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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잔치의 비유(누가복음 14:15-24)

큰 잔치의 비유는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반응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큰 잔치는 구원의 잔치를 말합니다.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는 주인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그의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잔치를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그 자리가 다 차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면서 아무 자격이 없는 자라도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려면 자기의 개인적인 일을 포기하고 그의 초청에 응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큰 잔치에는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누가복음 14:15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예수님은 보답할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청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답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베푸는 자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고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잔치를 벌일 때 서로 외치는 공식적인 건배사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연회를 예언함으로 그의 초대를 기대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면서 이와 같이 건배를 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이 예언의 말씀으로 건배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의로운 자들 가운데 거하고 크고 놀라운 날에 조상들과 함께 앉을 자격을 갖추게 하소서”라고 응답했을 것입니다. 이런 화답 형식의 축배는 정형화된 방식의 건배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시기 위해 잔치에 참여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미래의 메시아 왕국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선지자들을 귀한 손님으로 모시는 큰 잔치로 상상했습니다(13:28; 사 25:6). 익명의 이 손님은 자신도 언젠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선지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의인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14). 그 잔치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그의 나라에서 갖게 될 종말론적 교제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연회에서는 사망이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들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실 것입니다(사 25:6-8). 계시록 19:9에서는 이 잔치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하였고 이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의 호스트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잔치의 주인공이 어린 양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간과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잔치로 오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사양하였습니다(16-20).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비유에서 그들은 자기 일로 바빠 이 잔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연회는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사 25:6). 이 잔치에 참여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예복을 입은 자들입니다(마 22:11-12).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의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다 초청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잔치에 참여할 자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선언된 남은 자들 뿐입니다. 반면 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헛된 자부심이 때문에 그가 베푸시는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에 멀리 있던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엡 2:12-13). 

함께 먹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면서 자기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의 연회에 들어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의 잔치에 높은 자리를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지키는 전통과 규례와 의식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연회에 초청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근거 없는 희망을 깨뜨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된 확신을 무너뜨리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거짓된 확신에 찬 이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과 치명적인 기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따르지 않고 그의 제자로 살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기대하는 것은 모든 거짓 희망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고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거운지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히 10:29). 

하나님의 나라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보이지 않는 내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그가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 로마를 쳐부수고 다윗 왕국을 회복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20-21).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듯이 그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임하는 나라입니다(막 1:15). 또한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십니다(계 5:12).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복종하고 경배해야 할 그분을 바로 앞에 두고도 영접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4:16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와 관련한 비유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 “함께 먹는 자 중의 하나”에게 반박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언급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함께 먹는 자 중의 하나”는 아마도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 왕국의 연회에 좋은 자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비유적인 방식으로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셔서 그들이 심각하게 착각했고, 그들은 결국 축복받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없는 영원에 들어갈 것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지만 예수님은 이 놀라운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하셨습니다. 초대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는 사람이 거절하는 변명을 볼 때 슬픈 일입니다. 

