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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1-27)

포도나무와 포도원 비유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비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비유되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자의 포도나무 비유는 열매를 맺는 삶의 비결과 축복에 대한 메시지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열매 맺는 인생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내적, 외적으로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의미 있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주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함으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으셔서 사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15장 후반부는 제자와 세상과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할 고난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고 세상에 대해 복음을 전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주인공들임을 암시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1-6)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안에”라는 말을 이욯아여 상호내재적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14:10[2회], 11[2회], 20[3회]). 15장에서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1절과 5절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아버지를 농부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곳에서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로 비유하였습니다(시 80:9-16; 사 5:1-7; 27:2; 렘 2:21; 12:10; 겔 15:1-8; 17:1-21; 19:10-14; 호 10:1-2). 예수님도 이스라엘에 대해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묘사하셨습니다(마 20:1-16; 21:23-41; 막 12:1-9; 눅 13:6-9; 20:9-16).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었습니다. 마카비 시대의 화폐에는 포도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도나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포도열매는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6:3; 31:20). 모세가 12 족장들을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내었을 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민 13:23).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대해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민 14:7-8). 이를 볼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포도나무 열매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은 포도나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포도나무 열매는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의 특징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는 다른 포도나무 비유와 달리 예수님이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제자들은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참포도나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말해줍니다. “참포도나무”와 대조되는 것은 야생 포도나무입니다. 야생 포도나무의 열매는 작고 볼품이 없고 단 맛이 없고 맛이 시기만 합니다. 그러나 참포도나무의 열매는 극상품 포도로 그 달기가 꿀과 같고 그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달콤하고 향기롭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겉은 포도나무 덩굴처럼 생겼지만 전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포도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생명의 진액을 공급해 주시는 “참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농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포도원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사 5:1-2).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우리의 책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날씨와 햇볕을 주시고 병충해에 해를 입지 않도록 완벽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인색하고 까다롭고 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마 25:24).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2절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라고 함으로 예수님을 믿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지를 제거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5절에 의하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께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2절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열매 맺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고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 정말 붙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예수님께 속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겉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훈련을 통해 도덕적으로 그럴듯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형식적인 신앙 고백을 통해 크리스천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노력과 의지로 맺은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도 세상적으로 좋은 타이틀과 명예와 부를 거머쥠으로 사람들로부터 성공한 사람이고 열매 맺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공을 내세워 외적인 열매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열매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러워하는 세상의 성공의 열매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썩을 양식”이고(요 6:27)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이며(약 4:14) 곧 말라 떨어질 “풀의 꽃”과 같습니다(벧전 1:24).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매에 관한 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과 함께 교회 안에 섞여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예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영향을 주지 않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드러내시고 분리하십니다. 

반면에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영어로 pruning으로 ‘가지를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에서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농부는 가지치기를 합니다. 이는 영양분의 분산을 막고 열매를 맺는 가지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포도나무 줄기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농부의 목적은 상품적 가치가 있는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깝지만 과감하게 가지를 쳐내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고난과 훈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고 훈련하십니다. 고난과 훈련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시 119:71). 고난은 용광로와 같아서 우리의 내면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화되어 순금과 같은 믿음이 나오게 합니다(욥 23:10). 우리가 순수하게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쾌락과 이기심과 자기 만족의 가지를 뻗칩니다.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칠 때 영양분이 분산되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 가지를 치시고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6-10은 훈련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여기서 “징계”는 잘못한 것에 대해 벌을 주는 부정적 개념보다 discipline으로 ‘훈육하다, 훈련하다’는 말입니다. 운동선수는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감당합니다. 권투 선수는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먹고 싶은 음식을 절제하며 자기를 통제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고전 9:25).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지 않는다면 부모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부모의 훈육을 받습니다. 만일 부모의 훈육이 없다면 그는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훈육하여도 공경하는데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은 그의 크신 뜻 가운데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당장은 훈련이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정하심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정하심은 하나님의 훈련의 사랑이고 그것은 우리가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잠시 동안 슬픔과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인해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기도 하고 채찍질도 당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 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12-14).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떠나심은 고난을 의미했지만 이는 그들이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3절에 예수님은 그들이 깨끗하게 된 것이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3절은 하나님의 말씀과 깨끗함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불순물이 걸러지고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9:9은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디모데후서 3:15-17은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우리를 순수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나의 죄로 얼룩진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는 나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나의 진정한 모습은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진정한 자아발견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모습’입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과 영생의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고 나의 잘못을 책망하며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살면서 어긋나가는 것을 막아 주고 하나님의 의로우심 가운데 성장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7). 