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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애굽기 5:1-11: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 앞에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선포합니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에 코웃음을 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노역을 더 엄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목적을 밝히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선포하실 때마다 따라 붙는 메시지였습니다. 애굽은 선진국으로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반면에 그들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작은 민족의 신으로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애굽에 대해 심판을 내리십니다. 

애굽에 대한 심판은 곧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그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재앙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이스라엘을 내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바로의 끈질긴 저항은 인류를 사로 잡고 있는 죄와 죽음 강한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강한 손을 펴서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심으로 바로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메시지를 각인시키셨습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5:1-3)

출애굽기 5:1

5장에서 모세와 바로와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바로는 자신을 태양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므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로 행동을 합니다. 바로의 저항은 그가 열 번째 재앙인 장자 재앙을 당할 때까지 거세고 끈질겼습니다. 그의 저항은 재앙이 세지고 심해져도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재앙이 진행될수록 이스라엘에게 더 가혹한 압제를 가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전반부는 바로와의 전쟁의 구조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전쟁의 구도를 형성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을 바로와 같이 끈질긴 사탄의 권세와의 영적인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끈질긴 기도의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이런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입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사람의 영혼을 붙들고 억압하고 있는 사탄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기도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남은 자, 즉 그의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기도로 사탄의 세력과 맞써 싸우도록 명하십니다. 우리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진리의 허리 띠와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과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이것들은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여기에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공격 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영적 전쟁을 치를 것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도록 권면합니다(엡 6:11-18). 

“그 후에”라는 말은 다음 사건으로 진행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바로와의 첫 만남이 있기 전의 상황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만나기 힘든 바로를 만났는가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억압을 받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군주를 접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 애굽 제국의 왕에게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 당사국의 지도자들이 전쟁에 앞서 만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만나자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했습니다. 바로는 2절에서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고 반응하는 것을 보면 바로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은 생소하였였을 것이고 그는 여호와를 이스라엘 민족의 작은 신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애굽은 다신교 국가로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그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또한 노예 백성의 신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게는가 하며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부드럽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도록 말했습니다. 이 선포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데 특별한 절기가 있으니 광야로 가서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구적으로 애굽을 떠나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는 독립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바로의 절대 권력에 대한 도전이고 애굽 왕국 내의 소수 민족의 반란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처음부터 바로에게 정면 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을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내 백성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아끼시고 공급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백성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바로에게는 노예 백성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보배롭고 존귀한”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입니다(사 43:4).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들이고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들로 여호와께서 지으셨고 여호와께서 만드신 자들입니다(사 43:7).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백성을 내보내도록 요구하면서 그 요구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히브리 원어로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축제를 즐기다’는 뜻으로 순례를 동반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의 3대 명절이 있는데, 이 때 각지에 흩어졌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순례 여행을 합니다. 광야로 절기를 지키러 간다는 것은 그들이 거룩한 산 시내 산이 있는 광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율법을 전수 받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에게 이 말은 허무맹랑한 핑계거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기 5:2

바로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냉소적이었습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냐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깍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아도 여호와는 히브리인들의 신으로 그들의 신들과 비교하여 아주 깔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태양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였고 애굽의 번영과 영광이 자기 때문에 이룬 것이라고 과신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설령 도전한다고 해도 그가 늘 승리하리라 자신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를 찾아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는 그들의 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명령에 순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으며 하늘에서도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다고 착각했습니다. 

이런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완고함은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장자 재앙이 임하기 전까지 연속적으로 임한 아홉 재앙은 그의 영의 교만과 오만을 꺽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그의 뉘우침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의 완고함은 재앙의 풀무불에 빠져나오는 순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자 재앙으로 완전히 굴복했지만 살만해지자 다시 오만함이 도져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그의 오만함은 갈라진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는 이스라엘을 보자 더욱 충동질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건너는 바다를 자기가 못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히 11:29). 

시편 10:4-6에서는 교만한 자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바로의 교만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본다고 해서 낮아지지 않으며 열 재앙을 통해 드러난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되어도 대적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완고함을 더 완고하게 하셔서 여호와의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려 하십니다. 

출애굽기 5:3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완강한 거절에 간청의 방식으로 다시 한 번 5:1의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였지만 3절에서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고 하며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이에 쉽게 풀어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바꾸어 말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는데, 두 번째 간청에서는 그 광야가 어느 정도 떨어졌는지 알게 하기 위해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절기를 지킬 것이니이다”라는 표현을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라고 바꾸어 표현하였습니다. 제사는 영어로 sacrifice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동물 중 애굽 사람들이 숭배하는 송아지가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특정한 외모의 소를 아피스(Apis)라고 부르며 태양신의 현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송아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면 이는 애굽 사람들이 혐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느라 그들의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마음껏 그들의 하나님을 섬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만일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그들을 치실까 두려워한다고 전했습니다. 전염병은 죽음의 역병으로 이 재앙이 임할 때 상당수의 인구가 죽었습니다. 칼은 전쟁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민족들을 통해 죽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은 열 재앙을 의미하며 칼은 애굽 사람들이 홍해에서 수장된 것을 상징합니다. 전염병과 칼은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모든 다양한 재앙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진지한 것이고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닌 필수적인 의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그 재앙의 대상이 애굽 사람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상당히 부드럽고 완화된 방식으로 바로의 허락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 애굽으로 돌아오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서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는 본래의 의도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약한 강도로 말하고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숨긴 것은 사소한 간청도 들어주지 않는 바로의 완고함을 시험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는 말은 바로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그 재앙이 바로에게 임한다는 협박의 암시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로의 저항(5:4-9)

출애굽기 5:4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 의한 조직된 저항 운동이 있음을 감지하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영향력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저항정신을 갖게 되었음을 인지했습니다. 그들의 강제 노역의 생산성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는 이들로 인해 애굽의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에게 모세와 아론은 반란의 주모자였습니다. 

그는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였고, 강제 노동으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으며, 그들 가운데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게 감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모세와 아론이 갑자기 나타나 백성들의 무지를 일깨우고 그들의 민족혼을 불어넣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줌으로 자유의 가치를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히브리인들의 노역을 쉬게 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습니다. 바로는 그들에 대한 통제가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 할당된 일이나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출애굽기 5:5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적 증가에 대해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가 애굽 사람들보다 많아짐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나라가 넘어갈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임자는 그들의 인구를 억제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억압하면 할수록 그 수가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그들은 한 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강에 갖다 버리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가장 억압적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전임자의 살해 명령은 그래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애굽 정부의 목적은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불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로는 어느 정도 인구가 통제가 되자 남아 학살 명령은 중지시켰던 것 같습니다. 바로는 노예 백성의 인구가 줄면 경제적으로 손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수가 어느 정도 많은 것은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진다면 바로에게 큰 이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와 아론이 나타나서 광야로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구가 광야로 나아가 노역을 쉰다면 애굽 경제에 미칠 파급 효과는 치명적입니다. 바로는 그들의 수가 애굽인들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였지만 막상 위협의 존재들이 빠져나간다고 하니 나라의 경제가 무너질 것 같아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출애굽기 5:6-9

 바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진 것을 깨닫고 더 강력한 통제와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를 찾아와 요구한 바로 그 날에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감독들은 taskmaster(감독)로 노예를 전체적으로 감독하는 관리들이고, 기록원들은 foreman(십장, 현장 주임)으로 감독 밑에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노예들을 직접 부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조롭게 일이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등장하자 이스라엘 사회에 심상치 않는 분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고 요구 조건이 늘어갔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등장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당된 양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집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도록 했습니다. 짚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 때 진흙 속에 짚을 넣어 벽돌이 쉽게 깨지지 않고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짚을 주지 않으면서 전과 같이 같은 분량의 벽돌을 만들어 내라는 말도 안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여 벽돌을 만들었습니다(12). 그들은 또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배 이상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등장으로 그들의 고통은 더 가중되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졌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생겨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바로의 메시지를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속이는 말, 기만하는 말, 헛된 말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는 그들이 그 동안 해왔던 대로 하기를 바랐으며 다른 헛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러 가야겠다는 헛된 말에 현혹된 벌로 육체적 한계를 넘는 노동량을 감당해야 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탐욕에 사로잡힌 고용주들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게으른 소리’나 ‘거짓말’로 치부합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육체적 한계와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생산량을 얻고자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짚을 주지도 않고 좋은 벽돌이 나오기를 바라는 바로처럼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고 안전을 위한 장치에 투자하지 않고 무리한 생산량을 독촉함으로 산업 재해를 입거나 사망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용주라면 일하는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고 그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생산성이 더욱 향상되고 더 좋은 질의 제품이 생산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게으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로와 다를 바 없습니다. 

더 거세진 학대(5:10-6:1)

출애굽기 5:10-14

백성의 감독과 기록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짚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들에게 할당된 분량은 반드시 채우도록 독촉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의 목적은 그들을 학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였습니다. 짚은 비교적 길고 질긴 식물의 줄기이지만 그루터기는 수확 후 식물의 짧고 약한 남은 줄기입니다. 그들이 짚이 아닌 그루터기로 벽돌을 만들면 질이 안좋은 것을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감독과 기록원들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구타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때나 곡초 그루터기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후에나 들판에서나 곡초 그루터기를 구할 수 있었기에 한정된 기간에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반면 진흙 벽돌을 생산하는 것은 연중 항상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바로가 백성의 감독자들과 기록원들에게 짚을 제공하지 말라는 명령은 불가능한 일을 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은 벽돌용 짚을 저장하고도 내주지 않음으로 일부러 그들을 괴롭히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짚을 구할 수 없었고 곡식 그루터기라도 구하느라 목표량의 벽돌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면서 다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감독들과 일하는 자기 동족 사이에서 난감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요구받은 일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따졌지만 감독들로부터 몽둥이나 채찍을 맞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할 수 없이 자기 동족들을 압박해서 노동을 시켰지만 한계에 다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5:15-19

이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바로에게 직접 가서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아무도 그 일을 행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매를 맞으니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입니다. 원래 벌을 받는 것은 잘못해서 받는 것인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벌을 받으니 그 벌을 주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따졌습니다. 

이에 바로는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게으름으로 취급했습니다. 바로는 그들이 기계처럼 일하기를 바랐습니다. 독재자는 백성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생각하면 사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게 되고 다스리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따지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그런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정신 세계까지 지배하기를 바랐습니다. 바로는 종교나 문화 생활, 민족적 전통이나 관습을 지키는 것조차 규제했습니다. 독재자는 정신적 자유까지 빼앗아 통제하고 쇠뇌시켜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강제합니다. 그것을 거스리는 것은 모두 ‘게으름’으로 치부합니다. 

우리나라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군사독재 시절로 이어지면서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강조하면서 부정적인 용어로 왜곡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정의할 때 ‘근로자’는 주체성 없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고, ‘노동자’는 주체성 있게 서로 소통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라고 말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 여긴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한 미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용자의 관점에서 요구된다면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경시하는 일이 되고 그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를 ‘게으름’으로 여기고 여러 가지로 부당한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5:18-21

바로는 이스라엘의 자손의 기록원들의 호소를 냉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바로는 그 입으로 스스로 부당한 요구를 반복합니다. 이는 돈을 주지 않으면서 물건을 사오라고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공직 사회나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이런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받은 직원들은 생존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쳐가면서 무리하게 영업활동을 합니다. 바로는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고 자기의 말이 곧 법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신이라고 여기고 그의 말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시행되어야 한다는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뿐입니다. 

기록한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로가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바로를 떠나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모세를 만나 말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기서 “미운 물건이 되게 하였다”는 것은 원어로 ‘악취가 나게 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그들을 악취나는 나쁜 인상을 주어 미움을 받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의 미움거리가 된 원인을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칼을 주어 자신들을 죽이게 하였다고 원망했습니다. 칼을 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죽일 핑계거리나 명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처럼 괜히 바로를 자극하여 그들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변화를 바라지 않고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 그대로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변화를 바라지 않고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그들은 비록 노예이지만 풍요로운 고센 땅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와서 헛된 소망을 제시하더니 백성들의 마음을 현혹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 말하면 당장 애굽 땅을 나와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제시한 자유는 커녕 더 큰 억압을 받게 되자 그들은 즉시 원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자 할 때 항상 장애물에 부딪히고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도전에 따른 저항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도전과 그에 따른 저항을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소망이 없이 자기가 있는 그 곳에 주저 앉아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역사를 창조해가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며 모세와 아론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징벌하실 것을 소원하는 저주의 말을 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로 그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이런 식으로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살피다”는 말은 위에서 굽어 보시는 것을 말하고 “판단하다”는 말을 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판장이 재판석 위에서 면밀히 살피고 굽어 보아 그들의 잘못을 찾아 유죄 판결을 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같은 동족끼리 분열하여 대적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사탄으로 상징되는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 간의 불화를 조성해서 갈라치기함으로 일시적으로 그의 전략이 성공하는듯 보였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이처럼 믿음의 공동체 내의 불화를 조성하고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사탄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불화의 원인이 되는 원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5:22

“모세가 여호와께로 돌아갔다”라는 말은 return(쉰바브벳)으로 그가 어떤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분노한 감독들과의 만남의 현장을 떠나 하나님께 돌이켰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이라는 말에서 ‘돌이키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낙심을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로 쏟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원망을 들으면 자기를 변명하거나 같이 언쟁을 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원망하는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 내어 책망하기 쉽습니다. 지도자가 갖고 있는 우월적 권세로 복종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원망의 현장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이켰습니다(returned). 하나님의 사람은 문제를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돌이키며’ 하나님께로부터 답을 구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불평하였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그의 불평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보내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렸고 모세는 그 원인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다”고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도 백성들이 생각한 것처럼 일이 수월하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 첫 도전에서 쓴 잔을 마시자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가 쉽게 보내주지 않을 것을 미리 말씀하셨지만(4:21, 23), 막상 거절을 당하자 낙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뜻을 내세워서 바로에게 간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주의 말씀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로로부터 그들을 놓아주겠다는 답이 와야 하는데 오히려 더 잔인한 학대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셨고, 그들의 고난이 조금도 경감되기는 커녕 도리어 더 심해졌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곧 시작하실 것을 바랐고 그 결과 조금이라도 바로가 물러나는 기미가 보여야 했는데 결과는 그들에게 더 많은 일이 주어졌고 그들의 짐은 더 무거워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보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특히 그가 견디기 힘든 것은 자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 말도 안되는 잔인한 보복을 당한 것을 보고는 더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백성이 보복당하는 것을 보고 자책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부르심을 좇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상황이 생각과 반대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회의를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겪은 회의와 절망은 그가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그는 이 난관을 극복함으로 더 단단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은 열 재앙을 내리신 후 일어났고 그 후에도 그들은 홍해에 가로막혔고 광야에서는 먹는 문제와 물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약속의 땅으로의 인도하심은 그들이 광야에서 한 세대를 지나서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기가 때때로 우리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여러 고난을 거친 후에야 영광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겪을 때 문제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자세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바꾸어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약속을 상기시키시는 하나님(6:1-13)

출애굽기 6:1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 더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하나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불평을 들으셨습니다. 바로의 거절에다 백성들의 원망과 더 가중된 백성들의 고통을 들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심정을 아뢰는 것도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형식으로 하소연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꾸짖지 않으시고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이 답답하면 아무나 붙들고 자기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들어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또 그런 하소연을 부담스러워하고 좀 들어주다가 화를 내던가 피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하소연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다시금 약속을 상기시키고 확신과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모세는 그가 말씀대로 했는데 그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평을 그의 응답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바로에게 하시는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바로의 거절과 위협은 이제 구원의 흐름의 그래프가 바닥을 친 것이고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한 손이 바로와 애굽을 침으로 구원의 속도의 그래프가 급상승할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의심이 멈출 것입니다. 

