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의 결말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정점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인류 역사 이래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셨던 모든 구원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또한 이를 믿고 믿음으로 산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으로 실패자요 패배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1:19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본론의 마지막 장이고 그 결론은 도마의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을 부활을 다룬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독특하게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회의론자’이고 ‘솔직한 의심쟁이’라는 별칭을 가진 도마의 입을 통해 이런 신앙 고백으로 결론은 삼은 요한의 의도는 20:30-31에 나오는 이 글을 쓴 목적과 연결됩니다. 요한은 도마와 같이 연약하고 의심하는 우리가 이 책을 읽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고 그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힙니다.
빈 무덤(1-10)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와 패배의 십자가가 됩니다. 우리 죄를 위한 그의 희생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끝났을 것이고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고전 15:17-19).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는데,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들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십자가의 희생은 영광과 승리가 됩니다. 요한은 반복해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았습니다(12:23; 13:31; 17:1; 21:19).
19장의 분위기는 20장에 와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로 주님이 부활하신 첫 날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죽으신 후 사흘 후”라고 하지 않고 “안식 후 첫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첫 날”을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것의 첫 출발임을 알리고자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날은 경사스러운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 날이고, ‘주의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완성을 기념하는 날로 새로운 창조의 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율법’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 예배하고 그 다음 날부터 우리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 디베랴의 북쪽에 위치한 막달라 출신입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린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귀신들을 쫓아내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눅 8:2). 그녀는 그후 헌신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갈릴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눅 8:3). 그녀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고 골고다의 십자가 곁은 지킨 여인들 중 하나였습니다(19:25).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왔다고 하였고(막 16:1),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왔다고 기록했습니다(마 28:1). 그러나 요한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기록을 11-18절에서 다시 할애함으로 부활 신앙에 토대가 되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은 다른 여인들을 언급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연속성을 위해 과감하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마리아가 “우리”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다른 복음서에 말하는 대로 다른 여인들도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녀가 무덤에 온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눅 24:1; 막 16:1).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었던 큰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주의 천사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은 것을 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진과 천사가 돌을 굴리는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순히 돌이 옮겨진 사실만을 기록하여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오면서 무덤의 돌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 염려하면서 왔습니다(막 16:3). 무덤의 돌은 여인들의 힘으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대책도 없이 무덤에 왔습니다. 그녀는 계산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녀는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온갖 애정을 쏟아 그의 하시는 일을 섬겼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열한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십자가 현장에 있지 않고 숨어 있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용감하게도 예수님께서 숨지고 그 시체를 옮기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마리아는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급하게 무덤에 묻히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 두었는데, 이는 장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제대로 배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 만큼이나 강했습니다(아 8:6). 또한 그녀의 사랑은 ‘무덤’보다 더 강했습니다. 그녀의 예수님 사랑은 무덤의 공포를 이기게 하였고 그녀는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무덤까지 가게 하였습니다. 그녀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심은 열두 제자들을 능가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십자가와 그의 무덤까지 구주를 따랐던 참 제자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빈 무덤을 구주의 부활의 증거로 사실적 묘사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천사들이 돌을 옮겨 놓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마태가 기록한 것처럼 지진이나 천사의 등장, 공포에 질린 군인들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습니다. 빈 무덤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열두 제자가 아닌 여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녀만을 언급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드라마와 같은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빈 무덤의 첫 목격자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주님의 시체를 가져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빈 무덤을 보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급하게 제자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물론 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무덤에 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을 따르던 몇 사람의 여인들과 같이 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시중에 떠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은 군인들을 배치하여 무덤문을 지키도록 했습니다(마27:62-66). 마리아는 그 소문을 떠올리고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대적들로부터 그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십자가의 충격과 더불어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육신의 예수님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고 죽음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탁월했지만 부활의 믿음이 없을 때 그 사랑은 슬픔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부활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무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고인과의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정기적으로 무덤을 찾아가고 무덤을 소중하게 가꿉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무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소중히 여기던 무덤의 문이 열려 있으니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그 안에 편안하게 누워 계셔야 하는데 시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그녀가 전한 사건의 진실성을 확인하고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무덤으로 달리기 경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저자 요한은 자신과 베드로를 대조해서 재미있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였고 유월절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한 자라로 하였으며, 멀찍이 떨어진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여 예수님을 파는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말함으로 그가 베드로보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던 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요 13:23-24). 그는 예수님이 심문받으실 때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간 첫 제자이고 베드로는 그의 주선으로 금지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술했습니다(18:15-16). 또한 자신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무덤에 이른 첫 제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멀리서 그가 주님을 먼저 알아보았고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한 것을 통해 그가 주님과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말합니다. 그는 무덤에 도착해서 몸을 구부려 세마포 놓인 곳을 보았으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모든 면에서 빠르고 민감하지만 신중하고 두려움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용감하게 무덤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도 용기를 얻어 따라 들어갔습니다.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늦게 도착한 시몬 베드로는 요한과 달리 무덤에 직접 들어갔습니다. 