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pring

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광야 훈련(출애굽기 15:22-18:27)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2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신 후 그들을 잡으러 온 애굽 군대를 바닷물로 덮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광경을 보고 신 중에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온 백성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험난한 과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품을 갖도록 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심으로 그들의 공급자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 샘물을 내심으로 그들의 영혼의 샘물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도록 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자세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백 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 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모르는 왕이 등장하면서 애굽의 노예로 살아 노예 근성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이었고 참을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살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적 유익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거룩한 백성답게 살도록 가장 기본적인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훈련과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한 최저 기준이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심(15:22-27)

출애굽기 15:22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에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그들은 흥에 겨워 노래하고 소고에 맞추어 춤도 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승리의 감격은 잠시 이내 어려움에 부딪혀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르”는 히브리어로 ‘성벽’이라는 뜻이고, 애굽 말로 ‘성벽’은 “에담”이라 “수르 광야를 “에담 광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민 33:8). 이곳은 애굽 북동쪽과 팔레스타인 남쪽 사이의 경계에 있던 광야입니다. 또한 “수르”는 “술”(Shur)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창 25:18; 삼상 15:7). 이곳은 사라의 종 하갈이 쫓겨나 샘을 발견했는데 이 샘이 있는 곳이 ‘술’ 길로 가는 곳이었습니다. 하갈은 자기의 처지를 보살펴준 하나님께 감사하여 그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은 이 지역에 거주하였습니다(창 16:7-14). 

그들은 홍해를 건너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수르 광야는 인적인 드문 곳이었고 그들이 가죽부대에 담아온 물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수르 광야에는 애굽이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애굽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사흘 길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끈질기게 요구한 그 길이었습니다(출 3:28, 5:3, 8:27).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요구가 드디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남쪽 시내 산 광야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바닥이 났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목이 마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데리고 온 가축들까지 목이 말라 지쳤습니다. 그들은 사흘 길을 가면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성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기대와 정반대로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초신자들이 실망을 하여 회의와 불신을 갖고 과거의 옛 생활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훈련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난관을 만나게 하심으로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후 가장 먼저 갈증 문제에 부딪히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5:23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그들은 물을 찾고 있던 중 마라에 이르러 샘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의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쓴 물(bitter spring)’이라는 뜻입니다. 이 샘은 겉으로는 마실 수 있어 보였지만 마실 수 없는 성분이 용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들이 먹기에도 불쾌한 맛을 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목말라도 바닷물을 먹을 수 없는 것 같이 쓴 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험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해서는 안될 말을 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11-12)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입에서 이런 망발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심판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마라의 샘물을 이용하여 그들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때 그들은 예전과 같이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말하며 모세에게 원망하였습니다. 이를 좀 더 부드럽게 번역하면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공동번역). 그들은 “우리더러 이 쓴 물을 마시라는 말이냐?”고 하면서 마구 마음에 있는 말을 다 내뱉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를 내는데 이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약 3:1-12). 

말은 직접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 해를 가하지 않지만 심리적 해를 가하는 독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나 주의 종을 향한다면 큰 범죄입니다. 우리는 원망, 즉 감정적 분노 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6-7).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다면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여서 하나님께 먹는 물을 위해 간절히 기도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구름 기둥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으로 인도하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면 당연히 물을 공급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성숙한 백성으로 조금의 불편도 인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인내하지 못함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합니다. 

출애굽기 15:25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모세는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이 원망하였을 때 같이 감정적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결코 자기 감정을 드러내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으로 나아가 아뢰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평안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다급하고 절망하여 나아가지만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그 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작은 나무 가지가 먹을 수 없는 쓴 물을 달게 했는지 그 화학적 변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피의 강이 도로 맑은 물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실 수 있고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지 못할 불가능한 일은 없으십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이런 기적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말씀하신 대로 기꺼이 행하는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데에는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과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는 명령에 순종한 하인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요 2:6-8). 모세도 왜 해야 하는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을 때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이해 대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첫 단계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마라에서 하나님께서 쓴 물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법도와 율례”는 같은 말의 반복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법을 말합니다. “시험하다”는 것은 고난이나 어려운 상황을 겪게 하심으로 ‘교훈을 배우도록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쓴 물은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겪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이제 다시 애굽 군대가 쫓아올 수 없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의 영토에서 벗어났고 이제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축복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된 시작 단계에서부터 그들은 ‘마라의 쓴 물’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라의 쓴 물’ 사건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이런 ‘쓴 물’을 만나게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는 분이심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하기를 바라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늘 해결책을 이미 마련해 놓고 계셨음을 그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할 나무를 오래 전부터 키우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준비해 놓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놓고 계시지만 우리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라의 쓴 물’이라는 현실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겪는 ‘쓴 물’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로 인한 모든 저주를 다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감미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쓴 물을 겪을 때 단물로 변화시키는 나무인 십자가를 보도록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쓴 물을 통해 이런 십자가의 효능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쓴 물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하시고 연단을 통해 인격의 열매가 맺히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15:26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 비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복을 받으려면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보기에 의를 행하며 그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모든 규례를 지키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어 순종하고”는 두 동사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ESV에서는 부지런히 듣다(diligently listen)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절은 개역개정에서는 5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는 ‘부지런히 듣다’, ‘행하다’, ‘귀를 기울이다’, ‘지키다’의 4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듣는 것과 관련된 단어는 2개, 행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도 2개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들어 순종하다”는 것은 ‘부지런히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게으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안되고 의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셨을 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고 이마 사이에 말씀 상자를 달아 매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적용은 일률적이고 획일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용의 규례를 율법의 본질보다 앞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장로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오류를 범했습니다(마 7:5-8). 적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적용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각 사람에 맞게 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적용이 없다면 말만 하는 이론적인 신앙에 그치게 됩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따르지 않게 됩니다. 

“지킨다”는 말은 다른 말로 간직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들어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잊게 됩니다. 그래서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적는 것도 듣기 위해 중요한 방편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충분한 시간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도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그 말씀이 필요할 때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요 14:26).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순종하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그들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풍부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완악하게 할 때 그들은 애굽인들이 당했던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인이 당한 본보기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애굽 사람들이 당할 재앙을 그대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재앙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질병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끼시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의 치료받고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받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선한 삶의 법칙입니다.