1절에서 “강한 손으로”라는 말이 2회 반복되어 나옵니다. 바로의 권세는 강하기 때문에 노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치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바로를 치면 바로는 허락이 아니라 내쫒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얻어 맞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사흘만 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방할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었다가 애굽이 완전히 파멸될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바로는 모세를 불러 “속히 내보내려” 하였고,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게 하여 내보냈습니다(출 12:31-36).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6:2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번째 나타난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실 때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시며, 이어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3:14-15).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4-5절과 연관지어 볼 때 언약의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아브라함 훨씬 이전 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 가인에 의해 순교를 당한 의인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허락하여 주셨는데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공적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창 4:26). 믿음의 조상들도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여호와라고 소개하셨습니다(창 13:4; 15:2; 15:7; 18:19; 21:33; 26:25; 28:13; 28:21 등). 믿음의 조상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은 약속과 관련되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전능의 하나님”은 ‘엘 샤다이’(the Amighty God)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이스마엘에 만족하던 그에게 “너는 내 앞에 완전하라”라고 책망하시기 전에 일컬은 이름입니다. ‘엘 샤다이’(the Amighty God)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성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부각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잊고 당장의 어려운 현실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는데 이는 그들이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이루실 때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그 이름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완전하게 알려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하여 소수에게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200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심으로 그 이름을 완전하게,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성막을 주시고 그들과 교제하심으로 그 이름이 완전하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 백성들은 조급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었고 말씀해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란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6:4-5

약속의 땅은 조상들이 거류하였던 땅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류하였다”는 말은 they resided as foreigners(NIV)로 ‘그들이 외국인으로 거주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가나안 땅에 갔을 때에 가나안 사람들은 원주민으로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창 12:6). 그 땅의 소유권은 이미 가나안 족속의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 땅에서 벽돌집에 살지 않고 옮겨다녀야 하는 장막에 거하였습니다(히 11:9). 그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다 믿음을 따라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며 살았습니다(히 11:13).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거했습니다(히 11:8). 

KJV는 4절의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the land of Canaan, the land of their pilgrimage, wherein they were strangers라고 번역하였습니다. pilgrimage는 순례라는 뜻으로 이 구절은 ‘가나안 땅은 그들이 순례 여행의 땅으로 거기서 이방인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언급하시면서 약속을 믿고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그들의 삶을 높이 칭송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 영원히 거주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가는 곳이고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이 땅에 소망을 두고 땅의 것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골 3:2).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롬 8:24). 보이는 소망은 이미 실현된 것이라 소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 영주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거류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는 삶을 살게 됩니다(마 6:20). 야곱은 땅의 것을 얻고자 열심히 투쟁하였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형과 싸웠고 아름다운 아내와 재물을 얻고자 외삼촌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를 형에 대한 죄 의식에서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영적인 눈을 떴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간구했습니다(창 32:26-30).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의 약속을 믿고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시키십니다. 이제 그들은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향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애굽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이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은 미련을 티끌 한 조각이라도 남기지 않도록 그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오로지 약속의 땅만이 그들이 가야 할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5절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토록 오래 지체하신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5절의 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4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이주할 때에는 바로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목축하기에 좋은 나일강 하류지역의 고센 땅에서 따로 살면서 애굽의 풍요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들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도록 이민족의 침입이 비교적 적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곳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증가해 출애굽할 당시까지만해도 장정만 60만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이끌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고난을 통해 그들 마음에 약속의 땅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애굽의 압제가 없었다면 애굽을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뭄이 들 경우 그 지역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몰려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들은 이미 애굽의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애굽 땅을 나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그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시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고 약속을 붙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그를 그들 가운데 보내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시도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의 종살이의 고통에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같이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시도 그가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의 계획대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6

이 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학적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태를 “무거운 짐 밑에” 있는 상태라고 하셨고 “노역”의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를 무거운 짐과 노역의 상태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들은 “무거운 짐 밑에”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은 under the yoke of the Egyptians(NIV)로 ‘애굽 사람이 씌운 멍에’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밭을 가는 소의 멍에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나귀의 안장을 상기시킵니다. 멍에를 멘 짐승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주인이 지시하는 대로만 가야 합니다. 만일 다른 방향으로 가면 여지 없이 주인의 채찍이 가해집니다. 멍에를 멘 짐승은 자기가 쉬고 싶을 때 쉬지도 못하고 먹고 마시고 싶을 때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합니다. 심한 노역에 시달린 짐승은 기진하여 죽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함으로 항상 지쳐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사탄에게 속하게 되어 사탄이 지우는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저주를 받아 에고(ego)의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땅을 저주를 받았고 아담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7). 땅은 쉽게 곡식과 열매를 내주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곡식과 열매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땅을 갈고 잡초를 뽑아 주며 병충해와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그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생존경쟁입니다. 이런 투쟁은 고대 사회나 현대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국가가 발전하여 선진국이 되어 복지의 혜택을 누린다 하여도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오히려 선진국으로 갈수록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더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현대 사회로 갈수록 여유는 사라지고 무서운 속도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인생의 수고는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선언은 우리의 희망을 꺽어 놓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노역”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NIV에서 “그들의 노역”은 being slaves to them로 ‘그들에게 노예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인격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물건이나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노예가 아무리 똑똑하고 일을 잘해서 많은 이익을 가져와도 그것은 노예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노예의 자식은 역시 노예입니다. 노예가 해방되는 방법은 누군가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방법이나 더 강한 나라가 와서 그 나라를 물리쳐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예외 없이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형사적인 범죄나 도덕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신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라고 하셨습니다(요 8:34).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 감독관들의 감시 아래 강제 노역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재충전을 위한 휴일도 없고 오락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재산을 축적할 수 없고 삶의 거처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애굽의 노예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허락해달라고 할 때 바로는 이를 게으름으로 여기고 게으르지 못하도록 짚도 주지 않고 평소와 같은 할당량을 부과하였습니다(5:17). 

죄의 노예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죄의 장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계곡이 생겨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죄는 선 의지를 꺽고 더욱더 죄의 늪에 빠져들게 합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허우적거리면 더 빨리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죄의 세력은 나의 선 의지를 비웃듯 나를 파멸의 수렁으로 더욱더 빠뜨리게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지적으로 죄의 세력과 대항하지만 번번히 죄의 세력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그들을 빼내어 건지실 것입니다. “빼낸다”는 말은 그 짐을 벗기고 그 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건지다”는 것은 구출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건물이 무너져 건물 잔해 속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은 스스로 그 건물 잔해 더미를 들어올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방관이 그 건물 잔해를 분해하여 그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고 갇힌 사람을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서 치료하여 회복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이 지운 짐이 너무 무거워 그 짐에 깔린 자기 백성을 꺼내십니다. 그리고 그 짐으로 인해 다친 몸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멍에에 짓눌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이제는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주십니다. 과거에는 멍에를 진 짐승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가야 했으나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드려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유롭게 그의 일을 함으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향하여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무거운 짐에서 자유롭게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죄의 짐과 달리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갈 5: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으면 도로 죄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의 행위를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갈 5: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가치 있게 사용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쉼과 기쁨이 됩니다. 

둘째로, 그들의 노역에서 그들을 건지십니다. 여기서 “속량하다”는 말은 redeem으로 ‘구속하다, 대속하다’라는 용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는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는 스스로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노예는 누군가 상당한 값을 치르고 사야 원래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로 우리를 사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사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사신 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생자의 피로 사셔서 우리를 그의 종처럼 부리지 않으시고 자녀로 입양하셨습니다. 사탄의 독재에 시달렸던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고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롬 8:17). 우리는 상속자이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영광과 축복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롬 8:15; 갈 4:16), 이 세상에 대해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벧전 2: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백성들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신분이 급상승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자녀가 됨으로 ‘벼락부자’가 되었고 ‘출세’하게 되었으며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계21:27). 

이사야 선지자는 구속받은 백성들의 축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 너를 모을 것이며 …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1-7). 

셋째로, 하나님은 애굽을 향하여 팔을 펴서서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교만과 우상숭배의 죄를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서도 밝히신 것으로 이미 계획된 것입니다(창 15:13-14).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의 종살이를 할 것과 400년 동안 고난받을 것을 말씀하셨고 그 후에 그 나라를 징벌할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창 15:13-14). 이 예언에서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지만 애굽 백성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으로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바로와 애굽 백성들을 열 재앙으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 재앙의 대상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능력으로 우상을 멸하시고 여호와만이 참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6:7; 7:5,17; 8:22; 10:2; 14:4,18; 31: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애굽에게도, 더 나아가 가나안 족속들과 전 세계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원수 사탄을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원시복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곧 우리 원수 사탄 마귀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머리를 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마지막 발악을 할 것입니다(계 12:13-17).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지막 날에 미혹하는 마귀를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심으로 다시는 그들이 택하신 자들을 건드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계 20:10).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열 재앙으로 치신 후에도 마지막 발악을 하는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모두 수장시키셨습니다(출 14:27-28). 

출애굽기 6:7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는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창17:7). 

하나님이 “내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실은 어리석고 다루기 힘들고 완전히 무가치한 노예 백성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모세를 배척했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열 재앙을 통해 바로와 애굽을 치신 후 홍해로 인도하셨을 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하며 원망했던 백성들입니다(14:11). 그들은 물이 없어 원망하고(15:24; 17:3), 먹을 것이 없어 원망하고(16:3), 고기가 없어 원망했습니다(민 11:4). 그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모세를 원망하였고 심지어 모세를 돌로 치려했습니다(17:4).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동안 불안하여 금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교도들의 의식을 행하였습니다(32:1-8). 하나님은 이런 자격 없는 무가치한 백성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며 약한 자를 도우시며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34: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에게 각별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고 그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세계가 다 그에게 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언약을 지키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소망을 두셨습니다(19:5-6).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그들을 아끼시고 보배롭게 여기십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미지는 구원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에서 빼낸 분으로 그 이름은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뛰어난 신이 아니라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시는 것을 뛰어넘어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언약의 관계이지만 이를 뛰어넘어서 사랑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발전시켰습니다. 호세아 2:19-20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계 21:9). “내 백성”이라는 말은 왕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자녀, 더 나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점점 친밀도가 발전합니다. 

출애굽기 6:8

8절은 땅과 기업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무거운 짐에서 빼내시고 노역에서 건지시며 속량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의 실제 삶에서 어떤 변화가 있게 됩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은 가장 중요한 기업이었습니다. 기업이란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말합니다. 기업은 사람이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로 그들에게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센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후광으로 고센 땅에서 정착해서 이웃 나라가 기근으로 시달릴 때 애굽의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요를 누린다고 해도 그 땅은 이스라엘의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타나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바로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도 빼앗고 그들의 여가 시간도 빼앗아갔습니다. 게다가 무거운 짐을 지워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한 것은 그들에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그들의 기업으로 삼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경작도 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경계를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그들의 주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떠돌이 유목민이 아니요 당당한 주권 국가가 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했지만 이 때를 소망하며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히 11:13-16). 이제는 때가 되어 그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업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 우리가 직업을 갖고 거기에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부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업을 통해 얻는 부를 축적할 자유가 있습니다. 부의 축적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한 것이므로 당연한 권리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부정합니다. 이원론은 영과 육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영은 거룩한 것이고 육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과 육을 분리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a living being(NIV)으로 살아 있는 존재(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의 육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살 터전인 기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 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거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성경은 부자들의 탐욕을 경계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야 할 물질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8-19). 

성경은 많은 부를 갖고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그 물질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부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기업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 기업에서 우리 어떤 자세를 갖고 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업의 크고 작고를 떠나서 기업이 있다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가 일함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기업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그 기업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갖고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땅의 기업 뿐만 아니라 영적인 기업이 있음을 깨닫고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달란트를 주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기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기업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땅의 기업인 직업과 같이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받은 자들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왕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마 6:10).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 바로와 같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영적인 터전이고 우리가 개척해야 할 기업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는 장차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고전 15:42-44).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벧전 1: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갈 4:7). 

출애굽기 6:9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가 하실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대로 전하였지만 그들은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지팡이 기적과 나병의 기적을 보고 모세의 말을 영접하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바로가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도 안 되는 노역을 시켰다고 불평했습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짚도 주지 않으면서 이전의 분량의 벽돌을 만들도록 학대하였습니다. 바로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함으로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잔인한 현실의 고통이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의 상함”은 anguish of spirit(KJV)으로 ‘영혼의 고통’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고통은 인간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정은 인간 사고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처나 원망이 있을 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는 이유는 감정이 우리 사고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는 다 아는데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겪는 고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으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어 그 상처의 아픔 때문에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가혹한 노역”은 cruel bondage(KJV)로 ‘잔인한 노예 생활’을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좋은 주인을 만나면 가족처럼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많은 일을 감당합니다. 어떤 노예는 그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총무나 청지기의 소임을 맡아 큰 집안의 대소사를 섬깁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감을 찾는 엄중한 사명을 맡아 섬겼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집에서 그의 충성심과 신실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로 섬겼습니다(창 39:2-4). 

