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공관복음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보다 나중에 기록되었고 저자 요한은 중복을 피하고자 공관복음의 내용을 많이 생략하였고 반면에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을 많이 추가하였습니다. 요한의 십자가 사건 기록은 매우 사실적이고 세밀합니다. 이는 복음서 저자 중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빌라도가 무리와 예수님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유대인들과 줄다리기 하는 장면을 독특하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의 석방 노력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최종적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 세 가지만을 언급하였습니다. 첫째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내용이고(26), 두 번째는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8). 세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속 사명의 완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후 요한은 예수님의 육체의 죽으심의 확실한 증거를 기술함으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완전히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사실을 강조하면서 십자가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당하신 예수님(1-4)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관례를 이용하여 무리들이 흉악범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 석방할 대상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의 꾀를 써서 유대인의 저항을 받지 않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동정을 유발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채찍질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푸스티가치오’라고 하여 불량배들에게 경고로써 주는 형벌인데 채찍질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플라젤라치오’로 중죄인에게 가하는 채찍질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베르버라치오’로 십자가 형을 언도받은 자들에게 가하는 채찍질로 가장 잔인한 것이었으며 사형수는 거반 다 죽게 될 정도로 잔인하게 맞았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받은 채찍질은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채찍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채찍질에 대해 요한의 기록과 공관복음의 기록이 다릅니다. 요한은 사형판결을 받기 전에 채찍질한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사형판결 후 채찍질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 27:26; 막 15:15).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자가 형을 받는 사형수들에게 가하는 형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에는 채찍질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되어 있어 석방하기 위한 채찍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눅 23:16, 22). 이는 요한의 기록과 흐름을 같이 합니다. 요한도 누가와 같이 ‘석방을 위한 제스처’로서의 채찍질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두 번이나 채찍을 맞으신 것이 됩니다.
채찍질은 고대 시대에 매우 흔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채찍은 일반적인 태형의 종류였습니다. 채찍질은 죄인을 재판관 앞에서 엎드리게 해놓고 시행되었습니다. 몇 대를 때리느냐는 죄의 무게에 따라 결정되었고, 40대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신 25:2-3).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 즉 39대를 맞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율법에 기초한 것입니다(고후 11:24). 39대로 정한 것은 아마도 셈을 잘못할 경우에 대비해서 39대로 정한 것 같습니다. 또한 40대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맞게 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40대 이상을 때리면 이는 그 죄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채찍의 형벌을 가할 때 그 사람의 몸 상태를 살핀 후 행해졌으며 손을 기둥에 묶고 웃옷을 벗겨 가슴에 13대, 좌우 어깨에 각각 13대를 때렸습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뼈나 금속 조각이 달려 있는 채찍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이 채찍을 때릴 때마다 그 조각이 살점을 뜯어내어 죄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인 죄수는 채찍 형벌을 받지 않고 몽둥이로 태형을 받았고 오직 노예나 비로마인들만 채찍 형벌을 받았습니다(행 22:25).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채찍질은 군인들이 시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게 날카로운 뼈나 금속 조각이 달려있는 채찍으로 예수님을 내리쳤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금새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께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미친 몽상가 정도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은 것은 황제가 쓰는 관을 본뜬 것입니다. 이 가시나무는 대추야자나무로 만든 것으로 매우 긴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는 서로 잘 얽혀 붙기 때문에 왕관처럼 둥그렇게 엮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로마의 동전에는 왕관을 쓴 여러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군인들은 긴 가시가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머리 위에 나는 광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할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사정 봐주지 않고 가시가 머리에 박히도록 힘껏 눌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마에 붉은 피가 흘러 얼굴과 머리를 덮었을 것입니다. 이 가시나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합니다(창 3:18).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그 머리에 다 쓰시고 피를 흘리시며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후 군인들은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자색 옷은 로마 군인들의 망토로 군인들은 예수님의 어깨에 걸쳐 주었습니다. 당시 황제들은 자색 옷을 입었으므로 군인들은 예수님을 우스꽝스런 왕의 모습으로 만들어 조롱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외치며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왕에 대한 존경과 예의와 충성 대신 손으로 얼굴을 쳤습니다. 굵직한 그들의 주먹이 얼굴을 가격하면서 예수님을 놀잇감으로 삼아 한껏 그들의 무료함을 달랬습니다. 하늘의 황태자께서 그가 창조한 인간에 의해 이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다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요한과 그의 독자들에게 이 장면은 참으로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계셨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가시에 찔려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의 몸은 채찍으로 맞아 피가 엉켜 자색 옷이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보라! 이사람이로다” 빌라도의 말은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언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1:29). 피범벅이 된 불쌍하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시러 간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는 예수님을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아 유대 지도자들도 만족시키고 무죄한 자를 석방하고자 하는 그의 명분도 갖고자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보면 초라한 왕의 모습을 보이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는 채찍을 맞아 온 몸이 망가지고 상처와 피 투성이의 불쌍한 왕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몰골이 말이 아닌 자를 풀어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도로 그들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빌라도의 말에서 보라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을 요구한 유대인들(5-7)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자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요한이 그들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그들의 외침이 그치지 않고 격분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소리를 지른 자들은 “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무리들이 소리를 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7:20; 막 15:11).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순순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무리를 충동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역죄로 고소해 놓고 자기들은 민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총독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폭동은 로마 중앙 정부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가 파견한 총독들이 식민지의 민란으로 그들의 자리를 잃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 자리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절대 먹이를 물면 놓치 않는 사나운 짐승과 같이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은 무리들의 약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이 여론에 휩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신성모독을 한 자요 로마에 반역을 하여 자기 민족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위험한 자임을 알리고자 여론전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였습니다. 무리들은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빌라도의 석방 판결을 따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그 외침을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다수의 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가는 자기들의 신상에 위협이 올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라는 것이 불합리하고 모순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악을 행했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왕으로 영접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흔들리는 갈대였습니다. 