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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요한복음 11:1-57)

저자 요한은 11장에서 7가지 표적 중 마지막 표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표적은 표적 중의 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표적입니다. 성경에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는 세 곳에 등장합니다. 하나는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린 것이고(눅 7:11-17), 다른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방금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이며(막 5:35-43; 눅 8:49-56), 마지막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부활이 첫 두 이야기와 다른 점은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들은 첫 두 이야기를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오라버니가 죽어 나흘이 지난 상태에서 부패하여 냄새가 났을 때 예수님이 살리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매들은 나사로의 상태를 완전한 절망의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말씀하시면서 부활의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절망 상태에 있는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장차 무덤에 있는 자들을 부활시키실 부활의 주님으로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무덤에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1-4)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장 말씀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그 곳은 감람 산 너머 예루살렘 동쪽 마을로 여리고로 가는 길목 약 3 킬로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이 곳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엘아지리에(el-ʿAziriyeh) 마을로 “나사로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나사로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곳입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성 밖으로 나와 베다니에 가서 하루밤을 지내셨습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는데 시장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 거하시다가 아침도 먹지 못하고 떠난 것을 보면 이 곳이 가난한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21:17-18). 또한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로 가난한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6:6). 쿰란의 성전문서에 따르면 나병환자와 병자를 위한 세개의 장소가 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여행하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기 위해 여리고 동쪽 길을 이용하였습니다(요 4:3-4). 예수님이 베다니에 자주 머무르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여리고를 통해 이 곳에 자주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배경이 되는 곳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인 베다니가 아닌가 추측됩니다(눅 10:30).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베다니에서 하셨습니다(막 11:1-1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이 곳에 머무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와 두 자매의 특별한 관계를 볼 때 그들 집에 자주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가족과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이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였습니다. 누가복음 10:38-42의 이야기에서 이들 자매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마르다는 식사 준비로 예수님을 맞이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마르다를 가장 먼저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르다가 이 가족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많이 섬긴 것 같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함께 산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풍습으로 보아 결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마을에 함께 살아도 따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절은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마리아를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12장에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사건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향유를 주께 부은 사건들이 나옵니다(마 26:6-12; 막 14:3-9; 눅 7:36-38).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사건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7:36-38의 사건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틀 전의 사건이고 누가복음의 사건은 예수 사역 초기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의 향유 사건은 유월절 엿새 전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누가복음의 향유 사건의 여인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향유 사건의 여인과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사건의 장소가 다르지만 시기가 예수님의 수난 전의 일으므로 동일한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정을 매우 사랑하셨다는 언급이 11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3,5,36).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어서 예수님께 고쳐 주시기를 부탁할 때 나사로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가 특별함을 알 수 있습니다(3). 저자 요한은 나사로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발병한지 얼마 안되어 죽은 것으로 보아 그는 만성질병이 아닌 열병에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나사로의 병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열이 나고 숨이 차오르고 결국에 정신을 잃고 위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부탁에는 나사로라는 이름도, 고쳐달라는 요구도 없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이렇게만 해도 예수님이 충분히 알아듣고 당장에 달려와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매들이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매들과 특별한 친분 관계가 있어 행선지를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자매들은 발이 넓어 그 지방의 소식통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안수하시면 죽을 병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요 11:21,32). 그들이 이런 믿음으로 부탁을 하면서도 그들 마음 가운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는 구절을 볼 때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나다닐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로 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에 대해 들으시고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하려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에 대해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9:3). 예수님께서 보실 때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자는 사람의 눈에는 비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육적인 눈을 뜨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사로의 병은 인간적으로 죽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장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시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부활의 주가 되심을 예표하는 사건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은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 몸의 부활이 있음을 암시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슬프고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에 절망하고 슬퍼하지만 예수님은 비극과 운명을 영광과 섭리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장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끝장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비극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행복과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그의 아들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나사로의 부활로 입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을 병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죽을 병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예수님께는 결코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병”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음으로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만나면 “죽을 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불행한 일을 만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며 원망의 말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누구 때문에 그런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고 불행한 사건이 사라지고 앞으로 좋은 일만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많은 “죽을 병”을 만날 때마다 “누구 때문일까?”