그러나 그 주인을 잘못 만나면 그들은 잔인한 노예 생활을 합니다. 출애굽 시대의 바로는 가장 악명 높은 왕으로 “가혹한 노역”을 시킴으로 이스라엘은 잔인한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잔인함은 모세와 아론의 방문으로 더 가중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노예 생활인데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잔인함을 더 자극한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육체적으로 힘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원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할 때나 장시간의 노동으로 쉼이 없을 때, 쉬고 싶어도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고난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들의 진정한 갈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노예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싸울 것인가? 그들은 이를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만일 뒤로 물러서면 슬픔과 불평과 부정적 생각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희망의 약속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함 받고 가혹한 노예 생활로 인한 피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들은 과연 뒤로 물러섬으로 노예 생활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바로와 싸울 것인가, 이는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가만히 있거나 뒤로 물러가면 바로는 더 의기양양하여 그들을 더 거세게 쥐고 더 가혹한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들은 적에게 두려워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뒤에 역사하는 사탄의 음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무지로 인해 그들은 사탄이 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감정은 인간 사고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믿음으로 살고자 했을 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보고 뒤로 물러서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내면의 진정할 갈망, 즉 바로의 노예로서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하며 바로와 맞설 것인가를 살피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6:10

모세는 백성의 절망에 동요되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다시 새롭게 모세에게 도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을 강하게 하려고 그에게 도전하십니다. 바로는 한창 독이 오른 상태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분노한 바로에게 다시 가서 말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의 원망을 듣고 깊이 고민에 빠지고 지나친 염려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염려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어떤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바로의 완고함과 끈기 있게 싸우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듣고 낙심되어 뒤로 물러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더 완고해진 바로에게 도전하도록 도우십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더 많은 고통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백성들을 더 큰 고통으로 이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 10: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감당할 시험을 주신 것이고 이제 그 한계치가 넘어가기 전에 크신 이적을 베푸셔서 바로의 완고함을 꺽으시고 모세와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십니다(7:5).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겪는 고난과 아픔에 대해 지나친 연민과 인간적인 공감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후퇴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적대적인 세상에 대해 당당하게 복음을 다 말하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힘들어하는 것에 동정하지 않으시고 다시 도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것, 물러서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6:12

모세는 바로에게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모세의 걱정과 두려움은 이스라엘 자손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로가 그의 말을 듣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민족이 거대한 제국에서 탈출하여 독립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이 메시지를 자기 백성에게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는데 완고한 제국의 왕이 들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했다가 이스라엘이 받을 가중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또한 자신의 무능력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입이 둔한 자라고 하면서 자신은 바로를 설득할 언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입술(uncircumcised lips)을 가진 자이다’라는 뜻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받지 않은 입술’이라는 것은 자신의 입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감당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조건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완고한 바로는 설득하는 대상이 아니라 굴복시켜야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제한 채 바로를 설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고 그 후 세 가지의 이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바라보고 물러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셨습니다. 

13절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라는 구절에서 갑자기 아론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2, 10), 갑자기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두 형제에게 명령을 주심으로 이 두 사람에게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책임이 주어졌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전할 말씀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모세의 발뺌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권위적인 명령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반응에 따라 변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그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들은 바로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로서 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겔 2:5; 2:7; 3:11). 그들은 바로의 반응을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한 후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큰 일을 가만히 지켜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자의 조급한 기대는 실망과 낙심을 낳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즉시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상황의 악화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더 두드러지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를 믿고 바로의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계보(6:14-27)

출애굽기 6:14-25

성경주석 출애굽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

14절에서 갑자기 아론과 모세의 족보로 전환됩니다. 하나님께서 낙담한 모세에게 확신을 심고 바로와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지만 모세는 그의 무능함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족보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끊깁니다. 

우리는 족보의 등장이 마치 TV에서 드라마를 하다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고 광고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저자는 중간에 족보를 소개함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를 전개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배경 설명(1-2장), 부르심(3장), 도전(4-6:12)의 흐름으로 이어지다 족보 소개 이후 본격적인 열 재앙의 시작을 암시합니다. 저자는 족보를 소개한 후 족보의 결론으로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라는 구절과 “…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 아론과 모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임을 강조합니다(26-27). 

족보의 내용은 미완성의 느낌을 줍니다. 족보는 12 지파를 다 소개하지 않고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과 차자인 시므온을 소개한 후 레위 지파의 소개로 끝을 맺습니다. 이는 아론과 모세가 레위의 증손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은 레위 지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모세의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론의 후손이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중요했고 그 중에서 대제사장의 제사 행위 역할이 매우 중요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28:1-29:37; 레 8장).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의 요구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을 범죄하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32:1-6). 그는 모세의 책망을 받자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한 무책임한 자였습니다(32:21-24). 또한 그는 그의 누이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던 자였습니다(민 12:1). 그는 그의 범죄로 인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해야 마땅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론과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핵심 직분인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은 것은 그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에서 첫째 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는 분향할 때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막내 아들 이다말은 제사장 직분을 행했는데(28:1), 특히 성막에 쓸 물건인 금, 은, 놋을 계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38:21). 아론의 대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주어졌고(민 3:32; 20:25-29), 그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모세와 더불어 백성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고, 모세가 죽은 후에는 여호수아와 함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였을 때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범죄한 자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인해 하나님은 평화의 언약을 주셨고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하셨습니다(민 25:11-12). 

족보의 마지막은 아론의 자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중심인물은 모세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아론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19:6). 하나님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제사장인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족보는 선택적입니다. 각 족보는 기록한 이의 말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게 편집됩니다. 족보에 모든 이의 이름이 다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족보는 아론의 계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족보의 특이한 점은 레위와 그의 아들 고핫과 그의 손자 아므람의 나이를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137세이고, 고핫은 133세, 아론의 아버지인 아므람의 나이는 137세로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부터 아론까지는 4대가 되고 이를 합친 나이가 407년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4대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신 것(창 15:16)과 그 기간이 400년이라고 제시하고 있는데(창 15:13), 본문의 나이와 세대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400년이 4대에 해당된다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족보가 특정한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족보에 모든 사람을 다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론과 모세의 족보에서 특이한 점은 아론 계보에서 어머니들을 세 곳에서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아므람은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과 결혼했고(20),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와 결혼했으며(23),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25). 요게벳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원문에 보면  ‘고모’(도다)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근친 결혼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습니다(레 18:6-18).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 하였으므로 근친 결혼은 아주 일반적이었습니다. 계대결혼(수혼제도)인 ‘고엘’도 지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형의 이름으로 혈통을 잇게 하는 제도였습니다(신 25:5-10). 이런 것들은 일부일처를 지키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참으로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원시적인 제도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런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그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계보에서 여인들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아론의 계보를 부각시킨 편집된 족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6:26-27

26-27절은 13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 명령을 전하고 …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라는 구절을 이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25절의 후반부도 14-25절의 족보가 레위 지파 중심의 족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출애굽의 지도자 아론과 모세가 레위 지파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6-27절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와 “…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라는 강조함으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임을 강조합니다. 26절에서는 “아론과 모세”라고 함으로 나이의 순서대로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제사장 직을 강조하였고, 27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라고 함으로 출애굽의 실질적인 리더십은 모세에게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26-27절에서 주목할 만한 구절은 “그들의 군대대로”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군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군대”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적으로 보면 무질서한 오합지졸의 노예 백성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들은 지파 별로 잘 조직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들은 10 라운드에 걸쳐 바로와의 전투를 치를 것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그들은 대열을 지어 하나님의 군사답게 나올 것입니다(출 13:18).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그들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며 지파별로 대형을 맞추어 움직일 것입니다(민 10:11-28).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17:8-16). 나중에 땅을 분배할 때에도 지파별로 분배하였고, 좋은 지역에만 몰려서 살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땅에 흩어져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군대대로”라는 말에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군대로 키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신적 권위를 약속하심(6:28-7:7)

출애굽기 6:28-30

28-30절은 12-13절의 반복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무능을 주장하는 말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모세와 아론”에게 공식적으로 선포된 명령이었습니다(13). 그 후 저자는 모세와 아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족보로 설명합니다. 저자는 이제 중단된 내용을 다시 이어 반복해서 언급함으로 중단되었던 이야기를 다시 전개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무능을 주장하는 것은 두 번째 항의가 아니라 독자에게 모세가 이전에 말한 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 말하는 것”입니다(29).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대변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자기 생각을 보태거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부분을 빼면 안됩니다. 대변인은 독창적이거나 영리하고 재능 있는 설득가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라고 자신의 무능을 주장하였습니다. 

출애굽기 7:1-2

하나님은 4:16에서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4:16에서는 모세를 백성들에게 하나님 같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고, 여기서는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4장에서와 같이 모세가 입이 둔한 자라고 하니까 아론을 대언자로 세워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말하면 그가 바로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의 단점을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의 무능을 다시 주장하지 못하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모세 곁에는 그의 형 아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의 형은 달변가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와의 10 라운드를 벌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자 그는 점점 강해져서 아론을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능을 주장할 근거를 없애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전할 때 신적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때로는 자신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복음을 들은 사람이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수고를 많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거절합니다. 복음 전파자가에게 불신자들의 거절은 아주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수확을 거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하는 자의 입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셔서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자는 신적 권위를 갖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거절한 자에게는 심판이 임하고 영접한 자에게는 구원이 임합니다. 바로와 같이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지만 출애굽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편에 서고자 했던 가나안 족속의 기생 라합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4:16의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라는 것과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God)”이라고 하였고 바로에게는 “신(a god)”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말과 이적은 그들에게는 복음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바로에게는 모세의 말과 이어질 재앙이 심판이 될 것입니다. 

대언자는 prophet로 ‘선지자’를 말합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복음은 화려한 말이나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로 이를 영접하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 전파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가감 없이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한다거나 듣기에 부담스러운 것을 빼서 부드럽게 한다면 그 메시지는 이미 신적 권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 자기를 끼워넣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종은 달변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씀 그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의 전달자입니다. 그는 또한 부활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그가 보고 들은 사실을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들은 것을 그대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달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3-6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가 완악하게 되면 그는 이스라엘에게 더 가혹한 억압을 가할 것 같은데 더이상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적”과 “표징”이라는 단어는 따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두 단어가 한꺼번에 사용되었고 출애굽기에서 이 곳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에게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미리 보여준 표징이 될 세 이적 중 나일 강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은 이미 보여준 이적입니다(4:9).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보여주실 표징과 이적의 첫 번째는 그 규모가 전국적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만이 온 세계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이심이 드러날 것입니다. 

“표징”은 sign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이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보여줄 열 가지 이적은 그들의 신들을 표적으로 삼아 심판하는 것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을 애굽에 뻗쳐 “큰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큰 심판”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습니다. 연속되는 열 가지 재앙은 그 강도와 파괴력이 증가함으로 하나님만이 “큰 심판”을 베푸시는 분이심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군의 완악함을 이용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바로가 완악하게 해야 하나님은 그를 꺽을 이적을 계속 행하시게 됩니다. 그의 완고함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이 더할수록 하나님은 더 큰 재앙을 가하시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더 두드러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은 곧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애굽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큰 심판”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목적으로 이미 6:7에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심판”의 소문은 가나안까지 퍼지고 이로 인해 온 세계가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작용하지만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으로 작용합니다. “큰 심판”의 소문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예는 가나안의 기생 라합입니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하였습니다(수 2:11).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주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그 주제의 중요성의 강조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필요한 동어반복이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은 바로와의 싸움이지만 사실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영광을 그들이 섬기는 신들께 돌렸습니다. 바로는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애굽의 국력을 보고 애굽의 신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무력함과 무익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만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창조주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심판”으로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존자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원인자시며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군대라는 말은 6:26에서 “그들의 군대대로”라고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내 백성”은 7장 이전에 4차례 사용되었습니다(3:7; 3:10; 5:1; 6:7).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내 군대, 내 백성”이라 함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두 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억압받는 힘 없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대적들을 물리치는 강한 군대로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그 어떤 원수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원수의 세력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보배롭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군대를 움직이시고 그의 백성을 폭군의 땅에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애굽 위에 펴서 그의 백성을 그 땅에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열 번째의 재앙으로 애굽에게 결정타를 먹이실 때 그들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입이 둔하다는 것을 핑계대며 뒤로 물러서려는 모세를 설득해 가시면서 바로에게 나아가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핑계거리를 다 없애시고 바로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환경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단지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말을 넣어주시고 갖은 방해 세력을 표징과 이적으로 물리치시고 그의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7:7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의 왕자로 궁중 교육을 받았고, 그가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자각을 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바로의 미움을 사서 미디안으로 망명하였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80세에 가시떨기 가운데 불꽃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만나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고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고(신 34:7),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하는 일은 여호수아가 감당하였습니다(수 1:2).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론은 83세였고 그는 123세에 죽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아론도 모세와 똑같이 40년 간 쓰임받았습니다(민 20:28).  

뱀이 된 아론의 지팡이(7:8-13)

출애굽기 7:8-12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바로가 이적을 보여달라 하거든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지팡이가 뱀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불러 모세와 아론이 행한 똑같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현인”은 실제 삶에서 이해력과 기술이 뛰어난 사람인데, 여기서는 마술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법사”는 박수나 무당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흑마술을 부림으로 신기한 현상을 일으키고 마술적인 주술을 사용하여 영이나 악한 세력을 불러모으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술사”는 주문을 외우면서 초인적인 힘으로 눈에 띌만한 신기한 일을 일으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현인과 마법사와 요술사는 공통적으로 신적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바로의 신적 권위를 세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로는 이들을 불러들여서 아론이 사용한 기술이 신의 능력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마법과 같은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애굽의 마술사들은 뱀을 잘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뱀의 목덜미를 누르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뱀이 일종의 강직증에 걸려 뻣뻣한 막대기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뻣뻣하게 된 뱀을 막대기처럼 만든 다음 숨겨 지팡이처럼 보이게 한 다음 그것을 꺼내어 뱀으로 변한 것처럼 술수를 썼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의 부름을 받고 이를 대비해 준비해 두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연습을 많이 한 후 모세와 아론이 행했던 것처럼 기술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뱀을 마비시켜 뻣뻣하게 만드다는 것은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고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는 현인과 마술사와 요술사 배후에는 사탄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0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사탄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모든 속임으로 사람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하나님만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도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능력으로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여 자기의 수하에 있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애굽의 마술사의 이름을 얀네와 얌브레라고 일컬었습니다(딤후 3:8). 바울은 그들이 그들의 마술을 통해 모세를 대적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를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들을 마귀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고통과 불행에 빠뜨리고 자기의 종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에덴의 행복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여 사람을 두려움의 종으로 만듭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자연 가운데 역사하는 신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적인 행위를 합니다. 현인과 마술사, 요술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함으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그들을 속여서 자기들의 노예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도 또한 자신이 태양 신의 아들이라고 착각하여 속임수에 당한 것이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도 수많은 신들을 섬겨야 재앙에서 벗어나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거짓 희망에 속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특성은 살인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함으로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마귀는 거짓과 속임수로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삼아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그의 소유가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면, 마귀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탈취’하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과의 분리의 상태에 붙들어 두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목적을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16). 하나님의 속량함을 입은 성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8:15).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어 주셔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시려 하십니다(히 2:13-14). 

