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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종합, 성경 구절 묵상, 현대적 적용 주석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요한복음 14:1-31)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주옥과 같은 말씀을 쏟아내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우리의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가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근심에 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기 위해 믿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1). 예수님이 떠나시는 목적은 “거처”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거처”라는 주제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표현으로 발전합니다(20). 이 표현은 다시 한 번 “거처를 함께 하리라”는 말씀으로 반복됩니다(23). 14장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배타적으로 들리나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방황의 종지부를 찍는 유명한 선언을 하셨습니다(6).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질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9). 가룟인 아닌 유다의 질문에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떠나심과 그가 다시 오심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22-23). 14장의 주제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랑과 계명의 관계, 보혜사 성령님의 오심과 축복의 순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4장을 읽으면 순환적 구조로 인해 지루함을 느끼게 하시만 순환이 진전됨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심(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절의 배경은 13:36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라는 말씀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신다고 하자 고아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많이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같이 계실 때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제자들은 많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오래 동안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충성 맹세를 한 후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3:37). 이러니 그들은 마음에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심하다”는 말은 원어로 ‘뒤흔들리다’, ‘요동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물에 빠져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같은 동요를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그만큼 제자들을 크게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12:27). 예수님의 괴로움은 제자들의 괴로움과 비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은 고문을 당하는 괴로움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괴로움을 알고 예수님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신뢰하다’, ‘맡기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어린 아이가 그 부모를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맡기듯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근심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지나치게 의존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예수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와 땅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의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오실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예언대로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배척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허물과 죄로 상함을 입고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구원 역사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겪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마음에 상함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을 가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 그들의 믿음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그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떠나십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던 주님, 그들의 손으로 만졌던 주님은 더 이상 육신으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요일 1:1). 이제는 그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손으로 만져 보지 못하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더이상 친히 길을 인도하시지 못하지만 떠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권능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협력하여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시고 환난 날에 나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과 시험이 아무리 크고 힘들다 하더라도, 내가 오해 받고 다른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도, 사탄이 으르렁대고 나를 위협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절대주권을 신뢰하고, 그의 무한한 지혜를 믿어야 하며, 변하지 않는 신실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고, 다시 오셔서 우리들을 그에게로 영접할 것과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를 보지 못하였지만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됩니다(벧전 1:8).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가시겠다고 하시는 곳은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언급한 곳은 세 곳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된 것을 보시고는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5-16). 여기서 “내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그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언급하신 “아버지의 집”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아버지의 집”은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내 아버지의 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심으로 돌아가실 집을 말합니다. 이 곳은 예수님이 먼저 가시고 장차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영접할 곳입니다. 이 집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거주할 집을 말합니다. 이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영원히 함께 거하는 낙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시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거할 곳”은 KJV에서는 mansion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맨션’은 언덕 위에 큰 집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따르면 이 땅과 내세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는 서구적인 경제적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 고난을 많이 받으면 우리가 누릴 부와 권세를 풍성히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할 곳”은 ‘언덕 위의 대저택’이라기 보다는 방(rooms;ESV, NIV)이나 거하는 곳(dwelling places; NASB, NRSV)을 말합니다. 이는 여러 식구가 한 지붕 아래 사는 동양적인 거주 개념을 강조한 것입니다. “거할 곳”은 우리 주님의 임재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집의 넓은 공간에서 풍요롭게 살 것에 대한 생각에 초점을 두기보다 사랑하는 예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서 풍요롭게 살아도 교제가 없는 외딴 곳에 산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반면 넓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과 함께 거하며 여러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산다면 그것은 행복의 극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다면 그들에게 일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성경은 이를 의문문으로 번역했습니다(ESV, NIV). 공동성경도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질문 형식은 제자들의 미래의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할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건축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한 집은 지금도 짓고 계신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예수님은 본래의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역사의 완성을 통해 주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엡 2:14).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히 4:16).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실 구원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고 하십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 구원역사를 완성하신 후 그가 다시 와서 믿는 자들을 그에게로 영접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가장 가까운 사건으로는 부활 이후에 예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을 의미합니다(20:19-29).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격으로 오신 사건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말합니다(14:15-21; 행 2장).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해 재림하실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신약성경 곳곳에서 우리 주님이 약속하신 바이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서신의 저자들이 강조한 바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위해 떠나십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가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셔서 그의 제자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합니다(살전 4:17). 그런데 종말에 관한 주제는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6), 다른 보혜사를 그들에게 주셔서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 또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것인데,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19). 