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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받으신 예수님(요한복음 18:1-40)

1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자 요한은 이 기사 중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을 두 장면으로 나누어 삽입함으로 마치 드라마의 신속한 장면 전환과 같이 긴박한 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실 때나 심문을 받으실 때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시고 당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왕다운 기개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 있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문받으시면서 그의 왕이심을 선포하셨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빌라도에게는 진리의 증언자로 오셨음을 밝히시고 그를 진리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체포되신 예수님(1-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님께서 기도를 다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성 동쪽을 흐르는 시내로 예루살렘 성과 감람산 사이에 있습니다. 이 시내는 아주 작은 시내로 너비가 약 2미터 정도 됩니다. 기드론 시내는 와디의 일종으로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평소에는 말라 있었습니다. 이 시내는 실로암 못의 물과 합쳐 남동쪽 방향으로 흘러 사해로 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오수가 다 이곳으로 흘러갔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나면서 건넌 곳입니다(삼하 15:23). 

요한은 감람산 자락에 있는 동산을 소개하였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의 부유한 사람들은 감람산 자락 한적한 곳에 이런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이 곳에 자주 가셔서 기도하셨던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 곳은 접근이 쉬운 곳이었고 후미진 곳이었기 때문에 기도하기에 적절한 장소였습니다.예수님은 이 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뇌에 찬 자기 부인의 기도를 하셨습니다(마 26:36-46; 막 14:32-43; 눅 22:39-46). 요한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17장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를 다루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대신 12:27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신 후 그의 죽음을 생각하시면서 겪은 그의 고뇌를 다루었습니다.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눅 21:37; 22:39).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 밤이 되면 감람산으로 물러나 쉬시곤 하셨고(눅 21:37; 22:39) 그 곳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던 장소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2-3절에서 유다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유다의 배반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12장부터는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불가피하게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배반자 유다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2절에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라는 대목은 예수님께서 대적들에게 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유다가 알고 있는 곳으로 가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였지만 사람들 앞에 공개적 행보를 하심으로 그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을 두려워 해서 성전이나 예루살렘 거리에서 감히 그를 잡으려고 하지 못했가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대적들의 체포에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53:7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 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유다는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왔습니다. 유다는 이들을 데리고 오는데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관복음에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마 26:4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막 14:43),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눅 22:52)라고 함으로 로마 군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로마 군대가 왔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군대는 ‘스페이라’로 이 단어는 cohort(대대, NASB95; LEB) 또는 detachment(중대, NRSV; NIV)로 번역하였습니다. cohort는 760명의 보병대와 240명의 기병대로 구성되는데 천부장이 지휘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민란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증원군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cohort의 규모라기보다는 200명 정도로 구성된 detachment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은 12절을 보면 천부장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고 체포조로 온 “그 아랫사람들”은 성전의 경비대장들을 말합니다(눅 22:5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로마 사람들의 관심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심문에서도 나오듯이 로마 당국은 예수님의 영향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로마 군대를 언급한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한몫을 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함께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온 인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가담하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책임에서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찔리셨고 ‘나의 허물’ 때문에 상하셨습니다(사 53:5).

