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예수님의 탄생 기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임한 성탄 메시지가 중심이며, 동방박사라는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동방박사의 눈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시대적 배경으로는 분봉 왕 헤롯을 등장시킵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임한 성탄의 은혜를 기록하였습니다. 저자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기록해서 마리아를 통해 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쓴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이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사가랴 부부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목자들이 등장합니다. 누가는 이들의 공통점은 유대인들이고 유대인의 눈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냅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로마 황제 가이사를 등장시켜 그 당시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은 이방인인 동방박사의 눈으로 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이 헤롯 대왕은 팔레스틴의 헤롯 안티파스 2세의아들로 헤롯왕가의 세번째 왕입니다. 그는 25세에 갈릴리 총독이 되었었고, 주전 37년부터 로마 황제로부터 허가를 받아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는 10명의 아내로부터 많은 자녀들을 낳았으며 주전 4년 70세 되던해에 죽었습니다. 헤롯왕가는 헤스몬 왕가를 무너뜨리고 주전 55-주후93년까지 148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본문의 헤롯왕은 이두매(에돔)와 유대인의 혼혈인이었습니다. 그는 주전 47-4년 동안 43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유대 대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의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증축하였는데 이 성전이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그는 권좌를 지키기 위해 장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들까지 제거한 잔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주변의 2살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공포정치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으로 메시아가 태어나기로 예언된 곳이었습니다(미5:2). 이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영어로 Magi로 고대시대의 사제계급으로 ‘현자’, ‘꿈의 해설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바사(바벨론)의 점성술사들로서 별을 보고 연구하며 시대를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천문학에 능통한 자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천체물리학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온 목적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란 일반적인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 나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만일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다면 굳이 동방에서 박사들이 경배하러 올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말을 볼 때 그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과 바사 지역에는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내용이 이들 학자들에게 알려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들은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예언의 말씀에 기초해서 메시야의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별을 오래 동안 연구하고 관찰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하늘의 징조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별이 나타나자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 15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여행했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위해 많은 물질을 투자했습니다. 그들의 생업을 포기했고 가족을 고국에 두고 왔을 것입니다. 헤롯이 그들을 만나준 것을 보면 그들은 잘 알려진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왕에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하는 상류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시대의 다니엘이나 모르드개와 같은 인물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 성경을 배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탄생을 위해 친히 그들을 준비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 메시아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왔습니다. 무슨 다른 현실적인 유익을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분께 존경을 표하고 싶어서 유대에 왔습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 던이란 학자는 예배를 가리켜 고귀한 시간 낭비라고 불렀습니다. 예배가 무엇이길래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먼 길을 왔을까요? 인간은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전3:11). 누구나 영원한 것을 예배의 욕구가 있습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상에게 예배합니다. 오늘날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숭배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예배의 대상을 찾아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안에 예배의 기쁨이 생깁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참된 예배의 대상을 몰랐기 때문에 남편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기쁨을 찾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을 증언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야의 별을 보고 따라왔으나 도중에 메시야의 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탄생했으리라 여기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헤롯대왕을 찾음으로 메시야가 죽임당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왕이요 목자로 나신 예수님(3-6)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소동하였다는 것은 당황하였다는 말입니다. 평안하게 잘 지내왔는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끼어들어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메시야 탄생에 대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동방박사의 반응과 사뭇 다른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 당시 헤롯의 나이는 칠십 정도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대단하여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일생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이룩한 견고한 왕권인데 이에 도전할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헤롯은 골치 아픈 근심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왕이 불안하니까 그의 신하들이 불안해졌고, 백성들도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왕이 무슨 일을 할지 몰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메시아를 맞을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헤롯의 폭정 하에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막상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들으니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서 누리는 자유보다는 헤롯의 종으로서 그냥 아무 일 없이 눌러 앉아 있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변화를 추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움은 그들의 거룩한 영적인 소원을 덮어버렸습니다.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태어날 장소를 물었습니다. 모든 대제사장은 사두개파를 가리키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를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은 사두개파가 여당이었고 바리새파가 야당이었습니다. 헤롯이 종교 지도자들을 불러 구약성경의 예언을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성경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두개파이든 바리새파이든 성경 전문자들이므로 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알아야 했을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동방박사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고, 헤롯은 4절에서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시는 죄로부터 구원할 구원자가가 아닌 정치적 왕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그의 정적으로 생각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메시야를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로마를 쳐부수고 그들을 해방시키며 다윗과 같은 왕국을 이룰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메시야관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메시야관이었습니다.