즉 우리의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해주며 선을 행할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갈 5:22-2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의 ‘전정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뻗어나온 가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정하며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 예수님과 제자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하다”는 말은 ‘거하다(abide)’, ‘남아 있다(remain)’는 뜻입니다. 즉 어디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기웃거리지 말고 예수님 안에 남아 있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는데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시고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14:16). 여기서 “함께 있다”는 말은 KJV에서는 abide로 ‘거하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14:16에서는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15:4에서는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와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a person in Christ)’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고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삶에 적용하는 삶을 말합니다. 나의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즐거워 하는 삶입니다. 신앙 생활을 의무감으로 하지 않고 성령과 더불어 춤을 추듯 기뻐하는 삶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절박한 것입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없습니다. 가지는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에 붙어 있겠다는 각오와 실천입니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붙어 있겠다는 목숨을 건 각오로 갖게 합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다시 한 번 1절의 ‘나는 …이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와의 관계는 상호내재적인 관계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은 14장에 이어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14:10, 11, 17, 20).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15장에서는 ‘열매’라는 단어가 10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2[3회], 4, 5, 8, 16[2]). 이는 열매 맺는 인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열매 맺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 구절은 인간은 한마디로 ‘열매 맺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신약적으로 적용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많이 낳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명은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살리고 예수님의 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행 5:20; 요 21:15).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말씀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막 16:15). “다스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게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열심히 일하는 사명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것을 외적인 것만 생각할 수 있는데 내적인 열매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5-9). 베드로가 언급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삶에서 얻게 되는 내적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덧붙여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 삶이 되도록 권면했습니다. 베드로가 의미하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가운데에서 구원하셨는가’ 하는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붙드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어떤 가운데에서 구원하셨는가를 기억하고 ‘한 가지 아는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요 9:25).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그에게 주신 명령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막 5:19).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나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나에게 행하신 큰 일’이고 ‘나를 불쌍히 여긴 일’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는 복음 중의 핵심이며 신자가 굳게 붙들어야 할 영원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후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떠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기 능력과 의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을 등한시하고 영적으로 타락하는 삶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세상으로 가지를 뻗치는 삶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한 삶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지만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큰 일’을 잊고 자신이 잘해서 잘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인생에 평안이 찾아올 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여년 간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신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열 재앙으로 애굽을 치시고 홍해를 갈라지는 이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 40년 간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나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시고 밤의 추위를 녹일 수 있도록 불기둥으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에 정주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곳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주변 나라를 통해 훈련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문제가 해결된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그 안에 거하지 않고 분리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줄기에서 공급되는 생명의 진액, 은혜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6절의 말씀처럼 줄기에서 떠난 가지는 그 내면이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지 않고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빈 손으로 주께 돌아오면서 고백할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찬송가 280장)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6절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할 때 그 결과 어떠한지 말해 줍니다. 여기서 제자들을 의미하는 “너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론을 말씀하시는 것을 말해줍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예수님이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예수님을 떠나 살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양을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알며 그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그들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확언하셨습니다(요 10:27-28).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과 섭리를 믿을 때 우리는 안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 없이 살 수 없고 생명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붙들지 않으시면 예수님의 양인 신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사람”을 언급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의 결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와 그를 따르지 않는 자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를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지 못함으로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듯이 그들은 장차 올 불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기준이요 구원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대조법을 통해 강조하셨습니다.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함(7-12)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을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도록 하라”는 말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잔가지들을 제거해주고 전정하여 줍니다. 우리의 삶을 전정하는 가위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7절에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통해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입니다. 시편 1:1-3은 말씀을 붙드는 삶의 축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말씀을 붙드는 삶은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딱딱하고 꽉 막힌 삶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우리에게 두렵게 하고 정죄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트레스가 아니라 기쁨과 쉼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의 때에 희망을 주고, 슬픔의 때에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황하는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길을 제시해주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정돈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중요성과 함께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 말씀과 기도의 수레바퀴 두 개가 떠받칠 때 균형잡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치우치고 기도를 등한시 하는 신앙은 지식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기도에 치우치고 말씀을 등한시 하는 신앙은 분별력 없는 자기 열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이 두 바퀴가 균형적으로 떠받칠 때 신앙이라는 수레는 잘 굴러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어린 아이가 떼 쓰듯 무조건 달라는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구할 때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찬양곡 가사). 