무리들의 외침은 피에 굶주린 야수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반면에, 도리어 이교도인 빌라도가 주님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습니다. 괜히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리들의 강력한 요구에 한 발 물러섰습니다. 그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형 집행권이 없는 그들에게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 번째로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였습니다(18:38; 19:4). 그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집요한 요구에 이미 손을 항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고 이는 소요사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정의보다 로마의 평화를 지키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했고 그는 로마의 평화가 깨지게 될 경우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는 무죄한 자의 피 흘리는 것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래에 익숙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이 무죄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이 데려다가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모순이었습니다. 정치적 수사는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허다합니다.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자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면서도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함으로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붙들고 빌라도를 몰아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정치적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약점을 파악한 그들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 율법에 의하면 신성모독으로 죽을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레 24:16). 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 전에 빌라도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의 무죄 선언에 대해 몹시 반발하자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 대리자로서 유대인의 신에 대해 두려워할 리가 없습니다. 로마는 군대의 힘으로 전 세계를 정복한 힘 있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두려워하는 것은 갑자기 미신적인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섬겼고 각 지방마다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온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신들 중 하나가 그를 방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의 아들을 채찍질하고 조롱한 자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종교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가 행한 잔혹한 행위로 인해 신들의 미움을 사서 자기의 인생에 혹시라도 액운이 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두려움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27:19을 근거볼 때 그는 아내의 불길한 꿈 이야기가 생각나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꿀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 사람으로 인해 애를 많이 태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사람을 보내어 간청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말이 생각이 나서 더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는 종교성이 없었지만 그가 자라온 종교적 영향으로 미신적인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십자가 형을 선고한 빌라도(8-16)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 지라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너는 어디로부터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그 전에 했던 심문에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법으로 고소한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신에 사로잡힌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그가 들어왔던 로마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땅에 온다는 미신을 믿고 예수님이 어떤 신이냐는 질문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만일 그가 로마 신화에 나온 신들 중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유대인들이 믿는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질문은 혹시나 해서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재판관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재판관의 질문에 침묵하는 것은 그 재판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재판관을 경멸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자기를 변호한다고 하더라도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속제물이 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의 쓴 잔을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에게 “내가 그로라”라고 대답하셔서 신성모독으로 기소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정치적인 질문에는 적극적으로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그의 나라의 속성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대답으로 예수님은 그의 무죄함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어디로서냐?”라는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마음을 돌이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에 화가 났습니다. 그는 다급하게 예수님이 대답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는 재판장으로서 사형집행권이 있음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압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허세와 자랑이 있었습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는 그런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준 권한은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주어진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 스스로 그 권한을 거머쥔 자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착각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와 교만 때문에 권력을 남용합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잊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름으로 무죄한 자에게 가두거나 죽이는 일을 합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이 그의 석방의 노력에 대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반응으로 여겼습니다. 권력자들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것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달거나 저항하려는 것을 보면 그들을 혼내주고자 하는 본성이 작동합니다. 빌라도는 생사여탈권으로 위협하면서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침묵을 깨고 빌라도의 착각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빌라도의 권세는 로마 황제로부터 주어진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권한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 권세의 기원에 대해 분명히 정리하였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그 권세가 설령 악인에게 주어지더라도 그것조차 세상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권세입니다. 권력자들이 이를 모르고 권세를 남용한다면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권력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인을 벌하며 억울한 사람이 없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해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마음대로 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십자가형을 언도한 것도 인류 대속을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에 기초하지 않는 그의 판결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인 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자기를 빌라도에게 넘겨 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넘겨 준 자”는 바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범위를 확대하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적 권세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권세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재판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산헤드린의 동의를 밟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죽의려고 모의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11:50). 그들은 백성을 내세웠지만 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교도로서 영적인 것에 무지한 자로서 저지른 것이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지만 고의로 죽이려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죄의 대가는 더 크다는 것입니다.