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풀 때 그들이 갚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기 위해 선을 베푸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선을 베푸는 동기는 다른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참된 동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값비싼 영생의 선물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베풀고자 할 때 갚음을 기대하지 말고 거저 베풀어야 합니다.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누가복음 14:12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예수님은 자기를 초청한 자에게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심”은 헬라어 원어로 ‘아리스톤’으로 ‘점심’, ‘저녁’, ‘식사’라는 의미로 가벼운 식사를 의미합니다. “저녁”은 ‘데이프논’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이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즐기는 연회’ 혹은 ‘환영이나 환송, 축하나 위로, 결혼이나 수확(추수)의 기쁨 등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는 축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손님을 초대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지난 잔치에 그들이 초청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례 차원으로 초대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초청받은 사람이 미래에 자기 자신을 답례로 초대할 것을 기대하고 초대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고받기식의 초청은 사랑과 은혜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함과 이기심의 증거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웃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것을 하나의 거래로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호주의에 기초한 초청 모임은 가진 자나 특권 계층의 상호 이익을 위한 사교 클럽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바리새인과의 식사 초대는 일종의 통화 거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높이고 칭찬받기 위해 손님 초대를 이용했습니다. 사심 없는 친절은 그들에게 이질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초청의 특징은 특정 집단만을 고집함으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에게 파티나 만찬을 주최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주어진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 시대에 사람들이 큰 잔치를 열었을 때, 그들은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했고, 그들이 참석하면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람들은 그들을 사교 모임에 초대함으로써 호의를 보답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보답을 받기 위해 권위 있는 사람이나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동기를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은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의 반대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청하지 말라”는 현재 시제로 “계속 초대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끼리 주고받기식의 초청방식이 배타주의와 특권의식이라는 것을 비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초청한 자는 손님을 선택하는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종류의 초대로 인해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이런 저런 종류의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큰 교회일수록 배타적으로 교제하는 집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 대화하고 음식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나 직업상 대화가 통하거나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유유상종함으로 상대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만 초청해서 교제를 나누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가우리만큼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선을 베푸는 동기는 사람들의 박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야 하며, 하늘에서의 영원한 보상이 되어야지 땅에서의 일시적인 인정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상을 두 번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받은 자는 하늘에서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 이 땅에서 환대하며 자기 것을 베풀며 살았지만 받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사람들의 눈에 첫째인 사람은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눈에 그들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반면 사람들의 눈에는 마지막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는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성서에서 환대의 의미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가 풍성하게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부지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었습니다(히 13:2). 율법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배부르게 먹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 10:18; 14:29; 16:11-12; 24:19-22; 26:12-13). 하나님은 이 명령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일을 기억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상호주의에 기초해서 보답을 받을 기대를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베푸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보상도 없이 풍성하게 베푸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이렇게 베푸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행 4:32-35). 이처럼 초대 교회의 활력을 주도한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그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은혜 받은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마 10:8).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 은혜 베푸는 일을 한다고 하면 이는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의 베푸는 일이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환대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듯이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보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이며 믿음의 내용은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히 11:6).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상 주시는 이”시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상”은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상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예를 소개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하였습니다(히 11:10). 저자는 모세에 대해 말할 때에도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기술했습니다(히 11:26). 그는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상”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소유가 아니라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 그분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 15:1).
예수님은 “상”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하늘의 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6:23). 예수님은 이 땅의 상을 바라지 말고 하늘의 상을 바라며 선을 행하는 일에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는 죄인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없습니다.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받을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보편적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6:33-35).
갚을 것이 없는 자를 청하라
누가복음 14:13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예수님은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12절과 13절은 초청 대상자의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은 갚을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14).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분명히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가르쳤습니다(신 14:28-29 ; 16:11-14 ; 26:11-13).
결코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0:35). 예수님은 우리가 주는 삶을 살게 될 때 누리는 축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지만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경건한 사람임을 뽐내고 싶어했고 사람의 존경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선의 행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헌금할 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헌금함에 동전 소리가 오래 동안 들리도록 해서 많은 기부를 했음을 드러내었습니다(21:1).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그들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부터 상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을 기대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4).
그리스도인의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사역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생각하지 않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때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말아야 하며 섬김의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려면 이생의 보상이 아니라 영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서는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이생에서 많은 축복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섬김의 보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섬기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리가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지만 그로부터 감사의 답례를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괜히 퍼주기만 하는 것 같고 도와주면서도 섭섭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그들이 게으르고 거지 근성에 쪄들어 있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그들로부터 “갚음”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12). 도와주는 대상으로부터 감사의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섬김의 동기가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감사의 반응을 줄 수 있는 사람만 섬기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서 이기적인 동기는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은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 대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심으로 영적인 결핍을 느끼는 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마 5:3). “몸 불편한 자들”은 원어로 ‘아나페이로스’로 기형이거나 장애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저는 자들”는 다리를 절거나 걷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다리에 장애를 입어 걷지 못할 수도 있고 나이 늙어 힘이 없어 걸을 수 없는 자도 해당할 수 있습니다.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3을 보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은 영적인 연약함을 지니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맹인”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어린 자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8:21-25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꾸짖으시고 난 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단계적으로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자 맹인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이 후에 밝히 보게 될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인지 추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영적인 맹인임을 시사하셨습니다(요 9:39-41).
우리의 초청의 대상은 이처럼 영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여 영적인 돌봄이 필요한 모든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멀쩡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구주를 만나지 못함으로 영적으로 메말라 있고 죽어가는 그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라고 초청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요 1:46). 진정한 경배의 대상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감격에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초청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요 4:29).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의 방황하는 양들에 대한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을 예수님의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14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푸는 자는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섬기는 자를 주목하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동기의 사랑과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이 된다”는 말은 you will be blessed로 ‘복을 받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 복을 주시는 분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적인 섬김을 기뻐하시고 하늘의 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로 선을 베푸는 자는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닌 하늘의 보상을 바라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이 우리의 섬김과 베품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은 결국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장 안전한 투자를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하늘의 창고에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합니다. (마 6:19-20).
“의인들의 부활시에”라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축복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는 용어입니다. “갚음을 받겠음이라”는 말은 사심이 없이 베푸는 삶에 대한 하늘의 보상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갚을 것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극히 큰 자비와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불에서 고통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신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장차 그의 나라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상급으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치열한 경쟁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희생과 봉사보다 이익을 남기는 방법과 손실을 피하는 방법에 더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내가 선행을 베푼 것에 대해 상대방이 되갚음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조건이 붙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부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갚아 주실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받는 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는 짧은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 땅에서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자에 대해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라고 칭하였습니다. 이런 자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무지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을 망각하는 자들입니다(약 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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