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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4:1-30)

요한복음 2장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고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4장에서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하십니다. 2-4장의 공통점은 물을 소재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3장은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이고, 4장은 니고데모와는 정반대의 인물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여자로 남자에게 무시 받는 여자였으며 도덕적으로 5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죄인으로 같은 사마리아 여자들로부터도 따돌림 받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세상에서 멸시 받는 가장 낮고 천한 한 여인과 대화하심으로 낮아지심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3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다루었듯 4장에서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상징되는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뿐만 아니라 죄에 빠진 온 인류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로 가고자 하신 예수님(1-6)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4장은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드높아가고 있는 시점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지역에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풀었습니다. 신약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최초의 인물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예비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막1:4).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를 자청하셨습니다(마3:13-15). 이는 구약에서 이어지는 구속역사를 이어받는 계승의 의미가 있고 또한 그 몸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것을 보면 메시아의 대관식의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친히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4: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그들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제자로 살겠다고 하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아온 자들에게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3:11). 예수님의 주시는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이 주는 물 세례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물 세례는 회개하고 제자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지만, 성령 세례는 그들의 죄를 없애고 깨끗하게 하며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받는 성례로서의 세례는 과연 불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셨고(4:2),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선교명령을 주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하셨습니다(마28:19). 세례는 예수님의 세계선교 지상명령에 명시된 것으로 성찬과 함께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성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푸는 일이 요한보다 많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향력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확대되어가는 영향력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유대를 갈릴리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하고 때 이른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 장소를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것은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필연성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었는데 후에 북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남유다와 사마리아의 관계는 다윗 왕국이 분열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두 차례의 침공으로 멸망 당했습니다(주전 731년, 721년). 이 때 앗수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거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대신 앗수를 사람을 사마리아로 이주시키면서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수 혈통을 상실하고 혼혈인이 되었고 그들은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민족적, 종교적 대립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졌습니다. 9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가면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 요단 동편으로 엿새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땅에도 복음을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앗수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유대인들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친 요셉도 유다지파이지만 그 곳에 거주하였습니다. 포로 귀환 후 지파별로 땅을 나누던 개념이 없어졌고,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 지역이 고립되었습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은 유대 광야를 지나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 곳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웠습니다. 수가는 세겜 근처 작은 마을이었고 그 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세겜 지역의 땅을 매입하였고(창33:18–19), 이를 요셉에게 주었습니다(창48:21–22). 그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다른 성경에 언급된 것이 없어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이 우물은 오늘날 관광지로 남아 있고 이 곳에서 그리심 산(20절)이 보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지치시고 피곤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감정을 느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난하여 말이나 수레를 타고서 여행하신 것이 아니라 걸어서 이 곳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초라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에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 겨에 그대로 앉으셨다는 것에서 예수님은 튼튼한 신체를 소유한 분이 아니라 연약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해서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어 우물에 그대로 앉으셨지만 그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간 것을 보면(4:30), 예수님이 상대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예수님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히2:18). 예수님이 우물에 도착하신 때는 여섯 시, 즉 낮 12시였습니다. 유대인의 시각을 우리의 시각으로 계산하려면 6을 더하면 됩니다. 낮 12시는 가장 더운 때입니다. 사람들은 그늘 찾거나 가벼운 식사를 하고 ‘씨에스타(siesta)’라는 낮잠 시간을 즐깁니다. 

