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30세 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0세는 제사장이 임무를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나타나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합니다. 이는 왕이 행차하기 전 왕이 평탄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강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박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천국이 가까이 임했음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구원과 심판의 역사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회개하고 영접한 자들에게는 천국의 축복이 주어지지만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을 기다리는 정죄 상태에 그대로 있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수님께서 드디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구속 역사의 바톤을 이어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장면은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영광스럽고 장엄한 대관식이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한 세례 요한(1-2)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하여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기록은 4복음서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 기록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눅 1:16). 그의 아버지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였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는데 그녀도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눅 1:5).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고 율법을 흠이 없이 행하였습니다(눅 1:6). 그런데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눅 1:7).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오래 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아들을 주셨는 그가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입니다(눅 1:36). 구속사적 측면에서 보면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으며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만에 나타난 선지자로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외모 면에서나 기질적으로 보나 엘리야를 닮았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그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눅 1:17). 그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적 인물이면서 신약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보면 구약의 선지자 전통 위에 있었고, 그러면서도 예수님 시대의 모습을 지녔습니다. 그의 사역지는 도시가 아닌 유대광야였습니다. 이는 이사야 40:3-4에서 그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구약의 예언에서 “광야”와 “사막”이 언급되어 있는데 요한은 이 말씀을 기초로 그의 사명지를 광야로 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거하면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그에 합당한 훈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하늘에서 주시는 양식을 의지하게 하셨으며 안식일 지키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의 은혜가 있는 광야에서 말씀을 전함으로 백성들이 출애굽의 은혜를 새롭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듯이 그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듣기 전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기대하였듯이 요한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백성들이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에게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데 역사적 의미와 함께 가장 적합한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요한이 전파하는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였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였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개”는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구약에서 회개할 때 회개하는 사람은 재를 뿌리고 옷을 찢었습니다. 재를 뿌리는 것은 마음이 슬프고 비천한 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재는 먼지를 말하는 것으로 주님 앞에서 자신은 먼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재는 모든 것을 태워 무균 상태이므로 ‘정화’를 의미합니다. 옷을 찢는 것은 마음을 찢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회개한다고 할 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죄를 회개하는 ‘상한 심령’입니다(시51:17). 진정한 회개는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즉 삶의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이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님이 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이 문장이 없고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37회나 나오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4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독자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려한 것을 고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이 계신 처소를 끌어와서 “천국”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심으로 그의 통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통치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준비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임을 직설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은 통치를 받는 존재입니다. 독재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불행합니다. 가정에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의 다스림을 받는 자녀들은 마음에 상처를 안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통치는 다른 말로 돌봄을 말합니다. 지나친 간섭이나 폭압으로 인해 불행하기도 하지만 아예 돌봄을 받지 못하고 내버려지는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상 왕들의 통치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기 양을 돌보듯이 우리들을 섬세하게 돌보심으로 통치하십니다. 왕이시며 동시에 목자이신 예수님의 통치는 부드럽고 섬세하고 친절하시고 겸손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힘 주시며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왕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그의 통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람들이 말하는 뉘우침보다 더 근원적인 자세의 전향을 말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개선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요 전적인 신뢰로 그 분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와 구별된 점이 없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내면에 죄가 있으면 성령이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거역하고 죄를 짓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들은 항상 말씀에 기초해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 때 하늘의 길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운행하다보면 가야할 궤도를 벗어나 엇나갈 수 있습니다. 이때마다 궤도를 수정해서 가야할 길로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의 궤도를 따라 가면서 벗어날 때마다 궤도를 수정하며 믿음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백성들(3-6)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3 인용하여 자신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사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각 사람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매우 다양해서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 중 공통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과 같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사명입니다. 안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로, 어떤 사람은 찬양사역으로, 어떤 사람은 봉사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상담으로 자기의 재능과 주어진 직책에 따라, 자기 주변환경에 따라 자기 사명을 찾아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3절 말씀은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께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빛의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빛이 이미 어둠에 비추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요 1:5).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은 어둠이 전부인 줄 알고 자기가 거하는 어둠의 동굴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들은 바깥 세상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빛의 증언자가 되어 빛의 세계로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요 1:7). 우리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있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빛의 증언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일으켜 부축이면서 이끄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아올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지붕을 뚫어 예수님께 인도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막 2:5).
