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헤롯의 위협을 알려주면서 헤롯의 관할지역을 떠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질 것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정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처럼 유대인의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하시면서 자기를 배척한 예루살렘, 즉 유대인들이 당할 심판의 참혹함을 생각하시고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셨습니다.
헤롯의 위협을 알린 바리새인
누가복음 13:31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곧 그 때에”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얻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말씀하신 후를 말합니다(24).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요단 강 건너편 베레아 지역입니다. 베레아는 사마리아와 유대 맞은편 요단 강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갈릴리와 마찬가지로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헤롯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고 전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베레아를 떠나 산헤드린이 관할하는 유대로 가도록 강요하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수없이 충돌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완고한 그들의 죄를 책망하셨고 그들에게 화를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로 따져 물었습니다(11:53). 분봉 왕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부도덕한 자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폭군이었습니다(3:19). 또한 그는 그의 죄를 책망하는 의인 세례 요한을 죽인 자였습니다(9:9). 그는 헤롯대왕의 아들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한 분봉 왕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을 재판하게 되는데 예수님을 희롱하고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23:7-12). 헤롯이 그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그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소식을 전한 것은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유대로 가도록 위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32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여우는 무리를 짓지 않고 황무지나 산의 자연 동굴이나 스스로 판 굴에 살면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입니다(겔 13:4; 마 8:20; 눅 9:58). 여우는 작은 동물이나 곤충, 과일 등을 먹는 잡식성인데, 특히 과즙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종 포도원에 침입하여 큰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아 2:15). 여우는 영적으로는 교회나 주의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거짓 예언자를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겔 13:4). 또 몸이 잽싸고 지혜로워 흔히 교활한 존재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을 “여우”라 표현한 것은 이런 이미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하신 것은 경멸적인 발언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헤롯은 신약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런 경멸을 표현하신 유일한 인물입니다.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통치자를 모독하거나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2:28). 전도서 기자는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전 10:20). 사도 바울도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고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롬 13:1).
그러나 이는 보통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지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을 직접 질책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통치자들이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한다고 하며 그들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사 1:23). 에스겔 선지자도 그 당시 정치 지도자들을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였다고 책망했습니다(겔 22:27).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을 들으시고 그를 “여우”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밭을 해치는 해로운 짐승,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살인자,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자로 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헤롯 왕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을 때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그를 무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헤롯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이 문장 앞에 “보라”(이두)라는 말이 있어 그가 하실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을 언급하심으로 그의 삶이 짧을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직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방해나 우회 없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그의 치유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권고대로 헤롯의 죽음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길을 돌아가시거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도 초기 사역 때와 같이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치유 사역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을 건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기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11:20). 그러나 이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완전하게 되셔야 합니다. 그가 죄와 죽음을 정복할 때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에 의해 결코 방해를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를 수행하시기 위해 정확한 일정에 맞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면서 완전한 그의 나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완수될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완전하여지리라”는 NIV로 reach the goal로 ‘목표에 도달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목표는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사명을 언급합니다. ESV에서는 I finish my course로 ‘길을 다 마치다’로 예수님께서 그동안 달려왔던 사명의 길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인생 말년에 그가 살아온 인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을 가리켜 “완전하여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슬픈 비극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목표인 그의 백성의 구원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운명하시기 전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 19:30).
예수님의 죽으심이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제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제삼일”은 3일 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오늘과 내일”보다 더 멀리 있다는 비유적 언급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제삼일은 정확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짧은 기간을 말합니다. “제삼일”은 우리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완벽하게 성취될 것을 암시해 줍니다. 이 목표는 그가 죽으신 지 세 번째 날 부활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구원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고전 15:3-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9:22). 예수님은 이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9:44; 18:32-33).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자들이 빈 무덤을 찾아왔을 때 천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예언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24:7).