요한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베드로는 생각하는 것보다 몸으로 반응하는 것이 빨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먼저 대답했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나 이해하기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사랑은 몸으로 반응하는 사랑이고 자동반사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확신있게 대답했습니다(막 8:29). 그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 즉 예수님을 꾸짖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막 8:32-33). 베드로는 저녁 만찬 자리에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는 주의 말씀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 나이다”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칼을 빼어 휘두르며 예수님을 방어하고자 했습니다(18:10). 이런 베드로의 모습은 신중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요한과 매우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을 확인하는 일에 있어 용감하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 무덤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로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그 머리를 쌌던 대로 놓여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 자체로는 객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의 말대로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간 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사건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싸고 있었던 세마포가 예수님이 누우신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면 세마포에 싸여 있는 시체를 그냥 들고 갔을 것입니다. 시체를 가져간 사람은 급하기 때문에 세마포를 벗겨내고 그것을 누운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또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수건은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얼굴을 쌌던 수건은 얼굴을 닦는 손수건과 같은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덮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시체의 입이 벌어지지 않게 턱까지 감싸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 천이 얼굴을 쌌던 그대로 말려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는 구절은 개역한글의 “딴 곳에 개켜 있더라”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접다’는 말과 ‘감싸다’는 뜻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에서도 ‘접히다’는 의미의 folded up 또는 folded together(ESV; NKJV; NIV)라는 번역과 ‘말려져 있다’, ‘감쌌다’는 의미의 rolled up(NASB; NET), wrapped together(KJV)의 번역이 있습니다.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와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님의 몸은 세마포를 통과하여 부활하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옮기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잘 정돈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군인들이 잠자고 있을 동안 시체를 가져가는 일은 급박한 일입니다. 시체를 가져갔다면 세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을 벗겨내고 시체가 썩어 부패한 액체가 나온 나신을 가져갔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부활의 증거를 만들고자 세마포를 정돈했다면 그렇게 정교하게 누운 곳에 정확하게 배열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자 요한과 베드로는 이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8). 특히 요한은 그의 예리한 눈으로 목격한 것을 그대로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입으신 옷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이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선 영역이므로 일일이 이에 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은 부활의 옷, 영광의 옷을 입으셨다고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은 베드로의 용감한 행동에 용기를 얻어 같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무덤의 모습을 그들의 기억에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시체를 감쌌던 세마포 거기 그대로 놓여 있다는 모습과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수건도 감싼 상태로 그대로 놓여 있다는 모습은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임을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이 부활에 관한 기사를 읽고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기사를 하나의 신화로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흘려 버리기 쉽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인이나 성인이 그가 죽어서도 그의 영향력이 살아 다른 사람에게 미치듯 예수님도 기독교를 창시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선한 삶이 오늘날까지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렇게 죽어서도 산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저자들을 통해 그가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다방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도둑설’을 일축하는 기사를 썼고,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의 부활에 관한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일컫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보이셔서 그를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자기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부활의 광채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변화시키셨음을 간증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가정하에 반대급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임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확신시켰습니다. 또한 씨앗의 비유를 통해 육신의 몸은 씨앗이고 부활의 몸은 그 씨가 담고 있는 장래의 형체임을 비유적으로 설명함으로 우리가 몸으로 부활할 것을 확신있게 증거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부활은 사망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선언입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고 그 복음의 내용은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부활의 기사 끝머리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라고 씀으로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으로 부활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고 상징적 해석으로 얼버무리면서 여전히 불신과 의심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베드로가 빈 무덤과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놓여 있던 세마포와 수건을 보고 믿었듯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 증거를 시작으로 부활의 관한 기사를 읽음으로 그의 부활을 확실히 믿기를 원했습니다.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초보단계에 머물어 있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셔서 그의 몸의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9절에서 부활신앙의 확실한 믿음은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코멘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부활신앙의 가장 견고한 기초는 성경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 15:3-4). 아무리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릿해지고 현실에 따라 그 개인적인 기적의 체험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은 기록된 말씀에 기초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경이 예언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그의 메시아로서의 정통성은 구약성경이 말해줍니다. 구약성경은 그의 베들레헴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약혼한 마리아와 요셉이 살고 있는 곳은 저 북쪽 갈릴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로마 황제의 호적명령을 통해서 마리아와 요셉이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베들레헴에서 구주를 해산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예수님은 정통성을 가진 메시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역사도 구약성경에 수없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은 구주의 부활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창세기 3:15의 원시복음에서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구절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네 머리”는 사탄의 머리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죽음 권세를 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탄은 패배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시편 16:10을 인용하였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스올”은 무덤을 말하고 “멸망”은 decay로 ‘썩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예언하는 시를 썼습니다. 다윗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고 썩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시고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다윗의 시적 표현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하였습니다. 바울도 그의 설교에서 같은 시편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행 13:34-37). 사도들의 부활신앙은 구약성경의 예언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행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들에게 말씀하신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필연성을 역설하셨습니다(눅 24:26-27). 성경은 십자가와 부활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신앙의 근거가 기적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믿음이 견고해지고 강렬해지고 열정적이 되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믿어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한 것을 보아 그들의 부활신앙이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을 알 때 그들의 부활신앙은 견고하고 완전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활의 증거를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기록된 말씀의 증거를 통해 이성적으로 알 수 있게 되고 성령의 감동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부활을 전인격적으로 믿게 됩니다.