이 말씀이 신자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에 걸린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병에 걸리면 즉시 치료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치유하는 권세가 여호와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의미하시는 치료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침은 죄 사함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질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인간은 죽게 되었습니다. 질병은 그 죽음의 저주의 일부분입니다.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국 인간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곧 죄 사함을 의미합니다. 죄 사함은 죽음의 형벌에서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영생으로 수렴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죄 사함은 부활로 확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주시고 죄의 삯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은사로 주셨습니다(롬 6:23). 치료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질병에서 치료하시는 분, 즉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마 9:2; 막 2:5; 눅 5:20). 이는 죄 사함이 질병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근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죄 사함의 관계에서 죄 사함이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적인 의사로 소개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5:31-32). 이를 볼 때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곧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죄로 인한 우리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7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갈증을 급하게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신 곳이고 장막을 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들이 장막을 친 곳은 엘림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더 많은 물이 있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70그루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물 곁에 장막을 치고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엘림은 ‘상수리 나무, 거대한 나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 두 번째로 장막을 친 장소입니다(16:1; 민 33:9-10). 엘림은 남쪽에 있는 시내 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곳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시나이 반도의 수에즈 만에서 약 96.5km 떨어진 와디 가란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열두 샘물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종려나무 70그루는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 숫자를 쓴 것은 엘림이 우연히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곳으로 충분한 휴식과 회복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두게 하심(16:1-21)

출애굽기 16: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마라에서 원망은 물에 관한 것었지만 이제는 먹을 것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고 광야에 이른 때가 둘째 달 십오일(유대력 2월 15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지 한 달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들은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의 신 광야는 가데스의 신 광야와 다른 곳입니다(민 33:36). 그들은 홍해 가를 거쳐 신 광야에 이렀습니다(민 33:11). 신 광야는 홍해라고도 불리는 수에즈만 가까이 있는 광야입니다. 그들은 엘림에서 짧은 시간에 긴 거리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빠른 걸음으로 시내 산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으므로 그들이 가져온 음식은 다 떨어져갔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고 많이 지쳤습니다. 광야에서 음식을 사거나 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구름 기둥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시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신 하나님, 엘림의 열두 샘물로 충분히 마시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기도하는 대신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온 회중”이라는 것을 통해 모두가 다 원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온 회중이 원망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순탄하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사람이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풍요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고난은 오히려 영적으로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기도제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시 73:28).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배부름을 얻고, 주린 자는 주의 말씀의 양식을 먹음으로 배부를 것이며, 우는 자는 눈물의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박해를 받는 자는 하늘의 상이 큼으로 복을 얻은 자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눅 6:20-21). 그러나 이런 영적인 축복을 모를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원망하게 됩니다.

그들의 원망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그 고기를 몰래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은 항상 그렇게 배불리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노동을 하고 겨우 생존할 정도로만 식량을 공급받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었던 기억은 간혹 운 좋게 고기 가마 곁에서 일하다가 얻어 먹었을 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음식이 떨어지자 굶어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공포는 기억 왜곡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애굽의 노예 생활은 처참하고 비극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2:23).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약속대로 그들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2:24-25). 

우리는 여기서 현실이 주는 공포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기억조차 왜곡시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배고픈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잠시의 고난이 주는 공포에 휩싸여 판단력이 마비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으로 현현하시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고픔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능력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 엘림에서 열두 샘으로 마시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르치시고자 주기적으로 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기도해야 하는데 주의 종들에게 거칠게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배고픔을 통해 배불리 먹이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인데, 그들의 부정적 반응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였습니다. 결핍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주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초청인데 그들은 본성을 누르지 못하고 그 초청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하고 저주를 말하고 미친 개들처럼 맹렬히 달려드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유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아직 노예의 습관과 근성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면서 살지만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믿지 않고 살 때의 행복에 미련을 둡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며 과거의 쾌락의 삶에 미련을 둡니다(눅 9:62). 우리는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죄 사함을 받고 자유인이 되었지만 육체에 남아 있는 악한 본성은 우리를 옛날을 그리워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과거 죄의 노예의 삶이 행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인의 삶은 비참하다고 착각하고 험한 말을 쏟아냅니다. 어떻게 그들이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들은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게 제 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본성이 나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고 다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악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4:23은 마음을 지켜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부러진 말을 하고 비뚤어진 말을 내뱉습니다(잠 4:24). 

출애굽기 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때 단순히 원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어 한마음으로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의 문제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깐의 불편을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즉각 내 요구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즉각적인 해결을 해주시지 않으면 마구 불평합니다. 그들의 격렬한 소란은 그들의 불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들의 구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광야에서 죽게하는 살인자로 취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당장에 징벌하시고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참으시고 그들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장기적 식량 공급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을 훈련의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들에게 그들의 실제의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이심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받기 전 만나를 매일 아침 모으면서 그들의 신실하심을 테스트하고자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매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탐욕 때문에 미래의 불안한 상황에 대비해서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을수록 그들의 인생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모아놓은 것이 없으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이는 그들이 공급자가 계시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거두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실 때 땅의 소산으로 먹이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내린 양식으로 먹이시고자 하십니다. 시편 78:24은 이를 가리켜 “하늘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신령한 음식”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3).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으로 하늘에서 온 떡이 되십니다(요 6:35, 48-51).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육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더 확대하셔서 “나는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요 6:55).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 몸을 찢기시고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죄로 인해 그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됨으로 막힌 통로가 열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 중에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매우 큽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서 만족하고 서로 같이 나누어 먹음으로 서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도 성육신하셔서 하신 일이 먹고 마시면서 교제하신 일입니다. 성경은 이를 ‘거한다(dwell)’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a dwelling place(거처)라고 하였습니다(레 26:11).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백성 가운데 거하셨고 후에 성전을 통해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불충분하셔서 친히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4). 이제는 성령을 통해 믿는 자의 내면에 내주하십니다(요 14:17). 예수님은 거주하는 것을 이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계 3: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신 사건은 장차 생명의 양식 예수님을 허락해 주신 사건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거둘 것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실 때 일주일 분이나 한 달치 분량을 주시지 않고 날마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백성들이 날마다 양식을 거두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것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거두어야 합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지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양식을 거두다가도 내일 먹을 것이 끊어질까 하는 의심이 들 수 있었습니다. 만일 한꺼번에 주시면 백성들은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쌓아놓은 양식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날마다 거두도록 하신 것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날마다 거두도록 하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신 8:3). 하나님은 그들이 떡 문제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실제 삶의 필요를 위해 날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풍성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를 주리게도 하시고 고난을 통해 문제에 빠지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의 살아계심을 체험함으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됩니다. 출애굽기의 만나 사건은 생명의 양식 예수님과 연결되는 사건으로 하나님은 육의 양식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을 살리고 만족시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16:5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6일째에 그 거둔 것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준비”는 안식일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6일째 되는 날 갑절의 만나를 주실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두 배의 분량을 거두어 안식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준비하도록 한 것은 그들에게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일 개념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일하지 않고 쉬는 날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육체적인 안식을 할 뿐 아니라 영적인 안식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안식일을 출애굽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시 5:15). 

