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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출애굽기 13:17-15: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후 바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품을 갖도록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면 블레셋 사람의 땅을 통과해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걱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블레셋 사람의 땅이 아닌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홍해를 가르심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킴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막다른 길로 인도하심으로 그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도록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현현하셔서 친히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초가 전혀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이런 시각적인 모습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이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온 나라 백성들에게 소문으로 알려져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알림으로 그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심(13:17-22)

출애굽기 13:17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최단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 서남 해안 지역, 곧 에그론에서 남으로 애굽 강(시홀)에 이르는 비옥한 땅에 정착한 민족으로 매우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이 블레셋을 정복하기 전까지 끊임 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길로 간다면 블레셋과 전면적인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갓 애굽을 탈출한 백성으로 아무런 무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비옥한 토지에 살면서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지만(12:41), 실제로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처음부터 전쟁을 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자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이 이토록 졸장부일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의 때에는 유월절 예식을 행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했으면 블레셋과 한 판 붙어볼 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다가 조금만 힘들어져도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민 14:2-3).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만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학대를 받았지만 애굽이라는 강대국이 그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블레셋이 그들을 치러 올 때 그들은 전쟁하여 죽는 것보다는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길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출애굽기 13:18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블레셋 길이 아니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왔습니다. 여기서 “대열을 지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전열을 갖추다’라는 의미와 ‘오십 씩 그룹으로 배열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ESV는 equipped for battle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전투를 위해 갖추다’는 뜻입니다. 이 번역은 17절에서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염려와 배치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소망을 두셨습니다. 실제로는 겁쟁이였고 훈련받지 못한 노예의 근성이 배여있는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소망을 두시고 소망의 눈으로 그들을 보신 것입니다(19:6). 반면 ‘오십 씩 그룹으로 배열을 지어 가다’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도 군대가 오와 열을 맞추어 가는 것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도 역시 그들은 하나님께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3:19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모세는 애굽을 나갔을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라고 단단히 맹세하여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창 50:24-25). 모세는 애굽을 나갈 때 요셉의 뼈를 이장하는 것부터 챙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유언적 예언은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타난 이후 억압받기 시작습니다.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요셉의 유언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그들은 요셉의 예언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소망을 발견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요셉의 유언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정신 세계는 애굽화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당대만 생각하지 않고 그의 후손을 생각하는 역사성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고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민에게 복을 주는 원대한 계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당대만 잘되면 된다는 근시안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환경문제가 이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편리한 것만 찾다가 환경을 훼손합니다. 이는 후손들에게 오염된 환경을 물려주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환경 보호는 후손들에게 좋은 자연환경을 물려주고자 하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도록 기도하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사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그 신앙의 전통이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의 유산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가정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또한 훌륭한 믿음의 전통을 물려주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사성을 가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설명할 때 구약에 근거를 둡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은 창세기 3:15의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그 약속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언된 말씀에 근거를 둡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복음의 역사성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의외로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이 이생과 내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우리가 몸이 부활하여 재창조된 세상에서 예수님과 누릴 영화까지 이어져야 비로소 완전한 복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승천과 재림, 성령의 역사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죄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의 교리를 믿도록 교육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 문턱을 들락거리는 신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유언을 통해 현재의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믿음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다음 세대들을 위해 기도하고 신앙 교육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13:20-22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0-21절은 출애굽 여행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쳤습니다. 에담이 광야 끝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셨습니다. 우리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따로 있는 것으로 구분하는데 사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같은 현상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 앞에 자신을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 앞에 가시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의 형태로, 밤에는 불 기둥의 형태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에 구름 기둥이 임하시면 커다란 검은 구름처럼 보이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24:15-18에 묘사된 시내 산 정상을 덮은 구름의 모습과 연결시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6일 동안 산 정상을 가려 보이지 않았고 산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 같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격을 실제로 보지 않고도 구름과 불로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늘 보았습니다. 

22절에서는 “떠나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는 낮이든 밤이든 그들이 행진할 때이든 진을 치고 머물 때이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24시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24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그들은 실로 축복받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것으로 더 구체화되고 친밀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격으로 제자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요 1:14).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4:26, 16:13),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안타까워하시고 근심하시며(엡 4:30),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니다(롬 8:27). 우리는 성령의 확신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며 그의 상속자이심을 믿고 그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롬 8:16-17).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그 눈이 가리워져 그가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정의가 있다면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하고 악이 가득하는가?”라고 하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 행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인생을 그의 섬세한 뜻과 섭리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곳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 불규칙하고 낯선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잘 아셨기 때문에 적들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 곳은 홍해를 앞둔 막다른 곳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보여주고자 계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다른 낯설고 불규칙한 길로 인도하시지만 인생을 길게 볼 때 그 길은 나에게 가장 적절하고 맞는 최상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날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인생의 종착역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하나님(14:1-14)