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역시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은 베들레헴 탄생 장소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은 거주민이 천 명이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떡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곳은 목가적인 전원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마을이 작지 않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가 태어나시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왕, 곧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배하고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국가 구성의 3요서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영토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입니다(골1:16).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회입니다. 그의 주권의 형태는 세상나라와 달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의 정의와 평화로 통치하십니다. 세상 나라의 왕의 통치기간은 길어야 30-40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세상 나라의 통치는 권위적이고 폭압적입니다. 세상 통치자는 사람의 행위를 구속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삽니다. 세상 나라는 복잡하여 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면 통치자는 나라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경찰이나 군대가 동원되고 힘으로 사람들을 제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 다스리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마음의 바라는 것들을 만족시켜 주십니다. 이사야 9:6에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나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 분은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았고 허름하고 냄새나는 축사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화려하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궁에 계시지 않고 천한 목자들도 가서 볼 수 있는 베들레헴 시골 마을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 분은 요란하게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너무도 조용하게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도 주목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있습니다. 그는 기묘한 모사, 즉 놀라운 상담자가 되셔서 우리들의 고민과 인생의 짐을 상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대상이십니다. 그는 평강의 왕으로 그 분의 통치를 받을 때 평화를 누립니다.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폭군처럼 다스리면 그 가정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자녀들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반발하고 바깥을 배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지도자인 아버지가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리면 그 가정은 들어가고 싶은 따뜻한 곳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영락없이 붙잡힌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죄를 범함으로 죄의 종이 되고(요8:34), 죄로 인해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의 종이 됩니다(히2:15). 또한 어둠과 죽음의 그늘, 즉 그 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눅1:79).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요8:32).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자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빛이 그 안에 거함으로 생명력 있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는 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6절의 앞부분은 미가서 5:2이고 뒷부분은 미가서 5:4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여기서 ‘목축한다’는 것은 영어로 shepherd his flock으로 ‘목자처럼 자기 양떼를 기르신다’는 의미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주고 목자되신 예수님은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를 줍니다. 예수님은 목자처럼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누이십니다. 예수님을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babysitter)처럼 우리를 돌보십니다. 양은 목자 없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는 분별력이 없고 전염병에 약하며 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제도 없습니다. 양은 목자의 섬세한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자기 양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돌봄을 받는 양들은 평화롭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때마다 영양가 있는 꼴을 먹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영혼에 필요한 말씀의 꼴을 먹이십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가 되는 말씀을 주시고 경책이 필요할 때 경책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믿음이 필요할 때 우리를 믿음 위에 굳게 세우는 말씀을 주시고 소망이 필요할 때 소망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14:26). 목자되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시23:1).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목자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시23:4).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한 박사들(7-10)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이에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불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고 싶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찾은 후 죽이려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방 박사들은 이 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박사들은 평생 연구실에서 별만 보던 사람들이라 너무 순수했습니다. 자기가 순수한 사람들은 남도 다 그런 줄 알다가 자기도 모르게 이용 당하기도 합니다. 지금 박사들이 딱 그럴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문득 메시야의 별이 나타나 그들을 아기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습니다. 별은 자연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 계시를 통해 상당 수준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 별의 인도함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알고 그 곳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목적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들이 보았던 메시야의 별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우’, ‘크게’라는 강조 부사가 수식하고 ‘기뻐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강조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리를 발견한 기쁨을 말해 줍니다. 그들이 그토록 찾았던 진리의 별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과 같이 진리의 별을 발견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벧후1:19). ‘주의한다’는 것은 pay attention으로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날이 새도록 집중할 때 마음에 샛별을 발견하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는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사모하는 마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십니다(계22:16).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새벽별처럼 우리 마음을 비추시도록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박사들(11-12)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집’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축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들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성경에 동방박사들이 세 사람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예물의 갯수가 세 개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드린 예물의 의미를 성경에 기초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황금’을 바친 것은 왕이신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를 피울 때 쓰는 것으로 우리의 중보자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향품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대속의 주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귀하다고 하는 예물을 만왕의 왕께 바쳤습니다. 