더 나아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19). 이를 볼 때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는 말씀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흐름상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의 처소와 방들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구속사적 측면에서 볼 때 열한 제자가 아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것이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길, 진리, 생명되심을 선포하심(4-6)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완료형으로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그의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습니다(골 2:9). 제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1:14). 그들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 외에 길이 없음을 알았습니다(6:68).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시는데 그 방법이 십자가와 부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땅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의문을 제기한 제자는 도마였습니다. 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이 땅의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역사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에 관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역사의 완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쟁이의 대명사로 생각합니다. 도마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로드맵을 원한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집과 거처에 대한 비유를 여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반면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누리게 될 교제의 행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실 영원한 생명을 암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규범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면서 영생의 길을 물었습니다(마 19:16).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눅 10:27). 또한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가리켜 예언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기초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역사를 시작하시고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이루신 분이시고 신약의 시대를 여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길을 묻고 있는 도마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이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마의 엉뚱한 질문은 7:33-35에 나오는 무리들의 반응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모인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라고 반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신다는 것을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셨습니다(7:33-36). 우리는 도마의 질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과 도마가 의미하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의미하는 “생명의 떡”과 무리들이 요구하는 “썩을 양식”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6:27,35).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지만 무리들은 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하신다고 여겼습니다(6:52; 6:54-58). 제자들이 생각했던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미했던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은 예수님 그 자체이고 그들이 할 일은 ‘믿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6:28-29).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길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계된 것으로 이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길을 묻는 도마에게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이 놀라운 진리의 선포의 말씀을 듣게 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라는 선포를 사용하여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선포가 7번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낼 때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여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4:6은 여섯 번째 선포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선포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입니다. 여섯 번째 선포에서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이라는 세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길”은 목적지가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종교가 길을 제시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하고, 성지인 메카를 한 번은 방문해야 합니다. 또한 이슬람 확장을 위해 싸워 순교하는 자는 천국행 직행열차를 타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는 천국에서 산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해야 합니다. 불교도 또한 인간의 선행과 개인의 참선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이처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착한 행위나 종교적 열심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말합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6:29). 인간이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너지 못할 깊고 큰 절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하였습니다(롬 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원어의 의미로 ‘부족하다, 모자라다, 못미친다’라는 뜻이다. 인간의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탁월하고 놀랍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족’합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길을 만드셨는데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3:16). 우리가 구원을 얻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죄의 계곡이 생겼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켰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높은 수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는 다리를 놓으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6). 중보자가 되려면 중보자가 완전한 하나님이 되셔야 하고 한편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양쪽을 다 만족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셨으므로 인간의 죄의 피를 물려받지 않으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십니다(히 4:15).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을 위한 완전하고도 영원한 대속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의 피로 인간의 모든 죄를 한번에 영원히 다 속죄하실 수 있습니다(1:29; 히 9:12).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엡 2:14-16). 

예수님은 길이실 뿐만 아니라 진리이십니다. 길은 방향과 경로의 개념이지만 진리는 우리의 실제 삶의 지침과 교훈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유행이 변하듯이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성이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실제의 삶의 변화를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구원을 갈망하고 있으며 그 죄의 결과로 사람은 죽습니다. 이 사실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고 죽음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처럼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의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과 영생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의 진리를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유행은 달라지지만 진리는 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성경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은 나의 실제 삶과 괴리가 있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고리타분한 경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 있어 꿈틀거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8:32). 진리가 주는 자유는 영혼의 자유, 내면으로부터의 자유, 죄와 죽음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8:34-36). 진리는 거짓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거짓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8:44-47). 진리는 우리의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며 교훈을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세계관과 무엇이 중요하고 참된 것인가에 관한 가치관을 갖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5-17).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 사상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 4:12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님은 생명이 되십니다.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얻는 결과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생은 원어로 ‘조에’로 살아 있거나 활력이 있는 상태로 특히 건강함, 행복, 윤택, 열정, 활기 등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꽃병의 꽃과 같은 일시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생명 나무를 없애지 않으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이는 하나님께서 영생의 소망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생을 상실하고 주리고 목마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불행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과 다른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만족줄 것을 찾아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샘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예수님이 아니고는 이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1:4).