출애굽기 14: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전까지 그들은 라암셋의 동쪽이나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12:37; 13:20).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돌이키다”는 말은 turn back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여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2절에서 언급된 “바다”, “믹돌”, “비하히롯”, “바알스본” 등은 오늘날 확실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곳은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작고 외딴 곳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간 곳이 인구가 많은 도시나 마을이었다면 현존하는 고대 문헌에 이들의 행적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도시의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켜 사건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경로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라고 불리는 바닷가 어딘가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불규칙으로 이동시켰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애굽의 영토 안에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없는 광야를 지나가고 있었지만 누군가 큰 무리를 목격한 사람들이 이를 바로에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직 애굽 국경선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비하히롯 앞에 장막을 쳤다고 보고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에담에 도착했으나 다시 돌아가서 비하히롯에 이르렀고 그 후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으로 보아 에담은 홍해 앞이 아니라는 것과 비하히롯이 홍해 앞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홍해는 오늘날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의 큰 바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홍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레이트 비터 호(the Great Bitter Lake)를 가리킨다고 보고 있습니다다. 애굽의 북동쪽 국경선에는 자로우 호(Zarou Lake), 팀사 호(Lake Timsah), 그리고 비터 호(Bitter Lake)가 있는데 비터 호를 제외하고는 호수가 작은 규모입니다. 믹돌과 바알스본의 위치도 부정확하고 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불규칙한 길로 인도하심으로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게 하는 계략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홍해위치

출애굽기 14:3-4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한편 바로는 장자 재앙의 충격으로 어떨결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했으나 제 정신이 돌아오자 그의 결정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의 결정을 번복하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계획할 것입니다. 바로의 결정의 번복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4:5-7

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바로의 결정의 번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갇혀지게 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그들을 추격하여 잡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는 바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당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화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즉시 떠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좀 살만해지자 그들의 마음이 변하여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라고 말하며 후회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섬김을 받는데 익숙했습니다. 그들의 섬김은 그들이 애굽의 노동력 제공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빠져 나간 상황에서 자국민들이 애굽 경제를 떠받치는 노동 계급이 사라지므로 애굽 사람들이 이를 메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탐심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패배의식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노예 백성이 애굽을 누르고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선진국 백성인 애굽 사람의 자존심은 그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그의 병거를 갖추고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선발된 군대의 규모는 특수 병거 660대와 그 외의 애굽에 있는 모든 일반 병거였습니다. 이들을 합치면 아마도 1000대가 넘었을 것입니다. “선발된 병거”는 NIV에서는 the best chariots로 ‘최고의 병거’라는 뜻입니다. 이 특수 병거는 철로 만들어졌고(수 17:18; 삿 1:19) 대부분은 두 개의 바퀴가 달려있고 그 바퀴는 쇠로 덧입혀 있었으며 병거의 오른쪽에는 활과 화살 및 창, 장검 등의 무기를 꽂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 3마리의 말이 병거를 끌었습니다. 병거의 몸체와 바퀴는 보병 부대 사이를 뚫고 나가기 위해 강한 철로 장식했습니다(나 2:3). 병거는 기동력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평지에 적합한 이동 수단입니다. 병거의 단점은 지면이 무르거나 울퉁불퉁하거나 산악지대나 물이 흐르는 시내에서는 매우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그들의 영토 내의 평지에 머물러 있다는 점과 그들을 빠른 시간 내에 추격해야 하기 때문에 기동성을 요구하는 병거를 동원하였습니다.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라는 구절을 통해 볼 때 병거를 모는 사람은 일반 병사가 아닌, 병거를 몰며 전투하는데 익숙한 경력이 많은 장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는 그의 최고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고자 하는 계획 가운데 그들을 유인한 것입니다. 6절에서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라는 구절을 보면 바로가 직접 전차 군단을 지휘하며 추격 작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8-9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하나님은 열 재앙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떠난 후에도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이후 바로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는 그들이 담대히 나가는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들이 의기양양하게 나가는 꼴을 볼 수 없었습니다. ESV와 RSV에서는 defiantly로 번역했는데 이는 ‘도전하는 자세로’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12:41) 애굽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거대한 제국 애굽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의 신들이 여호와께 모욕을 당하고 이웃 나라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격동을 받아 더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격동된 완악한 마음을 홍해에서 최후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는 기동력이 좋은 병거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이 장막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곁 해변에 이르렀습니다.

출애굽기 14:10-12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눈으로 식별할 만큼 애굽의 군대가 바싹 그들을 뒤쫓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로와 애굽 백성들이 흔쾌히 그들을 내보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방어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와 그의 신하의 마음이 변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11-12절의 그들의 불평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공포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절망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왜 하필 나한테 이런 고난이 닥치는 것입니까?” 우리는 11-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없음과 불평의 죄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에게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이끈 것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집단으로 죽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차라리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광야에서 죽는다고 착각했습니다. 두려움은 이처럼 하나님을 반역하게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갖는 심리 현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두려움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두려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그를 의지하게 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심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불신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가장 먼저 자리잡은 심리 상태는 두려움이었습니다(창 3:10).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계시록 21:8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사람들의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 중 첫 목록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생기는 첫 증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지만 사탄이 주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그들은 그들을 인도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사람을 원망한 것 같지만 사실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망상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을 크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작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이시려고 인도하셨다는 그들의 생각은 망상입니다. 장자 재앙으로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을 광야에서 집단으로 죽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공포가 가져다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때 잠시의 어려움도 참지 못하고 원망합니다. 두려움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마비시킵니다.