물을 달라 하신 예수님(7-10)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그런데 그 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그 시간에 홀로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보통 여인들은 해가 질녘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우물가로 와서 물을 길러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인들을 물을 길러 오는 시간이 외출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다른 여인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다섯 번의 이혼의 경력을 가진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으로 사람들이 그녀를 멀리 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가장 더운 시간을 골라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부도덕하고 소문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우물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고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장 더운 시간에 홀로 기다리셨습니다. 여인은 우물가에 낯선 남자가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 사실 에수님과 여인 사이에는 대화하기에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 또한 당시는 엄격한 율법사회로 낯선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것은 사회적 통념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거룩하신 하나님이고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삼중 장벽이 놓여 있는 상태에서 그 누구도 말을 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이라는 대화의 접점을 찾아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 놓고 여인에게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하며 정중하게 아쉬운 소리를 한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낱 구걸자가 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목이 무척 말랐고 여인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영혼의 목마름을 보시고 그녀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먼저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먼저 다가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더러운 죄로 인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멈칫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먼저 나에게 말을 거셔서 대화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어둠의 방 안에 갇혀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나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우리는 여기서 아쉬운 소리를 하시면서 먼저 청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계셨던 분이 이 땅에 낮아져 오셨고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고 남자에게 멸시를 받는 여자이며 멸시받는 여자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가장 낮은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장 고귀하신 분이 가장 비천하게 되신 것이요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사람보다 더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예수님의 대화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화의 벽을 허물기 위해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거나 고상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에 대해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 그 사람이 보기에 만만한 상대가 되어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에 상처가 깊이 패인 사람들은 사람을 피하고 자기 세계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특히 사생활을 중요시하며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대화법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일 것입니다. 서로 ‘물’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소재로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긴 도보여행으로 지치고 목이 마른 상태였고 여인도 물을 길러 우물가로 왔다는 점에서 ‘물’은 두 사람이 대화하기에 가장 적절한 대화 소재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상대방이 공감하지 않는 뜬금 없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무례하고 위압적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반감을 갖고 피해 버릴 것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복음 이야기를 한다면 듣는 사람이 불신자라면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느낌을 받고 마음의 문을 닫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이 땅에 왕궁에서 태어나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복음을 전했다면 우리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실 때 백성들은 너무 무서워서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를 통해 말씀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깊은 계곡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하게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종이 되시고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께 아무 부담 없이 다가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겸손하게 낮아져 다가가고 그들과 공감하고 섬기고자 할 때 대화의 접점을 찾게 되고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신자의 겸손과 섬김의 향기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물을 좀 달라”라고 겸손히 청하신 예수님의 겸손이 우리의 겸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 여자는 낯선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남자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무시 받는 사마리아 여자들이 무시하는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사는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녀는 결혼에 다섯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들은 그녀를 이용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위로 받으려 했지만 이기적인 남편은 얼마 안 있어 그녀를 떠났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그녀는 그 동안 거쳐왔던 남편으로부터 상처만 받았기에 현재의 남편과 억지로 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내면은 사람들의 던지는 말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면서 상처와 고름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꼬이고 비틀리고 꺽이고 상처받은 인생을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떤 고상한 유대 남자가 친절하고 겸손하게 말을 걸어오다니 너무도 이상하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두 그녀를 무시하고 거친 말을 쏟아 부었는데 이 유대인은 겸손하게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친숙하지 않는 부탁을 본능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이는 마치 내면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것과 같이 즉각적이고 반사적으로 아프다고 반응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니면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내세웠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받는 사마리아인이지만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자존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저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다고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물론 같이 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갖고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특히 종교에 대한 갈등은 화해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성전에서 예배하였고 신학적 갈등은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민족적, 종교적 장벽 앞에 사마리아 여인은 해묵은 적대적 감정을 표출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모든 장벽을 허물고 사마리아 여인에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은 놀랍고 감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 뭔가 흑심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더 놀라웠습니다. 보통 사람이 싫다고 하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거기서 그치는 것이 예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에 예수님도 경계심을 갖고 맞대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강압적으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고압적이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쿨’하게 여인의 공격을 넘겨버렸습니다. 적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예민한 문제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예수님은 ‘가정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선물을 줄 수 있는 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인 ‘물’을 주제로 일관되게 대화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물이 필요해서 물을 달라고 부탁했고 여인도 물이 필요해서 물을 길러 우물가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물이 아닌 영적인 차원의 살아 있는 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알아야 한다’는 동사를 쓰심으로 여인이 예수님과 그가 주시는 생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화제를 전환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그를 한 유대인이요, 초라하고 피곤에 지친 여행자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 외모 이상의 더 중요한 것을 그 여자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이 방황하는 인생을 사는 원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선물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지로 인해 방황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영적인 지식을 갖게 되면 방황을 그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신을 소개하시며 우리와 대화하시면서 우리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선물은 대가를 지불하는 사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1-14)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자는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선물 이야기에 좀 당황스러우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생수를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목마름을 해소하는 다른 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말하였지만 여인은 글자 그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색을 보아하니 초라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냐고 말하면서 빈정거렸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이 단순한 허풍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또 한 번 사마리아 여자에게 무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무시를 받으시면서까지 그녀를 살리고자 다가가셨습니다. 