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0절을 어디에 포함시킬 것이냐 하는 것은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1-9절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11절과 연결시켜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두 제자들은 빈 무덤과 그대로 놓여 있던 세마포와 수건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이 일을 차후에 의논하기 위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 기다렸습니다. 19-23절을 보면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이 모여 있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면 그들은 함께 모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은 NIV(1982)에서 but이라는 접속사로 연결하여 ‘제자들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남아서 울고 있었다’는 의미로 연결함으로 부활을 믿은 두 제자와 여전히 슬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를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출신들인데 예루살렘에 어떻게 거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 제자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의 집이나 예루살렘의 임시 거처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12을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은 마가의 집에 모여 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논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19). 그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은 모여서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건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일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알아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라고 책망하심으로 그들의 ‘더디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아직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일을 겪어보지 못한 제자들이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견고한 부활 신앙을 갖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다시 무덤에 돌아와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빈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증언한 첫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제자들처럼 마냥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제자들과 같이 빈 무덤에 왔는지, 아니면 홀로 빈 무덤을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는 무덤으로 와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려 있는 무덤을 보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그녀가 예수님께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울고 있는 마리아는 죽은 예수님께 매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다시 무덤 안을 확인하고자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성전의 속죄소 양 끝에 서 있어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25:19-20).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렇게 무덤이 비어 있는데 너는 왜 울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천사의 눈에 마리아가 우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관심은 잃어버린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천사를 보면 두려움이 들어 그 앞에 엎드러지는데 마리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을 잃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조차도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보면 그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내 주님”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보았지만 그녀의 집착은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집착 때문에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도 그녀는 천사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녀는 빈 무덤을 보았고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을 붙들고 슬퍼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모순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 가운데 산다고 하지만 상실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부활 소망 가운데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 여전히 슬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남편, 남편을 떠나 보낸 아내, 자식을 떠나 보낸 부모, 부모를 떠나 보낸 자식들의 마음에는 아무리 부활신앙이 있다고 해도 그 마음에 슬픔의 아픈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에 매몰될 때 주위 사람들의 신앙적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사랑하는 주님이 무덤에라도 계셔야 하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녀는 부활의 증거를 보았지만 여전히 주님이 육신으로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이 말을 하고 천사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을 거라 여전히 생각하며, 부활하신 주님이 거기에 계실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찾는 분이 그 앞에 계셨는데 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리아는 그녀의 눈물이 그 앞을 가려서 예수님의 모습이 또렷히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보기는 보았으나 그녀가 찾는 분이 바로 앞에 계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아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면 내 눈 앞에 아는 사람이 나타나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내가 부활하였는데 어찌하여 우느냐? 내가 부활하였는데 너는 왜 죽은 사람을 찾느냐?”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무덤이 요셉의 가족의 무덤이라 그 사람이 요셉 일가의 무덤을 관리하는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녀는 동산지기라면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자기에게 그 장소를 알려만 준다면 자신이 그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여자 혼자 시체를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시체를 옮기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의 명예를 위해 시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경의를 표하며 장례절차에 따라 행할 일입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혼자 하겠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대책도 없이 예수님의 시신만 찾는다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시체를 찾아 최대한 예우를 갖춰 다시 장례를 치러 영원히 예수님을 기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의 질문에 마리아는 여전히 죽으신 예수님에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며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단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이름을 듣고 그가 사랑하던 메시아 예수님의 음성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음성은 그녀가 늘 들어왔던 친근하고 익숙한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가 마리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옵니다(요 10:3-4). “마리아야!”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은 사랑스러운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 그의 음성을 듣고 그가 누구신줄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마리아의 눈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실패했지만 그녀의 귀는 그녀의 이름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특유의 억양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Meyer). 예수님의 음성은 타인의 음성과 달랐습니다. “마리아야”라는 이 말보다 더 애정이 담긴 단어는 없습니다(Tasker). 예수님은 한 단어로 완벽한 설교를 하셨습니다(Spurgeon). 에덴 동산에서 여자는 타락한 후 즉시 슬픔의 선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묻히고 부활하신 이 동산에서 위로의 소식이 여자에게 들렸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슬픔의 선고가 여자에게 무겁게 내려졌지만 여자의 후손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통한 위로 또한 달콤하게 그녀의 귀에 들려졌습니다(Spurgeon).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의 후손 가운데 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슬픔에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친숙하며 인격적이고 독특한 사랑의 관계성에 기초하여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25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까지 죽음의 권세인 슬픔에 매몰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형태로, 어떤 사람들에게 허무의 형태로, 어떤 사람에게는 무기력의 형태로,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에게는 죽음의 권세가 슬픔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그녀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 즉 죽음의 권세에 지배를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마리아에게 그 때는 “마리아야”라고 부르신 때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의 음성을 들었을 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영적인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슬픔의 눈물로 가리웠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슬픔과 두려움과 걱정과 허무와 무기력과 고민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음의 권세로 인한 것임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잠자는 우리를 일깨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보게 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느끼게 하십니다.