출애굽기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있으라고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두려움이 들 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좀 여유를 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숨을 깊이 들이 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실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이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곧 실행될 것입니다. 그 때를 차분히 기다리며 그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을 때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Way-maker)이십니다.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14:2-3). 모세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광야에 갇히게 하고자 하셨다는 기억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큰 구원을 주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여호와의 말씀 그 자체를 믿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면서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배척받은 아픔이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4:1). 그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하면서 그의 무능력을 주장했습니다(4:10). 하나님의 거듭되는 설득에도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4:13). 그가 처음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억압하였고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도 그들의 말에 휘둘려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5:23).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열 재앙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는 바로가 협상을 제안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바로가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에도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10:29).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호흡이 척척 맞아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이제 어려움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더 크신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백성을 준비시켰습니다. 만일 그가 믿음이 없었다면 백성의 원망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집착했다면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그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셨고 백성들은 가만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13-14절은 믿음의 성격이 어떠한지 잘 말해줍니다. 믿음은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과부의 한 맺힌 기도를 통해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75년간 머물렀던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이삭은 흉년 가운데에서도 약속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스쳐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맹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만을 믿고 집으로 가던 도중 아들의 회복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늘의 사령관으로 영접하고 그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믿음에서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상황에 따라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주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듭니다. 그렇지만 절벽에 서 있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기다릴 때 우리는 주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14:15-31)

출애굽기 14:15-16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하며 믿음을 심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는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도 속으로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가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게 내버려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가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믿음을 주시고 안심시켜 주시며 그의 뜻을 나타내 주시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십니다. 

모세가 바로와 대적하고 열 재앙을 겪으면서 그는 순간순간 하나님께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고 방향을 주셨고 모세가 순종했을 때 크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의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를 만나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부르짖어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패턴의 반복을 통해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드러내고 강한 척 한다면 곧 실패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사에 간절한 기도로 자기를 의지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전차 군단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홍해에 빠져 죽을 것이고 뒤로 가자니 애굽의 군대에 의해 붙잡힐 것이 뻔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와 싸울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때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겪을 때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기적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기적입니다. 모세도 처음 듣는 계획입니다. 과연 바닷물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려 갈라질 것인지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 새로운 기적입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고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처한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도 새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새 일을 행하십니다(사 43:19). 

출애굽기 14:17-18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신이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아무리 바다가 갈라졌다고 해도 자신의 군대를 바다 한 가운데 들어가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병거는 평지의 전투에서 기동력이 필요할 때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갈라져 바다 밑이 드러났다고 해도 병거를 이끌고 바다 가운데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다가 갈라진 상황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두려워하고 건드리지 말고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을 위해 바다를 갈라놓은 것인데 애굽의 군대가 들어가면 다시 물을 합치실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어리석은 짓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9). 그들은 “이스라엘 노예들은 건너는데 선진국 백성인 애굽 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지 못하겠는가?”하면서 자기들의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건넜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두려워했어야 했는데 바다를 건넌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도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교만을 자극하여 시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다. 살아남은 애굽 사람들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요 그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열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홍해 사건은 가나안 국가들까지 알려지게 되어 나중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정복전쟁을 할 때 가나안의 왕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성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수 6:1). 기생 라합은 이 소문을 듣고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고백하고 이스라엘 편에 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수 2:11). 

출애굽기 14:19-20

19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진에 앞서 가셔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대가 뒤에서 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자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갔습니다. 구름 기둥은 애굽의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머물러 그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구름이 두 진영을 갈라놓자 한 쪽은 흑암이 있고 다른 쪽으로는 밤이 밝았습니다. “밤이 밝다”는 말은 빛이 비추었다는 것으로 이는 흑암 재앙 때 애굽에는 서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흑암이 덮여 있고 온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합니다(10:23). 구름 기둥을 경계선으로 흑암의 세계와 빛의 세계가 명확히 구분되었습니다. 구름 기둥 저편으로는 낮에도 밤보다 더 짙은 흑암의 상태였고 구름 기둥 이편으로는 밤에도 빛을 환히 비추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밝혀 주었습니다. 

구름 기둥은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흑암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마치 흑암 재앙 때 애굽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고 자기 처소에 일어나는 자가 없듯이 흑암은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이 홍해를 다 건너기까지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둠은 빛의 세계에 있는 자들에게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밤의 어둠은 해가 비추면 그 자취를 감춰 버립니다. 어두운 방에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이 빛의 성질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돋는 해로 임하셔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추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눅 1:78-19). 또한 어둠은 빛의 자녀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요 10:28). 

출애굽기 14:21-22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여호와께서 큰 동풍을 일으키셔서 밤새도록 불게 하심으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가로 놓여 있는 바다가 갈라져 길이 되었고 질퍽한 바닥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바닷물이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더라도 땅은 질퍽한 상태로 발을 디디면 펄에 푹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질퍽한 땅도 말리셔서 사람이 걷기에 좋은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한 가운데를 건너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벽”은 히브리 원어로 ‘성벽’으로 사람이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벽을 말합니다. 지금 홍해가 갈라진 모습은 서해에서 썰물이 물러가듯 조용히 물러간 것이 아니라 물이 벽을 이루어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듯 으르렁거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백성들은 그 한 가운데를 걷다가 물이 덮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착시현상을 겪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바다였던 곳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담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앞 사람이 아무 일이 없는 듯 당당하게 걸어가자 뒷 사람도 따라서 마른 땅을 걷듯 걸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좌우에서 삼킬 듯이 으르렁거리던 물벽이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파도 소리로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고 말하였습니다(히 11:29). 