하나님은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의 뜻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과 위로하심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열매는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 1:31). 이 말씀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의 백미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가장 나중에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거룩함의 성품, 창조의 성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맡기시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피조 세계가 아무리 아름답고 조화롭다고 하더라도 최고의 걸작인 인간이 빠진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사탄의 유혹을 받아 계명을 어겼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분리되고 죄와 죽음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보내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옛것이 지나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롬 6: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마 5:14). 이는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사람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마 5:1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내적, 외적으로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는 열매로 제자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죄악의 열매를 맺거나 들포도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제자는 제자로서의 탁월성과 차별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자와 제자를 구분합니다. 제자는 급이 높고 신자는 급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잘못된 구분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 당연히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입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신자와 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요 교인은 교회를 다니는 자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신자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예수님과 연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내외적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삶을 사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끼치게 되고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인줄 압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3:1). 예수님은 종의 모습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13:4-5).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실 수 있었던 동기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넓은 사랑을 풍성히 받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랑하실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미움과 혐오를 꾹 누르고 관용과 배려와 인간애를 베풀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젖은 수건을 짜내는 것과 같이 억지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의 사랑이 차고 넘쳐 흐르게 됩니다. 사랑을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못 박은 군인들과 자기를 배척한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십자가 형 집행의 책임자였던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눅 23:47). 스데반도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행 7:60).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7).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7).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8). 예수님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확대하여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 1-8절까지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하나님의 관계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사랑으로 연합한 관계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수평적으로 다른 제자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신자의 숙제입니다. 서로 사랑은 죄악된 인간이 실천하기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갈등과 분열을 많이 목격할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자기와 취향과 성격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고 하나가 되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람에 감화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해놓고 서로 미워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고 섬겨주고 축복해주고 베풀고 사랑과 선행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히 10:24).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0절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순종이 참된 제자됨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불순종하고 있다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유일한 길은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본은 그분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과 순종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행동,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반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반응하면, 사랑은 더 깊어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반응이 있을 때, 사랑은 더 깊고 풍성하고 진실하게 자라며 결국 영광스러운 체험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다가오고 있는 사랑에 반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반응함으로 그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며, 날마다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며, 그 순종조차도 율법주의가 아닌 사랑에서 동기를 얻습니다.

순종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의존적인 관계입니다.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 이를 볼 때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관계성을 맺는 방식대로, 믿는 자들도 예수님과 관계성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치가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재현되기를 원하십니다(요 14:23, 17장).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거하도록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기쁨이 그들 안에 있어 그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여기서 기쁨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라고 하셨고 그 기쁨이 “너희 기쁨”이 되어 충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의 기쁨은 일시적이고 찰나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근원적이고 영속적인 기쁨으로 그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1:4). 그는 이 기쁨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4:14). 예수님은 초막절에서 무리들에게 이 기쁨을 “생수의 강”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 생수의 강은 믿는 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셨습니다(7:38). 요한은 “생수의 강”을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코멘트하였습니다(7:39). 현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여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보혜사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기쁨은 또한 ‘서로 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연합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사이에 서로 사랑함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성도 간에 서로 갈등할 때입니다. 갈등이 심화되어 분열을 겪을 때 뼈를 깍는 고통을 느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징되는 교회가 찢어지는 것이기에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조그마한 미운 마음이 마음 한 구석을 자리잡고 있을 때 그 기쁨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교제를 누리는 것과 같이 성도 사이의 믿음의 교제를 누릴 때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은 거룩한 것으로 우리는 이 계명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좋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하위 개념으로 생각하여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마 22:37). 신학적 교리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교리에 얽매여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등한시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예의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상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마음 편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구약에도 언급하고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마지막으로 주신 계명이라는 점에서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으로 주신 것은 우리가 등한시 하기 쉽다는 점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만찬 자리에서도 서로 “누가 크냐”로 경쟁하였습니다. 경쟁과 갈등, 분열과 미움, 무시와 차별은 인간이 갖고 있는 죄악된 속성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이 계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계명을 완성하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친구로 삼으심(13-15)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이제부터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친구의 관계로 발전시키십니다. 15장 첫머리에서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제는 이에 더 발전하여 친구의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친구를 분류하면 일반적인 친구, 가까운 친구, 친밀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제자의 관계는 친밀한 친구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으셨던 것은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갖고 계셨기때문입니다(10:17).