라고 원인을 따진다면 우리 삶은 정말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영광 편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망과 슬픔이 바뀌어 감사와 찬양이 됩니다. 우리가 겪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 편에서 다르게 해석하면 믿음이 성장하고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언급을 많이 했습니다. 포두주가 다 떨어진 위기 가운데 있었던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가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변화의 사건으로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갔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의 부탁대로 예수님께 순종한 하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처음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평범하신 좋으신 분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절망적인 사건을 통해 치유와 회복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시고 예수님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장의 “죽을 병”과 같은 사건 앞에서 이해가 가지 않고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렌즈로 사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렌즈는 하나님의 섭리과 주권을 말합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운명적이고 슬픈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기쁨과 소원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해석의 중심이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어둡고 운명적이고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느끼는 대로, 마음의 소원대로,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신앙은 이런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대로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듯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해주셔야만 한다는 고집을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새찬송가 549장)라고 기도하는 것이 불행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고 이런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르게 생각하고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자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기초한 섭리적인 생각은 “인생은 그런 거지”라는 식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체념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은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섭리적인 생각은 하나님 편에서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을 기회로 삼고 도약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극복하고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원리입니다.

이틀을 더 지체하신 예수님(5-16)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5절은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심을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2일을 더 계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 가정을 사랑하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사로를 고쳐주시기 위해 달려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 결국 나사로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6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체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체는 나사로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매의 말대로 예수님이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분석해 보면 나사로는 예수님의 지체와 상관 없이 죽었습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베다니까지 거리상으로 보아서 나흘이 걸리지 않습니다.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계신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고 베다니로 가는 동안 하루를  보태더라도 사흘의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자매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시점에 바로 나사로가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니면 그 전에 나사로가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가 고의로 죽게 내버려 두도록 했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전지하시므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실 텐데 베다니로 오시지 않는 것은 자매들에게 원망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원함과는 반대로 행하기도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슬픔과 고통에 깊이 동참하시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울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인간이 겪는 슬픔에 깊이 동참해 주셨습니다(눅 7:13).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에게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죽음의 한계를 뛰어 넘어 더 좋은 부활을 선물로 주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최악이고 절망이지만 예수님께는 그것 최악이나 절망이 아니라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선물은 죽음이라는 최악의 절망 상태를 거쳐야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의 한 차원 높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가장 좋은 타이밍을 아십니다. 사람에게 가장 긴박한 시점과 예수님이 일하고자 하시는 시점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져 이 문제를 들고 나온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2:4). 그 이유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어서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는 나사로가 죽어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는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타이밍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인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하인들이 순종하였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알게 하고자 가장 절망적인 때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이제 곧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 자신이 부활하실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은 계신 곳에 이틀을 유하시고 나서 유대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 밖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 동편 요단강 건너에 계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하는 것을 보아 예수님은 잠시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해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적대 감정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긴장 분위기는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초막절 명절 기간 동안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7:25). 예수님은 초막절에서 말씀을 전하신 후 다시금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이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돌로 치려하였으므로 이를 피해 성전을 빠져 나오셨습니다(8:59).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들과의 논쟁 중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시자 그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였습니다(10:30). 요한복음 11장 사건은 수전절이라고 하는 하누카 절기가 있는 겨울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유월절 봄 사이의 기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유월절로 갈수록 험악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위협은 곧 제자들에 대한 위협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로 가고자 하는 예수님을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유대인들은 낮을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12시간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계절에 따라 12시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에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무리들을 고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은 생명이 있을 동안을 말씀하시고 밤은 죽음의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9:4에서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날이 올 터인데 살아 있을 동안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려고 위협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밤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쉬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까지 아직 밤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낮이 지나면 밤이 올 것입니다. 