그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등과 횃불을 든 것은 예수님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을 수색하기 위해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저녁이라 항상 보름달이 떴기 때문에 밖은 환하게 비추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무기를 갖고 온 것은 혹시라도 예수님의 체포를 막기 위해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 압도적인 무장된 군인이 있어야 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이들을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마 26:53).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시면서 스스로 체포되셨습니다(마 26:54).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난 만왕의 왕이시지만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나라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36-37).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유다가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왔을 때 움츠러들어 뒤로 가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 싸울 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그의 죽음은 억울하게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초기에 유대인 관리들이 그를 잡고자 하셨을 때 피하셨습니다. 이것은 비겁하게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0:40; 11:54). 그러나 이제 그의 때가 이르렀습니다(17:1). 예수님은 긴 기도를 마치신 후 담대함을 얻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스스로 체포되셨습니다.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자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48-50을 보면 이 장면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미리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라고 말하면서 군호를 짰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조금의 양심의 찔림도 없이 능숙한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가룟 유다의 배반의 키스 장면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체포단들은 “나사렛 예수라”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투로 지어낸 호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가 나사렛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1:46). 예수님의 대적들은 모욕적인 뉘앙스를 담아 말했지만, 우리 주님은 그 이름을 영광스런 이름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에수님은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자기 자신을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라고 소개하셨습니다(행 22:8).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에게 이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심으로 자신이 그들이 찾는 자임을 밝히셨습니다. 헬라어에는 I am he로 되어 있지 않고 I am으로 되어 있습니다. I am은 ‘에고 에이미’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선포하신 이름입니다(출 3:14). 요한은 ‘에고 에이미’라고 하면서 구약의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와 연결을 의도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라고 함으로 유가 체포의 주동적 인물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다의 배반의 키스 장면을 묘사하는 것 대신에 그가 체포하는 사람 편에 섰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누구의 편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고자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음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 속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성경에는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닌 양다리를 걸쳐놓는 것은 곧 악의 편임을 말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에 선지자 엘리야는 그들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요한계시록 3:15-16을 보면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세상에 속하느냐? 하나님께 속하느냐?’의 기준을 제시함으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은 듣지 않습니다(요일 4:5-6).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예수님의 편이냐? 세상의 편이냐?’ 둘 중 하나이지 중간지대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하시자 그들이 물러나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들은 당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서론부터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연역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이 창조주요 말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고 그가 왜 그런 분이신지를 일곱 표적과 그의 말씀을 통해 드러내었습니다. 요한은 유다의 배반의 키스의 장면을 묘사하는 대신 예수님 스스로 “내가 그니라”라는 당당한 선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일곱 종류의 ‘에고 에이미’의 선포와 함께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신 모습을 연계하여 잠시나마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서술하였습니다(출 3:14). 체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상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진리의 편에 섰을 때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그들은 채찍을 맞고 풀려 났을 때에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 5:41).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설 때 하나님도 우리의 편에 서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상황에 필요한 용기와 믿음을 주시고 할 말을 넣어주십니다(막 13:11). 우리의 주의 말씀을 들고 전할 때 주님께서는 신적 권위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당하신 예수님을 통해 적대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고 돌아보게 됩니다.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땅에 엎드러진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라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이 일어나 자신을 체포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괜히 이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큰 화를 당할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라고 함으로 제 정신을 차리고 체포하고자 하는 그들이 온 목적을 알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가지 조건을 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간청의 말이라기보다는 권위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은 스스로 체포될테니까 자기 제자들은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그들이 “내 제자들을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닥칠 것이다”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신적 권위를 드러내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셨던 분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그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내가 그니라”라고 하심으로 그의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라도 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의 말씀에 그들이 엎드러지자 베드로는 용기를 얻어 칼을 휘두르는 돌발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도록 도우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신적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도 체포될 수도 있었습니다. 체포하러 온 사람들의 무장과 인원은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큰 용사라 하더라도 수백 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을 보면 열두 제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마 26:37; 막 14:33). 이런 것을 볼 때 제자들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만 체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핵심 제자들을 체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을 다 반란죄로 엮어 그 도당들을 멸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만 죽이더라도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더 크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자들도 역시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심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입니다. 이 지위는 열한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지위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서론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1:12). 사도 베드로는 박해받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9).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자”라고 하였습니다(엡 2:4-6).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이런 특별한 지위가 부여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대인들의 위협 가운데에서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가시는 도중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마지막 순간에서도 제자들이 체포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그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17장의 기도에서 유다에 관한 예외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는 유다가 체포하는 사람의 편에 선 본래부터 마귀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6:70).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나중에 그들의 사명을 다하고 순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 사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셨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그들이 자기 사명을 다한 후입니다. 제자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채찍을 맞기도 했지만 고난은 그들을 연단하였고 강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어 그들을 위험에서 피하게 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그는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하시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유혹에 넘어짐으로 마귀의 손아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위기에서 건지시고 지키십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님께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잡히시는 것을 보자 시몬 베드로가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대제장의 종을 쳤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의 종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어 체포하려고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격분하여 칼을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종의 머리를 정면으로 내리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칼을 빗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칼은 단지 그 종의 오른쪽 귀만 베었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칼을 들어 친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과 상처를 입은 자의 이름이 말고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때 아마 베드로가 생존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런 엉뚱한 행동을 한 자가 누군지 밝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름을 언급했더라면 아무래도 베드로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도들 중 사도들 중 가장 오래 생존했던 인물로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베드로가 이미 순교한 이후였을 것입니다. 요한이 굳이 베드로와 말고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의  역사적 정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스스로 체포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조건으로 제자들에게 손을 대지 말고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의도에 방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는 행동은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헛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이끄는 군대를 앞에 두고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함으로 자칫 제자들의 신상에 위해가 가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심으로 문제를 수습하셨습니다(10). 누가는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낫게 하시는 이적을 베푸심으로 문제를 수습하시는 것으로 기록했습니다(눅 22:51). 