세례 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외침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원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한다면 그것을 인권 침해 또는 사생활 침해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자기 발견 없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의 내면 문제를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된 삶의 결과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려면 그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구불구불한 마음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회개의 메시지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기겁을 해서 달아날 것입니다. 회개의 메시지 이전에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속에서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충분이 적셔진 상태에서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여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잘 관찰했다가 그 사람의 내면 문제로 접근하여 모든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임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방법이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의 삶과 외모는 엘리야와 삶과 외모와 비슷하였습니다. 열왕기하 1:8을 보면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고 되어 있는데 세례 요한도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엘리야가 주로 산야에 거하며 생활하였듯이 세례 요한도 광야에 거했습니다. 말라기 4:5-6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낼 것인데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 예언이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이 예언을 근거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마 16:14, 막 8:28, 눅 9:19).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만에 선지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요한의 삶은 단순하고 검소했습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 석청이었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연식이요 건강식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부요한 삶을 살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제사장 출신으로 다른 제사장과 같이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도시의 삶을 거부하고 광야로 가서 말 그대로 광야의 거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의 메시지의 힘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하며 검소한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자는 풍족한 삶을 누릴 수도 있고 가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에 자족할 줄 알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 아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점점 영적 소원을 상실하게 되고 그 마음이 부패하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하여 죽은 신앙이 될 것입니다. 삶이 메시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자가 말을 잘하고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삶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불신자들은 삶에서 풍겨나오는 악취를 맡고 멀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말씀대로 살고자 하고 예수님을 본받고자 살게 되면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와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고후 2:15).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5절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도망가야 할 터인데 정반대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이는 회개의 메시지가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내면 문제를 건드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실타래 처럼 얽힌 내면의 문제가 풀리길 원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듣자 죄로 인해 꽉 막힌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습니다. 처음에는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상하고 세례 요한이 너무 직선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메시지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메시지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백성들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이며 그들 영혼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소문은 온 사방에 퍼졌고 영혼이 목말라 지친 영혼들이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백성들은 요한이 전한 대로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켰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세례는 정결예식을 의미했습니다(출 30:17-21, 레 19:17-18). 성경에는 선지자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세례는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 사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그들이 사는 지역에 회당을 세우고 회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중에서 회당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기인하여 죄를 씻는 예식을 정하였는데 이것이 세례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물로 죄를 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대상이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회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그들의 근거 없는 자부심을 깨고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것처럼 새로 시작하도록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곧 등장하실 메시야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동안 쌓아왔던 교만과 자부심의 탑을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한 세례 요한(7-10)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자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 후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다시는 이런 불행을 겪지 말자며 철저하게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삶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바리새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헬라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목숨을 내놓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6천명 가량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암송하였고 성문화된 미쉬나와 그 주석서인 탈무드를 공부하였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달리 내세와 부활을 믿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들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종파였습니다.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의 우두머리 제사장으로 삼은 사독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삼하8:17; 왕상2:35). 사두개인들은 주로 오경만을 믿었고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죽은 자의 부활(행 4:1-2; 23:6-10)과 천사와 영을 믿지 않았습니다(행 23:8). 그들은 로마 사람들과 타협함으로 세속적이었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세례 요한에 나이온 것은 세례 요한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의 사역을 관찰하고 몇 가지 조사를 하고자 온 것으로 보입니다(요 1:19-28).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자신들을 고위급 종교 지도자들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이들에 대해서 같은 말을 쓰셨습니다(12:34, 23:33). 그들은 겉으로 볼 때 경건하고 품위 있어 보였지만 내면은 독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과 권위적 태도로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 먼 인도자였으며 율법이 가르치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들이었고,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23:15-36).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26:4). 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지체 높은 사람들이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회개하라”라고 하였지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무시무시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함으로 그들이 임박한 진노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들의 형편은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얻기가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섬뜩한 말을 듣고 마음이 움찔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마땅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마음이 굳은 자에게 극단적인 처방을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요한은 그들이 심판의 경고를 들었으니 속히 마음을 찢고 겸비하게 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겉으로는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비밀스러운 죄를 감추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였지만 사생활은 부패하고 문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스럽게도 스스로 합리화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더욱 두텁게 자기 몸을 가렸습니다. 