사람이 밤에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실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는 살벌한 상황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숨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밤과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9:5). 그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마음에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낮에 다니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그들은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밤에 다니는 것이므로 빛이 없어 실족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면서 빛과 어둠을 대조해서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9장에서는 빛되신 예수님을 힘입어 운명을 극복하고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11장에서는 빛되신 예수님을 힘입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두려움이 물러가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게 되며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나사로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나사로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인식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나사로의 죽음의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잠은 보통 죽음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 “자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행 7:60).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고(고전 15:20),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살전 4:14). 우리는 죽음을 무섭게 생각합니다. 교통사고나 암에 걸려 죽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데 죽음과 함께 나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그 동안 살면서 고생한 것이 헛 것이 되고 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은 죽을 터이니 사는 동안 마음껏 즐기고 먹고 마시자고 말합니다(고전 15:32). 부활신앙이 없을 때 이처럼 허무주의와 쾌락주의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으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게 됩니다. 부활이 있으면 잠자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깊은 잠을 잤다가 다시 깨어나 보면 우리는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고전 15:42-44). 사람들은 잠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잠은 회복에 필수적입니다. 잠은 우리 건강에 좋은 치료제입니다. 잠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부활을 얻기 위한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거기 가 있지 않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만일 거기 계셨더라면 사람들은 나사로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낫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훨씬 더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갔을 때 그 어떤 사람도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빨리 오지 않으셨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소망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이런 고정된 관념을 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흘이나 되어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한계에 갇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는 다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이라고 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 주님은 큰 일을 시작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부활의 믿음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하면서 결기에 차서 다른 제자들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고자 하시는데 눈 딱 감고 가자. 어짜피 죽음은 피할 수 없는데 이왕이면 주와 함께 죽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도덕적인 의리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한 것입니다. 원래 도마는 믿는 데 더디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이는 잘 믿지 않는 특징이 있었습니다(요 20:25).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는 대단한 결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의심쟁이 도마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 대해서는 의심을 했는데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의외의 반응입니다. 도마의 신앙은 부활신앙이 없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신앙으로 우리는 이런 신앙을 ‘열사의 신앙’ 또는 ‘소신공양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어짜피 모든 인간은 죽으니 의미 있게 죽자는 생각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나 의리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런 희생은 다른 사람이 감히 본받을 수 없는 훌륭하고 값진 희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까지 결연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지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 소망에 기뻐하게 하시고 죽음을 뛰어 넘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열사 신앙과 부활신앙의 차이는 같은 죽음에 대해 부활의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다면 죽음은 잠자는 것이고 장차 주님과 함께 부활할 소망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다면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지만 애써 겁쟁이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세례를 받자 죽음의 한계를 뛰어 넘어 돌로 치려고 하는 박해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이런 용기는 부활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한계(17-2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께서 드디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체 주위를 떠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체가 부패하게 되면 그 영혼은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장례를 치를 때 장례는 가족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의 일로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부고가 알려지자 수많은 먼 친척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조문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도 와서 슬픔을 같이 하였습니다( 19).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매장을 했습니다. 시체를 장기간 동안 두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중죄인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두는데 이는 저주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시체를 그 날 매장하도록 해서 땅을 더럽게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신 21:22-23).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악취를 줄이기 위해 향품을 사용하였고 땅 속에 묻는 것이 아니라 동굴에 안치하고 무덤 입구를 돌로 막음으로 매장을 끝냈습니다. 그 후 7일 동안 애도기간을 갖고 조문을 받았습니다. 1년이 지나면 뼈를 석회암으로 된 유골함에 넣어 안치하였습니다. 보통 동굴 하나에 여러 방이 있어 그 방에 유골을 안치하였습니다.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루살렘에서 베다니까지의 거리는 ‘오리’였는데, 이는 영어로 2마일로, 약 3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베다니가 가까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와서 조문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와서 위문하러 왔다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꽤 영향력 있는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였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언니로서 그 가족의 대표로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이 있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마르다는 행동파였고 마리아는 수동적이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0:38-42에서 예수님을 초청하였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행동이 다른 데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의 곁에 앉아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이런 대조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집에 앉았더라”고 표현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더 컸음을 말해줍니다. 