출애굽기 14:23-25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5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이를 본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표현했습니다(히 11:29). “이것을 시험하다”는 말은 they attempted to do the same(ESV)로 ‘그들도 똑같이 해보려고 했다’ 뜻입니다. 그들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는데 애굽 백성이라고 못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시험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다로 들어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넌 것을 완료한 후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밤새도록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가운데 홍해를 건넜고 애굽은 구름 기둥으로 인한 더 짙은 어둠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이 되자 하나님은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셨습니다.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보셨다”는 것은 looked down from the pillar of fire and cloud(NIV)로 ‘불과 구름 기둥에서 내려다 보셨다’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불과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현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려다 보시자 애굽 군대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어지럽게 하다”는 것은 NIV에서는 threw it into confusion로 ‘혼란의 상황에 빠지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했고, ESV에서는 threw the Egyptian forces into a panic로 ‘애굽의 군대를 공포에 던졌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람도 놀랐고 군마도 놀랐습니다. 군마들이 공포에 휩싸여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향해 앞발을 들자 전차가 전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의 마른 땅을 도보로 건넜지만 애굽 군대는 병거를 타고 건넜습니다. 바다 가운데 생긴 마른 땅은 사람이 걷기에는 적당했지만 두세 사람을 실은 무거운 병거가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땅은 부드러운 고운 모래였기 때문에 바퀴가 모래 속에 빠져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빠져 나오고자 말에게 채찍을 가하며 무리하게 힘을 주자 병거의 바퀴가 벗겨졌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을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애굽 사람을 치시는 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덫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4:26-29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노예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데 자기들은 왜 못하냐고 하는 자존심을 내세워 바다 속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바닷물이 합쳐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같은 교만은 그들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갔습니다. 악인들은 이처럼 교만으로 사리분별을 잃고 멸망하게 됩니다. 

모세가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바다의 힘이 회복되었습니다. “힘”은 히브리 원어로 물의 흐름과 관련한 단어로 “바다의 힘이 회복되었다”는 말은 물이 본래 흐르던 대로 그의 지위를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강력한 힘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물이 좌우의 벽이 되어 그의 백성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일을 다하신 후 물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힘을 회복하게 하셔서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물의 폭포가 애굽 사람들 위로 덮쳤습니다. 그들은 물을 거슬러 헤엄을 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엎으십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을 말해줍니다. 

29절은 애굽 사람과 대조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다시 한 번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표현하는 두 가지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에서 “육지”는 dry land로 ‘마른 땅’을 말합니다.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는 표현은 물의 흐르는 힘을 하나님의 힘이 막아섰음을 말해 줍니다. 물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삼킬듯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이 물의 흐르는 힘을 압도하자 물은 벽이 되어 소리만 낼 뿐 백성들을 해하지 못했습니다. 

좌우의 벽이 된 물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묶인 사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원수들은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위협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묶인 사자처럼 울부짖을 뿐 결코 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해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막고 서계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마치 요란하게 소리를 내느며 좌우에 벽처럼 서있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의 흐름을 막으시고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4-8). 

출애굽기 14:30-31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30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대조적으로 서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들의 패배를 보게 하시고 승리의 감격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바다에 수장시키심으로 최종적으로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셨습니다(사 9:4).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시 146: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우리 눈이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시 54: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고 이러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애굽 군대가 뒤에서 추격할 때 백성들은 놀라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큰 능력과 구원을 본 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드라마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여호와인 줄 깨닫게 하시려고 극적인 연출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이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합니다. 우리가 근시안적으로 인생을 살 때 문제에 휘말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려움 앞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멀리서 바라보고 그의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의 구원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고 깊어진다는 것은 롤러코스터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진폭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출렁이는 바다 표면이 되지 않고 바다 밑에 면면히 흐르는 저류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15:1-18)