모세가 행한 이적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마술사가 행한 이적은 사탄의 속임수였습니다. 애굽의 요술사들은 그들의 요술로 모세가 행한 이적을 흉내내었습니다. 모세의 이적과 요술사들의 이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고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사탄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현혹하게 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믿음이 이적에 기초하면 쉽게 마귀의 역사를 분간하지 못하고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치유나 방언, 환상이나 계시에 의존한다면 마귀의 속임수에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적이 누구로부터 나왔는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술사가 하나님의 이적을 흉내내어 사람들을 이 속임수로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보면 아론의 지팡이가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왕관에는 코브라의 형상이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왕의 절대권력을 상징합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 왕에 대한 심판을 예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모든 악한 영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적적 현상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대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이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은혜의 구원의 원리입니다. 복음에 다른 것을 추가한다면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 1:8-9). 

출애굽기 7:13

바로는 아론의 지팡이가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키는 것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보면 이에 놀라 믿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있으면 그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준다고 한들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4). 요나의 표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으면 그 어떤 표적을 본다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로의 완악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아론의 지팡이가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켰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진 것이 분할 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7:1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다음 이적에도 그가 저항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이를 굴복과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믿는 어리석은 자요 현실 감각을 모르는 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굴종한다고 여깁니다. 이는 그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좀처럼 굽힐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자기가 태양 신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여호와의 백성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거절하였습니다. 

첫째 재앙: 물이 피가 되다(7:14-25)

출애굽기 7:15-18

아론의 지팡이가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이적은 열 재앙이 시작되기 전 오픈 게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로가 거절하자 본격적으로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물을 피로 만드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 가에 서서 바로를 만나고 그 손에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던 지팡이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큰 이적을 행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바로는 매일 아침마다 나일 강에 갔습니다. “아침”은 이른 아침, 즉 새벽을 의미합니다. 바로는 애굽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일 강의 신인 ‘하피’에게 아침 제사를 드리러 갔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강의 범람 기간에 맞추어 강의 범람이 재앙이 되지 않고 땅을 비옥하게 해달라고 비는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 반대로 나일 강이 재앙이 될 것입니다. 재앙이 미치는 범위는 나일 강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있는 모든 곳에 미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전할 말을 넣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을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로 원어의 기본동사는 ‘넘어가다, 건너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유브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르러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며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 11:9). 그 후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한 애굽은 그들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땅이 없고 남의 땅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을 가리켜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억압받고 고난받는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고난받고 억압받는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받는 박해와 고난을 다 아시고 함께 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결국에는 큰 승리와 상급으로 보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주시는 경고에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반복합니다.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훈련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십니다(17). 하나님은 자기 백성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 더 나아가 온 천하만민이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도록 하십니다(20). 그 지팡이는 뱀으로 변하여 애굽 왕의 상징인 코브라를 삼키는 이적을 행하였던 지팡이였습니다. 그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 것이 피로 변하고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 악취가 날 것입니다. 피로 변한 물에서 피 비린 내와 물고기 사체 썩는 냄새가 구토를 일으키게 할 것입니다. 피로 변한 물은 아무리 정화해서 먹으려고 하지만 워낙 오염된 것이라 그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물 공급원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애굽인들이 탈수로 전멸할 수 있는 위기입니다. 

출애굽기 7:19

1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를 나일 강에 펴도록 말씀하셨지만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의 물들은 샘, 호수, 강, 바다의 모든 물을 가리킵니다. “강들”은 나일 강의 지류를 말하고, “운하”는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관개 농업을 하기 위한 물길을 말합니다. “못”은 물이 고인 웅덩이를 말하고 “호수”는 저수지를 포함하여 물이 갇혀 있는 모든 곳을 가리킵니다. 한 번은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팔을 펴는 것으로, 다른 한 번은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팔을 펴서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수행의 주체가 교차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누가 지팡을 들어 이적을 행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7:20-21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이집트에서는 늦여름과 초가을에 매년 나일 강이 범람하였습니다. 나일 강 상류 지방의 붉은 퇴적물이 씻겨 내려와 하류로 내려오면 나일 강이 피처럼 붉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물이 변하여 피가 된 것은 이런 자연 현상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인간의 이성의 틀에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물을 변화시켜 피가 되게 하시는 변화의 능력자가 되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팔을 펴자 나일 강 본류 뿐 아니라 애굽의 물, 강들, 운하, 못, 모든 호수 위에도 손을 내밀자 피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의 물도 피로 변하였습니다. 사람이 물 없이 견디는 기간은 3일이라고 합니다. 사흘이면 그들은 모두 탈수로 인해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것으로 이집트의 질서와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데 이런 재난이 임하였다는 것은 그의 권위가 흔들리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이적을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행하였습니다. 이는 바로와 그 신하와 백성들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이 피로 변하는 과정을 목격했다는 말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주관하는 신 하피(Hapi), 나일 강의 수호신이자 창조의 신 크눔(Khnum), 나일 강은 그의 핏줄이라고 오리시스(Orisis)를 숭배하였습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은 나일 강의 신들을 숭배하는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굴욕과 수치를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7:22-25

모세와 아론이 물을 피로 만들자 애굽의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바로는 이를 보고 히브리인의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이 엄청난 재앙을 보고도 궁으로 들어가 그 일에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이는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입니다. 

요술사들은 어떤 약품을 사용하면 화학 반응을 일으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갖고 있던 마술의 비밀을 이용하여 바로와 백성들을 속이고 그들의 교만을 부추기고 각종 신들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였던 하나님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술수 때문에 바로는 더욱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바로는 이런 따위의 이적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이런 재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위해 피할 길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편견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리 결정된 계획이나 자기의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복음이 다가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물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습니다. 이 곳의 물은 나일 강의 물이 여과되어 나온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은 애굽 사람이 마시기에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이 재앙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이 물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기간이 약 3일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들은 땅을 파서 정화된 물로 근근히 버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하였고 물이 없어 음식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물이 없어 씻지도 못하고 끈적거리는 이집트의 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바로의 고집 하나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심각한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재앙부터 세 번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분리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은 네 번째 재앙인 파리 재앙부터입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였다는 언급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끼시고 사랑하셔서 이런 재앙들로부터 어떻게든 보호를 받도록 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들은 만물에 신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적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범신론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합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은 그들이 섬기는 나일 강의 신의 굴욕이었습니다. 축복의 젖줄기와 생명의 근원이 가증한 것이 되었고 사망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죽음과 저주를 토해내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나일 강과 나일 강의 물고기까지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둘째 재앙: 개구리가 올라오다(8:1-15)

출애굽기 8:1-2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을 피바다로 만든 재앙이엇습니다. 이는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없어 땅을 파서 걸러진 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물 부족은 애굽 사람들에게 심각한 불편을 끼쳤습니다. 또한 많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함으로 그들의 먹는 문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 모세와 아론이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똑같았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듣지 않으면 개구리 재앙으로 온 땅을 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개구리 재앙이 나일 강이 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이런 이성적 판단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자연적 현상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재앙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하면 개구리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재앙을 내리시는 데 조건을 달고 계십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재앙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요 3:18). 

출애굽기 8:3-4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청결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낮에 두 번, 밤에 두 번 목욕을 했고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목욕을 자주 했으며 부정한 것과 접촉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일 강에 나왔다는 것에서 그들에게 목욕 문화는 그들의 종교적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청결을 매우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개구리들이 온 천지에 득실대는 것은 깔끔을 떠는 애굽 사람들에게 정말 견디기 힘든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구리 재앙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설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개시하시면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겨 올라와서 바로의 궁과 침실과 침상 위와 신하의 집과 백성과 화덕과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개구리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일 강에는 악어를 비롯하여 수많은 생물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나일 강 근처에 국한됩니다. 개구리는 물이 있는 곳을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사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개구리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튀어나와 사람이 사는 곳에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불어난 개구리의 개체수는 통제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침실까지 침투하고 화덕과 반죽 그릇까지 자기 집을 삼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고자 의도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개구리들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입니다. 

개구리는 그 자체로 사람에게 무해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운 양서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 피부는 끈적하고 비위생적이고 만지기에 불쾌합니다. 사람들은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시골의 평온한 가운데 저 멀리서 개구리 소리를 듣는 것은 자장가이겠지만 방 안의 개구리 소리, 특히 침대까지 올라운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잠을 못 자게 하는 끔찍한 고문입니다. 아무리 개구리를 잡아서 없애도, 창문과 방문을 밀폐해도 개구리들은 어디선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바퀴벌레를 아무리 박멸하고자 하지만 질긴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을 조리하려고 하면 개구리가 냄비와 그릇 안으로 들어오고 음식을 조리해놓고 보면 개구리가 음식 속에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것을 보면 입맛이 싹 달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짐승들을 보내어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해한 동물인 개구리 재앙을 내리는 목적은 바로와 그 백성을 괴롭히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이같은 수많은 개구리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을 괴롭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개구리에게 당한 괴로움은 그들이 괴롭힌 히브리 백성들의 고난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개구리처럼 보잘 것 없는 미물조차도 멸망의 도구로 삼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시기 위해 강력한 군대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개구리와 같은 하찮은 동물로도 그들이 가한 만큼 되돌려 받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8:5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축복의 젖줄기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구리 머리를 한 여신 헤케트(Heqt)를 숭배했습니다. 개구리는 알을 많이 낳는 다산의 상징으로 이집트사람들이 섬기는 신입니다. 그들은 나일 강이 범람하기 직전에 대량으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새 생명의 시작과 부활을 상징하였습니다. 나일 강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수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하며 나일 강의 생선은 그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일 강을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집트 백성들을 괴롭히는 개구리 재앙을 낳는 모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개구리 재앙을 내리신 것은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그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8:6-7

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그의 손을 내밀자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였습니다. 이집트의 요술사들은 모세와 아론의 흉내를 내어 개구리가 애굽 땅으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다. 계속해서 개구리가 올라오고 상황에서 그들의 이런 요술은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개구리를 나일 강에서 올라오는 요술을 행함으로 그들 자신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8:7). 바로는 요술사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저지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기를 바랐는데 그들은 개구리를 올라오게 함으로 바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구리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는 요술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8:8-9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하나님께 구하여 개구리를 없애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재앙을 겪고 잠시 뒤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는 조금씩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요술사들의 요술의 한계를 느낀 것 같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요술사들이 남의 흉내만 낼 뿐 그 어떤 능력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모세는 바로에게 언제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하는 이유는 모세는 바로가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10). 모세는 바로에게 “내게 분부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KJV를 보면 이 구절은 Glory over me로 ‘내게 영광을 주소서’라는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애굽에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부탁은 당장 개구리 재앙이 멈추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앙을 멈추게 하려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언제 멈추도록 간구하는 것이 좋을지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내게 영광을 주소서’라고 말함으로 자기도 하나님께 간구할 시간이 필요하니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생각해달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내게 분부하소서”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마술사들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대적하였소. 이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 그리고 내가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리이다. 그 분은 당신의 기도를 듣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오. 그 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나는 그 분이 맡기신 사명을 이행하는 전달자일 뿐이오. 그러므로 구원의 시기를 정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기도를 그것을 위해 기도하겠소.” 

또 다른 해석은 “내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통해 여호와께 기도하시오. 당신이 언제 개구리 재앙을 그치기를 원하는지 내게 말하면 내가 기도해 주겠소.”라는 의미입니다. NIV를 보면 I leave to you the honor of setting the time for me to pray for you로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정할 영광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러니 언제 개구리 재앙이 그치게 할 것인지 말하시오.”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출애굽기 8:10-14

바로는 그 다음 날 개구리를 제하여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당장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짧게 잡아 내일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왕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에게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대로 재앙을 멈추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의 모세에게서 입이 둔하여 할 수 없다는 패배적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아론의 지팡이가 마술사들의 지팡이들을 삼키는 이적과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 개구리 재앙이 그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멈추는 때까지 정해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개구리 재앙이 멈추게 할 때를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고 이로 인해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때를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때를 따라 일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바로의 원대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고 나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대로 개구리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들이 집과 마당과 밭에서 나와서 죽었습니다. 큰 전쟁이 끝나고 시체를 정리하듯 그들은 죽은 개구리의 사체를 모아 무더기로 쌓자 온 천지에 개구리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개구리는 애굽 사람들이 번식과 다산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치심으로 그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개구리의 사체가 무더기로 쌓여 악취를 풍기는 장면은 개구리를 신격화하여 우상시했던 애굽의 우상 종교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그것이 여호와 앞에 얼마나 악취 풍기는 모습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8:15

재앙이 끝나자 바로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겠다고 말할 정도이면 개구리 재앙이 바로에게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는 개구리를 보고 그들이 내는 소음을 들으면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서 모세와 아론에게 기도를 요청하자 하나님께서 재앙을 그치셨습니다. 그러자 온 세상이 조용해지고 더이상 불쾌한 개구리가 보이지 않아 바로는 탁 막혔던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살만해지자 마음을 돌이켜 그가 한 약속을 후회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한 약속을 파기하였습니다. 바로의 이같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견한 것이었습니다. 바로가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라고 말할 때(8), 그는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 후회한 것입니다. 그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회개하는 척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고통을 피하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시적인 물러선 것을 말하는 반면, 회개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회가 아닌 회개를 원하십니다. 회개는 마음의 근본적인 돌이킴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약속의 이행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 바로와 같이 완고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 3:7-9). 진정한 회개는 그의 삶 속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음의 돌이킴이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부심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입니다. 우리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기 의를 내세운다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롬 3:10). 또한 회개한 자들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기를 낮추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롬 1:17). 