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악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5:26-29). 예수님 안에는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11:25-26).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때가 되면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다시 오셔서 죽은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고전 15:42-45). 예수님의 생명은 이 세상을 살 동안 우리를 만족시키고 기쁨을 주며 삶의 의미를 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무덤을 이기게 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살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예수님은 영생은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영생이 하나님과의 교제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서는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에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목적은 거처를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교제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을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시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계하셨습니다(눅 12:15). 인간은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믿는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은 소유가 아닌 존재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풍성한 물질을 소유한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누리는 자가 행복합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롬 5: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에서 화평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대속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소유 지향에서 관계 지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유가 아닌 영적인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배타적인 느낌을 줍니다. 조금의 융통성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플러스 알파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99%에 우리의 노력 1%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1%의 노력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노예는 아무리 능력이 많고 부자라고 해도 자기 스스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가 벌어들이는 돈은 전부 주인의 것이고 그가 아무리 주인에게 잘해도 주인은 결코 그에게 자유인 신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이 그의 주인에게 속전을 지불하고 그를 사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가 해방되었다면 이는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산 새로운 주인의 은혜 때문입니다.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노예는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그래도 선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구원의 길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꿈꾸는 세상은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신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며 종교 간 연합을 이루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수많은 길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복음의 절대성과 우월성과 유일성은 사라지게 되고 복음은 힘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됩니다. 종교 간 연합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럴 듯하고 새로워보이지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길로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탁월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배타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고 영원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이 있으며 구원을 주는 능력과 믿는 자의 실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딤전 2:5-6).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분명하게 전했습니다(행 4:12).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는 신실한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7-11)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하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은 공통적으로 if를 사용하여 조건절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문맥상으로 보면 since(…하기 때문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영생의 말씀”으로 알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믿었습니다(6:68-69).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1:1-3에부터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셨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낮아져 오셨습니다(1:14).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그의 모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1:18).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재확인하셨습니다(5:18).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10:30).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영어 번역에서는 From now on you do know him and have seen him(NIV; ESV; NRSV)으로 강조의 do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이라는 용어는 강조를 나타내는 do와 연결되어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버지는 ‘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실 하나님을 보는 것에 해당합니다. “보았느니라”는 말은 완료형으로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you는 ‘너희들’이라는 복수로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에게 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나타냅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그후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계시가 분명해지면서부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것은 이미 하나님을 안 것이고 하나님을 안 것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영생과 관계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17:3).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볼 수 있습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고백한 것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보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은 초보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줄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장차 알게 될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을 현재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어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본 것으로 여기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모호한 답이 아닌 그를 만족시킬 분명한 계시를 요구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질문은 인내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과 같은 기적적인 체험으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찌기 시내 산에서 조상들에게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가 임하는 것과 같이 영광 중에 임하는 것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출 20:19-21). 모세도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출 33:18). 그러나 빌립의 요구는 매우 위험한 요구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출 33:20). 빌립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수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또한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적 권위에 이끌려 제자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디론가 멀리 가시면 붙잡아야 할 뭔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요구는 그들의 불안심리를 반영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현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계시인 성경을 외면하고 뭔가 충격적인 방법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의 불신과 조급함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고, 충분히, 최종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으로 충분히 계시하셨고 더 이상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잘 아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빌립에게 다시 한번 7절의 말씀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길을 묻는 도마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이나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누군지 이해하지 못해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해야 믿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해하고 눈에 보이는 확증이 있어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같이 하여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바라는 것’은 미래적인데 믿음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현재의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적인 비밀들입니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계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였다는 것은 영광중에 영광이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출 33:20). 그런데 제자들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오랫동안 보고 만지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만진 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내재적 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10:38; 14:11; 14:20; 15:10; 17:21; 17:23). 