출애굽기 15:1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15장은 ‘바다의 노래’라고 불리우며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직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노래는 누이 미리암이 악기를 잡고 가르쳤고 모든 여인들도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불려졌습니다(20-21). 이 노래는 출애굽기가 기록되기 전에 불리워졌을 것이고, 나중에 출애굽기가 기록된 후에 이 부분에 삽입되었을 것입니다. 이 노래는 홍해를 건널 때의 과정을 노래하였습니다. 미리암이 이 노래를 여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인기를 얻어 백성들 사이에 불려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노래가 귀에 익고 같이 부르면서 시내 산으로 가는 도중에 지속적으로 이 노래를 불렀고 이 노래는 국민 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기억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하늘 나라에서 불리어진 승리의 찬가입니다(계15:3). 이 노래는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찬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찬양으로의 부르심, 찬양할 이유, 요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장의 노래는 모세와 이스라엘이 부르는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한 것입니다. 15장에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18회가 나옵니다. 이는 다신론적 세계에 살던 그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노래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출애굽기 3:14-1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로 소개하셨습니다(3:14). 이는 만물을 존재하게 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절대자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분이거나 사람이 만든 신들 중 하나가 아니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시면서 그 의미를 더 풀어가셨습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3:15).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각 사람의 하나님으로 그 사람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찬송하고 있는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홍해 한 가운데 길을 내시고 마른 땅을 걷게 하셔서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찬송하는 하나님은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혔던 애굽 사람들을 바닷물로 덮으시고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여러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시고 우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여러 신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우상 이면에 마귀의 세력이 있어 그가 사람을 지배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을 창조하셨고 통치하시는 높고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골 1:16). 그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심으로 악인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경험이 없었고 전쟁을 위한 무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애굽 사람들은 막강한 전차 군단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쫓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그들에게 흑암 가운데 있게 하셨고 그들을 어지럽히셔서 병거의 바퀴가 땅에 빠지게 하시고 혼란한 틈을 타서 한꺼번에 바닷물로 수장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3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있었을 때 그들은 무력했고 노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노예는 그가 아무리 똑똑하고 힘이 있고 재산이 많아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옛 주인은 마음이 완고하고 잔인한 전제 군주였습니다. 그 주인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구원으로 구원을 받아 힘이 생겼고 구원의 감격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며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를 믿는 각 사람의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아버지는 조상들을 말하는 것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번성할 것과 400년만에 출애굽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5:13-14).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가 인도하실 약속의 땅의 범위까지 말씀하셨습니다(창 15:18-2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약속에 신실하심에 감사하여 그를 높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높아져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고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높일 때 하나님을 높일 수 없습니다. 반면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의 영광과 은총을 드러내고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용사”로 칭합니다. 또한 그의 이름 “여호와”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4장의 홍해를 건넌 사건은 용사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진 앞에 가시다가 애굽의 병거와 마병이 쫓아오자 그들의 뒤로 옮겨 그들을 흑암으로 덮으셨습니다(14:19). 하나님께서는 큰 동풍을 불게 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한 가운데 마른 땅이 생기게 하셨습니다(14:21). 애굽의 말들과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추격할 때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고 병거 바퀴를 벗겨 달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4:23-24).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셔서 애굽 사람을 치시는 것을 보고 도망하고자 했습니다(14:25). 그러자 바닷물로 그들을 덮어 바다 가운데 엎으셨고 바로의 군대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14:27-28). 이 내용은 용사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반영합니다. 

출애굽기 15:4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하나님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던지다”는 말은 힘센 군인이 적을 향해 창을 멀리 던질 때 쓰는 동사로 하나님은 애굽의 군대를 바다로 던지셨습니다.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였습니다(14:7). 그들은 세계에서 최고의 전차 부대를 자랑했습니다. 병거를 타는 자들은 최고의 지휘관들로 병거를 다루는 데 능숙한 숙련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비군이나 계급이 낮은 병졸들이 아니라 바로의 명령을 직접 하달받는 장교들로 최고의 군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군인들과 최첨단의 무기 체계를 갖춘 애굽의 군대를 모두 바다에 던져 수장시키키심으로 바로의 군대보다 월등히 크신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애굽의 최고의 군대의 몰락으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애굽은 완전히 몰락하여 바다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랑거리를 조롱거리로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몰락을 국민 가요에 담아 부름으로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출애굽기 15:5

5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그들을 덮은 물은 깊은 물이었습니다. 좌우의 성난 물의 벽이 그들을 삽시간에 덮쳤습니다. 그들은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은 갑옷의 무게 때문에 돌처럼 무거워 가라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수렁에 빠지거나 얕은 물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거대한 깊은 물에 익사하였습니다. 이는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멸망받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1-23).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부분적인 심판이 아니라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고자 하시면 무섭고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때에 앗수르 대군이 유다를 침공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앗수를 군사 185,000명을 하루 아침에 몰살시키셨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 19:35).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이와 같이 철저하게 멸망당합니다. 전쟁 중에 창과 화살로부터 몸을 보호했던 철로 된 갑옷의 무게는 오히려 돌보다 더 빨리 그들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6

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6절에서는 “주의 오른손”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는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정의로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의 권능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위엄을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의 권능으로 원수를 부수셨습니다. 하나님은 패배를 모르는 대애굽 제국의 전차 군단을 산산조각내셨습니다. 병거와 그들의 무기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 그 혼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14:28). 하나님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에게는 보호와 인도와 구원을 나타내지만 대적들에게는 위엄과 두려움과 파멸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7

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그의 큰 위엄은 the greatness of thine excellency(KJV)로 ‘그의 탁월함의 크심’이라는 뜻으로 ‘탁월함’과 ‘위대하심’의 두 단어를 사용하여 두 번 강조하였습니다. 이 노래에서 모세와 백성들은 자기 백성을 박해하고 압제하는 자들에 대해 “주를 거스르는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교회를 그의 몸의 지체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행 9:4-5). 예수님은 교회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로 하나님은 그들을 엎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거스르는 자들에게 진노를 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정적인 측면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자기를 거스르는 자들을 엎으시고 그의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는 모습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노는 그를 거스르는 죄에 대한 당연한 응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심으로 그의 진노를 쏟는 것을 지체하시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롬 2:4). 세상에 악이 번성하고 득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적하기를 계속한다면 이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자기에게 쌓는 것입니다(롬 2:5).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잘되는 것 같고 행복한 것 같지만 성경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고 하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반면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롬 2:6-10). 