하나님은 그가 회개한 것이 아니라 후회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긍휼을 베푸셔서 숨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자 그들에게 내리고자 하시는 심판을 거두셨습니다(욘 3:5:10).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들이 물러서고 긍휼을 구할 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입니다. 요나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욘 4:2). 하나님은 바로의 회개의 흉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재앙을 그치게 함으로 숨을 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셋째 재앙: 티끌이 이가 되다(8:16-19)

출애굽기 8:16

이 재앙은 6번째와 9번째 재앙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바로는 개구리 재앙 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겠다고 거짓 약속을 하였지만 이를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의 티끌은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진 흙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 흙을 신들이 주신 선물로 여겼습니다. 땅은 애굽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곡식의 첫 소출을 땅을 주관하는 신에게 바쳤습니다. 땅이 곡식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땅의 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신성시하는 땅에서 해충을 내게 하셨습니다. 땅은 인간에게 영양분을 공급했지만 하나님은 그 땅으로 사람과 짐승을 파괴하셨습니다. “이”는 조그마한 몸집의 각다귀나 모기류를 일컫습니다. KJV에서는 포유류의 몸에 기생하여 피를 빨아 먹는 흡혈 곤충인 이(lice)로 번역했지만, 대부분의 성경은 gnats(각다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 코에 들어가 귀찮게 구는 작은 벌레인 각다귀나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혹은 독한 질병을 전염시키는 모래 파리를 가리킵니다(시 105:31). 

흙이 강이나 못에서 서식하는 각다귀로 변하는 것은 물이 피로 변하는 것과 같은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막의 먼지와 같이 날아다니며 그 크기가 작아 셀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입니다. 이 재앙은 면도를 해야 했던 제사장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의식을 위해 몸의 털을 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물려 온 몸에 상처 투성이라 그들의 몸에 면도칼을 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8:17

모세와 아론이 그대로 행하자 땅의 티클이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올랐습니다. 먼지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것이 모두 이가 되었다는 것은 이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막의 신인 세트(Set)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이었습니다. 또한 애굽의 제사장을 향한 공격이었습니다. 16절에서도 설명했듯이 제사장들은 자주 씻고 면도를 하여 청결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청결한 몸에 세마포 옷을 입고 종교 의식을 주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몸을 가렵게 하는 이로 그들을 괴롭게 하고 오염시켰습니다. 

출애굽기 8:18-19

요술사들은 이를 흉내려고 했지만 자기 요술로는 이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람 뿐 아니라 가축까지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임을 인정했습니다. 요술사들은 그 전에 모세와 아론을 자기와 같은 요술사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 재앙을 겪고 나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같은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이” 재앙에 꽁무니를 빼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원문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이 힘을 상징하는 데 비해 손가락은 정교함이나 재주에 강조점을 두고자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묘사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또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또한 우리말에는 없지만 원어에는 the finger of God(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귀머거리를 고치실 때 손가락을 사용하셨습니다(막 7:33). 이를 볼 때 손가락은 정교한 일을 할 때 쓰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요술사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니까 바로는 그들마저 등을 돌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바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넷째 재앙: 파리 떼를 보내심(8:20-22)

출애굽기 8:20-21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침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바로가 모세를 만나기를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 유역을 걸으면서 아침 일찍 제사를 드리러 나온 바로를 만나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가 듣지 않으면 바로와 그 신하와 백성과 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파리는 성경에 ‘제붑’과 ‘아로브’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제붑’은 집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나안 지역에서는 ‘파리의 신’ 또는 ‘오물의 주’라는 의미를 가진 바알세붑(Baal-Zebub)’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블레셋의 도시 에그론에서 신으로 숭배하였고(왕하 1:2-18), 신약에서는 ‘바알세불’이라고 불려졌습니다(마 10:25; 12:24). 

여기서는 ‘제붑’이 아닌 ‘아로브’로 소의 배설물에서 자라며 사람과 가축에 붙어서 기생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무서운 곤충입니다. 이들은 ‘개파리’(dog-flies)라고 알려진 것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물었을 때 매우 통증이 심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파리를 이집트 사람들이 생명의 상징으로 숭배하는 풍뎅이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풍뎅이가 땅을 비옥하게 함으로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하여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 ‘게프리(Khepri)’는 풍뎅이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8:22-23

네 번째 파리 재앙부터 하나님은 애굽 사람이 거하는 곳과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구분하셨습니다. 재앙이 이스라엘에게 미치지 않도록 구별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공간과 자연과 시간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보내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이루심으로 시간을 지배하시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해충들이 생겨나게 하심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자연을 지배하시며, 애굽과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구분하심으로 재앙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하셔서 공간을 지배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애굽에 임한 재앙은 자연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죄악을 심판하는 재앙이며 두 지역을 구별하심으로 하나님이 온 땅의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셔서 이를 “표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재앙은 단순히 생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적임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표징은 주로 구원과 심판에 관계된 단어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구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구원과 보호를 받게 하시고, 따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고통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8:24-25

바로는 지독한 해충인 무수한 파리 때문에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이 황폐화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바로는 견디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광야가 아닌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를 제안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결정은 대결도 하지만 주로 타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진리와 거짓의 문제로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어느 한 쪽이 항복하는 구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하셨을 때 혼돈과 흑암과 무질서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세워졌습니다. 빛과 어둠은 그 성질상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그런데 우리는 정치 세계의 타협의 원리를 영적인 세계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합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방안을 제시합니다. 바로는 “굳이 이스라엘이 멀리 떨어져 있는 광야로 가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는가?”라고 그들에도 양보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바로는 자기가 조금 봐줄 테니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릴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바로는 또한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28). 이를 볼 때 그의 마음의 문이 많이 열린 것처럼 들립니다. 이 정도이면 많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그럴듯한 제안처럼 들립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와의 지리한 싸움보다 서로 양보함으로 평안을 택하고자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로가 이같이 나오는 것도 대단한 양보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이제 그의 압제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얻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제안은 기만이요 속임수입니다. 영적인 전투에서는 휴전이나 타협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타협하는 순간 바로는 본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바로의 타협은 양보가 아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어 좀 느슨하게 해줄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노예 상태입니다. 바로의 제안대로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협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타협은 곧 예속 상태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타협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부림치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헌신을 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주일 예배에 한두 번 빠지는 것은 괜찮다고 하고 너 혼자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속삭입니다. 굳이 전도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꼬드깁니다. 그러나 타협을 하게 되면 당장에 편한 것은 있지만 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8:26-27

모세는 바로의 타협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모세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며 그의 제안이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바로의 제안이 부당한 이유는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면 애굽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여 그들을 돌로 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동물의 희생은 애굽 사람들에게 가증한 것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아피스(Apis)라고 불리는 신의 형상인 황소와 그들의 여신 하토르(Hathor)를 나타내는 소를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들이 소의 희생제사를 목격할 경우 그들은 이를 신성 모독으로 여겨 폭동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별과 동물 등 우주와 자연, 심지어 동물들에게까지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애굽의 신들을 나열한 목록을 보면 80개 이상으로 사자, 황소, 염소, 늑대, 개, 고양이, 다오기, 독수리, 매, 하마, 악어, 코브라, 개구리, 돌고래 등 각종 짐승들과 각종 물고기, 각종 나무들과 풍뎅이, 메뚜기 같은 곤충까지 신성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을 희생하여 제사를 드린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신들을 모욕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하며 본래의 제안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조금의 타협의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거기에 자기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덧붙여 말씀을 희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롬 1:17).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심으로 배타적인 선포를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구원의 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타적 느낌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려면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의 구원의 길 외에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유대 크리스천들은 믿음 외에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거짓 교사라고 일컬으며 그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였습니다(갈 2:4). 바울은 타협의 동기는 박해를 면하려는 것과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 6:12-13).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이 주신 구원의 길, 복음의 핵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라고 말하며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27). 바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적당히 얼버무린다면 이는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8:28-32

모세의 단호한 태도에 대해 바로는 한 발 더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는 ‘통 큰 양보’를 했습니다. 그는 애굽이 아닌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려도 좋다고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바로는 마지 못해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의 본심은 이스라엘의 엄청난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면 애굽의 경제는 무너질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바로는 재앙을 면하기 위해 그의 탐욕을 숨기고 많이 양보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가진 척 했습니다. 그는 “너희는 나를 위해 간구하라”라고 기도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는 바로의 회심을 위해 양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는 여호와 신앙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토를 달고 있습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이것이 바로의 본심이었습니다. 바로는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주도권을 잡으면 발톱을 세워 광야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다시 잡아 올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재앙으로 애굽을 치더라도 바로가 완악하게 나올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는 결코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속임수로 상대방이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멍에의 고삐를 당길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바로의 거짓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타협을 제안했을 때  바로의 태도가 개선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가 덧붙인 “너무 멀리 가지 말라”라는 조건이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거짓과 완악함이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겠다고 약속했고 내일이면 파리 재앙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어서 바로에게 그의 양보가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그가 신실히 약속을 지킬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말대로 파리 재앙이 떠나게 하셨습니다. 

31절에서 저자는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다고 묘사했습니다. 새까맣게 몰려다니며 온 세상을 뒤덮으며 사람과 짐승의 피를 빨아먹음으로 괴롭혔던 파리 떼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역사입니다. 파리 떼는 말끔히 사라졌지만 파리 재앙은 사람들과 짐승의 피부에 온갖 상처를 남겼습니다. 파리 떼가 사라지자 바로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고 그의 마음은 본래의 완악한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그가 맹세한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취소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였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그의 포로된 자를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바로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그가 사로잡은 자를 놓아줄 것처럼 하다가 다시 완악하게 굴어 우리의 구원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와 전도, 가르침과 양육의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마귀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구속 역사는 10 라운드의 피 흘리는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재앙: 돌림병으로 가축을 치시다(9:1-7)

출애굽기 9:1-3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다섯 번째 재앙을 경고하도록 하십니다. 모세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계속 반복되는 것으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전체에 울려 퍼지는 후렴구와 같습니다(5:1; 7:2,7,16; 8:1,20).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고 노예로 부려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의 소유가 아니라 더 크신 왕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심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바로는 분명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려고 할 것입니다(2). 그러면 더 심각한 재앙이 그를 기다리고 그를 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심한 돌림병”으로 가축들이 죽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3-4). 돌림병 재앙은 다른 재앙보다 비교적 짧게 서술되었고 바로가 이 재앙을 당하고 물러섰다는 기술은 없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의 몸을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물인 가축들을 죽이심으로 경제적 손실을 입게 하십니다. 재앙이 전개됨에 따라 그 치명 정도가 커지고 바로의 권위와 체면도 치명상을 입을 것입니다. 

피조물은 인간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돌림병으로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하고 있어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은 이런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롬 8:19-22). 

하나님께서 애굽의 가축들을 치시는 것은 동물의 형상을 숭배하는 애굽의 우상숭배를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황소와 수소를 신성시하였습니다. 나일강 삼각주에는 4개의 지역이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황소와 암소의 형상이 발견되었습다. 황소의 공동묘지가 창조의 신인 프타와 프타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황소의 형상을 한 아피스 우상이 아피스를 숭배하였던 멤피스 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사랑과 미와 기쁨의 여신인 하토르 우상도 발견되었는데 그 형상은 왕에게 젖을 먹이는 젖소의 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한 돌림병으로 가축들을 죽이셨는데 거기에는 그들이 광적으로 숭배하는 황소와 암소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돌림병으로 애굽의 주신들을 죽이심으로 그들의 우상숭배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3절의 “여호와의 손이 … 더하리니”라는 구절은 지금까지의 재앙과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1-4 번째 재앙은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일어났지만 5 번째 재앙은 하나님의 손이 직접 애굽의 가축을 친 재앙입니다. 또한 “심한 돌림병”이라고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한 방법으로 구약에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데베르’로 ‘멸망’,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NASB95와 NRSV에서는 pestilence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페스트’를 말합니다. 1340년경 유럽 인구는 약 7,500만 명이었는데 페스트가 유행하자 4년도 채 되지 않아 유럽 인구의 1/3이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심한 돌림병”은 페스트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가축 전염병은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됩니다. 예를 들면 구제역은 소에게만 발병하고 돼지 열병은 돼지에게만 발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심한 돌림병은 특정한 가축에게만 나타나지 않고 들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 돌림병은 애굽의 가축들에게는 전염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가축들에게는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내리신 천형이었습니다. 돌림병의 대상의 예로 든 것은 말과 나귀와 낙타, 소와 양이었습니다. 말과 나귀와 낙타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데 필수적인 동물들입니다. 소는 밭 가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오늘날의 트랙터의 역할을 하고 양은 고기와 털을 제공하는 가축입니다. 이 가축들은 고대 사회에서 재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축을 치는 것은 그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가는 징벌입니다. 