예수님은 이 관계를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에도 적용하셨습니다(6:56; 14:20; 15:4-5; 15:7; 15:10; 17:21; 17:23; 17:26). 예수님은 이 관계를 세 번이나 의문문 형식으로 말씀하심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세 번의 의문문 형식으로 강조해서 하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그들의 더디 이해하는 것에 대해 답답한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제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영적인 눈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움이 느리고 더디 믿는 자들이었습니다(눅 24:25). 그렇다고 우리는 과연 영적인 이해가 빠른 자들입니까? 우리가 제자들의 입장이라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는 on my own authority(NIV)로  ‘나 자신의 권위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연합의 관계로 그 본질상 절대적으로 동등하십니다. 대리인은 단순히 순종하는 종의 존재나 주인의 대사로 주인을 대표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대리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셨지만, 그 역할만을 수행하는 대사 그 이상이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상호 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8). 하나님이 이런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으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내적인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믿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음으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행한 기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속을 이루시고 부활로 죽음 권세를 파하심으로 이룬 구원 역사를 예표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이 되심을 예표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여 이 일을 행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은 그 하나하나에 그가 어떤 분이심을 나타내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때나 능력을 행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실 때 그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을 이적이라고 하지만 특별히 ‘표적’(miraculous sign)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내재성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 믿을 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떠나실 때 제자들이 할 일(12-15)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제자들의 현재 형편을 생각할 때 그들은 혼란과 슬픔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론가 떠나신다고 하니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미래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물었습니다.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질문과 요구는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 그들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불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의문문 형식으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신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보실 때 답답한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이 예수님이 행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재 모습에 실망하지 않으시고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신하였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하실 하나님의 크신 일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부활 이후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두 제자 뿐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불치병을 고칠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할 것이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칠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사람들이 바울이 만진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들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19:12). 그러나 제자들이 행하는 이적의 역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걷는 것이나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는 것이나 나사로를 살리는 일과 같은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 그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하는 일”과 “그보다 큰 일”은 양적인 측면인 복음의 확산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고자 하시는 비전을 내비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반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사역하셨지만 제자들은 한 평생 사역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서 사역하셨지만 제자들은 세계로 뻗어나가 사역을 할 것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된 오늘날 사역하는 복음의 사역자들은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까지 갈 수 있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공간적인 면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를 놓고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의 목소리가 뒤에 앉은 모든 자에게 다 들렸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품질이 좋은 마이크를 이용하여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각종 현대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명확해졌습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 잘 정돈된 복음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일하시기 위한 도구요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지금도 믿는 자의 내면에 내주하셔서 믿는 자들과 같이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예수님은 고난받는 교회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셔서 일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일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는 소수의 제자 그룹에 불과하셨기에 일하시는 범위와 분량에서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믿는 자들을 통해 “더 큰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일”과 “그보다 큰 일”은 예수님을 믿고 사망의 세계에서 나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생명의 역사를 말합니다. 표적은 단지 주의 사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뒷받침하고 확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본질은 기적이 아닌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 역사입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하시는 일”과 “그보다 큰 일”을 위해서 제자들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에 대해 이 한 구절만 떼어서 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구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을 자판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응답해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단지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모든 기도에 100% 응답해주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응답의 형태가 “그래”, “아니다”, “기다려라”의 세 형태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응답해주시지 않고 예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많이 얻으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여깁니다. 반대로 많이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을 믿음이 약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문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제자들을 육신적으로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가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렇게 ‘잠시의 이별’은 있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본격적으로 그들과 같이 일하고자 하십니다. 그 일은 온 세상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20:31).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기도의 응답을 생명 구원역사와 연관지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 즉 생명 구원 역사는 우리의 능력이나 아이디어, 우리의 열정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없이는 그 어떤 생명 구원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생명 구원 역사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듣기를 원합니다. 또한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하여 사람들로부터 기도의 사람이라고 칭함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영광과 이름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 누구보다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 모든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10). 물론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에도 나와 있습니다(마 6:11). 우리는 개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흐름 속에서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구원 역사의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주님의 기도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의 떠나가심으로 제자들은 기도함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에 특정되어 사용되었습니다(13:34; 14:21; 15:10,12).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계명을 사랑과 연결시켰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예수님은 먼저 10:18에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계명으로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13:1), 십자가를 지시기 마지막까지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13:4-5).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였으므로 계명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과 사랑의 관계는 요한복음 15:12에서도 반복되고 요한일서에서도 반복되어 나옵니다(요일 3:21). 