여인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해서 무시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그녀는 야곱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하여 우물 뚜껑으로 사용했던 무거운 돌을 옮기고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간 무료로 봉사했던 야곱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내들과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한 야곱의 삶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야곱과 시대를 달리 살았지만 야곱이 남긴 그 우물로 날마다 물을 길러 오는 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비난했지만 이 야곱의 로맨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유서 깊은 우물로 매일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녀는 이런 야곱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볼 때 사람들의 눈을 끌만한 매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이 비교법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비교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무시하기 위해 비교법을 사용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비교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물과 자신이 주실 영생의 샘을 비교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 물은 다시 목마른 것이 특징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을 단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입니다. 그 물을 마실 때에는 당장의 목마름을 갈아 앉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을 찾게 됩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세상이 주는 기쁨을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문제를 꺼내신 것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에게 우물 물은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간은 텅 빈 내면을 사람들의 사랑으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거짓되고 배반하고 조건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이야기를 보고 읽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 우리 삶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야기의 소재로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 받습니다. 남녀 간의 육신적인 사랑은 육욕이 충족되면 배신을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그의 이복 누이인 다말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간교한 친구의 말을 듣고 다말을 강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욕을 채운 후에는 다말을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삼하13:15). 사마리아 여자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참 만족하는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결혼에 대한 행복한 꿈을 꿉니다. 그러나 결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 사람들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고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지만 팍팍한 삶을 살다보면 그럴 여유가 없고 서로에게 요구만 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수없이 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기대할 때 실망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빈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흘러 넘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갈구하는 만큼 실망도 클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과 사랑을 받고자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것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임 없이 교제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인간은 끊임 없이 방황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인 인간이 다른 것으로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때 참 만족이 없고 오히려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립니다. 쾌락으로 만족하고자 하면 더 크고 자극적인 쾌락을 찾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면 극심한 허탈감과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반면 예수님의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믿는 사람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매일 길러 나와야 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족을 얻지 못하고 더 큰 갈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수는 ‘그 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물을 길러 가는 수고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영생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사야 55:1-2은 이 영생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이 주는 것을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좋은 것’, ‘기름진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은을 달아 주며’ 구입해야 하고 ‘수고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돈 없는 자’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돈 없이’, ‘값없이’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수를 얻으려면 ‘나를 청종’해야 합니다. 영생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10에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적들이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긍휼이 여기셔서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샘물 근원’은 바로 ‘성령의 샘물’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저자 요한은 ‘생수의 강’이 바로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39).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외부로부터 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이 강은 결코 마르거나 다함이 없습니다. 끊임 없이 공급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얻으려면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합니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신 예수님(15-19)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영생수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여인의 태도가 정반대로 바뀐 것입니다. 짜증 섞인 말투가 사라지고 겸손하고 간절히 갈구하는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하신 영생수는 바로 사마리아 여자가 그 동안 바라고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그런 물을 자기에 주셔서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또한 이 야곱의 우물로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물 길으러 오는 게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물긷는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을 떠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야곱의 우물로 출근하는 여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직장인들은 월급날만 기다리며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하지만 늘어가는 카드 명세서와 대출금으로 인해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물을 길으러’ 출근해야 합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게 못할 것’을 찾고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죄를 짓고 더 죄의 짐을 지고 더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갑니다. 또 죄가 주는 상처를 안고 할 수 없이 하루하루 살아야 하니까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의 방황은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에서 생긴 문제입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사마리아 여인이 영생수를 간구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은 검사가 피의자를 추궁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여자의 남편 문제를 꺼낸 것일까요? 그녀에게 남편 문제는 가장 마음 아픈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외과의사가 되셔서 그녀의 상처를 도려내신 것입니다. 그녀에게 남편 문제는 죄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죄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3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3:5). 거듭남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에서 반드시 수반되는 역사는 죄 사함의 역사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 문제는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세례를 베푸심으로 일어나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죄 문제를 ‘먼저’ 꺼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근본 문제가 죄 문제임을 깨닫게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마음의 현상 중 하나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말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눅5:8). 이사야도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사6:5).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면서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셨습니다(막2:5).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눅5:3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고전15:3).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겉으로는 남편 문제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녀의 영적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의 영적 갈증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내면 깊숙한 죄 문제를 다루신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로 인해 곪은 상처를 도려내어야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곪은 상처를 싸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환부를 마냥 덮어주고 그 상처가 없는 것처럼 위장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 문제를 덮어 두고 증상 완화 치료만 하고자 합니다. 환부를 드러내놓고 칼로 도려내는 것을 피하고 자꾸 진통제만 먹는 것과 같습니다. 진통제를 먹으면 당장에 증상은 완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죄 문제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8-9).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죄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시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즉각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사실 거짓말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대답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과거에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다 꿰뚫어 보시고 계셨습니다.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법적으로 남편이 아니니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녀의 사생활을 여지 없이 드러내셨습니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자는 자신의 사생활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을 다 아십니다(10:14).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음을 다 아셨습니다(1:48). 