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왔다갔다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는 것과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 말 들으면 그게 옳고 저 사람 말 들으면 저게 옳다고 여기며 사람의 반응에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석방 결심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그의 결정을 번복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가이사의 충신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가이사의 충신”이라는 말은 영어로 Caesar’s friend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하여 신임을 얻은 특별한 엘리트 그룹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사실 빌라도가 “가이사의 친구”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마 그는 가이사의 친구라는 그룹에 가입하는 것이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그랬듯이 그의 목표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고 로마를 위해 일하는 권력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은 빌라도가 이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한다면 그들은 로마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로마 황제에게 불충한 빌라도를 처벌하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최대 관심사는 그가 권력자로서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는 무죄한 자를 죽인 것에 대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그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가이사의 충신”을 거론한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정권을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가증스런 연극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를 그들의 왕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이 말들은 빌라도를 향해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왕이 없고 오직 로마 황제 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 항변했던 말과 완전히 반대되는 발언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8:33). 그들은 상황에 따라 논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카말레온처럼 자기를 변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고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며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함으로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자들이었습니다(8:44).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 )에 있는 재판석 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총독의 자리가 위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으나 유대인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빌라도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가 무죄한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린다면 ‘정의의 의자’라고 하는 재판석에 앉아 있으면서 로마의 정의를 우습게 만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석방한다면 유대 지도자들과의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고 그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재판석에 앉았으니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 날은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 준비일이라 가부 간에 결정을 지어야 했습니다. “돌을 깐 뜰”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말합니다. 이는 히브리 말이나 아람어로 “가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바다”라는 뜻은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광장 안의 재판석이 있는 연단을 말합니다. 총독은 그 곳에서 대중들에게 연설을 하거나 재판을 열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 판결을 내리기 위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요한은 이 날이 유월절의 준비일이고 제 6시라고 기록했습니다. 유월절 준비일은 금요일 저녁 안식일의 예비일을 가리킵니다(31).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마 26:17-19). 마가는 이 때를 제 3시라고 하였고(막 15:25), 요한은 제 6시라고 하여 일치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서 온 땅에 어둠이 임한 때가 제 6시(정오)라고 하였고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각이 제 9시(오후 3시)라고 하였습니다(마 27:45; 막 15:33; 눅 23:44). 요한만이 이 때를 제 6시라고 언급하고 있어 성경을 읽는 사람은 당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 로마식 시간으로 기록해서 우리와 같이 오전 6시라고 합니다.
어떤 영어의 번역을 보면 about noon(NIV; NRSV)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어 낮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시각과 같은 로마의 시간 계산법 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6시에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고 오전 9시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시는 것이 되어 일치됩니다. 그런데 이를 유대식 시간 계산으로 보면 낮 12시가 되어 문제가 생깁니다. 요한이 유대식 시간 계산법으로 의도했다면 낮 12시가 됩니다. 어떤 학자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수를 약속한 시각이 제 6시, 즉 낮 12시이므로 이것과 연결시키기 위해 정오를 의미하는 제 6시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요한이 삽입된 형식으로 그 날이 유월절 예비일이라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이라는 것을 단순히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운명하신 시각의 중간 정도의 시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일치시켜 요한이 로마식 시간 계산법으로 기록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유대식 시간 계산법과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혼용해서 썼다고 보는 전통적인 해석이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요한은 삽입 문장의 형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유월절의 준비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신 날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구약의 출애굽의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역사의 모형임을 말해줍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 재앙을 피하고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족별로 어린 양을 잡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어린 양을 희생시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모형으로 삼으셨고 그의 외아들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유월절의 준비일”이라는 말을 상기시킴으로 유월절 당일에 죽으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요한은 이방인 빌라도의 말을 통해 왕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빌라도는 옆의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며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무죄하고 그들이 경멸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듣고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이 젖어 빌라도의 비아냥은 지나쳐 버렸습니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왕으로 오신 분을 이렇게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기심 때문에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혐오의 감정으로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같은 동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을 부인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빌라도에게 청하였습니다. 심지어 가이사에게 충성 맹세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구원자로 오셨으나 이런 취급을 받으신 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라고 하였고(사 49:7),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 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도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성을 상실하고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우리는 군중 심리에 이끌리지 않고 진리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이 문제를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려놓고 회개하고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분노의 외침을 반복하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일관되게 예수님을 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달라는 것이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마음은 이미 십자가 처형의 판결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유대인들의 확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죄한 자를 죽게 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습니다. 그는 무죄한 자를 억울하게 죽게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현실적인 유익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무게를 덜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잘못된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의 반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는 의미로 자기 양심의 가책을 누그러뜨리고자 했습니다. 마태복음 27:24에서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기는 책임이 없고 그의 죽음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충성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말은 실로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삿 8:23; 사 26: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 나라처럼 그들도 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이스라엘의 요구를 듣고 마음이 상했습니다(삼상 8:6).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삼상 8:7). 하나님은 결국 왕을 섬기는 대가에 대해 이르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하나님은 왕정 국가를 이루게 하시고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통치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왕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였고 그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방 국가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깨달은 것은 “우리의 통치자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인의 18기도문 중 11번째 기도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밖에 왕이 없습니다”라는 기도를 습관적으로 올렸습니다(세모네 에스레 기도문). 