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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8)

10장에서는 유명한 양과 목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10장은 9장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간의 분쟁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강도와 목자, 타인과 목자, 삯군과 선한 목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강도, 절도, 타인, 삯군은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를 빗대서 하신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은 맹인 눈을 뜬 사건으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돌보아야 양과 같은 눈을 뜨게 된 맹인을 출교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양들의 목자이었지만 안식일 규례를 내세우면서 한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을 내팽개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삯을 위해 존재하는 삯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본문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축과 관련되어 나온 비유로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알 수 있는 감동적인 메시지입니다.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시는 목자(1-3)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예수님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의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와 강도를 대조시켜 종교 지도자들이 강도임을 지적하셨습니다.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떠 광명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축하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볼모로 삼아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눈 뜬 맹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심을 부인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아는 은혜에 기초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유대 사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출교는 곧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내세우면서 한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시켰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목자의 사명을 부여받았지만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절도며 강도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양들의 영혼을 강도짓하여 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양들의 목자는 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목회자 뿐만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리더급 구성원을 의미합니다. 더 넓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도의 사명을 받은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에게 자기 양무리들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무리들을 맡기기 전에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후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습니다(요 21:15). 우리는 예수님의 양무리를 치되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양들을 쳐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된 자들, 즉 교회 리더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교회에서 리더의 위치가 되면 양들을 주장하고 명령하는 자세로 대하기 쉽습니다. 또한 교회 리더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자기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마음을 “더러운 이득”이라고 하였습니다. 리더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이어야 하고(막 10:45) 본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요 13:14). 만일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자기의 직분을 이용하여 자기 만족과 영광을 구하려 한다면 이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도며 강도가 됩니다. 

또한 절도와 강도는 교회 내에 있는 거짓 선생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세상의 지식을 갖고 들어와 복음을 왜곡하고 이상하게 가르쳐서 양들의 영혼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거짓 선생들은 주로 유대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내에는 그리스 철학인 영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은 모두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예수님의 육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고전 15:12). 거짓 가르침은 초대 교회의 문제만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교묘하게 교회 내로 파고 들어와 양들의 영혼을 빼앗아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부정하고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고 꾑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감동할 만큼 잘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별하지 못하는 양들을 유혹하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버립니다. 예수님의 양들인 우리는 이런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벧후 3:18).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의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갑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양들을 키울 때 낮에는 초장에 풀어 두어 풀을 먹도록 했고 밤에는 마을의 공동 우리에 넣어 쉬게 하였습니다.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목자가 자기 양을 찾으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공동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는 목자를 위해 문을 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5을 보면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그를 만난 적이 없으셨지만 이미 그를 영원 전부터 아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삭개오는 이에 감동을 받아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목자는 우리를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양들은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럿이 같은 무리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여럿 중 하나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나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여러 사람 중의 기도 중 하나가 아닙니다. 나의 기도에 온전히 집중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수십억 인구의 기도를 듣기도 바쁘실 텐데 내 기도는 수십억의 기도 중의 하나일 거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분이 되십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십 억 중에 나를 보실 때 헷갈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지으신 분으로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의 뜻과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엡 1:11).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결코 우연히 생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 전부터 아셨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고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십니다(롬 8:29-30). 하나님은 별들의 수효를 세시며 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시는 섬세하신 분이십니다(시 147:4). 이 섬세하신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이름을 그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심으로 늘 보시고 기억하시며 내가 사는 거처를 그의 앞에 두어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사 49:16). 