누가복음 13:33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러나”는 Nevertheless(KJV; NASA95; ESV; RSV)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의 위협을 피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일정대로 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요 1:29).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예수님이 사흘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지체없이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멀리 가다’, ‘여행하다’라는 뜻으로 다른 복음서나 신약성경 저자보다 누가가 더 자주 사용한 단어입니다(41회). 이 동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굳게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결심하셨을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9:51).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장엄한 구원의 계획은 사람들에 의해 좌절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은 영원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벧전 1:20). 심지어 헤롯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의 적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행 2:23; 3:13-18).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라는 속담은 선지자들이 죽은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는 헤롯이 아니라 그들에게 헤롯의 위협을 피하라고 강요한 바리새인들입니다. 사실, 많은 선지자들이 그 도시에서 죽임을 당했고, 앞으로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죽음(대하 24:20-22)과 선지자 우리야의 죽음(렘 26:20-23)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들 선지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받았습니다(마 21:11; 요 9:17; 눅 7:16; 눅 24:19).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는 모세가 신명기 18:15에서 말한 그 선지자이셨습니다(행 3:22).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는 속담의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세운 총독 그다랴가 살해되자 강제로 애굽에 끌려가(렘 43:1-7) 거기서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그는 헤롯의 궁전에서 참수당했는데, 이 궁전은 예루살렘 도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요단 강 어귀에서 남동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화된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헤롯과 헤로디아이 손에 죽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법 절차에 따른 죽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이 속담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의한 박해와 살해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재판하는 특권을 가진 기관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만 앉아 있었고, 선지자를 재판하고, 거짓으로 판명되면 그를 정죄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재판이라는 사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그 재판은 새벽에 열린 재판으로 불법적인 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재판에서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사형 집행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인 빌라도의 손을 빌어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부분의 선지자들의 죽음처럼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누가복음 13:34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23:37-38에도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화려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2; 막13:2; 눅21:6; 마24:2).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3:37에서는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 전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헤롯의 관할권인 베레아에 계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같은 말씀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한 후 나온 것이지만, 누가복음의 기록은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위협을 이용해 예수님이 헤롯의 관할지역인 베레아를 떠나 산헤드린이 관할하는 유대로 가도록 강요하려는 상황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도시가 심판받을 것을 생각할 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외침은 거룩한 도시에 대한 작별이었습니다. 이 외침은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애정이 담긴 슬픔을 요약한 말이었습니다. 지상의 도시가 예루살렘처럼 사랑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곳은 영원하신 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섬기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성전은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의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엄숙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루살렘의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둡고 우울한 역사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항상 악한 사람들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피의 행위가 이루어졌고 은혜를 배반하였으며 영적으로 무능했고 악으로 변질된 어리석음으로 더럽혀진 도시였습니다.
KJV을 보면 O Jerusalem, Jerusalem으로 ‘오’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격한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라고 탄식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심으로 그의 깊은 슬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렀습니다(삼하 18:33). 반복은 성경에서 강조와 감정을 표현하는 익숙한 방법입니다(10:41; 22:31;행 9:4).
예수님께서 깊은 탄식과 슬픔을 표현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피가 예루살렘 거리의 땅에서 울부짖고, 하나님의 성전 뜰에서 울부짖었습니다. 돌로 치는 것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인 처형 형태로, 신성모독(레 24:14, 16, 23 )과 배교(레 20:2; 신 13:11)와 관련된 경우에 사용됩니다.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학대하고 박해하고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가 낳은 백성을 모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 영적인 힘 등을상징하는의미로 쓰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표현하며 릇을 축복하였습니다(룻2:12). 시편 기자는 주님의 날개 그늘을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교제의 영역으로 표현했습니다(시 17:8). 이사야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고(사40:31),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면서 바람이 그 날개로 이스라엘을 쌌다고 표현하였습니다(호4:19).