베드로가 사용한 검은 헬라어로 ‘마히아라’로 작은 칼을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자답지 않게 왜 칼을 차고 있었을까요? 오늘날 우리들의 문화적 관점으로 볼 때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강도들이나 갱단이 갖고 다니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이는 치안이 잘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에는 강도나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면 이런 자기를 보호할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여행을 할 때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당시 아주 일반적인 복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6).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한 것이었고 그가 칼을 휘두른 것은 그의 주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충동적 행동은 21장에서 “주시라”라는 요한의 말에 겉옷을 두르고 물 속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러 간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21:7).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 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무모한 행동을 제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동이 자신을 위한 충심임을 아셨지만 그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임을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그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성경에서 잔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잔(시 116:13), 위로의 잔(렘 16:7), 기쁨의 잔(시 23:5)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잔이 있는가 하면 심판의 잔, 진노의 잔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시 75:8; 사 51:17, 22; 렘 25:15; 겔 23:31-33; 마 26:42).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바로 심판의 잔, 진노의 잔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아들이 온 인류의 그들의 죄로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잔을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죄는 없으시지만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잔을 마시는 것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괴로움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마 26:39). 이 잔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가 마실 심판의 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마신 진노와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에 온통 다 뒤집어 쓰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영접할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잔, 기쁨의 잔, 위로의 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한 또 다른 잔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이 세상에 임하지 않은 최후의 심판의 잔입니다. 베드로는 손에 검을 쥐었지만, 예수님은 손에 하나님이 주신 진노의 잔을 쥐셨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대속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했지만 우리 구주께서는 자기를 대속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Wiersbe). 예수님의 희생은 온 인류의 죄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히 12:2).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심(12-14)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진노의 잔을 마시고자 스스로 체포되셨습니다. 이데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였습니다. 결국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했던 대로 그들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체포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체포하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시는 그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붙잡히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과 같이 어떤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그들은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나스에게 먼저 끌고 간 것을 보아 안나스가 실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유대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습니다(민 35:25). 그러나 로마는 유다에서 대제사장의 영향력을 없애고자 종신직을 없애고 로마 정부가 대제사장을 임명하였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안나스는 AD 6년에 임명되어 빌라도의 전임자인 발레리우스에 의해 AD 15년에 물러났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안나스는 물러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종신직인 대제사상직을 바꾼 것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안나스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그후 안나스의 다석 아들들과 사위 안나스까지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안나스는 공식적인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의 가족이 그 직을 수행함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가야바는 AD 18년에 임명되어 AD 36년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재직하고 있었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11:51). 가야바는 그가 죽지 않으면 백성들 가운데 폭동과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로마가 개입할 것이고 그는 로마에 의해 해임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백성들을 위해 그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희생시킨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15-18)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끌려가시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요한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 견해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그가 사랑하시는 자”,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 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13:23; 19:26-27; 20:2-9; 21:1, 20-23, 24-25). 또한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우리는 요한을 갈릴리 어부 출신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0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켜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한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하층민으로서 오해를 갖기 쉽습니다. 사실 그 당시 어부들은 하층민이 아니라 중산층에 해당하였다고 합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가 그의 집에 고용된 품꾼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막 1:20).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매 사이였습니다(19:25).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사촌이자 세례 요한의 친척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로 제사장이었으므로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입니다.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베드로와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한 맹세가 있어서 예수님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13:37).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분께 끝까지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과 충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장소까지 따라왔지만 문을 지키고 있는 여자에게 막혀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요한이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니 베드로를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여종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지만 기회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는 그의 신분이 탄로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는 붙잡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는 문 밖에 서 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는 유혹의 문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문에 남자 하인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여자 하인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여자가 문지기의 딸이었다고도 추측합니다. 