왕에게 빈 손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왕에게 나아가는 자는 왕께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공물을 바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빈 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 귀중한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은 매주 주일 예배에 나아가 주님께 우리 몸을 보여야 합니다. 또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물질 속에 담긴 나의 진심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비싼 옷을 사입고 좋은 차를 타며 대출을 해서 좋은 집을 삽니다. 그러나 과연 나의 구원의 주님께 우리는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311장에 우리를 일깨우는 가사가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 밤 같은 세상에 만 백성 구하려 /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려냐 / 한 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 세상에 내려와 값 없이 주었다 /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동방박사는 예물을 드리고 난 후 그 대가로 아기 예수님로부터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 그 자체를 기뻐하고 떠났습니다. 신앙생활은 드리는 것, 곧 헌신입니다. 나 자신을 드릴 때 기쁨이 생깁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7-8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순수한 사람들이라 음흉하고 잔인한 헤롯에게 속아 예루살렘을 거쳐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사탄의 계획에 이용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다른 길로 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도모가 서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애굽으로의 피난(13-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동방박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주의 사자가 꿈 속에서 요셉에게 나타나 애굽으로 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일어나 밤에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거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가 애굽으로 피신한 사건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는 마태가 호세아 11:1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출애굽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들 중 많은 것들은 저자의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들이 많습니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과 연결될 때 그 의미가 완전해집니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은 요셉 부부와 아기가 애굽으로 몰래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의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헤롯은 권력을 가진 자로서 위로부터 주신 권력을 백성을 위해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그 권력을 잔인한 학살극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자기 정적에 대해 예민하였습니다. 그는 권좌를 지키기 위해 장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들까지 제거한 잔혹한 인물이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헤롯이 죽은 것을 보면 그가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권력에 사로잡힐 때 판단력을 상실하고 추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이 잔인하고 슬픈 사건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적용하였습니다(렘 31:15).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10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베들레헴에서 16-19 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묻힌 곳입니다(창 35:19). 그런데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라헬이 베들레헴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는 소리였습니다. 라헬은 이스라엘의 어머니의 대표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라마에서 유다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베들레헴에 묻힌 라헬이 무덤에서 일어나 라마에서 그의 자녀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을 보고 슬퍼하며 애곡하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비유적인 표현을 헤롯의 유아 대학살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어머니의 슬픔처럼 사람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마태는 헤롯의 잔인한 학살에 희생당한 자식을 두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대신하여 이 학살의 슬픔을 표현하였습니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은 노욕은 얼마 못가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헤롯이 죽자 주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요셉은 지시대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헤롯의 죽음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헤롯의 아들들이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셋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습니다. 물론 로마 황제 가이사 우구스도는 이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유대지역과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은 그의 장남인 아켈라오가 통치하고 빌립은 갈릴리 북동쪽 이방지역을 통치하였으며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22절의 아켈라오는 그의 아버지처럼 잔인한 왕으로 유월절 때 성전에 온 약 3천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의 독재로 인해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그를 축출하였고, 유대지방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된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요셉은 아켈라오의 소문을 듣고 유대지방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꿈에 지시하심을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성장하시어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선지자들이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고 하신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를 명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영어로 the prophets로 ‘여러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나사렛은 사람들에 의해 멸시를 당하던 곳이었습니다(요 1:46, 요 7:41,52).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며 놀림을 받으며 성장을 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 이단’(행 24:5)이라고 비방하였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비방을 받고 멸시를 당하며 배척당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시 53:2,3, 시 22:6,7, 시69:7,8). 이 예수님은 멸시받고 배척당하시고 조롱받는 소외된 자들을 품으시고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셨습니다(고전 1:27-2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사람들의 비방과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다 뒤집어 쓰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랑스럽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을 보았을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함으로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자랑스럽게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였습니다(행 4:10, 10:38). 예수님께서도 바울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2:8).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고통받고 천대받고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따뜻하고 큰 위로가 되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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