모세도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독수리의 새끼 사랑의 은유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날개에 업어 인도하듯이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은 새끼의 둥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일정 시간이 지나자 둥지에 있는 새끼를 날개로 어지럽히는 독수리와 같이 고난을 통해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강한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들을 업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신 32:11-12).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언약을 잘 지키면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출 19:5-6).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반복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때마다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돌이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낸 것은 그들을 그의 날개 아래 모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역대하 36:15-16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호소는 하나님을 대리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암탉이 새끼를 모으고자 하듯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을 모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그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고 귀를 틀어막고 외면할 뿐만 아니라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제 은혜의 시간은 끝났고 전능하신 날개는 접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슬픈 통곡을 하시며 그들이 황폐해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시면 슬픈 특권, 즉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언급하셨습니다(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누가복음 13:35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보라”는 말은 각 개인에게 ‘보는’ 행위를 시작하고 보는 것의 결과나 효과에 참여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은 지금 당장 하고 미루지 말라는 의미로 지휘관이 그의 군대에 내리는 명령과 같이 긴박함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그의 정죄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라”라고 외치시면서 참혹하고 충격적인 결과를 보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너희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황폐하게 되었다”는 말은 의미는 원어로 ‘버려지다’는 말로 “너희 집”이라는 단어 앞에 놓여 강조되어 있습니다. “황폐”(desolate)라는 말은 KJV, NIV와 NASB95에 첨가되어 번역되었고 ESV, RSV, NRSV에서는 원문 그대로 ‘버려지다’(is forsaken; is left)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 “집”(오이코스)은 거주지를 가리키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기도 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그들이 거주하는 거주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인에 의해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집”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이 성전이나 국가, 혹은 그들의 거주지 모두가 버림을 받았고 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11). 왜냐하면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빛 가운데 드러날까봐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요 3:19).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였습니다(행 3:14). 건물 형태의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삼상 4:21).
“버린 바 되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전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 위치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소중한 성전이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영광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다”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렘 12:7). 이와 비슷한 예언적 말씀은 예레미야 22:5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물론 예레미야의 예언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과 첫 번째 성전(솔로몬 성전)의 파괴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좀더 확대되어 예수님 시대에 메시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비극적인 재앙으로 연결됩니다.
“…할 때까지는 …하지 못하리라”는 표현은 특정시점까지 일어난 다음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특정 시점을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시대를 암시합니다. 그때 그는 참으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계 19:16). 이와 비슷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하실 때 언급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22: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2:18). 바울도 이 성만찬을 언급하면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그가 오실 때까지”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기 70년에 시작되어 그들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며 눈물과 비극 속에 살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포위할 때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 누구도 예루살렘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그후 티투스 장군의 지휘를 받은 이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성벽은 5층 높이였고 매우 두꺼웠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 안에는 급수 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많은 곡물이 저장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거룩한 성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포위는 재앙이었고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5개월간의 포위 기간 동안 12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습니다. 60만 명이 거리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하루에 4,000명의 시체가 성벽 너머로 던져졌습니다. 역겨운 죽음의 악취와 성가신 파리 떼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굶주리고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식인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횃불을 던져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길은 성전의 내부 성소에 삼켰습니다. 화재로 인해 성전 건축에 덧입힌 금이 녹아 돌의 틈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쇠지렛대와 쐐기로 성전을 돌 하나하나 뜯어내며 이 금을 찾았습니다. 돌 하나도 남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19:44; 마 24:2; 막 13:2).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배척당하지 않고 기쁨으로 영접받을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거부로 예루살렘 성전은 황폐해질 것이고 왕이나 제사장이 없고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하시 후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은 그를 찬송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버림받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평강의 왕이 다윗의 왕자에 앉아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성전과 제사와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외에는 더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성전에서 떠나셨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들의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숨어 안전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하심 아래 거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은 반대로 해석하면 아주 희망적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교회 시대에 구원받는 남은 자들을 넘어선 이스라엘의 미래가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보는 것’은 영적 인식을 말합니다. 그들은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자랑하는 교만에 눈이 가려져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미래의 날에 이스라엘은 그분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면 그들이 그 찌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애통하고 통곡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를 보내신 아들을 죽인 죄에 대한 애곡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게 될 것입니다(슥 13:1). 거역하던 그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역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그를 보게 될 것이지만 그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형벌이 있게 되는 구원의 교리의 일반원칙이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은 버린 바 되어 황폐하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게 될 것이고 영적으로 깨달아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약속을 번복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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