마리아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마리아야”라는 음성이 마리아에게 친숙한 음성이었듯이 “랍오니”도 평소 마리아가 예수님을 부르던 친숙한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평소 친숙한 관계 속에서 부르던 호칭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랍오니의 뜻이 ‘선생님’이라는 뜻임을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랍오니”는 “랍비”라는 말의 소박하고 친근한 방식의 호칭이고, 여기서 히브리 말은 그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한 아람어를 말합니다. “랍오니”는 마가복음 10:51에서도 사용되었고, 성경에 두 군데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마리아야”라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감긴 눈이 떠져서 예수님인 줄 알아보자 자신도 모르게 평소 부르던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존경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그의 스승인 엘리야를 따르듯이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녀의 생명을 구원하는 구주일 뿐 아니라 그녀가 배우고 따르는 스승으로 존경해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그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생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을 바쳐 배우고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가는 삶이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이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그의 죽음까지 따랐습니다. 이제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며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 것입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 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자 너무 반가워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8:9을 보면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 “그 발을 붙들고 경배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경배의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는 ‘만지다, 대다’는 의미이고, 영어 번역으로는 touch(만지다, KJV; LEB), cling to(붙들다, ESV; NASB95), hold on to (붙잡다, NIV; NRSV)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이야기의 흐름상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행위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의 움직임에 대해 “나를 붙들지 말라”라고 하심으로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손의 못자국과 그의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27). 또한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 그 발을 붙들고 경배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마 28:9). 왜 마리아에게만 그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마리아는 아마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처럼 부활하셔서 자기와 제자들과 계속 생활하시면서 전처럼 행복하게 말씀을 나누시고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육신으로 살아계신 예수님께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식하기 전에는 죽은 예수님께 집착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식하고 나서는 이 땅에 거하실 예수님께 집착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승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가시겠다는 말(14:12, 28; 16:10, 28)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에게 그가 가실 곳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라는 말씀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같이 살 것을 기대하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한 단계일 뿐입니다. 그는 아직 아버지께 가지 못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 낙심에 빠진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부활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삶과 직결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그들에게 공급된 것은 아닙니다(20:1-10).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19-23). 예수님은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 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 도마에게 부활의 믿음을 갖도록 도우셔야 했습니다(25).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다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셔야 했습니다(21장). 예수님은 그가 다락방 강화에서 다 말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셔야 했는데, 그 기간은 40일이나 걸렸습니다(행 1:3).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리도록 당부하십니다(행 1:4).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의 어린 양들을 먹이도록 부탁하십니다(21:15-17). 그들에게 세계 선교 명령을 주시며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20; 막 16:15; 눅 24:46-48; 행 1:8).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행 1:9). 그후 제자들이 같이 모여 기도할 때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2:1-4).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중보자로서 사역을 감당하십니다(롬 8:34; 히12: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6:64). 예수님은 그가 다시 오심으로 예수님은 만유를 회복하시고(고전 15:28),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계 21:1-3). 이로써 하나님의 모든 구속의 계획이 완성됩니다. 마리아의 기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이 땅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같이 계시면서 지상 왕국을 꿈꾸었습니다(행 1:6).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지상 왕국이 아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승귀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마리아에게 그런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지상 왕국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실 영적인 나라, 진리의 나라,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통해 지상 나라를 꿈꾸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 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고”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의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를 정치적으로 이루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함으로 그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한 죄 사함과 거듭남을 전파함으로 사탄의 통치 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예수님은 그의 나라가 그를 영접한 자들의 내면에 임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선포하시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시면서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나 물리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요 진리의 나라입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적인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롬 14:17). 예수님은 이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 남아 계시지 않고 승천하십니다. 그후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믿는 자들을 통해 그의 재림의 때까지 차근차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찾고 있었던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십자가와 무덤까지 주님을 따르던 마리아에게 임한 부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혀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고자 하는 천사도 무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고 막무가내로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슬픔으로 나타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자각하였습니다. 그녀는 부활과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을 몸소 뵈옵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녀는 인생이 무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 이상 슬픔의 노예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부활의 증인으로 인생이 무덤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장차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슬픔과 상실에 빠진 모든 사람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의 이별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라”라고 감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독자를 잃고 슬피 우는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는 자들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과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사셔서 죽음의 권세를 굴복시킨 부활의 주님이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바꾸어 기쁨과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가진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 이 생명을 전하는 자로 삼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 하루가 넘어가기 때문에 여기서 “저녁”은 해가 지기 전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24:29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시각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4:33을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만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일 오후부터 해질녘까지 급박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가 살아나셨음을 친히 제자들에게 보이시느라 바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은 종교 당국이 나사렛 예수의 잔당을 소탕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종교 당국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헛소문을 퍼뜨릴까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마 28:11-15). 