그러나 그들은 이런 기도를 하던 그들은 ‘하나님’ 대신 ‘가이사’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발하였는데, 실제로는 그들이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25에서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함으로 자기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말대 로 그들에게 임할 끔찍한 재앙을 생각하지도 않고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함부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대량학살을 당하며 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 피가 그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는 말을 듣고는 유대인들이 물러설 뜻이 없음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을 말합니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형 집행권을 넘겨줄 리가 없었습니다. 23절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는 표현을 볼 때 군인들이 사형을 집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정의를 버리고 타협을 선택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썼으나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죄가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불의의 판결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어떤 일을 결정하고 판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때 원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의와 타협할 것인가 늘 갈등의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의의 판단입니다. 그들에게 ‘과정의 선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석방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심각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문제는 우유부단함이었습니다. 그의 판단의 기준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무리와 예수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의 생각은 갈대처럼 여러 번 흔들렸습니다. 지도자는 정의의 관점보다 여론의 관점에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론의 관점은 그럴듯한 변명이고 결국은 자기의 지위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여론을 핑계대지만 그것은 ‘선동된 여론’이었습니다. 불의의 판단은 결국 자기 유익과 관계되어 작용합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죄는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기록되어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넘겨준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유다가 안나스에게 넘겨주었고(18:12-13),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넘겨주었습니다(18:24). 가야바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18:28),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16).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들에 의해 선동된 군중들, 이방인인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외 없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의 부류에 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라고 하였습니다(행 2:36). 여기서 청중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이방인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야”라고 발뺌하려고 하지만 성경은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선포하기 때문이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에는 이런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 즉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며 그의 구원의 초청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따르는 삶을 살므로 그와 연합한 사람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선물을 받고 성령이 이끌리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구원은 죄인으로서의 자아발견에서 시작됩니다. 성화의 동기 역시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주권적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감격 속에 살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17-27)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 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라는 구절은 원어와 영어 성경에는 16절 후반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당연히 로마 군인들을 말하고 사형 집행은 백부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 형을 받은 사형수는 직접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라틴어로 ‘파티불룸(patibulum)’으로 십자가의 가로대를 말합니다. 사형수는 가로대를 목에 걸치고 양팔은 뒤로 젖힌 채로 줄에 묶여 멍에처럼 메고 갔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 바로 전에 채찍을 맞은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무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벼운 단계의 채찍을 맞으신 것만을 소개했습니다(1).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린 후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채찍을 맞으신 것을 기록했습니다(마 27:25-31; 막 15:15-20). 이 채찍은 가장 높은 단계의 채찍질(베르베라티오)로 채찍 끝에 납이나 뼈조각을 달려 있어 이 채찍을 맞으면 살점이 뜯겨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옷이 벗겨지고 기둥에 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내리치는 채찍에 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이 채찍질이 얼마나 잔혹했던지 채찍을 맞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형수가 채찍을 맞다고 내장이 파열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인들이 우는 장면의 기록을 생략했습니다(눅 23:28-31). 요한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사건도 생략했습니다(마 27:32; 막 15:21; 눅 23:26).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나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에게 역사의 바톤을 넘기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사건을 생략한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의 ‘고난의 길”(비아 돌로로사; 라틴어)을 길게 서술함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은 한 문장으로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함으로 그의 왕되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죄를 짊어지심으로 우리의 죄짐이 풀어진 감격스러운 장면을 한 문장으로 집약해서 표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곳은 해골이라는 곳으로 히브리어(아람어)로 “골고다”입니다. 누가 외에 다른 복음서는 “골고다”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해골이라는 곳이라는 뜻의 ‘갈보리”라고 하는데 라틴어의 ‘칼바리아’의 음역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묻힘으로 해골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해서 “골고다”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처형 장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곳은 성벽 바깥쪽 예루살렘 근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곳이 “골고다”라고 명명된 이유는 이곳의 모양이 해골을 닮은 언덕과 같아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가 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성경이 아닌 찬송가에 나온 가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마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언덕 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군인들은 해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요한은 공관복음과 달리 단순하고 짧게 두 행악자 사이에 못 박히셨다고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산 자를 못 박아 두거나 죽은 자를 매다는 것은 일종의 경고의 선언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를 극형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대상은 노예, 피정복민들, 낮은 계급의 사람들, 중죄인들과 반역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태는 X자 형태, T자 형태,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 형태가 있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 팔과 다리를 묶었는데 산 채로 두어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죄수가 땅 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해서 배고픈 짐승들이 충분히 그 발을 뜯어 먹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한 경우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도록 하기 위해 높은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19:29; 막 15:36).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벌거벗긴 채로 매달려 있음으로 수치를 당했습니다. 또한 몸의 진액과 부산물이 줄줄 새어나옴으로 그 모습은 처참하였습니다. 죄수는 오래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놓여 극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 사형수는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리로 밀어올리고 팔을 당겨서 호흡기가 열리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팔과 다리의 신경을 자극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근육 경련이 일어날 때마다 몸이 움직여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을 견뎌야 했습니다. 힘이 없어 몸이 무너지면 곧 질식하여 죽었습니다. 그래서 죄수의 고통을 연장하기 위해 몸을 부분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의자의 역할을 하는 나무조각(세데큘라; sedecula)을 부착했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형벌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너무 잔인하여 황제의 허가가 없이는 어떤 로마인들을 십자가로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려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 박히신 지 6시간만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32-33).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이렇게 처절하게 고통하시다 죽으셔야 했을까요?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고난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5).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서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장벽이 가로 막히게 되었고 죄의 절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죄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엡 2:13-16; 롬3:25). 