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6:39,40,44,54). 제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안에 거하는 신자는 더 깊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종과 친구의 차이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주인은 종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왜 시키는지 물어보면 그것은 큰 결례입니다. 그러나 친구는 서로 중요한 문제를 의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그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그들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가리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내 종 선지자(들)”라고 부르셨습니다(렘 7:25; 25:4; 29:19).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믿음의 사람과 공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하심을 붙들고 심판의 기준을 ‘흥정’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에서 10명으로 조금씩 깍아내려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고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받았습니다. 모세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께 자기 백성들을 사해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롭게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2:10).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시도록 중보자의 입장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예 회막을 짓고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출 33:11).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사악한 바벨론을 통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한 인간이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박국의 호소를 받아 주시고 그에게 바벨론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박국에 나타난 하나님과 하박국의 관계는 마치 친구처럼 대화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하실 때 혼자서 다 알아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부르셔서 동역자로 삼으시고 같이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그들과 동역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는 ‘비밀을 털어 놓는 사이’입니다. 이는 “그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확장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의 의논의 대상자이며 구원역사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에 예수님의 친구가 된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고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아져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분리되어 메마르고 외롭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부를 소유하고 권력을 갖고 세상의 쾌락을 다 즐긴다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죽을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사람 사이에서도 분리되어 살아갑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할 말과 못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많다고 하지만 그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그칩니다. 친구가 친구의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위로와 동정을 줄 수는 있지만 죄 사함과 영생과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사랑이 메마르고 있습니다.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마 24:12). 이는 이기심의 죄악 때문이고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져서 반려동물을 친구 삼아 살아갑니다. 세리 레위는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돈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자 친구를 잃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친구요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그의 이기적인 삶으로 외로워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가 다가가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피했습니다. 그는 등 뒤에서 자기를 욕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눅 19:5).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죄인 중의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독생자께서 가장 천하고 낮은 죄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칭함을 받으셨습니다(마 11:19).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들고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나의 친구가 되어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10:14). 예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예수님의 선택과 열매 맺는 삶(16-17)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16-17절에서 다시 한 번 열매 맺는 삶도록 하신 목적과 기도의 삶,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간사함, 신실하지 못함과 교만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말씀이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겪거나 시험에 들 때 영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지금은 은혜를 받아 기쁨이 충만한데 이 은혜를 꾸준히 지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로 자주 넘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 자신이 없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힘들 것 같은 생각에 그냥 ‘신자’로 남고 싶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은 제자로서의 수준 높은 삶이 부담이 되어 ‘천국행 티켓’을 따놓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죄 때문에 구원마저 배제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회의에 빠져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소원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예배에 참석하고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고 내가 선하게 살고 싶어서 제자로 살기로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영적 소원을 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고 제자로 사는 것은 오로지 그의 선택과 부르심에 기초한다는 생각은 갖게 되면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33:2-3은 말합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수 있고 그가 이루시는 큰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연약하여 수없이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권능으로 애굽에 노예 생활했던 자기 백성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이 되셔서 신부가 되는 자기 백성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깨뜨리기를 수없이 하였습니다(렘 31:32). 그들은 언약을 어기고 이방의 가증스러운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렘 31:33-34).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연약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의 기초한 언약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개입될 수 없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과 연약함으로 그의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언약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보내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마 1:2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실 때 공개 선발이라는 방식으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의 자격 요건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막 3:1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이기적인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세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평판에 오점이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은혜로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겠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라고 주권적으로 부르셨습니다(마 9:9).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웠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강조해줍니다. 이사야 43:1-3은 말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모든 위험 가운데에서 보호하시고 섬세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영생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셨으므로 아무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확언하셨습니다(요 10:28-29).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우신 이유는 그들이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1-8절에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열매를 주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열매 맺는 삶의 주제에 대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열매 맺는 데에 제자들의 책임을 강조한 반면, 16절에서는 예수님의 선택의 결과로서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가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고(마 28:19),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 것과 제자들이 감당할 선교 사명의 연관성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열매는 내적 열매가 있고 외적 열매가 있습니다. 내적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고 인격의 열매입니다. 내적 열매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형성되는 성숙함의 열매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할지라도 성숙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열심이 많고 많은 능력을 행하고 많은 지식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성숙한 제자의 인격이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 열매의 정점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그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고전 13:13). 