보통 상주들은 슬픔을 표시하느라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자기 백성이 자기 백성이 가증한 죄를 범하자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스 9:4).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느 1:4).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시 137:1). 그들은 슬픔을 표현할 때 티끌에 앉고 재를 뒤집어 쓰며 슬픔을 표현했습니다(사 47:1; 에 4:1). 오빠의 슬픔에 대한 두 자매의 반응은 이처럼 달랐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주께서 좀 더 일찍 오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원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보고를 받을 때 나사로가 죽은 시점입니다. 마르다는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오더라도 나사로는 죽은 지 하루가 지나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의 말은 예수님이 다른 데 계시지 않고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님의 치유로 인해 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르다는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의 슬픔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의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모든 예의를 갖추어 예수님께 자신의 슬픔을 표시하였습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주실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실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신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실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듯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39절에서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자신의 불신을 감추고 막연히 미래의 부활을 믿는다고 신앙고백했습니다. 그녀가 믿는 부활관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들이 다 부활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에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에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고 하여 부활도 믿지 않고 천사도 영의 세계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를 위로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했습니다(눅 16:22). 이는 낙원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도 십자가의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연결됩니다(눅 23:43).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2에서 육체의 죽음을 땅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으로 말하였고 부활하는 것을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무너진다는 것은‘벗다’는 의미로 죽음을 말하며, 죽음은 곧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하고 부활은 육체와 영혼이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덧입는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부활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바울의 이런 설명이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성종현,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 신약성서 신학적 고찰, 상신논총 제3집, 2010).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몸의 부활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위로의 날을 기다리며 현세의 고난과 아픔을 견디며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마르다의 부활신앙은 미래적인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부활은 미래적인 부활신앙과 더불어 현재적인 부활신앙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예수님(25-31)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이다(I am …)”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는 현재형이라는 것과 둘째는 주어 “나는 …”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부활을 주실 분이 아니라 ‘현재’ 부활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주어를 잘 쓰지 않는데 굳이 주어를 쓰는 것은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생명을 주실 분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눈 앞에 있는 예수님께 주목하지 못하고  자꾸 먼 미래로, 마지막 날로 눈을 돌리려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고, 마지막 날 부활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며 부활과 영생을 주실 분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 차원의 생각에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부활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나의 현실적인 삶과 연관시켜야 하는데 자꾸 먼 미래의 일로 여깁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은 내세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아득히 먼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세의 부활의 믿음이 현재 나의 실제 삶에 작동되어야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신 것은 그냥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23).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한 말로 오해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내세관의 차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사로는 죽었지만 영생을 누릴 것이다”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계획하고 계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막연한 미래의 부활관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심으로 먼 미래에 부활과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어떤 능력의 일을 행하실 것을 생각했습니다(22).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자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요 1:1-4).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함으로 얻게 되는 단순한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님께 연결됨으로 얻어지는 엄청난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면 이중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다”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부활이다”라는 선언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모든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예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과 나무에서 첫 열매가 맺히면 앞으로 계속 그 나무에서 사과 열매가 맺힐 것을 말해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심은 우리의 현재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세력은 예수님의 생명 속으로 빨려들어가 삼켜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망의 그늘과 어둠을 다 삼켜버리고 녹여버립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온 것이지만 예수님의 생명은 이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립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의를 통해 우리의 삶에 흐르고 그 생명에는 다함이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결코 우리를 방해하거나 상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광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게 합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그의 부활과 생명의 음성은 우리를 사망의 세계에서 영생의 세계로 옮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요 5:24-25).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육체의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은 무덤 너머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히 죽음에 지배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믿는 즉시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누리기 위해 인간의 시간과 역사 속에서 그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세를 기다리지 않고 믿는 즉시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받고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다. 