출애굽기 9:4-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에는 전염병이 임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섯 번째 재앙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선언하셨습니다. 두 번째 재앙에서 개구리의 죽음은 애굽에게 다행인 일이지만 돌림병 재앙에서 죽음은 애굽의 귀중한 자산의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열거된 가축들은 농경 사회에서 가축은 농사를 짓는데 필수적인 동물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돌림병으로 가축을 잃고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곧 식량 부족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 하나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명확한 구별을 목격한 애굽 사람들은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극도의 수치와 굴욕을 느낄 것입니다. 구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전염병을 특정 지역에 국한해서 내리실 것이라는 그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기한을 정하여 이 일을 시행하실 것입니다(5).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에서 모세는 바로에게 재앙을 그치게 할 때를 정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8:9).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림병 재앙을 내리실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이는 재앙이 어떤 자연적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5절의 “이 땅”은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애굽의 가축이나 이스라엘의 가축이나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풀을 먹고 같은 물을 마시는데 어떻게 애굽의 가축은 죽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멀쩡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돌림병은 경계가 따로 없지만 하나님께서 경계를 정하셨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특성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이는 전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째 재앙인 악성 종기 재앙을 내리실 때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겼다”라고 했습니다(9:10). 이 구절을 보면 애굽에 속한 동물들이 많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일곱 째 우박 재앙 때에도 그 재앙이 사람과 짐승에게 임하였고(9:25), 마지막 재앙인 장자 재앙 때에도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신다고 예언하셨는데, 이를 볼 때 상당수의 짐승들이 연이은 재앙 가운데에서도 살아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2:12). 그러므로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라는 말은 상당한 수의 가축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정과 국가 경제에 미친 손실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재앙: 악성 종기로 괴롭히심(9:8-12)

출애굽기 9:7

바로는 애굽의 가축이 너무 많이 죽어 애굽의 경제적 재앙이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았습니다. 7절에서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라는 말 뒤에 “본즉”이라는 단어가 “보라(behold)!”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바로는 “심한 돌림병”이 자연 현상의 하나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사관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가축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보라!”라는 단어를 첨가해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집트 전역에서 소와 말과 다른 동물들의 시체가 햇볕에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거주지인 고센에서 비슷한 상황이 발견된다면 전염병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위안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재앙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하신 첫 번째 사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는 조사관들을 보내어 그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지만, 조사관들은 고센 땅에서 전염병에 의해 죽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동물들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반면 애굽은 황폐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조사관들이 입증한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에게 완전한 굴욕과 비극적인 패배를 안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에 대해 굴욕감을 느끼고 오기가 발동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고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굴복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대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이렇게 계속 저항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은 이를 어리석은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쓸 데 없는 자존심을 꺽고 그의 권세 앞에 엎드려 그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뭣 모르고 많은 악을 행한 자라도 자존심을 굽히고 회개하고 그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9:8-9

여섯 번째 재앙인 악성 종기 재앙의 기록에는 바로와 모세와의 언어적 대결은 없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야외에서 행한 상징적 행동을 목격했습니다. 악성 종기 재앙은 열 재앙 중에서 가장 짧은 재앙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재앙은 한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형된 이적입니다. 그 전에도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이적,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된 이적, 건강한 손이 나병에 걸린 이적이 그런 경우로, 여섯 번째 재앙도 화덕의 재가 티끌이 된 이적입니다. 

화덕의 재는 바람을 타고 악성 종기를 일으키는 원인자가 되었습니다. 화덕의 재는 NASB95, NIV, NRSV, ESV는 soot로 검은 색의 그을음으로 번역했고 KJV과 RSV는 ashes로 타고 남은 재로 번역했습니다. 화덕은 바로의 종으로 일하면서 벽돌을 구운 용광로를 암시하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의 상징합니다(1:14; 5:7-19). 화덕은 신명기 4:20에서 “쇠 풀무불…에서 인도하여 내사”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의 백성의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재로 악성 종양이 되게 하심으로 이 고통을 바꾸어 고통을 준 애굽인들이 그 고통을 당하도록 하심으로 보복하심으로 그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악성 종기는 구약에 13번 나옵니다. 신명기 28:27에서는 “애굽의 종기…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볼 때 당시 인간의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이며 전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이 내린 독특한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KJV을 보면 a boil … with blains로 ‘물집이 생기는 종기’라고 되어 있는데, boil은 ‘끓어오르다’, ‘뜨겁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이 피부병은 지독히 가렵고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IV에서는 festering boils로 번역되어 있는데 ‘고름이 생기는 종기’라는 의미로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궤양성 피부병을 말합니다. 욥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진 질병도 바로 이 악성 종양이었는데 욥은 얼마나 이 종기가 가려웠는지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습니다(욥 2:8). 이 재앙의 대상은 사람과 짐승이었습니다. 이 질병은 인체의 피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병이지만 즉시 사망하지 않고 사람이 극도로 괴롭히는 질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9:10-12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해 재를 날리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 앞에서 이를 행함으로 바로가 이 기적의 목격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는 가벼운 재가 공중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날리는 것은 이 재앙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운 것임을 암시합니다. 

여섯 번째 재앙에서 특징적인 것은 요술사가 더 이상 모세 앞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술사는 1-3번째 재앙 때 등장하여 1-2번째 재앙 때는 하나님의 이적을 흉내내었으나 세 번째 이 재앙 때에는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한계를 인정했습니다(8:19). 그들은 바로의 조언자로 바로가 옆에 두고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 때에는 요술사들에게도 악성 종기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 동안 그들은 바로 앞에서 모세를 대적하기 위해 바로를 보좌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악성 종기가 생기자 이제는 더 이상 바로를 섬길 수 없습니다. 

요술사들은 요술을 부리기 위해 세상의 모든 잡다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종합하여 사람을 속이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악성 종기를 치료하거나 악성 종기의 전염병을 차단하거나 그들도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바로가 하나님께 대해 계속 저항할 명분을 제공해야 하는데 요술사가 악성 종기에 걸렸으니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 드러난 꼴이 된 셈입니다. 요술사들은 치료의 신인 ‘세라피스’나 질병으로부터 수호하는 신인 ‘임호텝’에게 치유를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악성 종기를 치유하거나 악성종기 재앙으로부터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바로에게 하나님을 대적할 능력도, 지혜도, 모략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직 살아남은 것은 그의 완고한 자존심 뿐이었습니다. 

악성 종기는 모든 애굽인들을 쇠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성 종기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신체를 치셨지만 바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더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심입니다. 

일곱째 재앙: 우박으로 상하게 하심(9:13-35)

출애굽기 9:13-1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은 첫 번째와 네 번째 재앙에 이어서 세 번째입니다(7:15; 8:20). 모세가 바로에게 할 말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번 재앙의 목적은 바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 것(14절)과 온 세상에 그것을 알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16절). 하나님은 애굽이 경험한 우박 중 최악의 우박 폭풍을 보내고자 하셨습니다(18). 우박 재앙으로 열 재앙 중에서 우박 재앙과 장자 재앙은 실제로 인명을 빼앗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통해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이 온 천하에 여호와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바로가 신뢰하고 섬긴 신들은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박 재앙 이전의 재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예비적인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림병으로 치셨다면 이미 애굽 인구를 완전히 없애고 완전한 파괴를 이루실 수 있으셨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너를 세웠음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의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세계 최강대국의 왕인 바로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돌림병으로 당장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갈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단번에 치시지 않고 재앙을 조절하신 것은 바로와 그의 백성이 온 천에 여호와 같은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다시 한 번 재앙을 내린 목적을 강조합니다. 13-35절에는 “모든”(22, 23[3]), “온”(14,16,24,25)이라는 단어가 합하여 총 8회 반복됩니다. 우박 재앙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재앙이었습니다. 이 재앙은 온 나라의 모든 채소를 치고 나무를 꺽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로를 비롯해 모든 애굽 사람들은 온 천하에 여호와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이 소문은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14). 

열 재앙 중 장자 재앙을 빼고 7번째 우박 재앙과 8번째 메뚜기 재앙은 가장 길게 서술된 이야기입니다. 우박 재앙 다음에 일어날 8번째 메뚜기 재앙의 서술이 3절 더 깁니다. 우박 재앙에서 추가된 서술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마음 먹고 돌림병으로 바로와 애굽을 쳤다면 바로와 애굽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목적에 대해 서술(15-16)한 것과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에 대해 대조적으로 서술한 것(20-21)이 추가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14절에서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에게 내려”는 KJV으로 보면 I will at this time send all my plagues upon thine heart로 ‘바로의 마음에 재앙을 보내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를 ‘너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레브’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바로는 그 동안의 재앙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재앙들이 귀찮고 불편하고 짜증났을 뿐 그는 백성이 겪는 고통에 대해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나라가 우박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받고 절망에 빠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그의 마음을 치기 시작하십니다. 나중에 장자 재앙을 내림으로 결정적인 펀치를 날릴 것입니다. 

그 동안 여섯 번째 재앙까지는 가축이 죽는 재앙은 있었지만(9:6), 사람이 죽는 재앙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괴롭히는 재앙이었다면 7 번째 우박 재앙은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그것들이 죽으리라”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은 사람과 가축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19). 하나님은 마지막 10 번째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들은 장자를 잃게 될 것입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덜 마음 아픈 일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가장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에 재앙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9:17-18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말씀하신 후 바로를 꾸짖으십니다. 그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붙잡아 두고 계속 이용하고 억압하고자 하였습니다. 17절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는 개역개정과 KJV에서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수사의문문으로 그의 교만에 대한 책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번역에는 평서문으로 되어 있고 새번역에서도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도 내 백성에게 거만을 피우며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로 되어 있어 단순한 진술을 나타냅니다. 

바로의 행동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 1:21-23). 하나님은 악인들을 죄악된 삶의 고정된 패턴에 내버려 두심으로 멸망을 자초하게 하십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유기라고 하는 것으로 ‘내 버려두는 것’을 말합니다. 내버려두심은 하나님이 벌하시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파괴적인 과정을 밟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재앙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고 듣지 않으면 그 마음이 둔하여지고 완고하게 됩니다. 마음이 교만하여 완고한 것은 죄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형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완고한 상태로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9:19-21

13절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에서 19절의 “… 죽으리라”까지가 모세가 바로에게 전달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13-19절의 2인칭은 모두 바로를 가리킵니다. 19절은 바로와 애굽 백성들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전하지 않으시고 바로에게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주신 것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와 달리 이례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 속에 구원의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들에 있지 말고 집과 축사로 모은다면 그들은 우박 재앙에 죽지 않고 생존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19-21절은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에서 애굽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경고를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한 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들에 있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이 우박 재앙을 당하여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두려워하여 집으로 피하여 집에 가축들을 대피시키고 집에 머무른 자들은 이 재앙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영접하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지만, 영접하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 3:17-18). 우리는 이 구별시키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비록 멸망받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두워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살리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9:22-26

20-21절을 볼 때 모세의 메시지가 바로 뿐만 아니라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전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경로로 메시지가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박 재앙을 내리시기 전 애굽 사람들이 그 경고를 듣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아무리 범죄한 인간이라도 그들이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충분히 피할 길을 주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충분한 예고를 한 후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리게 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재앙의 대상은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은 모든 채소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집으로 피한 애굽 사람과 고센 땅에 거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20, 26).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습니다. 또한 우박은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꺽었습니다. 나무가 꺽였다는 것은 우박 재앙의 규모와 심각성이 어떤지 짐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바깥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우박을 맞고 즉사하였을 것입니다. 짐승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애굽 사람들의 먹을 거리인 채소들과 과일 나무들을 침으로 곡창지대로서의 애굽의 명성을 훼손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박 재앙에 대한 충분히 예고하심으로 애굽 사람의 생명과 그들의 재산인 가축들과 아직 자라지 않은 밀과 쌀보리를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겨두셨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이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물품을 애굽 사람들을 통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12:35-36). 애굽 사람들은 장자 재앙을 당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주어 그들을 내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다 생각하시고 충분한 예고를 통해 애굽 백성들과 그들의 소유를 아끼신 것입니다. 우박 재앙은 맹렬한 불덩이와 함께 임했습니다. 여기서 불은 우박과 동반되는 번개로 해석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으로 인해 나무와 집이 파괴되고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는 표현은 ‘불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불이 달리다’는 표현은 불을 의인화한 표현으로 번개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 꽂는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번개로 인한 화재가 바람을 타고 온 땅에 번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우박 재앙은 애굽이라는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끔찍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고센 지역은 이 재앙의 예외였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인간은 범죄하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심판 가운데에서 예외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구원받을 꼬투리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타락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근성이 몸에 밴 노예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한 이후에 모세를 대적하였고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힘들면 불평과 불만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음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렇게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시고 길이 참으시고 관용하심으로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언약하신 것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있는 고센 땅에 우박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 때문이요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고자 하시는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주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든 심판의 예외자요 특별히 구별하심을 입은 자가 됩니다. 

출애굽기 9:27-30

수많은 백성들과 재산을 잃은 바로는 다급해졌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내가 범죄하였노라”라고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하면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은”이라는 말을 씀으로 그가 완전한 항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건을 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의 회개는 분명 후회에 불과합니다. 입술로 자신의 사악함을 시인했지만 입술로 회개하는 것이 진실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도움을 구할 때의 자세보다 더 진전을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28). 

모세가 성에서 나가 그의 손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펴자 우렛 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우박 재앙이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기도함으로 재앙이 그치게 하여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박 재앙은 하늘의 여신 누트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농작물을 주관하는 신인 이시스와 셋을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박에 의해 파괴되고 불이 내려 나무와 숲과 집이 파괴됨으로 이들 신들의 무력함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물러난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과 신하들이 아직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9:31-35

우박 재앙이 내린 때는 보리의 이삭이 나온 시기이고 삼은 꽃이 필 때였습니다. 이 때 우박과 불이 내려 이 농작물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않을 때였습니다(32). 보리의 이삭이 피고 삼의 꽃이 피는 시기는 대략 1-2월 정도입니다. 따라서 우박 재앙의 시기는 1월말에서 2월말 정도에 해당합니다. 밀과 쌀보리는 3월말에 수확하였는데 우박 재앙이 내릴 때는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않은 때라 우박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삼이라는 식물이 나오는데 애굽 사람들은 이 식물에서 아마포 천을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제사장들과 귀족들은 아마포로 만든 의복을 입었습니다. 특히 아마포는 제사장 의복을 사용되었는데 삼 농사가 우박으로 인해 완전히 망쳤으므로 제사장들은 이 옷을 입지 못하였고 이는 그들의 신들에 대한 불성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박 재앙은 여러 신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재앙은 사람을 괴롭게 하는 재앙이지만 우박과 불 재앙은 사람이 맞으면 죽게 되는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박 재앙은 애굽 사람의 죽음을 보는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바로는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습니다.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용수철과 같이 그의 완악한 마음도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바로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와 신하들은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치닫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의 권능과 살아계심을 인정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로는 머리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파멸의 행로를 고수하였습니다. 그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처음에 자기 잘못을 발견하였을 때 이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감으로 이성적으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이미 굳어진 마음 때문에 파멸로 가는 관성을 거스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뇌에서는 명령을 내리지만 중추신경이 파괴되어 몸으로 전달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덟째 재앙: 동풍으로 메뚜기를 몰아오심(10:1-20)