예수님은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어 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신 것을 볼 때 그의 이름과 그의 인생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마태의 내면 문제를 아시고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중동의 뙤약볕이 내리 쬐는 더운 낮에 홀로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오시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내면 문제를 다 아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드러낼 때 과연 “상대방이 나를 받아줄까?”라는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 나의 치부가 상대방의 놀림감이 되고 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꽁꽁 감싸고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감추다 보니 어느새 나도 나 자신을 모르고 정체성과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나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 세시는 분이십니다(마10:30). 하나님은 나의 체질을 하시며 내가 먼지 뿐임을 기억하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시103:14). 시편 94:9을 보면 시편 기자는 우리 각 사람을 아시는 주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우리는 나 자신을 아실 뿐만 아니라 이해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 때 나의 문제를 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그로라(20-26)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문제를 훤히 아시는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내면 깊숙히 있는 그녀의 영적인 소원을 드러내었습니다. 여인은 예배 문제를 꺼내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은데 논란이 되고 있는 예배 장소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여자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예배드려야만 하며, 그 예배가 올바로 드려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를 만났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을 거룩하게 여기고 이 곳에서 예배하였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신11:29, 27:4-26).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 건축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따로 축복의 장소로 선택된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고 예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마카비 왕조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조상들의 전통대로 이 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삼하7:13, 왕상11:13; 14:21).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는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정통인지 논쟁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 중 모세오경만 믿었고 나머지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이방 신을 숭배하면서 혼합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유다 지파를 통해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의 문제에 대해 어느 편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구약 성경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이제 과거의 제사제도의 시대, 즉 옛 언약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라고 하심으로  성전 예배의 시대가 가고 메시아를 영접할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예배했던 사람이나 미래의 방식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인의 방식이나 사마리아 방식으로 구분해서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예배자들은 시간이나 소속에 상관 없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영과 진리’라는 말은 두 단어이지만 사실 한 가지 뜻입니다. 이를 다시 풀이하자면 ‘오로지 영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제사의식에 기초한 예배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영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이제는 성전의 집기류나 상징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희생제사를 위한 의식도 필요하지 않고 이를 집행하는 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십니다(히4:14).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 예배의 장소나 방법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히10:12). 이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관습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감동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성경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이 늘 우리 심령에 역사하시고 그의 능력과 도우심을 받도록 하나님의 영을 의지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이 부패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주신 구원에 대해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올바른 방식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했고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거짓이라고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죄 많은 사람일지라도, 예배의 장소나 방법을 잘 모르는 사마리아인일지라도, 아예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방인일지라도, 구원자를 찾고 진리를 찾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기에는 먼 동방에서 별을 따라 긴 여행 끝에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박사들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지만 죄로 인해 방황하던 사마리아 여인도 포함됩니다. 율법 사회에 살지만 율법과 전혀 상관 없이 살던 세리 마태도 예배자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철저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찾았고 참된 예배의 대상을 발견하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된 참된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죄로 인해 방황하지만 죄로부터 구원할 구원자를 갈망하며 참 진리를 찾고자 하는 예배자들을 찾으십니다. 누구든지 온 마음으로 구원자를 찾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렘29:13).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인도 참된 예배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녀도 또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형편에 대해 아신다는 것을 볼 때 선지자라고 얘기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바로 오실 메시아라고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가 오셔서 예배의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을 통해 바로 앞에 계신 분이 그 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더 명확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에 대해, 예배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 줄 것이며 그 동안의 불분명한 것과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며 구원에 관한 진리를 명확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은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네가 찾고 있는 그 메시아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까이 오려는 자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자의 부재를 탄식하며 자기를 구원할 구원자가 어디 있냐고 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말씀하시는 중인데도 그러한 그의 나타나실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예배자가 아닌 그들에게 자신을 메시아이심을 밝힌다면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소요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인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내가 그니라”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이방들을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정점은 예수님이 바로 인류가 찾고 있던 메시아, 즉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증인이 된 사마리아 여인(27-30)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시고 나서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무엇을 구하시나이까?”는 말은 “우리가 먹을 것을 가져왔는데 그녀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뜻이고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는 “랍비께서는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반응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할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랍비가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에 끼인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녀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오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급하게 동네로 달려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물을 긷는 일도 팽개친 채 마을로 달려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기뻤던지 해야 할 일을 놔둔 채 기쁜 소식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지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예수님은 세상 보화보다 값지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메시아를 만나기 전 그녀는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도 그녀를 피했고 그녀도 사람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변화되자 그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메시아를 만나 죄 문제가 해결되고 예배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반응에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확신과 기쁨에 가득 차서 힘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신 것과 예배와 관련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내용을 말씀하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녀가 행한 모든 것을 아시고 이를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스스럼 없이 말했습니다. 그만큼 그녀가 받은 죄 사함의 은혜는 감격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과거에 지은 자기 죄로 인한 부끄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끄러운 죄를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되지 않으면 말도 못하고 그 죄를 혼자 끌어 안고 끙끙 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주께서 죄의 짐을 풀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죄 사함 받은 자에게는 자기 죄를 사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부각됩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그대로 말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증인’이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녀는 자기가 체험한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이 주신 힘과 에너지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지 증언하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녀의 증언은 첫 제자들이 증언한 “와 보라”라는 메시지와 같이 간결하고도 힘이 있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의 변화로 사마리아에 복음의 빛이 비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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