이런 그들이 변화되는 길은 거짓과 위선의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죄 용서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온 백성들이 다 알도록 간음죄와 살인 교사죄를 용감하게 회개하였듯이 그들도 껍질을 벗고 원래의 모습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친다고 하면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고상해 보이는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드러내었을 때 그들의 지위와 인격에 치명적인 내면 깊숙한 곳의 더러운 죄는 감추기에 급급하다면 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추이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투명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매사에 겸손한 마음을 갖고 높아지지 않으며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죄와 타협하지 않으며 해야 할 사명을 다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타인을 영접하고 공감하는 삶이 회개에 합당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근거 없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처럼 멸망할 죄인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약속을 저버리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있고 제사가 있고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죄를 결코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습니다(요 1:13). 그들은 혈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휼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고 그들의 피를 이어받아 율법을 배우고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오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해당합니다(요 1:12). 그들의 문제는 근거 없는 자부심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요단강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굳고 거부하는 쓸모 없는 그들보다는 차라리 돌들을 더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개념으로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갈 3:29). 중요한 것은 그들이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회개하고 세례 요한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 복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그가 증언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천국이 임하는 것이고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그에게 심판이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18을 보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의해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갈린다는 것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본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받고 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예전과 같이 그대로 정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심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의 종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죄의 결과인 죽음이 주는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며 심판의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8절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언급한 것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열매를 강조합니다. 요한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 “불”도 역시 “도끼”와 같이 심판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열매를 기대하고 심은 나무인데 열매가 없을 때 당연히 잘라버립니다. 주인은 열매를 맺기까지 일정 기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거름도 주고 가지치기도 해가면서 돌보아 줍니다. 그래도 열매를 얻지 못하면 주인은 잘라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사람들로 회개하게 하기 위해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오시는 이는 능력이 많으신 창조주로 요한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학자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같은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죄를 태우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한편 어떤 학자는 성령은 구원의 역사를 상징하고 불은 심판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동시에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로 심판하시는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는 내용으로 볼 때 이와 연관시킨다면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과 심판의 주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물로 세례를 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명확히 알았고 오직 자신의 역할과 사명에만 충실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상을 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도 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키는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를 골라내는 도구를 말합니다. 키질을 할 때 알곡은 무거워서 키에 그대로 떨어지지만 쭉정이는 가벼워서 바람에 날려갑니다. 예수님은 농부가 되셔서 키질을 함으로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구분해 내십니다. 알곡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자를 의미하고 쭉정이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를 말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갈리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기준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회개하는 자, 즉 예수님께 대해 마음이 열려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되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 즉 예수님께 대해 마음이 닫힌 자는 그들이 원래 처해 있는 정죄의 세계에 그대로 있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1-12절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함으로 천국,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배척함으로 그리스도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갈림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명확하게 갈리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으려면 심판의 무서움이 어떠한지 알아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이냐? 심판이냐?의 절박한 갈림길에서 놓여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마냥 미적거리고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날려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기회가 오겠지 하며 어정쩡한 상태로 넘겨 버릴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임박한 진노의 심판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밧줄을 붙들어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13-15)
13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셨습니다. 그 목적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놀라서 만류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거꾸로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례 받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구약의 구속역사를 계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과 단절하여 자기 사역을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주할 때 바톤 터치하듯이 예수님은 인류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세우셨던 구속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구약을 계승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육신하셨고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할 구주이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값을 그 고귀한 몸으로 다 치르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만족시키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롬 3:24-25). 이로써 하나님의 의가 모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히 5:8).
메시아의 대관식(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린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신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그 전까지는 닫힌 상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로 인해 하늘의 보화가 땅으로 내려오는 통로가 막혀 있었습니다. 더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대속으로 모든 의를 이루심으로 하늘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늘로 가는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나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는 예수님 사역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역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는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함부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겸손하게 낮아져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셔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께 다가가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드려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은 비둘기 같이 평화롭고 온유합니다. 예수님은 강제적으로 우리를 믿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감동되었고 그들의 인생문제가 해결되었으며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고나서 이번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는 시편 2:7에 나오는 말씀으로 왕의 대관식 때 왕이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메시야의 대관식입니다. 이 대관식에서 하늘이 열린 것은 왕이 행차할 수 있도록 레드카펫이 깔린 것을 연상하게 하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한 것은 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는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선포하는 것은 부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축복을 선포하는 장엄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장면은 왕의 대관식의 절정의 모습입니다. 이 대관식은 성자, 성령, 성부 하나님, 즉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장엄한 대관식으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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