영적인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이루어집니다. 육체적으로 쉬기만 하면 게으름에 빠집니다. 영적인 안식이 없으면 영적인 굶주림을 겪게 되고 그 영혼에 쉼이 없고 지치게 됩니다. 영혼이 텅 빈 것 같고 심령에 무언가 꽉 막힌 것 같으며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3).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신 때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후부터입니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은 안식일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키우시고자 하셨는데 그 출발은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그 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율법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율법은 영원한 율법이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모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위한 최소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주일 성수’라고 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을 목숨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안식일 개념을 계승해서 주일에 물건도 사지 않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주일에 공부하지 않았고 주일에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성수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될 때 주일성수가 율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안식일 개념이 지나치게 느슨해지면서 주일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지 못하는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방송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필수 요소인 성도의 교제를 무시하고 설교 쇼핑을 하는 성도도 생겼습니다. 인터넷 방송이 선교와 부득이한 경우를 위해 생겼지만 우리는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믿음의 평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믿음이 크다고 평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내면을 보시는 분이십니다(롬 2:11). 그러나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실생활에서 가장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는 생활 원칙입니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쉬셨듯이 우리도 그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개념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태초의 창조 질서인 안식일 개념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라는 인간의 본래의 본분을 깨닫게 해줍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듯이 그 사람이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눅 12:33).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에게 물질을 주시고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풍성히 채우실 것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최소한의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도록 훈련하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6-7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6-7절에서 저녁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아침을 언급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 날이니라”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이는 유대의 하루 개념이 저녁 해질녘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해질녘까지가 하루로 여겼기 때문에 나온 배경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고 아침에는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라는 말은 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실 것을 가리키고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는 말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하늘에게 만나를 내리실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고 말합니다. 이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모세와 아론이 구원자로 알고 그들의 인도함에 대해 원망하였지만 사실 그들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를 원망하는 것은 그들을 대리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하는 것입니다(8). 

모세와 아론이 백성의 원망의 말을 들었을 때 몹시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원망의 말을 듣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면 사람들의 원망의 소리를 한 몸으로 받습니다. 이렇게 해도 불만이고 저렇게 해도 불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사람의 말에 상처를 쉽게 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많이 매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상처를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만큼 인간은 마음이 여리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대리자들을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믿는 자들을 강하게 담대하게 하십니다(수 1:9). 

이 말씀은 교회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딤후 3:12).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사람들의 비난과 박해을 받고 불이익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슬퍼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은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23).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위로하였습니다(벧전 4:14). 믿음으로 받는 고난은 내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출애굽기 16:8-9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저녁의 고기와 아침의 떡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괜찮은 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경작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경작하여 먹는 곡식과 과일에 비하면 초라한 음식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양적인 측면에서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든 영양가를 골고루 갖춘 완전 음식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와 떡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양식 문제에서 만큼은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시는 굶주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기간은 광야 생활 4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4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늘에서 비 같이 내린 떡을 먹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이 공급하심으로 굶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구촌의 많은 지역들이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정상 국가에서 정상적인 통치를 받는 국민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인간이 굶주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지도자들의 탐욕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별하지 않으시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십니다(마 5:45).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많이 굶지 않고 의식주를 공급받아 살고 있다면 이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어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물으셨습니다(마 6:25).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잠깐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는데 모세와 아론은 그들이 곧 여호와를 향하여 원망하는 것임을 알려주면서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원망 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6-7). 

교회 지도자에 대한 비난은 하나님께 대한 비난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고 죄인으로서 연약함과 약점과 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이런 지나친 요구는 비난과 원망으로 바뀌고 그 비난과 원망은 나에게 결코 신앙적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갈등으로 마음 고생하다가 믿음에서 떠내려갈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난 대신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비난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이해와 섬김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다는 모세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민 12:3). 모세는 평생 사람들의 배척과 비난과 원망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겸손과 온유로 백성들을 대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백성들의 불평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신경질을 내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민 20:10). 이로 인해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죽게 되었습니다(신 32:51). 우리는 원망하는 백성이나 그 원망을 들었을 때 사사로운 감정을 표출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9).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을 향하여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죄이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호소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16:10-12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지도자를 원망하는 그들에게 구름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영광은 밤에는 불기둥의 영광으로 나타났던 영광입니다(출 13:21-22).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임을 일깨워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들은 두려움과 경외와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기도 대신 원망하는 것에 대해 그들을 먹이고자 하시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그들의 원망함을 들으셨고 그들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먼저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에 질려 불평할 때 고기를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11:4-35). 민수기는 백성들의 원망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한 반면, 출애굽기는 백성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배고픔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배부르게 하시겠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요구를 원없이 충족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그들의 원망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통해 그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시고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도 하시만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도 하십니다. 베드로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그물을 씻는 자기 일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에 성실한 베드로에게 그의 배에 오르기를 청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기 위한 꼬투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눅 5:8).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함을 들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대해 진노하는 대신 그의 계획대로 저녁에는 고기를, 아침에는 떡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 그의 위엄과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놀라움과 경외함으로 엎드려 간구한 것과 같이 그들도 놀라움과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출애굽기 16:13-15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고기와 떡으로 배부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난 후 그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였습니다. 여기의 메추라기는 출애굽기 전체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단어입니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수렵조이고 유럽과 아프리카(이집트), 아시아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이 새는 몸 길이가 약 18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몸에 갈색 반점이 있어 마치 작은 꿩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새는 철새로서 3월이면 수단에서 이집트를 거쳐 북쪽(유럽)으로 날아가 알을 낳고, 가을(9월)에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는데, 주로 홍해 가까운 아카바 만과 시내 반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였습니다. 이때 메추라기는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였습니다(민 11:31). 메추라기는 땅의 씨앗과 곤충을 먹이로 하고 경작지와 초원에서 번식합니다. 이 새는 주로 하늘을 나는 것보다 땅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들이 하룻밤에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와 시나이 반도를 향해 날아오다가 지친 상태로 상륙하여 쉽게 먹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메추라기는 이집트 사람 사이에서 맛있는 고기로 인기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녁에 메추라기를 몰아 진에 덮이게 하셨는데 그 쌓인 높이만 해도 두 규빗, 즉 약 90 cm나 되었습니다. 이 정도 분량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떡을 주셨는데 이 떡은 밤에 이슬과 함께 내렸습니다(민 11:9). 이 떡은 ‘만나’라고 불리웠는데 깟씨 같이 희고 모양은 진주와 같이 동그랗게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맷돌로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그 맛은 꿀과 기름 섞은 과자 맛이 났습니다(30; 민 11:7-9). 이스라엘 자손은 이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양식은 자연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직접 만드셔서 그들에게 매일 먹을 양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이었습니다. 

이 양식은 “만나”라고 불리웠는데 그 뜻은 불분명합니다. 학자들은 16절에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만후’인데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만나’라고 번역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생활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공급받은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입맛에 맛는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양식은 다양하게 요리해서 먹을 수 있어 각 사람의 취향에 맞게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의 주식으로 사용될 정도로 영양가를 골고루 갖춘 ‘완전 식품’이었습니다. 이 양식은 하늘에서 내린 양식이라고 해서 “하늘의 양식”이라고 불렸고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시 105:40). 만나는 “힘센 자의 떡”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영양가가 풍부하여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음식이었다는 뜻입니다(시 78:25). 

