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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병 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누가복음 14:1-6)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수종병 든 자를 이용해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속내를 아시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지를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를 구하는 것처럼 시급히 행할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례를 고집하는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규례에 집착한 바리새인들

누가복음 14: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가신 것은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안식일에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그 전날 음식을 다 만들어 놓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었고 안식일에는 세 끼를 먹었습니다. 전날에 준비하고 따뜻하게 보관한 안식일 식사는 정오 무렵에 회당 예배가 끝난 후에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손님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은 5회 언급하였습니다. 4:31-37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 5:17-26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6:6-11은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 13:10-17은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신 사건, 마지막으로 14:1-6은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수많은 갈등을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초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초청한 바리새인 지도자는 분명 그가 병을 고치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 앞에서 치료의 기적을 보았지만 영적은 눈먼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은혜에 대해 눈을 멀게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둔화시키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기적을 일으킨 마지막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많은 부담스러운 규칙을 추가하고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을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휴식의 날이어야 할 날이 부담스러운 날이 되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의 영혼을 덫에 걸리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엿보다”는 말은 헬라어로 ‘눈을 떼지 않다’, ‘면밀히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매가 먹이를 지켜보듯이’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사악한 눈에 감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초청의도는 악했으며 불순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약점을 발견하면 바로 그를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고(9:51),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과 그들과의 충돌도 그분의 여정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자 엿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하고자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감시를 당하신 것은 그의 지상 사역 내내 끊임없이 겪으셨던 일의 한 유형일 뿐입니다. 그분의 적들의 눈은 끊임없이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걸음걸이를 지켜보았고, 그들이 붙잡고 고발할 수 있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십니다(히 7:26). 그 어떤 적이라도 그의 흠이나 티, 점, 주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 못지않게 주시받고 감시당할 것이라는 것을 마음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눈이 우리에게 쏠려 있고, 악한 자들이 그의 모든 길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흠이 잡히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빌 1:27).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1-3). 그렇게 살면 악의적이고 악의적인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감시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불쾌감이 없는 양심을 갖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주님의 원수들에게 모독할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대적이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했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습니다(단 6:4).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완벽하게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해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의 식사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도 믿지 않는 자들과의 교제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과의 교제의 자리가 우리를 통해 반사되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삶과 행동 방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은 제자인 우리가 그의 삶을 본받도록 이 땅에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선생이요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제자들이 그 본을 따라 서로 발을 씻는 삶을 살도록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3:14-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고전 4:16). 이는 그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피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행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히, 주의 깊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2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수종병”은 헬라어로는 ‘휘드로피코스’인데, ‘물’을 뜻하는 ‘휘드로’(ὕδρω)에서 유래된 말로 ‘물이 가득 찬’이란 뜻입니다. 이 병은 복부에 과도하게 체액이 축적되어 심장, 간장 등 장기들을 압박하여 몸이 붓는 증세를 가리킵니다. 수종병은 심장이나 신장에 결함이 생길 때 발생하는데, 얼굴이 부어 오르고 팔과 다리가 크게 부풀어 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수종병은 발생 부위에 따라 ‘복부수종’, ‘늑막공동’, ‘심장수종’, ‘발과 다리 수종’ 등으로 불립니다. 

2절 앞에 behold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독자의 주의를 끌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언급한 곳이 여기가 유일하기 때문에 독자의 주의를 끌 만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리새인 집에 수종병 앓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종교 엘리트만 모이는 곳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는지를 엿보고 그를 고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이용하여 그들의 불순한 목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 사람을 치유하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전략은 고전적인 설정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은 분명 그가 신적인 능력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하지만 영적은 눈이 먼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의 규정에만 꽂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견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면 안식일에 일을 행하지 않음으로 율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안식일 율법은 장로의 유전으로 그들이 만든 세부규칙이었습니다. 