남자 문지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딸이 임시로 맡아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알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 베드로를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생 동안 뼈 아픈 고통을 겪게한 유혹에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문 지키는 여종은 베드로를 금새 알아보더니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이고 그 달빛으로 누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종은 문을 지키는 자로서 여러 사람의 동태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베드로를 유심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부른 것으로 예수님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여종의 질문을 보면 헬라어를 볼 때 긍정의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으로 단순히 질문한 것으로 어떤 가시가 있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인의 의도에 맞게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하러 온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그니라”(8)라고 대답하신 것과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맹세를 하였던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칼을 빼어들고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말과 행동은 모두 예수님이 같이 계실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고 그가 혼자 있었을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의 부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종이 그런 질문을 할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가 부인한 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놀라고 두려워서 부인하였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이 이렇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그것도 여종의 단순한 질문 한 마디에 무너졌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악의를 갖고 공격적으로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인한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모든 것이 끝장 날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예수님도 잡히고 자기도 잡히면 다같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위기의 순간만은 벗어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마음 속의 변명은 그의 구주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가 여자 하인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 후 그녀를 피해 뜰 안의 숯불로 갔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피해 혼자 어정쩡 서있다면 그의 행동은 더 의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다른 사람처럼 숯불로 가서 몸을 녹였습니다. 저자는 이 때의 날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지어진 도시이고 사막 끝자락이라서 해가 질 때 바람이 불고 온도가 쉽게 내려갔습니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이기 때문에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 있었던 때였습니다. 물론 낮에는 해가 내리쬐어서 뜨거웠지만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고 아침에는 이슬이 내릴 정도로 추웠다고 합니다. 심지어 유월절이 추웠을 때는 눈이 내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따라 매우 추웠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날씨를 언급한 것은 베드로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때와 날씨를 이용하여 상징적인 표현을 합니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때를 밤이라고 하면서 거듭나지 않은 그의 마음이 밤과 같이 어두웠음을 말하고자 했습니다(3:22). 또한 유다가 예수님이 주신 떡을 받아 먹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 때가 밤이라고 덧붙였습니다(13:30). 이는 유다의 배반으로 그의 마음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는데 그 때가 수전절로 겨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0:22). 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겨울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마음을 추위와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어두운 이야기는 부활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밤이 가고 동트는 새벽이 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적인 것은 ‘숯불’입니다. 우리말에는 ‘불’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숯불'(a charcoal fire; ESV)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21:9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생선을 요리해 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과 함께 두 번이나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숯불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고 나가니 그 때가 밤이었지만, 베드로가 제자임을 부인하는 곳에는 숯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불꽃은 베드로가 낙심하여 낙향하고 다시 물고기 잡는 어부의 인생으로 되돌아 갔을 때에도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타오르는 숯불을 보고 그의 자책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숯불처럼 언제나 타오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징되는 숯불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장소에서도 타오르고 있었고 그가 제자 생활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낙향했을 때에도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쉽게 낙심하고 죄에 넘어집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자기의 잘못 때문에 멀어진 그의 사랑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자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숯불과 같아서 내가 실패하거나 넘어졌을 때에도, 또한 자책으로 인해 마음이 멍들고 아플 때에도 그의 사랑은 변함 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심(19-24)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 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 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제 장면이 바뀌어 대제사장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는 그의 제자들에 관한 질문이고 둘째는 그의 교훈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은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모든 판결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또한 피고인의 변명을 듣는 것은 단지 요식행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에 대해 질문한 것은 제자들까지 엮어 이 문제를 처리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의 가르침인 율법에서 떠나게 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말한 것을 꼬투리로 삼아 성전을 모독한 자로 여겼습니다(마 26:61).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자기들을 겨냥하여 혹독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은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 세력을 규합해서 세력을 키워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것으로 보았고 예수님을 반란죄로 고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제자들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63을 보면 대제사장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다른 질문에는 침묵하셨지만 이 질문에는 확실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 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이에 그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여기고 이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확실한 자백을 받아냈다고 득의양양하였습니다(마 26:65-66). 요한은 이 과정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물으니”라고만 기록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의 대답에서 제자들에 대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서만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어떻게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치셨고 은밀하게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열두 사도와 함께 계셨을 때 따로 가르치신 것도 그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법정에서는 보통 피고를 변호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하루종일 피고를 변호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판에서는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에 비협조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고인에 대한 증인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들의 진실에 기초한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거짓 증인을 내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61). 그런데 이는 그들이 사전에 다 짜놓고 거짓 증언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증인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는 것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 판단으로 왜곡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또한 피고 쪽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대제사장은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절차에 따르지 않은 불공정한 재판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형사 재판 과정은 낮은 제외하고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죄가 선언된다면 그 선고는 낮에 이루어져야 하고 유죄가 선고된다면 그것은 그 다음 날까지 가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안식일 저녁이나 명절 저녁에 재판의 선고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재판이 이루어졌고 유월절 밤에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불법이 됩니다. 