이는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몸의 부활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심을 선언하시면서 마지막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무덤에서 누워있는 나사로를 살릴 수 있음을 네가 믿느냐?”라는 것에 포인트를 두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 포인트를 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부활 생명의 권세가 이 곳 베다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논리적 암시로 그의 부활 생명이 죽은 나사로까지 이어질 것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선언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의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의심 없이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구속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능력을 무조건 믿지만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로 인한 불안감은 존재했을 것입다. 그녀가 고백한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으면 죽음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그녀의 현재의 마음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전까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 그 이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모든 자들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는 음성은 나사로의 무덤 위에 울려퍼질 뿐만 아니라 나사로와 같은 모든 죽은 자를 일깨우는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겠고 육체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르다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선포를 듣고 그녀의 믿음을 고백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르다는 가만히 여동생 마리아를 불러 예수님이 오셔서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가만히”라는 말은 영어로 secretly(KJV), in private(ESV), aside from the mourners(NLT)로 각각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조문객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라는 의미입니다. 마르다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장례식장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에서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특별하였습니다. 12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몽땅 쏟아 부은 것을 보면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특별했고 예수님도 이런 마리아를 특별히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빠진 마리아에게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선생님(the Master, the Teacher)”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렇게 부르면 마리아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서둘러 사랑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갔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로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위로에 대한 확신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이 일에 어떤 모습으로든 간섭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상주로서 집 안에서 앉아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관습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저버린 채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멀리 떨어져 마을 밖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 계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당시 무덤은 보통 성읍이나 마을 바깥 지경에 위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집으로 들어가셔서 불신하는 조문객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죽음 권세에 사로잡혀 슬퍼하는 조문객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사람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조문객들은 마리아가 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는 마르다와 달리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이 많은 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조문객들은 유족이 혼자 울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따라가서 함께 울며 슬픔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 되심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몰래 동생을 불러낸 것은 헛된 일이 되었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를 통해 마리아를 불러냈고 유대인들은 그녀를 따라 무덤 근처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숨은 섭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32-44)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경배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똑같이 가정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다른 데 가시지 않고 여기 계셨더라면 병든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 계시는 동안 죽은 나사로에 대해 슬퍼하면서 서로에게 “주님이 다른 데 가시지 않고 여기 계셨더라면…”라고 아쉬운 소리를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똑같이 예수님은 병은 고치실 수 있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의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과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사로의 경우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 방식대로 죽은 영혼이 3일 동안 시체 곁을 배회하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들었으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고 현재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따라온 조문객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신음하고 괴로워하셨다.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은 NIV에서는 he was deeply moved in spirit(NIV)로 ‘심령 깊숙히 움직이셨다’는 뜻이고, KJV으로는  he groaned in the spirit으로 ‘영으로 고통스러워 신음하셨다’는 뜻입니다. “심령에”라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말이 콧바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인간에 대해서는 분노 또는 격노의 의미입니다. 또는 마음 깊숙한 심란함의 감정을 말합니다. 이는 슬픔과 고통과 연민등에 의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을 뿐만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troubled로 ‘곤혹스럽고 당혹스럽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마르다나 마리아나 조문객에 대해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의 실체인 자신 앞에서 죽음에 굴복당하여 슬퍼하는 장면을 보시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생명의 지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무덤에 대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에 패배당한 모습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승리와 생명과 부활의 강력한 실체가 예수님 안에 있는데 그들은 이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망에 휘둘림 당하여 슬퍼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사망 권세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에 가서 인류의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해 그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입니다. 영어로는 Jesus wept로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문장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 큰 의미를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셨다는 언급은 세 곳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시고는 성을 보시고 우신 것(눅 19:41-44)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 슬픔의 눈물을 흘리시는 사람들을 보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과 다릅니다. 또한 조문객들의 눈물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슬퍼서 눈물을 흘립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눈물이 납니다. 또한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연민의 눈물을 흘립니다. 