계명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관계,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의 관계, 제자와 제자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입니다(요일 3:18).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제자 곁을 떠나십니다. 그 동안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명대로 같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보혜사에 대한 약속(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떠나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도록 하셨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 그들에게 임할 선물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은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곁에서 격려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 Comforter(위로자; KJV), 대언자(Advocate; NRSV, NIV), 상담자(Counselor; RSV), Helper(조력자; ESV, NASB95)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위로자요, 대언자요, 상담자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셨는데 이제는 성령께서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더 유익이 됩니다(16:17).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공간의 한계에 갇혀 계시지만 보혜사 성령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풍성한 보고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나의 곁에 24시간 함께 계시는 보혜사의 약속은 가장 큰 약속이고 선물입니다. 보혜사라는 이름은 다정다감한 이름입니다. 그 분은 애통하는 자에게 기쁨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낙담한 사람에게는 칭찬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애통의 집이 영원히 닫히고 혼인잔치가 시작될 때까지 그분은 우리를 확실히 위로하실 것입니다(Charles Spurgeon). 

보혜사께서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함께 있다”라는 말은 KJV에서 abide로 ‘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구약 시대에 성막에 임재하셨습니다.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그림자였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친히 성육신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을 만져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요일 1:1).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지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십니다. 그 분은 또 다른 형태의 예수님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abide). 우리는 실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보혜사께서 바로 내 곁에 계셔서 위로자요, 조력자요, 대언자요, 상담가로 계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에게 상담을 요청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고자 다가갑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상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반려견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보혜사께서 내 곁에 계셔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십니다. 그 분은 24시간 내 곁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만나기 위해 그 분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내 곁에 계시는 보혜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 또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15:26; 16:13).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도 성령님을 “진리”라고 하였고(요일 5:6),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대조했습니다(요일 4:6). 요한은 성령님의 가르치는 역할과 인도하는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15:26). 그는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십니다(16:13). “장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 사역과 성경적 세계관, 성경적 역사관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재림과 함께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보상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거짓의 영의 가르침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주십니다. 요한이 살던 당시에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지주의가 만연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무엇이 참된 복음이고 무엇이 거짓 복음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초대 기독교 역사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미혹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 신비적 체험에 치우치는 잘못을 갖기 쉽습니다. 성령 체험을 강조하면서 정작 거짓 영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성령 체험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깨닫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신비적 체험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실 때 그 체험은 신비하고 놀랍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감사와 참만족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아도취나 감정적 흥분이라면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반사회적이거나 반이성적거나 비상식적으로 변질시키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참과 거짓을 깨닫게 하시고 계시된 성경 말씀의 의미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에 모든 진리를 믿는 자의 내면에 계시하십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의 내면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하게 하시고 그 심령에 진리를 인치시고 확증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과 세상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거나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세상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깨닫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들의 죄와 교만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5,10,11). 세상은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고 어둠을 사랑합니다(3:19). 이는 그들의 죄가 빛 가운데 나타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3:20). 그들은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어둠에 붙잡혀 살아갑니다(12:35).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교만과 아집으로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8:40). 그들 내면에는 진리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8:37). 그들은 영혼의 도둑들로서 사람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였습니다(10:10).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진리의 성령님을 압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믿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제자들과 세상을 대조시켰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고 세상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즉 그들의 국적이 다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자들이고 세상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하여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주눅이 들거나 손해의식을 갖거나 부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고 있는 권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달리 성령님을 압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험적으로 알며 정서적으로 알고 구원의 지식으로 압니다(Matthew Pools).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내면에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롬 8:11).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한 영입니다(고전 6:17).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잘 압니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고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으로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불안과 염려에 휩싸인 것도 그들이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 대해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하는 고아처럼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아와 같이 버려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 아주 잠시이지만 제자들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가서 그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을 하셨고, 또한 다시 와서 그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여 그가 있는 곳에 제자들도 있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3). 예수님은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약속으로 보혜사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16-17, 26).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잃고 다락방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 육으로 부활하셨음을 인지시키셨습니다(20:19-20).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강을 선언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20:22). 예수님은 도마가 의심할 때 도마를 위해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의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를 만져보도록 하심으로 예수님이 육으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오셨음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20:24-29).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친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셔서 베푸시고 그들의 사랑 고백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맡기셨습니다(21장). 예수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의 보호 아래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랑의 서약을 받으시고 목양의 사명을 맡기셨고(21:15-17), 40일 동안 그들과 함께 계시다고 승천하셨습니다(행 1:3, 9).