이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죄의 절벽에 놓인 다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롬 6:33). 이는 육체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고통하는 지옥의 형벌, 즉 둘째 사망을 포함합니다(계 21:8).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허락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참혹한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은혜로 값없이 속량하셨습니다(롬3:25). 십자가에는 자기를 반역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3:16).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이로써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3-5).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1:2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지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6:14).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고 부활과 함께 복음의 요약입니다(고전 2:2; 행 2:23-24; 고전 15:3-4). 십자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예수님께서 못 박히실 때에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혔는데 예수님은 그들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요한이 두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공관복음에는 “강도”(마 27:38; 막 15:27), “행악자”(눅 23:33)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될 정도이면 이 두 사람은 중범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있고 이들이 좌우편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중범죄자 취급을 받으셨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이사야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신 것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습니다(갈 3:13).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 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빌라도는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NIV과 NRSV는 죄패를 새겨 십자가에 달도록 시킨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나머지 번역은 능동태로 되어 있어 빌라도가 써서 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빌라도가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은 죄패를 목에 매달거나 사형수 앞에 죄패를 앞세워 처형장까지 가면서 사람들이 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죄패를 십자가 꼭대기에 고정시켜 만인이 보도록 했습니다 죄패의 내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의 왕 예수”(마 27:37)라고 하였고, 마가와 누가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막 15:26; 눅 23:38). 요한이 가장 길게 죄패명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죄패명을 보면 공식적으로는 예수님의 죄가 반역의 죄목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글자를 고쳐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쓸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이 문구가 그들을 화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메시아에 대한 호칭이라 유대인들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빌라도는 그 죄패를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히브리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대부분 사용했던 아람어를 말하고, 로마말은 로마 관료와 군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를 말하며, 헬라말은 그 당시 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권 나라들이 통용하는 세계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호칭인 “유대인의 왕”이심을 전 세계에 선포한 셈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예수님의 왕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대로 행할 용기가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거짓을 공표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성취된 것이고, 죄패는 예수님이 온 세계의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방인을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 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를 찾아와 죄패의 내용에 대해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못 박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마 27:41; 막 15:31).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꼭대기에 달린 죄패를 보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유대를 조롱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의적의 의미로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의 왕”인데, 빌라도가 그렇게 써서 화가 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문구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모욕적인 문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에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이 반란죄로 죽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도록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주기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내용이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어 있어 명절을 맞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그들의 요구를 과감히 거절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요구에 승복했습니다. 이제 그도 자존심이 있었는지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더 이상 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갈기갈기 찢겨진 마지막 남은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전 세계에 선포하였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예수님의 왕되심을 만천하에 인증하였습니다.
십자가 곁에 있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23-27)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3-24절의 내용은 공관복의 내용과 비교하여 더 길고 구체적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다고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군인들이 겉옷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예수님이 입으신 속옷 모양이 어떠한지, 그들은 속옷을 어떻게 나누어 가졌는지, 이런 일이 이루어진 의미가 무엇인지 서술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기념으로 탈취물을 취하듯이 죄수들의 물건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조금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집행한 군인들은 십자가 처형이 부수입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옷”과 “속옷”을 구분하였습니다. 앞에 언급한 “옷”은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garments로 번역했는데 복수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외출할 때의 복장과 연관된 모든 것 즉, 샌달과 벨트, 두건까지 포함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이를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은 옷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지만, 옷과 함께 샌달과 벨트, 두건을 각각 나누어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 명의 군인들이 나누어 가진 것을 보면 십자가 형을 집행한 사람의 숫자가 4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입으셨던 속옷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속옷은 KJV에서는 coat로 ‘상의’라는 뜻이고 NIV에서는 undergarment로 ‘안에 받쳐 입는 옷’을 말하며, 다른 번역에서는 대부분 tunic으로 ‘긴 상의’를 말합니다. 이 속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속옷이 아닌 아주 긴 상의입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호지 않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옷은 어깨나 옆구리의 이음매가 전혀 없는 것으로 성직자들이 입는 긴 옷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여러 직물이 혼합되어 섞어 짜지 말도록 했기 때문에 이음매 없는 속옷을 입었다고 합니다(신 22:11). 어떤 이들은 이음매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속옷은 교회의 연합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흐름과 관련이 없는 해석입니다. 이 속옷은 만들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에게는 귀한 것이었고 그들은 이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이긴 사람이 가져간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은 이토록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역사적 사실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요한은 한 가지 덧붙여 군인들이 옷을 나누는 것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말했습니다. 이는 공관복음에는 없는 독특한 기록입니다. 요한이 인용한 말씀은 시편 22:18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입니다. 인용된 구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겉옷은 나뉘었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져갔습니다. 군인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고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미리 정해진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악인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군인들에 의해 그의 옷이 탈취물이 되어 누가 가질 것인가 내기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어김 없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곁에는 로마 군인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일에 전념하는 로마 군인들과 대조적입니다. 