양은 이런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양은 낯선 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압니다(사 1:3). 그들은 비록 짐승이지만 주인의 목소리를 압니다. 그들은 주인이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고 자기 생명을 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설득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고집과 교만으로 그 눈과 귀가 가리어져서 선한 목자 예수님의 생명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복음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의 음성은 사랑과 은혜, 자비와 용서, 화평과 자유의 음성입니다. 죽은 자가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5:25). 그의 음성을 듣고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5:24). 그의 음성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 주고 영혼에 기쁨을 주고 새롭게 하며 위로와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소리로 들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듣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그의 음성을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부르는 수많은 음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음성은 우리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우리를 꾀어 파멸로 가게 하는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부모님이나 자식, 형제나 배우자나, 친구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그래서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신 13:6-7).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의 멸망할 것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5절에 보면 “타인의 음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우리를 꾀어 죄를 짓게 하고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음성을 듣지 않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대적자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목자의 인도(4-6)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릅니다. 목자는 돼지나 소떼를 몰듯 양떼를 몰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들에 앞서 갑니다. 그는 양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갈까봐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양도 목자가 인도하는 길을 의심하거나 따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 신뢰하고 목자가 가는 대로 그 길을 그대로 따릅니다. 목자는 앞서 가서 장애물이나 위험한 곳이 있으면 피하여 인도합니다. 개울을 건널 때 목자는 어린 양을 품에 안고 건너면 두려움 많은 양들은 안심하고 목자를 따라 얕은 개울을 건넙니다. 만일 깊은 개울이라면 목자는 결코 건너지 않을 것입니다. 목자는 헤엄을 칠 줄 알아도 양들은 헤엄을 못친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얕은 곳을 찾아 인도합니다. 목자가 앞서 간다는 것은 목자가 본을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제자들에게 강압적으로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각해 보도록 하시고 그들 스스로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 따르지 못할 때 벌컥 화를 내시고 “그것도 못하느냐?”하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그에게 가면 마음이 포근하고 쉼을 얻습니다(마 11:29).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에 쉼을 얻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강요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에 감동과 감화를 받아 믿게 되고 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섬기라 하지 않으시고 먼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먼저 일일이 씻기심으로 본을 보여 주시고 그들도 그 본을 따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13:15).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제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막 10:45).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신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따릅니다.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와 함께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 5:40-41). 그들이 이렇게 고난받은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난받지 않으면 영생이 취소되어서 고난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 사이의 절대 사랑과 절대 신뢰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양은 이처럼 목자를 신뢰하고 그 음성을 듣고 따르지만 타인의 음성은 결코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타인의 음성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타인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합니다. 양은 목자이면 양들을 살리고 먹이려 하지만 타인이면 자기를 이용하고 해하려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섬세한 보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양은 독초를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 풀이나 마구 뜯어 먹습니다. 양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과 같은 공격 무기가 없어 짐승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양은 다리가 짧아 빠르게 도망하지도 못합니다. 양은 눈이 나빠 자기 앞에 있는 구덩이도 볼 수 없어 구덩이에 빠져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일어나더라도 스스로 빠져 나오지도 못합니다. 이런 양들에게 목자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양은 목자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평안히 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였고 양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율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자가 아니라 타인이었습니다. 양들은 이런 타인의 음성을 듣지 않고 참 목자를 찾아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은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방황하다가 참 목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무리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는지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과 오래 계시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의 목자가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21:15).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참 목자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구원 역사를 이루실 때 반드시 추수할 일군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영적 불모지와 같던 사마리아 땅을 보면서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5). 세상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의 문제는 ‘목자 없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지만 추수할 일군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양들의 목자가 되어 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보살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양들은 온통 타인의 음성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문화에 매우 익숙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쉽게 이해할 만한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참 목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양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구원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7-10)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못알아 들으니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5절의 비유와 7-18절의 비유는 목자와 양의 비유이지만 비유의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비유만 제시하고 특별한 설명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앞의 비유에서는 문지기가 따로 있어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하였고 뒤의 비유에서는 예수님이 유일한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비유의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배경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목자들은 우리의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 가시덤불 같은 것을 쌓아 막거나 목자가 직접 문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목자가 문에 있으면 양이 목자를 거쳐야 들락날락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목자를 거쳐서 가야했고 밖으로 나가 꼴을 먹고 싶으면 목자를 거쳐 나가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거쳐 들락거리면서 목자는 양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시간적인 개념으로 하자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선구자는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도요 강도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아 예수님을 고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을 소개한 자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동기는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목장으로부터 믿는 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의 영혼을 도둑질하여 그릇된 길로 가게 하고 결국은 영적으로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은혜로 값없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100% 주님의 공로입니다. 