그들이 헛소문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수배를 받고 있는 것 때문에 마음대로 외출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모이는 곳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제자들에게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그들의 모습은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모습과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 신앙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담대히 말하였습니다(행 4:19-20).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이성적으로 추론할 뿐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간접적으로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전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다시 사는 예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다 무덤으로 간다는 것이 영원불변의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예언을 듣기는 했지만 지상 메시아 왕국을 꿈꾸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탄이 짜놓은 죽음의 프레임에 갇혀 나가려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이 그에게 전 세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이래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기 위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문을 어떻게 여셨는지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오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광의 몸이므로 벽을 뚫고 오거나 문을 통과하여 오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것으로 보아 현재의 부활의 형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주의 사자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이끌어 냈듯이 주의 사자가 굳게 닫히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행 5:19).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의 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였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강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일시적인 평강이 아닙니다. 그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14:27).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그가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권세자 사탄을 이김으로 주어지는 평강입니다(16:33).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생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그 마음에 평안에서 두려움으로 심경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창 3:10).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리가 말하지만 성경은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열두 두령들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정탐을 하고 돌아온 열두 두령 중 10명은 가나안 땅은 정복하기 힘든 땅이라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민 14:1-3). 하나님은 두려움에 빠져 원망하는 백성들을 진노하시고 그 세대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민 14:26-38). 두려움은 불신에서 나오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죽음의 권세가 휘두르는 무기 중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강을 선물하심으로 그들이 두려움에서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제자들이 불신과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그들을 책망하시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평강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평강을 선물하심으로 그들을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후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입으신 몸은 영광스러운 몸인데 왜 그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갖고 계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의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없다면 제자들 앞에 계신 분이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가장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서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의 몸의 십자가의 흔적만큼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흔적은 부활의 진실성을 제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복자들은 전쟁 중에 입은 상흔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 자신이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웅변적으로 입증하셨습니다(매튜 헨리).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흔적을 간직한 채 승천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 속에서 보좌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신 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계 5:6). 또한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도 십자가의 흔적을 갖고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 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공생애 때 보았던 예수님과 다르지 않았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셨습니다. 또한 그의 음성도 그들이 늘 들었던 익숙하고 친근한 음성 그대로였습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였고 그들의 두려움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집착하여 슬퍼하는 마리아와 같이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슬픔과 상처를 예수님의 고난에 투영하면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셨어.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나보다 더 억울하게 죽으셨어.”라고 되뇌이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슬픈 처지를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달래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예수님만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예수님께보부터 승리만을 기대합니다. 그의 관심은 성취와 성공과 승리입니다. 그들은 낮은 곳으로 임하기보다 끊임 없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모토로 삼고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상처를 간직하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의 두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도 안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갈 6:14).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간직했습니다(갈 6:17).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빌 3:10-11).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흔적을 간직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간직한 부활 신앙이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의 십자가 상처를 보여주시고 난 후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19절에서 말씀하신 “평강”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염두하고 하신 말씀이라면 21절의 “평강”은 제자들이 감당할 사명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흔적을 갖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빛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듯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평강”을 주심으로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제자들이 감당할 사명은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23). 죄 사함의 복음은 곧 평강의 복음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이 관계성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다가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1-5).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원수된 것,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엡 2:14-18).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리게 된 우리에게 주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 즉 평강의 복음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고후 5:18-19). 이것이 ‘평강’과 ‘사명’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보낸다’는 말은 ‘왕의 대사로서 파송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으로 인한 생명의 권한을 맡기십니다. 왕의 대사는 왕의 대리자로서 왕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타국에서 왕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5:21).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5:24). 하나님은 아들에게 살리는 권한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판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5:26-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거절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사여탈권을 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계승하여 만민 구원 역사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 순간은 이 막강한 권한을 위임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낸다’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앞의 ‘보냈다’는 동사는 완료시제이고 뒤의 ‘보낸다’는 동사는 현재시제입니다. 