당시 큰 잔치에 초대하는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누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날의 초대장처럼 초대받는 사람에게 행사에 초대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식 초대장과는 달리, 첫 번째 초대에는 잔치 준비의 복잡성 때문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큰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잔치에 올 사람의 인원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할지, 소와 양은 얼마나 잡아야 할지, 음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어떻게 구하고 수확해야 할지, 자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등 꽤 복잡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모든 것이 차려졌고, 모든 것이 준비되면 주인은 하인에게 “이제 모두에게 준비가 되었다고 전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초대받은 손님은 하인을 통해 임박한 잔치에 대해 통보를 받으면 만사를 제치고 잔치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과 문화였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몹시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핑계를 보면 정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 시대에 일방적인 취소는 끔찍하게도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복음 14장의 큰 잔치의 비유는 마태복음 22:1-14의 ‘혼인 잔치의 비유’와 동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두 잔치는 차이점도 있고 유사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잔치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라고 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고 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18-20절에 걸쳐 각 사람의 변명을 언급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 보아야 한다고 했고,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므로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은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공통점은 처음 초청장을 보냈을 때는 참석 의향을 밝혔으나 잔치가 임박해서는 모두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비유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시도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지만(마 21:46), 누가복음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큰 잔치에 자신이 초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어떤 사람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7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비유에서 큰 잔치를 베푼 주인은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초청은 이미 잔치에 오기로 응답한 자들에게 다시 보낸 초청장이었습니다.큰 잔치에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두 번의 초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초대장은 행사를 알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 초대장은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청하였던”이라는 동사는 완료 시제로 초대장이 특정 시점에 전달되었으며 그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식적인 초청은 ‘부디, 회신해 주세요’라는 초대 확인을 요구하는 RSVP 초청장을 발송하는데 받은 사람은 반드시 수락 여부를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응답해 놓고 가지 않는 것은 초청한 사람 대한 심각한 결례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겠다고 해놓고 임박한 초청에 대해 거절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더욱더 심각한 모욕이었습니다. 초청하는 주인이 임금인 경우 그 임금에 대한 전쟁 선포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초대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왔고, 두 번째 초대는 그의 아들을 통해 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첫 번째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아들을 보내시자 아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아들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음으로 잔치집의 빈 자리는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21).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 사람에게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합당한 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영접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의 구원의 잔치에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청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큰 만찬을 준비하고 많은 사람을 초대한 주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준비와 노력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의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초대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큰 잔치는 철저하게 준비된 잔치입니다. 그래서 비유에서 잔치를 연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자리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참석자들이 가져가야 할 것이 없습니다. 잔치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모두 충당되었고, 만찬도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초청을 수락하고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태초부터 계획하셨던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요 19:30). 구주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신 십자가 위에는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대가를 치르심으로 메시아 왕국의 큰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복음의 초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기반으로 전파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잔치는 우리의 선한 행위를 1%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베푸신 은혜의 날, 구원의 날에 그의 구원의 초청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고후 6:2). “모든 것이 준비된” 구원의 잔치는 확실하면서도 완전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확실성을 의심하고 그의 초대를 미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미루고자 하는 것은 구원의 가치를 모르고 자기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 4:14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구원의 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대를 수락하는 순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잔치에서 죄인들에게 풍성한 구원을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찬을 베푸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샘물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주시어 불안을 대신할 평안을, 우울을 대신할 기쁨을 주시고, 죄를 극복할 능력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은혜로우신 구주와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알게 하신 것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벧후 1:3).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훨씬 전에, 그분은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풍성한 양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풍성한 영혼의 양식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며 다함이 없습니다. 그가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4:14).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은 생명의 떡으로 그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요 6:35). 이런 점에서 구원의 만찬은 값지고 풍성하고 완벽합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의 핑계

누가복음 14:18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두 번째 초대장을 보낸 종에게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변명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 일치하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거절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에는 변명한 사람은 세 명이 언급되어 있지만, 16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초대했는데 세 명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초대된 모든 사람이 “다 일치하게” 거절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다 일치하게” 거절한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변명을 했지만 그 변명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습니다. 그들이 초대받은 만찬은 작은 잔치가 아니라 “큰 잔치”였습니다(16). 이 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큰 영광입니다.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큰 영광이라 초대를 수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임박하자 그들 모두는 잔치에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이 거절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오셨으나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변명은 그가 밭을 샀는데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변명은 어리석은 변명입니다. 그는 그 땅을 구입하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사전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땅을 살펴보지 않고 구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땅이 귀중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땅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래서 땅을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땅을 사기 전에 매매 협상을 해야 했고, 가격을 협상하려면 나가서 부지를 돌아봐야 했습니다. 토지의 특성을 파악해야 했고. 이전 소유주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다 마치고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핑계이고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땅을 살피러 가는 것은 매매하기 전에 하는 일이고 그는 이 일을 다 마친 후였습니다. 

설령 그 땅을 구입한 후 그 땅을 돌아본다고 해도 그것은 긴박한 일이 아닙니다. 구입한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잔치에 참여한 후 나중에 해도 될 일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큰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는 초청한 사람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약속을 어김으로 잔치를 준비한 주인의 위엄을 심각하게 모독한 것입니다. 그는 변명하고 있지만 그는 고의적으로 거절함으로 초청한 주인에게 모욕을 준 것입니다. 