수종병을 앓는 자의 병증의 정도가 어떤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누가 봐도 수종병 앓는 자임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는 전신성 부종 환자로 모든 부위에 붓기가 확연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특히 몸의 가장 아래 부분인 다리에 부종이 심하여 그가 신은 샌들 밖으로 부은 살갖이 튀어 나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붓는 증상은 아마도 그가 심한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랍비들은 아마도 그런 부종 상태를 그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거나 신체에서 나쁜 것을 배설하지 못해 생기는 병으로 유출병과 함께 더러운 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레위기 15:3을 보면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즉”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아마도 수종병 환자는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힌 질병으로 부정한 병으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병으로 여겼던 바리새인들이 식사 때 그를 용납한 것도 율법을 지킨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4: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대답하다’는 의미의 ‘아포크리노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이 질문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라 그들의 행동이나 숨겨진 생각을 다 아시고 대답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위선자들이 안식일에 동물은 아까워서 우물에 빠져 위기에에 처한 동물은 구해내지만 병에 걸린 사람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한지 잘못된 일인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먼저 안식일 법을 가지고 공격할 것을 미리 차단하시려고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한다면 그동안 온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을 고치는 것이 불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는 차가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대답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막 3:4).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마 12:7).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은 안식일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사의 문제조차도 잔인하고, 융통성이 없고, 터무니없는 인위적인 제한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둘러싸고 확장하는 인간의 전통을 종종 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충분하며, 우리는 결코 좋은 전통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과 동등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데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가 안식일 준수를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급히 행할 일

누가복음 14:4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잠잠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답변을 했더라면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주장해 온 안식일 법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바꾸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쉽게 꺽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큼 수용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불법이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매정한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으로 난처한 입장을 벗어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은 수종병 든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데려다가”는 헬라어로 ‘에피람바노마이’로 take hold of (NIV; 잡다, 붙들다)의 뜻입니다. 수종병 든 사람은 유출병 환자와 같이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입니다. 레위기15:3에 의하면 몸의 분비물이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주장대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한다면 자기 집에 수종병 든 사람을 들이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 수종병 든 남자를 집안에 들였고 그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치기 위해 그가 부정한 자라도 그를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심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정에 의해 오염되실 분이 아니라 그의 거룩함으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만지는 것은 다 거룩해지면 완전해지며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기 위해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해가 진 후, 즉 안식일이 끝난 후에 다시 오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이면 안식일이 끝나니 그때가 되면 고쳐 주겠다고 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덫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를 고치기 위해 정면 돌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때에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우회하기도 하시지만 결정적인 때에는 정면 돌파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자 하실 때 피하지 않으시고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단호하게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때로는 피하기도 하시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직진하십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우회하실 필요가 없으셨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일을 과감하게 실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자 눈에 띄게 부어 있던 수종병 든 남자는 순식간에 완전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푸석한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입가에는 미소를 띄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내키지 않은 초청을 받아 불편한 몸으로 바리새인의 집에 왔는데 예수님의 치유로 온전하게 낫게 되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의 변화의 모습을 상상할 뿐입니다.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수종병 든 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적인 병을 앓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도전적이십니다. 예수님은 정면으로 우리의 죄를 마주하시고 치료해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에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샘물을 갈구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고 그녀의 죄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죄를 감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예수님은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부도덕한 삶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의 사생활을 드러내었다고 반발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죄를 그냥 덮어 두지 않으시고 의사가 메스를 대어 상처를 도려내거나 종양을 제거하듯이 제거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심으로 수술 후 상처를 싸매주듯 그녀를 죄 사함의 사랑으로 싸매 주셨습니다(요 4:16-19). 사도 요한도 죄 문제에 대해 정면 도전하여 깨끗함을 받기를 권면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고 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피한다면 사람들은 죄 사함과 자유의 복음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로 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죄 문제에 대한 정면 돌파 없이는 그 어떤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속박하는 부담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개념에 대해 아주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안식일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생명의 관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의 안식일에 대한 해석은 백성들을 속박함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확대해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의 행복을 방해할 정도록 무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생명과 구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종병 든 자를 고쳐 보내셨습니다. “고치다”는 ‘이아오마이’로 원래의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 그대로 육체적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구출하여 온전하게 만들고 신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에 육체적 치유는 영적 치유와 분명히 겹칩니다. 그래서 ‘이아오마이’라는 단어는 영적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마 13:15; 요 12:40; 행 28:27; 벧전 2:24). 