“지푸라기”는 ‘마른 풀이나 낙엽’, ‘추수 후 들이나 밭에 남겨진 밀의 마른 줄기’, ‘탈곡 과정에서 알곡과 분리되어 버려지는 지푸라기’, ‘부스러진 이삭’ 등을 가리킵니다(성경문화배경사전). 이는 “검불”(욥 13:25; 시 83:13), “겨”(창 24:25; 욥 21:18; 시 1:4), “그루터기”(사 5:24), “초개”(사 40:24), “지푸라기”(나 1:10), “짚”(출 5:7; 고전 3:12)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벼워서 쉽게 바람에 날리며 불에 쉽게 타버립니다.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는 구절은 최후 심판의 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계 21:8).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살라지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5:8

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주의 콧김은 하나님께서 일으킨 큰 동풍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14:21). 콧김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시 18:15). 하나님의 콧김은 파도를 일으켜 언덕 같이 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가벼운 호흡조차도 큰 파도를 일으켜 높이 솟게 합니다. 물은 흐르는 성질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자 물이 쌓여 벽이 되었고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섰습니다. “일어섰다”는 것은 수평으로 되려는 물의 성질을 거스려 물이 수직적으로 솟아 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다”에서 “엉기다”는 말은 ‘굳어져서 고체가 되다’는 뜻입니다. 큰 물은 the depths(KJV)로 ‘깊음’이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큰 바다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키자 물은 갇힌 댐이 되었고 물이 하나님의 백성을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홍해가 갈라진 것이 달의 인력 작용으로 썰물이 되어 얕은 바닷가가 갈라져 땅이 드러나는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큰 바다가 갈라져 댐과 같이 물을 가둔 기적의 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시 18:15). 

출애굽기 15:9

9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9절은 애굽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을 뒤쫓아 따라잡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탈취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칼을 빼어 들고 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열 재앙을 당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망간 노예를 잡으려는 악독하고 잔인한 주인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식욕을 채우기 위해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을 믿고 사는 자들로 군대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멸하는 자들로 사탄의 본성을 닮았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거짓말하여 속이고 빼앗고 죽이려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15:10

10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8절은 홍해를 가른 사건을 묘사한 반면 9절은 갈라진 홍해를 다시 합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자 바다가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 바람은 주의 콧김에 불과하지만 큰 파도가 한 곳으로 모여 쌓이고 좌우의 벽에 갇히게 되었고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곧 애굽의 심판으로 직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자 이번에는 댐이 터져 물이 쏟아지듯 바다가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들은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습니다. 5절에서는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다고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돌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층 더 강조하여 무거움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들이 주의 백성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아예 파도로 덮으시고 바다의 깊음 속으로 가라앉히셨습니다. 

출애굽기 15:11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1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유일성입니다. “신 중에서”라는 구절은 다신교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말한 것입니다. “신”은 하늘의 천사나 사탄,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말합니다(벧전 3:22).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와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다른 신들은 없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교도들은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들은 하나님과 비교 대상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성품입니다. 이방신들은 인간과 같이 감정적인 분노를 하기도 하며 사랑하기도 하며 시기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신들을 달래기 위해 각종 제사를 드려 그들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방 신들은 인간의 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사람들은 가나안 신의 대표인 바알을 풍요의 신으로 여기고 인간의 물질적 탐욕을 충족시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아세라 신은 쾌락과 다산의 신으로 인간의 육체의 쾌락을 충족시킨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의 영혼을 충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 은혜를 베푸셔서 대속 제물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이방 신들과는 달리 거룩하신 분이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기이한 일을 행하심으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처럼 조잡하고 우스꽝스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자연 세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높이 솟은 산의 바위, 광활한 대지, 넘실거리는 바다의 파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우주의 신비 등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심으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최고의 병거와 잘 훈련된 군인들을 홍해의 바다 한 가운데 던지시고 바닷물로 덮으심으로 그의 위엄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홍해를 가르셔서 물이 좌우의 벽이 되게 하시고 바다의 바닥을 마르게 하셔서 마른 땅을 걸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그의 위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위엄을, 믿지 않고 집요하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위엄을 보이십니다. 