여기에 뭔가 하나를 추가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영혼을 무력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합니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십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구원을 받습니다. 인류는 구원자를 갈망해왔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습니다. 인간은 죄의 대가로 언젠가는 죽게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인생 문제입니다. 아무리 백 세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100년의 세월도 화살이 날아가듯 금방 지나갑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끝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로 간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은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영생의 문제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갖습니다. 그런데 성경처럼 구원과 영생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종교나 사상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성경 전체의 요절로 영생의 길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값없이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믿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 선물을 받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받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입니다. 세상에 구원과 영생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이나 종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가 믿을 때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다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등산에 비유합니다. 그들은 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길이 있듯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신앙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앙과 신념을 존중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4:6은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죄 아래 팔렸습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야 우리는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 값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피값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로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정하시고 원하시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로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죄로 인해 원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으로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이 둘이 한 몸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소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엡 2:14-16). 또 구원의 원리를 계곡의 비유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로 인해 깊은 절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 절벽을 가로질러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그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 절벽을 건너는 길은 오직 한 길 십자가 뿐입니다. 다른 종교와 신앙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죄의 절벽이라는 장애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다룬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율을 지킨다거나 선행을 하거나 참선을 함으로써 영생의 길에 이른다고 말하는데 공통점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로마서 3:21은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한 의는 영어로 a righteousness from God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나온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과는 별도로’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의 행위위와 노력과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는 두 번째 축복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것입니다.  꼴은 양이 먹는 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목자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푸는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목자의 보호를 벗어나면 그들은 들짐승의 먹잇감이 되어 위험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자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그에게 나아갑니다. 입술의 신앙고백과 마음의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갑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의 피와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의 은혜와 힘 주심과 위로가 함께 합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 51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여기서 “오르락 내리락 하다”는 말처럼 ‘교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를 들어가며 나오며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눕니다. 성도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아래 안전을 느끼며 그 안에서 자유함과 쉼을 얻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사람은 노예입니다. 그들은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에 얽매여 죄의 노예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두려움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자유인입니다. 자유는 안전이 담보될 때 누리는 축복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것은 영적인 공급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꼴로 그의 양들을 먹이십니다. “꼴을 얻는다”는 것은 영어로 find pasture로 ‘초지를 찾다’는 뜻입니다. 양들은 배급되듯이 주어지는 것만 먹는 것이 아니라 넓은 푸른 초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먹을만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였기에 양들은 마음 놓고 꼴을 먹음으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사람은 육적인 양식이 필요하듯 영적인 양식도 필요합니다. 6:35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영혼이 배부를 때 만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게 살아도 그 영혼이 충족되지 않으면 만족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면 영혼의 참만족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며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습니다(6:47). 예수님은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의 개념을 십자가로 연결시키 구체화 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4-55). 우리가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죄 사함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주신 생명의 떡을 먹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영생을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의 꼴은. 생명의 떡”과 연결되고 그것은 곧 십자가로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죄 사함으로 우리 영혼이 만족을 누리며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아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목자와 도둑의 양에 대한 목적을 비교하시면서 선한 목자를 신뢰하도록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입니다. 이는 마귀의 목적과 닮았습니다. 마귀는 욕심대로 행하고 거짓을 제 것으로 말하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8:44).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얽매이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 안에서 삶이 지루하고 율법적이며 제한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경험해 보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를 제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하는 것이 풍성한 삶이라고 여깁니다.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봐야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풍성은 하늘의 축복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늘의 축복은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십니다(딛 3:6). 예수님이 성령이 충만한 삶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7:38).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성령의 샘물이 콸콸 샘솟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 14:7).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부어주십니다(엡 2:4). 또한 소망이 풍성하게 하시고(히6:11), 은혜가 풍성하게 하십니다(딤전 1:14).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게 하시고(빌 1:9),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엡 1:8).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 필요한 것들을 풍성히 채워주십니다(빌 4:19). 게다가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의 삶에 넘쳐 흘러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 삶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함으로 자신도 윤택하여집니다(잠 11:25). 그러나 자기를 위해 재물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는 궁핍한 삶이 됩니다(눅12:21). 