그런데 이렇게 내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외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만민 구원 역사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지상 명령인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해외 선교사로 나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교는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동심원을 그려가면서 퍼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가 있는 그 장소가 선교지가 되어 생명을 주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불신자나 많은 신자 중에서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전도 받는 것을 배척하고 신자들은 그 배척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특별히 선교의 공격성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주는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죄와 죽음의 문제 앞에서 고통하며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호산나”를 외치듯, 자기를 구원할 메시아, 구원의 주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 받을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끊어진 상태에서 외롭고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하면 그들은 영생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성숙한 인격과 품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들려줌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남은 자’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함으로 우리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앞서 얘기했듯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를 홀로 이루시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그의 비밀한 구원역사를 공유하고 같이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가서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의 부담을 다 떠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열매 맺는 역사도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이루실 역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함으로 우리를 중보자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의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습니다(롬 15:16).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들은 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오병이어로 축사하시고 생명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 사명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에 덧붙여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기도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선교 역사는 놀라운 역동성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한두 번에 행동에 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중보기도가 의례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행동 실천으로 인해 끼치게 될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던진 한 마디 “우리 교회에 한 번 와볼래?”, 아니면 “나랑 같이 성경을 공부해 볼래?”라고 말한 것을 통해 이에 응한 사람이 받을 하늘의 놀라운 축복은 경이로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일회적인 행동은 복음이 씨앗이 뿌려져 저절로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이 이루어지듯 우리의 열매가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아서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막 4:26-27).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감옥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그를 지키고 있는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열매를 맺어 복음이 온 로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행 28:30). 바울은 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였습니다(빌 1:13). 하나님은 나의 열매가 썩고 사라지지 않도록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생명의 씨앗이 우리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싹이 트고 자라고 더 큰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있을 뿐만 아니라 뻗어나가고 증대되는 소망 가운데 선교의 ‘작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기도를 함으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는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각 사람 마음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자입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됨으로 그의 뜻에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생명 구원 역사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하시고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롬 5:8). 우리는 개인적으로 무얼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으며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으로 포도나무의 비유의 말씀의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9절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시작되어 17절까지 “사랑”이라는 말이 9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9[3회], 10절[2회], 12절[2회], 13, 17).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끝을 맺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열매 맺는 풍성한 삶이 됩니다(4, 5, 8, 16). 열매 맺는 삶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10, 12). “서로 사랑”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고 “서로 사랑”할 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힘이 생기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를 위해 그들이 간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십니다(7, 16). 또한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그들 곁에 계십니다(13-15).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열매, 서로 사랑, 말씀과 기도의 기도가 순환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그 핵심에는 제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우리의 진정한 친구 예수님이 계십니다. 

세상과 제자의 관계(18-25)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거스르고 배척하는 적대적 관계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적대적 관계가 세상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적대적인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요 3:16).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악의 세력으로 보고 적대 감정을 가질 경우 주님께서 부탁하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대적인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들 중 믿는 자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적인 세상관은 세상은 하나님께 적대적이지만 그 중에서 변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셨듯이 제자들도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거나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그들이 영접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설득하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진리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우리 밖에 있는 그들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의 세계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항상 문을 열어놓고 어둠에 있는 자들이 빛의 세계로 들어도록 여지를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제자들을 적대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당연히 겪게 될 고난임을 말씀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7:7). 예수님은 빛이시지만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3:20-21). 빛과 어둠은 통치 영역이 다릅니다. 빛의 나라는 생명이 통치하고 어둠의 나라는 사망이 통치합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불가능한 일을 행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5:24). 