느헤미야 9:20에서는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주의 만나”라고 함으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켰습니다. 신명기 8:3에서는 만나는 육적인 양식일 뿐만 아니라 만나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적인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양식을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과 함께 주어진 “신령한 음식”이라고 칭함으로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설명하였습니다(고전 10:3-4).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시고 육의 떡을 먹고 힘을 내고 생명을 유지하듯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영생을 얻고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요 6:35,49,58). 요한계시록에는 장차 임할 메시야 왕국에서 승리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상급으로 “감추었던 만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계 2:17). 이는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출애굽기 16:16-18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만나를 거둘 때 먹을 만큼만 거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기준은 한 사람에 한 오멜이었습니다. 오멜은 밀, 보리 등의 곡물류를 재는 단위로 약 2.2ℓ(한 되 두 홉)에 해당합니다. 이는 한 에바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무게입니다(출 16:13–36). ‘한 오멜’은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하루분의 양식(곡식)으로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이 거둘 수 있었던 만나의 양은 한 오멜이었습니다. 이 분량은 가장 힘이 세고 왕성한 식욕을 가진 사람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사실 하늘의 양식은 조금 과하게 먹어도 충분히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라 탈이 날 걱정은 없는 음식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지나치게 식탐을 부리지 않도록 거두는 양을 절제시키셨습니다.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는 말씀은 예외 없이 개인이나 가정 단위로 거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급식소를 운영하여 각 가정에 배분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를 고용하여 거두는 일을 시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평하게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거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는데 장막에서 오멜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거두었는데 오멜로 되어보니 정확하게 하루 먹을 분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들의 먹을 분량을 제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루 먹을 분량을 날마다 공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절제를 배웠을 것이고 날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많이 모으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끼 먹고 필요한 물건을 사용하고 생활하는데 드는 비용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고급스러운 것을 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어떤 사람은 부족하여 조금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일 뿐 그들이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부자들은 마음껏 쓰고 싶어도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세상에 축적해둔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하게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재물의 청지기로 재물을 잘 관리하고 그 재물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영생을 위한 일을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 중 절제는 중요한 미덕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오늘 하루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도록 새와 들꽃을 예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즉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마 6:25-34).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함으로 괴로움을 더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날도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을 믿고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살아게 하심으로 우리를 날마다 기적적으로 채워주심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16:19-21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거둔 양식을 아침까지 남겨주지 않도록 경고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발동한 몇 사람들은 만나를 아침까지 두어 어떤 일이 생기나 시험했습니다. 그러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모세는 이 소식을 듣자 화를 내었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감정적인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분노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진노를 나타내시지 않았지만 백성은 모세의 영적인 분노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기보다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하고 경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영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른 일반 책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으로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 그의 말씀은 모순 투성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현상을 보아도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 가득차 있는데 하물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작은 머리로 그 큰 우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의 양식이 저장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많이 쌓아두고자 하는 탐욕이 작동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그것을 쌓아두면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풍성한 소출을 창고에 쌓아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것을 기대했으나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때 그가 준비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눅 12:13-21). 

무리는 아침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남은 것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스러졌습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그 날 먹을 양식은 사라지고 굶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근면한 백성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롬 12:11). 근면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고 세상에 나타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탁월함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하면 떠올리는 특징이 근면과 신실함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아침까지 남겨 두었을 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는 것과 만나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것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며 스러집니다. 우리는 죽을 때 세상에서 쌓아둔 부를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시겠다고 하시면 우리가 세상에 쌓아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세상에 쌓아두기보다 하늘에 쌓아두고자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합니다(골 3:5).  

안식일 훈련(16:22-30)

출애굽기 16:22-23

22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여섯째 날에 백성들은 각 사람이 평소의 두 배 분량, 즉 두 오멜씩 거두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에 두 배를 거두도록 하신 것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모세가 백성에게 전한 내용에는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상 빠져 있을 뿐 모세가 분명히 백성에게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두 배의 분량을 거두도록 말하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두 배의 분량을 거둔 것을 회중의 모든 지도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들이 안식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할 일을 지시했습니다. 

지시한 내용의 첫째는 일곱째 날은 휴일라는 것입니다. “휴일”은 the rest(KJV)로 말 그대로 휴식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휴식하는 날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 때 휴식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에 쉬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7절에서 그들이 안식일에도 양식을 거두러 나간 것을 보아 그들은 안식일에 안식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본래의 개념은 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의무적으로 쉬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쉬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여섯째 날까지 창조 사역을 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의무입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주셔서 의무적으로 쉬게 하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입니다(막 2:27). 사람은 휴식을 해야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휴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인권입니다. 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각 개인은 이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모세가 지시한 내용의 두 번째는 안식일이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거룩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은 이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ESV를 보면 “휴일”은 a day of solemn rest(엄숙한 휴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하는 날이 아니라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 속죄일은 안식일에 해당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일을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하셨습니다(레 16:31). 그러므로 안식일 만큼은 속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종합할 때 안식일은 안식과 예배의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쉼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식하지 못하고 장시간의 스트레스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세상의 일을 내려놓고 안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재충전을 함으로 새롭게 일주일을 출발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은 영적인 쉼을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서 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만족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또한 속죄를 받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입니다(시 51:17). 죄 사함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행 3:19). ‘새롭게 된다’는 것은 ‘회복’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 사함을 받은 자는 행복한 자임을 노래했습니다(시 32:1).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죄 사함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림으로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시한 내용의 세 번째는 안식일을 위해 음식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평일에 하루 이상을 보관할 수 없었습니다.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날에 거둔 만나는 상하지도 않았고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금 항아리에 담아 법궤 안에 두었던 만나도 썩지 않았습니다(32-34). 이를 볼 때 만나는 화학적 개념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하늘의 양식이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각자 다른 입맛을 고려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만나 자체도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양식인데 하나님은 각 사람의 취향에 맞게 요리해서 먹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24-27

24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않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신기한 체험을 통해 안식일이 특별한 날임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안식일에 그들이 보관한 양식을 먹도록 하였고 양식을 거두러 들에 나가지 않도록 경고했습니다. 모세는 안식일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양식을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그런지 호기심을 갖고 행동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와 순종의 대상입니다.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삐딱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증되어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을 갖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출애굽기 16:28-30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셨습니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줌으로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개념이 몸에 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애굽의 노예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쉬는 법을 몰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고 위기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가시적으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몸은 자유인이지만 내면과 삶의 방식은 애굽의 노예의 방식이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것이 다 확 바뀔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속량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으로 국적이 바뀐 것입니다(골 1:13-14). 그런데 국적이 바뀌었다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방식이 한꺼번에 바뀐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새로운 영적인 탄생입니다. 영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갓난 아이라는 것입니다. 갓난 아이는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여 성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화되기까지 평생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은 성화가 배제된 구원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값싼 은혜의 교리만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배우고 그 법에 따라는 사는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백성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극복하고 매일 일용할 양식을 거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여섯째 날에는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이틀치 분량의 양식을 거둠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출애굽의 목적에 맞게 안식일에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것이고 그 율법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육을 만족시켜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함으로 삶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직장을 나서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영적인 양식을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경건의 시간(Devotional)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께 경건한 마음을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 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는 아주 개인적이고 기본적인 것이며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죄의 습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본성이 부패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으로서의 자아 발견은 성화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성화가 인간적 능력과 성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악을 반복하는 자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변화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29절은 “볼지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지켜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을 주셔서 쉬게 하는 것임을 먼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그들이 쉴 수 있도록 이틀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 일은 그들은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삐딱하게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가택 연금시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쉬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막 2:27).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체적인 규례가 나오면서 그들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은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회의 날”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레 23:3). 그들은 일상적인 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을 읽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행 15:21).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일정 거리를 걸어가는 것도 허용되었습니다(행 1:12). 그들은 안식일에 소와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일도 했습니다(눅 13:15). 이는 안식일의 정신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는 말은 그 동안 안식이 없던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후손을 위해 만나를 간직하게 하심(16:31-36)