이 여인들은 고통하시면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아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외롭지 않도록 예수님 곁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저자 요한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 “그 제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시므온의 예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눅 2:35). 아들이 처참하게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칼로 그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모”는 his mother’s sister로 성모 마리아의 자매입니다. 그녀는 세배대의 아들들, 즉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입니다(막 15:40; 막 16:1). 그러므로 한글 성경은 “이모”로 번역하였고, 요한과 예수님은 이종사촌 사이가 됩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이고(막 15:40), 글로바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 하나이며, 그를 성모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형제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예수님 곁을 지켰던 여인들의 특징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이모)와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살로메)라고 하면서 3명을 언급했고,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글로바의 아내)와 살로메(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마태와 마찬가지로 동일 인물 3명을 언급했습니다. 누가는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만이 십자가 아래에 이 3명의 여인들과 함께 성모 마리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면서 요한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독특하게도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에게 맡기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지시기 전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 예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섭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2:4).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시느라 가족들을 돌보시지 못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곳곳을 떠돌아 다니시는 예수님이 걱정이 되어 그가 계신 곳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라고 가족에게는 섭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2:49-50). 예수님께 가족은 우선 순위에서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처럼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픔을 감당했습니다. 동생들은 이런 형으로 인해 나름대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이런 형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세상적인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7:3-5).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해 인간적으로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었을 때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듯 아팠을 것입니다(눅 2:34-35). 예수님은 이토록 자신으로 인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그의 제자 요한에게 맡김으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시고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으로서의 의무 또한 저버리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요한이 예수님의 사촌으로서 가족이라는 사적인 입장에서 특별히 이 사건을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28-30)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님은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 하신 후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가리켜 예언한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신 구속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12:23). 예수님은 그의 대제자상적인 기도에서 자신의 죽으심을 가리켜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1, 4). 이는 그의 죽으심을 통해 인류 구원 역사가 완성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수많은 고통을 견디시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짐으로 영화롭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요한은 “때” 사상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이 “때”를 많이 말함으로 십자가에서 구속 역사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의 목마름을 호소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탈수로 인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시편 22:15은 예수님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호소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요한은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신 포도주는 포도주에 식초를 타고 물로 희석시켜 먹는 포도주로 값이 쌌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먹는 일반적인 포도주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군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와 혼돈해서는 안됩니다(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여 사형수가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죄를 온전히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하신 것은 탈수로 인한 목마름보다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호소를 듣고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우슬초는 바위가 많은 틈에서 자라는 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이었습니다. 해면은 갯솜동물로 바다에 사는 둥근 덩어리나 항아리 모양의 젤라틴(gelatin) 껍질로 싸여 있는 몸체에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 물을 머금을 수 있는 스폰지(sponge)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슬초처럼 휘어지기 쉬운 풀에 포도주를 머금은 해면을 달아 예수님께 올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슬초가 키가 1미터 정도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입가에 대기에는 길이가 짧습니다. 그래서 이를 기초로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지 않으셨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는 갈대에 꿰어 마시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 27:48). 갈대는 원어로 지팡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갈대로 지팡이를 만들어 쓰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종합하여 갈대 줄기에 우슬초로 해면을 엮어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줄기(stalk)나 가지(branch)라는 말을 첨가하여 우슬초의 줄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갈대 줄기에 우슬초로 엮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해석자들의 상상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으나 요한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어린 양의 피를 우슬초에 적셔 문의 인방과 좌우 설주 뿌려 장자 재앙을 면했다는 기사와 연관시키기 위해 우슬초라는 것을 강조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출12:22). 우슬초는 물을 찍어 뿌리는 정결 의식의 도구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민 19:18), 시편 기자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우슬초가 정결과 죄 사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시 51:7). 이런 점에서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신 포도주를 마신 것을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과 동시에 죄 사함의 상징인 우슬초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 니라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말하고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조금의 아쉬움이나 후회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끝까지 다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심으로 시편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다 완성하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 구속의 계획을 암시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우리는 이를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22:18). 여기서 “네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있던 천하만민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메시아 왕국의 모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2). 이는 메시아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저주받고 심판받을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오래 동안 구속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하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관계성이 단절된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속죄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짐승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력이 한계적이라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하는 제사를 반복해야 했습니다(히 7:27; 9:25).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히 9:24). 하나님은 마침내 그가 약속하신 대로 그의 외아들을 대속제물로 삼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다시는 짐승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의 다 이루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99% 이루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1%의 분량의 노력을 함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는데 인간은 그 1%로도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1만년을 일해도 우리 죄를 값을 수 없습니다(마 18:24).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로, 값없이 그의 독생자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 1%라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1%의 행위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롬 1:17). 