선한 목자 예수님(11-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심을 선포하신 후에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어 이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고상하고 마음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마음이 착한 목자는 양들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는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고상한 척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기 위해 고되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목자입니다. 이리떼가 나타나면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우는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지만 그는 목자로서 험하고 고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번은 그가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그를 해하고자 하면 그는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습니다(삼상 17:34-35). 하나님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다윗의 목자의 심정을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괴물과 같은 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이처럼 양을 위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끼고 양을 구하는 일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것이 “선하다”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하셨습니다. 아침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양들을 돌보느라 탈진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시면 풍랑이 이는 가운데에서 배에서 주무실 정도였습니다(마 8:24).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먼 여행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치셔서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지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돕기 위해 그녀와 장시간 대화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기뻐서 마을로 가자 한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배고프고 지친 것을 잊으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권하는 제자에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4).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들을 자기에게 몰려오시는 것을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그 후에 예수님은 사천 명의 무리들이 따르자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시고 칠병이어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온전히 양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마지막 날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3:1). 그리고 제자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셨습니다(17:11,15).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대속제물로 드리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양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15:13).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7-8).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영어로 the good shepherd라고 하였습니다. 정관사 the를 쓴 것은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 성경 여러 곳에 목자 예수님이 자기 양떼를 모을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11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에스겔 34:23은 말합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예수님은 다윗의 위를 이어 오시는 왕이요 목자가 되십니다(마 2:6). 미가 5:4은 말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우리는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벧전 2:25).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장차 재림하실 때 어린 양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계 7:17). 예수님은 “목자장”이 되시고(벧전 5:4) “큰 목자”가 되십니다(히 13:20). 목자는 여럿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목자”(요 10:16)의 다스리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맡기신 양들의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좋은 본이 되셨듯이 우리도 양들의 좋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성도들을 이 시대의 목자로 세우시고 길 잃은 양들을 “목자장”이요 “큰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닌 양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양무리들을 섬세하게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실제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고 기도해 주며 그들의 영혼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선한 목자”가 있으면 이와 대조되는 “삯꾼”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은 옷차림이나 하는 일이 똑같습니다. 평소에 진위를 가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선한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러나 삯꾼은 양이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는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헤치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체 합니다. 이는 그들이 양을 치는 목적이 삯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용된 사람은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계약을 맺은 것 그 이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들짐승과 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제 양”입니다. 이는 NIV에서 own the sheep으로 ‘양을 소유하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삯군은 양을 ‘소유’하지 않았고 목자는 양을 ‘소유’했기 때문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벧전 2:9). 출애굽기 19: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소유’는 NIV에서는 my treasured possession으로 ‘내가 보배처럼 여기는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어린 양의 피로 사셔서 그의 보배로운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얼마나 아끼고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적과 관심은 그의 양인 우리들의 행복과 안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풍성히 주십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번에는 선한 목자이신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알고 양도 그를 잘 압니다. 여기서 앎은 지식적이고 피상적인 앎이 아닙니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처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계를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그의 보배 피로 사신 성도도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살아나심과 함께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롬 6:3-4). 우리는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 외롭다고 말합니다. 특히 사이버 공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외로움이 더 큽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람으로 자기를 알리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사생활이라는 일종의 인권을 내세워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하면 자기의 사생활이 알려질까봐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나를 모를지언정 예수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나를 예정하시고 미리 아셨고 나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롬 8:28-29). 3절을 보면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해 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나 자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 길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였습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군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참된 자아를 찾게 되었습니다. 존 뉴톤(John Newton)은 노예를 팔아 넘기던 잔인한 노예선 선장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배를 타고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목사가 되었고 노예폐지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작사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가사 중에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라는 절이 있는데, 그 뜻은 “내가 한 때는 긿은 자였지만 이제는 주님이 날 찾으셨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 나도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찾으셨고 나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고 목자의 품에 있는 어린 양처럼 섬세한 돌봄을 받는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른 양들을 인도하고자 하시는 예수님(16-18)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음과 그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말하고, “다른 양”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이방인들을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양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을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상만민을 위해 십자가에게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한 무리가 된다”는 것은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여 한 목자에게 있게 하시고 한 무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2:1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고자 하셨습니다(갈 3:14).