출애굽기 16:31-36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이스라엘 족속은 그 양식의 이름을 “만나”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깟씨(coriander seed)는 고수의 열매(씨앗)를 가리킵니다. 고수는 미나리과에 속한 키 60cm의 강한 향기를 내는 한해살이 풀입니다. 열매는 3mm 정도로 작고 둥글며 회백색을 띱니다. 만나의 맛은 꿀 섞은 과자 맛이 났습니다. 민수기 11:8에서는 “기름 섞은 과자 맛”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 고소한 맛이 났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후손을 위해 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와 함께 표본으로 보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나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함께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습니다(히 9:4). 만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 밖에 있던 진설병이나 등잔대나 분향단과 같은 성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생명의 양식”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요 6:35). 

하나님께서 왜 만나를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거할 때 그 만나를 보고 애굽의 속박에서 건지시고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시고 보살피신 은혜를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로 먹이신 사건은 4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간 그들은 구름 기둥을 통해 가시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밟을 때 구름 기둥이 걷히고 만나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수 5:12). 그때 그들은 풍요로움에 젖어 하나님을 잊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은 풍요로움이 가져다 주는 유혹을 경계하셨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0-13). 

사람들이 기념물을 만드는 목적은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념으로 삼도록 하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광야생활과 관련하여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출 12:14, 17, 24). 그들은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의 속박 가운데에서 고생하던 일과 그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출 12:8).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도록 함으로 “대대의 표징”으로 삼도록 하셨습니다(출 31: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간직하게 하여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민 17:10). 하나님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언약궤에 넣아 간수하도록 명하셨습니다(신 10:2,5).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역사를 잊으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의 죄의 속성을 잘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매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경험했기에 이를 숨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도 반역하고 원망하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것이 기적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지 않으면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기적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인생 가운데 특별하게 기적적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신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기 위해 기념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의 은혜를 기억하고 붙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 추수 감사절 등의 기념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때마다 행해지는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흘려 대속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역사책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사건들 속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우리를 기억나게 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시 119:130). 

반석에서 샘물을 내심(17:1-7)

출애굽기 17:1-2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를 떠나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노정대로 행하다”는 말은 ‘단계적으로’(by stages; ESV), ‘여러 곳을 거쳐’(from place to place), ‘진을 옮겨 가면서’(새번역, 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르비딤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장막을 치며 머물렀다 이동하였습니다. “르비딤”은 ‘휴식처’란 뜻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입니다. 이 곳은 시내 산 북서쪽 20km 지점의 와디 페이란(wadi Feiran)으로 추정됩니다. 

백성이 이 곳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그들을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킨 경험을 떠올려야 했습니다(15:25). 또한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던 엘림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15:27).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원망한 정도가 아니라 모세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정적 분노를 앞세웠습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보다 감정적 분노를 쏟아내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채찍으로 다스리던 애굽 사람에게는 아무 소리를 못하면서 겸손과 온유로 섬기는 지도자에게는 함부로 대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기도의 씨름을 해야 하는데 사람과 다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 기도의 씨름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괴로움과 문제를 들고 나아가 기도의 씨름을 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죄를 범했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당장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해 원망을 쏟아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면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자동 판매기가 아니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당장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합니다. 우리는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상황이 개인적인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삶에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3-4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는 요구에 덧붙여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자기들과 그들의 가축을 목말라 죽게 한다고 험한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한 지 한 달이 되어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죽었던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16:3).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을 광야에서 죽게 하는 것으로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죽겠다고 원망했습니다. 4절에서 모세의 기도를 볼 때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려는 공포를 느낄 정도였으니 그들의 원망은 살해 위협으로 들렸습니다. 이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들고 일어나서 모세를 반역할 분위기였습니다. 그들은 하이에나와 같이 지도자를 독한 말로 물어뜯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다투었으나 모세는 그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씨름을 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과거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선의를 갖고 자기 백성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억압받는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억압하는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은 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신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도망자가 되어 광야에서 40년 간 은둔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그때 백성들로부터 배척받은 아픔이 되살아났습니다. 모세는 어찌할 수 없어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한 말을 들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사람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인간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게 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가고자 합니다. 아니면 나를 공격하는 사람과 다투며 내가 당한 것 그 이상으로 되돌려 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의 방식으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다 영접하시고 위로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17:5-6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전 시험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미 해결책을 다 마련해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힘든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인내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를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 앞에서 모세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그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백성 앞을 지나가게 하신 것과 장로들을 데리고 가게 하신 것은 백성 앞에서 모세의 권위를 높이신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온유하고 겸손한 모세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높이셨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나일 강을 쳐서 물을 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지팡이로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모세의 앞에 서실 것입니다. 호렙 산은 시내 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그가 서있는 반석을 치면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메마른 광야입니다. 특별히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무나 흙에서 물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한 환경에서 불가능한 물체인 반석에서 샘물을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힘든 상황에 처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고자 하시기 위함입니다. 출애굽한 지 한 달 후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고자 하셨습니다. 르비딤에 왔을 때 물이 다 떨어져 극한 목마름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고자 하셨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표적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 되심을 나타내줍니다.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사건은 영생의 샘이 되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샘물이 나오는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4). 샘물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령한 음료, 영생수를 상징합니다(요 4: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 하신 것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영생수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채찍을 맞으심으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물이 없으면 탈수로 인해 살 수 없습니다. 물은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수의 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이는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킵니다(요 7:37-38).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면 멀쩡하고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갈증으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영적 기갈에 시달리는 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기 때문입니다.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렘 2:12-13). 사람이 행복과 만족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된 인간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와 같아서 그 무엇으로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통해 인생의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참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그녀의 영적 목마름이 채워졌습니다. 그녀는 일생 예배할 대상을 찾자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기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2).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있는데, 이 강물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고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할 것입니다(계 22:1-2).

출애굽기 17:7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모세는 반석에서 물이 나온 곳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맛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는 뜻이고, “므리바”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라고 여호와를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끝 무렵에 일어났던 가데스 므리바의 물 사건(민 20:1-13)과 별개의 사건으로 출애굽 초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편 르비딤에서 있었던 물 사건과 가데스의 물 사건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대표적인 불신앙 사례로 언급되고 있습니다(시 81:7; 95:8; 106:32). 