제자들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과 세상은 그들이 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자기 소속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죄를 즐기며 산다면 세상은 그들이 자기와 같이 행동하므로 전혀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라는 말은 ‘세상이 자기와 같이 죄를 짓고 같이 어울리는 자라면 그를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기준으로 살지 않고 말씀이 주는 가치와 원칙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세상과 달라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데 세상과 같이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선택을 받은 자들이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제자들을 세상과 분리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을 악에서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분리의 개념은 세상의 오염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어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가키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심으로 세상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하게 하시고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13-16).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실 때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3). 예수님은 제자들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15:16).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고우월하다”라는 특권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받는다는 특권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 즉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한 특권입니다(마 5:10-11).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격언을 사용하습니다. 이 격언은 예수님께서 여러 번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시고자 하실 때 이 격언을 사용하셨습니다(13:16). 예수님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 다 크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주인이나 보낸 자가 섬긴다고 해서 그 지위가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셔서 섬기셨으니 제자들도 마땅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김으로 낮아지셔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13:14). 예수님은 마태복음 10:24-25에서 선생과 주인과 상전 같으신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으면 그 제자나, 그 집의 종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40에서도 이 격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지만 “무릇 온전하게 된 자”, 즉 스승을 잘 배워 뛰어나게 된 제자는 그 선생과 같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은혜를 베풀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성장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4:13). 이를 볼 때 이 격언은 예수님 시대에 아주 흔히 사용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격언을 가르침의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인이고 제자들은 주인의 종입니다. 사람들이 주인을 박해하면 그 집의 종들도 당연히 똑같은 취급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신 것처럼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현상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은즉 제자들의 말도 지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반응이 부정적 반응과 긍정적 반응으로 나뉘어지듯 제자들에 대한 반응도 둘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반응이 다수를 이룰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롬 11:1-12).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마 7:13-14). 이 “남은 자”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준비하신 자들입니다(롬 11:5).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그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세력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희망을 두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지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다수가 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때는 한국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양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어 가고 발전할수록 사람들의 영적 소원이 식고 세상의 반응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고 마음이 위축되고 절망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박해하였은즉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있듯 제자들의 말을 듣고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가운데 제자들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씀을 하시고 나서 다시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순종하는 자들의 박해를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예수님을 보내신 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1). 박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대한 무지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듣고 압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다고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알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다분히 고의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전인격적으로 그를 안다면 그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고 순종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불순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배척하는 것이고 그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고 완악하게 굴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하는 일을 보고 믿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앓아온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그의 능력의 절정을 보이셨습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기적을 보이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때 그들의 무지는 용서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에게 죄를 추궁할만큼 무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은 과연 그들의 무지와 배척이 용서가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아 말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여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선언합니다(롬 1:20). 오히려 무지몽매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합니다(롬 1:19-21).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사람이 이를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를 찾게 됩니다. 복음은 바로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서 분리되어 죽어가고 있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복음은 그 죄의 수렁에서 건져주실 구주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를 통하여 이 복음을 전함으로 지금도 영적으로 무지한 자를 깨우쳐 주십니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복음 전도지, 각종 기독교 방송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수많은 주제를 다루는 기독교 서적들, 그리스도인을 통해 전해지는 교회로 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장 등 그를 알만한 것들이 보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할 건더기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결국 자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깁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자기 자신을 내맡김으로 타락한 삶을 살아갑니다(롬 1:21-24).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또 다른 이유를 성경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35:19).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 “율법”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이 두 시편은 다윗에 대적에게 쫓겨다니며 그의 억울함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메시아의 모형으로 그가 당한 고난은 곧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듯이 제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이 고난은 제자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주권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박해는 소속이 다른 것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그의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의 선지자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이 겪은 바입니다. 

보혜사와 제자의 증언(26-27)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26-27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제자들에게 보낼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하셨다가 다시 보혜사의 오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15장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는 16장에서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시키기 위한 도입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라는 구절입니다. 성령님을 보내는 주체는 성자 예수님이시고 그 근원은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오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자로부터 출원한다고 선언하였고, 동방교회는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 출원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절은 삼위일체의 성격이 주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증언의 두 주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증언이고 하나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1:1의 “태초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시작부터를 의미합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던 날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늘 같이 있으면서 예수님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증언할 차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혼자서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성령님은 제자들과 함께 같은 복음을 전하는 대리자이십니다. 제자들이 없는 곳에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과 별도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없는 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함께 계신 분, 조력자이십니다. 성령님은 혼자서 나서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십니다. 예수님은 떠나심을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 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선교 명령을 주셨습니다.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며 어떻게 “그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 이는 성령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시고 제자들은 이에 동역하여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의 열심으로 이를 이루십니다(사 9:7; 사 37:32).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한 증인들입니다. 좁게는 사도의 자격을 의미합니다(행 1:22). 그러나 넓게는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고 영접한 자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그가 체험한 예수님, 성경을 통해 가르침받은 말씀을 전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합니다. 16장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을 자세하게 나열하였듯이 사명을 주신 예수님께 단순하게 순종할 때 성령께서 친히 듣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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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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