사도행전 8:33도 이 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 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그는 예수님께 대해서는 지극히 뺨을 때림으로 비열하게도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대제사장에게는 최선을 다해 아부하였습니다.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그는 대제사장은 추켜 세우고 예수님은 모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결코 무례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법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법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증언하라”라고 하심으로 증인을 내세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법정에서 피고인은 재판을 받을 때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에 침묵하셨다면 그의 침묵은 굴복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의가 조롱을 당하고 그들의 악행이 정당화됨으로 법과 공동체를 부당함에 넘겨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악한 자에게 법적 승리를 줄 수 없으셨습니다. 안나스의 목적은 예수님을 애걸하는 피고인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당당한 모습에 유대 권력자들과 나중에 로마 총독인 빌라도도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결국 권력남용으로 악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들은 불법적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 사형판결을 내리고 빌라도 또한 무리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라고 말씀하신 그의 가르침과 상충되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취지는 사적인 보복의 감정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미움의 감정을 갖고 악인을 대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이를 돌려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자는 죄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정의 앞에 굴복하는 자세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법정에서 보이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대처하심으로 대제사장의 불법적인 심문과 아랫 사람의 폭력에 대해 맞서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예수님께서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을 선언하였습니다(행 2:23).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대해 보복을 구해서도 안되고 같이 욕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보이신 것처럼 잘못된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옳은 것을 위해 권리를 요구하고 이성적 대처를 해야 합니다. 이로써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후 안나스를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안나스의 관저에서 가야바의 관저는 같은 곳에 위치하였고 가야바가 정식 대제사장이었으므로 공식적이고 더 넓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그 곳으로 보내어졌을 것입니다. 안나스는 절차상 불법 심문에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안나스의 심문과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보내는 내용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반면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조롱하는 사건과 침을 뱉는 모욕의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마 26:67; 막 14:65). 또한 여러 증인을 내세워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할 것과 사흘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는 증언에 관한 내용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마 26:59-61; 막 14:58-59).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대답하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면 신성모독이라고 말하며 사형 판결을 내린 사건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마 26:64-65; 막 14:64눅 22:69). 요한복음은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증인을 요구한 것과 성전 하급 관리에게 얼굴을 맞았을 때 침착하게 때린 것의 불법성에 대해 항의함으로 예수님의 당당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 과정에서 그의 침착함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박된 채 가야바에게 보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결박되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으셨고 결박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모습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이 당당한 모습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고 있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슬퍼하고 두려워하기 쉽지만 심문받는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시고 당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침착하고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여기가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는 것의 결론입니다. 다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최종 이야기를 거쳤다가 그후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부인(25-27)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 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25-27절은 베드로가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를 한꺼번에 다룬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마 26:69–75; 막 14:66–72; 눅 22:56–62). 요한은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사건을 중간에 끼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장면을 바꾸어 가면서 이야기 구성을 함으로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불을 쬐면서 사람들 중에 서 있었습니다. 이는 18절에 이어 반복되어 나온 표현입니다. 그때가 추운 밤으로 이는 그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두 번째 질문을 한 사람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두 번째 질문을 한 사람은 “다른 여종”(마 26:71), “여종”(막 14:69), “다른 사람”(눅 22:58)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을 한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요한은 “대제사장의 종”,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고 하였고, 마태는 “곁에 섰던 사람들”(마 26:73), 마가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막 14:70), 누가는 “다른 사람”(눅 22:58)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런 차이점을 보였을까요?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이고 요한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즉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전해들은 이야기이고 요한은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비교할 때 첫 번째 질문자는 공통적으로 “여종”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에서 질문자의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상황이고 분명 한 사람이 질문했으면 그 말을 받아 여러 사람이 질문했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세 번째 질문자를 “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요한은 이를 두 번째 질문자로 넣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 번째 질문자로 대제장의 종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였습니다. 이는 요한이 제공하는 추가적인 사실입니다. 이를 볼 때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른 제자”는 요한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그가 대제사장 집안의 사람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첫 번째 질문자인 여종의 질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 베드로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것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눈동자와 긴장된 얼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끼여들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자기 보호 본능으로 제자임을 부인하였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같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막다른 곳까지 몰아 붙였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목격자의 추궁이니 베드로는 꼼짝 없이 예수님의 제자임이 발각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강하게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을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라고 하면서 아주 약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저주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저주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면 저주를 받아 죽을 것이라는 맹세의 표현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베었고 이제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더 겁에 질려 가장 강한 표현으로 제자임을 부인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닭이 울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간 전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예언하셨는데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4:72; 눅 22:62).