거절하는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큰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앞세웠습니다. 그가 큰 잔치보다 구입한 밭을 보러 가야겠다는 말은 땅에 대한 소망에 집착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소유나 재물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재물을 이 땅에 많이 쌓아 놓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이미 배가 부르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 없다고 느낍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사랑하는 자마다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딤전 6:9-10). 이 땅의 것은 오래 동안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것을 이 땅에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런 현실을 모르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현세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수평적 시각만 있는 자들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바라보는 수직적 시각을 가진 자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이 메시아 잔치 초대를 거절하기 위해 내놓는 변명의 참담한 본질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잔치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정중한 초대에 시간이 없다고 하고 당장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세상 물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명은 자기의 것을 우선시하는 이기심을 드러냅니다. 인생은 우선순위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를 위해 시간을 냅니다. 또한 소중한 것을 위해 시간을 내어 알아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의 구원의 잔치에 초대했을 때 다른 일 때문에 바빠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초대한 주님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단순하게 초청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것을 거절하기 위한 변명을 생각해 내느라 거짓말을 하고 진땀을 흘립니다.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우리 주님도 거절을 당하신 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십니다. 

누가복음 14:19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소 한 겨리’는 멍에를 같이 메는 두 마리의 소를 말합니다. 그가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것을 보면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소가 필요한 것을 보아 그는 많은 밭을 가졌고 일할 종들도 많았음을 알 수 잇습니다. 시승도 하지 않고 중고차를 사는 고객은 없습니다. 시험해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많은 소를 살 수 없습니다. 또한 만찬은 저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밤에 소를 시험하러 간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잔치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시험하러 간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주인의 초청을 거절하기 위한 핑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운 초대에 응하여 결정을 내린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헌신하고,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로운 초대에 응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편리할 때만 응합니다. 그들이 더 원하는 것이 없을 때 은혜로운 초대를 내민 사람을 따르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길 때만 따르기로 선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로 병든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핑계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청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더 중요한 일을 만들어 내고 핑계합니다. 

누가복음 14:20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세 번째 사람은 신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장가를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주인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세 사람의 변명만 놓고 보면 그 자체로 죄는 아닙니다. 땅을 구입하고 경작하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밭을 경작하기 위해 소를 구입하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실제 삶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하고 진취적이고 근면한 노력으로 이것을 얻도록 장려합니다. 결혼과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잘못이 아닙니다. 결혼은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친히 계획하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성경에서는 남자가 결혼한 지 1년이 안되었으면 그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신 25:5). 그만큼 하나님은 결혼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런 일들을 할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마 6:3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지 심각하고 악의적인 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들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나 선한 것들이라도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나 여가 활동, 직장과 자녀에 너무 몰두하여 영혼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혼하는 것은 충만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가 원하는 결혼, 자기가 원하는 배우자에 집착함으로 자기 감정과 생각을 우선시함으로 합당하지 않은 선택을 할 우려가 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라고 했지만, 세 번째 사람은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예의를 갖춘 형식으로 정중히 사양 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반면 세 번째 사람은 용서를 구하는 표현도 없고 일방적 불참 통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들은 구원으로의 초대에 대해 점점 더 완악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가면 갈수록 점점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차갑고 완악한 거부의 반응을 보입니다. 