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를 보내어 주셔서 제자들의 내면에 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육신의 예수님을 의지하던 데에서 보이지 않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들 내면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놀라운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모든 믿는 자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버려져서 마치 고아와 같이 홀로 남게 된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박해가 아니더라도 주님을 위해 열정과 진심을 드린 후 찾아오는 피곤함과 허탈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모든 관객이 사라지고 나 홀로 남은 그런 감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우고 난 후 번아웃(burnout)되어 극심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처럼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왕상 19:4). 이때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의 지친 마음에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주고 꺽인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줍니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더 이상 세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신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은 말씀과 표적을 통해 충분히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는 약속은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자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영생과 부활의 약속을 하십니다.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생명력이 충만한 살아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육신으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의 영혼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날에 그가 아버지 안에,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관계를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롬 6:3-4). 그리스도께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엡 2:5-6).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골 3:3).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을 확신하고 이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사랑과 계명과의 관계(21-24)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는 말씀에서 좀 더 나아가서 제자들이 계명을 지킬 때 그들을 받게 될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조건문과 “지키리라”라는 그 결과의 형태로 간단히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가 어떤 자이고 어떤 축복을 받게 될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좀 더 설득적인 화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의 증표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계명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계명을 기억하고 간직합니다. 또한 그 계명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기를 힘씁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늘 부지런해야 하고 꾸준하고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순종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이 있어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그의 절대적인 보호와 돌봄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기뻐하실 때 그가 그의 자녀에게 줄 선물은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킬 때 그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누리게 될 가장 큰 선물은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믿는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우레와 번개,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 강림하셨고 그 연기가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진동하였습니다(출 19:17-19). 그들은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부탁할 정도로 두려워 떨었습니다(출 20:19). 기드온도 두려워 떨었고, 이사야도 그랬습니다(삿 6:22; 사 6:5).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대신 기쁨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시고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셨습니다(20:20). 뿐만 아니라 영광을 얻으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요 21:9-14).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예수님의 전인격을 온 몸과 영혼으로 느끼며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말씀은 믿는 자에게 학문의 대상도 아니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외우는 주문도 아닙니다. 말씀은 마음으로 영접하고 간직하면서 우리의 실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가룟인 아닌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이면서 알패오의 아들인 유다를 가리킵니다(유 1:1).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고향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렸습니다.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그는 아마도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제자인 자기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동일한 은혜를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그런데 이는 마음의 원함이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 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복음과 천국의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구하는 이가 얻고 찾는 이가 찾으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립니다(마 7:8). 이 빌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마 13:14). 구원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에게 주어집니다(롬 11:5). 이 말은 구원의 복음을 겸손하게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아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한 유다에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것’의 관계에 대해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15,21).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하셨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라고 역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축복을 반복하셨습니다. 또한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타내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은 23절의 “나를 사랑하는 자”와 대조적으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로 바꾸어 계명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적 표현으로 강조하셨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내리라”고 표현한 것이 유다로 하여금 혼돈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거처”라는 말은 원어로 ‘모네’로 2절에서 “거할 곳”과 같은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근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18절에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는 표현에서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의 감정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땅의 얽매여 있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거처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그들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처”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로 가셔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거처”는 구약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이 성막은 나중에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처소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성령의 거처의 모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겔 37:27). 요한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는 “거처”의 개념을 요한복음 1장에 끌어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하였습니다(1:14). 이 주제는 하늘의 거처의 개념으로 결론이 납니다(계 12:12; 21:3). 예수님께서 “우리가”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겠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성령과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요한은 4복음서 중 유일하게 20:22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20:22).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은 것과 연결됩니다(창 2:7). 하나님께서 태초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창조하셨듯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가서 거처를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거처”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이런 성경의 큰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23-25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 계명을 지키는 자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를 대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듣는 말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별개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아들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린 자들입니다(창 3:8).