혹은 자기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고 불쌍해서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연민의 감정이 작용해서 나온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35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에 눌려 상처를 입고 비통하여 우는 인생들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왜 사망권세에 시달리면서 슬픈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낙원을 상실하고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것은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대속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이 죄사함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앞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권세 가운데에서 그 동안 상처받고 고통당한 인생들을 생각하며 인류의 고통에 동정하시고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실 구원을 보시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감격의 마음이 뒤섞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크신 권능으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인류 위에 폭군으로 군림해온 사망에 대해서 분노를 쏟으십니다. 죄와 죽음의 결과인 무덤 권세를 향하여 승리를 외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무덤의 현장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망가진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대속의 죽음을 겪으셔야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인류의 원수를 이기실 희망에 벅차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공생애를 베다니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었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친분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도 아닌데 단순히 친분관계에 있는 나사로로 인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각별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의 깊은 의미를 잘못 해석했습니다. 또 다른 반응은 예수님의 눈물을 조롱하듯이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가 왜 나사로를 살리지 못하셨는가 하며 예수님의 능력의 한계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이제는 다하였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정말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이를 고치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베푸시지 않은 것을 보고 전에 그가 행하신 기적까지 거짓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심으로 수근거리는 자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소경을 고친 것보다 더 위대한 일 곧 죽음도 정복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고 다시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33절의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음의 영향력에 사로잡힌 비참한 상황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이 모든 불행을 초래한 사망 권세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놓인 무덤으로 상징되는 죽음과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들이 죽음 권세에 시달리지 않고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 권세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미래의 몸의 부활을 믿더라도 그것이 현재 부활 신앙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현재를 살면서 여전히 죽음 권세에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롬 8:2).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셨는데 그 무덤은 동굴로 된 무덤이었고 돌로 막았놓았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굴릴 수 있는 원형의 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8:2, 막 16:3; 눅 24:2). 그러나 지금 발견되는 무덤의 대부분은 원판 모양의 돌은 많지 않고 사각형 모양의 돌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덤 문은 어떤 모양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굴릴 수 있는 돌이었지만 본문에서는 돌을 굴린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함으로 돌을 옮겨 놓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예수님을 생각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믿나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 고백과 그녀의 반응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 고백을 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믿지 못하고 불신의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과 현실이 일치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인데 이 두 가지가 따로 있을 때 이는 죽은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그들은 3일 동안 무덤에 가서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지를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육신을 떠난 영혼이 무덤 주위를 맴돌다가 다시 몸으로 들어가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경우는 3일이 지나고 이제 정식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의 문을 굳게 닫아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 문을 돌로 막아 놓은 지 하루만에 다시 옮겨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3일간 시행했던 시체를 확인하는 작업을 나흘 째에 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이제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공식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 요한도 마르다를 가리켜 “그 죽은 자의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죽은 지 3일이 지나 4일째가 되어 이제는 공식적으로 ‘죽은 자’가 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자 정면 도전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방금 죽은 자를 살리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죽은 자처럼 보이는 자를 소생시킨 자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다시 오실 때 무덤에 있는 자들이 살아나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무덤에 있는 자들은 마른 뼈이거나 화장해서 뼈가루조차 남지 않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적조차 없는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을 살려 영광스럽고 신령하고 강하고 썩지 않는 몸으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이 구절은 23-25절의 말씀을 상기시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마르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영광이었습니다. 이는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능력을 훨씬 능가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르다는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지만 죽은 자를 당장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지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이 현재적 부활임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망자를 살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돌을 옮기라는 말씀을 나사로의 시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시체의 썩는 냄새를 맡는 수고를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 23절에 말씀하셨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을 때 책망하심으로 완고한 자기 생각을 깨십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자기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완고함에서 나오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신과 의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각의 완고함과 교만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당장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불가해의 상황에서 그의 말씀을 의지하고 단순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면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믿고 기대하며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자기 고집을 피우면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자기 생각의 껍질을 벗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물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실 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더니 가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눈에 진흙이 덮인 상태로 실로암 못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였다면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순종해서 실로암에서 눈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예수님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나의 이성적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세계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죽음의 권세를 거스려 능력으로 역사하는 세계인데 이는 우리의 불신과 의심과 자기 생각의 돌을 옮겨 놓고 순종함으로 이루어집니다.