완료시제를 쓴 것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사명의 결과가 계속 지속되고 영원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그 뒤를 이어받을 차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보내다’는 현재시제로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신 대상은 열두 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도마가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10제자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도마에게도 해당되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제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또한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모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의 권세를 위임하셨듯이(마 28:18-19)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똑같은 권세를 위임하십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권한을 주어 세상에 보내었듯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복음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이 엄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독특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는 구절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그들은 살아있는 영과 육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그들에게 불어넣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숨을 불어넣으신 것은 21절과 관련하여 사명을 부여하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파송되어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자 할 때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그들의 계획과 의지로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이유가 구원 역사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성령이 능력이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성령님과 따로 우리는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과 관련하여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구속 역사를 계승하도록 성령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성령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보이지 않은 형태로 계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승천하심으로 물리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화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14:20).
우리는 이 구절과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계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미리 내다보는 예표적이고 상징적 선언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선언 이후에 도마를 위해 다시 한 번 나타나실 때에도 여전히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현장에 없었고 그는 여전히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이 선언 이후에 갈릴리 바다로 가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자기들 생업으로 돌아갑니다(21:3). 이런 무기력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의 선언은 장차 일어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 그들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20). 그들이 예수님의 성령의 선언 이후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던 것은 두려워서라기보다 성령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도마는 여전히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면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부활을 확신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 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기다리도록 지시하셨습니다(행 1:4).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기다린 것이지 예수님의 성령을 받으라는 선언이 단지 상징적 선언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언의 유효성을 성령강림의 사건과 연관지어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칼빈은 요한복음 20장의 성령주심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의 관계를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의 차이로 설명했습니다. 즉 부분적인 것에서 온전한 것으로의 점진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 니라
예수님은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 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은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3절을 언뜻 보면 제자들이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라는 말씀과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라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권세라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위임한 것은 그들에게 죄 사함을 주는 복음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성직자가 죄 사함의 권세를 위임받았다고 해서 그의 선언에 의해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량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엡 1:7). 즉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죄 사함은 그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러므로 제자들이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으로 죄 사함의 선물이 은혜로 주어지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 선포의 위임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제자들의 권한과 함께 이를 전파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빚진 자의 심정을 언급하였고(롬 1:14),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부득불 할 일임이라는 것과 복음을 전하지 아니 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6). 복음을 가진 자들은 그 권한이 큰 만큼 무거운 책임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맡은 신자들은 주어진 권한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이를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선물로 값없이 거저 받았으니 값없이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마 10:8).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죄 사함이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은 the good news로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소식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정작 ‘죄 사함’이라는 좋은 소식을 빼놓고 은혜와 축복이 메시지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이라는 말에는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가 공존합니다.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이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죄 문제를 다루기를 꺼려합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를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해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심각한 사생활 침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 트라우마와 심리적 고민에 대해서 위로받고 지지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모든 어두운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선포를 받을 때만이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됨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의 문제를 말씀하실 때 여인의 죄 문제인 남편 문제를 건드리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남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배려와 위로에 그쳤다면 그녀의 영혼의 목마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드린 그녀의 죄 문제인 남편 문제는 예배 문제로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 그녀가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에 앞서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병자’이기 이전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하시면서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 9:13).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죄 사함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행 2:38; 10:43; 13:38).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신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도 ‘죄 사함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각 사람의 죄 문제를 다루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회피하는 순간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은 그들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도마를 위해 나타나신 예수님(24-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마가 제자들이 모인 곳에 왜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마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쟁이’라고 하기도 하고 ‘실증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이름만이 언급되어 있고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마가 ‘의심의 대명사’, ‘실증주의자’라는 인상을 갖기 전에 그가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후 사흘을 지체하시다가 갑자기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말하며 동행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11:8). 이 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며 나섰습니다(11:16). 그의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의리와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의심하고 눈으로 보아야 믿는 그의 기질과 반대됩니다. 도마는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 예수님의 주옥 같은 유명한 말씀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데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에게로 영접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1-4). 그러자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14:6). 