이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다는 것도 이와 같은 형식의 표현법입니다. 

“만나서 죽이려 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할례 문제를 매우 중요하고 심각하게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시면서 경고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 하나님은 할례가 언약 백성의 표식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언약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수여자, 이스라엘의 구원자,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할 모세의 집에서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여행 중이니 할례를 좀 미루자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하나님과 언약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 아들이 있는 가장을 자기 민족의 지도자로 인정할까요? 디모데전서 3:5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숙소, 즉 여관은 여행 중이라도 임시적으로 머물 수 있는 장소로 얼마든지 할례를 행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할례 문제를 통해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할례를 직접 행한 십보라에게 이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피 남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녀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이방인인 자신이 언약 백성에 편입되었음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언약 백성은 혈통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실 때 그 대상이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라고 하시면서 그 집에 속한 모든 자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창 17:13). 십보라는 미디안 족속으로 이방 여인이었지만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남편을 구하고 자신은 언약 백성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피로 남편을 새롭게 얻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식으로 언약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4:27-28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출애굽기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와 애굽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이의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27절은 하나님께서 아론을 부르신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역사에 모세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론도 부르셨습니다. 출애굽 역사에서 아론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봉사하는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고 모세의 동역자로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금송아지 사건과 같은 허물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여기서 광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시내 산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형제의 상봉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극적인 효과를 더해줍니다. 마치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남으로 형제의 갈등이 봉합되고 화해했던 것과 같이 모세와 아론의 만남으로 모세를 배척한 자기 동족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암시합니다. 

아론은 그가 3-4세 때 그의 동생을 본 적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 때의 기억이 흐릿했거나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생이 바로의 엄한 명령으로 나일 강의 갈대가 많은 곳에 버려진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어머니가 그의 동생의 유모로 바로의 궁중에 드나들며 모세를 젖먹여 키웠다는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 모든 특권과 부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언젠가 그와 공식적으로 상봉할 날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부모와 함께 마음 아파했고 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론이 미디안에 있는 모세와 기별을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생사 여부는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율법을 받을 거룩한 땅인 시내 산이 있는 광야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고 서로 입맞춤으로 새로운 협력의 역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극적인 상봉을 한 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렸습니다. 이 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를 볼 때 공식적으로 출애굽의 지도자가 모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으로 모세를 조력하는 자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은 모세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각 사람마다 다르고 맡은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주신 사명은 모세의 말을 잘 옮겨 백성들에게 말하는 사명입니다. 아론의 사명은 모세와 백성과의 고리 역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깊은 관계성이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는 서먹서먹한 사이입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40년 전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40년 간 광야에서 지낸 모세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몹시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또 다시 그들의 배척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아론은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세를 대신하여 고리 역할을 할 사명이 있습니다. 

아론은 누구보다 애굽 생활에 잘 적응되어 있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도 지도자로 신망이 두터운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론은 모세가 동생이라고 자기가 주도해서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생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동생의 말을 잘 듣고 동생을 세워주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각기 맡은 바 사명과 역할이 다 다릅니다. 자기 권한을 벗어나서 높은 데 거하기를 추구할 때 교회 내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자기의 위치와 역할을 알고 그 직분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출애굽기 4:29-30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모세와 아론이 상봉한 후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장로들을 소집하는데 아론의 역할이 컸습니다. 아론도 이스라엘의 장로로서 아마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모세는 소문은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장로들이 모인 것을 보면 그들만의 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고자 그들끼리 뭉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중심으로 서로 뭉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애썼을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일을 뒷받침할 만한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세 가지 이적 중 두 가지만 보아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킨 이적과 손을 품 안에 넣어 나병이 발하게 하고 다시 손을 품에 넣어 나병을 낫게 하는 이적,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설득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이 피로 변하는 세 번째 이적은 그들이 믿기를 거부할 경우에 대비한 예비적인 이적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의외로 반갑게 모세를 영접하였을 것이고 세 번째 이적은 바로와 애굽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미루어졌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모세가 행한 기적을 보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 장로들은 이 사실을 그들의 지파에게 전함으로 백성이 믿게 되었습니다. 만일 40년 전이었더라면 백성들이 모세가 전한 말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40년 전 그들은 모세의 선한 의도를 왜곡했고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이 없는 고난과 학대 속에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더 간절히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욱더 심해진 학대와 장기간의 고난으로 이제는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흩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풍요로운 애굽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잊고 살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히 12:11).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들었고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경배했다는 것은 worship으로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보내 주시고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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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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