예수님은 그를 고쳐서 보내셨습니다. “보내시다”는 말은 ‘아폴뤼오’로 ‘풀어주다’, ‘구하다’, ‘해방시키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 대신 반란자 바라바의 석방을 언급할 때 쓴 단어입니다(마 27:15,17,21; 요 18:39). 이 단어는 또한 군 복무에서 면제되거나,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채무자를 자유롭게 할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법적 맥락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거나, 풀어 주거나, 석방하거나,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의 외적인 치유가 그의 영혼의 내적인 구원과 함께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영혼의 구원과 연결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신자는 사실 예수님의 붙드심(에피람바노마이)과 치유(이아이오마이)와 보내심(아폴뤼오)를 통해 속죄의 기적을 받은 자들입니다. 수종병 든 자는 바리새인에 의해 이용되기 위해 만찬에 초대되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의해 그날의 주인공으로 ‘붙드심’과 ‘치유’와 ‘보내심’을 받기 위해 초대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4:5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자 “이제 우리가 그를 잡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비난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의 긴급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논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물에 빠진 소는 긴급하게 구조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경작하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를 잃는 것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실 동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경제적 손실 때문에 안식일이라도 동물을 구조하는 것을 우선시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사람의 치료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찬사나 존경을 받게 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이용해 그들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위반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은 곧 그들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아주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 법에 우물에 빠진 소를 구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도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져 죽으면 구덩이를 판 주인은 이를 배상하라는 조항이 있습니다(출 21:33-34).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이 이를 특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조항이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종병 든 사람을 우물에 빠진 소에 비견하여 그가 응급 상황에 있다는 것을 피력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수종병 든 사람은 자신의 체액에서 허우적거리며 익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부어 있는 비참한 상태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시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급한 환자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직진하고 계십니다. 수종병 든 자는 안식일인 그날이 아니면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수종병은 그 당시 의사들이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시각이 아니면 그는 영원히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아니면 그를 수종병의 매임에서 해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우물에 빠진 소와 같은 응급상황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통 부어서 비참한 상태로 고통받는 이 사람보다 자신의 동물을 더 돌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의 부족과 종교적 위선을 폭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동물을 돕는 것이 옳다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일관성 없는 가르침을 폭로하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4:6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반박할 논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짓된 경건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일 법을 수호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학대하고 구주를 비난함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보호하는 것과 인간의 전통을 지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박의 패턴은 친숙한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더 작은 것에서 더 큰 것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수사 의문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악한 자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를 비교하시고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셨습니다(마 7:11). 누가복음 11:13에서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악한 자의 자식’과 ‘하늘 아버지의 자녀’를 비교하셨고 ‘좋은 것’과 최고의 선물인 ‘성령’을 비교하심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2:28에서는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과 ‘믿음의 자녀들’을 비교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을 굳게 닫히게 한 예수님의 질문(5절)은 ‘우물에 빠진 아들과 소’와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수종병 든 자’를 비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시고 겸손을 촉구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지만 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말씀을 연구하지만,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지식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상대로 사용할 탄약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의 눈으로 주의 깊게 지켜보았지만,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 요구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라는 말씀을 거론하며 자기에게 순종하기를 요구합니다. 반면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라는 말씀을 거론하며 남편에게서 그리스도의 높은 수준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요구하는 마음이 앞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데 사용하기 싶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그럽게 적용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리더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흔히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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