출애굽기 10:1-2

하나님은 우박 재앙에 이어 여덟 번째 재앙으로 메뚜기 재앙을 내리고자 하셨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열 재앙 중 장자 재앙을 제외하고 가장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메뚜기 재앙 이야기에서는 모세와 바로의 대결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재앙 이전과 이후의 바로의 반응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옵니다. 여덟 번째 재앙 이야기의 특징적인 것은 바로가 메뚜기 재앙이 있기 전에 장성한 이스라엘 남자들이 일시적으로 애굽을 떠날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 양보한 것입니다.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은 우박 재앙 이후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고 가축들이 죽었으며 우박으로 인해 온 나라가 황폐화된 상황을 보았습니다. 바로는 또 다른 역대급 재앙이 오면 애굽은 더 이상 설 수가 없을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재앙이 임하기 전 먼저 양보의 제안을 합니다. 바로는 제사를 드리는 일은 여자와 어린 아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장정만 보내기를 제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일시적으로 광야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 애굽을 떠나 여호와께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에게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신하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셔서 여호와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완악함을 이용하여 그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1-2절에서 “표징”이라는 용어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징”은 단순한 이적이 아닌 메시지가 담긴 이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은 이 표징과 그의 능력의 증거를 보이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바로가 겸손해져서 즉시 항복했다면 그 싸움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폭군의 완고함은 부싯돌과 철의 충돌로 불이 생성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더 많은 기적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독특하고 특이한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평범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곧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든 애굽의 신들과 달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며 자연세계를 지배하시는 분이시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려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애굽 백성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라는 메시지를 알게 하려고 표징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표징을 애굽 사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그 자손의 귀에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라는 구절에서 “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통을 가하다, 가혹하게 다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ESV와 NIV에서는 how I dealt harshly with the Egyptians(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가혹하게 대했는지)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NRSV는 have made fools of로, RSV는 have made sport of로, NASB는 made a mockery of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놀리다, 조롱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신 것은 학대의 의미라기보다 우상을 섬기는 그들에게 우상의 무력함과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놀리신 것으로 ‘굴욕’과 ‘치욕’의 의미를 강조한 번역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단순한 장난감으로 여기시고 갖고 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백성에게 행하신 재앙은 애굽의 신들의 무력함과 헛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의 대상은 모두 그들의 신들과 관련되어 있었고 이는 그들의 신들을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우상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수치를 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주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그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알게 하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표징을 모세의 아들과 모세의 자손의 귀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들은 모세의 혈통적 자손이라기보다 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자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이시는 것은 일시적 목적이 아니라 그들 자손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치며 그들과 거룩하고 영원한 언약을 맺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자기 백성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는 후렴구처럼 계속 반복되는 메시지입니다. “여호와인 줄 알리라”의 대상이 “네 아들과 네 자손”으로 여기서는 후손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모세가 살던 시대의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알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의 역사를 대대로 기억하도록 역사교육을 시켜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0:3-6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3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했습니다. 4번째 파리 재앙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했고, 5번째 심한 돌림병 재앙의 때에는 모세에게, 6번째 악성 종기 재앙의 때에는 모세와 아론에게, 7번째 우박 재앙의 때에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번째 재앙에서는 아론이 등장하지 않다가 8번째 재앙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모세와 아론은 항상 동행하였으며 이야기를 기록할 때 같은 방식보다는 변화를 주면서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말이 아니고 반복해서 언급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박해받고 고통 받는 백성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심으로 수사의문문 형식을 통해 바로의 교만을 책망하십니다. 바로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지 않는 교만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죄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고 교만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고 교만으로 인해 그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교만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롬 1:21). 사람이 참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아무리 겸손하고 예의가 있고 교양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지 않고 자기를 높이고자 한다면 그는 교만한 죄인입니다. 

오만과 교만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1:8) 시대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의 태도를 특징짓는 특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거부하였기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굴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 질문은 바로의 마음의 완악함의 책임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지 않은 교만으로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완고함을 이용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4-6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메뚜기 재앙의 심각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박 재앙과 다가오는 메뚜기 재앙은 이집트 농업 경제를 무너뜨리는 원투 스트레이트 펀치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우박 재앙을 피한 농작물을 황폐화시켰습니다. 메뚜기가 지면을 덮으면 사람은 땅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후 애굽 땅에 모든 식물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 암흑 재앙으로 애굽은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황폐한 제국이 될 것입니다. 두꺼운 먼지바람이 불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먼지 대신 메뚜기의 바람이 휘몰아 닥치면 그 끔찍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흙의 먼지는 작은 입자라서 눈 앞에 희미한 형상이라도 보이게 하지만 메뚜기 떼는 인간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릴 것입니다. 심지어 태양을 덮어 한낮이 밤중처럼 어둡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는 농작물만 먹는 것이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가 집 안의 먹을 것까지 싹쓸이 할 것입니다. 애굽에는 녹색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황토색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역사 이래로 이같은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박의 전례 없는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과 비교적 유사한 표현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후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로를 만난 기록에서 처음 쓴 독특한 표현힙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바로 앞에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왕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뒷걸음질 쳐서 나오지만 돌이켜 나왔다는 것은 이제 애굽 왕이 최소한의 예의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도 여행을 갔을 때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게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행위와 같습니다(마 10:14; 막 6:11; 눅 9:5). 이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거부의 반응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생명의 복음을 간직한 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마 16:19; 18:18).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허락하여 주셨고(롬 15:16),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벧전 2:9).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간직한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구원과 심판을 주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권력과 화려함에 주눅이 들 필요가 없고 당당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10:7-8

바로의 신하들은 모세와 아론을 애굽의 함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바로의 말에 절대 복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고집으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바로에게 직언을 한 것입니다. 애굽이 망하지 않도록 하려면 이스라엘을 보내어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소 무력해진 바로에게 그의 무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평소 같았으면 바로의 실정을 비판하는 말을 꺼낸 것 자체로 그들은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함정”은 모든 영어 성경이 snare로 번역하는데 그 뜻은 줄에 고리를 만들어 매듭을 지은 ‘올가미’를 의미합니다. 신하들은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존립에 올가미가 되어 애굽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올가미의 역할을 하는 그들을 내보내는 것이 애굽이 살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가미로 묶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종으로 삼아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애굽은 그들의 노동력으로 풍요와 번영을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으로 이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올가미가 되어 애굽이 종의 입장이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하들은 그들의 비굴한 아첨이 바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함으로 재앙을 재촉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신하들이 재앙을 통해 제 정신이 돌아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기보다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저항이 실패했으므로 궁여지책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완고한 바로와 같이 여건이 나아지면 다시 완고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는 신하의 제안에 수긍했습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등을 돌리고 떠나자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도록 허용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바로는 완전히 굴복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는 뜬금 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갈 자는 누구 누구냐?” 만일 그가 하나님께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려 했다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설마 모세가 그의 백성을 다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가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허용하되 조건을 내걸고자 한 것입니다. 바로가 재앙이 닥치기 전에 그들이 떠나도록 허용한 것은 그로서는 통 큰 양보입니다. 재앙의 끔찍함을 견디지 못해 허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주석 출애굽기 애굽에 내린 열 재앙1
성경주석 출애굽기 애굽에 내린 열 재앙2

출애굽기 10:9-11

모세는 바로의 반응에 이제 좀 수그러드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협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모세는 “남녀 노소”라고 말함으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다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재산까지 다 가지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은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영구적으로 이주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타협이라는 명분으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정치의 세계나 사업의 영역에서 타협은 어떤 일을 이루는 데 적절하고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역에서는 타협이 결코 통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원리를 진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셨는데 사탄은 이 말씀을 배타적이라고 비난하도록 부추깁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다원주의 분위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타협이라는 그럴듯한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다른 신들은 사람이 만든 신이라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만이 십자가 대속과 부활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고 유일한 중보자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는 조금의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믿지만 세상적인 분위기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고상한 행위를 첨가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이원론자들이 그러하였고 오늘날은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자는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그러합니다. 이런 다원주의적이고 타협하는 분위기에 젖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다는 진리를 포기하고 타협의 여지를 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분명한 입장을 취한 것처럼 타협이라는 ‘다른 복음’을 분별하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절대 복음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10절에서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는 표현은 비꼬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 착각하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라는 구절은 바로가 비꼬고 있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ESV를 보면 Look, you have some evil purpose in mind로 “보라! 너는 나쁜 의도를 갖고 있구나”라는 뜻이 됩니다. 새번역은 “그래, 어디 다 데리고 가 봐라! 너희와 함께 있는 너희의 주가 나를 감동시켜서 너희와 너희 아이들을 함께 보내게 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가 8절에서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라고 할 때는 그가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10절에서 비꼬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너희에게 나쁜 것이니라”는 말은 “네가 내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너는 정말 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라고 함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로 삼았습니다. 

11절은 바로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바로는 가족의 대표만 참석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장정들이 애굽에 남아 있는 처자식을 생각해서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자와 어린 아이를 볼모로 삼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에서 남자 중심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17:2-3에서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라는 구절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모두 우상숭배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장정들만 가도록 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신들을 섬기는데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두었다는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을 볼모로 삼으려고 한 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가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왜곡시켰습니다. 바로는 남자만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모세가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바로는 모세로부터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습니다(5:1; 7:16; 8:1; 8:20; 9:1; 9:13; 10: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백성”은 여자와 어린 아이가 배제되고 장정만 해당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는 자기 판단을 억지로 모세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바로는 큰 마음 먹고 모세에게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타협하지 않자 그의 굴복의 제안을 한 것을 후회하고 모세와 아론을 쫓아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쫓아낸 것은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은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0:12-15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애굽 땅 전역에 임할 재앙의 개시를 알리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도록 특정하셔서 메뚜기 재앙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밭의 모든 채소”는 every plant in the land(ESV)로 그 땅의 모든 식물을 말합니다. 이는 밭의 채소 뿐만 아니라 사람이 경작하지 않는 모든 식물을 말합니다. 이 재앙은 7 번째 우박 재앙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밭의 모든 채소에 피해를 입히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상징적인 행동을 했고 여호와께서는 동풍을 일으키셨습니다. 메뚜기는 일반적으로 멀리 이동하지 못하지만 강한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타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본래 메뚜기는 에티오피아에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동풍을 타고 온 메뚜기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몰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동풍은 자연현상을 거스려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위한 초자연적인 이적입니다. 동풍을 타고 온 메뚜기 떼는 애굽 온 땅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저자는 이 메뚜기 재앙을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재앙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메뚜기 떼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메뚜기가 하늘을 뒤덮자 태양을 가리워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황사나 먼지 폭풍이 불면 해가 가리워 어두침침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메뚜기 떼가 햇빛을 가리는 현상은 이보다 더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메뚜기가 땅에 내려 앉자 우박에 상하지 않은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어 치웠습니다. 그 결과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않았습니다. 우박 재앙은 보리의 이삭이 피고 삼의 꽃이 피는 시기인 1-2월에 발생하여 보리와 삼에 피해를 입혔으나 3월말에 수확하는 밀과 쌀보리는 피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메뚜기 재앙은 3월말에 임하여 밀과 쌀보리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힌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박 재앙으로 곡식의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고 게다가 메뚜기 재앙으로 밀과 쌀보리마저 피해를 입었으니 애굽 사람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메뚜기떼를 막는 신 세라피아(Serapia)와 폭풍과 농작물의 수호신 셋(Seth)을 겨냥하여 내리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0:16-17

한 나라의 지도자가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의 권좌는 심각한 타격을 받아 위태롭게 됩니다. 독재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먹을 것을 해결해주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우박 재앙으로 보리와 삼에 피해를 입었고 메뚜기 재앙으로 밀과 쌀보리마저 피해를 입어 이제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이 식량 문제를 겪되면 폭동이 일어납니다. 바로는 자기의 자리가 위협을 받게되자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그가 사과한 것 중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간구한 것입니다. 바로는 일곱째 우박 재앙 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9:27). 그런데 바로는 여덟째 메뚜기 재앙을 겪은 후에 그의 사과에서 그가 범죄한 대상을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정하였습니다. 일곱째 재앙을 당할 때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죄를 지었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지었다고 구체화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용서를 구하였고 그는 모세에게 하나님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그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번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그 이전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는데 그는 그것을 뒤집은 것을 시인한 것입니다. 그는 “이번만”이라고 언급함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습니다. 

바로는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는 메뚜기 재앙을 “죽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죽음”은 NIV에서는  ‘이 치명적인 재앙(this deadly plague)’이라고 함으로 메뚜기 재앙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풀어서 번역하였습니다. 바로는 우박 재앙과 메뚜기 재앙의 결합으로 그들의 식량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은 단순한 불편함이나 일시적인 고난이 아니라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표현은 10 번째 재앙인 장자 재앙을 본의 아니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자기 고집과 교만으로 자존심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곧은 목을 꺽으며 수치와 굴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의 대가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게 하십니다. 악인들은 그들이 죽음의 길로 가면서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라고 외치지만 자기 자신은 그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바로는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충성심을 가지고 기꺼이 순종해야 할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기 죄를 참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너희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에게 영광과 감사를 돌리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10:18-20

모세가 바로에게서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셨습니다. 목을 뻣뻣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던 바로가 재앙을 만나면 후회하고 잘못했다고 빌고 재앙이 물러가면 도로 완악하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가 아닌 마지못한 후회를 했을지라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면 내리신 재앙을 거두시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아무리 악한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이라도 그들이 재에 앉아 금식하며 회개할 때 내리시기로 한 재앙을 거두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동풍 대신 서풍을 불게 하셔서 메뚜기 떼를 홍해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풍을 서풍으로 바꾸시는 자연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아무리 과학의 힘으로 자연 현상을 바꾼다고 노력해도 인간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태풍이 발생하여 불어 올 때 그 진로를 예측하고 태풍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비하지만 태풍의 진로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사람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강하게 불어 일으키시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잔인하게 박해하던 자로 도전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를 그의 주권과 일방적인 은혜로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빛으로 역사하셔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의 역사의 주권자요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거두시자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표현으로 그의 완악함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지은 죄이며 그가 완악하기를 선택한 것을 말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의 완악함을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데 사용하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셔서 그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은 잠시 후회하고 굴복할지 모르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거나 부드러워지지 않고 상황이 회복되면 도로 자기 욕심과 고집이 살아나 완악하게 됩니다.  