아담에서 시작된 죄는 가인에게 와서 살인 죄로 발전했습니다.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나서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창 4:13-14). 그러나 라멕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자기 두 아내 앞에서 시를 써서 그의 악행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거리낌 없이 자랑했습니다(창 4:24). 죄는 점점 더 자라서 노아 시대에 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육신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 대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노아의 가족 외에는 이런 세상에 소망이 없었습니다(창 6:1-8). 홍수 후에도 인간은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창 11:1-9). 이처럼 죄는 자라고 악화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계속 거절하다보면 미안함 때문에 죄의식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언젠가는 구원의 문이 닫힐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고 아무리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누가복음 14:21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인은 잔치를 준비하고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이미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 갖가지 핑계를 대어 주인의 초청을 거부한 것은 주인에게 큰 모욕을 주는 것이고 주인을 경멸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초청에 기꺼이 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의 잔치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메시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구원의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하기로 굳게 약속했던 유대인들은 막상 잔치가 준비되자 참석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번영했고 가족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행복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번영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도 세속적 욕심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종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거절한 일에 대해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주인의 분노는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들은 배은망덕하고, 친절을 무시하고, 환대를 무시하였기에 그들이 당할 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기적의 은총을 받은 유대인들의 완고함과 불신앙 때문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을 노여워하시고,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한 형벌, 더 가혹한 정죄,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자는 은혜를 상실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버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을 때 영접해야 합니다. 나중에는 영접하고 싶을 때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초대받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가 선택받은 엘리트라고 생각할 때 결정적인 순간에 내침을 당할 것입니다. 구원의 잔치가 열리는 곳의 문이 닫히면 그들은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주인은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 “거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원어로 도시의 광장(public square)이나 큰 길(streets)을 의미합니다. “골목”은 마차가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길을 의미합니다. “골목”은 유대인이 사는 샛길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꺼려 하는 길을 말합니다. 이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 몸 불편한 사람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로 가득한 곳입니다.이 구절에서 우리는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그 잔치는 취소할 수 없는 큰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반드시 잔치가 진행되도록 방향을 확 바꿉니다. 그것은 종을 보내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가 있거나 부상을 입어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 초청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초대하는 것은 고대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장애인들은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레 21:17-23). 이런 그들이 큰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초청받은 사람이 거절함으로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난한 자”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파산한 자를 상징합니다. “몸 불편한 자들”은 신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죄로 인해 영적으로 균형을 잡지 못함으로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은혜의 이끌림과 영향 없이는 그리스도에게 생명과 구원을 구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맹인”은 죄로 인해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둠에 다니는 자들입니다(요 8:1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한 의와 생명과 구원의 길, 그들 자신의 마음의 질병, 죄의 극심한 죄성,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 그들의 영혼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와 그 필요성, 그리고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영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저는 자들”은 일어나서 걷는 것이 힘들어 영적으로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들과 눈먼 사람들과 절름발이들의 독특한 공통점은 초대를 받으면 겸손함으로 받아들이고 감격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눈먼 사람들은 농사를 살펴보러 나가지 않고, 몸이 불편한 자는 소를 몰고 밭을 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에 초대받은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잔치를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 어떤 보물보다 가치 있게 여기며 그것을 얻기 위해 기다리고 임박한 시점에 냉큼 달려갑니다. 잔치가 열리면 능력 있고 존경받고 고귀하다고 찬사를 받던 사람들은 밖에 있었고 가치 없다고 늘 외면하고 내침을 받았던 자들은 구주께서 주신 의와 영광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초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거절했을 때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초대받은 자가 참여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의 초대를 영접한 자들만이 참여한다는 것도 동일합니다. 초대받은 자 중에서 이 잔치를 사모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물처럼 잔치에 대한 소망을 간직한 사람에게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초대받은 것은 거저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은혜를 누리는 자는 대가를 치르는 자입니다. 세상에 얽매인 것을 제치고 오로지 소망 가운데 간절히 기다리며 대가를 치른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선택받았다는 것에 집착하여 자기 일로 바빠 그의 초대를 외면한다면 그는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는 무료이지만, 값싼 초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 갈보리 언덕 위에 높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룬 초대입니다. 그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를 살리시고 그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구원의 만찬을 다 준비하셨습니다. 구원으로의 하나님의 초청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궁핍한 죄인이라할지라도, 약하고 상처 입은 자들이고 병들고 아픈 자들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몸이 불편하여 제대로 걷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그의 강권하는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시고 구원의 잔치로 안내해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열망의 불꽃과 감사의 눈물과 찬양의 손을 펼쳐 그의 이끌리심을 받을 것을 소망한다면 그의 은혜의 잔치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2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종은 주인이 명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NIV에서 what you ordered has been done으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종이 다만 순종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계획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는 일을 할 뿐,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그리시고 그의 섬세한 계획 가운데 친히 이루십니다. 

종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행하였지만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노력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의 자리는 무한히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와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리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 안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스스로 이를 배제하지 않는 이상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결코 배제되지 않습니다.

주인의 종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고, 그들을 모으라는 지시를 받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루어졌다고 보고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곳곳에 흩어져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3차에 걸쳐 소아시아 지역과 마게도냐 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천국 잔치의 좌석이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거쳐 당시의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곳을 거쳐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진 서바나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다음에 빈 자리에 이방인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 속에, 택하시는 은혜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언약 속에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마련된 빈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선교 사명 속에 그 자리를 채우라는 간절한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교회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생겼고, 결국 그들은 사랑의 수레를 타고 새 예루살렘과 하늘의 영광 속에도 자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마음에 죄인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으십니다. 그분께는 우리를 위한 공간이 아직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라는 종의 보고는 그리스도께로 오라는 간절하고 부드럽고 애정 어린 초대의 음성이 담겨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정처없는 나그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의 은혜와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들은 단지 이 세상의 거품에 만족하며 그 거품이 사라지면 절망하고 낙담하는 삶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샘물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죄를 씻으면 눈보다 더 희게 되어 나옵니다. 그 샘은 마지막 선택받은 영혼이 그 안에서 씻겨지고 대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장차 임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가 벌어질 때까지 결코 그 능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씻음 받은 사람들은 사랑의 수레를 타고 우리의 삶의 종착지인 하나님의 나라로 안전하게 실어나를 것입니다. 그 사랑의 수레에는 수백만, 수천만 명을 더 태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지상의 아버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집에 가족이 아닌 낯선 사람을 위한 방이 없습니다. 그들의 집은 이미 자신의 아들딸들로 꽉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자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방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는 빈 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빈 자리를 채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빈 자리를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내 집을 채우라