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로 보면  I have other sheep that are not of this sheep pen로 ‘나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도 역시 예수님의 양들로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다만 그들이 아직 부름을 받지 않아 예수님의 우리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영원부터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양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핏값으로 소유한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 안으로 들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 없이 방황할 것을 아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되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음성을 전할 메신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지금까지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선한 목자 예수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작은 목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전달할 때입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이 소유한 양이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융리지만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이제 목자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게 될 것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버린 희생이 결실을 맺으려면 그가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헛되이 목숨을 버리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이로써 대속의 죽으심이 영원히 유효하게 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드시 죽음을 이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그를 무덤에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만 죽어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소망 가운데 기꺼이 자기 목숨을 드리셨습니다(12:24).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힘이 없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잡혀서 심문받으시고 죽으신 것 같지만 실은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는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릴 권세도 있으시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라고 하심으로 능히 천사들을 불러 자기 목숨을 지키실 수 있었습니다(18:36).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하실 때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하며 조롱하였습니다(마 27:40).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가시기 위해 모든 수욕과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도 갖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목자 비유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19-24)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들을 염두해 두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마음에 찔렸는데 회개하지 않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워낙 암시적이라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적대적 감정을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감정이 상하면 습관적으로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7:20; 8:48,52, 10:19).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라고 함으로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렸다는 말은 좀 지나치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귀신이 들리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은 예수님처럼 조리 있게 암시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비유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귀신들린 자나 행악자는 기적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귀신들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더라도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보다는 눈을 상하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는 이적을 행할 것입니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수전절은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이는 ‘봉헌의 축제(Festival of Dedication)라고 하였습니다(21). 수전절은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배경이 되는 절기로 유대의 주요 절기가 아닙니다. 그리스가 기원전 334년부터 10년간의 전쟁을 통해 알렉산더 대제가 세계를 정복한 후 유대는 그리스의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점차 유대인들은 150년 간에 걸쳐 헬라 문화에 동화되어 갔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이 70인역(the Septuagint)으로 이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의 종교의식을 금지시키고 성경사본을 불 태우고 성전에 이교 우상을 세운 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인 ‘마카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첫 리더는 유다 마카비우스였는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였고 주전 165년에 성전을 봉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하였는데 이는 ‘봉헌’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시대의 이스라엘의 독립과 성전의 재봉헌을 기념하여 겨울에 예루살렘에서 축제를 벌였고 이를 ‘봉헌의 축제(수전절)’라고 불렀습니다(22). 1세기에는 예루살렘에서 8일 동안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수전절이 있는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은 보통 폭풍이 불고 우기에 속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솔로몬 행각을 거니신 이유로 추측됩니다(23). 비를 피하기 위해 그 곳을 거니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셨을 것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성전 바깥뜰 동쪽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무너지고 헤롯이 다시 성전을 세우면서 세웠습니다.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몰아부치면서 분명한 답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호한 자세를 취한 것에 대해 분명하게 자기 자신을 밝히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목자의 이미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의 예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고소할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메시아나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입으로 메시아임을 말하는 순간 그들은 로마 정부에 반란죄로 고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 심문을 당하셨을 때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셨습니다(막 14:62). 그들은 기다리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당혹했고 예수님을 다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5-30)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한 목자라고 밝히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그들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수없이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그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오직 원하는 것은 그들이 고소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야 반란죄로 고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라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설명한들 그들은 영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요 1:4). 이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을 넘어서 영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살아 있는 동안 기쁨을 줍니다. 이 생명은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히 지속시킵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을 주시되 값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고 안받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파멸도 있습니다. 이는 영혼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에 처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든 영벌이든 영혼의 존재는 계속됩니다. 영생은 기쁨과 행복이 영원한 상태를 말하고 멸망은 지옥의 고통이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파멸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파멸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우리는 엉뚱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다가 이탈한 양이나 다른 짐승들에게 물어 뜯긴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합니다. 이를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서 내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대적들로부터 불상사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 쉽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노리는 원수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 사상이나 거짓 희망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유혹합니다. 또한 세상은 박해를 통해 신자들을 위협하고 회유하여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면 좋은데 가다가 실족하여 영원한 파멸에 처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염려가 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의 손에 있고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아래 있습니다. 이 영역은 그 어떤 세력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은혜와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함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9은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줍니다. 마귀는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고 정죄하여 은혜에서 떠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다른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 편이시고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고난이나 박해나 위협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영적 세계의 권세자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실족이나 실패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요 확신입니다. 