우리는 연약하여 자주 넘어집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복해서 나아가면 과연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까 의심이 듭니다. 죄에 자주 넘어지면 “어떻게 뻔뻔스럽게 또 나아가 죄 사함을 구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십자가로 나아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이라도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마 18:22; 요일 1:9). 우리는 그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기를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히 10:19). 우리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을 고집하지 말고 다만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에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떠나갔다는 말은 영어 번역에서는 gave up his spirit으로 그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23:46에서는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포기하다”라는 흔히 사용하지 않은 동사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무력해서 포기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파라디도미’로 ‘넘겨주다(deliver)’는 의미입니다. 이는 죽음에 대해 잘 사용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체포되고 심문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넘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셔서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넘겨졌고, 대제사장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 군인들에게 넘겨져 채찍질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넘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 넘기시심으로 우리는 그의 무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넘겨지심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예언하실 때 넘겨지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악한 세력들에 의해 무기력하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셨습니다(10:18). 그는 그의 죽음의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지배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비극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gave up his spirit이라고 공통적으로 번역함으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의 이 표현의 의도는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지만 그의 죽임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31-37)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날은 준비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하여 그들의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날은 정월 15일 전날, 즉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 개념으로 말하자면 그 전날 밤 만찬을 하시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붙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아침이 되자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사형판결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유월절 새벽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유월절에 희생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각은 오후 3시이므로 저녁 6시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날을 “준비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면서 동시에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므로 “큰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식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시체를 내려달라고 빌라도에게 부탁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누가 죽을 죄를 범하여 그를 처형한 후 나무 위에 달게 될 때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시체를 그냥 두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신 21:22-23). 일반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을 집행할 때 새들이 와서 숨이 붙어있는 산 사람의 살을 뜯어 먹도록 여러 날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은 죄수의 죽음을 빨리 재촉해야 할 때 망치로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는 몸이 처지면 기도가 막혀 질식하는데 그들은 숨을 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로 자기 몸을 밀어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부러뜨리면 자기 몸을 위로 밀지 못하기 때문에 금방 질식사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 좌우편에 매달린 두 행악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 다리를 꺽지 않았습니다. 이는 시편 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다리가 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찍 숨을 거두시면서 그 다리가 꺽이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리가 꺽이었다면 성경의 예언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유대인들을 통해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신 것은 출애굽 당시 희생되었던 어린 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량함을 얻었듯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심으로 심판과 저주 가운데에서 우리들을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독의 명령에도 그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이심을 말해줍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과 함께 복음서 중 요한만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은 그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옆구리에서 피가 나오지 않고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성화에서 보는 것 같이 높이 달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인의 창이 그의 옆구리에 창이 닿을 수 있을 정도에 달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들은 밑에서 위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그것이 심낭을 뚫고 심장을 통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심장을 둘러싼 막을 심낭이라고 부르는데, 심낭은 심장을 싸고 있는 두 겹의 막(섬유심장막, 장막심장막)으로 이루어진 주머니입니다. 두 겹의 막 사이에는 정상적으로 약 15~50mL의 액체가 있어 심장 박동 시 마찰을 감소해 주는 ‘윤활제’ 역할을 합니다. 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 액체가 나온 것이고, 피가 나왔다는 것은 창이 심장까지 뚫고 갔기 때문에 피가 나온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군인들의 창이 옆구리에서 심장까지 깊이 박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확실히 죽으셨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35절에서도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함으로 그의 죽으심에 대한 확실한 증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살아 있을 당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져 있었지만,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의 인성과 성육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처럼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시고 완전히 죽으셨음을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고 그의 부활 기사도 공관복음보다 더 길게 기록하였습니다. 만일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가 실신하였다고 한다면 그의 부활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십자가와 부활의 교리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고 이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에 속은 불쌍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꼼꼼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확실히 죽으셨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피와 물이 나오더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쓴 것은 그의 문학적 기법으로 보아 상징을 의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말씀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당하실 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요 6:54).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6). 성경에서 피는 죄 사함을, 물은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 사함을 상징하는 피와 정결함을 상징하는 물이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할 필요가 있지만, 저자 요한이 그의 편지에서 다시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 작사자인 파니 크로스비(Fanny Crossby)는 이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다음과 같이 작사하였습니다. “Jesus, keep me near the cross, There a precious fountain; Free to all, a healing stream, Flows from Calv’ry’s mountain.” 찬송가 144장 한글 가사는 영문가사와 아주 다릅니다. 이를 번역하면 “예수여, 나를 십자가에 가까이 가게 하소서. 거기에는 귀한 샘이 있나니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는 치료의 샘물이라네. 갈보리 산에서 흘러나오네.”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한은 35절에서 31-34절의 내용이 확실하고 구체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복음서 저자 중 요한만이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증인으로서 확신 가운데 그의 증언의 진실성을 피력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독자들이 믿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20장에서 부활의 이야기를 기록한 후 결론을 맺으면서 다시 한번 그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강조해서 말합니다(20:30-31). 