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돌이 무덤 문에서 옮겨지자 사람들의 눈은 예수님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본다는 것은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이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는 나사로의 부활시켜달라는 기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즉시 행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감사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연합 가운데에서 오직 중재자로서 그를 의지하여 일하십니다. 그가 하신 모든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의 하나로 전능하시지만 그의 지상 사역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나타내시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사람들 앞에서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그 기도를 듣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감사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있는 나사로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무덤을 보면 부패하여 냄새나는 시체가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하여 모든 영혼을 집중하고 확신에 차서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또한 그가 하실 일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은 그리스도는 스스로 능력을 행하실 수 있으나 이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구하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는 혼자 이루시는 역사가 아니라 아버지께 구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역사입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는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들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았나이다”에서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시는 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공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는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믿고 그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고 이를 통해 부활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들은 막연한 미래의 부활과 내세를 믿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죽음에 지배당하고 슬퍼하는 인생을 그칠 것입니다. 장차 몸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의 매이지 않고 더 이상 죽음 권세에 짖눌려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3절은 나사로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속삭이지 않으셨습니다. 엄중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본래 가졌던 권위의 외침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는데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고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는 아마천으로 감쌌습니다. 보통 시체를 넓은 아마천 위에 누이고 그 천을 머리를 덮어서 다시 발끝까지 감쌌습니다. 그리고 발목을 묶고 팔 부분에서 아마천으로 몸을 묶었으며, 얼굴은 또 다른 천으로 감쌌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도 똑같은 방식으로 장사되었을 것입니다다(19:40; 20:5,7). 아마 나사로는 팔도 묶여 있고 발도 묶여 있기에 걷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천천히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죽은 자가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습니다(5:25; 5:28-29).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은 놀라운 광경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기적의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했습니다(12:9,17). 나사로와 예수님의 부활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중요한 다른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죽지 않으시고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지만 똑같은 육체의 몸으로 살아난 반면 예수님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고전 15:6) 굳게 잠긴 문을 통과하셨다(20:19).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보이셨고(눅24:13-35), 저 멀리 북쪽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21:1-14).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증명하셨습니다(20:27). 나사로의 부활은 장차 있게 될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기적 중 최대의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 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14:6). 나인 성의 과부를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확실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부활의 주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무덤에 있는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들의 뼈가루가 흙이 되어 있을지라도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온전히 다시 살리실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고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살전 4:16; 고전 15:51-53).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막연하게 믿기 쉽습니다. 주로 현세적인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내세에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는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부활의 과정과 교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전혀 새로운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 우리가 소망을 두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 소망을 상실하고 어느 틈에 세상에 매여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머리를 쳐박고 살아갑니다. 현실의 유익을 좇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금도 손해보지 않고자 합니다. 내 앞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마음으로 눈 앞에 있는 현실이 가장 급하다고 생각하고 위에 계신 우리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에 울고 웃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성경의 증언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사는 자들이요 성령의 내주하심과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이 우리 내면에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 즉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체념신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인생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어 있고 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땅의 모든 것은 하늘 나라와 연결하여 의미와 가치가 부여하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이 모든 좋은 것이 지나가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나이가 들면 부활의 영광이 그만큼 가까워 오기에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한 공회(45-57)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요한은 사람들이 마리아에게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마리아에 대한 애정이 더 크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들의 믿음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 달랐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의 지도부들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들은 이 기적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 어떤 사람은 믿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두 종류의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강요에 의하거나 분위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면 모든 사람이 다 믿기를 희망합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하면 모든 학생이 다 믿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납니다(요 1:13).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허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으면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었고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락이 안되자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나사로를 다시 땅으로 보내어 자기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가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의 비유가 정확하게 나사로의 부활의 사건을 목격하고도 믿지 않는 부류를 가리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큰 표적이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이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그 어떤 놀라운 표적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한 자들입니다.