누가복음 14:23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1절에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은 예루살렘 성의 거리와 골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23절의 “길과 산울타리”는 예루살렘 성 밖의 길과 예루살렘 성 밖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길”은 highways(KJV, SASB95, LEB, ESV, RSV)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속도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만든 큰 길’, 혹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여 넓혀진 큰 길’을 가리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던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지중해를 끼고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잇는 ‘해안 도로’와 남북으로 에돔을 거쳐 에시온게벨에 이르는 ‘왕의 큰 길’을 비롯하여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길, 여리고에서 벧산에 이르는 요단 계곡의 평지 길 등 크고 작은 도로가 발달해 있었습니다(삿 5:6; 시 84:5; 잠 15:19; 16:17). 그중에서도 특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진행하여 에돔과 암몬 왕에게 통과하기를 요청했던 ‘왕의 대로’와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을 ‘대로’라 불렀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은 제국 전역에 대로를 많이 건설했으며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이 건설한 대로를 통해 넓은 지역을 선교하며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도로망이 얼마나 잘 발달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는 반드시 직선이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어 높은 곳은 깍아 낮추었고 계곡을 있는 곳은 흙을 돋우는 방식으로 길을 곧게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사람들이나 물자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는 마차 2대가 서로 닿지 않고 교행할 수 있도록 넉넉한 너비로 도로를 닦았습니다. 이 길을 ‘길’, ‘도로’, ‘가도’란 뜻의 ‘비아’(via)라고 불렀습니다. ‘비아’ 양쪽에는 3m 폭의 넓은 인도가 마련되어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인도는 지면이 평평하고, 작은 자갈로 덮여 있었습니다(가스펠서브, 성경 문화배경 사전).

highways(길)와 연결하여 hedges(울타리 가)라고 번역한 것은 이방지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highways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닦아놓은 곧게 뻗은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먼 이방지역을 상징합니다. “산울타리 가”는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밭이나 포도원을 둘러싼 울타리로 하나님의 보호 밖의 이방지역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울타리는 보통 가시나무로 만들어졌고, 빽빽하게 심어 들짐승들이 포도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곳은 낮은 계층, 즉 집이 없어 울타리나 담장 아래에서 자는 것에 만족하는 부랑자와 불법 거주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변방 이방 세계의 방랑자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영적 비참함의 가장 깊은 심연에 빠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구원의 대상 범위를 벗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엡 2:12). “길과 산울타리’를 the highways and hedges라고 번역한 것은 로마의 큰 길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종들을 보내어 그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하나님의 집을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으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게 하셨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그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엡 2:13-18). 