영혼의 파괴자로 위협과 유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를 결코 해치거나 빼앗지 못한다고 분명히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주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상기시키십니다. 그는 만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만물을 붙들고 계신 분이시며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 만물을 재창조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만물보다 크신 분으로 그의 손에 붙들고 있는 양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내가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31-38)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신과 동일시하자 이를 신성모독으로 생각하고 다시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전에도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는 말에 돌을 들어 치려 하였습니다(8:49). 그들이 돌을 든 것은 레위기 24:14-16에서 신성모독하는 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성모독을 한 경우 그들은 법적 절차를 밟아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절차도 밟지 않고 돌을 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불법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감정적 돌출행동은 결국 로마법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버지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천국 말씀을 주심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며 소망을 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일들을 하셨고 그들을 자기 우리 안에 들이시고 보호하시고 돌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인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나와 광명을 보고 정죄 의식에서 놓여 진리 안에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일을 행한 것 때문에 돌을 들고 예수님을 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변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한 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하여 돌로 치려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맹인이 눈을 뜨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고 감동받아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두 번 그들 생각에 거스리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선한 일이 아니라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범한 중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런 예수님을 두둔하는 맹인이었던 자도 미워하여 그들의 권력을 남용하여 그를 공동체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꼬투리를 잡고 그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을 마귀의 힘을 빌어 행하는 것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20).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1:1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 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시편 82:6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시편을 “율법”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칭하셨고 사도들과 바울도 그렇게 칭하였습니다(마 22:23, 눅16:16, 눅24:44).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로 줄여서 구약성경을 “율법”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요 12:34, 15:25). 시편 82:6은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시편 82:1의 “재판장들”을 말하는데, NIV에서는 the “gods”, 즉 ‘신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82편은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어떻게 판결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들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어야 하는데 그들은 불공평하게 판단하며 악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시 82:2-3). 하나님은 일하실 때 대리자를 세워 일하십니다. 이때 대리자를 가리켜 “신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28을 보면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재판장”은 KJV에 보면 the gods, 즉 “신들”로 되어 있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치리하는 자들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기본적으로 두려워하며 그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들”이라고 칭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시는데 그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하여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하셨습니다.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리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그 자신이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1:1)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구속자”이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히 1:2-3). 재판관(신들)은 일정한 도시나 지방이나 나라를 통치하시지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치리자이시고 영의 세계까지 통치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약속대로 세상의 구원자로 세상에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뜻 두신 구원역사의 중차대한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논증은 보다 작은 것에서 보다 큰 것에로의 논증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신들”이었다면, 예수님은 더욱 더 그렇다는 뜻입니다(Matthew Henry Commentary). 그들은 “신들”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함과 겸손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은 것에 대해 그를 신성모독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는 경솔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그야말로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돌에 맞아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믿지 않지더라도 그가 행하시는 그 일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행했던 일들은 아버지만이 오직 행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행한 일은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는 행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오직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자연의 법칙들을 조정하고 변경하고 통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0)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논증적인 방법으로 설득시키셨습니다. 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시편의 말씀을 통해 신성모독이 아님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재판관도 “신들”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보다 더 크신 이로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려 일어난 초자연적인 것으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심을 먼저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깨달아 알리라”라고 하심으로 감정적으로 먼저 거부하지 말고 먼저 이성적으로 알고자 하도록 하셨고 그러면 “믿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신뢰하려면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의 집안 배경이나 가족들, 그의 취미나 성격,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을 알면서 신뢰가 쌓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믿어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간 후 신뢰가 쌓이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기적을 통해 그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도록 초대하시고 사귐을 갖고자 하십니다. 요한일서 1:3은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귐(fellowship)은 믿고 난 후의 일이지만 믿기 전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먼저 알아보고 사귀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설득하시는 바였습니다. 

요단 강 저편으로 건너가신 예수님(39-42)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의 논증은 꽤 설득력이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말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논리에 논박할 수 없어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에 가셔서 거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도시인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동편의 조용한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나 긴 논쟁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떠나 휴식과 고요함을 얻으셨습니다. 요단 강 저편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1:19-34). 예수님은 사역의 긴 여정을 마치시고 한 바퀴 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정리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수전절 겨울이고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세례 요한의 외침을 상기하셨을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외침대로 십자가를 지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하실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들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나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많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이 참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시에서 광야로 가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종교적인 곳이라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다르게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처럼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간직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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