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이 사복음서에서 다 다루었다는 것을 통해 이 사건이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맹세할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는 수제자로서의 체면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같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한없이 연약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힘드셨습니다(요 12:27). 그러나 곧 자기 뜻을 부인하고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온전히 아버지를 의지하셨습니다. 이것이 강함의 비결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는 시련 앞에서 넘어지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강함을 얻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보내시어서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게 하셨습니다(눅 22:43).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은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다고 하며 연약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강해지는 비결인 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겉으로 강해보이지만 시련 앞에서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실제로 강하지 않은데 강한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다는 자기 인식을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안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리어 그의 여러 약한 것들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가 약할 때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감’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여종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베드로에게 그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할 때 그의 실패를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제자임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자책으로 인해 마음이 너무 아파 통곡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 연약한 자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서 울었습니다. 또한 제자로서 스승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서 제자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그는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는 절망과 좌절의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가 실패로 끝나도록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절망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21:15). 그는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를 주어로 내세우지 않고 주님을 ‘주어’로 내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로지 주님의 사랑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나의 의지와 각오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오직 그의 사랑과 능력에 기초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빌라도에게 심문받으심(28-38a)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 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는 이야기를 공관복음보다 더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36). 아마 요한은 다른 독자들이 공관복음서를 읽은 것으로 가정하고 이 기사를 길게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대화체로 구성된 굵직한 기사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대화,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과의 대화, 무리들과의 대화,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 등 수많은 논쟁과 대화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빌라도와의 대화를 비교적 길게 기록하였습니다.

28절은 “그들”이라는 주어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NIV에서 the Jewish leaders로 유대 당국을 말합니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 빌라도의 관정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간 곳은 관정으로 그 지역의 사령관이 있는 곳입니다. 원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지역 관할 총독 본부는 평소에는 가이사랴에 있는데, 명절 기간 중에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몰려왔기 때문에 민란이 일어날 소지 많아 총독은 명절 때 임시로 그의 지휘본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관정(브라이도리온; Praetorium)은 전통적으로 성전 북쪽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헤롯 궁전을 더 유력한 장소로 봅니다(막 15:16).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정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유월절(무교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누룩이 없는 빵을 먹도록 되어 있어 집안에 누룩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혹시라도 누룩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자기들이 부정하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처럼 까다롭게 지키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부정을 피하려고만 했지 내면은 살인 의도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경건한 기간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까다로운 유대인들 때문에 바깥에 있는 유대인과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목요일 저녁 다락방에서 유월절 기념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부터 그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하루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적 시간 개념으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에 유월절 만찬을 하였고 그후 다락방 강화를 하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그후 체포되셔서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셨습니다. 이제 새벽이 되어 동이 트자 로마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는 6~7시 사이에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JerusalemNT

출처: https://biblemapper.com/blog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유대인들은 명절에 이방인의 거주지로 들어가서 부정하게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관정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밖으로 나와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전통과 의식을 존중한 양보의 행위였습니다. 총독이 바라는 것은 민란이 일어나지 않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라 마뜩잖아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넘겨주면서 마땅히 죄목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재판에서 판결한 신성모독죄로 기소할 경우 이방인의 법정에서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죄목을 특정하지 않고 그가 저지른 죄가 심각하다는 것만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빌라도가 그들의 판결을 존중해 주고 사형집행권이 있는 빌라도가 그들의 결정에 도장만 찍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그들은 아마도 빌라도가 군대를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협조해 준 것에서 빌라도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비교적 공평한 재판관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 과정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한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발한 것이 로마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에 관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빌라도는 그들의 고소가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관습을 존중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 내에서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사형 권한 만큼은 그들의 속국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충성한 사람들이 사형판결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폭력으로 인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진 것입니다(행 7:58-60). 그러나 군중들이 집단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9:15)라고 외친 것을 보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신 21:23; 갈 3:13). 