요한은 공관복음의 저자들이 놓친 부분까지 상세히 추가로 언급함으로 그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창이 예수님의 심낭과 심장을 깊이 찌른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기절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요한은 이어서 성경의 두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죽음이 성경을 성취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는 33절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은 시편 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씀을 성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시면서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 12: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뼈가 꺾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37절에서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라는 또 다른 성경을 인용하여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그가 인용한 구약성경은 스가랴 12:10로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는 내용에서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라는 말을 발췌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찌른 자들은 로마 군인이지만 요한은 유대인들이 그 일을 했다고 단언합니다.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그의 설교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 유대인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행 2:36).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함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요한의 스가랴의 예언의 인용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 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사 53:5).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기 위해 못 박히셨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 없이 함을 받고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행 3:19).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38-42)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두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니고데모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고(마 27:57), 존경 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막 15:43; 눅 23:50).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고(눅 23:50),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막 15:43; 눅 23:50). 요한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서 제자임을 숨겼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요한은 공회원으로서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제자라고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두더지 신앙을 가진 아리마대 요셉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로 커밍 아웃했고 용기를 가지고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려움 많은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시체를 성밖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냈습니다. 가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반란자의 시체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중범죄자들의 무덤에 묻혀 영원히 죄인으로 낙인 찍힐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 한 사람을 예비하셨고 그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셔서 빌라도의 허락을 받도록 하여 명예로운 매장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반란의 수괴라는 죄목이 조작된 것을 알았기에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명예를 지켜주고자 시체를 내어주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그 전에도 세 개의 언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 위 팻말에 기록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메시아임을 온 세계에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9). 아리마대 요셉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그의 동료 산헤드린 공회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편에 서서 제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책임감 있게 감당했습니다.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한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일찍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고민을 털어놓은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왔습니다. 백 리트라는 30 킬로그램으로 200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입니다. 몰약은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드는 데 방부제로서 사용된 필수적인 향약이었고 침향은 몰약과 마찬가지로 방향성이 뛰어나 질 좋은 향품으로 사용되었으며(잠 7:17; 아 4:13-14), 몰약과 섞어 시체의 방부제로도 쓰였습니다. 이는 왕의 장례에 사용하는 분량으로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왕으로서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유대인으로 나신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들고 왔던 왕께 드리는 선물 중 몰약이 있었습니다(마 2:12). 요한은 니고데모가 드린 몰약과 침향을 통해 예수님을 왕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세 개의 언어로 쓰인 팻말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었고, 여기서도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왕으로 죽으셨고 왕으로 묻히셨음을 드러내었습니다.
40절은 우리말 성경과 헬라어 원문에서는 주어가 불분명하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they를 씀으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같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역할을 분담하여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찾기 위해 빌라도의 허가를 구한 일을 맡았고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오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세마포는 NIV에서는 strips of linen으로 ‘긴 천’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번역하게 된 이유는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라는 구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매장 관습은 긴 세마포를 무덤의 시체방의 평평한 곳에 먼저 깔고 그 위에 시체를 놓고 세마포를 머리에서 접어 발끝까지 감싸서 발 부근에서 내려오게 하고 천으로 만든 줄로 묶었으며 거기에다 별개의 천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무덤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안치되셨습니다. 마가는 이 무덤을 “바위 속에 판 무덤”이라고 하였고(막 15:46), 마태와 요한은 그 곳이 “새 무덤”이라고 하였으며(마 27:60), 누가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23:53). 그들은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한 후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마 27:60; 15:46). 바위를 판 무덤에 시체를 안치해 놓는 방이 있는데 이 곳에 시체를 놓아 1년 정도 두면 시체가 썩어 뼈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 뼈를 수거하여 작은 유골 단지에 넣어 무덤의 다른 곳에 보관하고, 시체를 놓는 방은 재사용됩니다. 마태는 이 무덤을 “자기 새 무덤”이라고 하여 이 무덤의 소유주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은 요셉의 가족들을 위한 무덤으로 아직까지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나셨듯이 묻히실 때도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시체가 거치지 않은 새롭고 깨끗한 곳에 누이시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이므로 이곳은 잠시만 머무실 곳이므로 처음 제공된 묘지에 장사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6:4은 예수님의 묻히신 영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로 예수님이 죽어 묻히신 것 같이 우리의 옛 자아도 무덤에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아나심과 같이 우리의 새로운 거듭난 자아가 살아남으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9-20절은 그리스도인의 새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죄악된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것과 같이 묻혔습니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결론을 유월절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때가 유대인의 준비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서둘러 예수님의 장례를 마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범죄자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공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니고데모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해가 지기 전에 왕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준비일은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그 날이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는 “큰 날”이라는 점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운명하심으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요한은 준비일을 언급함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시기와 광기로 인한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암시하였습니다.
42절 후반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셉의 가족묘에 묻히신 것은 무덤이 십자가 현장에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먼 곳에 묻힐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임시로 요셉의 무덤에 묻히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시체를 거기 두었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거기 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살아나실 것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묻히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리셨습니다(행 13:29-30). 무덤은 예수님의 영원한 거처가 아닙니다. 무덤은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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