7절은 므리바 사건에 대한 모세의 결론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다툼과 의심이 지극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 기둥과 만나의 기적을 매일 보고도 의심하는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이 말라 조금 힘들다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은 그들이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름 기둥으로 그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고 만나를 매일 거르지 않고 하늘에서 비 같이 내려주심으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은 그들의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내면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십자가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류를 향한 그의 사랑의 음성이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몸이 힘들거나 불편하거나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의심하거나 살아계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어린 자녀가 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아빠가 계신가 의심하고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온 우주의 중심을 자기로 놓고 봅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면 그것이 선이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이 없거나 일이 잘 안되면 그것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엡 4:1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갈 5:24-25). 이로써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성공적인 사역을 이루며 열심을 갖고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격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빈 껍데기 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3:1-3). 사도 바울은 정작 중요한 것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가 되기를 권면했습니다(고전 13:4-7).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본다할지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매일 아침 먹는다 할지라도, 저녁이면 진에 쌓이는 메추라기를 먹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내면이 없다면 작은 불편에도 원망하고 의심하고 다투는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을 연단하십니다.  

아말렉과의 전쟁(17:8-16)

출애굽기 17:8-9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는 이 전쟁을 지휘할 사령관에 여호수아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전쟁에 나가 싸울 자를 모집하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정복과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눈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습니다(33:11).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슈아”라고 줄여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철자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원래 “호세아”라고 불리웠는데 모세가 “여호수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민 13:16).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 즉 오른팔 역할을 했고(출 33:11),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 열두 족장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민 13:8). 17:9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여호수아는 용맹스럽고 전투에 능한 자로 이런 연약하고 겁많고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적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용맹스러움과 충직함을 쓰셔서 장차 가나안 정복 전쟁의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한 후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으로 가는 도중 아말렉과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고 그 곳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수없는 전투를 치를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의 삶은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험한 세상에서 경쟁하며 싸웁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생존을 위해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고 졸업생들은 직장을 준비하는 것 하나하나가 투쟁의 연속입니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넘어야 할 수많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사람과의 갈등 문제로 시달리거나 재정적인 문제에 봉착하면서 사는 것을 힘겹고 모든 것이 투쟁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하여 회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현실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했을 때는 블레셋과 전쟁을 피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아말렉과의 전투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그 땅을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그 땅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결코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고 믿음의 싸움을 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쟁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전투에 능하도록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르게 하심으로 그들을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의 기도를 통해 가장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인간의 전략과 모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영적인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엡 6:11-13).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며 우리의 약점을 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2). 바울은 영생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때 얻게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정복 전쟁을 치름으로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투를 치름으로 그들이 강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장차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영적인 싸움을 싸우도록 하심으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겠다고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고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선발된 병사들을 보내고 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아니면 약탈에 능숙한 아말렉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 지팡이를 치켜 들어 싸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싸우도록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17:10-13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 싸울만한 자를 선발했고 그들을 조직했으며 각자의 특성에 맞게 무기를 지급했습니다. 간단하게라도 그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그들이 수행해야 할 일을 할당했습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지만 그들은 전쟁의 수행자이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조직화하고 전쟁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거는 일이기 때문에 담력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사령관으로서 싸움에 임하기 전 그들이 마음의 무장을 하도록 용기와 사기를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사령관으로서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쟁의 상황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책임감이 막중하였습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전장에서 적들과 싸우는 일을 감당한 반면 모세와 아론과 훌은 후방에서 이들을 기도로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론은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훌은 여기서 처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그를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모세가 없을 때 백성을 다스리는 재판관이었고 장로들의 우두머리였을 것입니다(24:14).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병사들이 보이는 곳에 섰습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할 때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피곤하여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좌우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아론과 훌의 손도 피곤해졌습니다. 그들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가 앉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훌은 각각 모세의 좌우에서 그의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들은 해가 지도록 같은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이 사건은 그들의 전쟁이 영적인 전쟁임을 말해줍니다. 여호수아와 그가 선발한 백성들이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들의 승리는 후방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역할이 컸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전략과 군사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전쟁터로 보내고 그는 지팡이를 잡고 아론과 훌과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이 지팡이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사용되었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샘물을 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전쟁에서도 유효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지팡이가 높이 들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반석에서 샘물을 낸 지팡이가 그들에게 승리를 줄 것으로 확신하였습니다. 지팡이는 모세 위에 있어 높이 들려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 위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나이에 이 지팡이를 혼자 오래 동안 들고 있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이를 도와 전쟁하는 내내 지팡이를 들고 있게 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방에는 여호수아, 후방에 모세와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여호수아와 병사들이 전쟁의 승리의 지배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후방에서 모세와 아론과 훌이 기도로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머지 백성들도 같이 기도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나이가 있어 피로를 느끼자 지팡이를 든 손이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이겼습니다. 이때 아론과 훌이 옆에서 그의 손을 치켜 올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이스라엘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기도로 후방 지원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가 계속 서 있을 수 없었으므로 반석을 가져다가 모세로 앉게 하였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좌우에서 그의 팔을 잡아 주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다 무찌르기까지 계속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합심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혼자 기도하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이 기도하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일을 맡아 섬기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뒤에서 지원하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전쟁으로 말하자면 전투병이 전선에서 싸울 때 하늘에서 전투기가 지원 폭격을 하고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을 함으로 전투병이 쉽게 적지를 점령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지원 사격과 같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성도들이 기도의 지원 사격을 해줄 때 힘이 나고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쟁의 과정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실패와 성공이 엇갈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잘될 때가 있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때에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의 손을 내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승리를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7:14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록을 매우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모세는 그가 겪은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궁중 교육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모세오경은 정경이 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읽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오경을 모세가 혼자 기록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와 동역하는 지도자들과 함께 이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 책의 최종 감수자는 아마 모세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오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거기에는 일점일획도 무오함이 없고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는 명령에 주님의 종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사본을 기록한 랍비들은 본래의 원본과 틀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기록하고 검토하고 또 검토했을 것입니다. 물론 기록된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수정된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에 조금의 훼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가 기록했을 때나 그 기록을 읽을 때 성령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6:13).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길에서 만나 이스라엘이 피곤할 때에 그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신 25:18). 하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사울 왕에게 그들을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삼상 15:2-3). 그 후 다윗 왕이 블레셋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을 때 아말렉을 침노하였고(삼상 27:8), 아말렉이 유다 땅을 약탈하였을 때 다윗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고 400명은 도망하였습니다(삼상 30:16-20). 그 후 히스기야 왕 때 시므온 자손 500명이 세일 산으로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그 곳에 거주함으로 그들은 멸망하였습니다 (대상 4:41-43). 