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에 죄의 장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내면에 가서 거처를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문을 닫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일(25-28)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은 그의 떠나심과 그의 부활로 이루어질 예수님과의 연합에 대해 말씀하시고 다시 보혜사에 대한 주제로 되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별 메시지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가르치시는 분으로서의 역할과 생각나게 하시는 분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외우고 묵상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또한 위기와 절망의 상황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시고 말씀을 붙들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도와주시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을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서 죄 사함을 주셨으며 부활하셔서 죽음 권세를 이기심을 확신하게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참과 거짓을 알게 하셔서 다른 복음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지속시키시고 더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성령의 은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해 황홀경에 빠지거나 속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 상태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예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해서 충만한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히 주님께 복종할 때 성령님의 충만한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끄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복종하고자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전적인 복종이 없이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에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은 곧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끼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은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평안을 빌었습니다. 이는 아론의 축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이 평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실현될 것을 곳곳에 예언해 놓았습니다(사 9:6-7; 사 52:7; 사 66:12; 겔 37:26). 평안과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강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악수하지만 속으로는 치열한 경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안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생긴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생명과 사랑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가 되었습니다(골 1:21).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얻으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셨습니다(골 1:22).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시니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아와 같이 버려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평안은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지게 됩니다(엡 2:16). 그러므로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끼치기 위함입니다. 이 평안은 또한 성령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그들이 체험하게 되는 마음의 상태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것입니다. 이 평강은 우리를 염려하는 것 대신 기도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마음에 감사가 충만하게 합니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빌 4:6-7).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은 그가 떠나실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다가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역사의 계획과 흐름을 깨닫고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이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성령님께서 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편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믿는 자들은 구속 역사의 흐름 속에 본류에 있는 자들로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감을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는 말을 덧붙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관점에서 자기가 어떻게 아버지를 섬겼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론인 1장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본래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고(1:1),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1:3). 예수님은 14장에서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7,9,10,20).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그의 뜻에 스스로 복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자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뜻에 복종하셔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9-10).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는 말씀은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대속 사역을 섬긴 실행자가 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성자보다 본질에 있어 더 크신 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질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복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에 해당됩니다(13:16).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29-31)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 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29-31절은 14장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반복해서 말씀하신 목적이 제자들로 믿게 하기 위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갑자기 일어날 때 그 충격은 감당하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도록 하시기 위해 반복해서 그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갑작스럽게 우연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구속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에 대해 묻는 도마에게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그들이 할 일은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떠나신 후 그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질문을 통해 다시금 예수님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것의 관계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떠나심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질 평안을 선물하셨습니다. 14장은 구조를 보면 이처럼 예수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랑과 계명, 보혜사 성령님의 약속이 순환적으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반복적 구조로 말씀하시는 목적은 제자들이 일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반복해서 가르치신 말씀은 제자들의 뇌리에 남아 그들이 사건을 만났을 때 떠올라 그들의 믿음을 붙잡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후에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 세상의 임금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이 충분하면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밤을 보내면 예수님은 붙잡히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보낼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음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겪으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용, 옛뱀, 마귀라고 합니다(계 20:2).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했지만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빵조각을 주었을 때 그것을 받아 먹음으로 유다를 조종하였습니다(13:26-27,30). 그후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 주는 일을 실행하였습니다(13:26-27,30). “세상의 임금”인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조종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계 2:13). 사탄은 거짓 이단 사상으로 사람들로 믿음을 저버리게 하며 배교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 실패하였다고 말합니다. 제자들도 잠시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 절망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그들은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잘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어둠이 온 세상을 지배했습니다(마 27:45; 막 15:33; 눅 23:44). 이는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희생을 당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사탄은 일시적으로 그의 승리를 자랑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이로써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 강림이 있기 전까지는 “세상의 임금”의 승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이 오는 것에 대해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떳떳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으심에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세상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 다락방을 나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은 우리에게 15-16장의 강화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우리는 15-16장도 다락방 강화로 분류하기 때문에 이런 궁금증을 더해 줍니다. 대체적으로 15-16장 강론은 주님 일행이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말씀하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15-16장의 강론이 제자들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무겁고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길을 가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5-16장의 내용은 나중에 편집할 때 삽입된 내용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주옥과 같은 고별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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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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