그들은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만인에게 알려져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이방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면서 처형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 “들려야 한다”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4). 또한 한 알의 밀의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죽음의 방법을 예고하셨습니다(12:32). “들려야 한다”는 것은 나무에 달려 죽으심을 말합니다. 이는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고, 사형수를 죽여 나무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그 날에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무에 여러 날 동안 달아두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취급하셨습니다(신 21:23). 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은 로마의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방법으로 죽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해야 할 유월절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것도 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에 달아매는 방법으로 처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 20:19; 막 10:33; 눅 18:32). 이는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의 방법까지 다 아시고 예언하셨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몸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다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놓인 바 되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유대인들은 명절에 이방인의 거주지로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고 하여 빌라도가 직접 밖에 있는 유대인들과 대화를 한 후 다시 재판정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첫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하였습니다(1:29). 반면 그의 복음서 끝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제로 이끌어 갑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 죄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 로마, 헬라말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19:19-20). 이를 종합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유대인의 왕”입니다. 이는 마태가 성탄 기사에서 예수님을 목자와 왕의 개념을 합하여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왕”이라는 것과 비슷합니다(마 2:6). 이를 볼 때 요한이 의도하는 “유대인의 왕”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왕입니다. 그는 히브리, 로마, 헬라말로 죄패가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각하여 예수님이 유대인에게서 나신 왕이었지만 만민을 구원하시러 오신 ‘만민의 왕’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과 대화에서 그들이 고발한 죄목에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행악자”(30)라서 고발한다고만 기록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정확한 증거와 증언을 제시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많은 것으로 증언”하였다고 하였고(마 27:13), 마가복음에서도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막 15:4). 오직 누가만이 예수님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 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는 그들이 고발하는 죄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눅 23:2). 누가복음을 참고로 할 때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 아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죄목으로 고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죄목은 유대 지역의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빌라도에게는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 위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빌라도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께는 그를 호위하는 반군 세력도 없고 그렇다고 민란을 주도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발하는지 궁금했습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예수님께서 만일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이 사건은 빌라도가 처리할 사안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가 인정하지 않는 속국의 왕이라고 한다면 이는 반란에 해당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의 근원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심문의 대상이 오히려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이 빌라도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네가 반란의 괴수냐?”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은 당연히 “아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질문이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혐의라고 한다면 “네가 그리스도 메시아 왕이냐?”의 뜻으로 예수님은 “그러하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의 근원에 따라 대답하고자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어떤 반란이나 모의를 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로마 권력에 해가 되는 영향력을 미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예수님에게 반란죄로 사형 판결을 내릴만한 사안이 아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인 공회에서 해결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다툼의 문제를 자기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모함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빌라도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가 들은 소문에 의존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라고 예수님의 질문에 반응했습니다. 이는 “나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자기는 판단할 수 없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에 대해 관심도 없다는 뜻으로 되물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에게 재판하라고 예수님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은 판단할 수 없고 그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로마에 대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오?”라는 것입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이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왕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만일 세상에 속하였다면 그가 명령하여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자기가 여기까지 잡혀 오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나라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그 통치 영역은 각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7:20-21). 그러므로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별개의 영역입니다. 물론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선하건 악하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빌라도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원칙적으로 서로 충돌하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예수님은 그의 나라를 보호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요청하여 그들을 물리치셨을 것입니다(마 26:53).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나라에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위에 두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 나라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여 교회가 세상 나라를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반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교회 우위에 있다고 하여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 와해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심하게 간섭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얽매여 하나님의 나라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를 적대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영역과 세상 나라의 통치 영역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서로 관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빌라도에 대해 적대시하지 않았고 빌라도 또한 예수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나온 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합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로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그의 통치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려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의 나라는 복음을 듣고 거듭난 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그 거듭남은 복음을 영접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어 사탄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빌라도는 이 말의 의미를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그가 통치하는 지역의 평화였습니다.