아홉째 재앙: 흑암을 내리심(10:21-29)

출애굽기 10:21-23

애굽에게 임한 흑암은 개기일식과 같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흘 동안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들은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집에 갇혀 밖을 나돌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등불 외에는 빛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불을 켜놓으면 칙칙한 안개 때문에 등불이 꺼져버려 집안에서조차 빛을 밝힐 수 없을 정도의 흑암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내린 흑암은 “더듬을 만한 흑암”으로 빛의 부재 상태가 아니라 어둠이라는 실체가 있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흑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체가 있는 살아있는 어둠을 보내셔서 그들이 밝히 등불이 전혀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록 18:22-23은 지옥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계시록이 말하는 지옥은 소리도 들리지 않고 흑암 속에서 등불 빛도 켤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곳은 손가락 끝으로 흑암을 감촉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계 16:10-11). 애굽 사람들은 완전한 흑암 속에서 흑암이 주는 공포와 그 권세에 압도당하여 자기 처소에서 일어난 자가 없었습니다(23). 흑암 재앙은 애굽의 태양과 관련된 신들, 즉 햇빛과 따뜻함을 제공함으로 곡식과 열매를 맺게 하는 태양신 레(Re)와 태양의 여신 호루스(Horus)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바로와 백성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배척했습니다. 빛을 배척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흑암 권세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지만 그들이 사랑했던 어둠은 그들에게 공포와 속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가공할만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악인에게 주어질 영원한 어둠이 주는 고통은 영원한 고통으로 우리는 그 끔찍함이 어떠할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애굽을 어둠으로 뒤덮었지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을 여전히 비추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그를 믿는 백성과 그를 배척하는 백성을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구별된 백성들에게는 빛을 비추이시고 어둠이 그들을 주관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로가 아무리 궁전에서 화려한 삶을 산다고 하지만 그 곳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인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오두막에 살지만 빛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말씀의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냥 어둠 가운데 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이며 방황하다가 어둠이 주는 공포와 속박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 빛을 거부하면 우리의 길은 어둠과 같아서 가다가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잠 4:19).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고 형제 사이에 진정한 사귐을 갖게 됩니다(요일 1:5-6). 하나님의 구별의 은혜를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가 비추는 빛을 영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요 1:11-12). 

출애굽기 10:24-28

사흘 동안 어둠의 공포에 시달린 바로는 모세를 불러 마지 못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들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어린 아이들은 함께 가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할 때에는 양과 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축들을 남겨두고 가라는 것은 결국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로가 갑자기 양과 소를 머물러 두고 가도록 허용한 것은 아마도 다섯 번째 재앙인 심한 돌림병 재앙과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 때에 죽은 애굽의 가축의 손실을 보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애굽은 우박 재앙과 메뚜기 재앙으로 곡식과 채소와 과일이 남아있지 않았고 수많은 짐승들도 재앙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는 이런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이스라엘이 남긴 가축이라도 담보물로 붙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가축들을 붙들어 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사를 드린 후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희의 양과 소를 머물러 두어라” 이 말은 사탄이 믿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두도록 유혹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세상에 남겨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미련을 갖게 될 것이고 미련 때문에 조금 가다가 다시 되돌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면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62). 롯의 아내는 그녀가 살던 소돔 성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그래서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도록 하시면서 멸망당할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눅 17:32).

바로의 타협에 대해 모세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그가 왕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25). 이 구절은 새번역에서 “임금님도 우리의 주 하나님께 바칠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더 보태 주셔야 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는 자기들의 가축을 가져갈 뿐만 아니라 왕도 하나님께 드릴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보태주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재앙인 장자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은금 패물을 갖고 나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에게 장자 재앙으로 치신 후 그들의 항복을 받고 출애굽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습니다(12:36). 이 사건은 모세가 바로 왕에게 왕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주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양과 소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의 소유도 가지고 가야 함을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타협에 대해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의 권위로 바로에게 그들의 소유를 당당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이스라엘 소유의 가축을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박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떤 가축을 희생할지 정해진 것이 없어 다 가지고 가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면서 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드릴 제사는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입니다. 이 때마다 드리는 제물이 다릅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이므로 어떤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할지 규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다 가져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타협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유물을 다 가지고 가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 존중하는 말로 바로의 부적절한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바로는 모세의 거절에 화가 났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완전한 굴복을 원하는 것을 깨닫고 그 동안 수그러들었던 그의 완악한 마음이 다시 솟아 올랐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로는 흑암 재앙의 공포로 마지 못해 부분적으로 승락한 것이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27).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이상 그는 여전히 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항복과 더불어 그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그를 향해 돌이키고 그를 영접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구별된 백성인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감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인정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항복, 완전한 영접, 완전한 헌신이 진정한 회개요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원리는 바로에게도 적용됩니다. 바로는 후회는 하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항복하는 것 같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그의 악한 본성은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는 것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화가 나서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협박하고 모세를 내쫓았습니다(28). 바로는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을지언정 다시는 모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얼굴을 다시 보는 날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다시 모세를 만났을 때 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전하는 열 번째 재앙의 예고대로 그의 장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선포했던 그가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는 이제 대화를 거부하고 협상의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지 않았고, 신하들의 고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앙이 점점 더 심각해져갔지만 여호와를 자신의 노예의 신으로 우습게 여기고 자존심만 내세웠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말을 그대로 되받아쳤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29) 이는 모세의 최후의 통첩을 의미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의 때에는 바로와 애굽의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재앙 이후 모세와 그의 백성은 영원히 애굽을 떠나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완고한 바로를 상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잔인한 독재자의 강제 노동과 속박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애굽에서의 고통의 시간은 한낱 과거의 역사로 묻힐 것입니다. 

열번째 재앙의 예고: 처음 난 것을 치심(11:1-10)

출애굽기 11:1-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재앙”은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 애굽의 모든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의 죽음의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 중 “내보내리라”는 말이 2회 반복되었습니다. 또한 내보내는 방법은 쫓아내는 식입니다. 바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붙들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붙들었다가 애굽이라는 나라가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가 아니라 애굽을 위협하는 화의 근원이 되어 더 이상 그들을 그의 소유로 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애굽 사람에게 “말하여” 그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여”는 Speak now in the ears of the people(KJV)로 ‘귀엣말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 사람의 집을 강탈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격적으로 말로 그들이 광야에서 지낼 필요한 은금 패물들을 부탁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기꺼이 그들에게 내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것은 애굽을 도망치듯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공식적으로 그 나라를 나온 것입니다. “은금 패물”은 단순히 보석 장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축제에서 쓸 금은 그릇과 광야의 거친 바람과 추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의복 등 그들이 광야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할 수 있는 이유는 3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 사람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이게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7:1).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애굽의 노예로 애굽 사람들의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 취급 받지 못했고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착취하였고 그들에게서 수많은 것들을 빼았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애굽 사람에게 뛰어난 백성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열 재앙으로 폐허가 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지역을 구별하여 보호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신들이고 어쩌면 모세의 반복되는 메시지인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7:5,17; 14:14,18)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믿는 신들은 가짜 신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가짜이거나 열등한 신들을 믿는 열등 백성이고 이스라엘은 참신이신 여호와를 믿는 특권을 부여받은 탁월한 백성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동안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이해할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 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물질적 지원을 해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라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창 15:14). 

출애굽기 11:4-6

모세는 다시 바로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모세는 그 전에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고 바로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선언이 끝나고 얼마되지 않아 다시 바로를 찾아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의 살해의 위협에 맞서서 그의 단호함을 보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0:28-29). 그는 마지막 재앙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갖고 바로를 찾아갔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무엇인지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밤중에”는 모세가 바로에게서 나온 날 밤이 아닙니다. 이 날은 니산월(아빕월) 14일 밤, 곧 유월절 밤을 가리킵니다. 이 때는 양력으로 3-4월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이 날을 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하셨고 1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1월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어린 양을 잡아 유월절 예식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12:2-3). 그러므로 모세가 바로에게서 나온 날부터 유월절을 행하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을 것입니다. 모세가 장자 재앙을 예고하고 여러 날이 지나서 한밤중에 장자 재앙이 갑자기 임하였으니 바로는 그 재앙이 언제 올지 몰라 여러 날 동안 두려움 가운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밤중을 택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다 깊이 잠든 밤에 그들은 가장 취약하고 무방비 상태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장자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니다. 애굽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의 장자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심한 통곡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실행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사람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두루 다니실 것이라고 하심으로 직접적인 개입하셔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는 재앙의 심각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의 재앙은 나일 강이 피로 변하거나 우박이 내리고 흑암이 뒤덮는 자연의 것을 이용한 재앙이나 개구리나 이, 파리나 메뚜기와 같은 곤충이나 양서류에 의한 재앙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의한 돌림병이나 악성 종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치신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재앙은 애굽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는 것일 뿐 사람의 생명에는 치명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장자 재앙은 신들이 아닌 애굽 사람들의 자신의 생명과 같이 여기는 장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가 가진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 16:26; 막 8:36; 눅 9:25).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장자 재앙으로 애굽을 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바로의 장자를 언급하셨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우두머리입니다. 맷돌 위에 있는 몸종은 맷돌을 가는 종을 말합니다. 맷돌을 가는 것은 가장 힘든 중노동으로 맷돌을 가는 종은 가장 비천한 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회 계층의 피라미드의 꼭대기부터 가장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모든 애굽 사람이 그의 재앙의 대상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축은 그들의 재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의 장자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인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치심으로 사실상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실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가계를 잇는 상속자였고 아버지가 늙어 무력해지면 장자가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만큼 장자는 두 몫의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신 21:17).  하나님께서 장자를 치신 것은 그 동안의 아홉 재앙과 달리 그들에게 치명타를 날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자를 치심으로 애굽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장자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 저항한 바로를 죽이지 않으시고 그의 장자를 죽이셨을까?”라는 궁금증이 들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백성들의 장자까지 죽이신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게다가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의문과 회의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이 사건을 적절히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의 장자는 신의 아들로서 후계자로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장자를 죽이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가 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거두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그가 재난을 당할 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이런 욥의 자세가 그의 피조물이 우리가 취해할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생명을 생명의 수여자를 위해 사용할 때 그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한 뜻을 섬기는데 쓰임받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늙은 나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젊은 나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해서 우리 삶이 불행한 것이고 늦게 데려가신다고 해서 우리 삶의 축복받은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는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고 그의 주권에 나의 삶을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나라를 징벌할 것이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정복 전쟁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시는 것을 늦추시는 이유를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라고 설명하셨습니다(창 15:16).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는 즉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그의 인내의 게이지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육체가 되어 버린 노아 시대에도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시기까지 120년을 기다리셨습니다(창 6:3). 그 사이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세상에서 대해 심판을 알렸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방주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열 재앙을 통해 애굽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만일 애굽 사람 중에서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도 마땅이 멸망하기로 작정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과 모압 여인 룻입니다. 이들은 멸망당할 족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 섰고, 하나님은 이들을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가계를 잇는 역사에 쓰시고 그들을 높이셨습니다(수 6:25; 룻 4:10-12). 그러므로 우리는 애굽에 대한 징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열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보응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움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의문과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자기가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세상에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질병과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행은 선인이나 악인이니 구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죄의 대가로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런 저주는 피조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다 함께 탄식하며 썩어짐의 종 노릇하고 있습니다(롬 8:19-21). 하나님의 심판에는 행위대로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죄로 인해 죽을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언약과 택하신 백성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들을 구별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장자 재앙을 면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유월절 예식을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에 장자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에 대한 대속의 원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1:6-8

장자 재앙으로 인해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것입니다. “큰 부르짖음”은 슬픔과 절망과 고통을 수반하는 외침을 말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장자를 잃게 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가장 큰 슬픔으로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극적인 반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에게서 태어난 남자 아이를 나일 강에 던지도록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1:22).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었습니다(2:23).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억압한 애굽 사람들이 맏아들을 잃게 되어 크게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눅 18:7). 애굽에서 장자가 한꺼번에 죽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재앙의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십니다. 애굽 전 지역에는 장자를 잃은 슬픔으로 큰 부르짖음이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 지방에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어 땀을 배출하며 쉬지 않고 혀를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이런 개가 혀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입니다.하나님께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보호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개들이 그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셔서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 평온함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개는 청각과 후각이 발달되어 인기척만 나도 짖습니다. 이런 개들은 장자 재앙으로 부르짖는 애굽 사람들의 곡소리를 듣고 짖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개들의 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고 그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거주하고 있는 고센 지역에 고요함과 평온이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애굽의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과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는 평온함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베푸시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예식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그의 신하들이 모세에게 내려와 그에게 절하며 간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복종하고 바로의 말을 들었지만 장자 재앙을 당한 후에는 모세에게 절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7:1). 바로에게 절했던 애굽 사람들이 모세에게 절한다는 것은 바로에게 또 다른 굴욕입니다. 모세는 모든 애굽 사람들의 바로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바로의 차별 정책에 동의하고 바로를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연이은 재앙을 겪고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점자 애굽인들은 바로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지독한 폭군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순순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한 것을 보면 그들의 자세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재앙을 바로에게 선포한 후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왔습니다(8). 모세의 이런 분노는 10:28에서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라는 선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는 반복되는 바로의 번복과 변덕을 참고 참다가 바로의 살해의 위협에 대해 드디어 그의 분노를 터뜨린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표현한 분노였습니다. 모세가 열 번째 장자 재앙을 선포함으로 바로와의 지리한 협상은 끝난 것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아오지 않을 것이며 마지막 재앙의 선포로 그는 바로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입니다. 모세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능을 주장했던 자였습니다(4:10). 그러나 지금 모세의 모습은 담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영적 전투를 통해 당신의 종들을 훈련하시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당하는 고난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믿고 고난의 의미를 알고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해야 합니다(롬 5:3-4).   

출애굽기 11:9-10

9-10절은 7:8에서 시작된 바로와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열 재앙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그의 기적을 더하셨습니다. 바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바로의 완악함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완악함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고쳐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완악했던 것이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앙을 겪으면 불편함과 처참함 때문에 잠시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소유로 생각하고 결코 놓치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그의 탐욕은 마귀의 본성 그 자체를 잘 나타냅니다. 마귀는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고 결코 내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죄의 대가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 사로잡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엡 2:1-5).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의 삶은 바로와 같은 끈질기고 강한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의 종으로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를 통해 마귀의 속성을 알 수 있고, 그 가운데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의 역사를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의 완악함과 욕심을 닮은 사탄과의 처절하고도 피나는 전투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함을 사용하셔서 그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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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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