출애굽기 17:15-16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모세는 승리의 기념으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 확신과 축복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습니다(창 8:20).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감사하여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7-8). 이삭은 가는 곳마다 애써 팠던 우물을 빼앗긴 후 두려움에 빠졌을 때 복을 주어 그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26:25).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5:7). 모세도 그의 조상들의 신앙을 본받아  그들의 전통대로 제단을 쌓고 그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념하였습니다.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깃대)’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은 높이 들고 군대를 집결하게 하거나 적진을 향하여 공격할 때 방향 지시를 합니다. 전투를 벌이다가 흩어진 상황에서 군인들은 그들의 깃발이 올라가는 곳을 향하여 뭉치면서 전열을 가다듬어 싸울 수 있게 하는 힘을 줍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의 지팡이는 이런 깃발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지팡을 높이 쳐들었을 때 그들은 이를 보고 힘을 내어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가 내려갔을 때에는 아멜렉에게 밀렸습니다. 그러나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지팡이를 기치로 내걸었을 때 그들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쳐든 하나님의 지팡이는 단순한 군대의 깃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호와 닛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32).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그 아픔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새찬송가 278장).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정신 없이 살다가도 마음을 가다듬고 십자가 아래로 모여야 합니다. 주일이면 십자가 앞에 모여 마음의 제단을 쌓으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삶의 전투의 현장에서 잠시 깃발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보일 것이며 거기에는 여호와의 깃발인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에서 십자가를 높이 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전함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방황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우리의 삶이 바로 “여호와 닛시”라고 고백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깃발을 높이 들면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지역 사회에서, 학교와 직장에서 예수님을 드높일 때 그분은 우리가 직면한 싸움에서 싸우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드로의 방문(18:1-12)

출애굽기 18:1-3

1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3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4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에 관한 소문은 강력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광야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모세는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미디안으로 돌려보낸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던 중 아들의 할례 문제로 죽을 뻔한 사건을 겪자 가족의 생명을 생각해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4:24-26).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에 돌아갔을 때 그는 그의 장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이는 영원한 작별이 아니라 곧 돌아올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잠시 장인의 허락을 얻어 그의 동족을 살피러 간다고 잠시 휴가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인과 십보라와 모세의 아들들은 모세가 얼른 일을 마치고 미디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십보라와 그의 자매들은 외부인들을 볼 때 겉모양만 보아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보았습니다(2:19). 그들은 우물가에서 지나가는 여행자들로부터 소식을 듣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애굽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 이야기,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에서 먹이신 사건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모세를 만나러 채비하였을 것입니다. 

2:22에서는 게르솜만을 언급하였지만 18:3은 모세의 두 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르솜의 뜻은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로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둘째 아들을 낳고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낳은 아들로 여겨집니다.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장소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숙소(여관)이었습니다. 모세가 첫째 아들 게르솜에게는 할례를 행했지만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난지 8일이 지났지만 할례를 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4:24). 이에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고 남편에 대해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4:25). 모세는 이 사건 이후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미디안으로 돌려보냅니다(2). 그 이유는 출애굽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할 때 그는 그의 가족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칼날을 피해 미디안으로 왔는데 이제 바로의 칼이 번뜩이는 애굽으로 가고자 할 때 잔뜩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끌려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로의 칼날에서 건지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결연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게르솜이라는 이름은 모세의 슬픔을 반영하지만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은 모세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출애굽기 18:5-12

5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6 그가 모세에게 말을 전하되 네 장인 나 이드로가 네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네게 왔노라 7 모세가 나가서 그의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9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10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두 아들과 그의 아내 십보라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렀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진 친 곳이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있는 시내 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3:1).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장인의 허락을 받기 위해 미디안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사람에게 이 곳은 먼 지역이었지만 그들은 양들을 몰고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사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었습니다. 이는 장인에 대한 존경과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에게 내린 열 재앙과 홍해를 가른 사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 므리바에서 샘물을 주신 사건 등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고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였습니다. 더불어 모세가 돌아와 자기 가족과 재회하고 정상으로 회복되었음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을 이기셨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제대로 된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미디안 제사장으로 르우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이방인 중에서 드물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그두라를 통해 낳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신앙적 영향을 받아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섬긴 남은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창 25:1-4). 그러나 그의 신앙은 희미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거짓 신과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월성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출애굽의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 모든 일과 …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 말하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어가 “여호와께서”입니다. 그는 “내가 …한 일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말하는 습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자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에 대해 잘난 척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자 하면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에서 보기 드물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디안의 우상숭배자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자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였습니다(9). 

그는 자기 사위가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며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모든 신보다 크시고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을 이기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희미한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이 믿으니까 자기도 교회에 다니는 정도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이력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정도의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도 기독교적 문화로 인해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신앙,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구원의 체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장차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 등에 관한 체계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큰 일을 증언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체계적인 기독교 기본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때 혼탁한 세상에서 명목만 유지한 채 희미해진 신앙을 회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8:12

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번제와 희생제사는 죄를 속죄하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희생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드로가 번제와 희생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드리며 예배한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는 것은 그가 정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는 아직 성막이 건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통적으로 제단을 쌓아온 곳에서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17:15-16). 

이드로의 제안(18:13-27)

출애굽기 18:13

13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13-27절은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사법 체계의 기본 구조를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후에 모세는 백성들의 모든 일을 홀로 도맡아 섬겼습니다. 모세는 날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쟁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다투기를 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물이 부족하면 목마르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건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문제까지도 소송을 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모세가 자상하고 섬세하게 백성들을 돌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애굽과 같이 전제 군주 체제라면 백성들은 불만이 있어도 숨을 죽이고 그들의 목숨을 지켜야 했습니다. 

모세는 공의의 재판을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받거나 공평과 정의를 훼손하는 기울어진 판결을 하지 않아 백성에게 인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재판하는 날짜를 정하여 하루 종일 재판하였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병자를 일일이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지도자는 마땅히 목자이신 예수님이 그의 양들을 돌보듯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마치 유모가 아이를 젖 먹이고 키울 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돌보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제자들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재판하는 일을 혼자서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200만 명 쯤 되었기 때문에 모세 혼자서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모세는 재판 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분쟁 해결을 위해 재판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는 국가 체계가 다 갖추어지기도 전에 혼자서 이 일을 감당했기에 지쳤습니다. 물론 곁에서 모세를 도와주는 동역자가 있었지만 모세가 일일이 다 담당하는 수평적 구조 속에서는 백성들의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8:14-16

14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15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미디안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대 근동의 사법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모세가 일일이 재판하느라 지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지치면 공정한 재판이 할 수 없다는 것과 섬세하게 판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재판은 지연되고 백성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만 악화될 것이 뻔하였습니다. 이드로의 판단은 정확하였습니다. 모세의 직접 재판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기도하면서 하는 재판이기에 모든 백성이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가지고 오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오늘날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법조문만 따지며 판정하지 않고 전체 흐름 속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도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수많은 백성의 다툼을 중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장인 이드로는 이를 간파하고 하급 법원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8:17-18