출애굽기 15:12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2절에서는 바다가 애굽 군대를 덮어 수장된 사건을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는 표현은 바다의 깊음의 끝은 지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표현이 가능합니다. ‘삼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날 때 자주 사용되는 시적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삼키다’는 표현을 시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는 ‘불이 삼키다’(레 10:2; 신 32:22), ‘땅이 삼키다’(민 16:32), ‘칼이 삼키다’(신 32:42. 삼하 11:25), ‘다른 사람의 기업을 삼키다’(삼하 20:19), ‘질병이 피부를 삼키다’(욥 18:13), ‘스올(무덤)이 삼키다’(잠 1:12) 등이 있고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다’(시 69:9)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5:13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3절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내용으로 “구속”은 성경의 웅대한 주제입니다. 구속은 redeem으로 ‘속량하다, 값을 치르고 사다,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바로의 힘은 너무 강하고 이스라엘은 한없이 무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장자의 생명을 대속하게 하시고 그들을 자기의 보배로운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여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13절이 말하는 구속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태어나고 살았던 애굽에서 그들을 불러내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으로 그들을 붙드시고 거룩한 처소인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모형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허락하셔서 같은 성격의 일이 더 크고 영원히 지속되는 규모로 일어날 것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사탄의 결박에서 우리를 푸시고 언약으로 우리에게 띠 띠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 구속이 이루어지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값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행했던 어린 양의 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속함을 입었습니다. 그가 값비싼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변경되었습니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사탄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구속의 진전된 개념은 13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감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값을 치르시고 구속된 우리는 그의 거룩한 소유가 되어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 당당하게 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그가 다스리는 처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성막과 성전에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말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구속은 “주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높은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참선을 한다고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다스림에서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 구속자 예수님을 보내어 중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신 것은 순전히 “주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4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사건의 소문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워한 사람들이 블레셋, 에돔, 모압, 가나안의 순서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의 순서입니다. 블레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잡혔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히브리 원어로 ‘강력한 두려움을 주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KJV에서는 sorrow(슬픔)이라고 하였고, ESV에서는 pang(갑자기 격렬하게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아픔)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이 소문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주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은 약속의 땅과 가장 가까운 땅으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원수입니다(13:7). 그들은 다윗에게 정복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주기적으로 괴롭힌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 나라를 무찌르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은 군사 무기에서도 압도적인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삼상 13:19-22). 철제 무기를 갖고 있던 이들이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애굽의 전차 군단을 이스라엘이 무찌른 소식을 듣자 두려움이 주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고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에돔에게 세일 산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신 2:5) 모압에게도 아르를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수 2:9).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통과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빼앗길까봐 이스라엘의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에게도 그들과 다투지 않도록 해서 그 땅을 우회하여 통과하게 하셨습니다(신 2:4-6). 

모압도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삿 11:17).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여 번민에 빠지자 주술가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민 22-24장). 

가나안 주민이 낙담하였다는 이야기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냈을 때 그들이 정탐한 내용에서 나옵니다.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라합은 그들을 숨겨주면서 가나안 사람이 홍해 사건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였고 주민들의 간담이 녹았다고 말해 줍니다(수 2:9-10, 2:24, 9:9). “낙담하다”는 말은 melt away로 ‘녹아내리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마음을 굳게 잡아야 하는데 그들은 마음이 녹아내리며 모든 의지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나안 사람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수 6:1). 

블레셋과 에돔, 모압과 가나안이 두려움에 사로 잡힌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크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대 시대의 나라들은 자기들의 신들을 의지하여 전쟁했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행하신 일의 소문을 듣고 이미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출애굽기 15:16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습니다. 주의 팔이 크다는 것은 주의 능력이 크다는 말로 6절과 9절에서는 “주의 오른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 주변국들은 돌 같이 침묵했습니다. 사실 에돔과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다가왔을 때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을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모압 왕 발락은 주술사 발람을 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셨고 그들과의 전쟁 없이 그들의 땅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해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돌과 같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전쟁 없이 그 땅을 지나가게 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뒤의 구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그들을 돌 같이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에돔과 모압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대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통해 죄가 턱 밑까지 찬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16절에서 “주의 백성”을 “주께서 사신 백성”이라고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샀다는 말은 buy와 purchase라는 단어로 물건을 사다는 말입니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당신의 백성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셨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공식적인 소유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버젓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이방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 약속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죽은 아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서 그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가 정당하게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후에 조상들이 막벨라 굴에 매장되었습니다. 이처럼 값을 주고 사야 공식적인 소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보배로운 소유로 삼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백성에게 그들이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출 19:5).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의 소유가 아닌 공식적으로 “주의 백성”이요 “주께서 사신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아래 팔렸던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그 고귀한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되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인데 주의 백성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요 10:28). 이 선언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큰 위안과 안심이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수없는 대적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사신 백성이므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건드린다면 하나님은 빼앗고자 하는 자들을 가만 놔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7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주의 기업의 산”에서 “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애굽과 달리 가나안 지역은 산지가 많기 때문이고 예루살렘 성전도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시온 산 꼭대기에 세워졌습니다. “심는다”는 말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시 44:2). 심기 위해서는 먼저 있는 것을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뽑으시고 주의 백성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에도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으로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만민이 우러러 보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주의 기업의 산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예루살렘 성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날 것이며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만민들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2:2-3). 이 비전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의 기업의 산에 우뚝 선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체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갈라놓은 휘장 가운데 새롭고 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히 10:20). 이로써 예수님은 친히 성전이 되시고 만민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하나님의 율법이 만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17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주의 기업의 산의 성전을 주의 처소로 삼으시려고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주의 처소를 “성소”라고 표현하였고 13절에서는 “주의 거룩한 처소”라고 칭하였습니다. 주의 거룩한 처소인 성전은 해발 790m의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 시온 꼭대기에 지어졌습니다. 이 곳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산으로 모리아 산입니다(창 22:2). 이 곳은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고(삼하24:16-25),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예루살렘 북동편 언덕입니다(대하3:1).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에게 속죄의 길을 열어 주셨는데 이것이 성전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형적 성전은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기 때문에 한계적이었고 동물의 피의 효력도 일시적이었습니다. 성전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로 중간에 막힌 죄의 담을 허무심으로 이루실 영원한 제사의 모형일 뿐입니다(엡 2:14). 하나님께서는 장차 주의 기업의 산에 주의 백성을 심으시고 주의 처소로 삼으려고 예비하신 것인데 이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성소로 나아가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18절은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통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왕 바로의 잔인한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진국 애굽에서 선진국의 풍요를 누렸지만 그들은 바로의 노예로 자유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자유가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반복해서 전한 메시지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였습니다(5:1; 7:16; 8:1; 8:20; 9:1, 13; 10:3).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9:5-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들은 바로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바로의 노예로 있었을 때는 자유의 가치를 몰랐지만 이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자유의 가치를 느끼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신 뜻은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빛나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가치를 추구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를 죄를 짓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시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이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복되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간직한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저주의 구속이 아니라 구원이고 생명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존재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만민이 부러워할 대상이 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진국의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이유가 선진국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극빈한 나라에서 독재자의 다스림을 받는 시민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안전과 생명과 시민이 누릴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다스리느냐는 문제는 무척 중요합니다. 바로의 다스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유의 감격과 환희 가운데 여호와의 영원무궁한 통치를 찬양합니다. 