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의 소문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퍼져갔고 예루살렘 산헤드린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산헤드린은 이 문제를 가지고 의논을 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제사장 그룹형성하는 사두개인들이 다수였고 대부분이 서기관인 바리새인들은 소수였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였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세 번째 작은 그룹은 장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절충적인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었던 귀족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대중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종교적 입지가 위축되고 영향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더 많은 기적을 베풀수록 그의 인기는 점점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전략은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예수님이 그들의 영향력을 다 흡수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내적으로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공적으로 예수님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도록 표적을 요구했었습니다(2:18; 6:30;마 12:38).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는데도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과의 종교적 세력 확장의 경쟁 뿐만 아니라 로마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진압할 것입니다. “우리 땅”(48)은 NIV 2011에서는 our temple, NET Bible에서는 our santuary, KJV와 ESV에서는 our place로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합니다. 로마 황제 외에 이스라엘 민중들이 세운 새로운 왕이 있다면 이스라엘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성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땅”, 즉 “우리의 장소(our place)”라고 한 것을 보면 이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권위의 위치를 언급한 것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잃지 않을까 하여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오면 백성들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대제사장 가야바는 A.D. 18-36년 동안 산헤드린의 수장이었습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대제사장으로 재직했던 사람이 가야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가끔 소요 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가야바의 장인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정치, 경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종신직인 대제사장직을 1년마다 재임명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대제상직에서 물러나서 아들 다섯에게 대제사장으로 세웠고 이제는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내세워 계속해서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는 말로 기록한 것입니다. 가야바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나란히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가야바는 매우 정치적이었고 희생이 필요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희생당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야바는 회의에서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며 무식한 사람이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는 모욕적인 언행을 함부로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부활의 기적의 소문이 이대로 퍼지다가는 로마에 의해 자기의 지위를 잃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자 결심하였고 동료 공회원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절차를 밟기를 주저하는 다른 동료들에 대해 참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필요한 희생임을을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으심은 말 그대로 정확하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안녕과 평안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이었습니다.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정죄를 받고 구원을 얻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염려대로 로마군이 A.D. 66-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하였고 성전까지 완전히 파괴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한은 51절에서 대제사장의 말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해석합니다. 요한은 가야바의 말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는 가야바의 말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가야바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말한 것입니다. 가야바가 그렇게 말하는 동기는 물론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대제사장의 탐욕을 이용하고 계셨습니다. 가야바는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산헤드린에서 나온 언급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로마인들은 결국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심판했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가야바는 실제로 그렇게 될 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죽으실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원대하고 놀라운 구원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구원역사는 예루살렘과 유대인 뿐만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까지도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52). 유대인에게 이 말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이 여기서 언급한 것은 분명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10:16의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라는 말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회의의 결과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반대해왔는데 드디어 공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요한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가야바와 산헤드린 앞에서의 예수님을 재판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고(마 26:57-68; 막 14:53-65; 눅 22:66-71),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가 막후 실세로서 사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만을 기록했습니다(요 18:19-24).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공회의 공개적 입장이 밝혀진 시점에서 예수님은 신중한 정치적 행보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해진 날이 오기까지 대중적인 인물이 되어 더 이상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셨습니다. 그 곳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2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곳이었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가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기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 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왔습니다. 이번 유월절은 특별한 유월절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절기에 참여하기 전에 일주일 동안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민 9:6-14).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어도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절기가 시작되기 적어도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12:9).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종교 당국의 의도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쑥덕이고 있었을 것입니다(11:57).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들의 대결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공생애 사역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는 표적을 보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거의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왕으로서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너무나 무력하게 체포되시고 심문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충동질을 받고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데 합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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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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