이는 도마가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을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그는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는 것을 두고 우리는 그에게 부정적 평가를 내립니다. 그가 모이기를 힘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모였는데 그는 낙심하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라’라는 주제로 설교할 때 도마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상으로 도마가 이용되기도 합니다. 도마의 뜻이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이름의 뜻을 확대 해석하여 그의 ‘이중성’을 부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두 번째 나타실 때 그의 바람대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보는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요한은 도마를 통하여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보여주시고 느끼게 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도마는 오늘날의 보통 ‘우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도마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그가 의롭다고 평가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은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에 두어야 합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그의 손과 옆구리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 주신 것을 말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과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과 그들이 죄 사함의 복음의 사명을 맡기신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도저히 그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격하고 다소 과장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반응은 다른 제자들이 믿지 못했을 때의 반응과 사뭇 다릅니다. 그가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주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이런 반응은 깊은 슬픔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이 큰 사람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오래 동안 간직해 온 희망이 무너진 좌절감 때문에 그의 꼬이고 복잡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그의 반응은 ‘솔직한 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불신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증언에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그의 말은 오히려 자기만 부활의 증거를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열 제자가 주의 부활의 증거인 십자가의 상처를 본 것 같이 자기도 눈으로 직접 보고 만짐으로 확실한 믿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구약에서도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기드온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기드온은 그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 되시는 표징”을 두 번이나 요구하였습니다(삿 6:17, 37). 그의 요구는 아주 당돌하고도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표징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연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마가 주의 상처를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말은 도마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보고 만짐으로 확실한 부활의 믿음을 갖기를 간절히 소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도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고백은 증거 없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증거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초하여 믿음을 갖습니다. 구약은 the Old Testament이고 신약은 the New Testament로, testament의 뜻은 ‘약속’이라는 뜻도 있지만 ‘증거, 입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고전 15:3-4).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경이라는 증거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한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도마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의 요구는 안 믿겠다는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 사도들이 보았던 부활의 확실한 증거에 기초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정확한 증거를 성경을 통해 주셨고 우리의 삶의 작은 조각 속에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지 않고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함께 있는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도마 개인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공개적으로 나타내신 것은 도마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거기 같이 있는 제자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타내신 것은 열한 제자들만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고 그들의 부활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두 번째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갈릴리 바다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21장).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40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 1:3). 또한 500여 형제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고전 15:6). 예수님은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를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8일째에 나타나신 것은 그가 부활하신 날로부터 계산해서 8일째이므로 안식 후 첫날이 됩니다. 이 때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였다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지난 주에 이어서 부활의 날에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어도 주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여 모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 날의 모임에 도마도 참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약속하셨는데(마 18:20), 이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는데 그 다음 주일도 제자들과 함께 하셨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후 제자들은 주의 날에 정기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였습니다(행 20:7).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문들이 잠겨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있는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황에서는 그들이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두려움을 극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 전이므로 그들에게 구체적인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나가기 전에 부활하신 후 아직 승천하기 전 기간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수배를 받는 상황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는 것은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나타내실 때처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사처럼 이후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인사에서 평강을 비는 것은 의례적인 인사일 수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매우 중요한 인사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하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모든 염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지각(understanding)에 뛰어나며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킵니다(빌 4:6-7).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기꺼이 도마의 요구에 응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도마의 무례한 요구를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들의 유치한 요구도 들어주시고 우리를 안심시키고 믿음의 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의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를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확신시켜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의 상처가 없었다면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르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별개의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같은 사람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신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는 볼 뿐만 아니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으로 부활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이 두 번의 나타내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확고하고도 강력한 고백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만난 영광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요한이 표현한 경이로움은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도 적용이 됩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경이로우신 부활의 예수님을 눈을 볼 뿐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는 경험은 요한이 비록 만지지 않았더라도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3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인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모습과 다른 점이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놀랍고 경이로운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지도록 허락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확고한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 뿐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실의 진실성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맡기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부활의 사실을 단순히 믿을 뿐 아니라 부활을 증거하며 다른 사람으로 부활을 믿도록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인이라는 말에는 ‘순교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차원은 “내 종교는 기독교야”라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증언하는 차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이 부활을 확신하고 그가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의 상처를 만져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만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있는 십자가 흔적을 보자 그는 경외심에 휩싸여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여호와”를 말합니다. 