미리암의 노래(15:19-21)

출애굽기 15:19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19절은 노래의 마지막 구절로 노래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애굽의 군대의 멸망과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의 극명한 대조가 사용되었습니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은 함께 바다에 들어갔고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과 병거와 마병을 자랑했고 군대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데 강대국의 전차 군단이 바닷물이 두려워서 못 건너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9).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자기들의 오만함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교만한 자를 땅끝까지 빠뜨려 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바다 한 가운데 마른 땅을 걸어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좌우의 물벽이 소리를 내며 덮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걸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히 11:29). 그들이 밟은 길은 육지가 아닌 바닷길이었지만 그들은 육지를 행하는 것 같이 두려워하지 않고 건너갔습니다. 

우리에게도 홍해와 같은 현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호둘갑을 떨기 쉽습니다. 현실만 바라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14:13-14).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허락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빌 4:7). 

출애굽기 15:20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애굽기에서 저자는 여기서 미리암의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바로의 남아 학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 모세도 나일 강에 버려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믿음으로 석달 간 숨기다가 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웠습니다. 이 때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강가에 나아올 때 모세는 공주의 눈에 띄게 되어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의 누이 미리암이 기지를 발휘하면서 공주에게 아이의 생모를 유모로 추천하였고 모세가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인생에서 미리암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모세의 노래에서 미리암은 “선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건짐을 받고 장차 이스라엘의 구원의 지도자가 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서 바로의 공주에게 제안했다는 점에서 이런 칭호가 붙여질 만합니다. 또한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출애굽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같은 호칭이 부여된 것 같습니다. 

그녀는 1-19절의 ‘바다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이스라엘 여성들의 지도자로 이스라엘이 믿음의 선택을 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여성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들의 아이들이 침묵을 지키도록 지도하는 일을 지시하는 등 보이지 않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노래하는 일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녀는 손에 소고를 잡고 모든 여인들도 그를 따라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들은 ‘바다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대대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 미가는 출애굽의 지도자 반열에 미리암을 끼워넣었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 민수기 20:1은 미리암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어 그녀의 지도자적인 위치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미리암은 소고를 치며 춤을 추었고 여인들도 이를 따라 소고를 치며 노래하였습니다. 소고는 전형적인 타악기로 구약에 8회 언급되었습니다(삿 11:34; 삼하 6:5; 대상 13:8; 욥 21:12; 시 81:2, 149:3, 150:4). 소고는 종교적인 행사나 즐거운 축제 때 서민들이 즐겨 사용했던 대중적인 악기였습니다(삼하 6:5; 대상 13:8; 시 68:25). 이 악기는 여인들이 주로 춤추며 노래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출 15:20; 삼상 10:5; 대상 13:8; 시 68:25; 81:2). 미리암이 악기를 연주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음악이라는 문화를 통해 백성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특히 고대 시대에 노래는 역사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현대 시대에도 찬송가나 크리스천 음악을 통해 이것이 사람들의 입에 불려져 유행하면서 그 가사의 내용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는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수백 년이 지나서 사람들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그 노래를 지은 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가사가 전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느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특히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 기독교 음악)은 젊은 세대에 맞는 문화를 제공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기 용이하게 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 문화의 선교적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의 문화적 접근은 젊은 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데 거부감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을 열정적인 예배자로 서게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15:21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모세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에 대해 미리암은 화답하는 형식으로 노래를 합니다. 이는 응답 송가로 ‘안티포널’(antiphonal)이라고 부릅니다. 성가대에서 독창자와 합창단이 서로 화답하거나 남녀로 구분하여 서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부르는 형식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노래에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며 화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기도와 찬송과 말씀의 형식을 취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화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찬송을 할 때 노래를 못 부른다거나 음악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닙니다. 또한 설교자의 말씀 선포에 대해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런 과정에서 말씀이 역사합니다. 가톨릭 미사에서 집례자의 소리에 맞추어 성도가 화답하는 것은 오랜 전통입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를 떠나서 화답이라는 상호작용의 예배가 될 때 그것이 살아있고 생동감있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미리암은 청중들에게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외칩니다. 그녀는 여호와는 높고 영화로우신 분으로 찬양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높고 영화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단순한 응답이 아니라 그의 영화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 응답받은 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응답받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응답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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