17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18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드로는 모세에게 그가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맡은 짐이 과중하여 기력이 쇠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백성에게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홀로 백성을 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단하지만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아무리 옳고 정의롭고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좌절과 피로를 초래한다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재판의 업무가 과중하게 치중될 때 모세의 중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데 기약이 없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신속한 정죄와 벌, 갈등의 봉합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애굽의 통치 하에서 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억압되었고 그들의 불만은 억눌린 상태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로의 폭압이 사라지고 온유하고 겸손한 목자인 모세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의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자유를 이용하여 그들의 내면의 억울함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지도자임을 영접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백성의 열망을 잘 알고 모든 재판에서 시간을 충분히 두고 신중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모든 에너지가 고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에 그의 장인 이드로를 적절한 시기에 보내어 주셔서 지혜로운 간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지 못하고 열정을 불태운 나머지 탈진하는 예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문제에 깊은 공감을 보임으로 그들의 짐을 다 떠안음으로 과로와 탈진으로 병을 얻습니다. 본문은 이런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영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가 그들의 짐을 홀로 떠맡기보다 짐을 동역자들과 나누어 지기를 원하십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라는 이드로의 염려는 곧 하나님의 염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기력이 쇠하여 탈진한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불의 응답을 받고 우상의 선지자들을 처단하였습니다(왕상 18:1-40). 그는 특심한 열심으로 헌신하고 도전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완전히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더 독해져서 엘리야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 겁쟁이처럼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몸을 숨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형편에 심히 낙심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휴식을 통한 위로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왕상 19:1-6).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제자가 점점 많아지자 구제의 일을 섬기느라 과부하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 얽매여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집사를 택하여 사무적인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행 6:1-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자가 과로함으로 건강이 훼손되어 하나님의 일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혼자서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보았듯이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전장에서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서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백성도 기도에 동참했을 때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목회자 한 사람의 ‘원맨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사역자의 부담을 성도들이 나누어 져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유기적인 조직으로 합심하고 하나되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혼자서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심을 오히려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출애굽기 18:19-20

19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이드로는 모세에게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셨습니다. 그의 조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함으로 모세는 그의 조언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이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도들의 제안에 유연한 태도를 가짐으로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드로의 제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백성들에게 보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위의 건강과 안위만을 위한 목적으로 짐을 분담하라는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드로는 괜한 참견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드로는 자신이 연장자임을 내세워 그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역사와 모세의 지속적인 사역을 위한 진심어린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모세의 사역의 범위를 축소시킴으로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더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고자 이런 조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짐을 지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 10: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과소 평가해서도 안되고 자기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 과도하게 일을 추진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시는 일에 앞서 가서도 안되고 그가 가시는 속도에 뒤쳐져서도 안됩니다. 그가 가시면 나도 가고 그가 멈추시면 나도 멈춤으로 그와 동행하는 지혜로운 종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8:21-22

21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

이드로는 백성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 체계 구축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모세에게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선발하여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도록 조언했습니다. 모세는 다만 큰 일을 맡아 재판할 것이고 작은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면 모세에게 무리가 되지 않고 백성들도 만족할 체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1절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개념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고 보았습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재판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들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재판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은 공의로워서 누구나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시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억울한 일이 없고 모두가 수긍하고 만족하는 사회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재판하는 사람, 즉 다스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해야 합니다. 

모든 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에서 비롯됩니다. 악한 사람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추구하고 불의한 이익을 탐냅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은 뇌물을 받거나 친분 관계에 의해 판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큽니다. 일부의 재판관들은 불의의 재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어렵고 긴 문장으로 그럴듯하게 법을 해석하여 봐줄 사람에게는 느슨하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고무줄 판결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는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었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면 이 사회에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다스릴 때 그 공동체는 천국이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가 된다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해서도 안되지만 그들의 평가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불신자 중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그의 통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가 타락하여 부패할 때 그들이 빛으로 나아오는 길을 차단하는 그는 이미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이 될 것입니다. 

이드로의 사법체계는 하급 법원과 상급 법원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급 법원은 사회의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맡도록 천, 백, 오십, 십으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이 용어는 군대 조직에 사용된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조직을 잘게 쪼개개 위한 용어입니다. 오십부장이나 십부장은 작은 사안을 재판할 것입니다. 그들의 재판은 사람 사이의 사소한 분쟁을 다룰 것이며 공식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보다 중재의 역할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입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은 좀더 무거운 사건을 맡게 될 것이며 모세가 직접 관장할 사건은 다루기 힘들거나 중대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하급 법원에서 다루다가 해결되지 못하고 상소하는 경우 모세가 이를 직접 다룰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하급 법원을 이용할 수 있고 중재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판결에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재판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드로와 모세의 아내와 아들이 방문할 때는 이스라엘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나고 그들이 시내 산에 도착하기 전이었습니다(19:1). 그들은 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체계적인 규범을 받기 전 준비과정으로 모세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의 성격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재판은 단순한 법리 해석이나 법 적용이 아닙니다. 모세는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재판의 목적은 단순한 분쟁 해결이나 죄의 처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새롭게 맡게될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재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재판하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각 분야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그 분야의 역할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은 목회자가 다 담당할 수 없습니다. 작은 모임을 맡은 자들이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하고 성경을 작은 모임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출애굽기 18:23

23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네가 만일 이 일을 행한다면”이라는 말은 모세가 장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시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드로가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제안을 한 것이지 장인으로서의 그의 지위로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세가 이 일을 여호와께 가져감으로 여호와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런 체계의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새로운 사법 체계로 개편해 시행하다면 모세는 좋은 컨디션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고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다”는 말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자기의 처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법 체계를 갖추어 재판을 받는다면 평안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은 특권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 때는 공정한 재판을 받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재판도 받지 않고 벌을 받았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대리자 모세의 재판을 받음으로 그들은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체계화되고 효과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땅에 산다고 해도 평안 대신 오히려 두려움과 재앙이 그들을 덮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8:24-27 

24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25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26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 27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

24-26절은 전형적인 반복으로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법 체계를 구축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제안을 과감하게 그대로 수용하여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말합니다(21). 모세는 이런 사람을 세우기 위해 면밀히 살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장인의 말을 받아들인 것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이드로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조언자임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사람을 보내시어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방법과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동역자들과 의논하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적합한 해결책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결론을 내리지 않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수렴하고 소수의 의견이라도 그 뜻을 반영하는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18:27

 27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

이드로는 모세를 만나고 난 후 자기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을 보내는 사명을 다했습니다. 더불어서 모세에게 귀한 조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장인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모세를 만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그의 신앙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다신교적 신앙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11). 그는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라고 고백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했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었음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 간 보살펴 주시고 그가 애굽에 있을 동안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보살펴 주신 장인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아쉬운 작별을 했을 것입니다. 

이드로가 자기 땅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미디안에서 평생을 유목민으로 살아왔고 유목하는 자로 남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겐 족속은 유다에 편입이 됩니다. 민수기 10:29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 르우엘의 아들 호밥(이드로일 가능성이 큼)에게 동행하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에게 다시 동행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사사기 1:16에 보면 겐 족속은 유다 황무지에 거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길 안내자로 이스라엘을 도왔고 모세의 간청에 유다에 귀속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5:1-19을 보면 레갑 족속의 독특한 신앙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들의 조상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대상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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