NIV와 NRSV에서 “길과 산울타리”는 country lanes(시골길)로 번역하였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프라그모스’로 ‘시골길’, ‘산울타리’, ‘가르는 벽’의 뜻이 있습니다. country lanes(시골길)라고 한 것은 사람이 잘 닦아놓은 roads(대로)와 대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큰 도로를 거닐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인적이 드문 구불구불한 시골길까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다 초청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민족과 인종, 지위와 계급을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강권하다”는 말은 ‘강압하다’, ‘억지로 하게 하다’, ‘재촉하다’라는 매우 강한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주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들로 하여금 강박관념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주인의 마음이 급하고 애가 탄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사람을 체포해서 강제로 끌고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최대한 설득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데리고 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주인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석하도록 격려가 필요하기 때문에 강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종의 초청을 듣고 의심하기도 하고 호기심은 있지만 관심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밭을 샀으니 나가 보아야겠다고 말한 사람,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말한 사람,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 세 부류의 핑계를 댄 사람들은 이미 첫 번째 초청에 그 잔치의 성격을 알고 가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인데 잔치가 임박하자 고의적으로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의도적 거절이었지만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인내함으로 설득하면 그 잔치의 성격을 알고 잔치로의 초대를 받아들일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 설득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런 잔치에 입을 만한 단정한 옷이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고, 몸 불편한 사람은 “저를 거기에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맹인은 “앞이 안 보여서 길을 못 찾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고, “저는 자”는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의 사람들은 “며칠 동안 목욕을 못 해서 옷이 더럽고 낡았어요. 갈 수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인이 그들을 환영한다고 설득했고, 그들도 자신들의 필요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모두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종이 설득하자 믿었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핑계가 있었지만 설득의 말을 듣고 초청에 반응했습니다. 종은 잔치에 초대하기 전에 이 모든 사람들의 배경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배경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국적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종교적 배경이나 종교적 배경이 있는지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예의를 갖추겠다는 약속도 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초대는 초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 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선함과 관대함에 기반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자신들의 배고픔을 인지하고, 그 제안이 진실임을 믿고, “네,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기대하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만찬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종들은 간청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경고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권할 수 있지만, 죄인을 강제로 주인에게 나아오게 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강압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강권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오히려 깨우치고 확신시키는 능력으로 그들이 다가올 진노에서 기꺼이 피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강권하다”(아낭카조)라는 단어를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강압적인 자세로 선교하거나 직권을 남용하여 강제로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끼치겠다고 협박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게 됩니다(요 1:12-13). “혈통”은 natural descent로 ‘혈통’ 관계로 말미암아 종교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버지가 믿으니까 자녀도 아버지의 권위를 따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정”은 human decision으로 ‘인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고자 하는 인간의 억지를 말합니다. “사람의 뜻”은 husband’s will(남편의 뜻)으로 남편이 가장의 권위로 아내를 믿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육체로부터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은혜를 사람이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은 두 번째 주인의 초청의 말씀에 순종하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왔지만 아직도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인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은 영혼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비어 있는 자리를 보시고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잔치의 자리는 144,000개로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계7:14). 그래서 그 한정된 숫자 안에 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완전수(12x12x1000)를 가리킵니다. 이는 계시록 7:9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여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손님을 필요로 합니다. 택함받은 자의 수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구원의 잔치의 초대는 계속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4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4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의 비유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와 가르침을 개인적인 언급으로 마무리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11:8; 15:7,10; 16:9; 18:8,14; 19:26). “너희에게”는 비유를 듣게 된 최초의 청중들 즉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내용의 결론을 직접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실 때 무서운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입니다. 이 사람들은 만찬에 초대받았지만, 이제 거절함으로써 배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맞게 될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 인가를 보여주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운 초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심판적인 분노를 표하신다는 것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부르셨으나 그들은 듣기 싫어하였고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그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그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재앙을 만날 때에 하나님은 웃을 것이며 두려움이 임할 때에 비웃으십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의 광풍이 임하겠고 재앙의 폭풍이 이를 것이며 근심과 슬픔이 임할 것이며 그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지만 그래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잠 1:24-28). 그들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아야 하며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야 합니다(사 55:6).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을 것으로 자신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리 그들 중의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복음 전파에 대해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고 썼습니다(롬 1:16). 이 원칙대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다윗의 혈통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보이신 하늘의 영광을 먼저 맛보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앞에 수많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고 그가 가르치신 복음으로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분의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넘어짐이 오히려 세상이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습니다(롬 11:12).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복음 전파의 순서의 원칙에 따라 먼저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복음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면 이방인에게로 향하였습니다(행 13:46).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그의 나라의 잔치에 먼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초대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그의 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려면 부르실 때 개인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의 부르심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선포를 통해 왔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 부르심을 영접해야 하는데 갖은 핑계를 대고 거부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초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과 초청받은 사람의 응답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첫 번째 초대장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롬 9:4-5). 그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초대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구약의 계시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13:34).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셔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4:19). 이로써 그들에게 두 번째 초청장이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의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15).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손님들처럼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요 10:9).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의 참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 26:59; 막 14:1; 요 11:53). 

비유 속의 손님들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첫 번째 초대에는 “예”라고 했지만 두 번째 초대에는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예”라고 했지만, 약속이 성취된 시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자기만족에 빠졌으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하늘 잔치를 놓쳤습니다(눅 8:14; 마 13:22; 막 4:18-19).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심판에 내버려 두셨고, 그들의 집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13:35).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는 말은 육적인 심판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심판은 서기 70년에 로마인들이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임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그분의 아들을 모욕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심판이 계속 임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요 3:36).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한 그분의 초대를 거부하는 자들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대신, 심판의 주로 오실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계 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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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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