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진리는 요한복음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의 지도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길이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학적인 개념을 설명하거나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서 진리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진리이심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신다는 것은 자신이 진리라는 것이므로 그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모호하거나 자의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호한 개념을 제시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고찰하고 증명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진리는 이 사람의 해석이 다르고 저 사람의 해석이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나 명확하여 다르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는 빌라도를 진리 가운데로 초대하고자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제한이 없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 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러나 초청에 응한 사람만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시는 것보다 빌라도를 진리의 나라로 초대한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총독으로서의 굳건한 정치적인 입지를 버리고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매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가이사의 대리자로서 누리는 영광이 더 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만일 진리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면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지 말씀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이 진리를 선포하시러 오셨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가 되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신학적인 교리에 밝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논한다고 하였지만 진리에 속하지 않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 교리에 얽매여 오히려 진리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다루었지만 진리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증언자로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직 진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찾는 자들이 세상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속하였으므로 우리가 진리를 말하면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증인으로 삼으셔서 진리에 속한 자들을 찾는 사명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8a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은 그가 왕이심을 선포하신 후 그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고 빌라도를 진리의 세계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언뜻 보면 그는 진리를 알고 싶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 유대인을 만난 것으로 보아 그의 질문은 냉소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은 “지금 무슨 진리 타령이냐?”,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진리라는 엉뚱한 말을 하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보물을 인식하지 못했고 빛이 비추었지만 그 빛을 싫어하여 배척했습니다. 그에게 진리는 정치적인 이익을 얻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쓰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비현실적인 몽상가요 어려운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철학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찾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각박하면 진리보다 현실적인 유익을 택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 현실과 타협하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 불의를 용납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그의 삶에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실리를 선택합니다. 인생의 진지함보다는 순간의 즐거움을 택합니다. 인생의 고난에서 얻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생의 풍요로움에서 누리는 편의를 추구합니다. 신자이면서도 세상의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영적인 무관심을 드러내며 신앙은 양념 정도로 나의 삶의 작은 부분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진리를 논한다고 하면 인생을 하나의 신파극 정도로 생각하고 구시대적인 삶의 스타일 정도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가 생명과 관계 있고 그것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진리의 진지함을 간직하며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타협을 시도한 빌라도(38b-40)

38b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마지막 질문을 하고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진리로 초대하시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시인한 것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몽상가 정도로만 생각하고 로마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무턱대고 유대 지도자들이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게 되면 유대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총독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았습니다. 또한 무죄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인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로마의 정치적 권력에 대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꼼수를 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할 경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유대 백성들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명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무리들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전통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로마 당국에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방 총독의 자율권으로 유대인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풀어 주는 관례를 제정하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6에는 ‘명절’에 이를 실시했는데 이는 로마 당국이 유대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실시하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석방해 주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꼼수를 써서 석방하려다가 오히려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이미 유대 지도자들은 브라이도리온 밖에서 무리들을 꼬드겨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준비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사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입된 답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7에서는 바라바를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중죄인인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는 로마 정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킨 자로서 빌라도의 입장에서도 아주 골치 아픈 자였습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로마 정부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열심당원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란이 일어나면 그들을 향한 로마 정부의 압력이 커지기 때문에 그들은 민란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라바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보다 바라바의 석방을 바랐습니다. 그들은 바라바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더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나중에 무리들의 요구 때문에 민란의 주동자 바라바를 놓아주었습니다. 이는 빌라도에게도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발생할 소요사태를 두려워한 나머지 빌라도는 예수님 대신 흉악범 바라바를 놓아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시한 선택안이 신의 한수라고 기뻐하였지만 그의 영민한 계획은 무리들의 돌변으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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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주석서를 참고하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주석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여러 주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을 알기 쉽게 편집했습니다. 지난 3년간 작업을 해온 것을 하나하나씩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종합한 내용이라 다소 어수선하기도 하고 신학적 측면에서 여러 견해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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