구약 사람들은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주님(the LORD)”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거의 대부분 “여호와(Yahweh)”라는 이름 대신 “주님”이라는 the LORD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던 서기관들은 이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자기를 정결하게 한 후 기록했습니다. 도마의 입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야훼”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예수님께 붙여진 이름으로 예수님은 경배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백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관해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결론 짓고 싶은 내용입니다. 요한은 프롤로그부터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고 요한은 그의 영광을 보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본론을 도마의 신앙고백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를 주저하는 회의론자였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요구하는 ‘정직한 의심쟁이”였던 도마를 통해 나온 결론이라 더욱 놀랍습니다(The Pulpit Commentary).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은 요한이 말하고 싶은 최고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마리아의 신앙고백이나 반석이라 칭함을 받은 수제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 자기 자신에 의한 사랑의 고백으로 결론을 맺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도마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결론을 맺음으로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혜는 인간의 선한 행위나 믿음의 크기에 비례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비록 의심쟁이 도마의 고백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절정의 표현이었습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도마와 같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미래세대를 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 믿었던 자였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만짐으로 그의 불신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바라던 효과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도마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미래 세대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의 부활을 느끼는 정도가 감소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최첨단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회가 선진화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릴수록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즉 미래 세대의 신자들도 역시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확증 없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세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에게 도마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와 똑같은 복을 누리고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언뜻 이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은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해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보고 믿는 것의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작정 맹목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증거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맹목적인 믿음은 신앙적 오류에 빠지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이런 증거에 기초하지 않는 맹목적 신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놀라운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증거들을 보고 있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직접 본 기억들은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기도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현실에 굴복하는지 우리는 삶에서 경험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이를 통해 주의 증거들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비록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지만 더 크고 놀라운 주의 증거들을 보고 읽고 늘 가까이 하는 사실상 ‘보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목적(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0-31절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 중 일부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의미 중심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더 많이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요한은 7가지 표적만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부만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기적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우선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함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믿지 않는 불신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의 복음서에서 대조적 개념을 많이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영생(생명)과 죽음, 구원과 심판, 은혜와 진리 등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일반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7:35에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누구인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내용을 씀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이 되심으로 세계 만민 가운데 열매를 맺는 비전을 보신 내용을 기록했습니다(12:20-24). 요한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죄패에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나사렛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19:20). 요한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그를 진리의 나라로 초대하신 내용을 기록했습니다(18:36).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사건의 수는 적게, 반면에 사건의 내용의 분량은 길게 할당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성경을 읽으라고 할 때 요한복음을 많이 추천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만찬 자리에서 고별 강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적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어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요한은 객관적으로 단순한 사건 나열보다 그의 의도와 신학과 코멘트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의 기록 목적이 선교적 목적이 주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훌륭한 인간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관심이 있더라도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듣지만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훌륭하신 분이시만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모습의 변화를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등장인물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고 그들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3장의 성공한 니고데모의 고민을 통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세상의 쾌락과 만족줄 것을 상징하는 야곱의 우물물을 바라다가 오히려 더 큰 인생의 목마름에 시달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갈증의 문제가 참된 예배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5장의 38년 된 병자를 통해 경쟁 사회 속에서서 패배자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6장에서 육신의 떡을 구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통해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8장을 통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통해 죄를 짓고 난 후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9장의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통해 영적으로 눈 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문제를 안고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 문제의 해결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과 그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됨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 안의 생명으로 이 생명은 죽을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19회, ‘영생’이라는 단어가 20회, ‘살리다’라는 단어가 12회가 나옵니다. 이는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월등히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생명’이 2회, 영생이 5회, 누가복음에는 ‘생명’이 2회, ‘영생’이 3회 나오며, 마가복음에는 ‘생명’이 1회, ‘영생’이 5회가 나옵니다. ‘생명’이나 ‘영생’이라는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하는 단어이며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의 생명에 관심을 갖도록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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